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21117b 베드로후서 3장 8절(모두 멸망)-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221117b 베드로후서 3장 8절(모두 멸망)-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노아홍수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세계에 없는 것이 근거가 되어서 인간세계를 심판하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하죠. 이야기해놓고 시험 쳐서 불합격한다면 심판에 대해 수긍을 하겠는데, 때려놓고 때릴만하다고 해버리면 이건 너무나 일방적인 심판이기 때문에 변호하거나 대처하거나 어떻게 항변할 수 있는 일체의 여지가 없는 겁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게 상당히 불합리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찾아야 될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세계에서 참인지, 거짓인지를 하나님이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입장에서 이것은 선이다, 악이다 하는 그 판단 구분자체를 주님께서는 완전히 근원적으로 그걸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첫째 시간에 두 가지 중요한 것 했죠. 벌써 다 잊어버렸지만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뭐냐 하면 심판의 근거에서 인간이 행한 것은 일체 없고 주님 자신이 행한 것이 심판과 구원의 근거가 된다.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되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이게 심판받는 근거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의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이죠. 해방감을 주는 거예요.
마치 필리핀 민다나오 섬인가, 일본이 정벌하고 2차 대전 다 끝났는데, 남들은 다 끝났어요, 본인이 혼자 싸우고 있어요, 지금. 끝났다고 삐라 뿌려서 빨리 나오라 해도 날 속일 생각하지 마라. 그러니까 속지 않기 때문에 구원 못 받는 거예요, 그 인간은. 자기 꾀임에 자기가 빠진 거예요.
하나님이 어떠하든 내가 알고 있는 선악체제에 의하면 사람은 착하면 천국, 악하면 지옥. 난 이것에 확고부동한 증거를 쥐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이걸 부정할 생각하지 마라. 여기에 모든 걸, 내 몸과 정신을 다 던져 넣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선악과가 독약입니다. 뭔가 약 잘못 먹은 거예요. 약 잘못 먹고 완전히 인간이 미쳐버린 거예요. 자기 의로움에 내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 완전히 본인이 거기에 반해버린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는 지식인데 나도 같이 알게 되었다. 거기서 오는 자부심, 내가 모든 것을,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판결자, 재판관의 입장에 있다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그게 어리석은 것인지 모르고요.
두 번째 경우는 뭐냐 하면 이미 멸망당했음.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는 순간 이미 인간들은 벌써 멸망당한 겁니다. 인간들은 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는가? 예수님이 하는 일을 이해 못했어요. 같이 동조할 수가 없어요. 모르니까 동조할 수 없는 거예요.
어떤 점이 동조가 안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약속의 내용이 예수님 본인의 죽음입니다. 이게 인간세계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시간의식은 인간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시간의식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살아있을 때 시간을 느끼다가 심장이 뛰다가 죽게 되면 삐-하는 것처럼 죽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시간은 의미가 없어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 간에 그건 하나의 흙이고 바짝 마른 회가루가 된 사람보고 당신은 지금 살아 계신 지 120년입니다, 하면 회가루가 놀라가지고 그래? 더 살고 싶어라, 뭐 이러지는 않거든요. 이미 죽었으면 시간도 같이 그 사람한테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었거든요. 그러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에서 예수님은 벌써 벗어난 거예요. 인간 시간에 예수님이 속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럼 이제 시간은 인간 몫이고 예수님은 인간세계에서 죽었으니까 죽은 거다. 이래서 모든 이야기가 만사가 끝난 걸로 여겼는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거예요.
