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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21028a 창세기3장 15절(발꿈치)-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광주강의20221028a 창세기3장 15절(발꿈치)-이 근호 목사

p.227 밑에서 6번째 줄,【동일한 살-신체, 말, 텍스트-속에서, 안이 바깥으로 되고, 바깥은 안이 되는 의사소통적인 순환의 장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기호학적 지시작용이 일어나면서 문화적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한다.】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 어떻게 인간이 인간끼리 의사소통을 하느냐? 아니면 의사소통을 하는 것처럼 하느냐?

인간세계는 의사소통으로 인한 의미의 세계죠. 인간세계가 의사소통이 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게 따로 살림을 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의사소통하는 이 원인은 인간의 육에서 나온 것들이에요. 육에서 나왔기 때문에 같은 육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육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의사소통에서 의미라 하는 것은 육에서 나오는 의미가 되겠죠. 따라서 육에서 나온 의미이기 때문에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육은 절대로 영의 세계 의미에 당도할 수 없다. 인간이 어떤 생각을 하든지 간에 영의 세계의 의미에는 당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의 세계 안에 그들이 놓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성경에 보면 엄연히 주의 백성이 있고 구원받은 사람이 있잖아요. 그들은 그러면 육 아니냐. 육에서 어떻게 영의 세계로 그 의미를 알 수가 있는가. 오늘 교재에 의하면 에스겔, 다니엘 이런 사람들을 말하죠. 그들을 인자(人子)라 하는데 오늘 본문에 나온 에스겔과 다니엘 둘 다 인자라고 불러요. 인자라고 부르는데 최초로 인자라 불리운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모세는 죽어도 모세언약은 살아있죠. 여호수아가 자기 마음대로 하지를 못해요. 모세언약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여호수아입니다. 모세는 죽어도 모세언약은 남아 있잖아요. 다윗은 죽어도 다윗언약은 살아있어요. 다윗언약에 의해서 이들(에스겔과 다니엘)이 인자라고 불리우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윗보고 인자라 했으니까. “인자가 무엇이관대” 시편 8편에 나오죠. 인자가 무엇이관대 (시 8:4)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공통적으로 그들은 어떻게 육에서 영의 의미를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죽음이에요. 무슨 죽음? 육의 죽음이에요. 그들도 육을 갖고 있는데 그 육은 어떤 육이냐? 죽음을 품은 육이 되는 거예요.

‘내가 살다가 죽는다.’가 아니고요. 이러면 살든 죽든 주인공은 누가 되느냐 하면 ‘내가’가 되겠죠. 한번 적어볼게요. 내가 살다 죽는다. 이것은 이제 육의 세계에서 서로 의미가 소통될 때 의미소통할 때 장례식에서 통하는 거예요. 장례식장 가면 다 이래요. 내가 살다 죽는다. 저 사람은 살다 죽었다 하죠.

그런데 영의 세계는 ‘죽음이 죽어있는 내 안에 살아있다.’ 자, 1번- 내가 살다가 죽는다, 2번- 죽음이 죽어있는 내 안에 살아있다, 라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차이가 있죠. 1번은 주인이 누구입니까? 내가 살다 죽는다. 그러니까 살다 죽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확인방법이 내가 숨 끊어졌느냐하는 나의 존재로 죽음을 설명하잖아요.

그런데 2번의 죽음은 내가 살아있는 걸로 죽음을 증명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걸로. 내가 살아있는 걸로 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 눈에는 내가 살아있는 걸로 보이지? 사실은 죽음이 살아있어.

죽음이 살아있다는 이 말, 육의 세계에서는 알 수가 없죠. 죽음이 살아있다. 왜 죽음이 살아있어야 되죠? 너도 살아있고 너도 살아있고 해서 우리가 하나의 의미의 장(場)을 형성하는데 왜 죽음이 살아있어야 되는가? 그것은 인간의 육과 육은 육1, 육2라면 육1이 한 행동이 육2로 넘어오지를 않아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육1에서 한 것은 육1로 돌아가고 육2가 한 것은 육2로 돌아가버려요. 내가 한 것은 나한테로 돌아오지, 남한테 넘겨줄 수가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혜택을 입었다’ 그게 인간세계에서는 성립이 안 됩니다. 혜택을 준 자가 살아있어버리면 살아있는 그걸로 혜택이 되돌아오게 되어있어요. 육1이 육2에게 줬는데 주어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온전히 가지 못하고 도로 나한테 온다고요.

