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강남-누가복음 12장 50절 (영생의 공놀이) 220920a-이근호 목사자유게시판누가복음

강남-누가복음 12장 50절 (영생의 공놀이) 220920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2장 49절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아직 불이 붙지 않았다 이 말이죠.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불세례가 예수님한테 먼저 덮쳐지고 덮쳐진 이 불이 예수님을 인하여 전 우주로 전 세계로 파급이 된다. 이 불세례가 얼마나 얼마나 고통스럽던지 예수님 본인이 답답하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등장했으면, 사람에게 있어 다음은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다음이라는 게 없어요. 그것은 그 인간은 I 와 전 우주, 우주니까 Universe. 보편성이라고 하면 universality. 이것은 보편성이라고 합니다. 보편성. 인간들은 자기를 나를 뭘로 이동시키느냐 하면은 특별한 나이고 싶어요. 구원을 받는다든지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든지 특별한 나이고 싶어요. ‘특별한 나’.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전체에서 내가 특별한 존재로 전환될 수 있는가. 특별한 사람으로 될 수 있는가. 이 특별한 것은 peculiarity. 특수한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인간이 이 전체를 다 알아야 내가 특별하다고 간주가 돼요. 전체에 비해 내가 우뚝 설 때 여기 일반성 속에 포함되어 있다가 이것을 뛰쳐나와서 전체를 바라볼 때 이걸 특별하다. 인간의 모든 소망과 욕망과 희망은 본인이 어떤 세상에 속하던 나만은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희망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쉽지를 않아요. Universe, U와 peculiarity, P 사이에서 내가 I 가 어떤 특별한 내가 될 수 있느냐. U-P-I. 이걸 기대하고 있지만 실제로서는 세상과 나 사이의 해결점은 뭐냐 하면은 peculiarity. 특수함, 특수성. U-I-P. 보편성과 나 사이에 특수성이 나로 하여금 내가 어떤 존재인 것을 해결해주는 겁니다.

마지막에 내가 결과적으로 괜찮은 내가 되기 위해서 인간이 이해하는 보편, 인간이 이해하는 특수 이것을 이 속에서 잘 특성을 잘 해서 내가 괜찮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열망과 희망이 있거든요. 인간은 자기 문제가 제일 관심사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모든 행동과 태도는 바로 U-P-I 이 공식에서 나와요.

삼성그룹에 취업했다. 삼성그룹 중에서 어떤 것이 승진이 빠르냐? 그것이 나였으면 좋겠다. 딱 맞잖아요. 이 세상에 장사한 사람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성공한 사람이 있다.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 이 땅에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나는 제일 아름다운 여자하고 결혼하고 싶다. 이게 전부 다 이 공식 하나로 세상 설명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I를 특수성에서 빼고 보편성 속에 하나로 이렇게 엮어버려요. 그러면 특수성 되겠다는 게 뭐가 돼요? 욕망이, 욕심이 돼요. U-P-I 에서는 욕망이 되지만 U-I-P 에서는 뭐냐? 욕심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저질이다 이 말이죠. 그렇게 희망 갖겠다는 자체가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특수성은 이미 확정되어 있고 이거는 하나님이 지정했어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특수성은 누구만 해당됩니까? 예수님만이 해당되는 거에요. 보편을 다룰 때 너도 같이 다뤄져야 된다는 겁니다. 네가 따로 ‘나’를 뽑아내지 말라는 거에요. 뽑아내는 이 오류가 뭐냐?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네가 신처럼 되리라는 악마의 부추김과 그 현혹에 말려들어서 우리는 자기가 보편 속에 속하는데 자기만이 특수한 자라고 오해하는 거에요.

어느 가정이나 자기애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우리 애는 노래 잘하고 뭐 잘하고 특별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지요. 주님 보시기에는 모든 것이 모든 보편성에 속하는 겁니다. 그런 예가 로마서 3장 9절에 나오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나도 없다. “모든 입으로 저주 아래 있고” 역시 로마서 3장에 나옵니다. 저주 아래 있고. 갈라디아서 3장에도 나오지요. “죄 아래 가두었으니” 에베소서 1장도 마찬가지에요. “세상 권세 아래 갇혀 있었다”

특수성은 인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은 세상과 더불어 망해야 된다는 그 성질이 있다는 것을 나만은 구원돼야 돼 라는 특수성을 외치는 것을 보니까 이거는 보편성이다 이 말이에요. 네가 나는 잘 돼야 돼 하는 거 보니까 입 다물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너는 너 주체파악이 안됐어. 그런 것들이 증거가 되는 거에요.

주께 기도하나이다 하면 기도하지마! 그냥 침묵해! 주는 대로 먹어 가만 있어! 이렇게 돼요. “네가 기도할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지니 이는 네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사야 1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바리새인들이 기도하니까 저 기도하지 마. 중언부언하는 저 기도 나 안 받는다. 특수성이 파급돼요. 특수성에서 여기 보편성에 더해 있는 ‘나’ 말고 특수성에서 따로 제작한 ‘나’가 따로 있어요.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제작된 ‘나’.

