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1-14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
Re..마 22: 1-14 (혼인잔치 비유)
이름 : 이근호(IP:)
혼인잔치 비유
2005년 2월 6일설교 본문: 마태복음 22:1-14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기독교의 핵심을 축약하면 이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만 구원"입니다. 뻔한 이야기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는 제법 길고 복잡합니다. 과연 이 본문에서 어떻게 "오직 은혜로만"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진멸을 부르는 혼인잔치'를 통해서 설명해 나가십니다. 즉 하늘 나라의 혼인 잔치는 하나님의 노하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진노하심을 바탕으로해야 비로소 '은혜'가 은혜답게 비쳐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노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세계입니다. 상호 맞을 리가 없지요. 여기에서 하나님의 노가 폭발하는 겁니다.
인간은 노동은 인간의 주체성을 외부로 발산하므로서 펼쳐집니다. 노동의 생산물과 그 주인은 따로 분리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생산물에는 생산자의 지혜와 계획과 노력이 담겨서 무에서 유로 창조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산물을 제거한다는 것은 마치 그 사람 본인의 신체를 베어 버린 것과 같은 겁니다.
부모 앞에서 자식을 고생시키고 구박하고 빼앗는 것은 부모 자신에 대한 학대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을 될 수 있는 한 자기 자식을 군에 보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힘들어 키워놓은 자식 대신 차라리 자기가 대신 군대 복무하고 싶어할 지경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관심을 갖고 평생을 채웁니다. 높은 산에 등산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산 정상을 정복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점검하고 싶어 그 산에 도전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 일을 하면서,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지 않습니다.
'나중에 나의 육체를 누가 거두어 가지'를 생각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기를 누구로부터 요청받는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해내는 놀라운 인간이다'라는 점에 사는 재미를 거는 자들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모든 행위 결정과 판단은 자기 몸과 자기 세계의 확대와 관련 있습니다. 자기 세계를 확신시키는 동기를 가지고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러한 작업을 방해하는 자가 등장한다면 인간들은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참으로 단호하게 대처합니다. 신이 되었던 구세주가 되었든 일단 자기 것을 훼손하고 파괴하고 손을 타면 주저 없이 결별해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임금님의 혼인잔치 통보는 여지없이 인간들이 개별적으로 벌리는 일이 충돌을 일으킵니다.
임금님이 의도적으로 그것을 유도합니다. 과연 '너가 지금 벌리는 일과 내가 주최한 내 아들 혼인 잔치 중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가'라는 늘 묻는 식으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매우 소중히 여기는 인간의 소유물을 건드려 시비 거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4:16-20에 보면, 더 많은 핑계가 나옵니다.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임금하고의 갈등이 더 크게 번져서 종들을 사람들이 죽이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혼인잔치에 오지 않겠다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천국의 종들을 대단히 핍박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은 인간들이 자기 노동으로 해내는 모든 가치보다 더 우월한 가치로 그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소식을 들은 인간들은 대단히 기분 나빠하지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소유물 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는 소리인데 이는 인간의 자아절대성을 모독하는 발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신이라면 인간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인간을 기분 좋게 해줄 때 비로소 그 신과 거래할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슬람 종교의 특색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슬람의 알라신은 인간들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신입니다. 알라신을 변호하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쳐야 하면 그렇지 않는 신자는 신자라고 취급을 하지 않겠다고 나옵니다.
자 그렇다면 인간은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 안에서 자신이 신처럼 합류될 수 있는 멋진 기회를 맞이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복종'이라는 규칙과 방법론에 따르기만 하면 이 세상의 '신의 사람'이 될 수 있기에 이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 경지에 도달한 상황이 되는 겁니다.
즉 '복종'이라는 가능성이 곧 인간은 자신의 영원한 본존을 위한 가치 있는 노동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천국을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식으로 초청하는 겁니다. 초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게끔 하는 그런 초청으로서 인간에게 꽂아넣습니다.
즉 인간을 죄인으로 몰아갑니다. 회복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도저히 초청에 응할 수 없는 상황을 포착해놓고서 거기에다 초청을 해버리고서는 하시는 말씀이 "거 봐 내 초청에 불응했잖아"하고 나옵니다. 세상에 자기 결혼식을 앞두고 남의 결혼식에 축하하려 법이 어디있습니까? 참으로 터무니없는 억지 초청이지요. 아무리 무서운 임금이래도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임금이 궁극적으로 두 가지 면으로서 인간 세계를 다루고 계심을 알리고 싶은 겁니다. 그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임금님에 대해서 자기보다 더 중요시 여기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들추어내겠다는 겁니다. 즉 어떤 인간도 직업의 다양함이나 노동의 종류와 상관없이 인간이 어느 분야에 종사하든지 간에 그 인간은 하나님은 우섭게 여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징벌을 하기 전에 그 구실을 만드는 기능이 바로 천국이 활동하는 기능 중의 하나입니다. "천국보다 너희 이 세상을 더 좋아하다니 나쁜 자들!"라는 평가를 내리면서 진멸하시겠다는 겁니다.
이 기능은 아무런 노동도 없이 강제로 붙잡혀 온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왜 건방지게 지정된 예복을 입지 않아서. 임금의 말이 말 같이 않아?'하면서 그들도 진멸해버립니다.
이러한 기능을 배경으로 깔려야, 비로소 혼인 잔치에 정상적으로 참석하여 하나님의 천국을 축하는 자들에게는 이 모든 혜택이 그저 임금님의 은혜에서 나옴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혼인 잔치 비유는, 천국에 들어갈 자들로 하여금 모든 것이 그저 은혜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리고자 하는 비유입니다.
이것이 선택해 주신 은혜입니다. 갈라디아서 3:27-28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만들어진 옷 앞에서는 '인생 성공', '인생 실패'도 무의미합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태초부터 선택받은 자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비록 우리가 부족하여도 받아주시는 그 예수님의 옷을 평생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