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21125a 다니엘9장 24절(두 종류의 시간)-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21125a 다니엘9장 24절(두 종류의 시간)-이 근호 목사
p.229 【4. 70년 포로 기간의 의미】왜 70년이냐? 7년도 아니고 14년도 아니고 왜 70년이냐? 포로 기간을 왜 정해놨는가, 하는 그 문제죠.
원래 에덴동산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에덴동산에 시간 자체가 없어요. 시간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죠. 모든 창조가 완성이 되는 상태가 되면 안식이죠. 안식은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다. 그러면 시간이 없다는 것은 흐르지 않는 것이고 아예 없는 거죠. 흐를 것도 없죠.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죄가 발생되었다. 죄가 발생되었다는 말은 낙원에 악마의 영향력이 작용했다 이 말입니다. 악마의 힘이 주입되었죠. 죄가 주어지면 그다음부터는 시간이 흐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나중에 죄의 문제가 처리되면 시간이 멈추기 때문에 그래요.
처음 안식의 때, 완성의 상태에서는 시간이 멈췄다. 그러면 시간이라 하는 것은 이미 완성될 경우에는 시간이 필요 없는데 죄가 주어졌으니까 완성이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죄를 빼내야 되니까. 죄가 들어왔으니까 시간이 흐르고 그럼 이 시간은 악마를 체포할 때까지만 시간이 흐릅니다. 체포할 때까지 시간이 흐르는데, 그럼 체포를 어떻게 하느냐?
두 종류의 시간이 이제 흐르게 돼요, 두 종류의 시간. 두 종류의 시간인데 하나는 인간의 몸으로 느끼는 시간과 또 하나는 미지의 몸, 주님의 몸이죠, 주님의 몸에서 나오는 시간, 이 두 가지의 시간이 서로 싸움을 벌이게 되는 겁니다. 시간싸움을 벌이게 돼요.
시간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시간에 두 종류가 있을 때나 싸움이 되겠죠.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두 종류의 시간이라는 것이 없고 하나의 시간밖에 없어요. 시간이라는 것은 딱 하나의 시간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감지하고 있는 시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거야’ 심 수봉이 불렀던 노래에 나와요.
적어볼게요. 어제에요, 어제.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거야. 자, 어제 오늘 내일, 시간 느끼죠. 시간을 느끼는데 시간에 목적이 있죠. ‘행복할거야’는 누가 행복하죠? 나죠. 내가 행복하다면 당신 땜에, 당신이라는 것은 나 말고 타인인데 타인은 내 행복을 위해서 종속되고 나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죠.
그러면 이 전체 시간은 누구를 지향합니까?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시간이 흐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시간만 주어진다면 나는 행복할거야’. 지금은 내가 불행하지만 좀 더 시간만 주어진다면 스터디카페 괜찮게 번창할 수도 있을 거야. 누가요? 내가. 이게 나 중심의 시간관입니다.
나 중심의 시간관은 싸움이 없죠. 경쟁이 없죠. 왜냐하면 이 시간이라는 것은 오로지 나 중심으로 느끼기 때문에 나 말고 다른 몸에서 나온 시간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해요. 그런 게 있나 싶죠. 시간 속에서 인간들이 군집들이 모여서 시간은 고정적이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우리를 곁눈질하지 않고 무심히 흘러가고 우리는 그 시간에서 나는 행복할거야, 그러면 끝나는 문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에게는 안식이 중요할까요, 자기 행복이 중요할까요? 자기 행복이 더 중요하죠. 한번 보겠어요. 안식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만족이죠. 그런데 행복이라는 것은 누구 만족이냐 하면 나의 만족이죠, 나의 만족. 안식은 하나님의 만족인데 행복은 나의 만족. 이 둘 사이에서 경쟁, 다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안식을 이야기하죠.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해선 관심도 없어요. 모든 것의 의미가 나로부터 나오고 나로 돌아가야 되니까. 그러니까 이 둘 사이에 경쟁과 다툼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은 역시 하나님편이고 그럼 하나님과 다투게 됐다는 이 말은 행복, 나의 만족을 위한 시도를 어느 쪽에서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안식에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신경 쓰지 말라고 부추기는 어떤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겠죠.
행복, 나의 만족에 관심 두게 하는 것은 그 세력, 악마가 의도한 바에요. 악마가 인간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너는 행복하라. 너는 행복하라, 에서 악마는 앞에 빼버리고 남는 것은 ‘나는 행복해야 되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악마한테 사기당한 거예요, 사실은. 악마가 내심 노리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해서 못 보게, 거기로 얼굴 돌리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악마의 목적이잖아요. 종교가 없는 인간은 자기한테 사기당하고 있고요. 종교가 있는 인간들은 종교한테 사기당했어요. 이래도 인간은 사기당하고 종교가 있든 없든 인간은 사기당하고 있는 그런 형편에 있습니다. 두 개가 서로 다투고 있는 입장에서는요.
