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2a 울산강의-역대기상(16강) 13장 11절 : 언약궤의 최종성
20221202a 울산강의-역대기상(16강) 13장 11절 : 언약궤의 최종성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언약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언약궤는 형체가 있습니다. 언약궤는 형체가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형체가 없어요. 방주가 형체가 있습니다. 성전도 형체가 있지요. 구약 때. 구약의 특징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 사람들이죠. 왕, 사람들입니다. 눈으로 보입니다. 그 사람들을 의존하고 그 사람들의 지시에 따르고 명령에 따르고 그 사람들에 대해서 복종하게 되면 승리가 주어지는 것이 이스라엘의 특징이죠. 좀 어렵지만 쭉쭉 나가겠습니다. 약간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전쟁 전문으로 하는 나라에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집어넣어준 거예요. 왜 전쟁을 하는가? 전쟁을 함으로써 여기서 승자가 생기고 패자가 생길 때 이긴 자는 의미가 되고 패자는 무의미가 되는 거예요. 살아도 소용없는 인생, 이거는 살 이유가 있는 것. 승자, 패자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전쟁의 전문 나라, 이스라엘이 졌다? 그럼 이스라엘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이거는 이스라엘이 전쟁에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 내부와 외부가 있다면, 내부에는 언약궤가 자리 잡고 있어요. 외부에서는 언약궤가 자리 잡아서 승리가 주어지고 이스라엘이 이긴다는. 싸워서 이긴다는 뜻이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끝까지 살아남는 이스라엘. 이걸 여섯 자로 하면 이겁니다. “끝내 이기리라”
박세리가 1998US오픈골프대회에서 이겼을 때 방송에 김민기의 틀어줬잖아요. 김민기 작사, 작곡, 양희은이 부른 노래, 끝내 이기리라 했잖아요. 홀컵에 쏙 들어갈 때 이겼잖아요. 태국선수를 이기죠(제니 추아시리폰, 태국계 미국인). 끝내 이기리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없는 나라로 만들어서 전쟁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하나님은 끝내 이기리라가 돼요. 왜?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면 악마가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악마에 대해서 끝내 이기리라, 라는 이것을 말로만 아니라 실제 눈으로 보이고 실제 역사 속에 있던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께선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러면 이 성경이야기는 종교가 아니죠. 취미가 아니에요. 이거는 한 번 믿어볼까, 이런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더 큰 환경입니다. 성경 내용이. 학생들이 학교에서 이순신 장군 배우잖아요. 사탐하는 사회탐구에서 역사 배우잖아요. 그 역사를 배울 때 학생들이, “선생님 그딴 종교를 강요하지 마세요.” 이렇게 나옵니까?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가 일제에 압제를 받아서 전부 다 못 살았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아요. 일제 때 조선시대 때보다 서너 배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만큼 자유도 많았고요. 그러니까 일제 역사 자체가 우리가 일본한테 억압당했다는 피해망상으로 종교 비슷하게 된 거예요. 일본은 죽여라, 이렇게 나오잖아요. 일본 때문에 잘 먹고 잘 사는 거예요. 이거는 아무도 안 가르쳐주는 이야기입니다만.
조선 시대와 비교가 안 돼요. 생활수준부터 돈, 경제문제뿐만 아니고 인간의 인권과 자율성 같은 게. 일제 때는 재판할 때도 변호사 없으면 일본법에 의하면 국선변호사를 대줘가면서 재판했어요. 심지어 안중근 의사한테도. 이거는 조선시대 때는 상상도 못한 겁니다. 그런 이야기는 학교에서 아무도 이야기 안 해줘요.
