강남-누가복음 13장 25절 (말씀의 온전함) 221122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3장 25절 (말씀의 온전함) 221122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13장 25절부터 보겠습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문이 이렇게 있으면 주님이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럼 여기는 뭐냐 하면은 시간이 종결, 시간이 멈췄습니다. 그런데 문 밖에는 시간이 흐르고 있어요.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시간이 살아있어요. 살아있으니까 여기 있는 사람이 뭐냐 하면은 자기의 과거라는 게 있고 그들의 지금 현재 자기 모습이 있고 현재는 우리가 과거에 주를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라는 시간을 가지고 문 열어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문 자체가 시간을 거론하게 되면 이 문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문 안에 있는 이 세계는 시간과 무관합니다. 어디서 무얼 했는지 전혀 묻지를 않아요. 시간과 무관한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 사랑을 하게 되면 거기서 시간 요소는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 말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웠다 하더라도 일단 사랑 속에 들어와버리면 그 힘들고 어려운 그 시기가 사랑 속에는 없지요.
요한복음 15장인가 보면 애기가 엄마 몸에서 출산을 할 때는 고통의 시간이 있어요. 그러나 일단 출산하고 난 뒤에는 뭐를 잊어버리느냐 하면은 과거의 아팠던 그 시기, 그 지난날이 잊어버리게 되는 거에요. 이게 없어져요. 지금 인간들은 옛날에 많이 했잖아, 옛날에 많이 한 것을 근거로 지금 내가 나를 천국에 넣어주세요 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시간 동안에 자기가 열심 내고 주를 위해서 했던 것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밑천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 천국의 근거는 뭡니까? 나의 행함이 되죠. 나의 행함. 그러나 이 문 안에서는 시간이 날라가버린다는 말은 과거의 내가 뭘 했는가, 뭘 열심히 봉사했는가 그 자체가 이게 전부 다 필요치 않지요. 그게 필요하지 않아요. 과거에 뭘 했는지. 다시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 천국을 이야기할 때 문이라는 요소를 주인 되시는 분이 일방적으로 설정을 했다는 것이 중요해요. 문이라는 걸.
문이 인간들이 결정하고 저 사람 들어오지 말도록 문 닫읍시다 라고 인간들이 의견을 제시하는 게 아니에요. 의견을 제시하는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문으로 차단해버린 거에요. 문, 차단성 또는 차단막. 차단해버리는 겁니다. 그 차단할 때 의도적으로 차단을 해버리는 거에요. 어떤 걸 차단을 해버리느냐 하면은 인간의 기억 속에 자기의 과거 시간을 품고 있는 그 의식 있잖아요. 시간 의식. 그 시간 의식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문, 이 안을 무슨 세계라고 했습니까 아까? 무슨 세계? 사랑의 세계죠. 사랑을 사랑답게 지켜주기 위해서 뭘 걸어 닫았다? 문을 걸어 닫은 거에요.
그러면 이 문밖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행함이지 뭐는 아니다? 사랑은 아니다 라는 거에요. 여기서 행함은 인간이 누구 사랑? 자기가 자기 사랑하는 거죠. 자기가 자기 사랑한다는 것 이거요 자기 구원을 자기가 막는 바가 이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본인 사랑하기 때문에. 요한복음 12장에는 미워하라고 했잖아요. 본인이 본인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한테 온 밥그릇도 차버려요. 내가 내 구원을 막는 그 근거가 본인에게 있어요. 본인에게. 본인을 놓지를 못하니까. 본인에 대한 집착을 놓지를 못하니까. 본인의 행함을 덩달아 놓지를 못하는 거에요. 본인의 행함을.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시작을 내가 시작한 일이 괜찮은 결과로 마감이고 싶어 하는 거에요. 인간은. 내가 시작한 것이 중도에 거부 안 당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모든 기도가 그거에요. 내가 시작한 일이 헛방, 헛일되지 않게 해주옵소서. 내가 실천한 일이 좋은 결과로 맺어지게 하옵소서. 차라리 노골적으로 내가 날 사랑하는 그 사랑을 주께서 인정해달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될 텐데 노골적으로 그 이야기는 못하고 주를 위해서 했다고 오늘 본문에 26절에 나오죠. “우리가 주를 위해서 했습니다.”