이 특수성과 나 사이에 자기 피조물을 새롭게 창조하는 거에요. 창조할 수 있는 그 권한이 바로 뭐냐 하면은 그게 언약의 내용입니다. 언약의 내용. 언약 안에는 다윗의 왕이 등장하고요. 순서가 이래요. 왕이 먼저 와서 왕이 누구를 모집하느냐 하면은 왕이 자기가 원하는 백성을 모집하는 식으로 언약 이스라엘이 성립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몇 명 뽑았어요? 12제자를 뽑았잖아요. 이스라엘 뽑았잖아요. 바로 그 식이에요. 12제자 뽑힌 그것을 가지고 뭐냐? 잃어버린 나의 이스라엘아. 나의 양이라. 잃어버린 나의 양이라. 양의 집단. 언약의 내용 가운데 언약의 내용이 이스라엘 구조를 그대로 가져와서 언약을 이룹니다. 이스라엘 구조가 뭐냐 하면은 다윗이 왕으로 오신다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혈통입니까? 다윗의 혈통. 왕가의 혈통이죠. 예수님은 왕으로 오신 거에요. 그런데 백성 없는 왕은 없지요. 왕이 있다는 말은 반드시 그 현장 앞에 왕 앞에 누가 이렇게 널려있어야 돼요? 왕을 왕이라고 인정하고 또는 왕이 백성이라고 상호 인정이 가능한 백성들과 하나의 단체를 이룰 때 언약은 완성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다윗 왕과 백성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는데 연결체가 있는데 매개체가 뭐냐? 피에요. 왕의 피로 먹고 마시는 자가 백성이 되는 겁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그 피 단회적인 제사가 반복됨으로서 이스라엘은 언약적 새로운 나라로 등장하는 겁니다. 기존의 나라 말고. 기존의 이스라엘 말고. 기존의 나라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

이게 제가 아까 유투브할 때 했지요. 이스라엘의 멸망이 최후라고.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상대하고 이스라엘 망해버리면 세상은 끝이에요. 다른 이방나라의 역사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 택한 이스라엘이 망하면 그걸로 세상 끝입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이런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이 오심으로 사람에게 다음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음은 없습니다. 끝입니다.

특히 49절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불은 용도가 베드로후서 3장에 용도가 세상을 다 태우는 용도에요. 날씨가 추워서 보온 용도로 불이 온 게 아니고 세상에 있는 것은 불로 다 태워버리는 겁니다. 불로 없애버리는 거에요. 있음이 불로써 다 태워지는 겁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생명나무 가는 길을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고 있다. 그 지키는 불의 두께가 세상 끝까지 확 퍼졌다고 보시면 돼요.

그 불은 왜 불이 있느냐? 생명나무 지키기 위해서 불이 있는 거거든요. 생명나무와 생명나무 없는 사이의 경계선을 위하여 화염검, 불이 있는 것처럼 불의 폭이 늘어나버리면 오직 생명나무에 있는 천국과 그리고 그 생명나무 없다는 표시로서 불 속에 들어가야 될 나라, 지옥불이죠. 지옥은 불로써 구성되어 있습니다. 뜻뜻한 정도가 아니지요.

에비앙 생수 하나가 돈으로 치면 굉장히 비싸게 팔아요. 물가가 올라서 물 한방울도 아쉬운 데에요. 사슴이 시냇물 찾아 목을 축이는 것처럼 목을 축일만한 샘물이 없습니다. 이 땅에 있을 때 대통령하고 국무총리하고 국회의원하고 재벌 되고 잘 나갈 때 참 좋았지요. 그게 누적이 되어서 자기를 지옥불 속에 생명나무는 이쪽이 없어 라는 경계선에 도구용으로 사용된 자기 자신이 쓰여진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지요. 평생을 나 잘났다 식으로 살아왔었는데 그게 아니고 너 말고 생명나무에요. 너 우선 아니고 생명나무 우선.

생명나무가 있는 것은 너 있는 곳에는 생명나무 없어 라는 그걸 표현해주기 위한 그 불 속에 그들은 영원히 사로잡혀 갇혀있어야 되는 운명입니다. 누구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이건 사실입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그럼 지옥에 불 온다는 것을 와봐야 아는 거지 누가 가봤나? 예 누가 해봤습니다. 누구? 누가해봤는데? 예수님이 바로 그 불을 저주의 불을 예수님이 받는데 흠뻑 받지요. 그걸 세례라고 해요. 그게 무슨 세례? 불세례, 곧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아버지께 저주받는 것. 생명나무 있는 쪽에서 저주받는 것. 끊어진 상태.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지키기를 원합니다. 그럼 생명나무에서 아담, 하와가 나왔다는 말은 너는 지킬 대상이 안 된다는 뜻이에요. 지키고 싶은 그 항목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키는 것은 생명나무에요. 선악과는 이미 훼손했으니까요. 생명나무를 지키고 싶어서 하나님께서는 불 까지 동원시켰어요. ‘불’.

