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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강-하박국 1장 5-11절(폭력과 사면)221026-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하박국

2강-하박국 1장 5-11절(폭력과 사면)2210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1장 5-11절까지입니다.

하박국 1:5-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찌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

성경에 많은 하나님의 기적이 나오거든요. 기적이라 하는 것은 뭔가 일이 잘되는 것을 기적이라 하는데 기적 또는 다른 말로 표적이라는 진짜 개념은, 사람들이 예상 못한 일을 기적이라 해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놀라고 또 놀라운 일이 벌어졌을 때에는 그게 바로 기적입니다.

그런데 기적을, 우리가 못했는데 하나님이 하셔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자꾸 그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 본문에 보면, 5절에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찌어다” 하는 이 일이 어떤 일이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갈대아, 갈대아 사람이라는 것은 바벨론나라를 이야기합니다, 바벨론제국에 의해서 사로잡혀 갑니다.

9절에 보면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지요. 사람으로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마치 사람을 모래같이 취급하는 겁니다. 모래는 하나, 둘로 세는 게 아니고 양으로 달아서 세지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아요.

그 정도로 잔인하고, 인간성을 갖추지 않고, 본문에 ‘독수리의 날음과 같’다고 되어 있어요. 짐승인데 이성이 없는, 기본적인 인간성을 갖추지 않은, 꼭 기계 같다는 말이지요. 잔인한,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잔인한 기계 공장의 기계처럼 움직이는 그런 제국, 바벨론 제국을 앞장세워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기적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폭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곱상하게 생기고 대자대비하고 그렇지 않습니다. 폭력이 개입됨으로써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알았던 자비롭고 사랑이 많은 하나님에서 진짜 하나님으로 돌변하지요. 성경 자체가 폭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 형제지간입니다. 누가 봐도 사이가 좋아야 될 형제지간에 살인사건이 일어나지요. 형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기적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 담긴 이벤트, 사건이지요.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날 때에 뭔가 곱상하게, 곱게 우리가 안 놀랄 정도로, 우리 마음을 차분하게 다독거려 주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전달한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상한, 엉뚱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본인이 원하는 우상적인 하나님, 그걸 생각해 왔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여튼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처럼 인류의 역사를 끌고 가는 그 힘은 공격과 그리고 폭력입니다. 그런데 이 폭력, 하나님께서는 때리는 자, 폭력에 앞장서는 갈대아 사람이 6절에 나오지요, 바벨론, 이 갈대아 사람, 잔인한 갈대아 사람과 그리고 그들에게 그냥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고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아무 대항도 못 하고 맥없이 무너져 나가는 그쪽을 뭐로 보느냐? 이스라엘로 봐요.

하나님의 폭력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루는 것과 그리고 이방 민족,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을 다루는 방식이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폭력 때문에 많이 아프다, 인생이 힘들다, 자꾸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과연 내가 이스라엘 쪽이냐, 저 바벨론 쪽이냐, 그런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구분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 5절부터 11절까지 보면 하나님께서 잠시 누굴 다루느냐? 바벨론을 잠시 다뤄서 누굴 치느냐? 이스라엘을 쳐버려요. 하나님 자기 백성을 쳐버립니다. 이렇게 자기 백성을 쳐버리면 여기서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에 의한 공격과 폭력을 받기 전의 이스라엘과 받은 후의 이스라엘이 차이가 나요.

그러면 진짜 이스라엘은 폭력 속에서 망해버리고, 쪼개지고,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 더 이상 이스라엘이 의지할 데 없는 그 상황이 될 때 진짜배기 이스라엘이 바로 그 때 등장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사람, 바벨론을 어떻게 다루는가? 바벨론은, 이것은 이방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미 있게 다루지 않아요. 그냥 사용할 뿐이지요.

이것은 요지부동이에요, 요지부동. 이방 민족은 그냥 지옥입니다. 이 세상이 그냥 지옥에서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그렇게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세상을 굳이 이길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옥 이겨서 뭐하려고요? 지옥은 지옥 다우면 되지 지옥 이겨서 뭐 그들을 개과천선 시켜서 천국 보낼 일 있습니까?