자, 이것이 뭐가 문제인지를 지금부터 글로써 적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간단하죠. 내가 살아있으면 주님이 죽어있는 바가 되고 주님이 살아있으면 나는 죽은 자로 간주된다. 이 문장으로 정리하시면 됩니다. 이 문장으로 왜 정리하는 것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은 내가 살아있으면 인간은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기준을 본인이 만들어내요. 천국 가는 기준, 지옥 가는 기준을 본인이 괜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냥 가만히 마네킹처럼 살아있습니까? 나 죽었다 이렇게 살아있는 게 아니잖아요. 살아있을 때는 내가 살아있는 의미를 피어내면서 그것을 냄새피우면서 살아있어요. 내가 살아있다는 걸.
보통 집안 어른이나 조직 사회에서 회식할 때 상사가 술 한잔할 때 큰 소리 칠 때 하는 말이 뭡니까? 나 안 죽었어! 이렇게 하잖아요. 나 안 죽었다는 말은 뭡니까? 나를 개무시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명절날 집안 모일 때에 왕년에 큰소리 좀 쳤던 왕년에 좀 잘 나갔던 집안 어른들이 평소에는 말 못하고 술 한잔 청주 일본말로 정종 한 댓 병 먹으면서 술김에 자기 본심 드러낼 때 보면 “나 안 죽었어! 너희들 나 늙었다고 무시하는데 나 안 죽었단 말이야!” 하면서 그냥 또 말만 하는 게 아니에요. 상을 엎지요. 상을 엎어버려요.
퍼포먼스를 해가지고 아주 자극적인 퍼포먼스 상을 엎어버려요. 발로 차가지고 엎어버려요. 나를 대충대충 띄엄띄엄 보지 마 이러면서 횡포를 부리지요. 그러면 부인되시는 분이 아 이 양반은 술만 먹으면 이런다고 어깨를 치고 평소에 안 그러더니 오늘 왜 이래. 둘이 연기를 벌여요 연기를. 그런 짓하면 아래 친척 조카들은 집에 가 집에 가자. 이참에 잘됐다. 집에 가자. 안녕히 계십시오. 빠져나올 핑계로 잘 된 거죠. 꼭 객기 부리는 게 하나 있으면 그 다음은 파장 분위기 되지요.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과 지옥 가는 기준을 본인이 고집스럽게 설정을 해버려요. 설정을 해서 일단은 나는 무조건 집어넣어. 천국 가는데. 나는 무조건 집어넣어요. 그리고 나처럼 되지 않으면 전부 다 지옥가요. 그러면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은 죽어계시잖아요. 본인이 살아있다는 것은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나는 최종 내가 안다 가 돼요. 나만. 누구 알고 누구 알고 아는데 대통령 알고 손흥민도 알고 아는데 알아도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확실하게 잘 안다 이렇게 되죠.
그러면 나 말고 다른 것은 뭡니까? 재끼는 거죠. 알기는 아는데 희미하게 알고 알기는 아는데 제대로 모르는 게 되죠. 그 재끼는 가운데 누구까지 재낍니까? 누가 재껴지죠. 누굴 제해야 됩니까? 예수님이죠. 이 말은 뭐냐? 내 살아가는 내 기준을 정한다는 말은 나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겠다는 고백이에요. 나 예수님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내게 확 와닿는 것은 나는 이런 식으로 구원 받는다 그것만큼은 확실한데 주님이 어떤 기준을 설정했는지는 그거는 내가 잘 모르겠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뭐냐 하면은 주님은 내가 날 아는 만큼 나는 주님을 모르는 자가 되지요. 주님은 내가 모르는 자가 되고 주님이 설정한 그 기준은 내 기준에 대해서 핍박을 받아버려요. 내 기준에 대해서 제거하고 치워 치워 하고 치워버리는 게 돼요. 치워버리는 것. 그런 경우들이 기도할 때 나와요. ‘주님 내가 인생 한 평생 살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줄 아십니까?’
