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2b 울산강의-역대기상(16강) 13장 11절 : 언약궤의 최종성
20221202b 울산강의-역대기상(16강) 13장 11절 : 언약궤의 최종성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레위 지파도 없고 제사장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기껏 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자기가 언약궤 앞에서 무의미하고 재앙의 대상이고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라서 후딱 언약궤를 자기 구역에서 빨리 추방하는 일에 급급했던 겁니다. 그게 사무엘상 6장에 나와요. 쫓아내면서 그들이 재앙을 받았던 다섯 고을, 거기에 금 독종, 금 쥐 금으로 그렇게 형상을 만들어서…….
그들은 그게 없어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기 때문에 다만 이상한 신이 들어와서 우리나라 조져놓겠다, 망하겠다, 우리는 여호와라는 낯선 신에게 크게 당했다는 증거를 담고 수레에 보내면서 그들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들 나름대로 테스트를 한 거예요. 그 테스트가 사무엘상 6장 9절에 나옵니다. 그건 보셔야 돼요.
6장 7절부터 보면,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그가, 여호와가 우리 이스라엘 여기에 재앙을 내린 것이요. 벧세메스를 목표로 잡고, 벧세메스가 블레셋과 이스라엘 경계에 있는 고을이거든요. 그 마을로 돌려보내는데 아무도 소를 진두지휘하지 않아요. 그냥 소한테 맡겨버리고 소가 알아서 가도록 테스트를 한 거예요. 그들 마음속에 있었던 겁니다. 벧세메스로 가면 재앙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고, 그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만약에 딴 데 가면 이것은 뭐다? ‘우연히’ 이게 바로 지금 인간사회, 인간세상을 지배하는 정신입니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우연이다. 신이 없다는 말은 신은 없다고 본 거죠. 이스라엘과 붙어봤던 블레셋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뭘 쳤다? 우리를 쳤다. 그러면 블레셋 사람인 우리는 실제로 손에 만져집니까, 안 만져집니까?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우리는 보이지요. 왜? 블레셋 사람이니까. 우리란 걸 쳤잖아요. 쳤으니까 다섯 고을에 큰 재앙이 왔잖아요. 재앙이 들이닥친 다섯 고을에 우리는 분명히 블레셋이 있지요.
그들이 생각하기를 우리는 있는데 우리를 친 ‘그’는 있느냐? 그라는 실존 인물이 있느냐 말이죠. 그걸 뭐로 테스트했다고요? 소가 벧세메스로 우리가 생각하는 진영으로 제대로 간다면 그가 있고 없다면 그도 없다고, 이래 보는 거예요. 그런데 소가 세상에 벧세메스로 가네요.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여호와 신은 말로만 우리가 만든 신이 아니고 우리를 심판하는 심판자란 사실을 블레셋 사람이 증거합니다.
그러면 이 순간 언약궤를 증거한 것은 이스라엘이에요, 블레셋이에요? 블레셋이죠. 블레셋은 의미 있는 거예요. 그 순간, 그런 경우에는 의미가 있고, 이스라엘은 무슨 일이 있었지? 그 사태를 몰랐어요. 다만 벧세메스에 소가 울면서 올 때 여기서 부흥사들의 벧세메스 소를 많이 거론하지요. 여러분 부흥회 안 해본지 너무 오래돼 잘 모르지요.
부흥사들 단골 메뉴 중에 하나가 벧세메스가 들어가요. 뭐냐 하면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을, 벧세메스로 가는데 뭐가 필요하냐? 그 소가, 송아지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 송아지를 누가 하느냐? 역시 돈 많은 장로들이 송아지를 해줘라 이 말이죠.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메고 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제대로 천국 하려면 장로들이 목사를 잘 후원해줘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야 교회가 교회답게 되지 않느냐? 그것 하면서 벧세메스 이야기를 많이 해요.