어쨌든 간에 역사시간에 일본만 나오면 나까무라 죽이라고 성토를 하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습니다. 강요로 압박당해서 일본에 돈벌이하러 갔다고요? 천만의 말씀 그 당시에 양복 입고 일본에 돈벌이 가는 것이 10:1, 100:1이 넘었어요. 서로 가고 싶어서. 독일에 광부, 간호사 가는 것보다 비율이 더 셌어요. 여자들 일본 방직공장 가는 것, 그건 아무나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유지 쫌 돼야 갈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 하나도 안 하잖아요. 민족주의가 나라를 망치는 거예요. 나까무라 때문에 사는데…….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가 나라 등쳐먹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민들의 생활고 서너 배 더 나아졌어요. 일본 통치 이후에는 그전까지 조선 서민들 인간도 아니었어요. 지금 국가 자체가 이념화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하나의 국가가 되게 되면 뭔가 적을 하나 만들어서 밟아야 자기들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꾸 그런 것을 학생들에게 과거에 대해서 왜곡되게 가르치는 거예요. 북조선이나 남조선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전쟁을 하게 돼 있고 전쟁을 함으로써 인간은 이미 악마 속에서 살아도 의미 없는 무의미한 존재, 집단이란 걸 알려주는 겁니다. 의미 있는 것은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생명나무 있는 그곳만이 의미가 있어요. 원래 인간을 창조했던 그곳, 그곳만이 의미가 있고 거기서 추방된 이상은 의미 있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소용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마화 된 인간세계에 시비 거는 거예요. 전쟁을 벌인 겁니다. 전쟁을 벌이는데 이스라엘 속에 뭘 만드느냐? 언약궤를 만들어서 내부의 외부전쟁 승리로 이어지게 하는 거예요. 언약궤를 집어넣어서 이스라엘로 전쟁 승리하게 한다면 이거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고 누구 전쟁이냐 하면 언약궤의 승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역대상 13장 봅시다. 13장 9절,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소가 나오는데 이 소가 뭐냐 하면 사무엘상 6장 9절을 보게 되면 언약궤가 블레셋 나라와 전쟁을 하는데 그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겼거든요. 이겼을 때 그들은 하나님도 이겼다고 생각하고 자기 신전에 모셨더니만 사무엘상 5장에 보면 자기들 다곤 신상이 박살나버렸어요, 그날 밤에.
그전에 사무엘상 4장 3절에 보면 이스라엘로 하여금 일부러 블레셋과 전쟁을 하도록 벌였지요. 이스라엘만 전쟁해서 블레셋이 이겼는데 죽은 사람이 몇 명이냐? 사천 명 죽었어요. 4장 2절에.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전쟁했는데 내가 뭐라 했습니까? 전쟁을 하는데 승자만 의미 있고, 패자는 무의미하다 했잖아요. 이스라엘이 사천 명 죽고 졌지요. 그럼 이스라엘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럼 승자가 뭐냐? 블레셋이란 말이죠. 일단은 준결승전, 블레셋과 이스라엘 붙어서 블레셋이 이겼지요. 자, 결승전……. 승자가 뭘 갖고 가느냐 하면 언약궤를 가져갔어요.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갔다고요. 언약궤와 블레셋 결승전 붙어서 누가 이겼습니까? 언약궤가 이긴 거예요. 그쪽 신이 진 거예요. 처음에 사천 명 죽고 난 뒤에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들고 나가면 전쟁에 이기지 않을까 해서 언약궤 앞장세워서 나갔습니다.
이게 민수기 10장에 보면 나와요. 언약궤 앞장세우면 이기고, 승리한다는 게 있어서 그 말 믿고 언약궤를 앞장세웠는데 언약궤를 들고 나오니까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전쟁할 생각 안 하고 뭐와 전쟁을 하느냐 하면, 언약궤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언약궤보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더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바로 사무엘상 4장에 나옵니다. 이걸 제가 하나하나 따지겠습니다.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나가겠습니다. 굉장히 어렵지만 중요한 것이라서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4장 5절에 보면 빨리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왜냐하면 8절에 이 언약궤를 만드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애굽이 신들을 친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애굽의 신들을 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전쟁에 끼어들었다. 따라서 경각심을 누가 갖느냐? 블레셋 사람이 더 크게 가져버렸어요. 그래서 블레셋 사람이 대장부가 되어서 더 힘 있게 하자, 이렇게 나온 거예요.