자, 아십니까 라고 이야기했지요. 아십니까? 할 때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나는 내가 한 평생 지독하게 고생했다는 것은 나는 지독하게 알고 있는데 주님은 내가 이렇게 고생한 것 아는 것만큼 알고 계십니까 라고 묻는 게 아니에요. 주님 잘 모르지요? 그렇죠? 이런 뜻이에요. 주님은 내 사정 잘 모르지요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25절 26절 한번 보세요. 26절에서 뭐냐 하면은 그들은 주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할 때 이게 주장이 누구 주장이에요? 본인이 본인을 너무 잘 안다는 자의 주장이죠. 여기 주님이 무조건 내 주장에 동의하라는 윽박지름이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나 너 몰라” 이렇게 된 거에요.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어요. 교회 열심히 충성했는데 ‘나 너 모른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에도 나와 있지요. “주를 위해서 귀신 쫓아내고 뭐 다 했습니다.” “누가?” “제가요.” “누구에요? 몰라 나 너 몰라.”
나 너 모른다는 말은 네가 내 앞에서 주님이 하는 그 기준을 너한테 적용을 시켜야 돼요. ‘주님 저 몰라요’ 이렇게 돼야 돼요. “주님 저에 대해서 저 아무것도 몰라요” 이렇게 돼야 돼요. 내가 나 모르면 무슨 기준을 함부로 내세울 수 없습니까? 내가 내세우는 기준이 이게 엉터리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이죠. 내가 끄집어내는 내 기준에는 반드시 나를 천국에 포함됐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기준이거든요. 그 기준을 인간은 생각할 수 있어요. 인간은 자유주의니까.
생각하는 건 좋은데 그거는 아니다 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이죠 그것도. 내가 내세운 기준, 무조건 나는 내 편이라는 그 기준은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먹히지 않는다 라는 것을 인정하자는 겁니다. 사도 바울도 그걸 인정했지요.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한번 적어볼게요. 나는 [ ] 하지 않았다. ‘나는’ 과 ‘않다’를 연결시켰습니다. 나는 뭐하지 않았다. 나는 십자가지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장 13절 나는 하지 않았다. 나는 무엇 무엇 하지 않았다를 증거함으로서 유일하게 구원의 근거에 있는 십자가에 내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가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는 주님 하는 일에 내가 거들 수 없다는 그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나를 은혜로 택했다는 거죠. 이게 성령 받은 사람에게 나올 수 있는 이야기에요.
아까 경우 예를 들어봅시다. “주님이여 내가 이 땅에 살면서 복음 때문에 얼마나 고생한줄 아십니까?” 라고 할 때 지금 뭐가 빠져버린 거에요? “내가 주님 때문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26절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쳤습니다” 에서 뭐가 누락된 거에요? 나는 무엇 무엇 하지 않았다가 누락이 되어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천국 문 바깥의 사람. 천국 문 바깥에 있는 사람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이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포함된 기준을 본인이 부인을 하지를 못하고 있어요. 자기를 내치치 못하고 있어요. 왜? 본인이 자기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자가 주님이 아니고 누구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 자신 있다는 이 말이거든요.
지금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한번 이렇게 비교를 해보세요. 무심코 들리는 것을 한번 비교를 해보세요. 그들의 말에서 본인이 섞이는지 본인이 재껴지는지 본인이 빠졌는지를 한번 보시라 이 말입니다. 그들의 평소의 행동과 태도를 통해서. 목사님, 이 정도까지 봉사하면 됩니까? 라는 그 물음 자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제가 이 정도까지 헌신하고 봉사하면 됩니까? 지금 그렇게 묻는 것 자체가 물음 속에서 지금 자기를 뺄 생각이 전혀 없어요.
왜 못 빼는가? 나를 빼면 내가 한 일에 의미가 없기 때문에 내가 있으나 마나 하기 때문에. 있으나 마나 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럼 나는 묻고 싶어요. “왜 당신이 있으나 마나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그 질문에 차마 답변 못합니다. 딱 감추지요. 그 답변은 벌써 다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나는 예수 믿는 것이 나 구원받기 위해서 믿습니다.’ 그 이야기에요.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예수 믿습니다.’ 내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평소의 행동 말씨에 다 나옴에도 불구하고 차마 자기 입으로는 그 이야기를 못합니다. 자기가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는 과거의 자기 노력한 것을 시간적 순서에 맞춰서 딱 이렇게 기록되어있어요. 마치 가족관계증명서 보세요. 자기 식구 쫙 나와 있잖아요. 그런 서류를 본인이 갖고 있는 거에요. 기록하고 있는 거에요. 내가 10년 전에 뭐 했고 뭐 했고 헌금 5천만원 했고 이게 전부 다 있어요. 자기 생활기록부가 있다고요. 회사에 인사부에 보면 뭐가 들어있습니까? 걔가 언제 입사했고 언제 대리되고 이런 거 다 나와있지요. 그 서류를 서류철을 자기가 갖고 있다니까요. 본인이. 그게 자기 자아고요. 그게 시간 요소거든요.
