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21013b슥14장20절(죽음의 노예)-이 근호 목사
안양20221013b슥14장20절(죽음의 노예)-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왜 나의 구원은 안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진실이 초막절이 쥐고 있기 때문에 안 이루어진 거예요. 이건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는 오늘 본문처럼 이방나라까지 적용됩니다. 이방나라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던 그 하나님이 초막절이니까 초막절은 죽음 경험이거든요. 죽으심만이 진정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죽음만이 진정 살아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두 종류가 있다. 지금 나이 들어서 죽는 것, 그냥 육신의 죽음. 두 번째는 최종적 죽음은 오직 하나님만이 죽을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못 죽어요. 아담에게 죽으리라, 했잖아요. 선악과 따먹었다고. 그 아담에게 정녕 죽으리라, 를 아담이 그걸 실현해 내지를 못합니다. 아담보고 정녕 죽으리라고 명령하신 그 하나님이 본인이 죽는 죽음이 진정한 죽음이에요.
명령내린 명령은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최종적으로 구현할 수 있지, 그 명령 받은 인간은 구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뜻은 안 이루어져야 되지요. 당연히 안 이루어져야 되지요. 왜? 진실이 아닌데 왜 이루어져야 돼요. 안돼요. 진실은 주님만이 이룰 수 있어요. 죽음도 삶도 주님만이 이루어져야지 진실도 아닌 우리가 이룰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장점은 주님과 동행한다는 점이 장점이에요. 홀로 있지 않고 율법을 주신 주님과 함께, “율법 지켜라! 내가 기다릴게.” 이게 아니라 율법 주신 하나님이 율법적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 그 결과가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 여호수아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서 비로소 벌어진 일들이에요.
여호수아에서 계속 일들이 터질 때,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물어야 될 것은 뭐냐, “우리와 함께 하나님이 계신다.” 가 아니라 교회에서 말하는 함께 계신다, 가 아니라 이렇게 물어야 돼요. “함께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라고 물어야 돼요. 함께 계신 분이 어떤 분이냐, 물어야 돼요. “집에 남편 있어요?” “남편 있어요.” 이게 아니고 “남편 어떤 분입니까?” 모르지요. 함께 살아도 모르지요.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함께 있어도. 그 내막을 알 수가 없지요. 집에 자녀가 있지요. 자녀가 어떤 애 입니까? 몰라요. 앞으로 한 커플, 두 커플, 양파껍질처럼 계속 나올 거예요. 그러나 다 나오기 전에 내가 늙어 죽을 거예요. 그리고 나는 결국 내 애가 누군지를 몰라요. 어떤 애인지 몰라요. 인간은 서로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도 몰랐으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자기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줌으로서 터져버린 일들, 그게 여호수아입니다. 인간은 사건들의 집합체. 인간은 사건들의 집합체에요. 그래서 인간의 자아는 기억을 담는 방식, 또는 그릇이 돼요.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과거의 기억을 담아서 말을 하는 거예요. 과거의 기억을 담아서. 그러면 자아는 뭐냐, 그 기억을 미래까지 이동시키는 하나의 운반 그릇이 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자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애굽에서 갖고 있던 게 뭐였어요? 기억이지요. 기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온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 배제하고 직접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와 싸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싸움에 보태준 거 있습니까? 없지요. 그냥 제자리에 있었는데 승리는 누구 승리입니까? 이스라엘 승리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이 바깥으로 나오게 된 거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원로들이 모여서 회의해가지고 “야, 애굽에서 못 살겠다. 나가자.” 회의한 적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왜 그런 회의를 못합니까. 그들은 애굽의 바깥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들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최고의 국가의 바깥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들이 지향하고 바라보는 것은 우리도 애굽나라처럼 절대 왕권의 전제정치 절대왕이 지배하는 이 거대한 나라가 그들의 소망이기 때문에 자기 소망을 스스로 철회하고 소망 없는 곳으로 퇴보한다. 이건 인간에게는 없어요. 우리 망하기로 합시다. 이걸 회의 주제로 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김건희라는 그 이름의 여자분이 대통령 부인이 논문 쓰면서 “나, 이 논문은 내가 무엇이 표절인가를 그 극치를 보여주겠다.” 이런 목적으로 논문을 썼습니까? 아니지요. 그건 아니지요. 목표가 뭐냐, 박사학위가 목표잖아요. 나 박사학위 안 받아도 돼. 논문의 표절이 이런 게 표준이야. 이리 해야 표절이야. 그걸 보여주려고 쓴 건 아니잖아요.