쉬운 예를 들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르헨티나(세계에서 제일 축구 잘하는 나라, 메시) 시합하는데 전반전 끝나고 사우디아라비아 감독이 호통을 쳐요. 너희들 메시와 사진 찍으려고 축구하느냐, 이랬어요. 메시에 대한 가치가, 아르헨티나가 자기 팀에 있는 메시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메시라는 축구팀의 실력을 더 인정해주니까 경각심이 나서 사우디아라비아가 2:1로 이겼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전쟁을 벌이면서 사람 대 사람의 전쟁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일깨워주는 겁니다. 교회 나온 사람을 교인이라 이야기하고 교인과 교인 사이를 교우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나 교인과 교우는 하늘나라 와 아무 의미 없어요. 상관없고 진짜 성도는 뭐냐 하면 교회 와서 사람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누구냐 하면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느냐가 그 사람을 성도라고 이야기해요.
그냥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나, 어떻게 비추겠어? 그런데 신경 쓰고 교회 나오면 그거는 교회 백날 나와도 소용없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고 인도했고, 인생을 어떻게 살게 했느냐,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게 취미도 아니고 친목단체도 아니고 더구나 종교는 아니죠. 종교는 인간이 만드는 거니까.
경각심으로 사천 명 이기고, 또 이겼어요. 1차전에 사천 명 죽이고 블레셋이 이겼는데 또 전쟁해서 이제는 그 당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엘리가 이때 죽었는데 엘리가 송해보다 더 살았어요. 아흔여덟까지 살았어요. 오래 살았지요. 죽을 때 며느리가 하필 그 타이밍에 애를 낳아서 이름을 지었는데 ‘이가봇’ 하나님이 우릴 떠났다, 우릴 버렸다. 왜? 며느리 입장에선 자기 남편 죽고 시아버지 다 죽었으니까. 기댈 곳이 없어요.
그래서 아들, 일종의 장군이에요. 장군 둘 다 죽고 언약궤 빼앗기고. 그래서 표현하기를 21절에 하나님이 우리나라 이스라엘을 떠났다, 라고 며느리가 애 이름에다 그렇게 지은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떠났다. 우리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되었다. 무의미하게 된 거예요. 전쟁에서 패자가 무의미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5장에 넘어가면 언약궤를 포로로 잡은 거예요. 신을 포로로 잡아놨는데 전쟁 아직 안 끝났어요. 언약궤 있는 곳마다 여호와의 저주가 계속 임한 거예요. 오늘 역대상 13장 9절을 읽어보면서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이렇게 돼 있어요.
제가 물어봅니다. 언약궤 붙들면 사람이 왜 죽지요? 제 질문입니다. 언약궤는 상자인데 그 상자를 붙드는 게, 웃사가 넘어질까 붙들었거든요. 소들이 발작을 일으켜 난동을 부리니까 소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언약궤가 나무에 금박 씌운 거라 깨질까 싶어서 붙들었는데, 보지도 않았어요. 붙드니까 죽었습니다. 왜 죽었을까요? 왜 언약궤는 사람을 죽입니까? 이게 진짜 신앙의 핵심이에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상대 안 합니다.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래서 언약궤를 붙들면 왜 죽이는가? 언약궤 안에는 인간의 최종성이 들어 있어요. 담겨있다. 나는 인간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확고한 취지가 언약궤 안에 들어 있어요. 어떻게 죽은 자가 생명나무를 왜 붙드느냐 이 말이죠. 인간은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된 거예요. 추방된 자가 어찌하여 선악과 따먹듯이 그걸 따먹느냐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진짜 깊이 있는 말할까 말까하다가 터뜨리는 속에 있는 질문이 뭐냐 하면, “목사님,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듭니까?” 누구나 묻고 싶은 이야기고 차마 자진해서 말은 못하지만 누구나 살아가면서 꼭 묻고 싶은 이야기잖아요. 차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전부 다 그게 제일 궁금하지요. 하나님, 예수님보다. 답변은 이미 나와 있어요.
옛날 선생님이 학생이 까부니까 “수업시간 방해되니까 앞에 나와 의자 들고 있어” 하니까 학생이 하는 말이, “선생님, 팔이 왜 아프지요?” “너 벌 서고 있는 거야.” 인생이 왜 힘듭니까? 그게 벌 서고 있다는 말이에요. 인생 자체가 벌 받고 있는 거예요. 안 힘든 인간이 없어요. 우울증 같은 소리하고 있네. 모든 인간이 다 우울증이에요. 행복한 인간이요? 벌 서는 주제에 뭐가 행복한, 행복한 인간 없습니다. 혼자 세계에서 제일 불행해.