예를 들어서 내가 너한테 돈 100만원 주었다. 그러면 사람, 육1이 육2한테 100만원 줬다면, 그냥 줘 그냥 너 해, 하고 줬지만 이 사람은 결코 그 100만원이 온전히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100만원 받은 이 사람은 육1의 소유가 돼요. 너 나한테 100만원 가져갔잖아. 네가 100만원 가져가놓고 나한테 이렇게 나오면 돼? 이렇게 돼요, 인간은. 받았으면 이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여기에 ‘살아있다’를 내가 살아있잖아요. 내가 살아있는 이상은 남들이 내가 살아있다는 뜻으로 남들이 ‘살아있다’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내 스타일대로 살아있는 그것과 동일한 스타일로 남들이 살아있다고 이해한다든지 그 사람을 해명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생각은 나한테로 국한돼요. 남한테 전달이 안돼요. 전수가 안돼요. 그러니까 부부가 같이 살아도 이건 따로입니다. 똑같은 영화를 보고 똑같은 감동의 눈물을 흘려도 따로따로에요. 너 눈물 흘린 이유가 뭐냐? 물으면 생각이 다 달라요. 같을 수가 없어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성경에서 인간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자꾸 일어나요. ‘예수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된다’ 이게 인간세계에서는 있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라 하는 것은 다른 육을 갖고 있잖아요. 다른 육체잖아요. 나는 내 육체가 있죠. 예수님이 의롭다 해서 내가 의로울 수 있는 논리적 근거는 인간세계에서는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돈 100만원 있는데 예수님이 이야기해요. 내 100만원 가져가라. 그래서 100만원 가져왔어요. 돈은 100만원 가져왔는데 예수님이 100만원 가져가라는 그 뜻은 결코 나한테 도달하지 않습니다. ‘고맙다. 참 좋으신 분이야. 어떻게 이렇게 희생적이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본인이 본인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참 희생적이야.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은 뭐겠어요? 그 예수님의 희생을 아는 나는 참 훌륭해. 그렇게 되겠죠. 예수님이 사랑을 베푸는데 그 사랑을 알아채는 나는 얼마나 착할까. 그게 반드시 따라 나와요.

그러니까 인간은 예수님한테 돈 100만원 받아도 이거는 자기로부터 자기 생각으로 그냥 되돌아가요. 예수님이 하신 것을 전혀 이해 못하죠. 왜? 영적 의미이기 때문에. 육의 세계는 영적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하고 그걸 일체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희생했다. 죄를 대신하여 희생하셨다.’ 인간이 그 이야기를 듣고 ‘그 희생의 혜택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습니다.’라는 시도는 할 수 있어도 불가능해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마찬가지에요. 주님의 희생하시는 희생을 알아차리는 나는 얼마나 의로우냐, 그런 식으로 마지막은 내가 참 잘했다는 쪽으로 이미 정리가 돼요.

이것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비(非)-본래적이라 합니다. 또는 같은 말로 비(非)-진리입니다. 인간의 육이라 하는 것은 비-본래적이고 비-진리에요. 본래적이 아니에요. 그러면 본래적이 아니란 말은, 진짜 원초적이고 본래적인 것은 인간들 속에는 없는 거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다시 한번 볼까요. 인간이 알고 있는 가장 바탕은 뭐냐? ‘내가 살아있으면 아직 나는 안 죽었다.’ 이렇게 돼요. 내가 살아있으면 나는 안 죽었다. 이 죽음이라는 것을 내가 설정하고 나로 확인되는 죽음만 인간은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안 죽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살아있는 것은 네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네 죽음이 살아있는 거예요, 네 죽음이. 너의 비-본래성이 살아있다. 본래에 들어가지 못하고 본래에 접근하지 못한 채로 너는 살아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여러분들이 강의를 들어보게 되면 우리는 지금 문제의 핵심에, 하나님이 생각하는 진짜 중요한 문제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겉돌고 있죠. 그 변두리에서 빙빙 돌고 있는 거예요. 이 동그라미 안이 본래적이라면 우리는 이 바깥에서 놀고 있어요. 바깥에서 놀고 있다고요.