그러니까 협상이나 인간과의 타협은 없습니다. 인간 쪽에서 아부한다 치고 이런 아부를 해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저리가. 그 입 다물어! 네 입으로 사랑이라는 말 하지 마! 그 입으로 감히 사랑을 말하지 마! 사랑하고 너하고 무슨 상관있어? 하지 마.” “천국은 저기 있군요!” “있는데 왜? 천국 있는걸 네가 왜 거론해? 거론하지 마. 너는 거론할 자격도 없어. 다시는 찾아오지 마.”

그것을 51절에 방금한 드라마 대사 있잖아요. 그걸 두 자로 표현했습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분쟁입니다 ‘분쟁’. “내가 온 것은 의도적으로 분쟁을 일으키기 위함이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네가 그렇게 생각하느냐? 도리어 분쟁 된 상태를 더욱 더 확실히 분쟁을 마감시키러 온 거죠. 완전히 갈라내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그 일이 이스라엘하고 상대하기 때문에 52절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이스라엘과 상대하는 거에요. 이방나라들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백성이고 자기 계시를 펼치는 하나님의 작업장이기 때문에 거기서 하나님의 마지막 뜻은 분쟁하는 겁니다. 갈라세우는 거죠. 인간들은 갈라서는 것을 싫어해요. 분쟁을 싫어해요. 평화를 좋아합니다.

우리 헤어지지 말아. 붙들고 난리도 아니지요. 여고 1학년 1반 학생들 이제는 진급해서 2학년 올라갈 때 특히 1학년 1반에 친한 친구들 있잖아요. 나중에 분반할 때 서로 껴안고 난리도 아니에요. 이산가족 헤어지는 것보다 더 서럽습니다. 우리 헤어지지 말자. 정숙아 옥희야 헤어지지 말자. 정숙이 2학년 2반 옥희 2학년 3반. 우리 편지 자주하자. 응 약속! 일주일도 안 지나서 다른 친구들이랑. 오지 마! 우리 반 오지 마! 나중에 배구할 때 죽으라고 던지고. 옛날에 1학년 때 정은 이미 다 끝났어요.

인간들은 자기가 이렇게 새로운 것에 쉽게 적응할 줄은 본인도 몰랐지요. 본인도 놀라지요. 감사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에요. 지나간 것은 다 지나간 겁니다. 이것을 지나간 것은 지나갔다는 말은 예수님 한 분 안에 모든 세상은 지나간 것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 한 분 오심으로서. 최종적인 것이 오심으로서 그전에 있던 보편성은 전부 지나간 것으로 만들어버리지요. 이제 예수님 중심으로 재편될 세상만 남아있기 때문에.

그럼 그게 어떻게 되는가? 무섭게 일을 무섭게 벌립니다. 역사의 끝은 역사의 끝낼 분이 오셔야 역사가 끝나는 거에요. 아직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 해도 소용없어요. 끝낼 분이 오면 역사는 끝났고 역사가 끝났을 때는 화평과 분쟁 그리고 그 뒤에 무서운 지옥 불, 그걸로 조건 다 갖춰졌어요. 주님이 불세례를 받음으로서 이 세상은 끝입니다. 이 세상은 지옥으로 끝났습니다.

세례라는 것이 세례의 효과가 주어진 일이 다른데 전체까지 다 파급되는 것이 세례거든요. 물세례. 물만 적신 사람이 구원받는 게 아니고 물세례라고 하는 것은 물속에 들어갔던 모든 사람에게 물이 주는 심판의 효과와 정화의 효과를 다 그들 전체에다가 다 뒤덮어버리는 거에요. 마치 태풍같이. 태풍의 눈은 두 개 아니에요. 하나에요. 하지만 넓은 치맛자락처럼 태풍이 몰고 오게 되면 태풍 영향권 속에 있는 것들은 전부 다 폭풍과 폭우가 쏟아지게 되어있지요.

그 전체 면적이 세례의 면적이에요. 불세례의 면적은 보편성, 인류의 모두에게 예수님 때문에 전부 다 지옥불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로 이야기가 끝나면 되는데 예수님께서 불세례 받으시고 십자가, 아버지께 저주 받으시고 심판 받는 불의 심판이라는 게 어느 대목에 나오느냐 하면은 마태복음 3장에 보면 나와요.