16강 못 들어갈까 봐 걱정해, 불행해. 날 춥다고 불행해. 감기 걸려서 불행해. 코로나 걸려서 불행해. 인생 태어나면서부터 울면서 태어나는 겁니다. 뭐 남자 세 번 운다고요? 남자 나이 육십오 세만 넘으면 드라마 보면서 매일 울어요. 여자는 울지도 않아. 남자는 찔찔 거리면서 울고 있다고. 훌쩍훌쩍. “재벌 집 막내아들이 불쌍해, 송중기가 불쌍해.” 어느 인간치고 교회를 백날 다녀보세요. 권사, 장로, 목사 돼 보세요. 행복한지. 행복은 물 건너갔어요. 지금 의자 들고 있다니까, 인생은. 의미 없습니다.
언약궤 안에 최종성이 있어요. 언약궤 안에 너희들이 나에 대해서 대적한다는 증거물이 들어 있습니다. 너희들이 아예 불행을 저주와 비극을 사서해. 그 증거가 언약궤 안에 들어 있어요. 그 언약궤를 들이민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를 우리 앞에 몰아붙이고 밀어붙이는 거예요. 언제 그런 강의했거든요.
왜 하나님은 인간을 극단까지 몰아붙이는가? 그 이유가 뭐냐? 구원은 사람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뭐 성화론에다 철야, 선교, 금식, 중보기도 하여튼 난리 블루스를 쳐요. 헌금, 십일조, 교회 섬기기, 목사 섬기기, 아주 무슨 짓이든 다 해보세요. 그래서 구원되는가. 그래서 구원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세리와 창기가 천당 가요. 바리새인들 전부 다 지옥 갔습니다.
그 말은 인간이 지옥 가려고 악을 쓰기 때문에 종교적인 열심을 내고 있다는 뜻이에요. 본인 행함으로 구원 받으려고 아주 환장을 했기 때문에,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없으니까 맹탕이잖아요. 맹탕이니까 그 빈 공간을 뭐하느냐? 자기 행함으로 채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우울증이 도진 거예요. 점점 정신병이 심화되는 거죠. 자기가 자기를 놔주질 않았어요. 자기에게 매질하고 있는 거예요. 더 심하게 매질해서 더 열심히 해야 천당 갈 수 있어. 본인이 본인한테 책망하고 난리도 아니지요.
사실은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몰아세우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극단적인 모습은 뭐냐?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 갈 수가 없다. 그 말은 인간들을 다 끌어 모아서 그중에서 인간의 힘으로 천국 가려고 하는 가장 극한의 최고의 노력을 앞장서서 했던 자들이 누구다? 바리새인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이 그 짓을 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던 겁니다. 자기에게 온 주님을 죽였던 거예요.
그래서 구원은 찾아오기, 하늘나라에서 다가오는 겁니다. 멀리 있는 구름이 가까이 와서 먹구름이 되는 것처럼 하늘나라가 다가오는 거예요. 제가 왜 먹구름이냐? 하늘나라 멀리 있는 구름은 솜털같이 굉장히 낭만적이죠. 뽀송뽀송 아름답다. 하지만 정작 그 구름이 다가올 때는 먹구름처럼 비를 머금은 무거운 시커먼 구름이 돼야 지면에 가까이 올 수가 있어요. 실제로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그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올 때는 우리에게 무서운 분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이것을 영화에도 나와 있고 뮤지컬에도 있지만 이거는 엑스칼리버. 엑스칼리버가 뭐냐 하면 칼 이름이에요. A.D. 6세기 경 혼돈스러운 영국에 서로 왕이라고 우기는 그 시대에 유명한 전설이 있어요. 바위에 엑스칼리버란 칼이 꽂혔는데 이 칼을 뽑을 수 있는 자만 영국 전체를 통치하는 새로운 왕으로 등장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게 어떤 인간이 달려들어도 칼이 안 뽑혀요. 오직 순결한 자만이 뽑을 수 있다. 엑스칼리버입니다.
