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406강,407강) 산성과 반석. 하늘 221004
406강-YouTube강의(산성과 반석 시편 18:2)20221004-이 근호 목사
제406강, ‘산성과 반석’. 산성과 반석, 여기에 관해서 시편 18편 2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반석 나왔죠. “나의 요새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산성 나오죠. 산성과 반석이 전쟁용어입니다. 전쟁의 진지(陣地), 그리고 방어 및 공격용으로 설치되어 있는 건축물이라 볼 수 있어요.
전쟁하려면 적이 있어야 되겠죠. 그럼 전쟁은 누가 일으키는가?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실시되는 전쟁에 필요한 설치물, 이게 산성이고 이것이 반석입니다.
사람은 전쟁하기 좋아하지 않죠. 화평하고 사이좋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랍니다. 인간들은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아주 못마땅해 합니다. 인생 자체를 힘들게 살기 싫어하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빨리 평화가 오기를 바라고 있죠. 쉽게 말해서 제발 날 좀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에요. 혼자 건사하기도 힘든데 주변에서 날 건드려버리면 현재 내가 나다움을 견지할 수 없다는 거죠. 나의 존재가 유지될 수 없다.
그럼 나의 존재가 유지될 수 없는데 그게 왜 힘드냐? 나의 존재라는 것이 나를 대체하기 때문에 나를 대신해주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모양새기 때문에 내 것이 없으면 나라는 것을 찾을 수가 없어요, 인간은. 그래서 인간은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내 것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것으로 나다움을 확인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전쟁은 원치 않습니다.
인간은 전쟁을 원치 않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벌였습니다. 벌이는데 시편 18편 2절에 보니까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이제 문제해결은 났습니다. 방금 제가 이 설교에서 줄곧 이야기한 것이 내가 나 하나 지탱하고 건사하기 상당히 힘들다 하는 것이 각자 우리의 형편입니다.
그러면 내 몸 하나 간수하고 지키기 힘들다면 거기서 건진다는 뜻은 무슨 뜻일까요? 지금 내 인생, 내 것, 나다움 이걸 누가 지킨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느냐면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힘든 투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건진다는 말은 결국 우리 쪽에서는 더 이상 나를 지킬 필요가 없게 만드는 상황으로 나를 데려간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이러한 구원받은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전쟁을 통해서 건지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어떤 질문을 한번 던져보는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 일을 하게 되었습니까?”라고 질문을 하게 되면 구원받은 사람의 답변은 딱 하나이어야 됩니다. “할 것 없어 이 일합니다. 할 것 없어서. 뭐 별로 할 것도 없는데 너무 할 것 없으니까 심심해서 이 일합니다.”
이게 무슨 뜻을 갖고 있느냐 하면 “나를 위해서 할 일이 더는 나한테 남아있지 않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나를 위하여. 고린도후서 5장에도 나오죠. 성도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나를 위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그걸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게 상식인데 거기에 대해서 부정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거기서 건진다는 거예요, 거기서.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지켜준다는 것이 마땅한데 거기서 나를 건져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의 일이 사라져버렸어요. 나의 일이 사라져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같이 덩달아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뭐하고 움직이고 하는 건 왜 하느냐? 그냥 손 놓고 있으려하니 심심해서 할 것 없어서 한다, 이게 정답이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나를 위한 성공, 실패는 더 이상 나한테 적용이 안 되기 때문이에요. 쉽게 말해서, “나의 전쟁은 더는 없습니다.”에요. “나의 자존심과 나의 가치를 지키는 전쟁을 나는 하지 않습니다. 그 힘든 걸 왜 합니까?” 되받아 질문할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이제 시편 18편에서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든 사정, 저주받은 사정을 너무 잘 아시고 우리로 하여금 더는 나를 위해서 할 일이 없게 만드는가. 참 이게 성도한테는 굉장히 기쁜 소식이에요.
왜냐하면 나를 위해서 일을 꾸미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스케줄 짜고 프로그램 짜고 일년 계획 짜고 이게 힘들어요. 짜놔도 그렇게 된다는 보장 전혀 없고요. 그리고 이걸 달성해도 과연 결과에 내가 만족할지 안할지 그건 전혀 장담 못하고요. 뭔가 내가 노력했는데 노력한 결과에 대해서 내가 실망할까봐 걱정도 앞서게 되고요. 이런저런 걱정, 근심, 불안, 공포, 나를 이런 힘든 투쟁의 자리에서 좀 데려갔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겠죠.