그런 것 없어요. 그냥 하나님께서는 지옥을 사용해서 가짜 이스라엘을 진짜 이스라엘로 뒤바꾸는 하나의 매개로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잖아요. 폭력을 동원해서, 무력을 통해서. 하박국 선지자가 이스라엘 편이잖아요. 그래서 1절에서 4절까지 기도한 겁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데 하나님 어떤 다음 조치가 없겠습니까?”라고 하소연을 했더니만 하나님의 응답하는 것이 이거예요. “조치? 해야지.” 그게 폭력입니다. 그게 이스라엘이 망하는 거예요.

하박국은 지금 이스라엘이 진짜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고 ‘이걸 어떻게 잘 다독거리고 추스를 수 있는가? 이걸 괜찮게 좋은 이스라엘로 바꿀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해가지고 하소연하면서 하나님 어떻게 도와달라 했는데 막상 하나님의 후속 조치는, 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었다. 기존에 있던 이스라엘은 깨어지기 위한 이스라엘이다. 그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 그 자신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깨어질 때 진짜 이스라엘이 생각도 못 한 이스라엘이 그 현장에 나오는 거예요.

얼마나 하나님의 뜻이 주도면밀합니까? 빈틈이 없지요. 그동안 그렇게 하나님께서 치밀하게 일하시는 이유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된 이유가, 바벨론이나 앗수르 이방 나라에 대해서 그렇게 평소에 선망했고 부러워했어요.

‘우리는 하나님 믿는 사람인데 왜 남들 사는 것만큼 못 사느냐?’라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들보다 더 잘살 수 있을까?’라고 굉장히 부러워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모습 자체가, 그런 지옥을 부러워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는 ‘손 봐야 되겠다, 이거. 이스라엘이 자기가 가짜인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구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간추려서 문장으로 만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또는 우리 성도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 살라고 기회를 주시지 그냥 밥 먹고 계속 살라고 이 땅에 기회를 주시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밥 먹고 잠자고 이렇게 살지요.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 있던가요? ‘어제도 밥 먹었다. 오늘도 밥 먹었다. 내일도 밥 먹겠지.’ 그러면 이건 식충이지요. 이게 무슨 이스라엘입니까! 사람 사는 이유와 목적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살았대요. 애 키우고 잘 먹고 잘살았다. 그게 뭔데요?

바벨론 그 건방진, 지금 이스라엘을 치고 이는 갈대아 사람들, 아주 무서운 갈대아 사람, 7절에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심판과 위령(威令)이 자기로 말미암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스스로 자기가 자기에게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에요.

자, 여러분이 성경을 많이 봤고 교회를 오래 다녔잖아요. 복음을 오래 들었잖아요. 그렇다 치고 제가 한번 물어보게 되면, 여러분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옳은 일은 무엇을 가지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지금 답변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무엇을 옳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시키는대로 하는 게 옳은 거예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일이 옳은 게 아니고 주님께서 시키는대로 하는 게 옳은 거예요.

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게 옳은 일이 아니냐 하면, 사람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이게 자기 의로 전부 장착이 됩니다. 자기가 우상화돼요. 그러면 반대로 성경에서 죄가 뭐냐? 성경에서 죄는 뭐냐? 본인이 본인에게 지시 내리는 게 죄입니다. 주님에게 지시받는 것은 의가 되고 본인이 본인에게 지시 내리고 명령하는 것이 죄가 돼요.

그게 바로 갈대아 사람들입니다. ‘내 돈 주고 내가 하는데 네가 왜?’ 이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졸부들한테서 많이 나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객기 부린다고 돈 만 원짜리를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라이터 불로 태우니까 “아이고 저 돈 만 원짜리 아까운데……” “내 돈 내 맘대로 하는데 네가 왜?” 내가 내 맘대로 지시 내린다는데 네가 왜?

우리가 성경 보면서도 기본적으로 우리 마음이 자꾸 섞여 들어가요. 바르게 살아야지, 착하게 살아야 복을 받지, 반듯하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천국 가게 해주지, 뭐가 바른 것이고 옳은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 다니고 그렇게 복음 듣고 성경 많이 안다고 하지만 막상 ‘옳은 게 뭐냐? 내가 훌륭하게 되는 것.’ 그것은 갈대아사람이지요. 그것은 지옥 같은 이 세상 사람들의 상식이지요.

