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17"10-15(말씀을 받는 사람들)
Re..행 17:10-15(말씀을 받는 사람들)
이름 : 이근호(IP:)
말씀을 받는 사람들
2005년 2월 9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17:10-15
17: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7: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17: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명절 때면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기 싶습니다. 마치 그것이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십자가 앞에 서 있음을 놓치지 않습니다.
'자기 가족'이라는 범주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 범주를 넘어서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자신이 친히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이나 상황 따라 그때그때 자신의 모습을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성경을 대할 때, 그 성경이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기를 고대합니다. 복이라든지, 영생이라든지, 구원이라든지 하는 이익을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의 '성경 보기'란 그저 자기를 키우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진짜 거듭난 사람은 '성경 자체'에 푹 빠지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이런데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성경에 대해서 남다른 감각을 지니게 됩니다. 즉 성경 앞에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 성경 속으로 자기 자신마저 빠트려 사라지고 맙니다.
이것은 그동안 성경을 대하는 자기 자신의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성경을 보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면서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성경에서 말하는 현실과 완전히 틀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뢰아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보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들이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는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보면 잘 나와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은,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상 나오는 모든 신학을 일거에 부정해버리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뜻이 '성경'이란 문자와 인간 언어로 제공된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분석하고 풀이해서 납득이 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조치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에는, 아무리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래도 어디까지나 '사람의 말'이 되는 형식을 취할 수 밖에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일단 '사람의 말'이 되는 조건 하에서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뜻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겁니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그 성경을 잘 정립해서 '신학'이라는 것으로 다듬어 간추려 놓으면, 그 누구든지 그 신학을 따르고 수용하기만 구원이 가능토록 연구를 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달리 이야기하십니다.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말'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람의 문자로 형성되어 있다할지라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와 적용에는 사람의 노력과 성의와 뜻을 배제 시키면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생명이란 선물로 공짜로 주어집니다. 교회 다닌다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 그냥 있어도 주어지는 것이 생명입니다.
결코 성경을 인간이 풀어준다고해서 그 인간의 능력이 가미되어서 그것이 납득이 되는 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 자체의 움직임이 움직여서 스스로 성취성을 실현시켜 나가는 겁니다.
과연 이러한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바로 '거듭난 자들'이 이 성경 말씀 자체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믿고 있는 겁니다. 이 점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 2:13절 끝 부분에 나와있습니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씀 스스로의 성취력을 방해하거나 막아 설 위인은 없습니다. 말씀 스스로의 성취성을 저지할 환경이나 열악한 처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말씀은 스스로의 성취성 없이 그냥 실패한 채로 이 세상에서 철수해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은 말씀을 대할 때, 자기 유리한 쪽으로 대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와서 이 데살로니가 2:13절의 말씀처럼 가르칠 때에 베뢰아 사람들은 '정말 그런하가 하며' 이러한 놀라운 성경 자체의 위력에 탐복하면서 성경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나 환경을 고려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본성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거듭난 사람에게는 이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들의 특징은 말씀 자체의 능력에 의해서 움직이기에 자꾸만 말씀 자체의 세계에 빠져듭니다.
자기 앞에서 어떤 현실이 전개되는지 알 바가 아닙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현실의 제대로된 실체는 자기가 빠져들고 있는 그 성경의 현실의 연장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 4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현실에 너무 매료되어 정신을 못 차릴 정도입니다. 15-17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베뢰아 사람들은, 이 성경 속의 현실이 과연 그러한가 너무 신기해가면서 고맙고 감격하면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것입니다. 하지만 거듭나지 못한 자가 이 구절을 대하면 자기 구원받을 방도나 수단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형의 결혼식에 참석한 동생이 형을 너무 사랑한다면 자신을 잊어버리고 마치 자기 결혼식처럼 흥겨워하고 좋아들 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형에게 평소에 감정이 있는 동생이라면, 나중에 자신의 결혼식은 형의 결혼식보다 더 웅대하기를 계산하는데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동생은 소위 '거듭나지 못한 자'의 태도를 대변합니다.
바라기에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획이 너무 좋아서 아에 성경 속으로 푹 빠져들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처지조차 고려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두리번거리면서 세상을 살지 말게 하시고, 성경 속으로 풍덩 뛰어들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