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3a 부산강의 : [시편]51(35:1)-덫
20220913a 부산강의 : [시편]51(35:1)-덫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시편 35편하겠습니다.
시편 35편 1절에 보면,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이렇게 돼 있지요. 여호와를 따로 상정하고 아래쪽에 ‘나’가 등장하고 그다음에 저쪽에 ‘너’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싸우는 자가 등장합니다. 이 세상에 남이라고 다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나와 싸우는 자가 등장해서 무엇이 여기서 규명이 되느냐 하면, 여호와의 뜻이 규명이 됩니다.
내가 싸움에 말려들지 아니하면 우리 자신은 여호와의 뜻을 모른다가 돼버려요. 시편 35편에 의하면. 시편 35편이 하나님 말씀이잖아요. 이 세상은 말씀대로만 돼 가지요. 말씀에 의하면 나와 싸우는 자의 등장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기회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구원이라는 거예요.
여기 시편 35편 3절에 보면,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너에게 구원이 이르렀다고 저한테 일러주소서. 너 구원 받았다고 일러주소서. 그런 뜻이거든요. 그다음에 여기에 9절에 보면,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구원을 기뻐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 뭘 아느냐 하면 구원이란 것,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하나님의 뜻 자체가 구원을 어떻게 형성시켜주는가? 그걸 아는 겁니다. 그러면 나와 다투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느냐?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왜냐? 구원은 여호와의 뜻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있지 여호와의 뜻에 관심 없는 사람은 구원 없어요.
구원 없다면 이들에게는 뭐가 있느냐? 여기에 25절에 보면, “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이렇게 돼 있어요. 나와 싸우는 자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소원이 있어요. 성도한테는 구원이 있지만 성도와 싸우는 자에게는 소원이 있습니다. 이 소원 있는 사람의 특징은 싸움이 없어요. 어떤 싸움이 없이 어떤 장애가 없이 인생에 자기 소원성취에 매달려 있습니다.
구원이 없고 소원이 있는 사람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걸 제가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싫고 천국은 원하는 인간의 이중성] 예수님은 싫은데 천국은 원해요. 인간이 예수님이 왜 싫냐 하면 예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게 뭐냐? ‘나’에요. 그래서 교회 와서 구원을 원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교회 와서 소원을 원해요.
예수님은 싫고 천국은 원하는 인간의 이중성,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유가, 천국이라 하는 것은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이게 누구의 나라냐 하면 예수님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 골로새서 1장 13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천국은 아들의 나라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싫다는 말은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고, 천국에 못 가는 이유는, 나는 예수님의 나라를 원한 게 아니고 내 나라, 나의 나라를 원한 거예요.
나의 나라 원해서 만든 게 뭐냐? 오늘날 교회입니다. 교회 온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자기가 자기한테 너무 좋아서 교회 온 거에요. 자기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그 소원이 뭐냐? 천국 가는 거예요. 천국 가기 위해서 교회 오는 거예요. 그게 소원이니까. 예수님을 잃고 싶지 않은 게 아니고 나를 잃고 싶지 않은 거예요. 예수님 잃어도 나만 챙기면 오케이로 여기는 자들, 교회로 갑니다. 그들이 자기 종교를 갖게 되지요.
그래서 그 사람들의 모든 행동이나 말이나 태도, 평소에 생활습관이 딱 이걸로 들통 다 났습니다. 예수님이 싫고 천국을 원한다. 그 천국은 무슨 천국? 내가 잘 되는 천국을 원한다. 이것을 인간은 숨길 수가 없어요. 예수님에 미쳤고 예수님 좋고, 이런 사람 거의 없습니다. 자기한테 미쳤고 자기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거예요. 그 자기 안에 뭐냐? 자기 가족과 가정이 함께 포함이 돼 있어요. 내 직장, 내 새끼,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잘되는 것 그 외에 더는 소원이 없는 거예요. 구원이 소원이에요, 소원.
