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20923a 민수기6장 5절(나에게 속기)-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20923a 민수기6장 5절(나에게 속기)-이 근호 목사
p.226 【3. 선지자의 속성과 다니엘의 위치】선지자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는데 선지자라고 하면 이렇게 보면 돼요. 한계, 경계. 경계선, 한계선에 서 있는 사람,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안/밖이 구분돼요. 안 또는 바깥이 선지자를 통해서 갈라집니다.
선지자의 위치에 대해서 쉬운 예를 들면 연극무대의 세트장을 생각하면 되겠죠. 앞에 연극무대가 있고 뒤에는 세트장이 있잖아요. 세트장에는 일반 사람들은 못 들어가죠.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이죠. 연극무대에서 연출되는 것은 무엇의 도움을 받아야 되느냐 하면 세트장 뒤에 있는 여러 가지 장치들이 있잖아요, 장치들의 도움을 받아서 여기 연극무대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연출되는 연극이 현실입니까, 아니면 세트장 뒤에 있는 장치가 현실입니까? 어느 게 현실이죠? 상당히 답변하기 곤란해요. 뒤에서 도와주고 있잖아요, 뒤에서. 뒤에서 “야, 이번엔 옷 바꿔. 배경 바꿔.” 뒤에서 도와주고 있다고요. 뒤에서 도와줘서 연출되는데 사람들은 연출된 걸 보거든요. 이걸 픽션(fiction)이라 그래요, 조작된 것. 조작된 것이죠. 조작된 것을 현실이라고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 조작된 것을 조작한, 세트장 뒤에 있는 널부러진 그러한 여러 가지 잡다한 기계들이 현실입니까? 그건 혼돈이죠. 아무 정리정돈 안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선지자는 한계와 경계선에 딱 서 있을 때에 사람들은 선지자를 보고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선지자 너머에 하나님 있다.’ 이렇게 오해해요. 이게 오해입니다. 연극무대를 마저 이야기한다면 연극무대에서 이 세트장 자체가 가짜에요, 가짜. 가짜입니다. 뒤에 있는 것도 연극의 시나리오가 아니잖아요. 널부러진 잡다한 그런 기계라든지 여러 가지 옷 같은 게 무슨 연극거리, 구경거리가 되겠어요? 가짜죠.
그런데 가짜가 있어야 진짜가 생기는 거예요. 진짜가 나타나야 가짜가 규명되는 것이 아니라 가짜가 나타나야 진짜가 규명되는 겁니다. 가짜가 나타나야. 바로 선지자가 자기가 하나님의 종으로써 말씀을 할 때 사람들은 그 선지자의 말을 듣겠어요, 안 듣겠어요? 안 듣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와 똑같이 생긴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 모습이 아닌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디서 구라야? 어디서 가짜야? 이렇게 되죠. 네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의견으로 듣지만 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는 않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선지자가 나타내는 기능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전부가 가짜라는 사실을 규명하는 겁니다. 왜 세상이 가짜냐? 선지자가 딱 등장하면 선지자를 가짜로 보기 때문에. 그런 능력밖에 인간은 없어요.
지금 한계가 있잖아요, 한계. 그 한계를 넘어서면 진짜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데, 한계 이전에 한계 앞에 있는, 한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한계 자체와 일치됩니다. 이것은 어떤 선지자가 와도 인간은 하나님한테 막혀있다, 그걸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떤 선지자가 와도 인간은 막혀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기능을 위해서 선지자가 있는 겁니다.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럼 절대자는 언제 나타나는가? 절대자가 나타난 순간을 제가 말씀드릴게요. 절대자가 나타나는 순간은 내가 나에게 깜빡 속았다고 느껴질 그 순간입니다. 내가 나에게 깜빡 속은 거예요. 그만큼 인간들은 그 어떤 것도 판단해서 어떤 선지자, 어떤 주의 천사가 온다 할지라도 천사의 말보다 내 말을 우선적으로 절대 신뢰하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안 속아 넘어가려고 애쓰기 때문에 나에게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해줄 때만 천사나 뭐에 대해서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천사의 말 듣고 주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 듣고 성경을 보면서 계속해서 굳어지고 굳어지는 것은, 역시 나는 총명해, 나는 역시 오늘도 안 속아 넘어간 걸 다행으로 여겨, 이겁니다. 오늘도 난 속아 넘어가지 않은 것을 자기의 성공, 승리라고 여기는 겁니다.
