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3장 1절 (예상 못함) 221004b-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3장 1절 (예상 못함) 221004b-이근호 목사
빌라도가 제우스 신에게 무슨 제물 드렸던 그거는 상관없는데 갈릴리 사람들 피를 섞어서 한 것은 바로 노골적으로 빌라도가 의도한 거라고 보는 거에요. 율법에 나와 있는 신에게 드리는 제물을 하지 말라 하는 식대로 그대로 한 겁니다. 그 식이 뭐냐? 레위기 17장에 보면 나와요. 레위기 17장에 보면 제물에 절대로 피를 접촉하거나 피를 섞거나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레위기 17장 10절에 보면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레위기 11장 32절에서 35절에 보면 “이런 것 중 어떤 것의 주검이 나무 그릇에든지 의복에든지 가죽에든지 자루에든지 무엇에 쓰는 그릇에든지 떨어지면 부정하여지리니”
부정이 뭐라고 했습니까? 더러운 것. 율법이 있음으로서 없던 부정들이 확산되고 확대되기 시작하는 거에요. 없던 부정들이. 이렇게 하면 더러워진다는 말은 애초부터 너희들은 이미 더러움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 더러움의 실체를 내가 드러내마. 그런 취지로 율법을 주신 거에요.
33절에 보면 “그것 중 어떤 것이 어느 질그릇에 떨어지면 그 속에 있는 것이 다 부정하여지나니” 34절 “먹을 만한 축축한 식물이 거기 담겼으면 부정하여질 것이요” 이게 원인이 뭐냐? 시체와 접촉됐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래요. 시체와. 35절에 “이런 것의 주검이 물건 위에 떨어지면 그것이 모두 부정하여지리니 화덕이든지 화로이든지 깨뜨려버리라 이것이 부정하여져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 되리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뭐로 전제로 합니까? ‘너희들은 거룩하다’ 라고 전제하면서 너희들이 거룩한 너희가 시체 만지면 더러워진다 라는 자체를 율법화시킨 거에요. 이걸 하나의 베일로 베일, 하나의 장막을 해서 포획해서 둘러쳐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백성들 입장에서는 ‘아 우리가 거룩하구나’ 가 아니라 이 거룩을 유지하는데 급급하게 만들어버렸죠.
새로운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점점 더 거룩을 유지하는데 힘들어져버려요. 아버지가 로또 해가지고 만약에 10억을 집에 뒀다. 그런데 아버지는 출타 중인데 빚쟁이들 와가지고 “너희 집에 돈 많으면서 잔소리 하지 말고 3억 내놔.” “우리 집 돈 없다니까요.” “저기 3억 있네. 있잖아! 있으면서 왜 없다고 해! 가져간다.” 아들이 의아해하는 거에요. 이 3억이 언제 생겼지?
그 다음에 또 다른 빚쟁이가 와서 “5억 내놔!” “5억? 우리는 5억 구경도 못했는데.” “저기 있네 5억 있네.” 아버지가 언제 5억 뒀지? 그러니까 아들은 예상 못한 일이 벌어진 거에요. 언제 우리가 10억이나 있는 부자가 되었지? 마지막 남은 2억까지 다 긁어갈 때 아 역시 우리는 거룩해서는 안 되는 가정이구나.
끝까지 거룩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고 그 거룩을 율법이 와가지고 거룩이 나한테 해당사항이 없음, 네가 거룩 받을 그런 쨉도 안돼 그것을 들추어내는 것도 율법적 기능이에요. 그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인간은 처음부터 부정하다는 것을 율법을 준 이스라엘에게는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 율법 중에 하나가 뭐냐? 화목제물. 화목제물이고 모든 제물이고 그래요.
자, 그럼 여기서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왜 피를 먹어서는 안 되느냐? 왜? 왜 인간은 피를 먹어서는 안 되느냐? 창세기 9장 4절에 보면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난히 피에 대해서 인간이 살인을 하거나 남을 죽여서 피를 흘려서는 안 되고 또는 짐승의 피나 사람의 피나 피를 마셔서도 안 된다 라고 언급하는 그 이유가 뭐냐? 창세기 4장에서 땅이 나와요. 땅이. 땅이 대사를 해요. 드라마 같으면 땅이 대사가 있어요. 그냥 폼만 잡는 게 아니고. 대사가 있어요 땅이. 땅이 하늘을 보고 호소합니다. 고자질을 해요.
