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2월 14일 교회를 넘어서 12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1
대구 2월 14일 교회를 넘어서 12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1
이름 : 이근호(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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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220.♡.176.150)
09-07-04 15:25
대구050214교회를넘어서12그리스도의몸으로서의교회1
[05 대구강의 2] - 교회를 넘어서 12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1
05,02,14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성전도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가?
이 강의를 녹음으로 듣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난 시간에 한 것을 복습을 좀 하고 지나가야 하겠는데, 배터리가 떨어져서 지난 시간에 강의한 것이 그만 녹음이 되지 않아서 말이다. 그들에게 강의의 흐름이 끊어지면 곤란하니 말이다.
지난 시간에 강의한 것을 한번 요약을 해보면, 어떤 분이 저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나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율법이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 기능이 있다고 하면, 성전도 역시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 기능이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래서 제가 다음과 같이 답변을 했는데, 즉 성전을 짓든 말든 그 성전에 대한 모든 내용들이 이미 모세언약에 보면 성막 중심의 제사법이 나오는데, 그러니 성막을 지으라는 아이디어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방주를 만들라는 것도 하나님의 아이디어이고, 또 놋뱀을 만들어서 쳐다보라는 것도 하나님의 아이디어이고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성막을 지어서 성막에서 제사를 지내고, 거기서 제사장이 활동하는 그 모든 제안들도 다 하나님에서 나온 것인데, 그 당시 풍습이 어떻고 문화가 어떻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말이다. 그것은 다 하나님이 직접 제안했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왜 말씀을 지키라고 하셨는가?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점은, 이렇게 하나님이 제안했기 때문에 우리가 따르기만 하면 그대로 하나님의 뜻에 합치가 된다고 여기는, 바로 그러한 발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한 것은, 그 지키는 와중에서 비로소 감추어졌던 인간들의 죄가 하나 둘씩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지키겠다고 하는 순간부터 그렇게 풀어져 나온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기능인데, 이렇게 율법 속에 이미 성막과 제사의 기능이 모두가 다 들어있으니, 그러므로 성전을 지었다고 하는 인간의 활동자체도 어떠한가? 역시 인간의 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전도 당연히 인간의 죄를 지적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렇게 “인간의 죄를 끄집어낸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새삼스럽게 죄를 짓는 쪽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사람들이 자꾸만 만들어서 이해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저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저는 분명히 ‘이미’ 인간 속에는 죄가 들어있고, 그 죄를 끄집어낸다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그런데도 상대방은 새삼스럽게 죄를 지어야 하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간주하지 않고 시작하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죄인임을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겠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창세기 3장뿐만이 아니라,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의 지배 아래에 있다” 라는 것도 거부한다는 것이다.
◈ 어떤 이단과의 대화 !!
한번은 어떤 이단과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가 집회에 참석해보면 목사님들이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 그렇게 성경말씀을 지키라고 강조하는데, 그런데 이 목사님은 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 자기는 도저히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갈라디아서 3장 말씀을 펴놓고 이야기하기를, “지금 당신은 목사가 설교시간에 지키라고 해서 말씀을 지킨다고 했는데, 여기 22절에 보면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라고 했는데,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킵니까?” 라고 했다는 말이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그러니 이것은 말씀을 믿는 것이 곧 지키는 것인데, 즉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지킨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것을 있는 현실로서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도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라고 하는데, 그러니 항상 십자가를 눈앞에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죄인의 특징은, 자기가 죄인임을 몰라 !!
그러니 그 이단집단에서는 이런 것을 다 요리조리 피해가고, 인간의 재주를 발휘하는 것만 가르쳐서 사람들의 경쟁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이다. 왜 그것이 쉬운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인데, 하지만 죄인의 특징은 아이러니 하게도, 자기가 죄인임을 모른다는데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 죄를 모르는데, 물론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은 알지만 말이다. 여기서 ‘부족하다’ 라는 것은, 여기 이렇게 자기가 도달해야하는 선, 즉 레벨이 있는데, 그 레벨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부족한 부분만을 채우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소위 ‘성화론’ 이고 말이다.
◈ 하나님, 제가 열심히 잘 해보겠습니다 ??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너는 죄인이야” 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제가 한번 잘 해보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잘해보라고 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십자가를 앞세워서 이야기하는 것은, 잘해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점이 여기에 있는데 말이다.
하나님은 지금 죄인임을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가 앞으로 잘해보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힘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서 한번 잘해보겠다고 한다는 말이다. 성령을 받은 인간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과연 하겠는가?
◈ 성령이 오기 전까지 인간들은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 !!