아까 한 걸 다시 이야기해볼게요. 다른 말로, 진짜가 가짜를 낳는 것이 아니라 가짜가 진짜를 낳는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사람들은 아무리 선지자가 와도 선지자의 그 존재의 비중과 선지자를 바라보는 자기의 비중, 자기의 무게 중 어느 쪽을 더 중요시여기겠어요? 나죠. 나입니다.
그래서 ‘아, 저 선지자는 진짜 같아.’ 할 때 여전히 그 사람은 자기한테 안 속고 있는 순간이에요. ‘진짜 예수님은 진짜 예수님 같아. 나 예수님 믿을래.’ 이 사람은 아직도 연극하고 있는 거예요. 이 연극하고 있는 나만이 진짜고 나만이 진짜 참된 현실인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보조하기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 피 흘렸다고 보는 거예요. 내가 아는 한계 너머에 계신 분이 나한테 와서 “너는 진짜야. 너는 진짜 신앙인이야.” 라고 알려줬다고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신앙이라고 이렇게 왜곡되게 생각하죠. 지식인데...... 자기 검정을 통과했잖아요, 자기 검정. 자기 검정을 통과해서 ‘아, 진짜 예수님은 믿을만해.’ 이럴 경우에 예수님이 믿을만합니까, 자기 점검이 믿을만한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예수님을 검정했던 자기 증거는 여전히 아직까지 실효성 있다고 보는 거예요. 아직까지 듬직하다고 지금 자부하고 있는 거예요.
수학의 노벨상이라 하는 필즈상을 받았던 허준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수학 빼놓고 다 잘한다.”고 했어요. 나는 수학 빼놓고 다 잘한다. 이걸 선지자의 말로 패러디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하나님 빼놓고 다 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선지자를 선지자로 보느냐 하면 다른 건 몰라도 하나님을 잘 알면 선지자라고 해서 자기가 선지자로 받아들이는 그 검정, 테스트를 통과해서 내가 믿을만한 선지자라고 수용할만한 대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참 이게...... 뭐냐 하면 죄의 실효성 문제에요, 죄의 실효성. 죄의 실효성은 무엇 때문에 있어야 되느냐 하면, 죄가 죄다워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죄의 실효성이 없으면 죄 사함의 실효성도 없게 돼요. 죄가 제대로 실효적이지 않으면 죄 사함이 하나의 위로가 돼버려요. 위로가 되고 아무 비현실적인 그냥 동화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죄 사함이 실효적이 되려면 죄가 실제로 죄이어야 해요. 실제로 죄이어야 하는 겁니다. 실제로 죄에 대해서는 이미 성경에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쉽게 언급을 해줬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 이게 죄잖아요. 따먹지 말라한 것을 따먹은 것이 죄잖아요.
그러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은, 현재 상황이 ‘따먹지 마라’ 상황입니까, ‘따먹었다’ 상황입니까? 따먹었다 상황이죠.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주님의 안목, 주님의 시선으로 볼 때에 우리가 구원받고자하거나 뭐 어떻게 성경을 연구하는 자체가 뭐가 돼요? 그게 죄의 실제성이에요. 죄의 현실성을 말하는 겁니다. 구원받고자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전부다 이게 죄에요.
죄는 종류가 문제가 아니에요. 죄는 질적인 문제입니다. 죄는 질적인 문제에요, 죄는. 그러면 본인이 죄인 것도 모르고 노력한 그것은 가상히 여겨 달라, 이렇게 나올 때 죄의 실효성에 인간이 합치가 안 되죠. 일치가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죄인인 것도 모르면서 난 이런 이런 종류의 죄는 안 지었다, 이건 아니에요. 죄의 질적인 문제거든요.