그럼 구원은 뭐냐? 소원을 깨고 나오는 게 구원이 되는 거예요. 내 위주를 깨고 나오는 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가도 구원 받은 사람 거의 없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자기 소원 얻으려 교회 왔기 때문에 구원과 아무 상관없는 짓들을 하는 거예요. 찬양하고 헌금하고 예배하는 데 소원과 관련돼 있지 구원과 관련돼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교회 마치곤 후다닥 자기 소원대로 열심히 하는 겁니다.
이 소원을 네 자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 소원을 뭐라고 하느냐? ‘목적의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어요. 성경에서 인간의 목적의식은 한 마디로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냥 이래요. 뭡니까? 더럽다. 사람이 인생이 사는 게 힘든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목적의식이 있기 때문에 힘들어요. 목적의식이 더러운 이유는 이것과 자기의 구원과 관련 없고 소원과 관련 있어요.
따라해 볼까요? 목적의식이 더러운 이유는 무엇 때문에?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나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자기 덫에 자기가 빠져버렸어요. 덫 알지요. 쥐 잡을 때 덫, 짐승 잡을 때 덫. 내가 내 인생에 덫을 놨어요. 지 인생에 지가 덫을 놓고 저 사람한테 사기 당했고, 저 사람한테 배신당하고, 이러고 있어요. 네가 나를 힘들게 했다. 전부 다 남 탓하고 있어요. 본인이 본인을 잊지 않기 위해서, 또는 더 나아가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살기 때문에 인간은 이 자아라는 덫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시 정리할게요. 인간이 기독교라는 종교, 교회를 가는 이유가 뭡니까? 궁극적으로 빠져나오는 게 뭐예요?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교회 나와요. 그럼 이 사고방식, 목적의식이 나중에 구체화됐다면 그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일까요, 자기 나라일까요? 자기 자신이 영광 받는 자기의 나라지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했어요. 너희들이 절대로 내게 올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게 뭐냐? 각자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것도 요한복음 12장인데요. 본문 알려드릴게요. 아주 친절하게. 이게 친절한 건지 짐을 지우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요한복음 12장 43절,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이 소원에서 못 벗어납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영광으로부터 못 벗어나요. 본인이 잘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말이 어려운 거예요? 안 어려워요. 본인이 잘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 본인이 잘되기 위해서 소원의 덫에 빠졌는데 이게 인간의 힘으로 구원이 되겠습니까? 구원이 안 되죠.
소원으로 계속 머리 처박고 거기 기어들어가는 데 무슨 구원이 돼요. 교회를 오십 년, 육십 년 다녀보세요. 구원이 안 돼요. 소원이 자기한테 최종 목적이 목표 자체가 자기 자신인데 무슨 구원이 됩니까? 안 되지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절대로 자기를 심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세상에 아까운 게 인간인데.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모든 범죄는 귀중한 것은 귀하게 못 보기 때문이다. 귀한 게 뭐냐 하면 햇빛과 공기와 주께서 우리를 오늘도 살려내심이죠. 주께서 여호와께서 살려내심이죠. 그러면 살려냄을 당한 내가 귀합니까, 주님이 귀합니까? 주님이 귀하지요. 요한복음 1장 4절에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이 먼저 있었느니라. 사람이 귀한 거예요, 사람 있기 전의 생명이 귀한 겁니까? 생명이 귀한 거예요.
그런데 살아나서 뭔가 문제가 생겼어요. 예수님은 싫고 나는 좋고. 내가 들어갈 천국은 좋고. 본인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한시도 Don't forget, 절대로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나한테 이익이냐, 이걸 한시도 긴장 늦추고 잊은 적이 없어요. 왜? 내 소원은 내게 있으니까.
이게 시편 35편 아니면 어떻게 알겠어요. 다윗이 등장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겠어요. 왜? 너나 나나 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다윗이란 것은 특이한 존재에요. 하나님의 선지자고 예언에 의해서 등장한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시편 35편 1절에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이렇게 돼 있어요. 하나님이여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시고, 이렇게 돼 있어요.