그렇게 구약의 긴긴 역사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오순절에 성령이 오기 전까지,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지막 때에 말세의 영이 오기 전까지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동안 그렇게 인간들은 자기들이 죄인임을 모르고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 살아온 작자들이, 자기들이 죄인임을 알려주는 율법과 만났을 때, 그들은 어떤 양상과 태도들을 가졌는지, 그것을 구약성경에서 ‘쫙’ 보여주는데, 그것이 결국은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우리를 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예수님을 손가락질을 하고 그만 살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는 말이다.
◈ 그런 와중에, 성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와중에서 성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학개와 스가랴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즉 하나님께서는 일단 성전을 지으라고 허락을 해놓고는, 그 성전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요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요리를 하는가? 성전을 지으라고 해놓고, 그 성전을 훼파함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진짜로 백성들과 만나고자 하는 그 지점은 인간들이 손으로 지을 수 없는 성전이라는 점을 유도하는 식으로, 학개와 스가랴에서는 그런 성전 개념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 하나님 : 성전에서 죄 용서를 한다고 했는데, 맞지?
* 백성들 : 예, 맞습니다.
* 하나님 : 그런데 그 성전이 깨어졌다는 것은, 너희들이 성전의 관리를 잘못했다는 말인데, 맞나?
* 백성들 : 잘 모르겠는데요.
* 하나님 : 너희들이 거룩한 성전의 의미를 호도하고, 기계처럼 죄를 씻는 장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 백성들 : ???
* 하나님 : 그렇게 기능적으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자동으로 죄가 씻어진다고 여겼지? 맞지?
* 백성들 : ???
◈ 새 언약의 시대가 오면, 이미 거룩해져 !!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의 거룩함의 의미를 모르고,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작업인데, 그런데 그것을 그만 인간의 작업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에스겔서에서는 그것을 마음속의 할례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는데, 그러니 인간의 능력을 이미 넘어섰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때, 즉 새 언약의 시대가 오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 자체가 이미 거룩하게 되어버리는, 그러한 상태가 되는데, 그 이전까지는 거룩하게 되려고 애를 쓰는 상태이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지막 영이, 즉 새 언약의 영이 오게 되면, 이미 거룩해져버린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는 발휘될 수 없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데, 그것은 전혀 온전한 윤리와 도덕이 아니라,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즉 하나님의 주어진 긍휼과 자비가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비만 자랑하고, 자기는 죄인임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새 언약 체제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 예레미야 - 과거 출애굽 때와는 달라 !!
이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과거 출애굽을 할 때의 법과는 다르다” 라고 말이다. 즉 옛날에 출애굽할 때 주어진 그 율법, 즉 십계명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십계명과는 다르다고 할 때, 그 십계명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왜 부자청년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지킨 십계명을 자랑하다가 그만 혼 줄이 나서 도망을 치고 말았는데, 그러니 십계명을 지키는 방식도 그 십계명의 범위 내에서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십계명을 지키는 방법도 역시, 그 십계명을 주었던 시점에서의 인간의 죄와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신약의 성령의 법과는 다르다는 말인데, 십계명은 완벽하게 그것을 지켜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바깥에 문자로 있는 십계명이기에 말이다. 그러므로 그 문자를 현재 자기가 지니고 있는 마음의 속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수준까지 지켜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 - 그러니 안 되잖아 !!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그것이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즉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라는 계명을 인간이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십계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지켜야 돼” 라고 했을 때, ‘이런 마음’이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마음 자체가 수준미달이라는 말이다. 십계명에 하자가 발생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준 것인데, 그래서 에스겔서와 같은 경우에는, 새로운 법이 오게 되면, 이미 마음속에 거룩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러니 이제는 자기가 무엇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있는 신에 의해서 지킨다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미 자기 마음속에 있는 성령에 의해서 성령이 자기 말씀을 성취해나가는, 그러한 과정 속에 성도는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자가 바뀌는데,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체자가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성령으로 말이다.
◈ 이근호 목사는 영지주의 ??
그런데 제가 이렇게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성령이 지킨다” 라고 하니, 어떤 사람은 저를 보고는 “이근호 목사, 당신은 영지주의자가 아닌가?” 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뭐 신영지주의가 어떻고 하면서 용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나라도 배우려면 제대로 배워야 하는데, 그냥 껍데기만 대충 배워서 말이다. 개인적으로 영지버섯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다(ㅋㅋ).
하지만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증거하게 하시는 분이 따로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도 영지주의자인가? 그렇지 않은가?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 10: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마 10:18)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마 10:19)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여기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을 한번 찾아보자.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어떻게 받는고 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렇다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과의 차이점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뒤에 보면 나오는데, 만약 사람의 말 같으면 그냥 지키면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사람의 말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지키는 여부에 의해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예 우리 속에서 우리 마음이 아닌, 하나님의 자기 마음대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이것이 과연 영지주의인가?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20절에서 말씀하신, 즉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라는 것과도 같은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말씀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고 하니, 놀랍게도 성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성령으로, 죄인된 몸이 성전으로 !!