부활을 해버리니까 예수님을 죽게 만든 인간들의 시간의식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시간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된 거예요. 너희들 시간 계산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하루가 하루고 이틀이 이틀이 아니라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경우는 어떤 사람에게 해당되느냐 하면 시간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이미 죽은 자에게 해당되잖아요. 그럼 죽은 자가 곱게 죽어있으면, 죽은 자는 천년이 하루 같든지 하루가 천년 같든지 시간이 관계없기 때문에 (살아 있는) 우리 시간이 중요하다 되는데, 이 죽은 자가 부활해서 살아나버리니까 기존의 인간시간과 경쟁관계가 돼서 어느 시간이 옳은 시간인가 판결에 따라서 심판이 결정돼버리는 거예요.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구약에 나온 예인데요. 레위기 25장 한번 보겠습니다. 레위기 25장 2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그다음에 뭡니까? “안식하게 하라” 했죠.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안식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에도 안식의 때가 남아있는데 못 들어간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오죠.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를 하시고 안식을 위하여 천지창조를 하신 거예요. ‘보기에 심히 좋았다’의 상태가 유지되면 하나님이 이제는 일을 그만하시고 쉬시려고 하는 겁니다. 안식에 이르지 못하면 계속 일하셔야 되니까.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그 차원과 이 땅은 안식에 이르지 못하는 그 차원, 안식에 이중성이 생긴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안식 못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내다보는, 안식하신 하나님이 안식의 차원에서 활동을 해버리는 거예요. 미완성, 다 이루지 못한 속에 다 이루신 분이 들어와서 이루지 못한 것과 이루심과의 그 차이를 드러내시는 거예요. 이루지 못한 것은 심판, 이룬 것은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안식을 할 때는 어떻게 안식을 하느냐? 시간을 가지고 그것을 설명해주신 거예요. 이제부터 굉장히 어렵습니다. 시간을 가지고 루틴(routine),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안식의 의지를 드러내신 거예요. 1,2,3,4,5,6 그다음에 무슨 날입니까? 안식일. 그럼 일주일이 무슨 날이 돼요? 일주일은 하루 같고 하루가 일주일 되는 거죠. 그 하루를 위해서 일주일이 있었으니까요. 인간세계에서는 일주일이 길어요. 하루는 짧아요. 그러나 너희들이 그 가치의 차이를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미완성의 시간과 완성된 시간의 차이는 족히 비교가 안돼요.
그다음에 하루만 그런 게 아니고 3절에 봅시다.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4절에 “제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뭐하게 하라? “안식하게” 하라. 계속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그분이 지금 안식하지 못한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 백성의 안식을 완성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 율법으로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이왕 어려운 거 더 어렵게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통해서 이 세상에 없는 시간관을 집어넣어서 세상에 없는 새로운 공간을 만드시려 하는 거예요. 새로운 공간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뭐가 되겠어요? 천국이 되겠죠.
천국은 이 시간 이 땅에 routine, 반복되는 새로운 시간의 법이 개입함으로써 천국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냥 죽었다가 ‘천당 갈래, 지옥 갈래?’ 이렇게 우리한테 맡기는 게 아니에요. 벌써 이 세상에 특이한 시간구조가 찾아오는 겁니다. 특이한 시간구조가.
하루가 일주일 같고 일주일이 하루 같은 그러한 새로운 시간구조가 오는 거예요. 육 년이 일 년 같고 일 년이 육 년 같은 시간구조가 오는 겁니다. 일 년을 위하여 풀어내면 육 년이 되고 육년을 모으면 그게 일 년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하루죠. 하지만 그 하루를 확장시켜버리면 천 년. 성경에서 천 년이라 하는 것은 무한이에요, 무한. 시간이 영원해버려요. 하루 안에 영원이 다 담겨있는 겁니다.
레코드판의 바늘 침, 다이아몬드가 있다는 뾰족한 침이 있다면 이 침과 레코드판이 만나 여기서 음악이 나오잖아요. 뾰족한 하루가, 이 침이 여기 있는 영원한 세계의 입구가 되고 그걸 대변해서 표현해주고 있는 겁니다.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얘기했듯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것은 뾰족한 인간으로 오신 분, 오직 한분이죠. 이것을 안양 강의에서는 다른 이름은 안돼요. 오직 무슨 이름? 주의 이름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주의 이름.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른 자는 무엇을 스스로 부정하게 됩니까? 자기 이름을 부정하게 돼요.