인간은 반대로 자기 존재를 부인한다는 쪽이 아니고, 자기 존재를 극대화 절정으로 긍정하는 쪽으로 누구든지 지향하는데 그게 바로 인간의 기억이에요. 그걸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참, 얼마나 골치 아프겠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결국은 약속의 땅을 차지했지요. 그거 보세요. 이거 웬일이에요? 어떻게 그 약속의 땅을 차지했으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거기에 대한 힌트가 전에 울산강의하면서 우리 전도사님이 저를 울산역까지 끝나고 난 다음에 태워주거든요. 태워주면서 조수석에 안전벨트를 했어요. 했는데 자기가 생각난다는 거예요. 자기가 전에 목사님이 앉는 그 자리에 쌀가마를 얹고 운전을 하니까 차 소리가 자꾸 삑! 삑! 나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쌀가마에 안전벨트를 안 했어요. 우리가 아는 안전벨트는 뭐냐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이지 쌀가마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닌데 이게 자동차라는 기계는 그걸 파악하지 못하고 무조건 안전벨트 풀렸으니까 삑! 삑! 시동은 걸었지 안전벨트를 안하니 소리가 나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쌀가마에 안전벨트를 했다는 거예요. 쌀가마는 기분이 좋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안전벨트를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절기라는 이름으로.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니가 안전벨트를 안 하면 적을 이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 형편이 그런 형편이에요. 대단한 형편 아닙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를 구경하면서 개인적인 텐트는 없고 전부 다 집단텐트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텐트는 있어도 의미 없기 때문에. 똑같은 형편에 놓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놓고 하나님께서 “자, 가자!” 이리 되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데요?” “가자, 사막으로!” 사막으로 갈 때, 사막으로 가면서 백성들이 얼마나 불안에 떨었겠습니까. 물도 없고, 양식도 없을 때에.
그 때 모세를 통해서 알려준 말이 내 율례와 법도를 지키면 된다. 아~~, 이건 무리한 요구입니다. 율례와 법도를 안 지키면 뭐가 되느냐 하면,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오지요. 애굽에서 익혔던 기억에 의하면 인간은 어쨌거나 저쨌거나 무조건 어떤 경우라도 죽으면 모든 것은 다 실패다. 이걸 몸에 익히고 온 거예요. 인간들은. 모든 인간들은 그래요.
그런데 광야에서 율례와 법도를 지켜라, 는 뭐냐 하면 죽음을 너의 주인으로 삼고, 너는 그 죽음에 노예가 되어라. 이게 여호수아의 주제입니다. 보통 인간은 주인이 누구냐 하면 내가 주인이에요. 주인이기 때문에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도 안 죽어야 돼요. 안 죽어야 됩니다.
그러나 율례와 법도 앞에서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돼요. 왜? 더러운 인간을 애굽에서 뽑아냈으니까. 더러운 인간은 율법의 관점에서 더러운 인간은 지극히 더러워해야 그게 율례와 법도가 함께 공존하고 있던 티를 내기 때문에 그래요.
자, 우리 가운데 십자가가 있다. 또는 십자가 지신 주님이 있다, 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 우리에게 합당한 대우입니까. 천하에 죄인 중에 괴수가 될 경우에만 십자가를 증거 할 수 있어요. 이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법무부 차타고, 본 적은 없는데 드라마에서는 봤어요. 법무부 차를 타고 거기 흉악한 제소자들 수갑 채워서 호송차 하잖아요. 호송할 때에 그 호송차 내부를 제복을 가지고 유니폼을 가지고 두 그룹을 구분해야 돼요.
운전사하고 호송하는 그 사람은 법무부 제복을 입어야 돼요. 그리고 뒤에 있는 제수들은 무슨 옷을 입어야 돼요? 죄수복을 입어야 되지요. 그런데 죄수들이 이렇게 법무부의 제복을 입고 앉아가지고 히히덕 거린다는 말은 도중에 중간에 반란을 일으켜가지고 운전사 빼앗고 지금 탈취해가지고 지금 교도소가는 길에서 자기는 지금 탈출하는 중이라 보면 되지요. 드라마 보면 그런 거 많이 있으니까. 호송을 얼마나 어설프게 하면 지가 수갑을 알아서 다 풀어가지고 운전사 뒤에 해가지고, 그걸 정의로운 검사가 끝까지 억지로 해가지고 범인 잡는다고 언론에 막 내는데 범인들은 가는 호송차 속에 전부 다 한패가 돼가지고..., 그래야 드라마가 되니까. 뭔가 구분 지어야 되지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를 대단한 존재로 자부하고, 자연이나 하늘이든, 별이든, 해든, 나를 살리는 이유 때문에 저 달이 있고, 별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에요. 타인이 있는 이유도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있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사람들이. 흔히 복음 안다 하는 사람이 입만 열면 그런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요. 주의 은혜로 이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주의 은혜로 뭘 살렸다는 말인고. 나를 살렸다. 나를 살리는 게 아니고 복음을 살려야지. 왜 자꾸 나를 살렸다고 하는가. 주의 은혜로 복음을 또 깨닫게 되었습니다. OK. 그건 인정하겠는데, 복음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또 밥 먹게 되었습니다. 밥을 언제까지 먹으려고. 밥은 요양병원에 가도 주는데. 죽을 때까지 밥 주잖아요. 아, 밥 죽을 때까지 밥 주는데, 그 밥 얻어먹으려고 하나님이 도와주는가, 그건 아닐 건데. 주의 증인 되라고 지킨 거고, 십자가 복음 지키기 위해서 주께서 줬는데. 그건 중간에 뭔가 그 배식을 지가 날름 탈취한 거 같아.