여러분한테는 상당히 생소하게 들리지요. 이걸 권사들이나 젊은 집사들이 듣고 기도할 때 집어넣어요. “주여, 벧세메스 가는 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 잘 섬기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 말이에요. 이 말은 뭔 뜻입니까? 협박이죠. 교회 안 되는 건 다 누구 탓이다? 여러분들이 벧세메스 소가 안 된 탓이기 때문에 돈 더 내, 이 말이에요. 결국 돈 문제로 가요. 신천지고 구천지고 전부 다 돈입니다.
그래서 인수인계를 사무엘상 6장에 보면 레위 지파가 받아요. 그래서 벧세메스 사람들이 울고불고하다가 칠십 명이 죽어요. 이걸 떠넘겨요.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냅니다. 이게 위치가, 지금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포위된 형태로 갖고 있어요. 골짜기가 있는데 여기에 벧세메스가 있어요. 경계선이니까 그때는 국경선이 철조망으로 친 게 아니니까. 이 골짜기 기럇여아림이 있어요.
7장에 보면,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 놓고”(1절) 있었던 겁니다. 오늘 역대상 13장 봅시다. 그 장면이 나와요. 5절부터 보면, 기럇여아림 나오지요. 아비나답 집 나오는데 웃사가 그 수레를 웃사 이야기하고 거기서 하나님과 충돌했다는 이야기 봤지요. 아까 웃사가 궤를 만져서 충돌했다. 그래서 그 궤를 어디로 옮기느냐? 오벧에돔의 집에 갑니다. 가다가 역대상 15장에 가면 드디어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다윗 성 있는 곳으로 옮깁니다.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언약궤를 다윗은 왜 바로 예루살렘으로 옮기지 않느냐?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난해하고 어려운 대목이에요. 왜 하나님의 언약궤를 바로 옮기지 않느냐?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까 언약궤 상자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고 물었지요. 최종성이죠. 그걸 다시 설명 드리면 최종성이란 인간의 가치와 의미가 바닥났다는 것을 뜻함. 최종성이라 하는 것은 인간은 결국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이었냐? 하지만 남는 것은 흙밖에 없어요. 이게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가든지 지옥을 가든지 지 마음대로 되는 아니에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별에 의해서 차별을 통해서 가려내기를 통해서 한쪽은 지옥 가고 한쪽은 천국 가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이의를 달면 안 돼요. 흙인 주제에 이의를 걸 자격이 안 됩니다. 그 점에 대해서 지난 수요 설교 때 제가 이야기했어요. 예정선택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창세전에 이미.
그걸 다시 말씀드리면 창세전에 야곱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야곱이 사랑받을 때 사랑했다는 창세전에는 야곱이 없어요. 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태어나지도 않은 자를 하나님은 사랑하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태어나지 않았다. 그럼 이건 없는 거죠. 없는데 뭐가 있느냐? 사랑은 있어요. 지옥 가는 에서도 없는데 뭐가 있느냐? 미움은 있어요. 사랑과 미움은 창세전부터 있는 거예요.
그들이 행동을 밉게 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에요. 나쁜 짓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나쁜 짓하면 지옥 가고 착한 짓하면 천국 간다는 것은 언제부터 인간이 이 생각했느냐 하면 악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생긴 이념이에요. 이게 양심이고 이런 거예요. 이게 선악지식인, 선악지식은 인간이 알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본인의 운명은 본인이 아는 지식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쓸데없이 알 필요 없는 것을 쓸데없이 악마한테 한 소리 들은 겁니다.
악마한테 사기 당한 거예요. 너희 딸 액정 깨졌다, 보이스피싱에 걸려서 그 소리 듣고 그다음부터 수백만 원, 수천만 원 날아가잖아요. 액정 새로 하려면 앱을 새로 깔고 그러면 은행정보 다 빼내고 하는데……. 그러니까 아는 것이 힘이다.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이 이야기했거든요. 아는 것이 탈이다.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든 지식은 선악지식에서 나오는 거예요.
