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402강, 403강) 자연과 인간, 빛과 어두움 220906
402강-YouTube강의( 자연과 인간 )20220906-이 근호 목사
제 402강 제목은 자연과 인간,
사람들은 자연을 상대합니다. 자연에서 정형화된 또는 질서 있는 원칙과 진리를 찾아내려고 그렇게 해요. 찾아내서 그 자연의 변화를 알아내서 뭐 할 건데... 그 이유는 인간들에게는 자신이 자연 안에 살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부터 잘못된 거예요.
성경에는 우리가 주님 안에 살고 있는데 인간들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자연 안에 살고 있다. 태풍 불어도 난리고, 코로나 번져도 난리고 그렇죠. 그만큼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게 아니고 자연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대자연아, 제발 좀 요동치지 마라.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지 말고 북극에 있는 빙하, 에베레스트 빙하 좀 녹지 말고 바닷물 넘치지 말고 해안가에 있는 항구 사람들 이사 가게 하지 말고 제발 좀 지금껏 하던 대로 그냥 계속 그대로 있어 달라. 우리도 그대로 있을 테니까 자연도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원칙 지키고 질서 지키고 그렇게 하기를 마음속으로 자연한테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의 왕이라고 하잖아요. 거짓말입니다. 자연이 왕이에요. 자연이 조금만 비틀어버리면 인간은 못살겠다고 난리입니다. 사람이 음주운전해서 교통사고 내게 되면 그 사람한테 화를 내지만, 산사태 일어나서 부모님 돌아가시면 산보고 화 안 내죠. 이미 인간은 대 자연에 그냥 굴복 당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대자연을 어른으로 섬겼어요. 어른, 그걸 어려운 말로 하게 되면 큰(great) 타인 큰 타자 그걸 한 자로 줄이면 신, 자연이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지켜보고 있는 큰 타자, 나의 운명을 쥐고 있는 나 바깥의 어떤 분, 그렇게 생각했어요. 언제 그랬느냐 하면 기원전 시대 모든 나라가 다 그랬습니다. 우리나라 단군도 마찬가지고 전 세계가 자연자체를 신으로 신격화시켜서 섬겼던 겁니다. 지금도 남아있죠. 우리가 어디 가도 느티나무 오래 된 것에 빌고 해보고 빌고 달보고 빌고 하잖아요. 그게 그대로 아직도 남아있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진리를 어떻게 했느냐, 대 자연의 움직임을 그대로 모방해서 진리를 뽑아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게 서양에서는 15세기까지 그걸 르네상스시대라 하는데 15세기까지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그때 뉴턴부터 시작해서 수학이 발달되고 화학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인간의 언어로서 자연을 분류하기 시작한 거예요. 이 수학이 뭐냐, 수학은 자연의 질서를 잡는 그런 잣대 같은 거거든요. 기준이거든요. 기준이 인간 쪽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기준을 잡아놓으니까 대자연의 움직임을 분류를 해서 배정을 해요. 이거는 화학, 이거는 물리, 이거는 수학, 이거는 의학, 이거는 생물, 분류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인간이 질서를 이렇게 수학적으로 규정을 하니까 인간이 자신감이 생긴 거예요. 자신감이 생겨서 마트에서 물건 뽑아내듯이 오늘은 물을 이용해서 수력발전을 해볼까 뽑아내는 거예요. 오늘은 저 개미한테 뭘 배울까, 개미라는 생물을 관찰의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세상이 수학과 과학이 발달되면서 인간이 어느 정도 똑똑하냐를 증명하기 위해서 자연이라는 것이 그냥 대기된 상태, 인간이 주인노릇 했다 이 말이거든요. 분류를 한 그 시대가 16~18세기까지 됩니다. 서양에서.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오면 비로소 처음으로 인간이란 말이 등장해요. 놀랍게도 오늘날도 그 표현은 다 인간인데 실제로 인간이란 말은 19세기 들어와서 1800년 들어와서 인간이란 말을 썼는데 그게 어떤 계기냐 하면 이제는 자연이라 하는 것, 수학이라 하는 것은 고정됐잖아요. 고정된 그 진리에다 모든 걸 꿰맞추다가 이제는 인간이 이 대자연을 변형을 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나와서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역사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뭐냐 역사를 이끌기 위해서 대자연을 변형시키는 주체, 그걸 인간이라 하는 겁니다.