그 말은 땅과 하나님 사이에 이미 계약이 성립되어 있어요. 어떤 계약이 있는데 그 계약은 뭘 하느냐 하면은 어떻게 하면 땅이 더러운 땅이 저주 받은 땅이 정화되는 땅, 깨끗해지는 땅, 거룩한 땅이 되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어떻게 땅이 정화될 수 있는가. 그 땅이 정화되는 것을 점차적으로 들추어내면서 뭐부터 언급하느냐 하면은 이런 식으로서는 땅이 정화되지 않는다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이런 식으로서는 땅이 정화되지 않는다.
자, 땅이 처음부터 더러웠습니까? 아니면 땅에 도달했기 때문에 더러웠습니까? 어느쪽이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 땅이 저주 받았어요? 저주 안 받았어요? 저주 안 받았지요. 그땐 저주 안 받았지요. 그렇지요? 그러면 더럽다는 것, 부정 탄다, 저주받을만하다, 심판받아야 돼. 그 더럽다는 것 그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원래 없어야 될 게 발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뭐냐? 죽음이에요. 죽음은 죽음이라는 것은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죽음은 애초부터 죽음 계획이 없는 게 아니고 죽음 자체가 현실화돼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선악과 따먹지 않을 경우에는 네가 죽지 않고 추가적으로 주는 보너스가 있어요. 죽지 않고 그 다음에 생명나무를 마음껏 따먹을 수가 있어요. 만약에 선악과 따먹는 날에 뭐부터 후딱 치워버리느냐 하면은 생명나무부터 따먹을까 해서 후딱 이렇게 격리시키는 조치가 주어집니다.
그 추방시킨 곳이 어디냐? 그게 땅이에요. 대지에요. 대지. 범죄 한 인간이 땅에 떨어짐으로서 땅은 그때부터 엉겅퀴와 그 저주받은 양상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또는 땅의 입장에서 뭐를 증명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빈틈이 없이 착착 추진되고 있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지요.
그래서 인간들 보기에 땅은 그냥 땅이지만 땅에 cctv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에 아벨에 나왔던 그 피가 죽었잖아요. 죽으니까 피가 나왔단 말이죠. 그 피가 나왔다는 것은 누가 죽음을 유발했다는 뜻이거든요. 그 죽음을 유발한 그 범죄로 인하여 죽음을 유발한 그것이 땅에 도달되니까 그것이 뭐냐? 땅을 저주케 하는 요인이 되는 거에요.
땅이 더러워지겠지요. 땅이 더러워진다면 지금 무엇을 모독한 것이 되냐면 땅의 정화, 땅을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한 하나님에게 대해서 도발적인 행위가 되는 겁니다. 마귀가 가인을 부추겨서 그런 짓을 한 거에요. 땅을 개판으로 만든 거에요. 땅을 개판으로. 그러면 대구강의에서 했지만 그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서 언급을 했거든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이라는 게 결국 뭐였던가요? 뭐를 점유했던 건가요?
우리가 살 땅을 내가 점유하는 게 그들의 구원 개념이에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내가 점유 하는 거에요. 이 말은 인간은 무엇이 없이는 못 산다? 인간은 땅 없이는 못 산다. 오늘날에도 성도는 땅 없이는 못 살아요. 오늘날 성도의 땅이 하늘나라입니다. 우리 주님의 땅이 성도의 땅이 되었어요. 그걸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돌아갈 본향이 있다. 이 땅 말고 저 땅이다.
그래서 대구강의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는 이유는 떨치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엘리야로 하여금 맛있는 짜장면, 짬뽕 많이 주는 게 아니라 까마귀로 음식 주는 이유가 엘리야가 갈 그 땅은 불수레 타고 가야 될 그곳이에요. 그 엘리야가 나중에 변화산에서 누굴 만나서 이야기합니까?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누구 만납니까? 예수님 만나지요.