3+5는 뭐가 되지요? 8이죠. 이게 단순한 중성적인 지식으로 알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3+5=8이다, 그래서 너는 옳다고 인정받아요. 이게 선이 돼버린 거예요. 모든 지식은 선이냐, 악이냐는 최종 가치론이 개입되는 겁니다.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지요. 노아홍수 심판 때 두 부류가 있어요. 하나는 물위에 방주 안에 떠있는 사람이 있고, 노아의 가족이죠. 밑에는 뭐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평생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일상의 생활했던 사람이죠.
그래서 수요일에 예를 들었듯이 여기에 누가 있느냐 하면 이재명이 있어요. 물속에 누가 있느냐 하면 윤석열이 있어요. 너, 거기서 왜 나와? 하려 하는데 둘 다 물에 빠져 있어요. 그런데 위에 보니까 안 빠진 사람이 있어요. 그건 뭐냐? 언약 안에 있는 사람.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서 언약을 세운다는 말이, 언약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같이 주님께서 창세전의 내용으로 구분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 받는다는 말은 태어나고 난 뒤에 내 쪽에 행했던 것을 내 쪽에서 무시해버리는 거예요. 내가 한 살 때부터 0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했던 모든 것을 delete삭제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 이것이 바로 창세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의 모든 것을 일임하고, 뭐 일임하나 안 하나 일임돼 있지요. 일임하고 그 절차에 따라서 구원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이게 최종성입니다.
최종성이 슬픈 게 아니고 자신의 모든 과거가 삭제 당함을 감사하는 거죠. 뭐냐 하면 오늘이 12월 2일이죠. 2일이 되는 순간 12월 2일입니다, 라고 시계에서 또는 “지니야, 오늘 며칠이야?” “듣고 있습니다. 오늘 12월 2일입니다.” 지금 12월 되는 순간 이 말속에 12월 2일이라고 듣지 마시고 12월 2일 전에는 전부 날아갔다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다 날아가 버린 거예요. 없어요. 내가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없는 거죠.
이 없어지는 걸 성도는 이걸 뭐라고 보느냐 하면 너무나 당연한 걸로 보잖아요. 그러나 없어지는 걸 세상 사람들은 그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걸 실패로 봐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악마가 준 자기 과거에 대한 집착에 얽매이게 하는지 몰라요. 이게 악마의 시험입니다. 계속 없어져버린 이미 떨어져나간 꼬리를 우리 코앞에 들이대면서 “네가 오년 전에 뭐 된다 했잖아. 네가 두 달 전에 이 계획은 달성한다고 했잖아. 남자 되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지. 오년 전에 결심한 건 다 어디 갔냐?”
그때 성도는 어떻게 해야 돼요? 오년 전에 결심한 것 없어. 그럼 왜 결심했어?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거든. (홍상수 감독, 2015) 그때는 시건 없고 지금은 오늘부로 시건 났거든. 없는 걸 자꾸 되새김하듯 들춰내서 남편 잡지 말고 아내 잡지 말고 자식 잡지 마세요. “네가 나와 결혼하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다고 했잖아.”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고.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 땅에서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실패를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버리는 걸 목표로. 성공은, 그러니 높은 곳에 올라가지 마세요. 올라가거든 그냥 내려오세요. 성공은 사람을 교만케 해요. 안 돼요. 실패해야 돼요. 그게 왜 중요하냐? 다윗은 예루살렘에 언약궤를 옮기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가? 바로 자기 실패를 위한 전쟁을 한 겁니다. 그게 14장에 나와요.
그 14장에 나오는 전쟁이 실패의 전쟁. 실패의 전쟁을 하니까 성공을 한 거예요. 한 번 적어볼게요. 실패의 전쟁이 곧 승리의 전쟁이다. 이스라엘이 처음에 사무엘상 4장에서 전쟁할 때 자기 팀에 메시 있다고 이기는 줄 알았어요. 호날두 오늘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호날두 있다고 이길 줄 알고 손흥민 있다고 이길 줄 알았는데 감사하게도 손흥민이 마스크 써서 잘 안 보여서 헤딩할 때 못해서 다행입니다.