본래적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아는 사람 만나서 아이고 이모님 아닙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아이고, 친구야. 전부다 어떤 누구를 만나도...... 아이고 목사님. 집사님. 본래적 속에는 전혀 들어가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똑같이 하면서 바깥에서 공통적인 의미체계를 형성하는 거예요, 의미체계를. 그게 육의 의미체계가 되는 거예요. 육적인 것.

그래서 이 사람들이 자기는 사람이다, 인간이다. 이렇게 하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시한 것은 사람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뭐냐 하면 인자(人子)가 되는 거예요. 인자라고 호칭하는 거예요. 인자는 어디서 나왔다고 했습니까? 다윗언약에서 인자가 나오죠. 다윗언약에서. 나는 죽고 나를 죽이는 그 죽음이 나로 하여금 발현되게 하는 것. 그걸 현상이라 하는데 내가 살아있는 족족 죽음이 나를 통해서 분출되게 하는 거예요.

육이 육을 낳고 육이 육을 낳잖아요. 육→육→육→..., 창세기 5장에 아담이 자식을 낳고 하잖아요. 그런데 반드시 이 사이에 뭐가 들어가던가요? 애를 낳고 뭐했더라? 사망이죠. 그러니까 사망과 육을 합쳐버리면 죄가 죄를 낳고 죄가 죄를 낳는 거예요. 죄→죄→죄→..., 어디로 가느냐? 죄의 본래성. 죄의 본래성으로 찾아 가즈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찾아가지 못하는 본래성을 잡아내요. 죄의 본래성, 죽음의 본래성, 존재의 본래성.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 찾아가도록 하나님의 언약이 추동적인 에너지, 힘을 가동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으로. 비-본래적에서 본래적으로 찾아가도록 하나님의 약속이 찾아와서 작동하는 겁니다.

이럴 경우에 이렇게 구분하면 쉽죠. 인간은 죄에서 죄로의 전달매체거든요. 전달하면 되는데...... 인간의 육이 육으로서 죄에서 죄를 낳고 죄에서 죄를 낳고, 아버지가 아들 낳고 손자 낳고 할 때 죄에서 죄를 낳는 거거든요. 죄로서 육에서 육을 낳으면 되는데 인간은 이렇기 때문에 그 죄가 뭔지 규명할 필요가 있겠죠. 무엇이 죄인지.

죄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합니다. 이때 인간은 사람이라 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합니다. 항상 어떤 순간이든 어떤 자리든 인간이 가장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내가 이런 행동하는 게 남들 보기에 옳다고 인정받겠나? 아니면 옳지 않겠다는 평가를 받겠어? 옳지 않다는 평가를 받겠다, 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옳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 먼저 전제되고 있는 거예요. 옳게 보임을 전제하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그게 아버지가 이렇고 자식이 이렇고 손자가 이렇고 그걸 계속해서 전수하는 거예요. 말이나 행동과 태도, 표정 이런 걸 통해서 정서적인 감정 이런 걸 통해서 계속해서 옳게 보이고자 하는 것을 유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인간은 옳게 보이고자 하잖아요. 성경에서는 뭐냐? 그냥 하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 육의 그 어떤 의미도 영의 세계로 들어올 수 없는 의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고 그냥 하는 거예요. 그냥 움직이는 거예요. 아무 의미가 없이 그냥 움직이는 거예요.

길거리에 쓰레기 청소한다. 그걸 가지고 저 사람은 그냥 청소한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하지 않아요. 저 사람은 남이 하지 않는 희생적이고 참 착한 일을 한다. 옳은 일을 한다는 뉘앙스를 집어넣어서, 저 사람은 청소하네. 화내면서, 저 사람은 청소하네! 이러진 않잖아요. 갑자기 순해져서는, 당신은 청소하고 있군요. 이러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뭐냐? 그 사람이 휴지를 담배꽁초를 버리는 거나 줍는 거나 주님께서는 똑같이 봐요. 그냥 꽁초 버리네. 또는 그냥 남의 꽁초 줍네. 끝. 저 사람은 애기를 낳았네. 저 사람은 애기를 못 낳네. 끝. 아무 의미 없어요.