인간이 하루하루 살면서 인간이 기억나고 생겨나는 것은 자기 중심의 공간이 생겨나요, 나라는 공간. 내 인생이 형성된 내 공간. 내 공간을 다른 말로 하면 여러 가지 엮여있는 인간관계. 저분은 나의 사촌이고 저분은 나의 아버지고 어머니고 할머니고 하는 이런 인간관계.
인간은 이 인간관계를 통해서 연대의식과 유대의식을 키운다. 이거는 바로 이번 십자가마을 수련회 교재에 보면 나와 있어요, 초반에. 이번에 아주 쉽게 썼습니다. 교재 한번 읽어보세요. 서론 부분 한번 읽어보세요.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국가까지 확장되는지를. 국가를 좋아하는 것은 그 안에 자기 몫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거예요. 내가 투자하고 내가 희망 거는, 내가 살아야 될 이유를, 의미를 이 국가가 나한테 보장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한테 헌신하는 겁니다.
손 흥민이 중국 사람입니까? 아니죠. 손 흥민이 중국 사람 아니죠.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손 흥민을 응원하는 거예요. 눈 빨리 나아서 필드 뛰어라. 방탄소년단이 북한 사람입니까? 아니죠. 내가 자랑할 만한 사람을 내 국가가 많이 양성하고 키워내고 거기에 포함됐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 나라의 국민 된 것에 어떤 자부심을 가질 때 나는 이 힘든 인생을 그나마도 위로받을 수 있는 거예요. 나라는 공간이 국가로 확장되면 거기서 나는 새로운 내 삶의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국가로 인하여 우리 주님이 쫓겨났는데요? 그러면 국가가 쫓아낸 겁니까? 그 중에 포함된 내가 주님을 쫓아낸 것일 수밖에 없어요. 그만큼 우리 자신에게 목적과 기대와 희망이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골칫거리에요. 이게 모든 성경을 왜곡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나름대로의 희망과 기대. 자기 우상화작업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간을 통해서 안식할 때 조건을 붙여요. 할례를 행해야 된다는 거예요. 할례가 뭐냐 하면 나의 죽음입니다. 내가 죽었다는 문신을 내 생식기 끝에다 두는 걸 가지고 할례라 합니다, 하례. 그게 신약에 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다. 이게 마음의 할례에요.
레위기 25장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3절에,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찌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그러면 그 약속의 땅에 안식이 임한다는 것은,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공간입니까, 안 그러면 주님이 사는 공간이에요? 주님이 사시는 공간이 되겠죠. 그럼 주님이 사시는 공간이 안식의 땅이 돼요. 완성이 된다고요.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살기 위해서 인간 속에 개입하는 방식이 율법이에요.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살고 싶어서 들어올 때 나오는 그 방식이 율법입니다. 안식하게 하신 주님이 들어와버리면 그게 안식의 땅이 돼요.
노아방주에는 누가 들어왔죠?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가 들어왔습니까? 거기에 정결한 짐승이 들어왔죠.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정결한 짐승이 스스로 자기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바칩니다. 희생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일을 희생 제물이 대변해주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에게 희생을 드린 거예요. 이게 뭐냐? 모든 심판과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 자신에게 있지,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철저히 우리를 배제해요.
그리고 난 뒤에 더 나아가서 레위기 25장에 가면 좀더 확장돼서 나중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진짜 최종적인 안식인 8절에,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7×7=49,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그다음 9절에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제오십년이 무슨 날이 되죠? 희년. 희년의 특징은 뭐냐? 개인의 소유를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주께서 보내주라면 보내줘. 왜요? 그건 네 노예가 아니고 내게 속한 내 종이기 때문에 내 지시에 따라야 돼요.
그러니 희년의 특징은 뭐냐? 내가 내게 내릴 지시를 일체 용납하지 않는 상태가 희년이에요. 내가 나한테 지시내리지 않아요. 마태복음 8장에 백부장 있죠. 백부장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렇게 하죠.