그런데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문 있잖아요 문. 그 천국 문, 그 문은 인간이 설정한 게 아니에요. 그거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완전히 셔터문을 닫은 거에요. 일방적으로.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사랑인데 왜 사랑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시간요소를 없애는 방법이 사랑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시간 속에는 나의 행함의 행적들이 나열되어있어요. 서류철이 있듯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주를 사랑한 게 아니잖아요. 내가 주를 사랑한 경력들이 아니라고요.
우리는 우리 사랑하기 바빠가지고 내 사랑만 정신이 빠져가지고 내가 나 사랑하는데 본인이 감동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 감동하는데 미쳐가지고 일방적으로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내 사랑에 막혀버리고 없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했다는 말은 그때부터는 네 사랑을 접어라는 뜻이거든요 이게. 네가 너 사랑했던 것, 네가 예수님 사랑했던 것을 이제는 그것은 폐기처분하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당신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아주 가벼운 존재, 너무 너무 나는 무엇 무엇 아닙니다 라는 ‘나는’ 뒤에 ‘아닙니다’를 하고 또 그냥 ‘아닙니다’ 하면 안 되지요. 겸손 떨죠. 중간에 뭐냐 하면은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집어넣어서 ‘아닙니다’가 돼요.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집어넣어서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식사했잖아요. 그러면 나는 오늘 내 힘으로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식사하도록 조성하고 힘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식사하도록 힘 안주시면 죽 먹어야 돼요. 그것도 제대로 숟가락 못 듭니다.
특히 잠자는 것에 대해서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내 힘으로 잠을 푹 자지 않았습니다. 이게 뭡니까? 주님의 힘으로 푹 자게 해줘서 고맙다는 감사하는 뜻이에요. ‘나는’ 뒤에 ‘않다’ 거기에다가 매사를 그 중간에다가 다 집어넣는 겁니다. 갈치나 고등어의 그 맛은 머리에 있지 않습니다. 꼬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건 괜히 중간을 지가 먹을라고 하는 거지. 진짜는 토실토실한 그 중간에 살에 거기 다 들어있어요.
핵심 부분은 핵심 엔진부분은 우리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내부에 텅텅 비게 하고 거기에다가 삼성 공장 반도체 보면 사람이 집어넣지 않지요. 로봇기계가 탁탁탁 심지요. 그렇죠? 우리를 하나의 반도체 펜이라고 보고 반도체 칩을 주님이 사랑으로 탁탁탁탁 다 심었다고 보세요. 사랑, 사랑, 사랑, 모든 게 사랑으로 심어 넣는 거에요. 주께서. 어제 12개 심었고 오늘 30개 심었다 하지 마세요. 사랑은 아무리 세월이 바뀌어도 사랑은 이렇게 시간 요소를 없애버립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지금 사랑한 것이 다음에 사랑한 것과 동일한 사랑으로 주어지는 거에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사랑할 때 사랑만 놓는 게 아니고 시간을 넘어선 시간을 극복하신 주님이 그 사랑 속에 함께 들어와서 우리의 주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만 덜렁주고 그냥 알아서 하라가 아니라 사랑, 예수님 자체가 우리 안에 그냥 슥 들어오시는 거에요. 우리의 주인으로서.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말도 되지만 사나 죽으나 내 안에 주님이 계시다고 하는 거에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자, 다시 봅시다. 주님이 계시면 나는 의미 없지요. 만약에 주님이 안계시면 주님이 안계시기 때문에 이 허전함을 뭘로 채워야 되겠어요? 내 행함으로 채워서 그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한 것 가지고 억지로 그걸 붙들고 있어야 되지요. 믿을 것은 주를 위해 행한 내 행함 밖에 없으니까 그걸 붙들고 있어야 되는 거에요. 만약 그걸 누가 복음으로 부정한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뭡니까?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자, 분노라는 말 나왔습니다. 아까 유투브 강의할 때 분노라는 말 했습니다만 분노 또는 기쁘다, 감사하다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기본 감정에 속하는 겁니다. 나타나는 감정에 속하는 겁니다. 기분. 화난다, 기쁘다, 감사하다 또는 슬프다. 감정이죠. 어떤 사람이 나는 기쁘다 할 때 물어보세요. 왜? 왜 기쁜데? 그 다음 말이 중요한 거에요. 자, 기쁘다. 왜 기쁜데? 왜 기쁜데? 그 다음 말이 뭐가 나와야 돼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나 지금 행복해” 할 때 “왜 행복한데?” 물어보세요. 여러분한테 묻고 싶다 정말. 왜 행복한데? 왜 행복합니까? 대장금에 그런 거 나오지요. 무슨 맛이냐 하니까 아이가 홍시 맛입니다. 그게 왜 홍시 맛이지? 홍시 먹고 홍시 맛이라고 하는데 홍시 맛이라고 하지 뭐라고 합니까 라는 비슷한 대사가 나오는데 왜 행복하죠? 왜 화 나지요? 왜 슬프지요? 왜 기쁘지요? 왜 그렇습니까? 여기서 두 유형의 차이 나는 두 유형의 답변이 나옵니다. 왜?