모세가 약속의 땅 봤습니까? 못 봤습니까? 자기 살아 있을 때. 못 봤지요. 약속의 땅은 보다 발전된 진전된 언약에 의하면 그 땅은 땅이 아닙니다. 율법의 땅이라는 것은 새로운 땅을 다시 완성을 시킬 때 예수님의 세계가 아들의 나라가 곧 새로운 땅으로 등극해서 그 땅에 자기 백성들 다 끌어모으는 거에요. 새로운 이스라엘 다 끌어모으는 거에요. 그게 성령 안이에요.
그래서 제물은 뭐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들이 저질러놓은 이 더러움을 정화시키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제사법을 준거에요. 여기서 중요하지요. 제물은 목적이 인간 정화가 아니고 뭐냐 하면은 땅의 정화에요. ‘땅의 정화’. 인간 거룩이 아니고 땅의 거룩이에요. 땅을 정화하고 그 다음에 땅을 먼저 정화하고 이게 순서입니다. 땅이 먼저 정화되고 그 정화된 땅에 과연 살 만한 인간이냐? 정화된 인간을 여기에다가 두게 만드는 거에요.
어떻습니까? 개인 구원 없지요. 개인 구원 날라갔습니다. 인간 구원 없습니다. 땅의 구원이죠. 땅. 땅부터 먼저 깨끗하게 하고 그 땅에 살 만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해서 거기에다가 인형 만들어서 심어놓는 거에요. 인형처럼.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뭐냐? 인형이죠. 거룩한 땅에 살 만한 거룩한 인형. 작은 아씨들. 뭐 드라마를 봐야.
그 땅을 정화하는 방법이 뭐냐? 그거는 인간을 재껴버려요. 인간을 재끼고 따로 다른 인간을 세웠어요. 그 다른 인간을 기존의 인간과 차별화시키는 새로운 인간, 그게 제사장입니다. 그게 제사장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왕이 있는 나라가 아니고 누가 있는 나라냐? 제사장이 있는 나라. 그래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 제사장의 나라에요.
그 제사장 중심으로 한 분으로 집약된 분이 누굽니까? 대제사장. 제사장도 마찬가지로 보통 인간이잖아요. 아까 제가 첫째시간에 인간과 이스라엘을 구분했지 않습니까. 언약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체. 율법이 완성되면 사람의 인격이 나오는데 거룩한 율법으로 완전히 형상화시킨 대상이 누구냐 하면은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은 전체가 모자부터 해가지고 발끝까지 심지어 속옷까지 전부 다 거룩이에요. 거룩. 전부 다 거룩이에요. 그런데 그 제사장 안에 들어 있는 몸은 누구의 몸이냐? 범죄 한 아담의 몸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인간은 이미 아담으로 범죄했기 때문에 더러운 거에요. 더러운 인간을 깨끗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적용되는 율법과 땅에 적용되는 율법과 같은 율법으로 양쪽 다 발라버려야 되지요. 양쪽 다. 양쪽 다 발라버려야 되는 거에요.
그럼 땅에는 짐승이 있을게 아니에요. 양, 소, 염소. 거룩한 것을 흠 없는 것들을 택하여서 인간 재끼고 그 제단에 사람이 죽는 게 아니에요. 누가 죽습니까? 땅의 짐승이 죽는 거에요. 땅의 짐승이. 땅의 짐승이 죽는 거에요. 땅의 짐승이 죽을 때 그걸 대신해서 죽는 겁니다. 그러면 그 본질 부위를 누가 차지하느냐? 짐승이 차지하겠지요. 인간을 재껴버립니다.
인간을 재끼고 인간을 대변해서 다른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을 대신하여 짐승이 등장하지요. 그러면 거룩한 짐승이 주가 되고 종속되는 것은 인간이 종속되겠지요. 그러면 인간의 피는 안돼요. 더러워서 안돼요. 짐승의 피는 돼요. 짐승의 피를 가지고 제사장 오른 귓부리부터 오른팔, 오른 발가락까지 전부 다 그 짐승의 기름과 짐승의 피를 거기에다가 적셔야 돼요.