다시 말해서, 이 성전은 바로 죄인이었던 몸이었는데 주님의 성령으로 인해서, 즉 죄악된 것을 도리어 거룩한 것으로 이전시키는 그 주체자가 바로 성령으로 인해서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성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혀 성전이 될 것이 아닌데, 즉 전혀 성전 근처에도 가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파괴되고 부서져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직접 개입해서 거룩한 성전으로 간주해서 주님에 거기에 머물러 있으니,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자비이고 은총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어떻게 윤리와 도덕이 나올 수 있느냐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성전개념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전체를 통해서 말이다.
◈ 다시 정리를 하면 !!
다시 정리를 해보면, 구약전체는 율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물론 율법은 죄를 지적하기 위함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성전이 나오는데, 성전의 모든 내용이 모세언약에서 다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세언약은 출애굽 당시의 준수해야하는 법칙이기에, 즉 인간이 더러운 마음으로 바깥에 있는 거룩한 말씀을 지켜내야만 복이 오는 관계성 속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전을 짓고 제 아무리 제사를 드리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쪽에서 거룩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악한 것까지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의 레벨은 마지막 영이, 즉 종말의 영인 성령이 오셔야만 가능한데, 그러니 “왜 마지막 때인가?”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성경 전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마지막이어야 하는가? 이 ‘마지막’ 이라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의미인데, 이미 모든 것은 구약 때 다 해보았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모든 몸부림과 만무림은 이미 다 쳤다는 것이다. 만약에 거기서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발견을 했다면, 왜 굳이 주님이 오시고 성령이 오셨느냐는 말이다. 이미 안 된다는 것을 공포하고 선언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이다.
◈ 요한복음은, 성령의 차원에서 십자가를 !!
그렇다면 성령은 누가 가지고 계시는가? 성령은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데, 이 요한복음을 꿰뚫는 비법(?) 가운데 하나가 성령의 차원에서 본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이 다 십자가이지만 말이다. 공관복음서,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는 달리 이 요한복음은 성령의 차원에서 십자가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빠트리면 요한복음이 전혀 해석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요한계시록 3장 34절에서 36절을 한번 보자.
(요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성령은 예수님이 독점 !!
여기 34절에 보면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누구에게 준다는 말인가? 예수님에게 준다는 것인데, 그러니 성령은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35절에 보면,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라고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만물을 다 손에 쥐고 계시니 참 대단하고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36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오는데, 즉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라고 말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아들에게 만물을 주시고, 그 아들이 만물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소유하고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영생을 줄 자와 주지 않을 자를 임의로 결정하는데 까지 그 범위가 넓혀지고, 포함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아까도 말했지만 오직 예수님만을 성령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이 성령을 가지고 계시는 것과 우리가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것이 참 중요한데, 성령은 바로 마지막 때에 오신 영이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 인간들이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그게 허사로 돌아갔는데, 즉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다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다 지옥에 가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지옥으로 가야될 인간이 천당에 간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말이다. 지옥에 가야될 놈이 지옥에 가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성령을 독점하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너는 천국에 와!” 라고 하면서 성령을 주시면, 그렇게 당첨이 된 자들만이 비로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자들은 다 지옥이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제가 계속해서 강조하지만, 성령은 마지막 영이고, 그 성령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시기에 말이다.
◈ 초코렛을 좀 줄래? - 메롱 ??
예를 들어서, 길에서 아이가 맛있는 초코렛을 먹고 있는 좀 달라고 하면 주겠는가? 안 준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초코렛은 자기가 독점한 것이기에 말이다. 이와 같이, 지옥에 갈 놈들이 예수님에게 천당에 좀 보내달라고 애원을 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천국에 들어간 놈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물론 년도(?) 없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천국은 오직 예수님께서 보내주셔야만 가는 곳인데, 우리 인간들의 희망사항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의 뜻에 의해서 말이다.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해서, 즉 그 열심히 기특하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가? 예수님에게 실컷 찜빠(쿠사리?)만 듣고 돌아갔는데 말이다. “아니, 이게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면서도 이것도 모르나?” 라고 말이다.
요한복음 6장과 17장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에게 속한 자들은 따로 있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 자들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만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데,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이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직을 하고 가게에 파리가 날리고 대학에 떨어져도 괜찮은데, 예수님에게 합격된 것보다, 아니 시험을 치지 않았으니 합격은 아닌데, 즉 예수님에게 당첨된 것보다 더 큰복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 때 종말의 영이 왔을 때 말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한국교회는 일종의 사교집단이고 ‘계’ 모임이지, 결코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계’ 모임은 언젠가 사달(깽판?)이 나게 되어있고 말이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그런 친목모임 이상의 의미를 두기가 정말이지 곤란하다는 것이다.
◈ 학개와 스가랴 - 죄를 가리는 방편으로서 말씀이 !!