인간이 시간들 속에서 모든 걸 변화시킬 수 있는 자신감으로 인간만을 위한 새로운 역사를 시작 하겠다 그 역사시대가 시작된 겁니다. 19세기부터. 그래서 벌어진 게 뭐냐 하면 1차 대전, 2차 대전이 된 거예요.
그럼 그전까지는 누가 있었느냐, 왕이 있었잖아요. 그렇죠. 우리나라도 왕이 있었잖아요. 왕의 자리는 신이 주신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18세기 19세기 되고 나온 나폴레옹 나오고 난 뒤에 프랑스혁명 있고 난 뒤에 역사의 주체는 신이 내려준 왕이라는 작자가 하는 게 아니고 우리 시민들의 의식에 의해서 얼마든지 편리한대로 개조가 가능하다하는 시민정신이 생긴 겁니다.
그러면 그게 끝이냐, 끝이 아닙니다. 자연과 인간의 만남에서 인간이 20세기 처음 등장했다 했죠? 인간에서 더 나아가면 뭐하냐 하면 이제는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 속의 ’나‘가 그 유니크(unique)화 된다. ’나‘가 특별존재로 자기를 간주해요. 그러니까 21세기 들어와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다 그것은 다 헛말이고요. 인간을 위해서란 게 없어요. 뭐로 바뀌느냐 나를 위해서입니다. 인간이라는 군중 속의 나, 나를 특별한 존재, 유니크한 존재, 특별한 존재로 보는 거예요. 그냥 이제는 막가는 거죠.
옛날에는 뭐냐 자연과 융화하면서 살았어요. 호두가 뭘 닮았는가, 인간의 두뇌를 닮았다. 그러니까 호두를 무시하지 마라. 우리 인간의 두뇌를 무시하지 않듯이 호두를 무시하지 마라. 호두 안에 생기가 들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자연과 어떻게 하나가 돼서 자연의 심기를 안 건드리려고 애썼던 시절이 수천 년의 인간 역사였다면 수학이 발달하고 만유인력이 발달하고 난 뒤에 인간이 갑자기 수학적 이성적 합리 안에 자연도 이렇게 거기서 자리배정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던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19세기,20세기 들어오게 되면 이제는 인간이 자연을 개혁, 변혁시킬 수 있다는 거예요. ’너는 이 안에 있어.‘ 가 아니라 이제는 우리 원하는 대로 자연을 한번 바꿔봐, 하는 시대라면 21세기 들어와서는 뭐냐 하면 더불어가 아니고 나 자신을 인간 속에서 특화시킨다. 특별한 존재로 간주합니다. 방금 이야기한 이것이 왜 중요한 이야기냐 하면 시편 74편 13절에 보면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시며 14절에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 15절에 바위를 쪼개사 큰 물을 내시며 길이 흐르는 강물을 말리우셨나이다 16절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이렇게 돼 있죠?
성경에서 말하는 이 자연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라는 특화된 오직 홀로 계신 주님의 자기 활동 영역이고 그분께서 친히 만드신 거예요. 자연이. 자연을 이렇게 제켜보면 거기 만드신 분이 나온다 이 말이죠.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이 자연에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함부로 죽이시기도 하고 부수실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이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이성적인 발달, 과학의 발달, 아까 이야기한 걸 하게 되면 결국은 주님은 한 분이죠.
그러니 오늘날 우리 인간은 인간 뭐 우리 대중들, 하지만 다 핑계고 결국은 뭡니까? 나를 위한 대중이고 나를 위한 민주주의고 나를 위한 국가 이어야한다. 결국은 남는 게 나만 남는다 이 말이죠. 결국 1대 1이예요. 1대 1인데 결국 성경에서 예언하는 것은 뭐냐 하면 네가 주님이라는 한 분이 하는 일을 모독하는 식으로 최후의 날에 네가 등장할 것이다. 그게 바로 용입니다. 그게 바로 숨겨진 악마의 인간화입니다. 1대 1이예요. 최후는 1대 1로 나와요. 주님이야. 나야. 1대 1로 나와요. 주님께서 다 예상했죠.