의미를 부여하는 쪽은 영, 언약에서 의미를 부여해야 의미가 되지, 내 쪽에서 하게 되면 인간의 의미는 항상 자기를 옳게 보이려 하기 때문에 여기서 변명들이 굉장히 나와요. 자기 커버죠. 자기가 옳다는 것을 변명하는 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죽음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일을 이루는 거예요, 죽음이. 인자는 뭐냐? 인자는 안에 죽음의 내부성으로서 죽음이 내부적으로 담겨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인자잖아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돈 100만원이 아니에요. 자신의 죽음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겁니다.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우리보고 죽으라는 말이 아니고 살아있으면서도 너도 나처럼 네가 살아있지 말고 나의 죽음이 언약적 죽음, 약속된 죽음, 인자의 죽음이 네 안에 펄펄 살아있도록 펄떡펄떡 살아있도록 그렇게 주님께서는 조치를 하는 겁니다. 죽음을 전달하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혜택으로 주는 겁니다. 너도 나처럼 죽을 수 있다는 것. 의미있는 죽음이죠. 언약적 죽음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제시합니다.

그 방법은 죄가 죄를 전수한 여기에다가 언약을 집어넣어요. 언약의 개입입니다. 죄의 흐름에 언약을 개입합니다. 죄→죄→죄→..., 이렇게 하면 이게 어디로 간다고 했던가요? 죄의 원천, 본래의 죄로 가겠죠. 본래의 죄가 뭐냐 하면 선악지식으로 가득 찬 상태. 선악지식의 상한가. 최고치. 선악지식의 최고치로 찾아가요.

선악지식이 가득 찬 그 상태가 되어야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습니다. 선악과 따먹지 말라 했는데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그러면 선악과 따먹은 게 죄가 되죠. 죄의 극한치를 찾아가는 거예요. 무엇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찾아가는 거예요.

게이지 수치를 극도로 올려버리는 거예요. 어떤 공장의 기계를 가동할 때 뭔가 위험이 되면 소리가 위이잉~~~ 막 올라가죠? 이스라엘 역사를 가지고 경고음이 제일 극도로 발현되는 그 순간이 되도록 우리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유대민족과 만난 거예요. 극한치, 죄, 선악체제의 극한치, 자기를 옳게 보이는 것의 극한치까지 극한상황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유도하는 거예요. 그래야 생명나무 과실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왔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왔다는 말은 어떤 이질적인 것 전혀 없이 오직 선악체계로만 가득 차 있는 그 죄인을 주께서는 부르러 오신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제 좀 어렵게 얘기해보겠어요. 인간들은 전부다 죄인이죠. 죄인. 죄인 되죠. 그러면 죄의 원천을 보여주는 분은 누구입니까? 인자되시는 예수님과 마주칠 때까지, 죄→죄→죄→..., 이것들이 예수님의 벽에 부딪칠 때까지. 이 파동이 벽에 딱 부딪칠 때 사건 터지는 겁니다. 더는 갈 필요 없어요. 죄의 극한치가 여기 있으니까요. 예수님을 더 넘어설 수는 없어요. 예수님이 본래성이니까요. 예수님 그 뒤편에 본래성이 없어요. 그냥 예수님으로 본래성은 완결이 되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비-본래성이에요.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내가 죄인이라 해도 뭐가 죄인지를 몰라요. 그러니까 사람이 고생한다고 인간되지 않아요. 아무리 고생고생하고 힘들어도 심지어 고생한 것조차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항상 변명이거든요. 어떤 경우라도 빨리 그 일을 수습하면서 나는 정당했다. 나는 옳았다. 나쁜 사람은 저쪽이 나쁘지 나는 나쁘지 않다. 그걸로 수습을 빨리 해요, 수습을. 그때그때마다 수습을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수습 불가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돼요. ‘인간이 믿고자 하는 것은 모든 가능성이다.’ 인간이 믿는 것은 항상 가능성을 믿어요. 불가능성을 믿지 않아요. 왜냐? 불가능성을 믿어버리면 자기에게서 희망이 끊어지기 때문에. 좌절되거든요. 절망적이에요. 아무리 어려워도 또 뭐 다른 문을 열어주시겠지, 이러고 있다고요.