레위기 19장 23절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그 열매가 아직 할례 받지 못했다는 말은, 할례가 뭐라 했습니까? 죽음이죠. 인간이 죽음으로써 기존에 살아있을 때 모든 시간, 그 시간이 만들어낸 공간, 그 공간에서부터 죽은 자만이 새로운 율법 완성의 시간과 공간에 참여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할례가.
그러면 그 근거가 어디 나옵니까? 장차 오실 메시야 되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거기에 근거한 거예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죽어도 사흘 만에 살아날 때 비로소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 그분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뭐만 전했어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증거한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공교하게 만들어낸 모든 이야기들 속에는 그냥 ‘부활하고 싶다. 살고 싶다.’ 가 있죠. 죽어도 다시 살고 싶다, 가 있죠. 하지만 실제로 살아난 상태에서 만든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목표와 기대를 갖고 시도해보는 거지만 내가 살고 싶다는 것은 내가 죽고 싶다, 라는 그 의사에 대해서 본인이 부정하는 거예요. 거부하는 거예요.
‘그래. 죽으면 죽어야지. 하지만 살고 싶다.’ 이 말은 무슨 말이에요? 내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나는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사랑이 많아서 죽은 나도 다시 살려주면 좋겠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건 하나님을 이용한 것밖에 안 되잖아요. 어디 꼼수를 쓰고 있어요, 꼼수를. 말이 안 되죠.
이 말은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어쨌거나 저쨌거나 절대로 나는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하게 강조하는 거예요. 내가 비록 늙어 죽더라도 하나님 뭐 하노, 날 살려내야지. 왜? 난 가치 있으니까. 지금 이걸 자기가 큰소리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마음의 할례가 안 된 상태에요.
하나님은 인간이 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이 하는 것만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정해줘요. 그럼 인간은 못하고 하나님만이 하신 게 뭡니까? 바로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 그것만이 하나님이 하시죠.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그걸 못해냅니다. 안 죽으려고 애쓸 뿐이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는 것은 인간이 못해주죠.
새로운 공간, 새로운 시간을 거쳐 새로운 공간에서 주제는 뭐냐 하면 바로 【주님은 주님이시다】 에요. 주님은 주님이시다, 이것 하나 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받으면 이렇게 됩니까? 되죠.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있어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봅시다, 고린도후서 12장. 자꾸 성경 찾으니까 좀 짜증나죠? 영생 받은 것에 비하면,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안 낫습니까? 그래도 좀 참아주세요. 12장 보면 제가 읽겠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이중성입니다. 사도 바울이 진짜 자기가 생각 못한, 인간세계에 없는 새로운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주신 거예요. 그 은혜와 선물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자만하지 않기 위해서 그 뒤에 사도 바울로 하여금 사탄의 가시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게 바로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나와요. 이 가시 빼달라고 세 번 기도했지만 세 번 다 거절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을 구원하는 게 주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사도 바울에게 주님이 근거해서 제공된 것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야 돼요.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있는 겁니다.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거든요. 왜 그런 말을 합니까? 자기 죄인 된 것을 자랑하려고 한 게 아니고 정작 자랑할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자랑거리에서 배제시키는 거예요. 빠져나오는 겁니다.
이 말은 성도가 되었으면 성령을 받았으면 뭔가 인간이 만들지 못한 예상 못한 새로운 것을 내놔야 되죠. 새로운 것을 내놔야 돼요, 새로운 것을. 인간이 공교하게 만든 것 말고. 아까 이야기를 계속 해봅시다. 성도가 되었으면 은혜를 받았으면 사람에 대해서 일체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죠.
평소에 인간들 세계에서 인간의 시간과 인간의 공간에서는 나라는 것은 남들이 이렇다 저렇다 한 것을 종합해서 그게 나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남들의 평가를 모아서 그게 나로 규정되는 겁니다. 평생이 다 가도록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뭘 하는지 자기가 규정이 안 된다고요.