아무튼 학개와 스가랴에서는 인간 쪽에서 성전을 만들고 자꾸만 제사를 드리니까, 사람이 그런 것에 관심을 두고 투자를 하게 되면, 미련이 남아서 그것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도 주님의 전략 가운데 하나인데, 즉 인간들의 자기 죄를 가리는 방편으로서 말씀이 동원된다는 것을, 그런 것을 성전과 더불어서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좀 알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자기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즉 자기 정당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들은 말씀대로 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업적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성전도 세우고, 제사장도 세우고, 선지학교도 세우고 말이다. 바로 그러한 것들이 인간의 죄를 가리우는, 즉 창세기 3장의 무화과나무 잎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신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인간들은 이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 어떻게 ‘예수님’ 이라는 홑이불만 달랑 ??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가리개는 그런 무화과나무 잎이 아니라 예수님 그 자체인데, 그러니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업적에 예수님을 덧붙이면 붙였지, 그런 자기 업적을 버리고서 ‘예수님’ 이라는 홑이불만 걸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기가 행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어떻게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의구심이 든다는 말이다.
하지만 세리와 창기는 어떠했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았는데, 그들은 내놓고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 이라는 홑이불만 걸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든 비싼 양탄자도 걸치고, 또한 오리털 이불도 걸치려고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코 천국에는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 학개와 스가랴의 성전, 에베소서의 십자가 !!
그러므로 이 학개와 스가랴에서,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신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런 성전은 반드시 인간의 죄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죄를 기초로 해서 성전이 되는데,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바로 ‘십자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에베소서에서 이때 십자가의 의미는, 예수님이 택한 자의 죄를 대신해서 졌다고 하는 죄인으로서 모습이란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서, 이제는 그런 부활의 능력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부활의 몸을, 즉 그리스도의 몸을 두고서 바로 ‘교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라는 말이다.
◈ 부활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
이렇게 보면 교회라는 것은 무엇인가? 부활의 능력이 머리로서 작용하는 곳이 교회라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데, 죽은 자도 살리는, 즉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마구 작렬하는 곳이 교회라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의 능력으로 제 아무리 교회에 와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활의 능력이 아니라면 말이다.
(엡 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엡 1: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 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러므로 교회에 오면 안 되고, 교회가 되어야, 즉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만약에 교회에 온다고 하면, 그것은 예배쇼를 보는 관람하는 관객으로 오는 것이지, 결코 그리스도의 몸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이런 그리스도의 몸이 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죄인이고,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새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자들의 모임이 부활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다윗언약에서도 그런 낌새가?
종말 때의 새 언약이 이러하다고 하면, 그렇다면 다윗언약에 있어서도 그런 낌새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당연한데, 다윗언약에 그러한 뉘앙스가 있다는 것이 지난 시간에 했는데, 그만 녹음이 되지 않아서 전달을 하지 못했는데, 다시 반복을 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다윗을 통해서 지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막상 성전은 솔로몬이 짓는다는 것이다. 이 솔로몬이 무슨 증거를 가지고 있는고 하니까, “다윗은 죄인이었다” 라는 흔적을, 즉 바로 그러한 유일한 증거물이 바로 ‘솔로몬’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낌새가 나오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신약에서는 십자가 위에서 교회가 세워지는데, 즉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동일한 십자가의 능력이 임한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이미 구약에서 영원한 구원을 보장한 집단이 있다면 ‘다윗가문’ 인데, 다윗가문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집이란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계시는데, 이 하나님의 집은 사람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으로 지은 집인데, 그것이 곧 솔로몬이 속한 다윗가문이라는 말이다.
◈ 갈라디아서의 ‘두 언약’ !!
그렇다면 솔로몬의 혈통인가? 솔로몬의 혈통은 아니고, 솔로몬에게 작용했던 하나님의 자비의 계통이라는 것이다. 즉 혈통이 아니라 자비라는 말이다.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는 ‘두 언약’ 이라고 하는데, 하나의 언약이 육에 있다고 하면, 다른 하나는 약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육의 혈통과 약속의 혈통은 서로 섞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각각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육은 먼저 앞선 육이 있다면 거기서 육이 나오기 마련인데, 하지만 약속은 육이 있다고 약속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어머니, 즉 이 지상에는 없는 어머니라는 것이다. 지상의 어머니에게서 나오는 것은 어디까지나 육이지만, 그러나 지상에 없는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 어머니인데, 그것이 바로 ‘놀랍게도 예루살렘’ 이라는 것이다.
◈ 예루살렘은, 다윗언약의 고향 !!
그렇다면 이 예루살렘이 무엇인가? 예루살렘은 바로 다윗의 고향, 혹은 다윗언약의 고향이란 말이다. 즉 다윗을 다윗되게 용서하신 언약의 고향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디로 오시는가? 다윗언약의 계통으로 오시는데, 즉 다윗의 혈통을 지니면서도 다윗의 혈통이 아닌 분, 즉 영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이다.