그래서 주님께서는 죽음이 너의 주인공, 죽음이 주인공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율례와 법도가 주인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로 의도적으로 죽음의 길을 가게 하는 겁니다. 여호수아에 보면 나와요. 출애굽기에도 나오고요. 출애굽하고 여호수아, 민수기, 레위기, 신명기 다 연결되었다고 보시면 돼요. 어쨌든 광야생활이니까.
그런데 신명기 같은 경우는 그래요. 그 사람들이 가다가 소가 도살장에 걸어가다가 갑자기 앞발로 버티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소가 진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소가 인간이라면 자기 죽을 자리 보고 본능적으로 자기는 버티는 거죠.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광야에 나와서 그냥 바로 들어가도 되는데 왜 40년간 뱅뱅이 돌아 그 광야길 뱅뱅이 돌았습니까. 본능적으로 자기 살 생각을 하니까 버티게 된 거예요.
이러다 우리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기가 차지요. 너는 벌써 죽었어. 이미 애굽에 나올 때 이미 죽은 채로 나왔고, 니가 홍해 건너 올 때 죽어서 건너온 거 기억 안나? 우리 주일학교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만, 그림 자체가요, 그림이 멋있어요. 푸른 물감으로 해가지고 바다를 그려 넣고 애들 아주 소풍가듯이 이렇게 해가지고 건너오는 모습의 그림이 있어요. 그림을 여러 번 보여줬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다른 말투로 하면 “이게 뭐야. 이게? 도대체 이게?” 왜 멀쩡한 길 놔두고 물속으로 기어들어가요. 이건 죽음의 길, 죽음의 길을 들어와야 거기서 생명의 길이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니가 죽는 것이 니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그건 끝을 알아야 버릴 것을 알아요. 이 새 책 나왔는데 새 책 끝에 보면 그 표지에다가 그걸 딱 걸쳐놨어요. “끝을 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니가 이제 버릴 것을 버려라.” 인간이 본능적으로 버티지요. 본능이니까. 욕망이니까 이건 못 고칩니다. 인간이 어떻게 욕망을 이깁니까. 욕망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그 버티게함으로서 거기서 속마음을 주께서 들추어내는 거예요. 바깥에는 율례와 법도의 세계인데 니 안의 세계는 율례와 법도를 거역하는 본능이 자리 잡는 그 두 개의 이질적인 것은 광야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아요. 광야 아니면. 왜 초막절을 지켜야 될 이유를 알겠지요.
초막절은 그동안 인간이 초막절과 얼마나 절기와 얼마나 싸워왔다는 것을 극단적인 텐트 생활을 통해서 그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그 마지막 절기가 초막절이지요. 쌀가마에 지나지 않은 게 내가 안전밸트 해주니까 안전밸트의 의미도 모르고 지가 쌀가마인줄 모르고 인간인줄로 알고 차가 왜 덜렁 덜렁 거립니까. 이리 나오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덜렁거리든 위로 튀든 간에 안전밸트 채웠잖아요. 이 쌀가마야! 쌀가마도 아깝다. 사실은.
나의 끝은 초막절이 쥐고 있어요. 나의 끝은 죽음이 나를 쥐고 있어요. 그래서 쟈크로 된 옷 같은 거 쟈크를 중간에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두렵지요. 하지만, 쟈크를 끝까지 다 내려서 아주 쟈크가 그 궤도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봅시다. 튀어나왔다고 본다면 그럼 그건 뭐냐,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거예요.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튀어나오고 다시 쟈크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이건 뭐냐 하면 이건 내가 죽으려고 두려워했던 그 때 자아가 체험하지 못한 준비된 새로운 체험. 주님 가신 길, 좁은 길이지요. 영생의 길.