그런데 뽑고 싶어도 뽑을 수 없는 엑스칼리버를 저는 어디로 활용하고 싶은 거냐? 히브리서 4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11~13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엑스칼리버에요. 폐부를 깊숙이 긴 칼로 그냥 찔러버립니다. 그냥 찌르지 마시고 ‘팍’을 집어넣어서. 말씀이 팍 찌르면 찔린 말씀을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나쁜 행동을 해도 박힌 말씀은 내 힘으로 내 인생에서 뽑아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그 칼에 꽂힌 채로 구원이 돼요. 그래야 구원이 돼요. 그 말씀에 꽂힌 총괄, 총합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꽂힌 채로 구원 받아요. 그래서 그걸 십자가 안에 있다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해요. 나는 십자가 안에 있다. 십자가 안에 꽂혀있는 겁니다. 그 십자가 안에 꽂혀버리면 십자가 안에 뭐가 흐르느냐? 예수님의 피가 생명으로 흐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내 피와 내 살을 먹고 마시지 아니한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 다른 말로 내 칼에 찔려라. 내 칼에 찔려서 찔린 채로 있을 때에 거기서 우리 육신 흔히 생각하는 자아, 나는 뭐냐? 나라 하는 것은 그 칼을 제외한 나머지가 나가 돼요. 그러면 나는 뭐냐? 칼에 꽂힌 그 구멍, 구멍이 생기고 외부에서부터 뭔가 찔렸다는 흔적, 그 구멍이 있으니까 그 구멍 자체가 우리가 무의미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찔렀고 그 말씀 빼놓고 나머지 자아는 뭐냐? 의미 없는 거예요.
그 의미 없는 것을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뭐냐? 내가 난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따라서 은혜 빼버리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게 우리가 만들어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에요. 그런 경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이거는 찾아볼 필요 없어요. 여러분 너무 잘 알아요.
마태복음 16장 18절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름을 뭐라 하느냐? 너는 이제부터 시몬이라 하지 말고 내가 이름을 새로 지어줄게. 베드로라 하라. 반석인데 보세요. 반석이니까 돌 자체는 의미가 없어요. 반석은 돌인데 뭔가 시작점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반석, 돌 그게 뭐? 그 위에 뭐가 세워져야 될 시작점이 되는 거예요. 너는 반석에다가 나중에 사도가 되니까 주님의 말씀이 들어와 버리니까 아무 무의미한 것밖에 없는 반석 위에 주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모든 말씀을 다 이룬 거예요. 구약, 신약 모든 말씀을 주님께서 다 이룬 거예요.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어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지요. 자, 묻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알게 하면 나중에 죽어서 어디 가지요? 지옥 가지요. 마음속으로 간음하면 어디 가지요? 지옥 갑니다. 네가 오른손이 범죄 했는데 안 찍어버리면 지옥 가요. 모든 말씀은 지금 장난이 아닙니다. 허투루 한 말이 아니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내 말과 내 뜻을 다 행하지 않으면 지옥 가게 돼 있어요. 그런데 세리와 창기, 강도는 천국 갔잖아요.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천국 갔지요. 그들이 뭘 했는데 천국 갑니까? 분명히 산상설교에서는 말씀 일획일점이라도 안 지키면 지옥 간다고 나와 있거든요. 마태복음 5장에 나와 있는 말씀이에요. 제가 지어낸 말씀이 아니고.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켜내야 돼요. 만약에 안 지키면 호리라도 못 지키면 지옥 불에 가는 거예요.
그런데 세리와 창기,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에게 너는 의인이라.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네가 죄 사함 얻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천국 왜 갑니까? 뭘 지켰는데 천국 가요? 진짜 묻고 싶다. 그들이 뭘 지켰다고 천국 갑니까? 주께서 수많은 말씀을 주셨는데 그 말씀 중에서 하나도 지킨 게 없는데 천국 왜/어떻게 가느냐 이 말입니다.