그러면 이 가능성의 내용은 어떤 가능성이냐? 내가 계속 살아있을 가능성이다. 내가 계속 살아있을 가능성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믿고자 하는 것은 점점 무엇과 멀어집니까? ‘죽음이 너를 통해서 살아있다’ 하는 그 진리, 이것이 본래성인데 죽음이 너를 통해서 살아있다는 이것이 인자거든요, 다니엘, 에스겔인데 인간이라는 작자는 이런 선지자로부터 또는 주님으로부터 점점 엉뚱한 쪽으로 계속 땀 뻘뻘 흘리면서 그쪽으로 달려가는 거예요.

아직도 배가 열두 척 남아있다. 그 배 열두 척 중에 열한 척 (불에) 타면 뭐라고 하겠어요? 아직도 한 척은 남아있다. 그럼 한 척 타면 뭐라고 하는가? 다음에 또 만들어야지. 끊임없이 인간이 게워내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희망이 있다는 이점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건 무조건 옳은 판단이라는 것을 유지하고 싶은 겁니다.

인간 생각이 이래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말 맞습니까? 이게 바로 육이 살아있는 거예요. 이게 육적이에요, 영이 아니고. 이게 인간이거든요. 그래서 주님(人子)에 대해서 인간들은 존재하지 않는 분과 상대해야만 했다. 같이 존재하는 인간 같으면 같은 육이기 때문에 같은 의미체제에서 이야기가 되는데 예수님은 인간에게서 존재하지 않는 분이에요.

비-본래적 세계에서 본래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본래적인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짜 본래적인 분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나중에 이스라엘은 결국 같은 존재하는 자들, 같은 이스라엘 또는 같은 인간인 이방민족과의 교류에서 그들은 한통속이 되면서 망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비-본래적인 것은 공속(共屬) 한다. 공통적으로 서로 속해있다는 이야기에요. 끼리끼리 그들은 대화가 되고 잘 만나는 거예요. 존재하는 것, 일단 육이죠. 이들이 보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 영이죠. 신약에서는 영이고 구약에서는 이게 언약이 되죠. 이 두 개가 같이 있는 것을 가지고 인자(人子)라고 합니다.

이게 다니엘과 에스겔이에요. 존재하는 것은 육이죠. 여기에 뭐가 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는 거예요. 약속이 주어지면서 선지자 내부에서 새로운 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선지자 내부에서. 이 존재하지 않는 걸로 인하여 이 존재가 문제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육이 문제의 대상이 된다.

아까 다시 해볼게요. 1번-인간은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한다. 2번-그냥 한다. 뭐가 빠졌어요? 옳다는 것이 빠져있는 상태에서 그냥 한다. 그냥 하니까 이건 수동적이죠. 그래서 지난 번에 p.227에서 【수동적 자율성】이라는 말을 했죠. 그냥 하는 거예요. 그냥 하는 것. 뭐가 빠졌어요?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하는 것을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인자 내부에서는 이걸 육에서 이어받은 죄로 보는 거예요. 자기를 옳게 보는 것을 죄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죄+언약을 통해서 인자가 되게 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일이 터지면 뭐가 마중 나오느냐? 자기를 옳게 보이는 것이 마중을 나와요. 내가 이거 잘했을까? 나 때문에 남이 피해를 보는 일은 없었을까? 피해 입었으면 내가 보상을 얼마나 해줘야 돼? 미안하다고 이야기해야 돼? 안 그러면 돈 얼마를 들고 내가 찾아가야 되나? 안 그러면 선물 보따리, 감이라도 사들고 올까? 이런 거 하는 거예요.

자꾸 왜 그런 행동합니까? 내가 나를 그냥 둘 수가 없어요. 내가 나를 지저분한 존재로 방치할 수가 없어요. 왜 방치하면 안 되죠? 나는 죽어야 될 이유를 내 안에 품었기 때문에 죽어야 될 이유를 배제하고 행동하면 안돼요. 내가 죽어야 될 이유는,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서 옳게 보이는 것 때문에 내가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고 죽어 마땅하거든요.