사람이 바르게 살겠다는 것은 노림수가 있거든요. 꿍꿍이가 있어요. ‘바르게 살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행운을 주셔서 채워주시겠지.’라는 어떤 꿍꿍이가 있다고요. 음흉하게 노리는게 있어요. 요한일서 2장 15, 16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버지께로서 주어지지 아니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 세상에 대해서 조금도 미련 가질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주신 것 외에 다른 것은 우리가 기대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것 없다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춰봐요. 열등의식이나 패배감. 성경에서는, 이 세상 것 속에는 아버지 것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도 없고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없다고 했으면 그게 제가 아까 이야기한 이 세상은 요지부동 지옥이에요.

지옥의 요소가 사실은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그게 있었습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이스라엘 내부성에 이런 지옥 적인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에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경고를 보내는 거예요. 1, 2절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내가 아차 싶을 때가 있었으니 언제냐? 3-9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마음을 두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는 일이 다 만사형통 되고, 풍부하고, 아프지도 않고, 심지어 죽을 때도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그냥 편안히 죽어요. 그걸 보고 소위 신앙인이라고 우겼던, 소위 신앙인 척하는 사람들이 막 살피는 거예요. ‘저 하나님을 안 믿는 인간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망가지는가 보자.’ 하나님께서 ‘봐라. 네가 기대하는 게 그들에게서 나오는지.’

하나님 안 믿고, 하나님에 대해서 신경도 안 쓰는데 어떻게 우리가 선망하는 것,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것 몽땅 다 갖고 있어요. ‘분명히 하나님 안 믿었으니 진짜 아주 저주받을 거야.’ 하나님은 ‘개코~, 저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마음만 평안하고 행복하게 잘만 잘 먹고 잘살기만 해요.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 믿고 뭘 기대합니까? 아주 놀라운 기적? 기적은 뭐가 기적이냐? 폭력을 가지고 나 자신을 치시는 그게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인 것을 이스라엘은 하박국을 통해서 알았어야 되는 거예요. 시편 146편에 보면 3, 4절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사람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은근히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희망이 있기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 하박국에서 핵심은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진실을 이야기해요. 인간관계도 진실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 두 사람은 헤어집니다. 인간의 모든 관계, 연애나 부부도 마찬가지고요, 부모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지만 사람과 사람 간에 꼭 지켜야 될 것이 있어요. 절대로 진실은 이야기하면 안 돼요. 진실을 이야기하게 되면 진실은 서로를 가깝게 하는 게 아닙니다. 진실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고 밀어내게 만들어요.

이스라엘이 하나 되기 위해서 그들은 쉬쉬하고 진실을 말 안 합니다. 그런데 눈치코치도 없이 진실을 말하는 자가 있어요. 그게 세자로 선, 지, 자, 선지자입니다. 지난 번에 제가 ‘선지국’이라 하기도 했지만, 선, 지, 자, 선지자는 눈치코치도 없어요.

왜 그래야 되는가? 가짜 나를, 세상을 부러워하고 있는, 지옥 가는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이 가짜 나, 가짜 나가 어떻게 진짜 나로 탈바꿈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진실을 이야기해 버려요. 진실을 이야기해 버리면 그동안 꼬깃꼬깃 감춰놓았던 나의 단점이, 하나님의 진실과 더불어 찾아오는 폭력 앞에서 나의 단점이 이게 완전히 들통나는 장점이 돼요.

나의 단점이 노출되는 게 바로 오직 성도만이 보일 수 있는 장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성도로 하여금 일체의 자랑거리를 갖고 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조치거든요. 이 얼마나 고마운 겁니까? 남한테 자랑질 못 해서 환장을 했잖아요. 우리는, 모든 인간들은.

조금만 뭐 있으면 자랑하려고 해요. 자랑 이야기하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자랑 없으면 와도 전부 입 다물고 가만 있어요. 우리 교회 교인들 같아요. 그런데 자랑할 게 있으면 교회 오는 게 재밌어요. ‘자기 자랑 들어줄 사람이 가만있어 보자, 몇 명인가? 모르겠다. 오늘 이 사람들에게 자랑해야지.’ 내 인생에 대한 주님이 주시는 폭력은 그 자랑거리를 하나, 둘, 전부 다 마늘 부수듯이 자근자근 다 부숴버리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계시, 선지자의 계시의 놀라운 혜택이고 자랑입니다.