그런데 주님의 은혜가 임했잖아요. 주의 은혜가 임하면 아까 고린도후서 12장의 말씀처럼 그 사람이 누군지 나는 모르겠다 할 정도로 자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져버려요. 나의 삶에 대하여 내가 구원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굳이 내 삶에 대해서 내가 신경 쓸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주님이 누구시냐가 중요해요. 주님이 누구시냐가 중요하지, 내가 누구냐는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보고 놀렸고 사도들도 많이 핍박을 받았잖아요. 얼레리 꼴레리. 특히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는 욕을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욕을 많이 얻어먹었는데 스데반 집사가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이유가 근거가 어디 있느냐? 돌 던진 사람을 용서해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앞에 누가 등장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죽는 순간에 누가 등장했죠? 예수님이 자기를 영접하려고 선 것을 봤죠.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걸로 된 거예요.
예수님에 근거해서 자기가 구원받은 거예요. 돌 맞아서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자기가 바른 설교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저분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돌로 치는 것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사람들은 돌 던지면서 돌 던지는 올림픽하겠죠. 나를 하나 타겟으로 삼아서. 자기들 취미인데 뭐.
그러니까 나 죽는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있느냐는 거예요. 내 죽고 사는 거 없거든요. 내가 죽어서 살아야 될 이유가 없어요. 나는 죽고 다른 나로 부활되죠. 아담으로 죽고 새 아담, 예수님의 형상으로 살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형상이라는 것이 우리 자체의 사적 형상이란 없고 아담의 형상을 물려받은 거예요. 우리 형상은 남의 것이에요.
너 누구 닮았냐? 너희 아버지 닮았네. 아니죠, 아버지의 아버지를 닮았겠죠.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냐?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또 누구의 아들이잖아요. 그럼 마지막에 가면 누구 닮았어요? 아담을 닮은 거예요. 아담의 형상을 우리가 계속 인수받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새로운 자아는 아담의 형상이 아니고 예수님의 형상을 인수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의 형상인 나로서는 상상을 할 수가 없죠.
성령 받은 사람은 상상하는 게 아니고 성령 받은 사람은 뭘 아느냐 하면 나는 일단 아니라는 것. 지금의 내가 부활되는 건 아니다, 그 정도는 알죠. 하나님 앞에 나를 받아주지는 않는다, 그 정도는 알죠. 주 안에서 만들어진 거니까.
부산 강의에서 그랬잖아요. 구원받는 것은 나무인데 나무의 열매로서 구원받는다고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열매거든요. 하나의 나무, 예수님의 열매라는 조건 하에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 나무에서 새롭게 맺힌 열매이어야 해요. 내가 노력하는 내 열매는 안 받습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주의 이름의 나무에 열매로서 구원받는 거예요.
우리 근거가 되지 않을 경우에는, 두 번째 제가 중요한 근거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미 멸망당했다 했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은 종말 처리된 것, 종말 처리된 거예요. 종말 처리된 것을 발견하라는 이 말은 그 종말 처리된 중에 누가 포함됩니까? 우리 자신도 포함되잖아요.
제가 아까 예를 다시 한번 들어볼게요. 노아 홍수가 왔을 때 비가 내릴 때 착한 사람은 놔두고 나쁜 사람만 골라서 바게쓰에 물 붓듯이 에이, 물에 빠져 죽어라, 이렇게 온 게 아니잖아요.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것에겐 다 왔어요.
나 착한데 설마 나를 주께서 물에 빠뜨릴까. 네가 착하다는 근거, 판단은 누가 내린 건데? 본인이 내리잖아요. 본인의 착함과 선함과 악함의 근거를 본인을 근거해서 하는 거예요. 본인 근거는 안 받습니다. 내가 반성하는 것, 회개하는 것 안 받습니다, 주께서는.