불 심판이 왜 세례의 기능이냐? 세례 요한이 이렇게 했어요. 마태복음 3장 11절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불세례라고 하는 것은 그 불 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다 심판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 심판에서 예수님도 면제되지 않는다. 예수님도 거기 불 심판을 받는 겁니다. 그게 불 세례에요. 내가 받을 세례에요. 예수님 받을 세례에요. 예수님 구경만 하신 것이 아니고 친히 저주 속에 들어오신 거에요. 친히 저주 속에 들어와 버리면 불 세례 받으신 분의 일원이 돼요. 불세례 받은 보편성 중에 정해졌잖아요. 여기에 예수님만의 특수성이죠. 특수성이 여기서 튀어나와버리죠.

그러면 심판에서 영생이 되어버립니다. 영원한 저주에서 영원한 복, 영원한 생명이 되지요. 영원한 생명이 되어버리면 이 특수성으로 인하여 새로운 I, ‘나’가 여기 출현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나’가 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 받았잖아요. 불세례 받았지만 또 뭘 받았어요? 성령세례 받았지요. 따라서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어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성령세례 받은 자가 남에게 성령세례를 유일하게 제공할 수 있는 자격자가 돼요. 성령 받은 자가 남들에게 성령세례를 줄 수가 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 세례 받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알아요. 사도행전 2장에도 보면 베드로 설교에도 나와 있어요. 그분이 하나님 주의 오른편에 가셔서 위에서 성령을 세례로 주는 거에요. 물? 아니. 불? 아니.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거에요. 성령으로.

특수성의 세례를 받아버리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은 이런 현상이 나타나요. 오늘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내용인데요. 죽어도 안 죽는 개인이 등장해버립니다. 이 개인이 뭐냐 하면은 이 개인이 성도에요. 죽어도 안 죽어요. 아무리 죽여도 안 죽어요. 이 성도의 특징은.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그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죽여도 죽을 수가 없어요. 466번 죽으면 그 다음에 죽을까요? 아니지요. 그럼 786번은? 안 죽어요.

제목을 ‘영생의 공’. 통통 튀는 공. 성도 자체가 공이에요. 무슨 공? 영생으로 만들어진 공. 생명으로 만들어진 공이에요. 성도 자체가. 성령께서 죽음을 이긴 영이 있기 때문에 밟아도 안 죽도 코로나 걸려도 안 죽고 화장해도 안 죽어요. 그동안 인간들이 죽는다는 것은 본질 자체가 기존의 인간들의 보편성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죽음이란 오류를 그게 죽음이 아닌데 인간은 죽음의 끝을 몰라요. 죽음의 끝은 누가 아느냐? 보편성은 죽음의 끝을 몰라요.

모순이라는 말은 모른다는 뜻이에요. 보편성인 그들은 어떤 개념 하나의 끝을 보지를 못했어요. 역사의 끝을 체험하기 때문에 역사 끝에 가야 모든 의미의 종결이고 모든 정의의 종결이거든요. 무엇에 대해 안다는 것은 끝에 가야 안다는 말을 할 수 있지 그 전에는 안다 할 수 없거든요. 그럼 죽음의 끝은 제대로 죽어 본 사람이 죽음의 끝을 알아요. 죽음의 끝은 누구입니까?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개인과 인간의 모순점은 예수님의 특수성에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거에요. 예수님의 특수성에서.

그런데 인간은 죽어도 죽음을 몰라요. 죽음을 아시는 분 누구밖에 없지요? 예수님밖에 없지요. 아버지의 제대로 된 저주와 심판은 예수님만 받았어요. 그것도 최종적으로. 다른 사람은 최종적이 아니고 죽고 난 뒤에 대기하고 있지요. 이렇게 개념이 예수님에서 모든 게 완결되어 버리면 이 땅에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단절이 없어지고 연속성만 남아요. 왜냐하면 최종의 단절은 예수님께서만 단절되기 때문에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이 늙어 죽었다. 죽은 거 아니에요. 그건 대기 상태라니까요.

나이가 96세 됐는데 돌아가셨다. 어떤 분 최근에 돌아가신 분 있지요. 장례식 거창하게 했잖아요. 엘리자베스 2세. 지금 대기 상태에 있어요. 아직 안 죽었어요. 죽음이란 목숨이 끊어진 게 죽은 게 아니고 온전히 저주받아야 죽어요. 온전히 심판을 받아야 죽는다고요. 죽고 난 뒤에 심판 받는 대기 상태에 있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 눈에 보이는 세상 있잖아요. 세상과 그리고 흔히 말하는 저 세상은 이어져있는 거에요. 이어져있는 거에요.