귀중한 것을 보지 못한 게 범죄가 되니까, 범죄란 것은 하나님께서 더럽다하니까. 인간의 모든 목적의식은 어떤 목적의식이든 그거는 더럽다가 돼요. 스스로 자기를 심판하지 않으니까 더러운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전부 다 죄인밖에 없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러면 인간의 목적의식, 소원이죠. 목적의식은 인간이 왜 힘든지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목적의식은 현실과 자기의 목적이 일치되기를 한시도 긴장 늦추지 않고 그걸 계속 간절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소원에 유리하게 되도록 바짝 졸아서 살아가고 있어요. 아주 예민해집니다. 모든 신경구조가 예민해지죠. 소원 없는 인간은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데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십자가 안에 들어온 성도는 이 땅에서 고인이 되었고 죽은 자가 되었고, 고인의 특징은 이 세상 전체에 대해서 산책로라고 이야기했지요. 왜냐하면 죽어버린 자에겐 뭐가 없어요? 더는 목적의식이나 자기 소원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의 소원이 나에게 일을 할당시키고 주님의 소원이 나에게 지시와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굳이 내 소원을 가질 이유가 없지요.
그런 사람은 이미 어딥니까? 자기 나라에 있는 게 아니고 어느 나라에 있어요? 예수님의 나라에 있는 거예요. 아들의 나라에 있는 거예요. 성도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답변은 주님의 지시에 따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지시가 시편 35편에 보면 바로 어떻게 아느냐? 인간의 주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아요. 나와 다투는 자와 만나게 해줍니다. 이게 바로 나에게 장애물이 돼요.
인간은 자기가 살아가면서 내 앞길을 막는 것을 아주 괴로워하고 혐오는 느낍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소원이 세상 돌아가는 내 계획이 있고 스케줄이 있는데 그걸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나의 적이에요.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영탁이 불렀고, 그 사람 이전에 진성이 먼저 불렀어요.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라. 죽여 버린다 이 말이거든요. 죽여 버린다는 말은 꼭 칼로 죽인다는 뜻이 아니고 미워하겠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제가 저번, 저번 낮 설교에 했지만 이 세상은 내가 죽이지 않더라도 이미 죽어 있고, 내가 미워하지 않더라도 미워하고 이미 죽어 있다는 미움의 대상이에요. 누가 보기에? 예수님 보기에. 왜냐하면 다윗은 선지자기 때문에 다윗 속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의 영이 와 계신 거예요. 베드로전서 1장 11절 말씀처럼. 이미 선지자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들어가 있어서 그리스도 영이 어떤 식으로 선지자의 고난 속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앞당겨서 그 시대에 펼쳤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육신에는 뭔가 쌓여진 게 있어요. 성도라 할지라도 이 쌓여진 것을 자기 힘으로 떼어낼 수 없어요. 쌓여진 게 뭐냐 하면 기억입니다. 그 기억은 어디에 응축되느냐? 나, 나로 응축돼요. 성도라 할지라도 항상 나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건 없어요.
그런데 교회 와서 복음의 말씀을 듣잖아요. 그때는 잠시 나가 느슨해지고 나가 풀어지고 나가 잘 생각나지 않아요. 복음에 빠져 들어간다고. 그런데 교회 문만 열고 나가면 다시 풀어졌던 내가 나로 하나가 돼요. 마치 뭐와 같나 하면 두부 만들 때나 밀가루 풀 할 때 스프처럼 돼 있지만 다시 굳으면 뭐가 됩니까? 액체가 서서히 고체가 되지요. 나 생각 안 하던 것이 세상에 나가자마자 내가 하나로 굳어지지요.
나로 굳어진 순간에 내가 조금 전에 들었던 성경말씀 복음은 전부 다 기억의 창고에 들어가서 그게 버려져서 지식이 되고 살아 있는 건 내가 살아 있어요. 분명히 예배시간에 말씀이 살아 있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거는 어느새 그러니까 15분내지 17분 사이에 벌써 아스라한 옛날 기억이 되고 그다음에 나오는 것은 이 소중한 내가 어떻게 살지? 어떻게 하면 내 소원이 이뤄지나, 나의 행복은? 내 자식은 잘돼야 될 텐데. 갑자기 아들의 나라는 날아가 버리고 나의 나라가 그 현장에 등장하지요. 나만이 잘됐다고 소문난 현장, 소문난 세상.