속죄제할 때 또는 제사장 임명식할 때 합니다. 그것뿐만 아니에요. 속죄제, 번제제 모든 제사에는 짐승의 피를 제단에 사방에다가 바르고 성막 입구에다가 그 피를 뿌립니다. 제단에도 뿌리고 성막에도 뿌리고 온 천지 피로 도배를 하듯이 뿌려대는 거에요. 피가 뭐겠어요? 피가 거룩과 더러움을 가름하는 하나의 베일이 되는 거죠. 막이 되죠. 막.
인간의 피는 안 된다고 했지요. 이 말은 뭡니까? 인간의 피는 안 된다는 말은 더러운 것을 옹호하는 식의 믿음은 허용되지 못한다. 더러운 것을 옹호하는 식의 믿음. 이게 뭡니까? 인간의 행하는 것을 옹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간주한 적이 없다. 믿음으로 간주한 적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계는 양을 잡을 때 양 바치는 사람이 잡거든요. 제사장이 잡는 게 아니에요. 양 바치는 사람이 양 잡고 제사장은 피만 뿌리고 안수하고 하는데 안수하는 것도 그 사람들이 안수하고 제사장이 처리하는데.
그러니까 양의 피를 바른다는 말은 항상 무슨 뜻이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계는 양을 잡을 때 그들이 잡았잖아요. 제사장들이 피 뿌렸잖아요. 그 선을 이스라엘은 못 넘어가는 거에요. 양 잡아도 우리가 잡았는데. 우리 제사장이 제사 드렸는데. 그게 뭡니까? 제사장도 더럽고 양 바친 사람도 더럽잖아요. 더러운 것을 옹호하는 식의 믿음은 허용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율법에 양 잡으라고 해 놓고 양 잡았는데 양 잡은 그게 죄가 되는 거에요. 그러면 어쩌라고?! 그게 주의 뜻이에요.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그냥 율법 시키는 대로 저주 받아야지 뭐 어쩌긴 어쩌겠어요. 율법으로 구원될 수 없어요. 그럼 복은 언제 받습니까? 주제에 복을 넘보기는. 네가 율법을 알어? 내가 추가적 율법 줘볼까? 네가 과연 복이 언제 저한테 옵니까 이런 소리 나오는지 율법을 한 번 줘봐?!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디모데전서 6장 한번 볼까요? “태어날 때 아무것도 없이 왔으니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하라” 한번 해볼까? 우크라이나 난민 한번 만들어봐?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로 아는 것. 통장이고 펀드고 없어요. 하루 한 끼 먹는 것도 고마운 줄 알아 이것들아 이렇게 된단 말이죠. 그것도 율법이잖아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했거든요.
그러면 그 나라 의를 구할려면 그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게 그 나라 의를 구하는 게 아니에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지 않아야 그게 그 나라 의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눈만 뜨면 염려하는 게 그건데. 이게 체질화됐는데 무슨 수로 그걸 끊어요. 손목가지 끊는다고 끊어질 거 같으면 끊지요. 안돼요. 손모가지 끊고 모가지 다 끊어도 안돼요. 나머지가 퍼떡거리면서.
이걸 보고 제가 인간은 예상한 것만 예상해요. 인간은 예상 못합니다. 주님의 구원을 예상할 수가 없어요. 제발 양 되지 말고 염소 되지 말고 희생 소 되지 말라는 거에요. 왜? 그럴 자격이 안 되기 때문에. 왜 자꾸 인간을 재끼고 재끼느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빈자리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만 한 일.
그 일은 우리가 못하는걸 예수님이 해내신 게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뭘 못하는지를 예상 못해요. 주님이 일을 다 이루었다 해야 아! 저걸 예상 못했구나 비로소 예상 못한 것을 소급해서 뒤늦게 발견하는 걸 이걸 이게 바로 믿음이에요. 내가 저걸 몰라서 죄인이고 저걸 몰라서 우리 보고 행하지 말라는 이유가 저기 있었구나. 이 말은 이미 완료된 이야기에요. 주께서 못한 것을 우리가 예상 못한, 못한 것을 다 이뤘기 때문에 뒤늦게 우리는 아는 거에요.