(갈 4:22) 기록된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 다윗의 혈통인가? 부활의 영인가?
제가 이야기를 하고도 참 어려운데, 사실 사도바울이 얼마나 어렵게 이것을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혈통으로는 육으로 다윗의 혈통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들이 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부활의 영으로만 아들이 되는데, 성도에게는 양자가 되고 말이다. 즉 아들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초창기에 다윗 속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함께 다 들어있는데, 그렇게 겹쳐져 있는데, 그것이 확연히 드러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인데, 거기서 분명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은 죽어야 하고 영은 살아야 하는데,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은 영과 관계가 있지 육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새 언약의 낌새가 다윗언약 속에 이미 들어있었다는 말이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다윗이 밧세바와 관계를 한 것은 잘한 것이지 않습니까?” 라고 엉뚱한(?) 질문을 하는데, 그것은 다윗이 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잘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고만 쳤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잘되었다고 해서 죄를 지은 것을 두고 옹호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왜 우리는 자기 다리를 슬쩍 집어넣는가?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데, 즉 처음에는 나쁘다고 여겼는데 결과적으로 좋게 되었을 때, 그렇게 되니 처음에 빼었던 자기 다리를 하나 슬쩍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는 “나도 잘했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아서 예수님이 죽고 다시 부활하시니, 그렇게 결과적으로 잘 된 것이기에, 그래서 가롯유다도 공로자가 아니냐고 시비를 거는 인간들도 있다는 말이다. 인간들에게 도무지 이런 사고방식이 멈추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의’ 이고 말이다.
그렇게 전화위복이 되었으면, 그렇게 하신 분은 주님이고 그분의 자비 덕분이지, 그러한 전화위복에 우리 인간들이 왜 끼어 드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그렇게 전화위복으로 만드신 주님 덕분이 아니냐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원수가 된 자이고 죄인인데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자기 공로를 찾아내려고 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라는 말이다.
◈ 다윗이 다윗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공로 !!
바로 그러한 점을 철저히 보여준 것이 다윗언약인데, 즉 다윗은 기껏해야 남의 여자와 간통하고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그 여자의 남편까지도 죽여버렸는데, 그야말로 흉악범인데 말이다. 만약에 우리야의 가족들이 있었다면 아마 평생 다윗에게 칼을 갈았지 싶은데 말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라고 하면서 다윗의 그 죄상을 다 드러내려고 했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다윗이 우리야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러한 상황에서 다윗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내가 간통하기를 잘 했지” 라고 하겠는가? 그러면 밧세바는 뭐라고 하겠는가? “그때 내가 옥상에서 목욕하기를 참 잘했지” 라고 할 것인데, 그런 말도 안 되다는 상황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 나는 하나님의 동업자 ??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즉 “나는 전혀 정당하지 못했는데, 주님이 개입하셔서 전화위복이 되었고, 그렇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으니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나도 동업자로 열심히 했잖아” 라고 한다면, 참으로 캄캄하다는 것이다. 즉 그런 사람은 당장 지옥에 가도 전혀 할 말이 없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한 것이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강의내용이고, 즉 다윗언약에도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습이 이미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나니까, 지난 시간에 녹음을 하지 못한 것이 좀 덜 미안해지는데, 이것도 ‘자기 의’ 인가?(ㅋㅋ)
◈ 이근호는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목사 ??
오용익 목사님의 사모님인 구자근 양의 글을 보면 참으로 표현이 멋있는데, 혹시 모두들 보셨나요? 한번은 제가 광주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떤 집사님이 말하기를, “이근호 목사는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목사이다” 라고 해서, 제가 무슨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멍하게 앉아 있은 적이 있는데, 아니 사람을 앞에 앉혀놓고 그런 소리를 하니 뭐라고 하겠느냐는 말이다. 얼굴만 벌겋게 되어서 그냥 앉아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구자근 사모님이 어떻게 적어놓았는고 하니까, “실로암 교회의 집사님 한분이 이근호 목사가 뻔히 죄인인 줄 알면서도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목사라고 말했는데(ㅋㅋ)” 라고 하면서, 아주 글을 솜씨가 나게 제대로 잘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글의 제목이 ‘도파민의 유혹’이지 싶은데 말이다. 꼭 한번 읽어보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글을 쓰면 상대방을 속이는데, 그러니 구자근 사모님은 전혀 그렇지 않고 솔직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 쓴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글을 읽어보면, 다른 분들은 기가 죽어서 글을 아예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물론 그런 것도 이겨내어야 하고 말이다.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
이제 교재 275페이지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살펴보겠는데, 그리스도의 몸은 아까 강의를 하면서 무엇을 전제로 한다고 했나요? 이 세상 죄를 지고 죽었던 몸이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하는데, 그렇게 해야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데, 물론 그리스도가 아니니 몸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그런 취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담고 있어야 그리스도의 몸이고, 메시야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지키지를 못하고,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놈들은 전혀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당연히 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데, 참 아이러니한데 말이다. 성령을 마시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없는데,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이 마땅히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 자체만큼 비복음적인 것도 없다는 말이다.