그들의 바탕이 반석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무엇의 반석? 주께서 홀로 다 하셨다는 걸 보여주는 반석, 주님만이 생명이란 걸 보여주는 반석, 나의 의는 일점일획도 거기에 끼어들 수 없음을 보여주는 반석, 내 기도가 내 구원에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내 기도가 내 구원에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기쁘게 받아들이는 반석, 기도를 하던 전도를 하던 나는 의미 없음, 애를 키우든 돈을 벌든 의미 없음.
오직 그 사람들에게는 뭐냐 하면 오직 주님의 은혜만 증거하는 많이 용서받았기에 오직 주님만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랑의 나라가 아들의 나라요, 그 사랑의 나라가 천국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천국, 저 푸른 초원 위에 골프장 있고 분수 있고, 무슨 소리하고 있어. 지금 엉뚱한 것 하지 마세요. 내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그게 천국 아닙니다. 살림살이 나아졌습니다만, 서울의 저쪽 경기도 저쪽에 있는 사람이고, 공중 부양하는 사람이고.
천국은 살림살이 나아지는 게 행복한 곳이 아니에요. 내가 무의미함을 이미 째지도록 늘 웃고 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걸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임하면 너희들의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주께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무엘상 6장 이야기 계속 해보겠습니다. 어떻게 해서 웃사가 죽음을 맞이했는지 보겠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와 블레셋이 결승전 붙는 거예요. 언약궤 잡았다고 하다가 언약궤를 누가 이동하는가? 언약궤는 앉은뱅이 같아요. 스스로 휠체어 타고 움직이질 못해요. 사람이 언약궤를 놔두면 거기 그 도시에 저주가 일어나고, 이쪽에 놔두면 이쪽 도시에 저주가 임한 거예요. 재앙이 임한 거예요.
블레셋 지역 다섯 군데가 그랬습니다. 재앙, 이게 종교입니까? 아니지요. 이게 소설입니까? 아니지요. 이게 신화입니까? 아니지요. 실제지요. 실제도 되고, 실재도 되고. 현실 그대로에요. 언약궤는 뭐냐? 언약궤는 그냥 물체에요. 사물체. 물체 또는 상자. 나무 상자인데 여기서 뭐가 피어난다 했습니까? 나무 상자 있는 곳마다 그 지역이 재앙이 일어나는 거예요. 역대상 13장 봅시다.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과 의논하고, 2절에,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선히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저희와 함께 들어 있는 성읍에 거하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보내어 저희를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이렇게 돼 있지요.
자, 여러분 읽었으니까 물어봅니다. 왜 블레셋 사람이 언약궤 있는데 가는 곳마다 다섯 도시가 재앙을 만났습니까? 언약궤가 재앙이 왔습니까? 분명히 이스라엘에게는 재앙이 없었는데 블레셋 나라에 가니까 재앙이 왜 생겼습니까? 방금 읽었던 역대상 13장 2절과 관련돼 있습니다. 무엇이 블레셋 나라에는 없었던 거예요? 레위 지파가 없기 때문에,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없어 그래요.
언약궤는 웃사가 만지면 안 돼요. 누가 만져야 돼요? 제사장이 만져야 돼요. 제사장은 죄인 맞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제사장은 죄인을 모집해서 옷을 입히는 거예요. 그 옷이 무슨 옷이냐? 언약궤를 만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옷을 입혀요. 그 옷에 있는 장치는 언약궤를 만져도 살 수 있도록 제사장한테는 옷을 입힌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한테는 무슨 특이한 사항이 있어서 왜 제사장들은 언약궤 다루고 만져도 죽지 않는가? 제사장 복장에 새로운 요소가 뭐가 있느냐? 바로 언약궤 제사장은 오른쪽 귀뿌리, 오른쪽 손가락, 발가락에다 뭘 뿌리느냐? 피를 뿌립니다. 이 피가 무슨 피냐? 나 죽었습니다, 라는 것을 안수해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사인하기 위해서 제물 소나 양에게 또는 염소에게, 제사장은 소를 잡아요.