인간은 다툼, 경쟁 이것을 도외시해요.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죠. 하나의 목적은 오직 자기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그 일념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70년 포로 기간의 의미라 할 때 70년 포로 기간에 포로 잡힌 자들이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달라서 여기에 주의 이름이 들어왔습니다, 주의 이름이. 주의 이름이 들어왔다는 말은 로고스(logos), 하나님의 계시라 합시다, 말씀인데 요한복음 1장의 말씀, 계시가 실린 시간, 계시가 담긴 시간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주의 이름에 계시가 담긴 시간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와버리면 이 계시가 담긴 시간은 아까 강의 초반에 이야기했듯이 목적이 있어요.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4장에 보면 잘 나와 있어요. 안식의 때가 남아있는데 거기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 있다. 이렇게 믿음에 화합하지 못해서 안식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뭐냐 하면 바로 광야에서 갈렙과 여호수아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탈락했다는 그걸 예로 들어서 이야기해요. 갈렙과 여호수아에서 갈렙과 여호수아가 내다본 것은 하나님 계시의 시간은 도착해야 될 목표가 하나님의 안식에 있는 거예요.
심지어 가나안 땅에 아무리 토착민들의 덩치가 크고 강력한 무기가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자기가 시작한 하나님의 계시의 시간의 최종성은 어떠한 방해도 뚫고 경쟁에서 이기고 그냥 돌파한다, 이게 갈렙과 여호수아가 생각하는 시간관인 반면에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행복하고 편하게 사느냐, 자기 시간성이 있기 때문에 토착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우리는 불행해지고 비극적이 된다는 거예요. 전쟁하기 전에 이스라엘 내부전쟁이 일어나버린 거예요, 내부전쟁이.
어느 시간을 생각했느냐의 전쟁이 일어난 거예요. 내가 행복하고 편하게 사는 쪽으로 가는 그런 시간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시간인 하나님이 안식하는 그 최종적 목표로 달려가는 시간이냐 하는 거예요.
두 개의 기관차가 있는데 한쪽은 하나님의 계시가 실린 시간의 기차가 있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계시가 없고 거기 탄 탑승객들의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는 기차가 있다 이 말이죠. 그 기차가 가는 방향이 서로 완전히 달라서 한쪽은 천국이라면 다른 한쪽은 지옥으로, 서로 상반되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시간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렇게 한다면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 간에 작용하는 시간의 흐름이 달라요. 지금 여기 p.229에 나오는 70년 포로기간, 70년 포로 이건 다른 나라 포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포로 잡혔다는 이것이, 이스라엘이 포로 잡힘 자체가 하나님의 시간이 실린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계시가 뭐 이렇게 지키고 이 계시가 아니라 그들의 역사 속에 경험하고 있는 그들의 모든 모습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로 사용당하고 있는 거예요.
70년,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71년도 아니고 69년도 아니고 딱 70년으로 포로 잡혔다는 것, 이것은 과거→현재→미래로 가는 게 아니고...... 이건 인간들의 생각이죠. 과거는 한때 있었고 현재는 유일하게 있고 미래는 지금은 없지만 우리가 그렇게 되고 싶다 기대한다, 이게 인간의 몸에서 나온 시간이거든요. 마귀가 우리 인간에게 느끼라고 준 시간이란 말이죠. 그러면 이 미래는 열려있습니까, 닫혀있습니까? 열려있죠. 시간이라는 건 열려있죠.
그런데 70년 포로,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보고 뭐 사전에 협의했습니까? 물어봤습니까? 안 그러면 이스라엘 너희들이 정해라, 이렇게 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안 정했어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했습니다. 그 정한 것이 역대하 36장 21절, 누가 한번 읽어봅시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 하나님의 계시죠. 그런데 그 계시의 목적이, 70년을 정한 취지가 이스라엘의 행복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자유를 얻는 게 아닙니다. 뭐냐 하면 안식입니다, 땅의 안식. 하나님의 땅이 안식을 하는데 비어있어야, 황무하라 하니까 텅텅 비어있는 거예요, 70년이 비어있어야 비로소 이 안식의 땅은 제대로 처음 창조 때처럼 안식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 안식을 충만할 수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기 결정이고 자기 확정입니다. 이 계획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하나님 계획이지, 인간이 여기서 의견을 개진하거나 끼어들 수 없어요.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당하는 거죠. 70년.
그럼 이건 뭐냐? 인간하고 관계없고 토지를 안식케 하는 겁니다, 토지. 그러니까 여기서 갑자기 하나님의 70년 안식에서, 인간보다 시간이 우선이고 시간보다 공간이 우선이고 공간보다 하나님의 안식이 우선이다 이렇게 되겠죠.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