아버지가 로또 됐구나. 그래서 빚쟁이가 5억 달라 3억 달라 이게 되는 구나. 나는 아버지 한 푼도 없는 줄 알았지. 10억이나 있었구나. 이미 다 이뤘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신 것만 원합니다. 원하는데 그것도 우리 보고 원하지 않고 원해도 무슨 뜻인지 몰라요. 이미 주께서 다 이루고 받을 거 다 받았다는 것을 그냥 통보해주는 거죠. 늘 통보해주는 거에요. 너는 너 수고한 것과 네 예상한 것 가지고 미혹되지 말라. 그게 교만이라고. 그게 세상에서 종교적으로 생각해서 잘못된 거룩과 부정의 개념이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이런 이야기가 레위기 7장 32절 보겠습니다. “또 너희는 그 화목제물의 오른쪽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를 삼을지니” 화목제물은 하나님께 바치는 거에요. 제물은 하나님이 먹으시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먹고 하나님 맛있게 먹었다는 그 후담 뒤에 주어지는 ‘내가 네 제물 받았어’ 라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다는 증표가 뭐냐? 그것이 제사장에게 화목제물의 일부를 제사장 몫으로 주는 거에요.
그러면 제사장의 집안이 먹을 게 생기지요. 그럼 제사장은 목숨이 부지가 돼요. 누구 덕분에? 하나님이 기쁘게 제사를 흠향하는 조건하에 제사장은 생계가 목숨이 보존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연결고리가 되느냐 하면은 이 제사장이라는 사람들은 누구한테 매여 사는 사람이 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율법에 전적으로 매여 사는 존재가 되는 거에요. 이게 제사장이에요. 율법이 없었으면 제사장이라는 그 직책 자체가 없고요 거룩이라는 것도 성립되지를 않아요.
자, 제사장이 거룩한 이유는 외부에서 주어진 뭐가 왔다? 피. 짐승의 희생제물의 피가 몸에 오는 거에요. 몸. 자, 보통 인간들은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 어디로 표시가 되느냐? 표징으로 나타나는가? 이게 육체로 나타나거든요. 마음속에 있는 것이 육체로 나타나요 인간은. 이걸 징표라고 또는 징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육체의 징표로 나타나는 것, 이게 뭐냐 하면은 제사장의 신체입니다. 제사장의 신체고 생활모습이고 활동모습이고. 제사장은 과부하고 재혼하면 안돼고요 제사장은 처녀하고만 결혼해야하고 조항들이 계속 있어요. 제사장을 주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었느냐 하면은 제사장에 종속된 나로 만들기 위해서 제사장 하나를 율법화된 인물로 만드는 겁니다. 율법화된 인물.
그러면 율법이 없었으면 제사장은 더러운 인간이죠. 더러운 인간인데 보라 저 제사장이 거룩한 인물이 되었잖아. 그런데 그 이야기 듣고 제사장이 역시 주께서 우리를 알아주는구나 이러면 안돼요. 왜냐 하면은 제사장의 속을 채우는 것은 본인의 마음이 아니고 율법이기 때문에. 율법으로 꽉 채워진 자가 제사장이에요.
그러면 아까 뭐냐? 땅의 정화가 우선이라고 했지요. 땅의 정화. 그럼 땅은 어떻게 되는가? 다시 말해서 레위지파, 제사장. 제사장이 제사를 지내는 조건하에 땅은 약속의 땅은 생산물을 내게 되어있어요. 생산물을 내었다는 땅의 징표도 또 내야 돼요. 땅의 징표가 씨앗을 뿌리니까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다. 그걸 1년 단위로 세 차례 절기를 만들어서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갖고 와야 돼요. 그게 유월절, 맥추절, 추수하는 수장절. 초막절 또는 칠칠절. 그렇게 해서 세 개의 절차가 거룩한 땅에서 인간이 살 인간이 새롭게 등장한 거에요.