주께서 만나를 매일 주시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아쉬울 때 뭐가 소중했다? 양식이 소중했는데 만나 먹고 난 뒤에는 뭐가 소중했다? 양식 먹은 내가 소중해버린 거예요. 주기도문에 나오지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 이 말은 날마다 “너는 이 양식보다 소중하지 않아.” 계속 그걸 일깨워주는 거예요.
“너보다 소중한 분은 따로 있어.” 너보다 소중한 분의 존재와 그분의 활동을 드러내는 계기로 삼기 위해서 너에게 사료 주듯이 개 키우듯이 먹을 것을 주는 거예요. 나는 개한테는 내 자식 아니다. 맞습니다. 내가 개입니다. 개도 뭔가 아들한테 주어질 것을 얻어먹으면 그 개가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개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줄 양식이 굴러 떨어졌으니까. 우리는 개보다 더 더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언약의 사람,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아들의 기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소중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작동하는 작용하는 말씀이 더 소중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이고 복음이고 전부 다 기억의 창고에 집어넣고 그다음부터는 나로 굳어져서, 나로 굳어지면 가만있지 않아요. 자기의 목적의식을 향하여 부단히 발발 떨면서.
떠는 이유는 뭐라 했습니까? 현실과 내 목적의식이 일치돼야 될 텐데, 그것 때문에 바들바들 떨면서 이런 자들을 향하여, 지난 복음 들은 것 어디 갔습니까? 나도 안다, 이러거든요. “너만 신자냐? 나도 신자다.” 갑자기 분노가 일어나요. “너 아는 복음, 십자가 피 나도 다 알아.” 이렇게 나온다고요. “나도 교회 오십 년 다녔어.”
이게 뭐예요? 그게 다투는 자의 특징이에요. 내 소원 포기 못하겠다는 뜻이에요. 주님은 구원인데 나는 때려죽여도 내 소원을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잘돼야 되겠다는 거예요. 내가 잘돼야 되는데 방해한다면 누가 방해한다? 바로 예수님이 방해하지요. 예수님이 어떻게 방해하느냐? 너도 죽어라. 그래서 예수님이 죽은 이유가 거기 있기 때문에. 나 혼자는 못 죽는다.
네가 내 앞길 막았으니까 장애가 되니까 내 소원이 혹시나 흠집 날까 싶어서 나는 죽일 수밖에 없다. 방금 들은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어디서 확인할 수 있느냐 하면 티비 예능프로나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대사를 한 번 스캔해보세요. 예능프로에 젊은 아이들 까부는 말 하나 행동 하나 다 스캔해서 방금 이 이야기, 인간의 목적의식과 결부시켜보세요. 그들이 왜 더러운지요. 지옥 가는 것은 기본이고요 일단은 더러워요.
라는 예능프로가 있는데 삼사십 대 혼자된 남녀가 선 봐서 짝 맞춰주는 프로그램에요. 거기에 의사, 변호사,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에 여자도 보통 잘 나가는 사람 아니에요. 처음엔 이름 안 가르쳐주고 영자, 숙자 가상 이름하고, 이쪽은 영철이 영식이 해서 선 보는 프로그램인데 그들 삼사십 대 사회의 중추 아닙니까. 그들이 삼사십 년 동안 가정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뭘 듣고 배웠는지 기억에 누적된 게 그들의 멘트로 말로 나오는 거예요.
말로 나올 때에 이런 구조, 시편 35편의 구조를 보게 되면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어요. 내 자식도 저렇게 잘돼서 선 봤으면 좋겠다. 아직도 시집도 안 가고 있는데, 이런 식이에요. 왜? 그걸 친화성이다. 어제 낮 설교에 친화적이다, 친근하다. 그러니까 복음을 들을 때 지식 하나 얻은 사람은 세상에 나가서 세상 자체와 나와 다툰다는 시편 35편을 못 느껴요. 친화적이라서.