그러니까 벌어지는 일은 선악체계의 상한가를 쳐버리는 거예요. 빨리 수습해서 나로 인하여 피해자가 없게 만들고 나로 인하여 상처받는 자가 없게 만들고, 참 그 사람은 우리 곁에 있는 것 자체가 복이야, 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예요. 이게 자기 잘남의 상한가입니다. 2700 막 올라가서 주가가 3000 돌파해. 코스피 막 올라가.

죄를 죄 되게 했을 때, 그렇게 할 때 자기 의의 상한가가 equal(=), 죽음의 이유의 상한가로 되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될, 더 살 이유가 없는, 내가 저주받아야 될 이유의 상한가를 치는 겁니다. 내가 옳게 보이도록 시도하는 그 자체가.

공속(함께 속해있음)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 공속이 커지면 이걸 공동체라 합니다. 공동체의 기본은 가정이에요, 가정. 자기 가정의 가오, 자기 가정의 위신, 체면. 이거는 뭐 이유도 없이 온가족은 여기에 무조건 복종해야 돼요.

그러나 여기에 2번-그냥 한다는 것은, 내 사명은 내가 죽어 마땅한 죽음을 지켜내는 거예요. 내가 죽어 마땅함을 지켜내는 거예요. 내가 죽어 마땅함을 위해서 내가 기필코 살아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으로써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의 일은 팔레스타인 지역이 아니고 시간 공간이 아니라 시간 공간을 넘어서서 전 기간에 걸쳐서 전 지역에 걸쳐서 주께서는 본격적으로 일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후에 이야기는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방금 이야기한 것이 어떻게 출현되고 그게 사건화 될 수 있는가 그 이야기를 할 거예요. 그러나 그전에 몇 가지 더 이야기할 것이 아직 많이 있어요.

인자, 인간이 아닌 인자, 이 말이 중요합니다, 인자의 내부 전쟁, 인자의 내부적인 투쟁, 인자 이전에는 이스라엘이죠, 내부전쟁이 하나님과의 전쟁으로 이어져서 죽음이 상한가를 친다. 인간의 내부 전쟁이라 하는 것은, 육은 누구를 상대하는가? 육은 육하고 상대하죠. 육하고 상대하면 남는 것은 ‘나는 옳았나?’ 라는 의식입니다. ‘내가 남들 보기에 옳게 행동했어?’ 라고 이렇게 의식이 되는 거예요. 육하고, 사람이 사람하고 상대하는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일상(사) 또는 일상생활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복음을 알고 해도 우리가 만나는 것은 일상과 만나요. 잡담과 애매함과 이런 것. 일상과 더불어서 일상과 만나요. 자, 일상과 만나게 될 때 사람들은 자기가 긴장할까요, 안 그러면 긴장을 풀까요? 항상 일상 속에서는 자기 긴장을 풉니다.

자기 의 체크하기. 일상에 반응하는 인간의 기본자세는 자기 의로움, 자기 의를 체크하기에요. 어떤 사람이 자기 의를 체크하는 방법 세 가지를 이야기했어요.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라는 사람이 자기가 자기를 체크하는 방법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어요. 첫 번째는 책, 두 번째는 거울, 세 번째는 깨어있기. 이 세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사르트르는 이라는 책에서 지옥을 묘사합니다. 지옥을 묘사할 때 지옥에는 세 가지가 없는데 첫 번째는 책이 없고 두 번째는 거울이 없고 세 번째는 깨어있음. 그러니까 지옥에는 잠이 없다는 거예요.

이 사람의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는가? 인간들은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것을 이런 소설로서 잘 보여줬기 때문에 제가 끄집어내는 거예요. 지옥에는 책이 없다는 건 자기표현, 자기 구상이 먹히지 않는 곳, 이게 지옥이죠. 한 열 명이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는데, 특히 예능프로에서 패널들 나와서 이야기하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다 방송분량 가지고 자기 말 했는데 한 사람은 자기 말이 편집돼서 잘리기도 하고 나오지도 않을 때, 그 사람은 뭘 느낍니까? 비참함을 느끼죠. 내가 거기 왜 있는데? 말도 못하고......

책이란 자기표현, 자기 글쓰기에요. 자기 글을 썼다는 말은 의미체계 속에서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그러니까 죽음이 살아있는 게 아니고 내가 살아있다고 저쪽에서 인정해줘야 나는 의롭다는 것이 증명이 돼요. 자기표현.