죄를 어떻게 짓는다는 것은 질적으로 이미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서 죄를 낳는 거니까, 그런 종류가 나오니까 인간은 종류 따라서 구분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빨간색과 노란색과 파란색 크레파스의 공통점이 뭡니까? 상당히 어려운 문제인가요? 모두 다 파라핀이라는 거예요. 재료가 동일하다는 거예요. 색깔이 문제가 아니고 빨간색을 내든 파란색을 내든 전부 다 똑같이 파라핀으로 만든 인공물이잖아요.
경우에 따라서 이런 죄, 저런 죄 나오겠지만 똑같이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죄의 실효성에 대해서 죄인인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죄의 실효성에 접근을 못하죠. 왜냐하면 스스로 죄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이미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 내가 믿을게. 선지자? 인정해줄게. 이건 누구의 검증을 통과해야 돼요? 본인의 검증을 통과해야 자기가 수용하겠다는데 본인 자체가 죄인인데 죄인이 믿는 예수님은 가짜죠. 죄인이 인정하는, 죄인이 동의하는 그런 선지자는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계 너머 뭐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계 너머도 한계 이전의 일부에요. 한계 그 자체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 너머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비극이죠. 저 선지자 너머에 하나님 나라 있고 연극무대 뒤에는 뭔가 연극을 연출하는 현실이 있을 것이라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뒤에 가면 널부러진 장치만 있죠. 앞에 있는 가짜를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만 있을 뿐이죠.
그래서 죄의 실효성에 인간은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제시한 것은 뭐냐? 죄의 실효성을 제시한 게 아니고 죄 사함의 실효성을 제시해버렸죠. 그래서 죄 사함부터 시작해야 죄가 나와요. 그 죄 사함의 실효성이 뭐죠? 십자가죠. 십자가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역시나 십자가 딱 제시할 때 요한복음 6장에서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 예외 없이 다 가버리고 남은 자가 없다고 했어요. 다 가버리고 한 사람도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없었다고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6장에.
한번 볼게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래도 두세 명은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66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6장의 시작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더라, 부터 시작했잖아요. “큰 무리가 따르니” (요6:2) 그런데 요한복음 6장 끝부분에서는, 다시는 그와 함께 있지 아니하였다.
그럼 도중에 사람들이 함께 다닌 이유와 떠난 이유가 다 나옵니다. 함께 다닌 이유는, 저분은 우리의 선지자다. 저분은 우리의 왕이다. 이런 기적은 행한 사람이 없다. 예수님 가는 곳에 바다 건너 산 건너 물 건너 막 따라왔죠. 따라올 때 그 마음가짐이 뭐냐? 인간들의 자기 검정에 의하면 예수님은 메시아 맞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 맞다, 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들이. 이게 인간의 본성이고 안에 내재되어 있는 내부의 성질이죠.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들과 다른 성질이라고 우길 수 있습니까? 없죠. 인간은 떠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결론이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인간은 떠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남아있는 누구보고 떠나라 합니까? “가! 열두 제자. 너희도 가! 가지 왜?” 이렇게 물었잖아요.
베드로가 자기가 무슨 말하는지도 모르고 뭐 “영생의 말씀이 계신 분을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점검해서 떠날 분이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라고 이상한 소리하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6:65)
아버지께서 내게 올 때까지 너희들도 결국은 말끔하게 주님 곁을 떠나야 되는 거예요. 왜 떠나야 되는가? 인간은 안 속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자기한테 안 속아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최종 믿는 것은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니에요. 자기 결정을 믿는 거예요. 자기 쌓아놓은 지식과 실력을 믿는 겁니다.
그렇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을 수 없게 될 때, 그 순간이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오셔도 하나님을 돌려보내는, 거부하고 배척하는 세상이죠. 그게 바로 최후의 순간이에요. 인류 최후의 순간입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핵폭탄 터트리는 순간이 최후의 순간이 아니고, 인류 최후의 순간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와도 인간이 거부했다는 것이 들통나는 순간이 인류 최후의 순간입니다. 우리는 그중의 한 사람이고요.