모든 것은 주님 한 분이 했는데 인간이 연구하고 탐구하고 인간의 지혜가 발달하니까 인간이 본인이 신처럼 되리라 하는 그 자기 본색을 더는 감출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자연이냐, 아니면 나냐, 어느 것이 더 우선적이냐, 오늘날 인간의 마음은 자연보다 내가 우선적이죠.
이한례gblayer('gblayer4', 'grapebranch0110', '이한례', 'hy_anes@hanmail.net', '', '1', './program');(IP:221.♡.138.184)
22-09-07 14:49
403강-YouTube강의(빛과 어두움 )20220906-이 근호 목사
제 403강 제목은 빛과 어두움입니다.
빛과 어두움에 대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빛과 어두움은
인간들이 아는 물리적인 빛과 어두움하고 다릅니다. 자연에서 우리가 관찰해서 아는 빛과 어두움하고 달라요. 성경에서 빛과 어두움은 어떤 점에서 다르냐, 그 점은 요한복음 3장 19절부터 21절까지 나옵니다. 제가 한번 후딱 읽어볼게요.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후딱 읽어서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게 돼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빛과 어두움은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인간의 개입 없이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있으면 그건 빛이고, 그 발광체가 없는 장소는 그냥 어두움이라고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요한복음 3장에서는 빛과 어두움이 빛이 빛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인물과 연관성이 있어야 빛이 되고 어두움은 그냥 어두운 게 아니고 어떤 인물들과 연관성을 가질 때 어두움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 인간들이 아는 일상생활에서는 이게 굉장히 이해하기가 힘들죠. 보통 한결같이 검은 옷을 입었을 때 ‘아, 너무 색깔이 어둡다.’ 이러잖아요. 어둡다. 옷 색깔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마음속을 결부해서 ‘역시 마음속이나 옷이나 색깔이 똑같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성경에서 말하는 이 빛과 어두움은 빛과 어두움 자체 둘 다를 결과로 보는 겁니다. 이 말은 빛이 뭔지를 인간은 처음부터 모르고 있고 뿐만 아니고 어두움이 뭔지를 인간들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둡다.’ 에 인간은 동의 못하고 있고 ‘하나님이 빛이다.’ 라는 것에 어느 인간도 거기에 동의할 인간들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너 죄 졌으니까 똑바로 해’ 이러면 될 텐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떻게 좋게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드러내는데 인간을 내가 사용하겠다는 뜻이 주의 뜻 이예요. 어두움은 어두움답게 드러나도록 인간을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우리가 주님한테 물어보면 빛을 빛답게 드러나는데 있어서 어떤 인간도 거기에 기초가 될 수 없고 바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강조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빛이, 빛이 되는 것은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도 거들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가 뭐냐 모든 인간은 어두움에 속하기 때문에. 또 달리하면 어두움을 생산해내기 때문에. 인간에게 나타난 게 어두움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아까 우리가 인간이 주님 앞에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똑같이 해보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에게 ‘어두움을 나타내지 말고 똑바로 하고 똑바로 살아. 말씀대로 살아. 그러면 네가 빛이 되는 거야.’ 이렇게 좀 잔소리하고 나무라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우리가 주님 앞에 되물을 수 있거든요. 주님의 관심사가 우리가 훌륭하게 되고 빛이 되는 게 관심사가 아니라 빛이 되신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피조물을 활용하고 있고 이용하고 있고 사용하고 있다는데 우리가 그런 관점을 갖고 성경을 봐야 돼요.
어두움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빛이 돼서 기분 좋다. 이게 성경의 목적이 아니에요. 왜 예수님만이 빛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훌륭하다 하면 되지, 예수님을 빛이라 하느냐, 그것은 빛의 특징이 자체적으로 빛을 알아 볼 수 있는 자질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어두움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두움. 어두움 자체는 지독한 어두움이라서 그 어두움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빛으로 올 수 없는 그런 요소로 굳어져야 그게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어두움 자체에요.