그러면 저 세상에 갔던 사람이 심판대에 대기하고 있다면 그러면 눈에 보이는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 경계선이 사실은 경계선이 없지요. 이어져있으니까. 95세 96세 97세 죽더라고 저 세상과 계속 이어져가는 거에요. 그래서 저 세상에 가서 98세 99세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인간의 수명 계산하고 주님의 수명 계산은 다르기 때문에. 죽기 전까지는 덜 죽은 거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저 세상에 가서 심판을 대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살면서 그들은 죽음의 대기 중이다. 죽음 앞에서 심판 앞에서 대기 중이다 이 말입니다. 방향이 그 쪽 방향이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령세례를 줘버렸다 이 말이에요. 성령세례를 줘버리니까 여기에 뭐가 등장했습니까? 통통 튀는 영생의 공놀이, 영생의 공이 등장한 거에요.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영생 덩어리에요. 통통. 796번 죽어도 이게 또 튀네. 왜? 영생이니까.

이 세상의 어떤 죽음과 악마와 율법과 죄의 세력도 영생을 이길 수가 없어요. 왜? 이미 이겼던 완제품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이미 그런 것을 다 극복했다. 극복 벗어난 거에요. 극복 알지요? 이미 그걸 벗어나버린 그런 힘을 가진 공, 통통통 공. 공으로서 나타난 자가 누구다? 성도지요. 성도는 자살하든 뭘 하든 죽을 수가 없어요. 성도가.

왜냐하면 본인은 이미 십자가에 죽은 몸이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은 자기 생명이 아니고 누구 생명? 외부 생명. 외부 생명이 들어왔기 때문에 자기는 껍데기만 제공했을 뿐이죠. 껍데기만. 살아있을 때는 아담의 껍데기 죽었을 때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껍질. 그걸 껍질이라고 하지 말고 성경에 나옵니다. ‘그릇’. 자비의 그릇, 영광의 그릇. 해같이 빛나는 그릇으로 변했잖아요.

마태복음 17장에 모세하고 엘리야가 누구 만났습니까? 예수님 만났지요. 그때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이 어땠었어요? 초라했어요? 기미 주근깨 연세들은 티 났습니까? 없어요. 베드로가 어떻게 했는줄 압니까?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눈부셔! 해 같이 빛나니까 그 영광이. 모세가 시내산 내려올 때 밑에 백성들이 모세 얼굴을 어떻게 봤습니까? 그냥 정면으로 볼 수 있겠어요? 못 봤어요. 그래서 모세가 신광 타월로 수건을 가려가지고 됐냐?! 이제 말할까? 이제 말하시옵소서. 수건 가리고 율법 이야기했잖아요.

그 영광을 감당을 못해가지고. 밑에 있는 백성들이. 기껏 40일 갔다 왔어. 40일. 한 달 반 동안 시내산에 갔다 왔는데 얼굴이 해 같이 빛났습니다. 한 달 10일도 그 정도인데. 거기서 영원히 사는 것은 엄청나지요. 엘리야가 불수레 타고 올라갈 때 엘리사는 감히 쳐다보지를 못했어요. 그냥 소리만 쳤지요. 하늘의 마병이여. 세상에 자기 스승이 불수레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그만큼 대단한 게 아니고 엘리야의 모든 기능이 지상적이 아니고 초월적이다. 영적이었고 하나님이 하는 기능이었다는 것을 같은 육체 모세 엘리야 만날 때는 그걸 몰랐는데 심지어 엘리야 본인도 본인이 내가 그 정도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인간에게 성도에게 제일 무서운 건 누굴까요? 본인입니다. 본인이 제일 무서워요. 성도한테. 내가 가장 무서워요. 내 안에 영생 들었으니까.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여러분들이에요.

그걸 약간 풀이하자면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은 주의 일이 가장 무서워요. 주의 일이. 따라서 그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무섭고 주의 일이 어느 정도 무서운지 알려면 가을철에 나오는 괴기 영화 다 보시기 바랍니다. 외국 괴기 영화. 한국 것 말고. 무서운 외국 괴기 영화 그 무시무시한 영화 보면서 그래 저게 무섭단 말이야? 저것 보다 내가 더 무서워. 본인이 더 무서워야 돼요. 본인이.

저런 것 무서울 때는 무서울 이유가 있어요. 뭐 축축하다든지 나쁜 짓을 했다든지 음습한 집을 갔다든지 이유가 있는데 내가 성도된 것은요 내가 내 손에서 어떻게 어찌 할 수 없는 내 손을 떠나버린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무서운 거에요. 이게 뭐냐? 내 속에 있는 영생을 내가 관리 대상이 안 된다는 뜻이에요.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것처럼 영생이 어디로 튈지를 사도 바울 본인도 본인이 어디로 튈지 몰라요.

그래서 영생이 들어올 때는 어떻게 들어온다? 무섭게 들어온다. 우리 안에. 아주 무섭게. 세상에 어떤 무서움도 시시하게 보일 정도로. 이게 무서운 거야? 코미디지. 이 정도로 진짜 무서운 것은 내가 영생의 사람으로 돌변했다는 그 사실에 있어요. 그 이야기가 58절 한번 봅시다.