못 느끼는 정도가 아닙니다. 나도 거기에 끼워줘, 이렇게 돼요. 나도 거기 한 자리 달라는 거예요. 왜? 그 이유가 뭐냐? 이겁니다.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성경에는 나를 잊지 않는다. 나를 잊지 않았으니까 예능프로그램에 나와서 짝짓기에 참여하지요. 신청하고. 서장훈 나오는 프로 있거든요. 거기 나오는 멘트 보세요. 오은영 박사가 하는 이야기 들어보세요. 하여튼 티비 모든 프로그램과 드라마 내용 보세요. 그들이 나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나온 거예요.
계시록 20장에 보면 나를 잊지 않는 사람, 이걸 바로 행위 책이라 해요. 행위 책은 어디 들어가기로 돼 있느냐 하면 불 못에 들어가요. 아까 제가 강조한 걸 상기하면 세상에 나가서 하는 이야기가 갑자기 동의가 되고 동조가 되고 친근하다는 말은 뭡니까? 그들의 끝이 지옥 불, 불 못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깜빡 놓친 거예요. 깜빡인지 본래부터 놓친 건지 모르겠지만 이걸 완전히 까먹고 있는 거예요. 이걸 삭제한 채 그 사람을 대하는 거예요.
불 못에 지옥 불에 들어가는 사람의 특징은 나를 잊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의 특징은 뭐겠어요? 주님 때문에 나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자에요. 왜? 지시는 누구한테 오기 때문에? 주님한테 오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시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시하게 되면 소중한 내가 소중한 나 되라고 내가 현재 지시하는 나와 소원을 성취한 내가 일치하기 위해서 평생을 바들바들 떨며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은.
이걸 제가 아까 한 자로 뭐라 했습니까? 덫. 오늘 제목을 덫이라 할까, 덫이에요. 성경 모임에 갈까요? 바빠서. 왜 바쁘지요? 이런 사람은 예외로 합시다. 꼭 가고 싶어서 벌써 두 달 전부터 마음속에 주여 꼭 가게 하옵소서, 이랬는데 어쩔 수 없이 국가가 불러서 못 한다든지 진짜 소원은 세상에 가는 소원이 아니고 말씀에 소원이 있는데 이게 어쩔 수 없이, 그런 사람은 예외로 합시다.
그럼 나머지는 뭐예요? 누가 소중하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싫고 누가 좋다? 나는 좋다. 그 끝은 어디 간다? 이건 이유가 뭐다? 항상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 끝은 뭡니까? 지옥 불이죠. 왜? 그 사람들은 구원은 관심 없고 자기의 소원을 구원이라고 여깁니다. 자기 소원을 구원이라고 오해하고 있어요.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한국교회에 거의 백 퍼센트에 가까운 모습이에요. 교회 교인들도 거의 대부분이라면 세상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 세상이 만든 방송국에서 나오는 프로그램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지옥체험, 지옥 구경하려면 티비 틀면 이준석부터 해서 전부 다 지옥 가는 사람 이야기 뉴스 시간에 다 나오잖아요. 실감나지 않습니까. 지옥을 미리 실감한다는 것, 재미나는 체험 아닙니까, 그게. 그동안 몰랐어요? 그게 지옥인지.
자기가 소중해서 자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 이 말은 현실과 내 소원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그 모습, 그것이 뭐다? 지옥이다. 그게 지옥 가는 사람의 공통점이거든요.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의 공통점이잖아요. 우리는 안 그러고 싶어요. 그런데 우리 힘으로는 안 그러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요. 왜? 나는 내가 다치기 싫으니까. 남으로부터 다치기 싫고 나로부터 다치기 싫고 주님으로부터 내가 다치기 싫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냐? 다투는 자를 만나게 해주시는 겁니다. 우리 가는 길에 장애를 만들어서 이 장애를 통해서 내가 누군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요. 세상이 내가 내 소원대로 이뤄지지 않게 해주시는 그 간섭하심에 그 기적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야아 이게 시편 35편이구나.” 나는 구원, 구원했는데 나중에 소원돼버렸어. 구원으로 시작해서 소원으로 돼버렸다고.