따라서 인류 최후의 순간을 캡쳐해봅시다. 캡쳐해보면 이것이 인간세계의 한계가 되겠죠. 인간의 한계죠. 인간의 한계를 아까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이게 누구라고요? 인간의 한계는 선지자에요, 선지자.
그래서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혼절이 났다고 다니엘 8장에 나옵니다. 기절했어요.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단8:27) 기절할 때 다니엘 선지자가 무엇 때문에 기절했는가 보니까 인간 세상의 전쟁이야기 계시 듣고 예언 듣고 기절했어요.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걸 듣고 기절한 겁니다.
그럼 다니엘이 하나님께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그것이 쇼킹한 충격적인 이야기였는가? 다니엘 역시 인간의 역사가 고요하고 평화롭고 그냥 안정되기를 바란 거죠. 그런데 인간이 멸망할 때 전쟁으로 멸망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니엘은 그걸 현실로 받아들인 거예요. 이게 바로 다니엘이 보여줬던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신앙이란 말씀의 세계를 유일한 현실로 보는 게 신앙이에요. 말씀의 세계를 유일한 현실로 본다면 기존에 주님을 배척한 이 세상은 현실이 아니죠. 이 세상은 현실이 아닌 게 된다고요. 이 세상은 현실이 아니에요.
다니엘은 이 세상에 살았는데 주님의 예언된 말씀이 와버리니까 이 세상에서 신앙으로 옮겨가버린 거예요. 옮겨가면서 이 세상현실은 현실이 아닌 게 되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현실세계가 가짜가 되어버린 겁니다. 진짜는 말씀에 있고.
그러면 이 (세상의) 현실세계에 다니엘이 있었잖아요. 그럼 이 말은 아까 제가 한 원칙, 인간이 자기한테 속았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이게 절대자가 임한 순간이에요. 인간이 자기에게 속았다는 것, 다니엘이고 누구고 모든 인간이 현실에 속은 거예요. 자기가 현실의 일부니까 내가 나한테 속은 거예요.
그래서 신앙이라 하는 것은 현실에서 만들어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신앙은 어디서 생기는가? 신앙은 말씀, 선지자니까 예언이라 합시다, 예언으로부터 생성되는 거예요. 신앙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못 만들고요. 말씀이 우선되고 절대적인 말씀이 들어와버리면, ‘아, 이 말씀이구나.’가 아니라 그 말씀이 들어온 순간에 ‘왜 나는 그동안 내가 나한테 속았지?’라는 생각이 우선적으로 드는 거예요, 우선적으로. 그래야 이 말씀을 받을 그릇이 돼요. 뭐 그전에 이미 그릇이 됐지만 말씀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를 붙잡고 붙들고 살려고 했던 거예요. 내가 나를.
그러면 신앙의 세계는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이렇게 요약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은 극단적인 피동성. 피동성인데 어느 정도로? 극단적인 피동성.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극단적인 피동성이에요.
내가 나설 게 아무것도 없고 말씀에서는 용납을 안 해줘요. 내가 그 말씀 지키겠습니다, 를 말씀세계가 용납을 하지 않아요. 내가 말씀을 실천에 옮기겠습니다, 이 자체를 말씀세계에서 용납하지 않아요. ~하겠습니다, 는 피동성이 아니고 능동성이기 때문에. 내 쪽에서 나오는 능동성이라는 것은 내가 가치 있어줘야, 이 가치 있는 내가 설칠 때 뭐 가치 있는 것도 나온다, 이게 능동성이란 말이죠. 그래서 극단적인 피동성이 계속 피동성으로, 이 현실세계 속에 말씀이 운동하고 말씀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작용하는 이러한 피동성의 원천 또는 피동성이 생성되는 원천, 인간세계 속에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 속에서 극단적인 피동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바로 혼절한 다니엘, 그리고 자기 몸을 묶어버리는 에스겔, 3년 동안 벌거벗고 애굽에 가서 예언한 이사야, 구덩이까지 들어가서 예언한 예레미야, 이 선지자들의 특징을 한번 보세요. 요나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한 마디로 말해서 극단적인 피동성이에요.