일단 고린도전서 12장 12절과 13절을 한번 보자.
(고전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 사도바울은 왜 몸과 지체를 구별하는가?
여기에 보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라고 하는데, 사도바울이 참 어렵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몸과 지체를 나누어서, 우리를 몸이 아니라 지체 파트에다 두느냐는 것이다. 그냥 몸의 파트에다가 두어도 되는데 말이다. 그것은 몸과 지체를 분리시키려고 그렇게 하는데, 머리가 나쁜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르지 싶은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이 몸은 하나이고 지체는 다수라고 하는 이유가 지체와 몸을 분리시키기 위함인데, 즉 “서로 붙어있으니 몸이 지체이고 지체가 몸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분리하는 이유는, 지체의 지체됨은 지체에서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몸에서 찾아야 비소로 지체의 지체됨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데, 그러니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할 수 있지 않는가? 내가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는데, 그리스도의 지체가 맞지 않는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의 지체됨을 지체의 충성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지체가 아닌 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몸에서 무엇이 주어졌는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 지체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 몸에서 나온 성령을 마심으로서 !!
여기 13절에 보면 성령이 나오는데, 즉 “한 성령을 마시게 했다” 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좀 어려운데, 어려워도 참고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몸과 지체의 관계에 있어서, 몸의 입장에서 지체를 볼 수 있고, 지체의 입장에서 몸을 볼 수 있는데, 몸의 입장에서 보면 성령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성령을 마시게 함으로서 지체 만들기에 성공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지체는 없다고도 할 수 있는데, 즉 지체는 자기가 지체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되시는 분이 성령을 주셔서 지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이 온 자에게만 한해서, 그래서 그 성령을 마신 자에게만 한해서 지체로서 선택이 되고, 뽑히게 된다는 말이다.
◈ 다수인 지체가 하나인 몸으로 !!
그러므로 이렇게 해서 지체가 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자기가 충성을 하고 봉사를 해서 된 것이 전혀 아니기에, 오직 성령을 마시게 함으로서 자기가 지체가 되었다는 고백을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지체는 다수인데, 그런 성령을 받아서 된 지체는 다수가 머물겠는가? 아니면 하나로 모아지겠는가? 그 특징이 반드시 하나로 모아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 4장이나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하는 교회의 개념인데, 즉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라고 말이다. 즉 자기가 교회라고 자꾸만 말로만 우기지 말고, 그 증거하는 바가 지체가 아니라, 몸을, 즉 주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는 것을 서로 서로 증거한다면,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지, 그 이외에는 아니라는 말이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 그러니 지체끼리는 당연히 부정적 !!
그러므로 지체의 입장에서는, 성령으로 마심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주관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니 지체끼리는 부정적인데, 즉 “무엇 무엇은 아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몸의 입장에서는 “무엇 무엇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서 “이근호 목사는 무엇이든지 부정적이다” 라는 소리를 듣는데, 하지만 인간들끼리는 이렇게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그런 가운데 오직 하나인 성령을 마셨다고 하는, 한 몸이라는 것이 구체화되고, 그 몸이 증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만약에 지체가 서로 잘나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몸도 잘났고, 또한 지체도 서로 잘났고 말이다. 그것이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몸된 교회의 모습이겠는가? 서로가 다 잘났으면 싸우기밖에 더 하겠느냐는 것이다.
방금 강의한 내용이 어려우면, 녹음이 되어있으니 집에 가서 다시 한번 더 들어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또 누군가가 녹취를 해서 다시 깨우치게 하지 싶은데 말이다. 아무튼 지체와 지체 사이는 부정적일 수밖에는 없는데, 그래서 “너도 잘났고, 나도 잘났어” 라는 것이 아니라,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야. 주님만 바라보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지체가 없으면, 그리스도의 몸도 없어 !!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체는 없는데, 이렇게 지체가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도 없다는 말인데, 왜 없는가? 우리는 언약의 완성자가 아니기 때문에 몸이 아닌데, 그래서 지체도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은 언약을 완성해야 하는데, 그러니 언약의 완성자는 예수님이고, 그래서 전적으로 예수님의 몸이지 우리의 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교회론을 이야기한 개혁주의자는 없는데, 로이드 존슨, 칼빈, 루터 등등, 모두가 이렇게 교회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카톨릭이 과연 교회인지, 그것을 따졌지 말이다. 이렇게 성경을 토대로 교회론을 전개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이러 이러해야 한다” 라고 주장은 했지만, “교회는 없다” 라는 소리는 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은 이렇습니다” 라고 했지, “그리스도의 몸은 없습니다” 라는 주장을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러하다” 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주님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고 만들지 않고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자기 마음대로 라는 것이다. 우리가 준비를 잘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열 처녀 비유’에 있어서 !!