이걸 다시 소원, 소원에서 구원으로 돌리시는 것은 바로 주님이 나와 다툰 분으로 등장할 때 비로소 나의 소원은 잊어버리고 이게 주님의 구원의 과정이고 일환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구원하는 데 이렇게 나를 밟아서 구원하시는구나.” 이게 멀쩡하게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나를 안 잊고 싶으니까. 나뿐만 아니고 내가 살았던 내 가정도 잊기 싫어요. 내 평생 고생고생하면서 일궈낸 가정이기 때문에.
지난 주 인가 나이 육십 이상만 보는 프로그램 있어요. 젊을 때 누가 보나 했거든요. 그건 칠십 이상 보는 거예요. 전라남도 무안에 칠십 넘은 할머니가 있는데 제목이 이에요. 땅에서 일하는 가운데 제일 힘든 일이 소금밭, 염전 일이에요. 그래서 장애자들 납치해서 일시키잖아요. 돈도 안 주고. 제일 힘든 게 염전하고 주물공장 이런 게 가장 힘들거든요. 실내온도 55도 되는.
소금밭에서 네 자식들이 일하고 커서 서울로 갔는데 서울에 직장생활 힘들고 어렵다고 하잖아요. 소금밭에서 일하고 나니까 직장생활은 노는 거예요. 데모는 왜 해, 파업은 왜 합니까. 미친 거예요. 소금밭에서 일해 보면 그건 일도 아니라. 뭐 잔업? 돈 몇 푼? 그건 일도 아니에요. 월급 적다? 그런 것 필요 없어요.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만큼 힘든 게 소금밭이에요. 이 소금밭이 그 할머니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내 인생 내 고생한 기억이 창고에 누적이 돼 있는데요. 창고에 누적이 된 걸 스스로 불태울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그 할머니와 오늘날 우리가 다른 점이 뭐예요? 누가복음 12장인가 그런 말씀 나오지요. 어떤 농부가 농사가 잘됐어요. 농부가 잘되려고 농사지을 것 아닙니까. 망하려고 농사짓지는 않지 않습니까. 해서 창고에 들이는 순간 그다음부터 그 농부에게 자아가 갑자기 소중해져버렸어요. 내 영혼아, 자기가 자기에게 묻는 거예요. “내 영혼아, 이제는 편안히 쉬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그게 생명이 아니라는 거예요. 생명을 추구하다가 막혀버린 거예요. 생명의 라인을 넘지 못하고 유사 생명에 멈춰버린 거예요. 이제부터 어려운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윗에게 왔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35편의 다윗에게. 다윗은 어느 계통이냐 하면 아담 계통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아담을 수축시킵니다. 다윗도 자기 기억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걸 다투는 자를 만나게 해서 수축시켜버립니다. 수축이란 말은 참기름 짠다 이 말이에요. 깨를 위에서 누르면 아파야 기름이 나오지요.
수축을 하는데 어디까지 수축하느냐? 수태장소, 처음에 잉태한 그 자리까지 가버려요. 니고데모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예수님한테 어떻게 내가 이 나이에 모친의 태중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안 된다고 한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자에게는 자기가 처음 태어난 수태장소로 눌러버립니다. 수축이란 압축을 시킨다, 눌러버리는 거예요.
수태장소가 어떤 장소냐 하면 없음과 있음을 가름하는 경계지점이에요. 이게 인간에게 뭐냐 하면 심연. 심연이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깊은 어둠의 세계, 아무 것도 없는 그 세계. 심연의 세계를 다른 말로 하면 창세기 1장 1절, 혼돈 속에 아무 형체도 없고 뭔가 만들어졌다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그 세계로 가지요. 그 세계가 바탕이 돼야 돼요. 이건 뭐냐?