극단적인 피동성의 특징은 더는 내가 나를 속일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거예요. 더 이상 내가 나를 꾸미거나 조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극단적인 피동성이니까 본인이 주체입니까, 주체 아닙니까? 주체 아니죠. 주체 아니니까 자기를 이렇게 만든 그런 주님이나 하나님을 소개하겠죠.
소개하게 되면 선지자 앞에 있는 일반 사람들이 이 선지자를 선지자로 인정하겠습니까? 인정 안하죠. 왜? 인간은 한계 밖의 한계를 인정 못 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선지자에게, 예수님한테 한 것처럼 똑같이 욕하고 공격하고 비난하는 거예요.
그 대신 그들이 양산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죠. 많이 깔아놓죠. 이적과 기사, 데살로니가후서에 보면 나와요.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살후2:9-10) 인간들이 원하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자기를 선지자로 받아들일 것을 은근히 압박하는 자들, 그런 자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 적그리스도가 한 명이 아닙니다. ‘적그리스도들’로 되어있죠. 요한일서에 보면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등장하죠.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요일2:18)
선지자와 이런 말씀의 만남 또는 주님의 만남은 나를 흔드는 만남입니다. 노사연의 그런 만남 아닙니다. 우리 만남은~ 그런 만남 아니고 나를 흔들어버리는 만남. 나를 희석시키는 나의 흔적을 제거해버리는 만남.
그래서 선지자에게 이 순간은 최후의 순간입니다. 항상 최후의 순간이에요. 최후라 하는 것은 최후를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최후라고 해서 ‘아이고, 안타깝다. 어쩌나.’라고 할 수 있는, 그렇게 감정을 표할 수 있는 주체 자체를 하나님은 인정 안 해요.
최후는 주의 말씀이 만나는 순간 최후가 되고 그 최후 앞에서 나는 이 가짜 중에 한 사람으로서 들통이 나는 순간이죠. 그것도 매일같이. “나는 가짜다.” 이런 식으로 매일같이 가짜로 들통 나고 나는 매일같이 나를 속이는 전문가로서 내가 살아왔음을...... 하루를 살면 또 하루 동안 나를 속이는 전문가로 살아왔다는 것을 자인하는 순간순간이 선지자에게는 바로 그 순간이 지금의 순간입니다. 그래야 극단적인 피동성이 유지가 되고 그렇게 유지가 되어져야 오직 말씀만 증거되는 거예요. 말씀만.
사람들이 선지자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이유는, 왜 자기가 자기한테 안 속아 넘어가려고 발악을 하느냐? 그것은 이미 선악체계가 턱하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기에 선악체제 자체에 하자가 없고 문제가 없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선한 걸 선하다 하고 악한 걸 악하다 하는데 이게 뭐가 잘못 됐느냐?
그래서 인간은 다른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어떤 경우,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선악체계로 전부다 분석이 가능하다고 자신만만하기 때문에 선악체제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없죠. 그러니까 선악체제 말고 다른 대안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없다고 생각합니까?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다른 대안이 없어요. 선지자가 오든 예수님이 오든 전부다 자기 선악체계에 의해서, “보자, 내가 한번 평가해볼게. 판단해볼게.”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이렇게 하나로 요약하면 됩니다. 신성, 하나님이죠,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은 하나님께서 끊어놓은 것을 인간들이 이어보고자 할 때 생성됩니다. 아까 생성이라 했죠? 생성. 자, 믿음이 뭐라 했습니까? 믿음은 무엇의 생성이라 했습니까? 믿음이라 하는 것은 말씀이 주체가 되어서 생성하는 거죠. 인간도 뭘 생성하느냐? 하나님과 자기가 끊어졌다는 이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거예요. 끊어진 것을 이어보려고 할 때 인간들은 생성하는 겁니다.