그 피를 자기가 내 운명을 너한테 부탁한다, 해놓고 부탁한 소가 하나님 제단에서 죽어요. 죽을 때 피를 남기고 죽어요. 그 피를 도로 이쪽으로 안수하고 피를 내 쪽에서 받는다는 말은, 피는 어떤 과정, 절차를 거쳤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 대신 죽었다는 절차를 거친 피를 자기의 오른쪽에다가 발라버려요.
그러면 제사장의 인간의 대표가 뭐가? 자기가 내세울 것은 자기가 아니고 피입니다. 나는 이 피 때문에 살았습니다. 이게 신약에 보면 피로 인하여 하나님이 받으시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피를 자랑하면서 십자가만 자랑하면서 드러내는 거예요. 이게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예수님의 피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아, 그런 뜻이에요.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오늘날 계약은 언약의 피로 세운 계약이라 돼 있어요. 마태복음 26장에도 나와 있고요. 내가 마지막 언약이니 피로 세운 언약이다. 이거는 종교교리도 아니고 신학도 아니고 현실 그 자체에요. 여러분들이 나중에 죽어서 천국 가거든 무엇 때문에 왔는지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교회 다녔기 때문에 새순교회 다니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게 아니에요.
어린양의 피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야기하면, “목사님이 보증해주시겠습니까? 천당 가고 싶어요. 이 땅에서 고생했으니까 영원히 이제 고생 그만하고 싶은데 진짜 피로만 된다는 걸 보장해주겠습니까?” 제가 보증해주는 게 아니고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보증해줘요.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 어디로 왔나, 물으니까 이 사람들 천국에 미리 온 장로들 있었거든요. 그런데 신입들이 들어왔단 말이죠. 이 신입들이 어디서 왔나 보니까 신입들에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어린양의 피로 옷들이 전부 다 희어졌어요. 성경에 어떻게 보면 참 쉽지요. 정말 쉬워요. 쉬운데 조건이 있어요. 뭐냐 하면 그 피는 나에게 구멍이 생겨야 돼요. 내가 예수 피를 믿는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엑스칼리버처럼 피가 내 의가 있는 자리, 주님 이것만큼은 가져가시면 안 됩니다, 그 지점에다가 주께서 엑스칼리버 칼로 꽂아버려요.
그 꽂힌 피의 칼은 고맙게도 내 힘으로 빼질 못합니다.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희미한 등불 밑에서 옥경이처럼 살고 또는 그것도 마찬가지거든요. 촌에서 올라와서 서울에 취직하려다 망해버린 인생, 어떻게 인생을 망친다할지라도 한 번 꽂힌 피는 내 힘으로 안 뽑아지는 걸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거지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이 있어요. 그 유명한 거지 나사로. 죽을 때도 몸 아파서 죽었어요. 병원에 한 번, 요양병원도 못 가고 자기 몸 핥는 개 옆에서 죽은 사람 있습니다. 이거는 파트라슈보다 더 불쌍해. 얼마나 불쌍합니까? 어릴 때 그 동화 보고 막 울었어요. 세상에 이렇게 불쌍한 개도 다 있구나. 그런데 인간이 더 불쌍해.
인간이 개보다 더 못합니다. 인간을 정신적으로 치료한 사람이 오은영 박사에요. 그런데 개 대통령이 따로 있어요. 개 대통령이 오은영 박사보다 더 낫습니다. 말하는 것, 상담하는 걸 보면. 개 대통령은 인간을 개로 보지만 오은영 박사는 사람으로 보는데 사람은 다룰 가치가 없어요. 자기밖에 모르는데 개보다 더 못하는 데 뭐.