1. 내가 행복하기를 고대하고 기대했는데 그래서 행복해서 기쁘다 이렇게 돼요. 답변이. 또는 분노하는 것도 내가 행복하기를 기대했는데 행복스럽지 않고 내 뜻대로 안되어서 나는 분노하고 나는 슬프다. 불행하다 이렇게 돼요. 이게 첫 번째 답변입니다. 물론 당연히 천국 문 바깥에 있지요. 25절 봅시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열어달라고 했지요.
자, 문 밖에 있는 사람이 문 열어달라고 했습니다. 너무 어려운 대목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묻겠어요. 자, 문이 닫혀있는데 문 밖에 있는 사람이 열어달라고 했지요. 제 질문은 이겁니다. 왜 열어달라고 했지요? 왜? 주께서 문 닫아서 안 열어주면 ‘알겠습니다’ 하고 집에 가지 왜 열어달라고 했을까요? 왜? 왜 열어달라고 합니까.
주님께서 문 밖에 있는 자들이 은근히 뭘 노리고 있는 것을 주께서 알았어요? 몰랐어요? 다 알고있어요. 그러니까 본인 생각밖에 없는 거에요. 나 구원받으면 참 행복할텐데 라는 그들의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걸 거절한 거에요. 그걸 거부한 거에요. 나는 내가 구원받았으면 천국 갔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걸 완전히 이렇게 밀어내는 거에요. 그러니까 열어달라는 것은 지금 분통 터트리고 있는 거에요. 진짜 발로 차는 거에요. ‘하나님 네가 뭔데! 주님 네가 뭔데!’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왜 주님이 하나님이고 창조주라면 지옥 보내면 고분고분 지옥 가셔야지 이게 창조자 앞에 있는 피조물의 마땅한 도리 아닙니까?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왜 피조물 주제에 본인의 기대가 있고 본인이 고대한 목적을 그걸 왜 갖고 있느냐는 거에요. 왜. 그걸 왜 갖고 있느냐 피조물 주제에. 시작을 본인이 시작할 권한이 없어요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시작을 해도 창조주가 시작을 해야지. 피조물이 왜 시작을 합니까.
아까 질문입니다. 왜 화냅니까? 내 뜻대로 안돼서. 네 뜻이 뭔데? 시건방지게 네 뜻을 네가 왜 갖고 있느냐. 네 뜻을 가지고 있는 순간 누구 뜻은 완전히 무시당합니까? 주님의 고유의 주님의 일방적 뜻이 피조물 주제에 내 뜻이 있다는 거에요. 뭐야 너. 네가 뭔데. 창조주도 아니고. 네가 창세전에 예정했어? 하나님과 의논된 사람이야? 언약 대상이야? 아니지요. 아닌 것이 네가 네 뜻이 왜 있어야 돼? 이게 보통 건방진 게 아니구나. 내가 아니라면 끝났지 네가 뭔데. 제 뜻은 그게 아니고요. 그 입 다물라! 그 입 다물라. 어디서 궁시렁 궁시렁 어디서 쓸데없는 뒷말이 왜 있느냐 이 말이죠. 내가 문 닫으면 끝나는 것이지.