영생의 길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영생이 되었는가를 체험할 수 있는 여분의 시간이 되는 겁니다. 여분의 기회가 되지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여호수아를 한 번 보겠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광야 생활 끝나고요, 본격적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시점부터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감자샐러드라고 봅니다. 감자샐러드 저도 한 번 만들어봤어요. 하도 유세 떨어서 나도 한 번 만들어보자. 유세 떨만한지. 감자 두 개 삶고, 계란 두 개 삶고, 마요네즈 준비해가지고 그래가지고 할 때, 요 과정이 멋있어요. 으깨버린다. 자기의 개별적 동질성이, 어느 게 감자지? 어느 게 삶은 계란인지? 전혀 표 안 나게 으깨버린다는 거예요. 이게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의 특징이에요.
감자샐러드 먹고 있는데, 단독으로 감자덩어리가 있다면 그 즉석에서 으깨버리지요. 그게 아간이에요.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해가지고 그대로 눌러버리지요. 개별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감자 샐러드를 으깨서 하나로 만들어줘야 이방민족이 어떤 종류의 이방민족을 맞닥뜨렸다 할지라도 그쪽은 전체가 하나가 되는 거예요. 거룩 대 세속의 대결구조.
거룩 대 세속의 대결구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게 있어요. 거룩과 세속의 대결구조라 했지요.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대결구조는 아닙니다. 거룩 과 세속의 대결구조는 맞는데요,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대결구조가 아니에요. 거룩은 이스라엘이고, 세속은 이방민족이다. 이렇게 막 연결시키면 안 됩니다. 그러면 뭐냐,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차이를 통해서 거룩과 세속의 대결구조 이건 맞아요.
자, 대결하는 것과 차이 나는 것, 차이 나는 것은 내 위주의 대결은 우리 인간에게는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로마서 보겠습니다. 성경 가운데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하나 중에 하나가 원수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 그 대목이에요. 그게 로마서12장 19절에서 20절에는 어떻게 풀어지는가 한 번 보세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이거 지금 누가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보고 이야기하지요. 성도보고 이야기하면서 친히 뭘 갚지 말라? 너의 원수를 니가 갚을 자격이 너한테는 없다는 거예요. 너의 원수를.
부부싸움하면서 웬수야! 웬수야! 하잖아요. 실질적으로 우리의 원수는 없어요. 어제 수요일날 제가 기도제목을 하면서 기도제목이 바로 이런 취지였습니다. 남한테 강요하지 말라. 남을 윽박지르지 말라. 그 사람도 지 맘대로 사는 게 아니다. 그걸 기도하라는 거예요. 우리는 뭔가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서 명령하고 지시하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줄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사람 말을 듣지 않고 주님 말을 듣지, 인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둘 다 으깨져야 하기 때문에. 둘 다 개별자의 자격으로 살 권한이 없기때문에 그래요. 개별자 자격으로. 그래서 고린도후서5장에 보면 성도는 자기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자기 자체가 자기를 위해 산다는 자체를 으깨버렸으니까.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서 일어나고 형성된 일들이에요.
아까 후딱 했는데 다시 하게 되면, 인간은 사건의 집합체입니다. 인간을 하나 하나 뜯어보게 되면 전부 다 사건, 사건, 여기에 관련된 사건, 숱한 사건, 숱한 계기들, 숱한 사람들이 일어난 일들이 모여서 이게 질서 잡힌 것이 이게 내 몸이에요. 내 몸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거기에 관여하고 있는 거예요. 불교는 요 정도는 알고 있어요. 연계설. 하나를 위해서 잇다라 연결되어있다는 거예요. 누가 했는지 그건 몰라요. 누가 했는지를 몰라요. 주 하나로 세상은 통일되기 위해서 하는 그건 몰라요. 그냥 현상만 바라보고 있어요. 많이 바라보다가 나중에 초막절한테 걸려가지고 바라본 눈 다 동굴처럼 시커멓게 될 거예요.