실패의 전쟁을 해야 되는데 승리의 전쟁을 찾았던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실패한 겁니다. 실패의 전쟁의 특징은 뭐냐? 비겁한 전략이에요. 그게 역대상 14장에 나옵니다. 13절에, “블레셋 사람이 다시 골짜기를 침범한지라 다윗이 또 하나님께 묻자온대 하나님이 이르시되 마주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야, 이것 비겁하다. 정면으로 맞서지 말고 숨어서 없는 것처럼 공격하라. 왜? 그래야 그들이 기가 사니까. 그들로 하여금 승리를 만끽하게 만들어라. 인생은 이렇게 돈 끌어 모으며 사는 게 인생이구나, 라고 승리를 만끽할 때 백 프로 그 사람은 복음에서 얼굴 돌아간 눈 돌아간 사람입니다. 눈에 뵈는 게 없어요. 그래서 부자가 천국 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처럼 힘들다.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에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셔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 세 가지했잖아요. 그 세 가지를 현재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절대로 이기기 못할 조건을 세 가지 걸었던 거예요. 악마가 뱀처럼 지혜롭거든요. 완전히 독사고 뱀이고. 한 번 문 것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것이 뱀이죠. 인간의 목덜미를 물었으니까 이길 수가 없지요. 그 뱀은 자꾸 물어요. 물고 놓질 않습니다. 이 뱀이 물었는데 잘못 물었어요. 누구의 발꿈치를 문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 대가리를 쳐버렸어요. 그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관계입니다.
비겁한 전쟁을 해요. 블레셋 사람들은 적이 보이질 않아요. 이건 도망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뒤로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나가서 싸우라” 이것 누가 지시한 거예요? 이건 하나님이 다윗에게 지시했고 다윗이 군사들에게 지시한 것 맞지요. 그러니까 뽕나무 소리 안 나면 어떻게 해요?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소리가 들려야 되는데 안 나면 어떻게 돼요? 이건 안 되지요.
비겁한 전쟁을 해야 될 이유가 다윗의 군대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그 시그널, 사인을 그들은 다 받아들어야 되는 거예요. 어떤 순간순간도 하나님의 개입과 지시에 따라서 세상을 움직인다. 그것이 인간이 예상 못한 하나님의 전략이다. 그것을 눈치 채야 되는 겁니다. 이걸 한 문장으로 쓰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내건 모든 조건을 이기신다.” 인간이 내건 모든 조건을 교회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바로 기도지요. 그래서 기도하는 당사자가 기도 내용을 구성하려면 자기에게 아쉬운 것,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 기도할 때 조건을 달았지요. 무슨 조건이냐 하면 네게 필요한 것은 누가 아신다? 아버지께서 미리 아시기 때문에 네가 내건 조건을 주님께선 거기에 대해서 일체 거부하는 게 아니고 그걸 이기시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자식이 암 걸렸다. 맨 정신으로 가만있을 부모는 없어요. 소위 교회 다니던 절에 다니던 맨 정신으로 밥이 안 들어가지요. 자연 금식이 돼요. 강대상 앞자리에 꿇어앉으면서 자동으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간절한 간구, 기도가 절로 나오지요. 안 나올 수가 없지요. 조건 겁니다. 차라리 내 목숨을 가져가시고 자식 목숨 살려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남자는 그렇게 안 하는데 여자들이 많아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러한 조건을 우리로부터 끄집어내시는데 유도하는데 성공하셨어요. 이게 우리의 본심이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테스트하시거든요. 그 시험의 조건이 뭐였습니까? “네 사랑하는 하나밖에 없는 독자를 내게 바쳐라.” 쉽게 말해서 죽이라 이 말이죠. 그것도 누구 손으로? 네 손으로 죽여라.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조건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간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 조건에 부합되었습니까, 부합되지 않았습니까? 참 질문이 어려워요. 아브라함이 아들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조건에 부합되었어요, 부합되지 않아요? 부합된 것처럼 보이지요. 네가 네 손으로 네 자식 죽이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에 출제문제를 바꿔버려요. 네 아들 대신 옆에 수풀에 있는 양으로 바꾸라고 마지막 한 순간에 멈춰, 해놓고 그걸 바꿔버려요.