거울은 뭐냐? 뻔하죠. 지옥에는 거울이 없어요. 거울이 없으면 우리는 누구만 있어요? 타인들만 있죠. 그래서 사르트르는 지옥은 타인이라는 말을 했어요. 이 사람의 유명한 주장인데 지옥은 타인이다. 지옥은 타인이라는 말은 내 뜻은 없고 남 뜻만 있는 곳이 지옥이다 이 말입니다. 그럼 나는 왜 있는데? 내 주장도 좀 하자.

사람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욕망 또는 시선, 나에게 하는 잔소리 그런 것만 있다면 그거 뭐 100억대 재산가, 남들 보기에 단란한 가정, 사이좋은 그런 부부라 할지라도 부부사이에 잔소리가 심해져버리면 그건 사는 게 아니고 지옥이죠. 그렇죠? 자기 주장을 못 펼 때는 지옥입니다. 그때 숨 돌릴 곳이 뭐냐 하면 거울 들여다보는 거예요. 립스틱 짙게 바르고 화장을 고치고. 왁스에다가 임주리인가 뭐 립스틱 짙게 바르고. 이걸 왜 하느냐 하면 나도 나만의 소박한 내 세계 안에서 나의 욕망, 내가 보는 나의 시선을 좀 살려보겠다는 거예요. 그게 허용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지옥이라는 거예요.

세 번째, 깨어있는 것.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이 잠을 못 자는 게 지옥입니다. 늘 초롱초롱하게 깨어있으면요. 안되죠. 그래도 이렇게 자기가 사라지는 그런 게 있어야 다음 날 개운하게 일어날 수가 있잖아요, 다시 원기회복해서.

늘 깨어있으면 기억이 깨어있어요, 기억이. 기억이 깨어있으면 기억이라 하는 것은 남들이 보기에 내가 옳다는 것을 자꾸 증명해야 될 그런 부담을 계속 지고 있는 거예요. 내가 스스로 그것을 짊어지고 있는 거예요. 차라리 모든 걸 놔둬버리고 그냥 던져주고 나를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런데 지옥 불에서는 잠을 재우지 않습니다. 계속 불침번이에요.

그래서 사르트르의 이러한 주장은 눈에 보이는 것, 살아있는 우리끼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간에 어쨌거나 우리끼리 그냥 살자. 그래서 그걸 실존주의 철학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끼리니까 자기밖에 모르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나에게는 타인의 속죄가 필요치 않다.

나에게는 누가 나를 용서하는 게 필요치 않다. 나는 내 식대로 그냥 살래. 내 식대로 살래. 만약에 누가 나에게 속죄를 해버리면 나는 내가 없어지잖아요. 내 가치, 가오, 내 희망 이게 없잖아요. 그게 지옥이라는 거예요, 사르트르에 의하면. 내가 사라지는 게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럼 오늘날 교회 교인들 보게 되면 이건 사르트르도 아니고 양다리 걸쳐있어요. 속죄도 원하면서 자기 주장은 또 펼치고 싶고. 그러니까 어중이 떠중이죠. 자, 나에게 타인의 속죄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 주장인데 이게 진짜 지옥이죠. 항상 자기한테 깨어있으면 지옥이죠.

이제 두 번째 시간에 하겠는데 영의 세계라는 것은 한 사람의 희생이 혜택으로 돌아가는 세계, 이게 영의 세계입니다. 한 사람의 희생이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세계. 그러면 영의 세계에서 지옥은 뭐냐?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만족스러운 희생을 제공할 사람이 없어요.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상은 자기 안에 자기만 있는 사람은, 인자 말고 인간들, 인자 말고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위한 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남에게 돌아갈, 하나님이 받지 않을 그것밖에 내놓을 게 없어요. 안 받습니다. 그게 바로 육의 세계이고 그게 바로 지옥이 되는 거예요.

그럼 천국은 뭡니까? 예수님의 희생이 나한테 실제적으로 혜택이 돌아오는 그런 세계. 그 세계는 어떤 세계냐? 예수님의 인자의 죽음이 우리 속까지 파고들어오면 비로소 우리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주인공이 되면서 우리는 그 혜택을 받는 영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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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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