자, 그렇다면 거룩한 땅을 왜 거룩케 하느냐? 하나님께서 왜 거룩케 하느냐? 그 땅에 하나님 자신이 거기서 살려고 해요. 이게 임마누엘이거든요. 그러니까 너희를 살려줄게 가 아니라 너 구원해줄게 가 아니라 내가 있는 곳에 오면 돼 이게 하나님의 구원이에요. 내가 있는 곳에 오면 돼. 나와 합류하면 돼. 신명기 12장 한번 봅시다.
12장 5절에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동해서 어떤 특정 지점을 찾아가요. 그 특정 지점이 뭐냐 하면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땅이 아니고 하나님 본인이 자기 거주지를 장만할려고 그 약속의 땅을 정복해 나가시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조건이 있어요. 12장 12절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18절도 마찬가지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왜 레위인을 자꾸 두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이름이 여기에 현존, 여기 실존이죠. 하나님 여기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안 보이잖아요. 율법으로 꽉 찬 레위인, 제사장. 그 레위지파가 자꾸 증표를 보여주는 거에요. 주님 여기 계시다고. 주님이 여기 계시고 그 가운데서 레위인이 주님 계신 것을 빙 둘러서 있으면서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레위인이 계속 보여주는 거에요.
보여주는데 일반 백성들은 그 보여주는 증표를 증표라고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은 예상 못할 일들이 일어날 때 아! 예상만 하는 인간들 말고 초법적인 존재,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와 함께 있구나를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레위지파 또는 제사장을 통해서 매일같이 받는 거에요. 매일같이 받는 방법은 뭐냐? 십일조 드리는 거죠. 십일조.
십일조 방향이 이렇거든요. 십일조를 드릴 때 자체순환구조를 갖고 있어요. 십일조가. 왜냐하면 십일조 드리는 그 곡물이 누가 생산한 겁니까? 죄인인 인간이 생산한 겁니까? 더러운 인간이 생산한 거에요? 아니면 하나님이 생산한 겁니까? 하나님이 생산한 거에요. 그러면 땅은 누구 땅인데? 하나님 땅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이거는 임대차 계약인이죠. 품꾼이에요. 품꾼. 레위기 마지막에 나옵니다. 28장에. “너희는 내 종들이다” 이 땅에서 농사는 짓되 세금은 바쳐라 하는 거에요. 임대차 계약.
하나님의 곡식 나올 때 적당한 햇빛과 그리고 비와 태풍 가뭄 다 없게 해주시는 것이 누굽니까? 하나님 본인이 거주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기 수고죠. 자기가 수고해서 곡식 얻었잖아요. 그러면 거기서 그 중에서 몇 분의 일을 가져온다? 1/10을 레위지파한테 바치고 제사장은 누구한테 바치고?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 바친 것은 화목제물로 도로 제사장에게 주어지고 레위인에게 주어지게 되면 레위인과 제사장은 누구 덕분에 삽니까? 백성 덕분에 사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분 덕분에 사는 거에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하고 자기 백성하고 너희들 나랑 같이 살자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그 땅에서 나랑 같이 살자. 그러면 십일조를 드리는데 10분의 9는 노동하는 자기 몫인가? 아닙니다. 왜 아니냐 하면은 이게 안식일 날 6일 동안 노동했잖아요. 하루 쉬었잖아요. 그 6일 동안 노동한 게 하루 쉬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10분의 9는 10분의 9를 가져가기 위함이 아니라 십분의 일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10분의 9를 가져가게 남겨두는 거에요.
10분의 9는 10분의 1이 없었으면 발생되지 않았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10분의 1을 자기 소유하지 않는 거에요. 그럼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10분의 9를 가진 사람이 자기 외부에 두겠지요. 하나님께 두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뭐냐? 십일조에 종속되겠지요. 그 십일조가 히브리서에 7장에 멜기세덱 예수님입니다.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는 그 존재, 실존하는 존재의 내가 여기 현존하는 존재가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는 운명, 그게 성도의 운명.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보이는 내가 그분의 증표로서만 존재하는 그런 처지. 그게 오늘날 성도입니다. 그걸 성령을 받으면 네가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멜기세덱에서 온 10분의 1에서 주어진 10분의 9. 다시 말해서 선물이죠. 뭐든지 배우자든 결혼이든 결혼 안 하든지 자식이든 직장이든 뭐든 재산이든 부동산이든 전부 다 선물입니다. 모든 게 선물이에요.