그러면 아버지 아브라함이 양을 잡을 때 아브라함은 뭘 느끼겠어요? 하나님께서는 내 자식 이삭을 받는 게 아니고 뭘 받는다? 대신해서 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때 아브라함은 식겁했겠지요. 식겁한 동시에 뭡니까? 아브라함 본인의 인간으로서의 어떤 한계점도 인간의 힘으로 천국 가려면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지요. 그걸 믿음의 증인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실패의 흔적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는 걸 말합니다. 내 기도대로 응답 안 해준 것에 대해서 늘 감사하는 거예요. 그럼 이걸 해봅시다. 자식이 암 걸렸다. 기도했다. 그럼 결과는 두 종류에요. 뭐냐 하면 암이 심화되어서 한 달 만에 죽었다. 이상하게 기적이 일어나서 암에서 완치되었다. 두 가지 결과지요. 두 가지 어떤 결과라도 하나님이 이긴 게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한 우리 인간의 기도를 우리의 본심을 끄집어내는데 하나의 하나님의 기도의 과정으로서 참여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6장인가 네가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했거든요. 인간은 항상 자기 뜻에서 기도하지 주의 이름으로 기도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해놓고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주님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쉬지 않고 기도한 덕분에 너희들은 구원을 이룬다고 돼 있어요.
그래서 주님의 기도로 오늘 하루하루를 살고 어제 것은 다 삭제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새롭게, 새롭게 알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예상 못하는 자식이 암에 걸리는 난데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우리는 황급히 다급해서 기도를 하게 했고, 그리고 어떤 결과든 이거는 내 기도의 응답이 아니고 주님의 기도에 참여하는 식으로 우리 성도로 하여금 응답되게 하는 거예요. 내 기도 아니고 주님의 기도대로 뜻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되게 하는 거예요.
어제 밤에 자는데 꿈에(미리 밝힙니다, 꿈입니다.) 우리교회 둘로 나눠졌으니까 앞쪽에 내가 뭘 하다가 연기가 자욱한 거예요. 꿈속에 보니까 식당에서 불이 났어요. 큰불이 난 거예요. 커튼에 불붙고 한 거예요. 꿈속에서 해결책은 뭐냐 하면, 이건 꿈일 거야, 하고 깨어났는데 그래서 왜 그런 꿈을 꿨는가, 보니까 보일러를 많이 틀어서 몸이 뜨거워서……. 몸이 뜨거울 경우는 불이 났을 때 뜨겁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원인을 규명하게 돼 있거든요. 규명할 때 내가 나쁜 짓을 했을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되는 짓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내가 성경을 안 봤구나, 내가 전도를 안 했구나, 내가 헌금이나 돈을 너무 사랑했구나, 요새 내가 주님 말씀에 관심이 없구나. 온갖 것 다 끄집어내잖아요.
그걸 일부러 다 끄집어내게 해놓고 그것과 주님의 기쁨과 아무 영향력을 주지 않아요. 상관없다는 것을 새로 입게 돼. 이걸 전에도 알지만 오늘짜리로 새로 깨닫는 거예요. 이게 바로 내 이름이 아니고 행함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주의 행함으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이란 주님 자신의 열심이에요.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실패 외에는 할 게 없어요. 실패하는 즐거움, 왜? 합격증 따놨으니까. 엑스칼리버 칼은 꽂혀 있으니까. 그 주님의 성공을 우리는 생각 못하고 자꾸 독자적인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성공적인 인생을 따로 끄집어내려니까 주님께서 가만있지 않고 그것이 얼마나 주의 구원을 훼방하는 짓인 것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아까 마태복음 16장에 시몬으로 있을 때는 자기가 자기 종이었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돼버리면 시몬이 베드로의 종이 돼요. 왜냐하면 베드로는 베드로의 이름이 아니고 베드로 안에 작용하는 예수님의 기능, 구원의 반석 기능하고 있으니까 베드로 육신은 그냥 껍데기고 안에는 주님이 일하니까 이름이 베드로. 베드로가 뭐냐? 주의 이름이에요.