12장 58절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게 뭐냐 하면은 이거는 빚쟁이가 아주 한 푼이라도 자기 돈 받아 낼 때까지는 절대로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율법으로 되어있어요. 율법으로.

보편성 이야기 잠깐 해봅시다. 이 보편성 안에 주님께서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이 안에 인간의 죄, 인간의 욕망이 분산되어 있다고 보는 거에요. 분산. 다 퍼져있다고 보는 거에요. 그래서 개인 행동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개인 행동이라는 게 없습니다. 인간의 개인 의미는 없어요. 인간의 의미는 외부에서 다 먼저 눈에 들어왔고 봤고 탐나고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했던 그것이 어느새 내 인생 내 몸으로 스며들은 것이거든요. 홀로 나만 아는 의미는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남들의 합작품이에요. 남들의 합작품.

제가 20대에 서울에 한번 올라간 적이 있어요. 구로구죠. 안양천? 비슷한 거 개천가 있는데 그때 일본식으로 할 것 같으면 하꼬방 알지요? 하꼬방. 정말 조잡하게 임시로 천막으로 된 후진 하꼬방. 지방에서 올라와서 서울에 본진에는 들지 못하고 개천가에 이렇게 줄지어 있어요. 왜냐하면 여기는 생활하수 그냥 갖다 부으면 되거든요. 옛날 청계천 비슷하게.

개천가에 집들이 있고 옆에 또 뭐가 있느냐 하면은 가내수공업 하는데. 그 당시 인형, 가발 가내수공업 하는 작은 중소기업 있어 가지고 공장들이 있는데 이런 공장들은 환경 대책 같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몇 년 일하면 속에 폐병들 정도로. 그러한 험악한 조그만 봉제공장이라든지 하천에 작은 소규모들. 그 소규모 공장들이 있어 가지고 여기 공장에서 일하고 건너와서 하꼬방에 있는데 여기 풍경은 을씨년스러워요.

전봇대만 높아요. 전봇대만 높고 다른 건 다 전봇대 밑에 있어요. 저녁에 노을이 운치 있게 개천가 냄새나는 오물덩어리 있는 잡초 붉게 물들어버려요. 오후 7시 됐다 합시다. 서서히 여기서부터 공장에서 일했던 여공들이 하나둘 퇴근하면서 가지요. 이때 여러분이 20대 청년이라고 생각하고 이 청년이 뭘 생각하겠습니까? 하나님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 생각하겠습니까? 복음 생각하겠습니까? 통통 튀는 영생 공 생각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생각 안나요. 내가 여기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해? 내가 여기 있어야 하는 그 문제. 내가 여기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어디 가서 또 돈을 벌어야 되는지 그것만 생각해요. 그것만. 또 하나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교수로 발령 되가지고 시골에 교수로 내려갔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철딱서니 없는 학생들 까불고 뛰어다니는 그 학생들 그리고 같은 교직원들. 같은 교직원들끼리 말 안합니다. 직장동료들 말 안 해요. 왜? 업무량이 말 할 시간을 주지 않아요.

직장 교사들, 행정요원들 딱딱해요. 사무적인 것. 그리고 아침에 코빼기 보이고 놀러가는 교장, 교장 놀러 가면 눈치 봐서 뒤따라 놀러가는 교감. 학생들 뒤쪽에서 담배 피는 말썽꾸러기 애들. 그럴 때 여러분들이 교사로 취직했을 때 도대체 왜 내가 이 자리에 있어야 돼. 왜? 내가 왜? 자기한테 질문하는 거에요. 왜 나는 이 자리에 있어야 되느냐. 지금. 그리고 이 자리에서 10년을 더 하게 될까? 5년까지 할까? 도대체 내가 몇 년까지 이 자리에 있어야 돼? 이거 아니면 내가 할 거 없어 이렇게 되겠지요. 20대 청년이. 이거 아니면 할 거 없어?

그러면 딴 거 뭐하는데? 김해에 가서 양식장할까? 아니면 무안 가서 소금밭에 가서 할까요. 도대체 인간은 자기가 어떤 생계문제에 생기면 하나님이고 뭐고 복음이고 아무것도 생각 안 나고요 나 어떻게 하루하루 살지. 그때 그냥 라면 먹고 살아요. 촌에서 어머니가 싸준 김치 쪼가리하고 라면하고 단무지하고 먹고 거의 영양실조 걸리다 시피 해서 아침에 또 공장가면 사장님 눈치 줘서 오늘 두 시간 더해라 해서 아침 8시 출근해서 밤 10시까지 작업비도 주지도 않아.