그러면 그 10분의 1에 해당되는 자가 결국은 레위인한테 드리고 레위인은 또 누구한테? 제사장 드리죠. 그 제사장이 하나님과 제일 근접한 위치의 제사장이 있어요. 레위지파의 땅은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있기 때문에 레위지파 땅의 특징은 인간 소유의 땅은 레위지파는 없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이렇게 되어있어요. 하나님 자체가 레위인의 기업이다. 하나님 자체가.
이 말은 쉽게 말해서 제사장의 특징은 내 것 없어도 괜찮아요. 내 소유 없어도 괜찮아. 나는 왜냐하면 내 것이란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되거든요. 왜냐하면 내 것 자체가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의 것으로 그 자체로 종결되기 때문에 주님의 것에서 내 것 따로 뽑아낼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에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부산에 시장 가면 오뎅 어묵 있잖아요. 질문해볼게요.
여러분 오뎅이 똑같습니까? 다릅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오뎅 꼬치 똑같아요? 달라요? 이 세상에 같은 어묵은 없어요. 다 다르지요. 볼록볼록 튀어나온 게.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뭐라고 합니까? 다른 어묵 주세요 하지 않아요. 그냥 어묵 달라하면 막대에 꽂은 거 그거 주잖아요. 어묵은 똑같지요. 제 말은 다양성 속에서 하나다 이 말이죠. 제가 말한 건 다양성 속에 하나에요.
그게 성도입니다. 성도는 다 다른데 오어묵 박오뎅 홍오뎅 최오뎅 이오뎅. 오뎅이 거기서 거기지 뭐 그 맛이 그 맛이지 뭐. 뭐가 달라요 똑같죠 뭐. 인간은 바로 같다는 것부터 자기가 알아야 돼요. 다같이 더러워요. 성도만 깨끗한 게 아니고 다같이 더럽고 부정해요. 다같이 부정하고 다같이 쓰레기에요.
서울대 나온 쓰레기하고 고대 연대 나온 쓰레기하고 다른 쓰레기 아닙니다. 어묵은 서울대학교 앞에서 파는 어묵이나 고,연대 앞에서 파는 어묵이나 똑같은 어묵이에요. 한번 먹으러 가볼까요? 똑같잖아요. 우크라이나 어묵이나 미국 캐나다 어묵이나 똑같아요. 오뎅은. 부산오뎅이나. 인간은 똑같습니다. 다 부정해요. 더러워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들어와봅시다. 왜 피를 먹지 말라는지 알겠지요. 더러운 건 안 받기 때문에 그래요. 더러운 것. 이 땅이 하나님이 계신 땅이기 때문에 감히 인간이 네가 감히! How dare you! 네가 감히! 하나님 계시는 땅이에요. 인간들 땅이라고 우리끼리 아닙니다. 우리끼리 민족은 북한에서 하는 거고요. 우리끼리 민족. 우리끼리가 아니에요. 오뎅끼리 뭐하겠다고.
주님이 함께 있어요. 그게 임마누엘이에요. 그 주님이 누군데? 인간은 매개로 하지 않는 신은 신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사람으로 오신 그 분 중심으로 뭉쳐져요. 그분이 영원한 제사장이에요. 그분이. 그분의 피로 그 외부적인 피로 우리가 깨끗함을 얻습니다. 피 말고 다른 거 없어요. 믿음은 피를 경유해요. 진짜 믿음은 피만 남기고 나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에요. 오뎅을 없애고 주님만 보이는 거에요. 그게 믿음이에요. 오뎅인 줄 다 아는데 쓰레기인 줄 다 아는데 뭐 그걸 새삼스럽게 이쁜 쓰레기 좋은 대학 나온 쓰레기 그거 뭐할라고 신경 씁니까.