그래서 구약에는 언약궤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냅니다. 언약궤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한다. 신약에는 놀랍게도 부활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주께서 성령이 줄 수 있는 권한을 받아요. 왜? 부활을 통해서 어느 쪽에 가있느냐 하면 전에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성령 주실 때 아버지 오른편에서 성령을 줬거든요. 그 위치까지 아들 되시는 주님이 하나님 오른편에 계시면 오른편에 놀러 가신 게 아니에요. 성령을 자기 원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그냥 놀러 오신 게 아니에요. 올 때 그냥 빈손으로 오는 게 아니고 다가오실 때 성령을 갖고 오시거든요. 이 성령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십자가로 환원시켜버립니다. 왜? 거기에 예수님이구원자가 될 수 있고 심판자가 될 수 있는 근거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기 때문에 성령은 반드시 부활로 가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증거하게 돼 있어요. 요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그분은 내가 한 것, 다 이룬 것에 대해서 증거한다. 성령이 성령을 증거하는 게 아니에요. 성령 받으라 해서 성령 받는 게 아니고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십자가를 증거하지요. 십자가 안의 십자가는 새 언약의 완성입니다. 내 살과 내 피가 완성이거든요. 그럼 모든 말씀이 언약의 완성이니까 모든 말씀의 완성이에요.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천국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곳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곳이어야 돼요. 왜냐하면 천국은 우리만 사는 동네가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의 패밀리 가족이 되어서 같이 살기 때문에 같이 기뻐하지 않으면 가족이 될 수 없어요.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들여보내주질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언약궤지만 신약 때는 뭐냐? 부활이에요. 부활의 특징은 아무것도 눈에 보이질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이야기해서 복이 복답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예상한 대로 행함으로 구원 받는 모든 것을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종교라는 것, 종교행위를 전부 다 하나님께서 거부해버리는 거예요. 복이 복답게 되기 위해서.
복은 일방적으로 주는 것, 주님의 일방적 다가섬으로만 구원 받기 때문에 거기에 인간이 반응해서 어떤 결심이나 호응 이런 것은 다 거부해버려요. 하나님이 줘도 우리가 안 받으면 구원 못 받지, 그런 경우는 인간이 지어낸 거고요. 그런 경우는 없어요. 칼로 쑤시는 데 뭘 받고 안 받고 어디 있어요. 말씀으로 쑤셔버려요. 칼에 꽂힌 채 구원받는다 말이에요. 일종의 꽂이에요. 닭 꽂이의 한 가지에요.
그 언약의 피가 합격증입니다. 합격증 같은 거예요. 광화문에서 미국 엘에이 방송국에서 기획을 해서 한 백 명이 떼춤을 추는데 미리 한국에서 예선전을 한 거예요. 한 사오백 명 몰렸어요. 광화문에서 떼춤 추는데 리아킴 해서 우리나라에 스트릿댄스하는 여자분들 있어요. 유명한 사람들 해놓고 그중에서 미국에 데려갈 사람과 탈락할 사람을 가리는데 그들에게 카드를 하나씩 줘요. 카드 표지는 색깔 똑같아요. 카드 열어서 빨간색 나오면 탈락, 녹색 나오면 합격이 되는 겁니다.
그때 빨간색 나오면 탈락이에요. 봉투 열어보기 전에 얼마나 아슬아슬하겠어요. 그러나 그거는 세상에서 기독교 종교에서 만들어낸 그러한 거예요. 지금은 모르지만 천국 가면 알겠지. 아니에요. 벌써 알아요. 내가 봉투를 열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미 안 사람이에요. 빨간 약 줄까, 파란 약 줄까? 맨날 영화에 보면 007이나 누굽니까? 나 또는 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 마지막에 아슬아슬하죠. 시한폭탄인데 빨간 선을 끊어야 되는지 어쩔 줄 모르다가 겨우 사는 것 있잖아요.
그런 건 진짜 하나님 현실세계에는 없어요. 다 무의미한 인간에게 무슨 선택권을 줍니까. 어떤 사람이 요새는 그런 질문 없는데, 목사님 자유의지는 어떻게 됩니까? 옛날엔 어지간히 질문들 했어요. 우리의 자유의지는 있다는 사람, 없다는 사람 있는데 자유의지는 어디 있습니까? 그 질문 참 많이 들었어요.
여러분 자유는 인간에게 고독입니다. 고독은 지옥이죠. 자유 줄 테니까 고독에 한 번 미쳐볼래요?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의의 종이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8장에선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게 진리의 종을 바로 자유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자유란 나에게로 몰린 마음대로가 아니라 어디로부터의 탈출을 자유라 해요, 성경에서. 애굽에서 나온 걸 자유라 합니다. 그러니까 자유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갇혀있다는 걸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자유라는 게 의미 있지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