어디 기름을 준비한다고 해서 신랑이 오는가? 기름을 준비하는 열 처녀 비유가 아주 재미있는 것이, 신랑이 딱 택한 처녀가 기름을 준비했을 때, 바로 그때 신랑이 온다는 것이다. 조금 더 늦게 오던지 하면 6명이 되니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6명으로 만들어주지 않기 위해서 신랑이 때를 맞추어서 온다는 것이다. 물론 신랑이 너무 일찍 와서 4명이 되어도 안 되고 말이다. 그러니 무조건 택한 자기 백성만 건지는데, 전혀 착오가 없고 빈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마지막 한 명이라도 작정된 자가 구원을 받지 않았으면 결코 재림을 하지 않는데, 물론 그렇게 작정된 자를 놓치고 실수로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얼마나 타락을 했던지, 어디서 무슨 짓을 했던지 간에, 옥경이처럼 혼자서 울고 있던지 간에 말이다. 택한 자라고 하면 반드시 같은 택한 자끼리 만나게 해주고, 또한 구원해주신다는 것이다.
아무튼 목회자라고 하면 그 정도의 믿음은 있어야 하는데, 즉 작정된 자는 반드시 만나게 해주시는데, 자기와 만남이 없으면 다른 곳에서 그 누구와라도 복음을 아는 사람들끼리 반드시 만남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나서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자기는 그냥 꺼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만을 증거하는데, 그것이 바로 지체의 역할이고, 반드시 그런 자들은 생겨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믿는 자가 없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고, 또한 너무 많다고 자랑할 필요도 없는데,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많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말이다. 그러니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택한 자는 정확하게 그대로 데리고 가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덕분이고, 그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몸이란, 곧 ‘천국’ !!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반드시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있어서, 그렇게 다 이루었다는 몸을 가지고 부활을 했을 때, 그것이 비로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메시야의 몸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언약완성의 몸’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있는 것이 바로 천국이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무엇입니까?” 라고 누군가가 물으면, “그리스도의 몸은 이렇게 이렇게 생겼습니다” 라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언약의 통치권 아래에, 즉 영광스러운 부활의 통치권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천국이라는 말이다.
◈ 주님 - 내 인생의 책임자 !!
그러한 그리스도의 책임자, 즉 머리가 누구인가?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을 ‘주님’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주님의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고, 그 안에서는 죽어도 살고, 이미 살아서 믿는 자는 통치권 안에 있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비로소 성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치권 안에서는 육은 죽이고 후패하게 하고, 속은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온전한 영광의 몸, 즉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 올 때까지 성령께서 보증이 되사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 안에서 교체작업이 일어나는데, 즉 흙에 속한 몸은 버리게 하시고, 영에 속한 영광의 몸은 죽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 당장에 죽지 않도록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아직도 살려두신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현재성을 증거하라고 살려놓고 계신다는 것이다.
◈ 장근식 목사님의 임직식에서 !!
어제 부산성문교회에서 장근식 목사님의 임직식이 있어서 갔는데, 제가 설교를 하고 다른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권면하고 했는데, 거기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목사라는 것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직분이 아니라, 주님의 우주적인 작업을 위한 직분이기에, 그러니 목사 개인이 하고 말고 할, 그러한 직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목회라는 것은, 주님이 계시듯이, 그렇게 목사의 일을 하게 하셔서 하는 것이기에, 자기는 전적으로 무익한 종이고, 주인이 시켜서 하는 것이기에 빼도 박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거부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전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목회인데, 그러므로 크게 보고 전체를 보아야 하는데, 자기가 목사라고 해서 울 문제도 아니고 또한 웃을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무익한 종으로 할 바를 하는 것인데, 이렇게 거대한 흐름 안에서 말이다.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이제 교재 275페이지를 보자.
** 성전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한 바가 그대로 성취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당연히 사람에 의해서 무너지거나 혹시 다시 세워지지 않는다. 오로지 약속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고, 약속이 세워지면 다시 세워지는 것이 성전이다. 이처럼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일관성 있게 ‘언약’이라는 조건 속에 놓여 있다. 언약이란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지, 결코 메시야에 대한 인간의 의무 사항이나 행동지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성전은, 인간의 아닌 약속에 의해서만 !!
이렇게 구약에서 사람들이 할 것은 다 해보았는데,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아니라 오직 약속에 의해서만 성전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신약의 교회도 이 ‘언약’의 연관성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태도나 규범의 범주를 언급하는 것은 새 언약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 즉 기껏 인간의 행할 조건으로 규정한다면, 그런 언약 하에서의 교회란 구약에서부터 말해온 성전도 아니요, 그저 사이비 종교체계에 불과하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우상으로서의 교회가 등장한다.