누가복음 본문 한번 봅시다. 13장 4절 “실로암에서 망대” 무너졌지요. 이제 여러분 해석하셔야 돼요. 실로암의 망대 왜 무너졌는가? 무너지라고 있는 거에요 그거는. 그러면 여기서 깔려죽지요. 왜 깔려죽습니까? 깔려죽으라고 있는 거에요. 이게 주의 일입니다 이게. 원래 안 깔려죽어도 깔려죽었어요 이거는.
오뎅이 깔려서 묵사발 되는 경우도 있고 연탄가스 새는 오뎅도 있을 것이고 교통사고 난 오뎅도 있어요. 마포대교 뛰어내린 오뎅도 있고요 그것도 살려낸 오뎅도 있는데 살려내봤자 그 살려낸 그 인간도 오뎅이에요. 노벨상 타도 오뎅이고 수학 필즈상 받은 사람도 오뎅이고요. 수학 잘하는 것은 수학 잘한다는 것을 예상했다는 거잖아요. 예상한 것은 안 받아줍니다.
보세요. How dare you! 어떻게 감히 나에게.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네가 감히 가 다 포함이 되어 있어요.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걸 왜 그런 거 네가 왜 신경쓰느냐? 어딜 나한테 감히! How dare you! 어딜 감히 나한테. 죽은 자가 죽은 것뿐인데 그걸 섭섭하다느니 뭐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느니 이렇게 나오면 안되지요 뭐 이런 식으로 시비조로. 죽은 자가 죽었다고 그런데 살아있는 너는 안 죽은 줄 알아? 죽은 자만 오뎅이냐? 산 자도 오뎅이야 이런 뜻이에요. 이해 쉽지요 이제. 이해 팍 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이 사람들은 율법을 제사를 자기가 지키고 있다는 거에요. 그들은 자기가 제사 지킨 것으로 부정하지 않다고 우기는 자들이에요. 제사 지내면서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었던 거에요. 제사 지내는 본인을 부인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보면 제사 지내는 그들도 죽었잖아. 죽음을 가지고 그들의 한계를 이야기합니다. 제사의 한계를. 죽었잖아. 그러나 예수님은 살았잖아.
제사 지내고 죽었다는 말은 제사를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고 제사를 지내고 죽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말은 제대로 된 제사를 지내신 분은 바로 누구? 주의 이름밖에 없어요. 주의 이름이 어디 가있느냐? 오른손에 가있어요. 오른손. 그러니까 율법 안에 오른쪽, 오른 손이 계속해서 하나의 암호로서 들어가 있는 거에요.
왜냐? 주의 이름은 하나님 오른편에서 일하는 곳이 주의 이름으로 일하는 곳이 하나님의 오른편이기 때문에. 그 오른편의 증표가 제사장의 육체로 증표로 남기는 거에요. 오른쪽 다리 그걸 먹으라 함으로서 율법을 먹으라 함으로서 율법이 인물과 만나서 제사장을 통해서 증표로 가시화되는 거에요. 증표로.
그러면 오늘날 증표는 뭡니까? 내가 십자가 죽었으니 그 다음에 그 증표, 십자가 죽었다는 다 이루었다는 증표가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의 신체화되어서 나타나면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식으로 증표가 나타나지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라는 식으로 나타나지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요.
오뎅 먹으라면 오뎅 먹고 도시락 먹고 도시락 먹고 숨 쉬라면 숨 쉬고 이거 누가 한 거에요? 주님이 하신 거죠. 주님이 하신 걸로 우리는 하루하루 채우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끝으로 복음 안 할 수가 없어요. 유미리가 이야기 했던 복음. 이 젊음의 빈 노트에 무엇을 채우려 하겠습니까? 주의 십자가 은혜로 주님의 살아계심으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은 율법 지켜서 거룩하다고 자부했던 그 시대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죽은 결과로서 오늘날 저희들이 성령 받아 성도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분이 우리를 주장하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있음을 우리 몸에서 만끽하며 드러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