다윗이 수축이 된다면 결국 다윗은 다투는 자와 만나서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그 다투는 자가 나를 어디로 인도하느냐? 나를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게 시편 35편에 나오는데 5절에 보면, 다투는 자를 천사가 와서 그들을 멸망의 길, 그러니까 심연의 길로 가게 하는 거예요. 지금 다윗을 예수님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까 예수님과 다투는 자가 누구라 했습니까? 우리가 우리 힘으로 심판할 수 없는 대상 누구지요? 우리 자신이죠. 아담에 속했으니까. 이런 자를 심연으로 가게 해요. 누가? 천사를 보내서.
그럼 우리는 누구 앞에 오느냐? 주님 앞에 오지요. 그러면 구원 받아야 될 우리가 스스로는 구원 될 수 없어요. 소원의 덫에 빠졌으니까. 이것을 구원하는 자가 구원 받아야 될 우리와 더불어서 함께 데리고 우리의 운명이 가야 될 그 길을 우리를 함께 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원래 시작의 수태의 자리까지 우리를 데려가시는 거예요. 이게 시편 35편 말씀의 완성이 십자가로서 완성되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이치에요.
그럼 있음과 없음의 자리, 이 자리가 뭐냐 하면 죽음의 자리에요. 이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착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일단 물어보고 설명 이어나가겠습니다. 생명나무와, ‘나’는 숫자로 하면 2가 돼요, 1이 돼요? 1이죠(나=1). 1이 수축이 되니까 뭐가 기다리느냐 하면 2가 기다리는 거예요. 있음과 없음의 경계 2가 기다리는 거예요.
생명나무와 선악과 할 때 죽음은 여기서 어디 있습니까? 선악과에 있다고 생각했지요. 사실은 죽음이 여기 있는 게 아니고 생명나무와 선악과 이 사이, 이 차이에 죽음이 있습니다. 이 죽음의 결과가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죽음이에요. 아담의 죽음은 결과고 원래 진짜 죽음은, 인간은 죽어도 죽음을 몰라요. 예수님이 죽어야 진짜 죽음을 아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그 차이, 그 사이에 진짜 죽음의 있는 거예요.
진짜 죽음은 우리의 존재가 수축된 상태를 말합니다.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1은 2에서 새롭게 1이 되는 거예요. 뭘 품고, 뭘 품는가? 예수님의 독생자의 죽음을 품고 새로 등장한 1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에 예수님의 죽음만 있습니까, 자기 백성의 죽음의 함께 들어있습니까? 함께 들어있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이미 나는 고인 되었고 죽은 자가 되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일로서 시편 35편을 이제는 이게 현실화되는 그 장, 그 영역 속에서 성도가 말씀의 세계 안에서 던져지고 그 안에서 생애를 보내는 겁니다. 인생을 보내는 거예요. 어렵다 하지만 들어보니까 논리는 간단하지요. 그렇지요.
자, 여기 1에 이미 우리는 죽었다는 말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은 나의 의지는 죽고 그리스도의 의지가 있고, 나의 힘은 죽고 없고 주님의 힘은 살아 있고 또는 있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보면, 내가 나 된 것은 □다. 내가 나 된 것은 무엇이다. 뭡니까? 주님의 은혜지요, 힘이죠. 주님의 힘보다 주님의 의사 또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주님의 목적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목적이 내 목적을 없애려면 반드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새로 시작이 돼야 돼요. 거기서. 사는 것은 주님의 의지로 살고 우리의 뭐만 자랑하고? 그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에 대해서 아시겠습니까? 알아도 문만 안 열면 돼요. 문 열면 ‘나’가 갑자기 건드려진 내가 생성되니까.