방금 한 이야기를 함축해서 보면 신앙이 끊어진 것을 신앙을 동원해서 잇고자 하는 이것이 인간세계에서 통하는 신앙이라고 우기면서 그렇게 주장들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끊어놓은 것을 인간이 신앙으로 이어보려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이에요. 끊은 것인데, 끊으면 끊은 건데 이어보려고 하는 거예요.
이걸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데 (마9:17) 옛 부대, 선악체제죠, 옛 부대에 미련이 있어서 여기에다 예수님의 소식을 선악체제에 짜맞추어서 그걸 집어넣고 이걸 신앙이라고 하는 이 자체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인 거예요.
그걸 집어넣을 때 삼위일체 이론, 성육신 이론, 십자가 이론, 언약 이론 다 들어갑니다. 왜? 왜 그걸 집어넣습니까? 무엇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어떤 경우라도 나는 그동안 깜빡 내가 나한테 속았다는 그 사실, 그렇게 속았다는 것을 고백할 능력 자체가 없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하나님과 자기를 이어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혼절하지 않고 정신이 말짱하죠. 선지자는 기절했는데, 기절할 필요 없죠. 기절 왜 하나? 성경공부하면 될 걸 가지고 기절을 왜 해. 이상한 사람들이네.
이렇게 되니까 아까 시작을 뭐라 했습니까? 죄가 무엇인가부터 하는 게 아니고 죄의 실효성부터 하는 게 아니고, 죄 사함의 실효성부터 주님께서 오셔서 성취해버려요. 완료를 해요. 업무를 종료시켜버립니다, 죄 사함에 대해서. 드디어 죄 사함에 대해서 더 추가적인 제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말은, 끝냈다는 거예요.
차가 고장 나서 정비소에 맡겼는데, “사흘 뒤에 찾아오세요.” 사흘 뒤에 찾으러 가니까 주인 보기에 뭐 고친 것도 없어요. “좀 고치라 했는데 왜 안 고쳤습니까?” “종료되었습니다. 다 고쳤습니다. 고물인데, 원래 고물이에요. 원래 고물을 고물답게 하는 게 우리 정비소의 주특기입니다. 다른 정비소, 이 세상 어느 정비소도 못하는 겁니다.” 철저히 고물을 고물답게 만드는 것, 가다가 덜렁거리면서 타이어 두 개씩 빠져버리고...... 그게 고친 거예요.
고쳤다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건방짐이죠. 끊어졌으면 끊어진 대로 살아야지. 끊어진 것을 고치겠다는 그 의도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예수님을 보낸 주님의 조치에 대한 모독이에요. 그래서 그런 노래 있잖아요. 끊어진 것은 끊어진 대로~. 뭐 그런 노래는 없습니다만.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죠. 끊어진 것은 끊어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뭐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선지자의 속성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선지자는 언약에 의해서 그런 속성을 가진 거예요, 언약에 의해서. 그래서 진짜 선지자치고 자진해서 선지자 될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난입하는 거죠.
그래서 만남은 뭐라 했습니까? 만남은 어떤 만남? 나를 흔들어버리는 만남. 흔드는 만남. 나를 소실시키는 만남. 나를 흔든 만남의 결과가 뭐냐 하면 극단적인 피조성이에요. 여기에는 어떤 목적의식도 용납되지 않고 기대심리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앞길, 미래, 희망 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피조성이에요. 어디를 가든지 어디로 몰고 가든지 그건 내 소관이 아니죠. 왜냐하면 나는 이미 흔들림에 의해서 갈기갈기 다 해리되었기 때문에 산산이 다 찢어졌기 때문에, 내 속에 침투한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예언이 나를 주도하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런 말씀을 판단했던 그 체계, 선악체계 그것이 악했다. 나빴다. 따라서 내가 나빴다. 판단하겠다는 것, 주의 말씀을 판단해서 내가 잘 되어보겠다, 내가 다음에는 그런 실수 두 번 다시 안 하겠다는 그 판단 자체가 그것도 목적이잖아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한 적 없습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자기 백성을 다루십니까? 물으면 아까 그 해답은 제가 제시했어요. 죄 사함의 실효성 때문에 그래요. 죄 사함의 실효성. 이 죄 사함의 실효성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서는 실효성이 없어요. 내가 죄를 알고 내가 죄를 씻어줄 분을 찾아서 결합시켜서 죄 사함에 도달하는 이런 가짜는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안 받아줘요.