자,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 했습니다. 이건 원수가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원수가 생기거든 너의 원수가 아니고 주님의 원수인지를 파악하라는 겁니다. 왜? 어떤 인간에게도 인간의 원수를 주께서는 만들어낸 적이 없어요. 모든 건 주님의 원수이지 너의 원수가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원수에게 갚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율법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과대하게 보복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지나치게, 과도하게. 그런데 어느 정도가 지나친지 그건 인간은 알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율법은 지키지 못할, 인간은 지킬 수 없는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 다음에 20절에 봅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이게 참, 원수입장에서는 진짜 이건 그 원수입장에서는 자기 자아를 비침하게 만드는 행동들이에요. 남편보고 담배 끊으라고 잔소리하던 아내가 남편이 술 먹고 와서 담배 피울 때 담배 딱 끄집어낼 때, 라이타 해가지고 담배 불피워주는 요 모습. 캡쳐해서 사진 한 번 찍어보세요. 이거 얼마나 못된 아내에요. 엿 먹어라. “내가 하지 말라는 것은 또 했지. 인간아! 나는 니를 도와주고 싶어.” 이런 거. 이게 도와주는 겁니까? 니는 철저하게 악에 니는 내 율법에 망가져야 돼! 이런 뜻이다 이 말이지요.
원수에게 먹을 것을 줌으로서 원수가 개과천선하지는 않아요. 원수로 하여금 혹독한 처벌이 주어지게 되는 그 계기를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그리함으로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뜨겁지 니? 부끄럽지 않아? 너는 지금 부정 못해. 니가 원수 짓한 것에 내가 보탰기 때문에 니는 빼도 박도 못하게 너는 악이야. 그래서 21절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말입니다. 악을 악 되게 들추어내기 위해서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입니다.
아,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이에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자기 업무 정지 당했잖아요. 누구한테? 사울왕한테. 그런데 사울이 찾아왔을 때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사울을 어떻게 했습니까? 막 독약 먹여가지고, 푸른난초 옆에 놓고, 푸른난초 모르지요. 에 나와요. 그렇게 했습니까. 저주했습니까? 아니지요. 임금님 힘내세요. 먹이고 입혔지요. 그래서 천국 갔습니까? 신접한 여인이. 동기생이라는 거죠. 지옥의 동기생이에요. 반갑다. 친구야!
진실은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등장해서 모든 꿈을 다 짓밟아버려요.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은 지금의 내가 만든 가설입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지금 만든 거예요. 지금. 지금 나의 어린 시절의 감상은 그 어린시절 그 때 돌아가도 그 때는 전혀 없어요. 첫 아이가 태어날 때 보통 옛날 사람 같으면 20대 후반, 요새 같으면 30대초반 되겠지요. 애기가 태어났습니다. 애기 태어날 때 아빠들, 애기한테 정신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가장 인생에서 자리 잡을 때에요.
거의 24시간 가운데 집에 와서도 회사 생각해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자리 잡을 수가 없어요. 자기 직장생활할 때에. 여자는 애기 임신했으니까 집에 있고. 집에 있으면서 하루종일 뭐하느냐 하면, 이 아기를 저 남자가 얼마나 어디까지 보장해주고, 언제까지 생활비 대줄것인가, 하루종일 아하고 옆에 누워가지고 그거 생각하다가 뚱뚱해지지요. 그런데 남자는 애를 낳아도 짐스러워해요. 이제는 사표를 내도 함부로 못 내요. 이왕 사표 못 낼 거 승진해야 되지요. 그러면 안 하던 아부해가면서 안 하던 짓거리 해가면서 그저 직장 안 떨어져야 그 자식까지 있다는 그 책임감을 내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그런 남자가 한 30년 지났다고 봅시다. 꼭 자식한테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니 처음 어릴 때 내가 니하고 안 놀아줘서 미안하다. 그러나 어릴 때 미안하다는 그 미안한 감정은 지금 자기가 만든 가설이에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게 되면 미안하고 자시구 할 게 없어요. 밤늦게 잔업하고 12되어서 자야 되는데 내일 아침 또 7시 되어 출근해야 되는데 새벽2시에 애가 앵하고 운다. 애들고 그냥 던지고 싶어요. 요새는 아파트라서 높아서 못 던지지만, 옛날에는 아파트가 아니고 단독주택이기 때문에 던질 수가 있어요. 바닥까지 던질 수 있어요. 요새는 창문 열고 던지면 큰일나지요. 잠 좀 자자. 니 때문에 잠을 못 자겠다. 힘들지요. 내가 고생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라는 말이 입에 달았어요. 지금까지 고생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술만 먹고 들어오면 그 소리하잖아요. 누구 때문인데. 뭐 누구 때문에? 니 때문이지.
죽음 자체가 주인이 되지 아니하면 기껏해서 회개한다는 것이 지금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해서 자기 정당함을 위한 가설을 내세우는 것이 기껏 하는 짓이에요. 미안하다. 그 때 못해줘서 미안해. 우리 다음에 놀러갈까. 어디 제주도 갈까? 그 때 못해준 거 채워줄게. 그 채워준다고 위로가 됩니까. 지나간 것은 지나갔는데요. 끝나버렸는데. 그게 돼요?