야곱은 야곱의 이름이지만 이스라엘은 누구의 이름이냐?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래서 그걸 보편화시키면 뭐가 되느냐?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껍데기는 내 이름인데 안쪽에는 주의 이름이 사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10장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달리 이야기하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 구원을 받았다 이 말이에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윗이 레위 인들을 모집하고 제사장들을 함께 모아서 언약궤를 옮길 준비하는 것이 13장이고요, 거기서 오벧에돔의 집에 도착했는데 그 집에 복을 내리셨다 했어요. 언약궤가 있음으로 복을 내리셨다. 벌써 세 번째인가 네 번째 하고 있는데 다시 해보겠습니다.
언약궤 안에 뭐가 들어있지요? 최종성 들어있지요. 최종성이란 우리가 하나님께 한 몹쓸 짓은 다 갖고 있는 거예요. 최종적인 몹쓸 짓. 아담에 속했다는 말은 악마에 속했다는 말이거든요. 악마가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간에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고 날 아프게 만들면 우리는 화나게 돼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의 분노에요. 물어봅니다.
분노를 왜 일어납니까? 어떤 때 성이 나지요? 답변은 이렇습니다. 우리 강의가 즐거운 것은 질문하고 답변 사이에 3초밖에 안 걸린다는. 분노는 왜 일어나느냐? 완성된 모든 것이 갖추어지지 않으니까 분노가 일어나는 거예요. 합격이란 기쁨이 없을 때는 분노가 일어나요. 미완성이 들통 날 때 분노가 일어나요. 완성이 돼버리면 그까짓 것 좀 져도 괜찮아요. 실패해도 상관없어요. 그러나 모든 걸 갖추지 않을 때는 갖추려는 내 시도가 방해받을 때 사람은 나의 완성이 방해받을 때 인간은 분노하게 돼 있습니다.
애가 성적이 떨어졌다. 왜 분노가 일어나는가? 네가 적어도 상위 층, 그러니까 10등 안에 드는 것이 너를 키워준 한 살 때부터 스무 살 때까지 3억 든다 하거든요. 돈을 그만큼 투자한 아빠, 엄마의 보람에서 너는 10등 정도는 해줘야 효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게 아빠, 엄마가 생각했던 완성 레벨이에요.
그런데 10등에서 15등으로 내려갔을 때는 그동안 학원비 등 해서 드렸던 3억이 나중에 3억5천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것, 이거는 5천으로 내 여유자금에 손해난다는 내 완성체가 한쪽이 붕괴될 때 나의 나다움이 지장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분노가 일어나는 거예요. 사람이 화가 나는 것은 완성된 것을 본인이 소지하고 있는데 그 소지한 것을 무너지고 와해시킬 때 사람은 분노하는 겁니다.
시진핑이 왜 분노할까요? 상하이에 감염자 한 명 생겨서 분노하잖아요. 우리 중국은 한 명도 없는 게 완전체인데 그 완전체에서 몇 명 생기니까 분노해서 다 가둬버려. 배급제하고 이런 식으로. 그런데 우리나라는 감염자가 삼만 명, 오만 명 나와도 왜 분노하지 않습니까? 나라 자체가 포기했기 때문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니 마음대로 하세요. 시위를 하던 데모를 하던 화물연대를 하던 니 마음대로 하세요. 대장이 없으니까. 각자 선택이니까.