회개라는 것은 다른 세계, 그러니까 주님의 세계에서 나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그 평가가 회개여야지, 내가 반성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에요. 사도행전 2장에 유대인들이 회개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어찌할꼬 (2:37). 자기가 할 도리 다 했는데 이제 이런 새로운 성령의 세계에서는 어찌할꼬.
다시 말해서 할 게 없다는 겁니다. 할 게 없기 때문에 할 게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를 부지런히 뭐라도 하게 하셨죠. 지금도 하고 있고요. 뭐라도 해요, 끊임없이. 인간은 잠시도 쉬지 않고 뭐라도 합니다. 딸내미 대학 하면 대학원 하겠다고 설치고. 뭐라도 해요. 대학원까지만 좀 키워주이소. 그다음부터는 내가 돈벌이할게. 뭐라도 한다고요.
모든 생각하는 것이 본인이 행한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어찌할꼬, 안합니다. 어찌할꼬 없어요. 뭐라도 합니다, 인간은. 그러다가 성령이 오게 되게 되면 아, 내가 마음의 할례를 안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내가 죽었다는 흔적을 문신처럼 새겨야 되는데 나는 죽은 적이 없다는 식으로 사람 행세하려고 한 것은 누구한테 보이기 위함이냐? 하나님께 보이기 위함이 아니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거예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꾸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과 인간관계를 유지하려고 해요. 술 사주고 뭐 사주고 돈 줘가지고 자꾸 내 친구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냐고 물으면 흔히 그렇게 말하죠. 외로워서 그런다고. 외롭다는 거예요. 우싸우싸 해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혼자서는 외롭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자기에만 빠져있다는 것을 대변해주는 거예요. 나는 내 생각에만 빠져있는 거예요.
자, 그다음에 베드로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을 때 그럼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잖아요. 그럼 예수님은 평소에 이런 이야기를 안 하셨는가? 하셨어요. 하셨는데 사람들이 내가 못 알아보겠다고 그냥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마태복음 24장 봅시다. 마태복음 24장 29절에 보면,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자, 질문 들어갑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했습니까? 그 존재한 이유가 뭡니까? 사람들을 위함이에요, 안 그러면 인자를 위함입니까? 해와 달과 별은 이미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었어요. 인간만 지금 소외되어 있는 거예요. 들의 짐승이나 모든 꽃도 이 세상의 해와 달도 지금 누구의 조종을 받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조종을 받고 있어요. 예수님과 관계가 이어져 있는 거예요.
인간들만 마귀한테 빠져가지고 잘난 체 해가지고 독립하겠다고 이렇게 하니까 인자와의 연관성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해와 달, 별 이걸 전부다 인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달에 가자. 그거 왜 가는데? 화성에 가자. 가서 뭐 할 건데? 뭐 할 건데? 화성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거기 왜 가는데? 로켓 쏘아 올리고. 그거 왜 쏘아 올립니까? 이야, 인간의 지혜가 이 정도다, 하니 뭐합니까? 교통사고 나서 죽어버렸는데. 죽잖아요, 인간은. 왜 죽는 것은 방비를 못해? 달에 갈 생각은 하면서. 인간의 수명을 그래도 백 년까지 키웠잖아. 성경에 보면 구백 년까지 사는데? 아홉 배나 더 증가해야 돼요, 아홉 배나.
세상 모든 것은 인자 중심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모든 심판과 구원의 근거는 인자가 하신 일에 근거되어 있어요, 인자가 하신 일에. 인자는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율법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백성 만들어서 새로운 공간, 새로운 하늘나라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율법이다 이 말이죠.
그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죠.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어린 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율법의 제사법에 나오는 개념 아닙니까. 어린 양을 희생 드려서 이스라엘의 죄를 없앤다는 그 원칙에 맞추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어요, 하나님은. 봉 준호만 계획이 있는 게 아니에요. 네가 다 계획이 있구나.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는데 인간만 그 계획에서 소외된 겁니다. 자기한테 미쳐가지고. 자기 계획에 미쳐가지고.