하여튼 하루하루 매일 생각하는 게 이 노을 보면서 내가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되나. 언제까지 내가 있어야 되나. 인간이 그러고 살아요. 인간이. 그게 나중에 20년 30년 되가지고 좋은 회사 가도 또 마찬가지에요. 내가 언제까지 이 회사에서 과장 노릇이나 하고 이러고 있거든요. 또 사장되면 언제까지 내가 사장 노릇이나. ‘이나~’ 가 들어가야 돼요. 내가 이 나이에 유럽에 놀러가야 되는 군번에 내가 언제까지 돈벌이나 하고 남편은 놀고. 누구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 짓해야 되나. 오직 자기 생각뿐이에요.

그래서 김민기라는 사람이 했던 ‘강변에서’라는 가사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온다 늘어진 어깨마다 퀭한 두 눈마다 빨간 노을이 물들면 왠지 맘이 설레인다 강 건너 공장의 굴뚝엔 시커먼 연기가 펴오르고 별들은 춤추는데 건너 공장에 나간 순이는 왜 안 돌아오는 걸까 아이야 불 밝혀라 뱃전에 불 밝혀라 저 강 건너 오솔길 따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열여섯 살 순이가 돌아온다. 저 강 건너 오솔길 따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강변에서’라는 김민기 노래 가사에 이게 나와요.

그때 그 시절을 높은 건물도 없고 개천가에 낮은 강둑으로 걸어오는 거에요. 강둑 밑에는 낮잖아요. 강둑 밑은 공장들이에요. 소규모 공장들. 먼지투성이. 하루 종일 먼지투성이로 가득한 공장들. 그럴 때 인간은 영생을 생각 못합니다. 그저 하루하루 사는데 하루 살고 그 다음 또 살 생각하고 그 다음 생각하지요. 그게 얼마나 암울하고 무서운 일입니까.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그냥 세상에 땅에 주저앉고 싶지요. 어쨌든 간에 내 집 갖추고 결혼 해가지고 애 낳고 그걸로 족하다 하고 그냥 땅에 주저앉길 원하지요.

그런데 보세요. 이 개천가 이걸 누가 설계한 겁니까? 개천가. 우리는 자연스럽다 하지요. 맞아요. 자연스러워요. 그 자연스럽다는 말이 뭐냐 하면은 그걸 사회. 인간사회. 남에 의해서 타인에 의해서 같이 섞여 있는 사회에요. 개인을 거기서 뽑아낼 수가 없어요. 개인의 목적, 개인의 스케줄, 개인의 성향 전부 다 이미 남들이 다 거친 거에요. 다 거친 거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12장 58절에서 뭐냐 하면은 고소한다 되어있어요. “고소한다” 고소가 뭐냐 하면은 율법으로 고소하는 거에요. 율법. 그럼 이 세상은 예수님의 세상은 뭐냐? 법의 직물. 직물 알지요? 짜는 거. 천 조각. 촘촘한 법의 직물이에요. 전부 다 고소해요. 인간을 고소한다고요. 16살 순이는 지금 월급 받아서 반은 촌에 보내고 반은 겨우 밥 먹고 사는 게 급한데 하나님은 그 16살 애를 향하여 법적으로 고소하고 있어요.

고소하는 근거가 뭐냐? 이 세상에 인간의 욕망이 전부 다 분산되었다. 퍼져있다. 그 퍼져있는 욕망 중에서 내가 하나 건져서 나는 오늘 월급 받았으니까 오늘 옷 하나 사 입어야지. 이게 인간의 욕망 중에 하나 그물망 속에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그 기준과 인간이 서로 공존해서 살기 위한 그 기준이 같다? 다르다? 이게 다른 거에요.

말씀 지킬 테니까 복 주세요 이게 왜 안 되느냐 하면은 이게 기준이 달라요. 말씀은 우리를 고소하는 거에요. ‘고소하는 것’. 우리는 기본적으로 내가 밥 먹고 사는 게 기본이에요. 기준이 달라요. 다르니까 어떻게 됩니까? 만날 수가 없지요. 그림을 그리면 이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켜가지고 너무 생존을 세속적으로 하지 말고 율법 지켜서 영광 돌리면 구원 받는다. 바리새인들이 천국 가기 위해서 시도하지요.

그런데 지금 진짜 하나님 나라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보내서 화살표가 인간에게 찾아오잖아요. 이 두 화살표가 만날까요 안 만날까요? 만나지지 않습니다. 만나지지 않아요. 오히려 이 노선을 율법으로 고소해버려요. 하나라도 어기면 저주 보낸다. 고소하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 끝에 누가 있습니까? 불세례 받은 예수님이 계시지요.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그들이 시도하는 천국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에서 말하는 천국은 없습니다. 없어요.

미리 땡겨서 성령세례 받아서 영생 얻은 사람만 이미 천국에 들어온 사람이지 그 외에는 천국에 못 갑니다. 화살표 때문에 그래요. 교회에 가서 열심히 시도하는 것 그거 없는데 가는 거에요. 있지도 않은 곳에 가는 거에요. 주께서는 고소하면서 마중 나오는 거에요. 고소하면서. 율법으로. 하나라도 다 지키지 않으면.