인간은 분노하면서 분노하는 그 자체가 레벨에서 성공을 했다는 것이 티가 나버린 거예요. 내가 생각한 나다움이 성공이지 하나님이고 예수고 간에 그딴 성공은 거부한다는 자기 마음의 표현입니다. 내가 성공일 때 성공이지 주님이 주시는 성공은 나는 달갑지 않습니다, 반갑지 않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구원 받는 자가 누구냐 하면 반드시 잃어버린 자입니다, 탕자. 하여큰 탕자, 이 사람은 염치도 없어. 그렇게 성공하겠다고 장담해놓고 땅겨서 가불도 그런 가불이 어디 있습니까. 땅겨서 유산 다 가져가놓고 돈 다 써버린 거예요.
돈을 함부로 쓴다는 것은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가 돈을 쓰는 자체가 성공적 삶이라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돈을 마구 쓰는 것은, 돈을 막 뿌리듯이 쓰는 것은 이게 성공적인 삶이라는 거예요. 벤츠 굴리고(벤츠 타는 사람 욕하겠다만), 골프 치고(골프 치는 사람 욕하겠다만) 이런 것으로 함부로 쓰는 것은 그게 자기가 나의 나다움의 최종적인 성공 모습이 이미 프레임이 짜있는 거예요. 그것에 맞추어서 자기 삶을 스스로 자기를 격려하고 독려할 수 있는 삶의 동기 유발로 자극제로 사용했던 거예요.
성경에서 이런 걸 무슨 나라라고요? 이게 블레셋이에요, 블레셋. 블레셋과 같은 정신머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블레셋 교회지요. 블레셋 교회는 오직 기도하시면 복 받고 성공한다는 이야기밖에 안 하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 십자가 복음 이야기해보면, 기쁘게 실패하세요, 하면 그 교회는 그 이야기를 못 들어줍니다. 내가 왜 사는데, 무엇 때문에 사는데?
언약궤는 최종성입니다. 그 설명마저 해야겠다. 최종성은 뭐냐?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는 걸 다 넘어서버렸으니까 더 이상 인간이 할 게 없어요. 구원에 인간이 할 게 없어요. 그럼 뭐냐? 부활의 영 외에는 구원 될 길이 없는 겁니다. 그걸 구약적 모습으로 보여준 거예요. 언약궤 가는 곳에는 인간은 무조건 실패해야 되고 실패하라고 다가가는 것, 여러분 누가 성경 찾아보세요.
마태복음 1장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란 이름이 구원자인데 그 구원자가 바깥에서 온 구원자입니까, 어디서 온 구원자에요? 죄에 갇혀 있는 자를 자기 백성을 어디서 끄집어냅니까? 이게 중요해요.
죄에서 끄집어내기 때문에 자기 백성은 외부에서 오지 않으면 자기가 죄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라요. 이렇게 성공적인 삶이 죄라는 사실을 몰라요. 그러면 우리가 가난하란 말입니까? 인간은 자기가 가난하다는 의식 자체가 죄가 돼요. 가난이고 부자고 이미 실패자일 때는 가난, 부자란 자체가 의미가 없는 호칭입니다.
한 군데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4장 25절,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다가가는 거예요. 구원은 다가오는 거예요. 저쪽에서 오는 거예요. 외부의 구원자가 우리에게 오는 것이지요. 내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오면 올수록 먹구름이죠. 오면 올수록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실패가 마땅함을 깨닫는 감사와 기쁨이 생깁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인간의 삶을 제가 한 자씩 해서 지어봤어요. 촉, 책, 벌. 인간은 뭐로 사는가? 촉으로 살아요. 감각으로. 좀 분석하게 되면 과거의 기억을 기초로 한 감각. 이건 정보, 지식 뭐라도 괜찮아요. 인간은 촉, 기분이든 감각이든 전부 다 바탕은 뭐로 돼 있느냐? 과거에 자기가 기억한 것, 체험한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체험한 것 중에서 기억나는 것, 어제까지 기억나는 그 바탕 위에 촉으로 삽니다.