이것을 제가 두 번째 시간에 할 예정인데 미리 이야기하면 그게 뭐냐? 비밀입니다. 이게 바로 에베소서 3장에 나오는 창조전의 비밀이에요. 비밀의 특징은 알려줘도 모른다는 것. 알려줘도 모르는 이유는, 알려고 하는 네가 죽어야 비로소 안다는 거예요. 내 눈을 감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게 비밀이에요. 살아 있으면서 비밀 해버리면 이게 기억이 돼버려요. 지식이 돼버려요. 그 지식은 나를 살릴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윗은 자기 다투는 자가 있지만 신약에 오면 그 반대가 되어 다윗과 다투는 자가 주님이 돼버려요. 그리고 우리와 다투는 자가 주님이고, 주님 입장에서 다투는 자가 우리 자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인이 소중하니까 본인은 멀쩡하니 살아 있고 얼마 전에 십자가에 죽었던 그 양반은 뭡니까? 가짜였다가 유포되기 시작합니다. 신약시대에서. 그리고 제자들은 속았다고 고기 잡으러 가버리고. 그 똑같은 현실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이 사실에 직면해야 돼요.
인간은 아는 비밀을 원해요. 내가 모르는 비밀은 원치 않습니다. 내가 아는 비밀은 사실은 비밀이 아니에요. 비밀이었더라도 내가 아는 비밀로 넘어오기를 바랍니다. 그 목적이 뭐냐? 소원이 있기 때문에. 비밀이라도 알아서 기어이 내가 천국에 가겠다는. 그런데 그 비밀이 오는 과정에서 누가 다툰다? 주님이 나와 다툰다는 사실을 그걸 모르지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걸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수준이 다르다. 수준이 다르다는 것은 층이 다르다는 게 아니고 다른 세계에 속한다. 세상이 말하는 누가누가 잘하나, 그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고 각기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비밀이 주어지는 겁니다.
다시 시편 35편에 돌아와서 4절을 보겠습니다.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생명을 그다음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찾는 자” 그러니까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자, 그런 뜻입니다. 사울도 그렇고 시므이도 그렇고 압살롬도 그렇고. 하여튼 사무엘상과 하에서 블레셋도 마찬가지고. 특히 사울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죠. 사울은 다윗을 대할 때 내 손에 죽어야 될 자로 본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성경 보는 입장에서 사울 원망을 많이 하지요.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썼지요? 예수님은 싫고 뭐는 좋아하고? 천국은 원하고, 할 때 이 ‘싫고’에서 뭐냐 하면 내 손에 걸리면 죽인다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내 소원을 방해하는 자는 비록 그게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죽여 버린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데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 내가 없애버릴 예수는 가짜였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제거하는 것은 이건 하나님이 아니었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왜? 내 지식 안에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사랑해야 구원 받는다는 지식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실제로 그 지식은 누구에게 봉사하고 누구를 받드는 지식입니까? 주님의 나라가 아니에요. 누구? 나를 받들기 위한 지식이기 때문에 주님께선 그걸 지적하는 방법은 나와 다투는 자로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어요.
나의 큰 존재를 압축시켜서 점으로 만들어버려요. 아주 면적이 하나도 없게 만들어요.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게. 이 말은 뭐냐? 너는 잊어버리고 잃어버려도 생명 되신 말씀이 있고 주님이 계시면 너한텐 그다지 손해 아니잖아,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우리는 하도 이익을 찾기 때문에 이익 쪽으로 계산하자 이 말이죠.
그러면 내가 잃어버려도 나를 새롭게 만들 분이 계시다면 괜찮잖아. 이게 어디 나오느냐? 요한복음 11장에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를 죽여 버렸어요. 나사로는 손해 본 거예요. 자기 귀한 목숨이 손해 본 거죠. 그런데 나흘 만에 다시 등장했습니다.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등장하면서 뭐냐? 내가 곧 생명이고 내가 곧 부활이라 했어요.
주님이 우리를 부활시킨 분이 아니고 주님 자신이 부활이기 때문에 부활되기를 소원하면서 예수 믿으면 안 되고 예수님 자신만 계시면 됩니다, 이게 믿음이라 이 말입니다. 믿음으로 뭘 획득하려고 하지 마시고. 믿음을 만약에 갖고 있으면 우리는 못 잊어요. 나는 잃어버려도 예수님만 생각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이미 아들의 나라, 천국에 온 사람의 특징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