그래야 내가 생각하는 나가 가짜인 것이 완전히 드러나거든요. 그동안 우리가 가짜인 것을 모르고 자꾸,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대충 ‘내가 문제 있는 것을 아니까 하나님이 도와줘서 새 인간 만들어주시고 곱게 곱게 다독거려 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 사랑으로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 바르게 살겠습니다.’ 이런 것. 이게 가짜인 줄 모르는 거예요.

이게 사실은요, 하나님 섬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단도리 하는 거예요. ‘너무 때리지 마세요. 너무 때리면 아파요.’ 이런 것. 자기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도용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 빡세게 다니고, 교회 목사가 시키는대로 다하고, 봉사하고 난리도 아니지요. 혹시 하나님이 날 때릴까 싶어서.

날 때려버리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어요? “예수 잘 믿는 줄 알았더니만 이제 보니 벌 받더라. 믿음 하나도 없으니까 벌 받았지.” 이런 소리 들으면 내 자랑거리, 그동안 퍼 날랐던 자랑거리 다 날아가잖아요. 개념 자체,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의 정신으로 되어 있는 것과 내 정신으로 사는 이 개념 자체가 완전히 달라요. 어느 정도 다른가는 몰라요. 왜냐? 때려서 내가 깨어져야 그때야 아니까.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다른 거예요.

어느 세 살 먹은 딸을 가진 단란한 가정이 있었어요. 세 살 정도, 두 살 내지 세 살쯤 된 딸애가 있는데 부부가 대화 중에 무심코 남편이 이야기했어요. “요새 노트북 바탕화면이 너무 지저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다.” 그 이야기를 세 살 먹은 딸애가 우연히 들었어요. 그래서 평소에 아빠를 너무 좋아해서 아빠를 기쁘게 한다고 그 노트북을 욕실에 가져가서 야무지게 빨았어요. 물에 푹 담가서 솔로 막 문질러서 빨았어요. 그 노트북 죽었습니다. 전원도 안 들어가요. 필리핀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에요.

우리는 우리 생각, 이 가짜인 나, 천국 간다고 우기는 이 가짜인 나, 내가 어느 정도 가짜인 줄도 모르고 무조건 나 보호하는 내가 죽기 전에 예수 잘 믿어서 죽고 나서 천국으로 직행하기 위해서 굉장히 자기가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갈대아 사람, 오만한 갈대아 사람, 이 사람을 누가 부러워했는가? 이스라엘이 부러워했거든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갈대아 사람,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 내에 공통성이 있다는 거예요. 서로 통하는 게 있는 거예요. 아무리 계시적으로 율법을 받고 하지만 본성적으로 다 계시 밖으로 새는 거예요. 서로 막 통하고 걸핏하면 우상 섬기고 이런 거예요.

그 갈대아 사람이라든지 또 이방 민족에게,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든지 하나님의 언약을 전해버리면……, 진짜로 전했어요. 모세가 바로에게 전했거든요. 그때 바로 왕이 이런 평가를 합니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데 그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내 백성 따로 뽑아서 데려가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바로가 한마디 하는 게 그거예요.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 곧 “여호와가 누구, 누구야? 내가 여호와 하는 일에 왜 관여하는데? 그 신은 도대체 어디서 굴러온 신이야?” 이렇게 된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요, 복음에 대해서 거부할 권한이 나에게 있다는 거예요. 바로의 주장이. 복음에 대해서 거부할 권한이 나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애초에 복음을 거부할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언제 아느냐? 모든 인간이 죽고 난 뒤에 알아요. 요한복음 5장 28, 29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렇게 거부했던 복음, 그렇게 거부했던 주 예수를 이것은 뭐 불교 신자든 알라신을 믿든 그것은 하나의 취미니까 놔두고, 모든 인간은 죽고 난 뒤에 반드시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은 종교가 아니에요. 실제상황입니다. 실제상황인데 그들은 어떤 종교를 가지기 때문에 ‘이 예수는 또 무슨 희한한 종교인가?’ 종교의 일종으로 여겼던 거예요, 종교의 일종으로.