아무리 이스라엘이 이방나라를 이겨도 그 성과가 이스라엘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장치까지 여호수아에게 마련되어있습니다. 야! 우리가 이겼다. 가 되면 안 돼요. 이건 이스라엘과 이방나라가 대결구조가 되는 거거든요. 차이 나는 건 이해되는데, 대결구조는 최종성과는 누구한테 가야 되느냐, 하나님이 대결하는 곳에 가야 되지요. 하나님이 대결하는 곳이 뭐냐, 놀랍게도 이건 세속 나라가 아니고 이방나라가 아니고 우상입니다. 우상. 자, 그렇다면 만약에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긴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는 대결구조가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사기에 노골적으로 되어있어요.
죽음이라는 것이 최종적이라는 것이 여호수아 어디에 나오는가, 여호수아 마지막에 한 번 봅시다. 24장32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무엇입니까? 요셉의 뼈. 아버지의 죽음이지요. 우리 이스라엘 아버지의 죽음이에요. 아버지의 죽음을 운반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의 죽음에 기꺼이 노예들이에요. 그럼 이번 승리는 누구의 덕이다? 아버지의 죽음의 덕분입니다. 그 아버지 요셉. 그 아버지의 죽음. 요셉의 죽음은 그 죽음을 통해서 뭐가 나오느냐, 약속이, 죽음이 아니면 약속이 안 나와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요,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처음 들었지요. 십자가, 십자가, 수천번 들었을 거예요.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십자가가 뭡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 노예가 됐다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의 죽음이 주인이 되어서 우리는 그의 운반체고, 직원이고, 집사고, 그의 증인이고, 그분의 종이 되고, 그분의 노예가 된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이 땅이, 오늘 여호수아를 왜 끄집어내느냐, 땅 문제 때문에 끄집어내요. 땅. 땅 문제에요. 땅을 어떻게 정복하느냐, 정복될 수 없는데 어떻게 정복했느냐, 그 땅이 빈 땅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꽉 채워졌지요. 무얼로 꽉 채워진 땅이냐 하면, 죽음의 종이 아니라 살겠다는 신, 너를 살려줄게 라는 신들의 땅이에요. 이게 바로 열 족속이고, 이게 바로 이방민족이에요. 나를 살려주는 신. 두 자로 우상이지요.
오늘날 교회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교회들 목사 설교하는 거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 살려줍니다. 지금 그 이야기만 되풀이해서 계속 내놓잖아요. 하나님께서 은혜로 여러분을 살려줍니다. 그러면 성도 같으면 어떻게 하느냐, 싫어요. 그 소리 그만하세요. 스탑! 스톱은 아니고 스탑! 스탑! 그 소리 그만하세요. 죽어도 좋은 이유만 설명해 주세요. 그거 말고. 어떻게 사느냐만 이야기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내 목숨 사느냐 그런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은 말씀주세요. 내 목숨과 바꿀만한 말씀주세요. 이 목숨이 짐이고 지긋지긋합니다. 끝내더라도 기쁘게 끝낼 수 있는 말씀주세요. 그렇게 외쳐야 되지요.
외친다고 들을 사람 아니니까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그럴 때 그들은 뭐냐, 사람의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에요. 그 하나님의 원수를 이 땅에서 먼저 이스라엘 사람이 접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합니다. 이 전쟁은 너의 전쟁이 아니고, 나의 전쟁이다. 모세언약의 전쟁이다. 너와의 대결구조가 아니고 나와의 대결구조다. 그럼 나는 뭐냐, “이스라엘 백성들아! 내가 뭘 갖고 있지?” “언약궤요!” “또 뭐 갖고 있지?” “율례요!” “또 뭐지?” “율법입니다.” “그러면 적들은?” “언약궤가 없어서.” 아, 그건 틀린 말이지요. 살고자 하기 때문에.
적들은 본인이 본인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극단적인 것은 다 갖고 있어요. 본인이 본인을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 쳐들어온다는 소식 듣고, 본인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하는데, 그 수단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거짓되게 항복하는 것도 포함돼 있어요. 기브온 사람들. 거짓되게도 항복했어요. 여호수아 다 할 필요 없고요. 이 시간에.