그런데 여기 시편 18편 2절에 “나를 건지시는 분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입니다.”라고 그렇게 언급되어있어요. 그러면 이 전쟁을 하나님이 실시하셨는데 하나님이 실시하셔서 구원의 산성이라.
산성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설치물, 최종적인 전쟁에 승리했을 때 모든 승리의 성과가 다 집결되는 곳, 그게 산성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그걸 시온성이라 이야기하죠. 그 산성, 그 산성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러면 우리를 산성에 데려가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나에 대해서 걱정, 근심이나 염려를 하지 않아야 될 이유가 뭐냐? 그것은 우리가 속해있는 우리 인생이 힘든 이유가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원수들이 만든 세계에 우리가 잠겨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절에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내 원수. 원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래야 전쟁이 되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우리가 발을 뺄 능력이 우리한테 일체 없습니다. 외부에서 우리를 건져주게 되면 빠져나오는데 내가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서 이 원수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 원수의 대표적인 무기가 4절에 나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여기에서 사망의 줄, 죽음의 공포, 뻔히 아는 거고요. 그 뒤에 말이 더 중요해요. 불의의 창수, 이게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자기가 죄인으로 낙인찍힐까봐 그것이 모든 공포와 불안의 요인이 되었던 겁니다.
선악체계에 의하면 죄지은 사람에게는 필히 벌이 주어지고 심판이 주어지고 저주가 주어지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죄지은 것을 인식하는 순간, 언제 어디서 하나님으로부터 신으로부터 된통으로 얻어맞을지 우리가 불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스케줄 짜고 아무리 계획 잡아도 “너 죄지었잖아.” 한마디. 심지어 이 죄지었다는 말을 어떤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길가에 어린애가 이야기하더라도 우리는 움찔해요.
나에게 하자가 있고 내 인생에 하자가 있고 ‘내가, 지난 여름에 네가 한 일을 다 안다.’고 누가 지나가면서 그런 이야기만 해도 ‘지난 여름에 한 일 때문에 올 가을은 완전히 내 인생 여기서 끝장나는구나.’ 라는 불안감으로 본인이 시나리오를 짜요, 본인이. 본인이 극작가가 되어서 대사 같은 걸 본인이 써요. 5년 전에 했던 일, 8년 전에 했던 그 일이 지금을 어떻게 사단 낼지... 10년 지나도 10년 뒤에 그 전에 했던 일에 대한 죄책감을 지울 길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뭐 위로하죠. 내가 이렇게 힘든 것은 옛날 과거에 지은 죄가 많아서... 내가 회개합니다, 백날해도 이게 그렇게 해서 없어질 것 같으면 그게 죄가 아니겠죠. 죄책감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예 ‘결국은 다 잊어버리고 사라질 일이다.’ 라는 것을 전쟁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전쟁이 바로 우리 여호와의 전쟁이에요. 지나간 것은 다 지나가버렸고 없어졌다는 겁니다. 왜? 넌 거기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네가 도착한 곳은 원수로부터 격리된 곳이에요. 불의로부터 격리되었으니까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만 가는 시온성이 되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건져주심으로서 더는 과거 지나간 그런 죄나 죄책감에 얽매이지 않고 너는 이곳에 살 충분한 자격이 된다. 왜? 네가 착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건졌으니까. 너에게서 나의 원수를 사망을 발로 떼내었으니까. 이것을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어야 되는 겁니다.
이하림gblayer('gblayer4', 'summerwood', '이하림', 'summerwood96@naver.com', '', '1', './program');(IP:219.♡.37.139)
22-10-05 06:43
407강-YouTube강의(하늘 마가복음 1:10)20221004-이 근호 목사
제407강, ‘하늘’. 하늘에는 보통 두 종류가 있다고 이야기해요. 별들이 박혀있는 스크린, 그걸 하늘이라고 이야기한답니다. 구약 사람들의 인식이 비과학적이어서 그것밖에 몰랐다는 거예요. 보통 신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구약 사람들이 비과학적이라서 하늘에 있는 대기권밖에 모르거나 또는 별들이 대기권에 박혀있는 식으로 세계관이 그렇게 어설프게 미신적으로 신화적으로 아마추어적으로 인식이 발달하지 못한 그런 식으로 한 게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 사람들에게 그렇게 허락하신 거예요.