계속 보면요. 마태복음 24장 30절,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예수님이 오신 입장에서 드디어 지구라는 것, 해와 달, 별, 예수님이 완성으로 왔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은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불에 타버리는 겁니다.
오늘 내가 여러 번 이야기하는데 다시 이야기하겠어요. 우리가 불에 타고 지옥 가는 것은 우리 행함의 근거가 아니고 예수님의 인자의 일방적 근거에 의해서 지옥이 되는 거고 불타버리는 겁니다. 그게 주의 약속이에요.
31절에,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택한 자들을. 자, 택했다는 것, 이것은 바로 노아 물의 심판 때에 택한 자인 노아에게 은혜가 임했죠.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여기 세상에 없는 것을 찾아라. 그걸 어떻게 찾는가? 하나님이 이 땅에 없는 것을 선물로 줄 때 아, 이게 없는 거구나, 알면서 그걸 받아들이게 돼요. 그냥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부정해버리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은 나를 살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신경 쓸 이유가 없죠. 있는 것 또는 인간관계 이것은 어디에 집중되어 있느냐 하면 나 하나에 집중되어 있어요. 나 잘되기 위해서 내 소유가 있고 나 잘되기 위해서 인간관계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나 말고 다른 나를 맞이했단 말이에요. 예수님 형상의 다른 나를 맞이해버리면 우리가 나 자체를 철폐해버리고 나의 있는 것과 내 인간관계, 이것은 그다지 신경 쓸 필요가 없죠. 주께서 오신다는데 주께서 나타나실 때, 뭐 탕수육해서 드릴 일 있습니까? 잡채해서 드릴까요? 그런 거 없거든요.
마태복음 24장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그래서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를. 왜?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예수님 자기 말이기 때문에 성령은 예수님의 마음이잖아요. 예수님의 마음이 오지 않으면 이게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게 되면 예수님 인자 혼자 바빠. 갔다가 왔다가 갔다가 왔다가. 왜 있으려면 진작 있든지 가면 오질 말든지. 갔다가 오겠다는 거예요. 갔다가 오겠다는 말은 하나님이 너하고 상대 안 한다는 뜻이에요. 예수님 나하고 상대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너희들은 관심사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기 자신을 못 버리고 있는 거예요. 갈 곳도 없고 갔다 오지도 않는, 맨 그 자리에 있는 인간 주제에...... 갔다 오는 게 있어야 되는데 갔다 온 것도 없는 인간 주제에 뭐가 그게 귀합니까? 주님은 갔다 왔는데.
34절에 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이 세대. 이 세대에 누가 포함되어 있어요? 인간의 모든 시간개념이 다 포함되어 있죠, 이 세대. 오는 세대, 묵시 세계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아요. 예수님이 율법을 이루었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안식의 때가 안식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인간의 시간측정으로 보면 이게 하루다 천년이다 규정할 수 없는 그런 세계관. 인간의 시간개념으로 하자면 천년이 하루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그 외에 다른 표현이 있을 수 없어요. 아이고, 천년이네요. 아니, 하루다. 하루네요. 아니, 천년이야. 천년이라면 하루고 하루라면 천년이고. 다시 말해서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 의식으로 네가 알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을 감히 규정하려고 들지 말라 이 말이에요.
그다음 35절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여기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라고 했는데 그 천지 안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다 포함되죠. 천지는 없어지겠다. 그러니까 나쁜 짓해서 벌 받는 게 아니고 없어질 세대에 속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다 한꺼번에 일괄적으로 없어지는 거예요. 한꺼번에 일괄적으로.
은혜 받은 사람, 다시 말해서 택함 받은 사람, 주의 약속이 구원과 심판의 근거인 것을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그 사람을 통해서, 베드로 같은 사람이죠 사도니까, 그 사람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 세상에 예수님의 활동이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 자기 백성에게.