기브온 사람들이지요. 그 사람들. 가까운데서 왔으면서 곰팡이 핀 떡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속였잖아요. 속였을 때, 그들을 처단할 수 없는 이유는 언약이 언약하고 체결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하고 체결한 게 아니고 언약하고 체결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관여 못해요. 그것도 언약 요소에 포함되는 겁니다. 어떻게 포함되는가, 하나님과의 전쟁인데, 이스라엘은 자기 가오, 자기 자존심, 체면, 그것만 챙기면 됐지 뭐. 이런 식으로 그 전쟁을 자기 체면을 위한, 자기 명예회복을 위한 전쟁처럼 이렇게 인간의 내부에 죄악성이 마구 마구 나온 거예요. 여호수아 전쟁 속에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이방민족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왜 복음 모르는 사람들과 부딪치고 늘 주변에 복음 모르는 사람들만 생기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저는 뭐 복음 아는 사람만 만났는데요.” 언제 변질될 지 어떻게 알아요. 언제 집사가 잡사가 될 지 어떻게 알아요. 복음 안다고 하는 목사가 언제부터 복음 모르고 자기 기분에 도취해서 사는지 어떻게 알거에요. 그런 거조차도 주께서 의도적으로 조성한 환경이에요.
“저 사람과 니가 다른 바가 있는 줄 아나. 똑같아 본성이.” 라고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겁니다. 만나게 함으로서. 중요한 것은 니가 구원받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필요로 해서 너를 사용한다는 그 관계, 언약관계가 중요한 거예요. 그 언약 관계가 뭐냐 하면 아까 했어요. 죽음의 종. 오늘 제목입니다. 죽음의 노예. 적어놔야 돼요. 나중에 죽으면..., 신나지 않습니까.
초막절이라는 것은 집 버리고 그냥 텐트생활하는 거예요. 한데. 바깥에. 텐트나 하나 달랑 치고. 죽음 체험이에요. 죽음 체험. 싸이가 전에 부산에서 쇼를 했는데 쇼 이름이 무슨 쇼이름이라 했습니까. 흠뻑 쇼. 물을 흠뻑 적신다. 했는데 코로나에 흠뻑 적셔. 주께서는 우리를 죽음에 흠뻑 맞닥뜨리게 하는 거예요. 어디 전쟁에서. 강력한 무기를 가진 이방민족과의 전쟁에 집어 뜰게 해가지고, 우리가 기피하는 죽음을, 우리가 본능적으로 기피하는 죽음을, 오히려 죽음을 기피하는 우리를 가지고 강제로 죽음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겁니다.
무기가 뭐냐, 할례였습니다. 할례. 할례는 조기에 자살하는 거거든요. 이미 죽었음을 내 몸에다가 새기는 것이 할례입니다. 조상에서부터는 육신의 그 흐름을 중간에 차단시켰으니까요. 이제는 육신으로부터의 고리가 끊어지고 약속과 이어져버리지요. 약속과 전복되었어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된 겁니다. 할례. 마음의 할례. 그래서 부산에서는 할례라는 것은 마음의 할례는, 육신의 할례는 끝을 잘라버리지만, 마음의 할례는 마음을 드러내고 거기다가 속된 것부터해서 거룩으로 이어가는 제사장의 움직임 또는 제사 제물의 움직임 또는 제사 피의 움직임, 하나님께 흔쾌히 받았던 그 제물의 피가 마지막 지상 속까지 뿌려지는 고 때까지의 과정을 우리 속에 담아버립니다.
그럼 우리 일상은 어떻게 되느냐, 맨날 불신자와 만나는 거예요. 불신자. 거기서 나온 유명한 포맨. 송재원씨가 한 팀에 있었던 포맨이 불렀던 노래. 맨날 술이야~. 세상의 문화는 다 필요 없는 게 없어요. 맨날 술이야. 우리는 맨날 불신자만 만나요. 어서 오세요. 불신자. 눈동자 빠져서 휑한 불신자, 혀바닥 썩은 불신자. 맨날 만나는 사람이 불신자만 만나요. 불신자 남편, 불신자와 같이 동거하기. 불신자와 함께 머물기. 도대체 이 불신자가 머물러 줘야 “주님, 저 언제 자를 거예요? 아이구, 지긋 지긋하다. 정말.” “아직 멀었어. 주의 증인. 더 해야 돼. 이 집사야!” 집사란 뜻은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본인이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누구 일을, 남의 일을, 그 사람 일을 하는 게 집사잖아요.
우리가 갖고 있던 가설, 나 위주의 세상보기, 여호수아처럼 그냥 이 땅 주인이 있는데 땅 주인도 아니면서 땅 주인이 있는 데를 이건 아주 억지같이 쳐들어가는 과정이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가 전쟁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아까도 했지만, 여호수아 24장32절에 요셉의 뼈를 세겜에다가 딱, 중심 거기에 본부가 있던 곳이에요. 세겜에 누워서 딱 하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겠어요. 바로 이곳이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분입니다. 주님의 계시는 곳입니다. 그게 바로 신약에서 말하는 약속의 땅이에요. 천국입니다.