사람들은 이런 버전, 자기 뜻을 고집하는 이 버전. 그러니까 사랑이 옴으로서 인간은 얼마나 평소에 하나님은 사랑이고 그런 건 다 핑계고 자기만 사랑했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들통내는 거에요. 자기만 사랑하는 것을 들통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자기만 사랑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 사랑이 절대로 못 들어오는 문을 만든 거에요. 인간이 자기 사랑하는 자들을 결코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문이 그 문이에요. 그게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만약에 어떤 사람이 문밖에 있는 자가 자기는 천국에서 쫓겨났잖아요. 어떤 사람은 커트라인 되가지고 누구는 천국에 문 안에 들어갔단 말이죠. 그럴 때 그 사람들 문 밖에 있는 사람들 하는 짓이 똑같아요. “그러면 쟤는요?!” 이러고 있다고요. “쟤는 왜 넣어줍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자, 그렇게 항의하는 심보는 여러분들이 충분히 분석할 수 있어요.
쟤는 왜 들어갑니까? 이 말은 뭐를 완전히 도외시하느냐 하면은 문이 사랑의 문이라는 것을 완전히 도외시해버리고 누가 주님을 더 사랑했느냐 여부에 따라서 많이 사랑하면 넣어주고 적게 사랑하면 안 열어준다는 평소의 자기 행함을 전제로 한 그것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는 거에요. 이 정신머리를 도끼로 부셔야 됩니까? 이건 뭐 부수지도 못하고 가르친다고 이게 바뀝니까? 지독한 자기 사랑을 뺨 때린다고 인간이 달라지겠어요. 마귀가 집어넣은 걸 인간이 그걸 고칩니까? 못 고칩니다. 마귀가 집어넣은 거에요. 자기도 자기 마음대로 못해요. 자기가 자기 사랑을 고칠 수가 없어요.
자기가 뭐 사흘 동안 굶고 철야하고 절벽 가서 나 변하지 않으면 뛰어내릴 거야 하면 마귀가 뛰어내려라 뛰어내려. 그렇게 뛰어내려서 천당 갈 거 같으면 다 뛰어내리겠다. 삼천궁녀도 뛰어내리는데. 뛰어내려서 자유낙하 5초 후 10초 후 되도 납작하게 빈대떡 되고 시체 되도 안 변해요. 인간이 자기 사랑이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왜 구원받았습니까? 주님 뜻은 뭐냐. “내 맘대로다 왜?! 내 맘대로다” 라는 그게 성경에 뭐냐 하면은 ‘죄를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주님의 사랑이 왔을 때 주님의 사랑받은 사람이 문 밖에 있는 사람하고 둘 다 똑같애. 인간은 똑같거든요. 똑같은데 어느 날 사랑이 찾아와요. 사랑이 찾아온다고요. SSG 쓱. 쓱 사랑이 찾아온다고요. 사랑이 쓱 들어와버리면 졸지에 내가 아무 근거도 없이 무조건 죄인이에요. 무조건 죄인인데 인간이 바뀌지는 않아요. 바뀌지는 않는데 죄인인 이유는 알아요. 아 지독한 내 사랑. 이거는 내가 예수를 믿든 천번을 믿든 이거는 바뀔 요소가 아닌 것을 압니다.
다윗이 고백했잖아요. 모친의 죄 중에서 나를 만들었다. 다윗이 뭐 바뀌었습니까? 바뀐 것은 뭐냐 하면은 뭐가 바뀌느냐 하면은 자기가 바뀐 게 아니에요. 자기 범주 있잖아요. 범주. 바깥에 있는 시선을 알게 된 거에요. ‘나’라는 동그라미 말고 너 넓은 동그라미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알았어요. 나를 죄인으로 보는 눈을 알았던 거에요. 내가 아는 범위 말고 나보다 더 크게 보는 어떤 안목에 의해서 우리가 걸려든 겁니다. 그럼 안목이 두 개가 되지요. 지독하게 나를 지킬려는 천하보다 귀한 게 ‘나’라는 안목, 이건 무슨 안목이냐 하면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가 작동하는 내 안목. 이거 없어지지 않아요. 죽을 때까지 계속 돼요.
그런데 그걸 통째로 죄라고 규정해주시는 고마움. 통째로. 그래서 나는 [ ] 아니다 이 말입니다. 나는 [ ] 아니에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죄 짓는 것만 가능해요. 그러나 죄를 벗어난다든지 죄를 안 짓는다는 것은 이건 내 몫이 아닙니다. 죄 짓도록 그냥 둬요. 두고 그것을 전체로 이렇게 쌈 싸먹듯이 싸버리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싸개’. 성경에 이 말 나옵니다. 사무엘상 25장 29절.