지금은 과학이 발달해서 대기권 위에 성층권 있고 성층권 위에는 무중력 상태의 하늘이 있다. 그거 똑똑한 것 같지만요. 쓸데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구약성경의 인식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쓸데 있는 것만 준 겁니다. 그걸 계시화라 해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환경으로서 최적화된 거예요.
인간의 과학은 거기에 전혀 계시가 포함되지 않습니다. 알지 않아야 될 것까지 알아가지고 자기들이 더 골치 아프게 생겼어요. 돈 들여서 화성까지 가는데 그 화성을 왜 가느냐? 하늘 끝까지 가보겠다는 그 집념 때문에 그런 일이 있거든요. 인간의 고향은 하늘이 아닙니다. 땅입니다. 자꾸 고향 떠나서 가봤자 방랑자 신세밖에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셔도 계시를 주셔도 계시의 완성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에요. 땅에서 다 이루어진 겁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다 이루었다, 에요. 그것도 물론 특정 장소죠. 바로 선지자는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일이 없다. (눅13:33) 예루살렘이라는 특화된 장소입니다.
하늘의 모든 뜻과 땅에 잠복되어 있던 숨은 모든 뜻이 만나는 만남의 장소,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출처로서 이야기하는 것은 괜찮아요. 하늘에서 시작했는데 최종점은 땅에서 이루어진다.
주기도문에도 그렇게 나와 있어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누가 알겠어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뭐? 뭐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라고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고 계시화시켰습니다. 그럼 뭐냐?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왜? 너희들은 하늘을 봐도 어디까지나 땅의 사람이고 모든 것을 땅의 움직임으로 받아들여야 될 대상이다, 인간은. 그리고 인간자체가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게 되어있어요. 폴짝폴짝 뛰어봤자 로켓타고 올라가봤자 인간이 생각하는 하늘이 사실은 그게 땅입니다, 계시적으로 볼 때.
구약 창세기부터 하나님의 계시의 깊이가 점점 더 더해가요. 더해가면서 땅과 하늘의 개념도 같이 변천합니다. 달라져요. 신약에 와서 하늘은 성령 안을 하늘이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게 하늘이 아니에요. 성령 안, 주님 안, 예수 그리스도 안, 십자가 안. 다 이루었다, 의 안 또는 처소. 그게 하늘이에요. 유대인들의 하늘은 그냥 별이 있는 그곳이 하늘인 줄 알았죠.
그런데 마가복음 1장 10절에 보면 하늘이 찢어져요. 유대인들은 하늘이 찢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것을 스스로 찢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거죠. 마가복음 1장 10절에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여기는 찢어졌다고 되어 있지 않고 갈라졌다고 되어있는데 같은 뜻이에요. 하늘이 갈라지매. 하늘이 갈라진다.
유대인들은 곱게 오는 걸로 여겼어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나님이 곱게 온다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사무엘하 22장에 다윗이 메시야를 예언하면서 하늘에서 그냥 곱게 와요. 그리고 에스겔 1장 1절에 보면 하늘에 보좌가 있어요, 하나님의 보좌가.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거든요.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엘리야가 불 수레 타고 어디로 갔는가? 그냥 하늘로 올라갔거든요. 불 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갔을 때 하늘이 불 수레 마중 나온다고 찢어졌습니까? 그런 일 없어요. 그냥 하늘로 아스라이 올라갈 뿐이죠. 다만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안개 같은 것으로 차단시켰죠. 구름이 와서 차단시켰습니다, 보지 못하게. (왕하2:11)
사도행전 1장에도 보면 예수님이 구름타고 올라갈 때 구름에 가리워서 인간이 볼 수 있는 하늘과 다른 하늘의 본질에 대해서 인간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행1:9) 그리고 몰라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그 하늘이 성령을 통해서 이 땅에서 성령 안이 되기 때문에. 성령 안이 하늘이에요.