죽은 자의 땅. 약속의 땅이에요. 천국입니다. 죽은 자의 땅. 십자가 죽으신 분의 그 분의 계시는 곳으로 우리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데려간다는 것은 그 동안 그 사이에 얼마나 엄청난 기적과 기적이 연속되어야 가능한 일이에요. 엄청난 기적이지요. 그래서 무빙워크라는 게 있지요. 무빙워크. 수서역에도 있는데. 가만히 있으면 도로가 가는 게 있잖아요. 그것처럼 절기 위에 우리가 놓이는 거예요.
절기위에 놓이면 절기가 알아서 움직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따라서 절기 따라서 같이 움직이지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무빙워크를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어요. 지금도. 뭐냐,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이게 이방 나라에서는 계절,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절기. 이게 절기잖아요. 주님이 여기서 돌리는 거예요.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돌릴 때, 유대인들은 주님이 돌리는 것을 알지만, 이방민족은 이건 자연스러운 일로 보는 거예요. 봄오면 여름되고, 여름되면 가을되고, 가을되면 겨울되고.
그런데 돌리는 그 절기가 맨 그 땅이 그 땅이 아니라 결국은 이 세상이 초막절이 보여주는 저주 받을 자와 모든 것이 거룩할 자를 가려내는 무대가 바로 땅이었다는 겁니다. 그 무대에서 이 인류를 대표해서 먼저 학예회를 벌린 자가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약속의 땅이라는 제한된 구역을 하나님이 일하시는 무대로 딱 장치를 해놓고 거기에 이스라엘 사람들로 보내서 제일 먼저 한 것이 할례 행하게 했지요. 할례.
처음에는 할례부터 한 게 아니고 언약궤부터 앞장 세웠는가 그렇지요. 처음에 여리고성 정탐했고요, 요단강 건너가지요. 언약궤부터 앞장 세운 거예요. 언약궤. 언약궤는 뭐냐,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계시지요. 언약궤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이 뭐로 바꿨느냐 하면 이게 주의 이름이 돼요. 주의 이름. 이름을 가진 하나님이 이 말은 이름을 가진 인간들 개별자 속에 들어왔다, 하나의 개별자 속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들어와서 주의 이름이 되어버리면 그 주의 이름 앞에 이름을 가진 모든 인간들은 감자샐러드처럼 으깨져가지고 자기 이름을 그냥 유지하면 안돼요. 없애버려야 돼요. 할례도 그렇고. 그러니 여리고성을 누구 이름으로 건졌다가 승리하면 돼요? 여리고성을 함락한 것은 주의 이름이지. 이스라엘 누구의 영웅이라든지 여호수아 때문에 하지 않아요.
여호수아 전쟁할 때 하늘에 뭐도 멈췄습니까? 해가 멈췄지요. 해가 멈췄다 하는 것은 여호수아가 앞장선다 할지라도 그 전쟁은 어디까지나 주의 이름이지요. 평소에 여호수아가 취미로 해를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취미를 가진 자가 아니잖아요. 평소에 해하고 관계있습니까. 없지요. 해와 관계있는 분은 지금 전쟁을 압도하고 전쟁을 선두지휘하는 주의 이름과 관련있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쟁의 이스라엘이 거기에 같이 합류하게 된 겁니다.
기생라합을 여리고성에서 건져낼 때, 붉은 줄. 붉은 줄을 늘어뜨리는 것. 이런 것 하나, 하나가 기생라합에게 주께서 했던 작용한 것이 붉은 줄 하나로 표현이 되도록 다 주께서 모든 일에 주께서 하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럼 여리고성 들어갈 때 언약궤 들어갈 때나, 언약궤가 요단강 건너갈 때, 여리고성할 때도 언약궤 들어갔잖아요. 언약궤라 하는 것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만, 뭐냐, 주님이 앞장 서는 그곳에 우리는 뒤에 노예로서 따라가야 되지, 내가 주의 일하겠다고 얼쩡대고 앞장서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절기가 스스로 회전하도록 주께서 오셨고, 이 땅에 고난받으시고, 십자가 죽으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는 이 순환구조. 무빙워크에 우리가 그냥 올라타기만 하면 되지요. 참 편해요. 문제는 디스코 팡팡이 문제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울퉁불퉁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이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원수 된 요소를 바깥으로 끄집어내게 하는 주님의 사랑인 것을, 주님에 대한 축복인 것을, 이제는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감사하는 저희들 마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