아까 말 잘못한 거 아닌 가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튼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죠. 어두움은 절대로 빛이 되면 안 돼요. 어두움이 어두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 어느 하나도 예수님을 알아볼 자가 하나도 없게 만드시는 겁니다. 왜 세상을 하나님은 어둡게 만드는 것을 그렇게 원하느냐,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빛이라는 것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 주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의 목적은 예수님에 대한 편애입니다. 예수님만 사랑해요. 그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용도는 뭐냐 빛과 어두움이라는 대치되는 이 상황을 주께서 미리 계획을 했다면 인간의 용도는 뭐냐, 인간의 행위와 모든 용도는 빛은 빛의 능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어떤 몸부림을 어떤 시도 열심히 인생을 바르게 살아도 어두움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라는 사실을 그런 시료적으로 또는 재료로서 소재로서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진 겁니다. 빛이 뭐냐, 어두움이냐를 둘이 대치되는 그 상황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든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의 특징은 뭐냐,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그 어두움에 속한 자가 빛으로 오지 못합니다. 이렇게 돼 있죠. 어두움에 속한 자는 19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이유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어느 누구도! 왜냐 하면 예수님만 빛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악해야만 마땅합니다. 악해야 되고 어두워야만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절대로 예수님이어서는 안 돼요. 예수님 빼놓고 다 사랑해요. 어두움에 속한 자들은.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는 되게 사랑이 많아요. 예수님 빼놓고 다 사랑해요. 자식도 사랑하고 남편 사랑하고 아내도 사랑하고 목사님도 사랑하고 교회도 사랑하고 심지어 주님도 사랑하고요. 하나님도 사랑하고 다 해요. 그러나 그 모든 사랑이 뭐로 드러난다? 악한 짓으로, 어두움 자체로만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걸 분명히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예수님 오실 때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의 믿는 빛의 자녀로 우뚝 서기 위해서 그들은 얼마나 거룩하고 성스러운 많은 것을 고안해 냈고 제도와 그런 율례들을 제정했잖아요. 왜 그걸 제정합니까? 율법을 더 정확하게 지키기 위해서 하잖아요. 왜 율법을 지키려고 했죠? 자기가 빛의 자녀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한 거예요. 구제하고 십일조하고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이 악한 일 하지 않고 바르게살기운동 벌이고, 왜 그렇게 합니까? 빛의 자녀기 되기 위해서 한 거예요.
그런데 막상 빛이 되신 예수님이 오니까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을 아무도 안 믿으니까 20절에 보면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예수님만이 빛인데 왜 예수님께 오지 않는가, 그거는 자기가 빛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데 그 빛이라고 여기는 그 자체가 비로소 끝장까지 본 그게 악의 결정체였다 이 말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3장20절에.
성경은 일방 적이에요. 예수님을 표준으로 끝이에요.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면 끝이에요. 인간을 두둔하고 인간 편에 서는 거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은 예수님만 편애해요. 편애. 모든 해석이 그래요. ‘거봐, 예수님 모르잖아.’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조장합니까? 그들이 하는 거룩하게 하고 빛의 자녀가 되려 하는 모든 시도가 그게 바로 악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왜 빛 된 생활한다고 빛으로 오질 안 해요.
그런데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모르는 게 당연한데 예수님을 빛으로 알아먹고 그분 앞에 오는 자들이 있어요. 아, 그 사람은 착한이구나. 아니요. 요한복음 3장 21절 그게 아니라 그게 착한 게 아니라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는 이유가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히 예수님하고 만나게 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나와요.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그 뒤에 말, everybody 다 같이 해보세요. 내게 올 수 없다.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예수님께로 올 수 없다. 예수님께서 오지 않고 하나님께 가는 사람은 다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쓰임 막대가 와야, 이게 내가 착해서 예수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내 의도와 관계없이 주님의 의도로 예수 믿으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아주 개 무시 하는 여기에서 성도는 최고의 희열과 기쁨과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