그래서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가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 6절.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하늘에 앉혔어요. 주님께서 죄 사한 자를 건져서 하늘에서 자기 우편에 앉혔다고 되어 있어요.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엡1:20) 이게 성령 안에서 가능한 거예요.
그리고 로마서 14장에도 그런 말씀 나오는데요.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 있죠.
성령 안입니다. 성령은 흔히 말하는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고 하늘과 땅이란 구분 자체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 생겨버린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새로 생긴 겁니다. 새로운 처소에요, 하늘의 개념이.
따라서 하늘이 찢어졌다. 마가복음 1장 10절에 하늘이 찢어졌기 때문에 그러면 하늘이 무너진 거죠. 하늘이 무너지면서 하늘이 찢어지면서 뭐가 내려오느냐 하면 예수님 세례 받을 때 성령이 내려와요. 성령이 누구한테 내려오는가? 예수님께 내려오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성령이 예수님께 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옛 언약 속에서 하늘이라는 것은 인간들 눈에 가시적으로 확연하게 구분되는, 이쪽은 땅이고 저 별들이 있는 곳은 하늘이라는 구분 자체를 무산시켜버립니다. 그것은 인간이 본 것이고 예수님이 생각하는 하늘은 따로 있다, 라고 성령을 통해서 차이 남을 언급하고 계시는 겁니다. 차이 남을.
그래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성령을 받기 전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냥 하늘이 찢어지고 거기서 뭔가 비둘기 같이, 비둘기는 아니에요, 비둘기 같은 것이 오죠. 성령이 누구를 만나느냐. 비둘기 같이 생긴 성령이 예수님과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시면서도 기존의 인간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완성된 새로운 인간존재가 예수님입니다. 그럼 하늘나라라는 것은 뭐냐? 성령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령 받은 사람 만드는 그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 그게 천국이고 그게 하나님의 나라에요.
그렇다면 인간의 눈에 띄고 보이는, 여기서 미리 하늘나라는 이럴 것이다, 이렇게 행복하고 좋을 것이라는 생각, 그 모든 것은 다 취소가 되고 무효가 되는 겁니다. 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그리고 가시적으로 상상되는 모든 하늘나라는 진짜 성령 안의 세계, 하나님 나라의 세계를 훼방하고 방해하는 요소로서 작용하게 되어 있어요.
이런 하늘나라를 한번 체험하고 싶습니다, 그런 생각이 사도 바울도 들었고 여러분도 들죠. 실제로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걸 체험했었습니다. 그 체험한 것을 사도 바울은 뭐라 하느냐. 삼층천이다. 하늘 말고 너희들이 아는 하늘 말고 그건 이층이고 삼층에 올라갔다. 기존의 하늘 말고.
“올라갔을 때 어떻게 생겼고 어떤 나라입니까?”라고 누가 궁금해서 물을 게 아니겠습니까. 사도는 물을 줄 알고 미리 답변을 준비했어요. 거기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도 모르겠다. 자기를 묘사하면서도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묘사해요. 그것은 내가 기존에 과학적으로 실증적으로 알았던 나를 그 하늘나라에서는 쉽게 잊어버릴 수가 있었다,가 되는 거예요.
끝으로 그 하늘나라를 구약에서 미리 경험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모세에요. 내가 지금 아침 9시, 아침밥 먹을 때가 되었는데. 식사시간 없습니다. 물 좀 마시고 할까. 물도 안 마셨어요. 무려 40일 동안 아무것도 안 마셨습니다.
이 말은 마귀를 이기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것, 그것은 기존에 우리가 육신적으로 알던 하늘나라를 우리가 알아서 포기하게 만드는 주님의 새로운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 40일 동안 아무것도 안 먹고 물 안 마신 사람 있었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그 때 악마와 그렇게 해서 이겼던 겁니다.
기존에 인간들이 알고 있던 하늘나라는 종교에서 말하는 하늘나라는 잊어라. 진짜 하늘나라는, 더는 내가 누군지 생각할 필요 없이 주님의 주신 사랑과 희락과 은혜를 만끽하는 그 상태, 나를 더는 생각 안 해도 되는 상태, 그게 바로 하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