제가 지금 불신자보고 이야기하는 것인지, 소위 신자라고 우기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여러분이 알아서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요, 이것은 종교 생활 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거부할 권한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언제 아느냐? 죽어서 아는 거예요. ‘야~, 참, 우리가 예수님의 낯을 피할 수가 없구나.’ 죽어서 아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특별조치로 미리 당겨서, 죽어서 아는 그것을 살아 있을 때 알게 하는 방식을 어떻게 하느냐? 이방 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전부 다 죽게 만들어요. 박살 나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이래도 네가 가짜 이스라엘 아니야? 이래도 네가 나를 믿는다고 할 수 있어? 가짜 맞지?” 그럴 때 이스라엘이 ‘오, 내 거, 내 재산, 내 목숨 날아간다.’ 그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고 죽어서야 아는 그것을 주님의 선지자의 예언에 따라서 우리를 제대로 심판을 해주시는, 이 심판 속에서 살아 있으면서 그걸 경험하는 거예요.

야~, 참,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복이! 죽어야 아는 것을 살아생전에 안다는 것, 내가 가짜라는 것, 나는 세상을 좋아한다는 것, 그래서 복음을 시큰둥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가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짜 가짜라는 사실, 가짜 신자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 이게 바로 기적이 아니고 뭡니까? 주님이 주신, ‘내 것을, 내 자랑할 것, 내 것, 내 목숨은 아예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 이게 아무나 얻을 수 있는 혜택이 아닙니다. 진짜 이스라엘에게 이런 혜택이 주어지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제 남은 게 뭐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깨부쉈다. 그들을 포로 잡아갔다. 죽였다. 하박국에서 많은 사람을 잡아갔다 했는데 예레미야 52장 29, 30절에 보면 “느부갓네살의 십 팔년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아 옮긴 자가 팔백삼십 이인이요.” 물론 그 전에도 잡혀갔어요. “느부갓네살의 이십 삼년에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사로잡아 옮긴 유다인이 칠백 사십 오인이니 그 총수가 사천 육백인이었더라.”

다니엘이 그전에, 20년 전에 잡혀갔던 BC 606년에 잡혀간 것, 그것 빼고도 이만큼 잡혀간 거예요. 자, 잡혀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잡혀갔다는 것, 개인적으로 굉장히 기분 나빠요. 주도권을 빼앗기고 누구의 종노릇 한다는 것 굉장히 기분 나쁘지요.

그런데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한 것을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포로 잡힌 데서 해방되는 것도 기적이지만 포로 잡혀간 것도, 진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기 위해서 그것도 일종의 해방입니다. 출애굽이에요. 엉터리 같은 나로부터의 해방, 잘못 생각하고 있는 나로부터의 해방, 그게 포로 잡혀가는 거예요.

제가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주지가 확실한 곳은 어디일까요? 교도소입니다. 교도소는요, 24시간 불철주야 보디가드들이 지켜줘요. ‘어디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는 주거지를 옮길 필요가 없습니다. 20년 동안 여기서 사시면 됩니다.’ 이걸 20년 언도라 하는 거예요. 주거지가 확실하거든요.

주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계시를 주게 되면 이스라엘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 우리는 죄 안에 갇혔다는 그 계시를 보여주는 증인의 노릇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죄 안에 갇혀 있고, 저주 안에 갇혀 있고, 율법안에 갇혀 있고, 요지부동 어떤 착한 일을 해도 우리는 그것이 아담의 본성상 어떤 착한 일의 잔소리를 들어도 내가 나에게 지시 내리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갇히게 한 이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해석을 내려주시는 거예요.

자, 그러면 그렇게 갇히게 된 이유가 뭐냐? 진짜 복음이 그 뒤에 제시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교도소에 있는 사람에게 제일 기쁜 소식은 사면이에요, 사면. 사명 말고 사면(赦免) 죄를 없애주는 것. “더이상 당신은 죄와 관련 없습니다. 당신은 죄 없는 사람입니다.”