그런데 촉으로 사는데 이 촉은 우리한테 뭘 주느냐? 책, 책임을 부여해요. 어제 네가 그렇게 결심했잖아. 오늘 이게 무슨 꼴이야. 내가 나한테 책임을 묻는 거예요. 이게 스트레스를 받아요. “어제 네가 일할 때 성사가 잘된다고 호언장담했잖아. 이게 뭐야, 이게.” 이런 것. “네가 10월 29일에 이태원 가서 잘 놀다온다고 호언장담했잖아. 그런데 깔려죽어? 이게 뭐야.”
언약궤는 하나님이 결정한 최종성, 인간은 최종적으로 흙에 불과하다는 그 최종성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따로 언약궤 계열에 편입한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언약의 후손이라 하는데 이 대목은 로마서 1장 2~4절에 나와요. 다윗의 후손 나와요. 언약궤는 후손을 만들어요. 언약궤 안에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미 최종성이니까 없음이 되죠. 없음에서 있음이 되려면 창조의 능력이에요. 창조 능력이 십자가에서 나오는데 이게 언약의 능력에서 나오거든요.
인간이 촉으로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사는데 여기에 대해서 오늘에 보면 그 과거의 기억에서 장담한 그 책임을 무겁게 오늘 나한테 짊어지운다니까요. 내가 나에게 책임을 물어요. 이게 하루하루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뭐냐? 로마서 6장에 보면 죄의 삯은 뭐 된다? 사망. 결국은 우리 주변에 있는 인물처럼 우리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전부 다 사망이에요. 사망인데 그냥 죽지 않아요. 죄 값으로 벌 받는 거예요.
촉, 책, 벌. 특히 중요한 것은 책. 매일같이 스스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할 일이 있는 건 좋아요. 하지만 어떤 짐이 되느냐? 꼭 성공해야 되고 꼭 성사해야 된다는 그 짐. 왜 꼭 성공해야 하느냐 하면 촉, 감각 안에 과거의 기억이 뭐냐 하면 나한테 요청하고 요구하는 타인의 시선들이 있어요.
“네가 내 자식이잖아. 시집가면 잘 먹고 잘 살아야지.” 그러한 친정 아빠, 엄마의 요구 또는 친정 조카나 동생들의 요청과 주변사람들, 알고 지내던 지인들 나에 대한 평가가 있어요. 이게 행동 하나에 감각의 촉으로 구성이 된다고, 내용이. 주변의 눈들이 많아서 눈들에 의해서 심리적 압박을 받는 거예요. 이게 참…….
인간은 생리적인 신체의 작용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육이잖아요. 육이 육을 몰라요. 인간을 알려면 영에서부터 출발해야 되는데 인간의 의학과 과학은 육에서부터 나와서 육을 관리하고 치료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육을 아는 의사들이 왜 촉, 책, 벌입니까? 왜 책임을 져야 돼요? 병원 안 된다고 힘들다고 병원 은퇴해서 “십칠 년간 치과 했다. 나 이제 그만 할래.” 이번 주 제목으로 나온. 본인이 인간을 치료하면서도 인간이 누군지를 몰라요. 다만 남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더라, 남들 이야기밖에 안한다고. 그리고 목사의 설교도 남들, 목사는 타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성령의 검, 엑스칼리버, 말씀이 여러분들을 찔러댈 때는 그냥 말씀 하나를 찌르는 게 아니고 말씀의 뭉치, 말씀의 완성 십자가,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한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내 피와 내 살을 먹으면 생명이 있다. 네가 이 땅에서 뭘 하며 어떻게 지냈던 일체 그건 다 지나간 거예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오직 예수님의 최종성만 여러분 속에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가오셔서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해주시는 그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가 실패해도 상관없는 이미 승자가 된 승자와 함께 한 이 삶을 살게 하신 주님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