사무엘상 25장 29절 누가 한번 찾아보세요.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여기 단어 나오지요. 네 자. 무슨 싸개? 오줌싸개 아닙니다. 생명 보자기 안에 다윗을 어떻게 한다? 애기를 싸듯이 폭 싸는 거에요. 둘러치는 거에요. 더 큰 사랑의 범주 안에. 생명이라는 범주 안에.
이거는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인간은 어디서 끊어졌습니까? 생명에서 끊어졌지요. 그런데 언약이 찾아와요. 다윗에게. 언약이 찾아와서 다윗은 그 생명을 받거나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그냥 벌거벗은 몸이에요. 지난 주일 낮 설교에 했지요. 인간이 벌거벗은 이유가 우리의 갖고 있는 것은 외부적인 것, 마귀적인 것이라서 주께서 그거 벗겨내지요. 벌거벗은 것을 어떻게 합니까? 주님께서 생명 싸개로 감싸줘요. 체온 떨어지지 않게. 사랑의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따스하게. 땃땃하게. 우리 자체의 발열 열 말고 생명 싸개에서 나오는 그 에너지로 따뜻하게 하는 거에요. 우리가 설친다고 그 열기로 버티는 게 아닙니다. 우리 행함의 열심이 아니라. 딱 감싸주는 거에요.
시편에 보면 나오지요. 시편 131편인가. 거기에 보면 젖먹이 아이가 엄마 품에서 만족스럽게 다 먹고 난 뒤에 엄마만 쳐다보고 있죠. 자기를 쳐다보지 않지요. 왜? 나는 주님 안에서 영원한 어린아이가 되고 싶어. 딸랑딸랑. 당신의 영원한 종이 되고 싶어요. 딸랑딸랑. 주께서 먹이시는 자식이 되고 싶어요. 젖먹이가 되고 싶어요. 내가 나를 먹이는 게 아니고 주께서 먹이시는. 먹이시는 조건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조건. 내가 어떤 죄인입니까? 내가 지독하게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죄인이라는 조건 하에 먹이시는 겁니다.
그럼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뭐 밖에 없느냐 하면은 나는 나를 관리하고 지켜야 한다 그것만 있지요. 왜? 먹이시는 엄마가 없잖아요. 성령이 없으니까 엄마가 없잖아요. 탯줄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30년 50년 신학 공부하고 열심히 교회 다녔지만 없어요. 항상 본인에게 본인이 자기 경계선이 전부에요. 마지막 철조망 끝까지 나만 있어요. 나의 행함만 있어요. 나의 과거의 기억이 하나님과 나 사이의 경계선을 치고 있습니다. 중간에 없어요. 예수 아는 지식 들어있고 신학 했던 지식 들어있고 성경 지식 들어있고 성경 구절 외우는 지식이 들어있지요.
지식의 보유자가 누굽니까? 본인. 지식이 본인이라고요. 맨날 성경 외우고 QT 하고 내가 지식의 보유자에요. 그 외에는 없어요. 그럼 평소에 은밀하게 본인만 알고 있지요. 본인만 알고 있다가 누가 복음을 이야기해버리잖아요. 복음을 이야기할 때 인상이 확 가버리죠. 갑자기 분노합니다. 내가 예수님 십자가 믿고 구원받겠다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는 거에요. 혹시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습니까? 내가 교회 열심히 해서 말씀대로 해서 구원받겠다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 에요.
우리는 묻지요. 왜 기분 나쁘냐 묻지요. 그게 왜 기분 나쁘냐 물어 보세요. 왜 기분 나쁜지. 그게 왜 기분 나쁜지 물어보세요. 그 뒤에 말을 잇지를 못합니다. 그동안 예수 믿고 하는 것이 다 누구를 위해서? 나의 의도와 나의 계획, 나의 인생 계획, 나의 인생 고대. 이걸 위해서 필요한 정보들을 거기에 쑤셔넣은 거에요. 거기에 다 집어넣은 겁니다. 혹시 그게 모자람이 있을까 싶어서. 열심히 성경공부 다니고 완벽하게 그 조건들을 맞추기 위해서 노력한 거에요.