그래서 철없는 젊은 애들이 부모한테 와가지고 나이 서른 넘어서 왔어요. “어머니 아버님 우리 결혼식 없이 그냥 살겠습니다. 우리끼리 사랑하면 되지 결혼식 왜 해야 됩니까? 결혼식 하면 돈 드는데” 이렇게 할 때 부모가 기가 차지요. 왜냐하면 결혼식이 자기만의 결혼식입니까? 온 집안의 결혼식이에요? 온 집안의 결혼식 아닙니까. 키우고 이만큼 성장해서 취직할 때까지 누가 도와줬어요? 부모가 도와줬잖아요. 부모의 수고스러움을 누가 모독한다? 자식들이 지금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힘으로 큰 줄 알고. 부모의 수고를 모독할 때 부모는 얼마나 섭섭하고 서럽겠어요. 진짜 서럽지요.

요즘은 주례도 없다. 잔소리 안 들을려고. 어른들 해봐야 별 수 있나. 우리가 더 잘 아는데. 주례도 없애고 자기가 자기한테 셀프 주례하고. 참내 기가 차서. 뭐 안다고 지가. 부모의 수고스러움에 모독을 하고 있다고요. 인간사회 전체가 주님의 하신 일에 이 세상 전체가 주님의 수고스러움이에요. 주님의 희생으로 만든 세상입니다. 인간들이 지가 노력해서 한 거 아니에요.

인간 기준은 뭐냐? 내가 수고했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기준은 뭐냐? 주님이 수고해서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에 없애도 주님이 없앤다는 거에요. 지가 열심히 해서 가는 나라 그 나라는 천국 아니고 지옥이죠. 주님께서는 주님을 모독한 것을 고소할 때 끝까지 책임을 물어요. 끝까지 책임 묻고 끝까지 처벌해버립니다. 예수님의 수고를 모독하는 자, 세상 끝까지 따라가서 반드시 처벌합니다. 어떻게 처벌하는지 10분 쉬고 봅시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74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9,317 자유게시판 13강-디모데전서 3장 8-13절(집사)221009 - 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최고관리자 22-10-09
19,316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하나님 탄생 / 221009 - 최고관리자 22-10-09
19,315 묻고답하기 하나님의 집 - 최고관리자 22-10-09
19,314 자유게시판 10월 부산 성경공부 안내 시편 최고관리자 22-10-09
19,313 자유게시판 안양20220915b슥14장04절(최후를 넘어서)-이 근호 목사 - 최고관리자 22-10-08
19,312 자유게시판 안양20220915a슥14장04절(최후를 넘어서)-이 근호 목사 스가랴 최고관리자 22-10-08
19,311 자유게시판 수요설교 정리(20220914:옮기심) - 최고관리자 22-10-08
19,310 자유게시판 11강-나훔 3장 13-17절(메뚜기 떼)221005-이 근호 목사 나훔 최고관리자 22-10-06
19,309 자유게시판 407강-YouTube강의(하늘 마가복음 1:10)20221004-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22-10-05
19,308 자유게시판 406강-YouTube강의(산성과 반석 시편 18:2)20221004-이 근호 목사 시편 최고관리자 22-10-05
19,307 강의 유튜브강의 (406강,407강) 산성과 반석. 하늘 221004 시편 최고관리자 22-10-04
열람 ➜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12장 50절 (영생의 공놀이) 220920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2-10-03
19,305 자유게시판 12강-디모데전서 3장 1-7절(외부의 피)221002 - 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최고관리자 22-10-02
19,304 자유게시판 19강-예레미야 3장 22~25절(흔적)221002 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2-10-02
19,303 묻고답하기 집사 - 최고관리자 22-10-02
19,302 묻고답하기 목사님.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말라 의미(의도,뜻)는 무엇인가요?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2-09-30
19,301 자유게시판 10강-나훔 3장 8-12절(사라져버림)220928-이 근호 목사 나훔 최고관리자 22-09-29
19,300 자유게시판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1강) 히브리서6:13(맹세) 20220926b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22-09-28
19,299 자유게시판 대전-신명기(5강) 신4:1(에어포켓) 20220926a 신명기 최고관리자 22-09-28
19,298 자유게시판 18강-예레미야 3장 19~22절(아버지의 가족)220925 이근호 목사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22-09-25
19,297 자유게시판 11강-디모데전서 2장 11-15절(남자와 여자)220925 - 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최고관리자 22-09-25
19,296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다니엘의 수난 / 220925 - 최고관리자 22-09-25
19,295 묻고답하기 감독의 자격 - 최고관리자 22-09-25
19,294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20923b 민수기6장 5절(나에게 속기)-이 근호 목사 민수기 최고관리자 22-09-25
19,293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20923a 민수기6장 5절(나에게 속기)-이 근호 목사 민수기 최고관리자 22-09-25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