여러분들이 한국 교회 목사들 설교할 때 바로 이것을 부정하는가를 한번 살펴보세요. 이것을 부정하는지 안 그러면 긍정하는지.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여러분 죄를 위해서 예수님 오셨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실효성 없거든요.
왜 실효성이 없는가? 여기에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 선악체계가 그대로 살아있어요, 선악체계가. 선악체계가 부정당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어요. 죄라는 것도 선악체계에 입각한 죄의 개념을 끄집어내고 있는 거예요. 이런 시도 자체가 죄라는 것, 그것을 모르죠.
인간은 이렇게 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자기가 시커먼 죄인이라는 거예요. 이게 싫다는 거예요. 내가 죄인 되는 것을 왜 싫어합니까? 아니 더 나아가서 물읍시다. 극단적인 피동성이니까. 내가 지옥 가는 것이 왜 내가 싫죠? 내가 지옥 가는 것을 왜 내가 싫어하느냐? 그 싫어하는 이유가 뭐냐? 그 해답 알고 있습니까?
그걸 이번 수요설교 식으로 해답을 내린다면 인간은 본인이 뭘 믿고 있지 않은지를 몰라서 그래요. 인간은 뭘 안 믿습니까? 나는 절대로 나를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안 믿고 있는 거예요. 이래 말하나 저래 말하나 안 믿기는 마찬가진데......
인간은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는 겁니다. 도저히 나는 내가 믿을 대상도 아니고 믿을 내용도 아닌 것을 본인이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누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죠. 마귀가. 이건 아무 실효성 없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죄 사함의 실효성을 증명하는 용도로,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죄 있다고 우기는 인간을 부른 게 아니고 그냥 죄인으로서 부른 거예요. 죄인으로서.
누가복음 한번 보겠습니다. 말을 끝까지 들어야 돼요. 중간에 들었다가는, 아 그 이야기구나, 하는데 그런 뜻 아닙니다. 누가복음 4장 25절 끝에 보면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어요. 있었는데 26절에 봅시다.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한 과부 뿐이었다는 거예요.
나는 과부다. 인생 팔자 더럽게 되었다. 주께서 불쌍히 여겨주겠지, 그런 사람을 부르러 온 게 아니에요. “여기 자기가 스스로 불쌍히 여기는 사람 다 와.” 이게 아니고, 반대로 “오지 마!” 오지 마. 과부라는 그 조건이 구원받는 데에 전혀 상관없어요. 오지 마.
그 오지 마라는 것. 나한테 오지 마라는 것을 그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뜻이, 과부라는 이유 때문에 불쌍하니까 불쌍한 것 받아주니까 “저 과부입니다. 불쌍합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저 찾을 거죠?”라고 할 때 “오지 마!”라는 그 증거로 선지자 기능을 하는 사렙다 한 과부가 그들에게 등장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렙다 과부가 “엘리야 나한테 왔는데?”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안 믿죠. 왜냐하면 너한테 찾아갈 그러한 합리적인 기준이 모호하다는 겁니다, 합리적인 기준이 모호하다.
출애굽할 때 열 가지 재앙이 있었거든요. 열 가지 재앙이 있었는데 그 열 가지 재앙 중에 바로가 자꾸 모세하고 흥정을 해요. 딜을 합니다. “너희들이 여호와께 제사한다고 나간다는데 나가지 말고.” 많이 맞았어요. 하도 많이 맞고 난 뒤에 “좋아. 제사 드리되 나가지 말고 애굽 땅에서 제사 드려.”라고 한 대목이 출애굽기 8장 25절에서 26절에 나옵니다.