노아가 밥 먹은 것도 중요하고 노아가 술 먹은 것도 중요해요. 노아가 술 취해서 벌거벗게 했을 때 이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우사스러운 짓이죠. 그러나 노아가 술 먹고 벌거벗은 것조차도 주께서는 뭐로 사용합니까? 주의 계시로 사용해버린 거예요. 뭐로 계시하느냐? 아들 가운데 어떤 아들은 저주 받고 어떤 아들은 복 받는데, 저주 받고 복 받는 기준을 저주 받은 본인이나 구원 받은 본인이 노아가 술 먹고 하체 드러낼 때까지는 몰랐어요. 본인에 근거해서 나는 복 받을 것이다, 나는 저주 안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근거가 노아를 통해서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모르죠.
그러니까 노아에게는 벌거벗은 것이 준비된 근거라면, 제 이야기가 아니고 성경에 나온 이야기니까요, 그럼 예수님에게 근거는 뭡니까? 노아에게 벌거벗은 일이 참 부끄러운 일이죠.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 중에서 인간이라면 가장 부끄러운 일이 뭐에요? 바로 사형수로 죽는 일이잖아요. 사형수로. 십자가잖아요, 십자가.
많은 죄, 큰 죄가 아니면 안 죽는 십자가. 저 인간은 더 이상 살려둘 가치조차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결정내린 사형수, 그게 십자가에요. 개과천선할 가능성 전혀 없다. 사람을 죽여도 너무 죽였다. 이 강도 같은 경우. 강도와 더불어서 같이 섞여서 강도 같은 죄목으로 죽은 것이 예수님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인간의 입장에서 가장 부끄러운 일. 가문의 영광입니까, 그게? 강도해서 사형당한 게 영광은 아니잖아요. 그럼 예수님은 그 가문의 영광도 안 되는 거예요. 수치스럽죠.
그 수치가 유일한 근거에요. 그 수치를 성령을 통해서 받아오는 겁니다. 내가 해낼 수 없는 수치를 주께서 나 대신 당했다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수치 수준만큼 내려갈 수 없는 나를 주께서는 함께 내려간 사람으로 이미 수치스러운 존재로서 규정해주시니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너는 죄인 중의 괴수인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대신 말씀해주시는 거예요. 죄인 중의 괴수가 구원받을 정당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수가 구원받을 근거는 없어요. 죄지었는데 무슨 염치도 없죠. 죄 지은 주제에 무슨 천당을 가려고 해요. 그런데 그 염치없는 그것이 주님에 의해서 알려질 때 주께서 일으키신 염치없음임을 알 때 우리는 염치없는 사람 된 것을 복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어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 우애.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내가 천하의 염치없는 인간이라고 드디어 굳힐 때 비로소 나타나는 열매에요. 그걸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나오는 열매라 했어요, 갈라디아서에서(5:24).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내가 진정 아무것도 아니다. 그다음에 덧붙인다면 주여, 날마다 쉬지 않고 진정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이유를 나한테 통보해주시옵소서. 통보해주시옵소서. 그럼 주님께서 뭐라 합니까? 내일도 기다려봐. 내일 또 회사에 일 터질 거야. 네가 손님한테 우사 한번 당해봐야 아,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개한테 내가 한번 물려봐야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매사가...... 부부싸움 크게 해봐야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가 내 가치를 위해서 붙들고자 하는 것을 주께서 강제로 손가락을 벗겨서 떼어 내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그냥 네가 있는 것은 다 하나하나가 은혜인 줄 알아라. 그렇다고 또 술 먹고 하체 드러내지 마시고요. 물론 은혜긴 은혜지만.
모든 일어나는 일이 나로 하여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일깨워줌으로써 하나님이 너를 십자가의 증인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늘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또 확인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주의 일이 벌써 성령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을 향하여 마음껏 놀려도 괜찮습니다. 주의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도 본인들을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일들만 벌이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따로 관리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더 이상 세상 일어나는 일에 깜짝 깜짝 놀라지 말게 하시고 걱정하지 말게 하시고 두려워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