◈ 새 언약이 아닌 것은?
바로 이점이 중요한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태도나 규범의 범주를 언급하는 것은 새 언약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하신 일이 새 언약인데, 그러니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새 언약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이렇게 복을 주는데,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는 것은 전혀 새 언약에는 없다는 말이다.
심지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도 예수님 쪽에서 해야 하는 일이지,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 전에 말한 목사의 일도 그렇고 말이다. 자기가 목사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언약에 없는 것인데, 그것은 자기 기분이지 말이다. 하지만 복음을 증거하는 것, 즉 “해야만 한다” 라는 것은,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일에 뽑혀 나왔다는 것이다.
◈ 호되게 다루시는 주님 !!
어제 예배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는데, “호되게 다룬다” 라고 말이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데, 어떤 때는 주님이 얼마나 호되게 다루시는지, 그야말로 가정이 모두 파탄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있으면 참으로 편안하게 다루어주실 줄로 아는데, 그것을 축복이라고 여기고 말이다.
물론 편안하게 다루어주실 때도 있는데, 하지만 주님은 편하게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편하게 다루어줄 줄 알았던 주님이 호되게 다룰 때도 역시 동일한 주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편할 때는 목사를 하고 힘들 때는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어떻게 여기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은 그때그때 달라요” 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이 과연 그런 분인가?
◈ 목회자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한결같이 !!
그래서 제가 장 목사님 임직식에서 설교를 하면서, 장 목사님을 주님께서 호되게 다루실 때도 역시 동일한 주님인 것을 잊지 말라고 했는데, 즉 힘들다고 해서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편안할 때도 목회를 제대로 해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편할 때도 주님은 이것보다 더 힘이 들어도 할 수 있는지를 묻고 계신다는 것이다.
목사가 제일 편안할 때가 언제인고 하니, 교인들이 보이지 않고 주님만 보일 때라는 것이다. 즉 자기 앞에 앉아있는 교인들의 숫자가 아니라 오직 거대한 십자가만 보일 때, 높이가 76m이고 가로가 80m인데(에스겔의 새 성전?), 자기를 완전히 가두어버리는데, 그렇게 십자가의 피로서 자기를 가두어버릴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눈에 보이고 들어오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가? 설교도 잘해야 되고, 행동도 조심해야 되고 말이다. 사실은 목회자에게는 그때가 제일 힘든다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만이 보여야 하는 그 현장에 사람들만 보일 때 말이다.
어떤 때는 제 아내가 그렇게 묻는데, “당신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알아요?” 라고 말이다. 이번 장례식에서도 그러했지만,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는 마구 떠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누구의 목소리가 더 센지 내기를 하는 것과 같은데 말이다.
◈ 그런데 목사가 교인들을 의식하게 되면?
하지만 사실은 이런 것보다도 정작 힘드는 것은, 설교자 본인이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고 의식이 될 때, 그때가 제일로 힘든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이런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라고 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십자가가 크게 보인다면, 어디서 어떤 사람들을 앞에 놓고 설교를 하든지 간에 전혀 힘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목회자 본인의 자세라는 말이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다음과 같이 시비를 거는 분도 있는데, “아니 목사님, 목사님도 알다시피 디모데전서에 보면 ‘돈을 사랑하지 말라. 일만 악의 뿌리이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성도라면 당연히 지켜야만 하는 규칙인데, 그것도 역시 새 언약에 포함되지 않습니까?” 라고 말이다.
물론 그것도 역시 새 언약이 포함이 되는데, 하지만 그 말씀은 우리가 아닌 주님이 지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이라는 말이다. 우리 인간들이 무슨 재주로 돈을 사랑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 성경전체가 모두 새 언약 !!
신약성경만이 아니라 성경전체가 모두 새 언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은 다 주님께서 하실 일이라는 말이다. 성경에서 십자가만 뽑아내어서 그것만 새 언약이라고 말하면 안 되고 말이다. 물론 십자가를 제대로 뽑아내면 성경말씀이 다 뽑혀 나오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성경말씀 전체가 새 언약인데, 그것은 모두 다 예수님이 하실 일이고, 예수님만이 지킨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276페이지를 보자.
** ‘목자를 치면 양떼들이 흩어진다’ 라는 예언의 말씀도 제대로 된 새 언약의 달성을 위함이다(마 26:31).
(마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 야, 이제 우리 흩어지자 ??
여기 마태복음 26장 31절에 보면 ‘기록된 바’ 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성경말씀의 모든 것은 누가 이룬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모두 다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가?
그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모여서, “성경에 보니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라고 했는데, 그러니 우리 할 일이 무엇이지? 아, 흩어지는 것이구나. 그러면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서 흩어지자” 라고 했는가? 전혀 그렇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