그래서 주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했거든요. 뭐를 모르느냐 하면은 본인이 예수님 사랑하는 것은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데 내가 주님께 봉사하고 하는 그것을 완전히 그걸 의미 없음으로 되돌리는 강력한 사랑의 침투, 내가 노력한 그것마저 그걸 죄라고 규정하는 그 규정에 빠져버린 거에요. 내가 주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그것이 죄였다고 규정하는 그 규정이 아직 안 들어왔어요. 그래서 복음 아는 사람이 그것도 죄인 줄 몰라요? 그 한마디 했다고, 한마디 했다고 그 다음부터는 발작을 일으켜요. 발작을 일으키죠.
버티기에 망한다. 버티기 때문에 망하는 거에요. 버틴다는 것은 시작점, 시작점을 누가 시작한다? 나부터 시작해서 점점점 어떤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던 거에요. 내가 시작한 결과, 이걸 가지고 뭐냐? 내가 만든 구원 스케줄이에요. 스케줄. 이게 구원의 기준입니다. 내가 만든 구원의 기준이죠. 그 기준을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어요.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기준과 전혀 다른 의외의 기준을 정해버렸습니다.
이런 기준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 문을 닫아놓고 그 안에 들어온 사람으로 하여금 내 모든 기준은 이게 바로 죄였습니다를 고백하게 만들죠. 그중에 여러 가지 사람이 있지만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이죠. 사도 바울은 구원받아놓고 그냥 나 구원받았다 하지 않고 뒤에 아까 뭘 붙였다? 나는 십자가 지지 않았다. 나는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요. 나는 [ ] 아니라고 이야기해버리죠. 그래서 뭘 보이느냐 하면은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하나의 수학적 기호로서 설명 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x라면 나는 –x다. 이런 식으로 해서 주님은 무한이고 하나님이고 나는 약한 죄인이다. 이거는 무슨 사상이냐 하면은 주권 사상입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주권 사상이에요. x와 –x를 대비한 것. 이거는 틀렸습니다. 나는 주님만큼 잘하지 못한다. 지금 이런 주장하는 것은 이건 전혀 신앙이 아니에요. 주님은 x가 아니라 주님은 이미 확정했어요. 1. 나는 1-x에요.
다시 말해서 나는 주님을 훼방하는 죄인이다 이렇게 돼야 돼요. 죄인이다. 주님의 공로를 주시옵소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를 내가 훼방하지 않게 하옵소서. 훼방하지 않게 하옵소서. 나는 주님의 공로에 방해자만 될 뿐입니다. 이런 고백, 이런 고백이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 나올 고백입니까 이게. 사람으로 나올 수 없는 고백이에요. 나는 주님의 짐만 될 뿐입니다. 이게 자기가 부인 안 되고 나올 고백입니까?
주님을 사랑한 만큼 주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전부 이럴 수 있다고요. 주님이 마음 낮추라고 해서 내가 지금 얼마나 마음 낮췄다고요. 지금 이렇게 나온다고요. 지금 그게 아니고 내 마음 낮추는 것이 무슨 일의 방해다? 내 마음 낮추는 것이 주님의 다 이루심을 방해하는 방해로서 저는 마음 낮추기를 했습니다. 나는 [ ]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내가 살아있는데 살아있어야 될 이유가 훼방자로 살아있는 거에요. 내가 훼방자로.
그러니까 내가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행복해도 뭐를 해도 그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의 일방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주께서 이런 반응을 유발시켰습니다. 항상 1-x 이기 때문에 항상 1이 살아있지요. 나는 –x. 이게 결합되어 있거든요. 1-x. 그냥 나는 못났음이 되어버리면 이 자체가 절대화돼요. 이 자체가 믿음의 내용이 되어버려요.
부흥사들 늘 강조하는 것은 목소리 쫙 깔고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그냥 마이너스잖아요. 주님을 증거해야지요. 주님을 증거해야지. 주님이 다 이루었는데 나는 너무나 부족해서 주님을 훼방했을 뿐입니다 라고 했을 때 이 고백은 성령 안 받으면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나는 십자가 지지 않았다. 십자가를 그런 식으로 증거하는 거에요. 십자가 다 이룸 앞에 나는 십자가 –x로 나오는 거에요. 나는 훌륭하다가 아니지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