이걸 가지고 로마서 8장 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또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사면되었습니다. 사면되었어요. 사면되었으니까 그야말로 사면되면 모든 것이 가능해요. 사면되었으니까, 사면된 자로 움직이니까 동으로, 서로, 남으로 움직이고 어제도 사면, 오늘도 사면, 내일도 사면, 죽을 때도 사면된 상태에서 죽으니까요. 이걸 고상한 말로 ‘사면 is 뭔들.’ 사면이 되어버리면 뭔들 못해요, 뭔들?

무서운 일? 두려운 일? 걱정 근심? 그게 뭐꼬? 내가 사면받았는데. 이 사면받았다는 이야기를 마태복음 20장에서는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건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16절에 보면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자, 뭐가 어려우냐 하면, 바벨론과 이스라엘을 비교해보자는 거지요. 바벨론은 아주 신바람 나버렸어요. 자기 힘 있다고, 군사력 있다고 거침없이 “거봐. 신이 있어서 우리 축복 줘서 내가 네 나라를 삼키잖아. 너희들은 지은 죄가 많아서 우리한테 당해야 돼.”라고 아주 신바람 났지요.

그런데 바벨론은 자기들 까불고 교만하고 오만한 그것으로 그냥 가요. 이 세상은 요지부동 지옥이라 해요. 요지부동 지옥이라서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가요. 하지만 진짜 이스라엘은 변화가 일어나요, 변화가. 그 변화를 주목해 보라는 거예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그 변화를 주목해 보라는 겁니다.

진짜 성도는 전에 십자가를 몰랐던 나와 지금의 나가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그 변화 자체가 일어났음을 기뻐하고 그 변화가 뭐냐? 사면조치였던 거예요. 전에는 뭐냐? 나도 몰랐지요. 내가 죄 안에, 죄라는 교도소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성령 받고 난 뒤에, 사면되고 난 뒤에 아는 거예요.

‘전에는 내가 뭘 해도 내가 나한테 지시 내리고, 내 인생 내가 챙기는 내가 나한테 지시 내리는 항상 죄 된 행동만 나왔던 그게 나였다. 그런데 이제는 사면하시는 주님의 사면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떤 일도 시키더라. 주께서 나한테 일을 시키더라.’ 이게 사면받은 자의 자유함, 또는 가벼움이에요.

이왕 어려운 것 좀 더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0-3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여기서 주님께서 강도에 대해서 일말의 비난하지 않습니다. 강도, 그 사태를 일으킨 원인 제공자 강도에 대해서 일체 입을 다물어요. 왜? 강도는 강도니까 변화의 여지가 없어요. 그런데 지금 강도 만난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강도 만난 사람은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진짜 이스라엘이 누구냐를 보는 거예요. 제사장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한테 비난받았던 사마리아인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줬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지요. 예수님 자신입니다. 왜? 모든 성도는 상처받은 자니까. 이 세상의 강도들에 의해서 상처받은 자에요.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훌륭함, 착함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주는 어떤 분의 존재가 성도한테는 절대적입니다. 나보다 더 절대적이에요. 나보다 더 절대적입니다. 나는 내 안에 있으면 안 되고 나는 예수님 안에 있어야 돼요. 내가 내 안에 있으면 내가 나에게 지시 내리는, 또 그 죄를 되풀이하게 됩니다. 자기가 지시 내려놓고 될까 안될까, 자기가 고민하고요. 자기 스스로 자기 늪에 빠진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이미 사면 자체가 나에게 지시 내리고 명령내리는 거예요. 네가 하는 일을 통해서 이렇게 용서받았음을 증거 하는 그런 남은 시간만 있는 거예요. 우리에게.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심지어 내가 자랑질 하고 싶은 것이 그게 깨어지더라도 그 폭력조차 주님의 놀라운 사랑의 기적인 것을 우리가 받아야 됩니다.왜 그것조차도 사면되었다는 소식으로서 동반해서 주어지는 사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참하게 이방 민족한테 망가지는 것은 배후에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이스라엘을 다른 이스라엘로 바꾸기 위한 조치인 것을 저희들은 이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로 이스라엘 사정이 오늘날 우리의 동일한 사정이 되어서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 용서받은 자로 백성으로 산다는 것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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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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