보겠습니다. 네 번째 재앙이 있은 이후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모세가 가로되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이 땅에서, 나가지 말고 이 땅에서 제사 드리라 하니까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이게 합리적인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재앙을 누가 내리느냐 하면 여호와가 내리거든요, 모세를 통해서. 재앙을 내렸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애굽 사람들은 인간 같지도 않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재앙을 내린 그 하나님에 대해서 애굽 사람들은 다 미워하고 싫어해요. 그런데 그 하나님, 애굽의 대부분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하나님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만약에 “찬양을 드립니다. 일 조치 참 잘 하셨습니다.”하고 찬양해버리면 그들이 돌멩이 가지고 멀리 있는 여호와까지는 못 던지고, 힘이 없어서...... 누구한테 던지겠어요? 여호와께 제사하는 히브리인들을 돌 던져 죽이겠죠.
바로 그 꼴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당했던 그 모습이에요. 너나 나나 다 같이 선악체계 가진 똑같은 인간인데 하나님이 그렇게 차별할 일은 없다 이 말이죠. “네가 뭐 별나고 뭐 대단한데 왜 너에게만 구원이냐? 같은 종류의 인간 같으면. 네가 우리보다 잘났어?” “안 잘났어.” “뭐 훌륭해?” “안 훌륭해.” “그런데 왜 하나님이 너만 찾아와? 에이, 죽어라. 인간아. 그러니까 너는 가짜야. 너는 죽어도 우린 벌 없어. 왜? 너는 가짜기 때문에.” 나만 하나님이 챙긴다는 가짜이기 때문에 죽여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당했던 그 모습이죠.
이걸 제가 왜 설명하느냐 하면, 이걸 왜 찾아보느냐 하면 그래서 언약이 생성되기 때문이에요. 언약은 그런 가운데 생성돼요. 언약이라는 게. 언약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언약은 사건입니다. 특이한 사건이에요. 인간이 갖고 있던 선악체계와 모든 지식체계를 총동원해도 설명이 안 되는 사건이에요.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이에요. 그게 또 마땅하고요.
그리고 제가 아까 처음에 한 것처럼 언약 사건은 어떤 순간에 찾아왔다고 느껴지는가? 내가 나한테 깜빡, 깜빡이 아니죠, 평생 동안 내가 속아왔구나. 내가 나를 지킬 대상이 안 되는데 어떤 일이 있어도 그냥 나만 지키면 인생 선방했다고 우겼던 그 모습자체가 이게 진짜 악마한테 속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은 그 생성되는 신앙. 신앙의 근거지. 신앙의 근거지는 뭐냐 하면 선지자 출현의 근거지가 되겠죠. 신앙의 근거지=선지자 출현의 근거지, 원천. 창세기 48장 15절에 나옵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나오죠. 요셉이 형들 앞에서 이야기합니다. 거기 15절, 16절에 나와요.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태어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자, 아까 우리가 들었던 용어 한번 적용해봅시다. 극단적인 피동성. 극단적인 피동성의 뜻은 시작점, start에서 ‘나’가 빠져있다는 겁니다. 내가 빠져있어요. 착한 나가 빠져있어요. 당연히 악한 나도, 선악이니까 착한 나도 빠지고 악한 나도 빠져버려요. 지금의 내가 나 된 것은 나 빠지고 다른 분에 의해서, 언약이죠, 다른 분에 의해서 지금 생성된 거예요. 생겨난 거예요. 그게 극단적인 피동성이에요.
그냥,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이게 아니고 끝까지 그 피동성을 유지하는 것. 내가 이렇게 했더니만 하나님께서 도와줬다, 이것도 아니에요. 기도했더니만 응답받았다, 이것도 아니에요. 극단적인 피동성이에요.
그 시작점과 끝점에 대해서 내가 모른다,가 아니라 내가 몰라야 된다는 피동성. 내가 몰라서 안타깝다,가 아니라 너는 빠지라는 그 지시가 함께 들어있는 것이 언약의 내용입니다.
16절에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벌써 2분 지났다. 피동성에 따르다보니 이런데...... 여기까지, 15절까지 하고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