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20722b 열왕기상19장 12절(감사와 변명)-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20722b 열왕기상19장 12절(감사와 변명)-이 근호 목사
자, 이제부터 책 내용이 좀 어렵습니다. 이것부터 먼저 전제로 하고요. 성도는 사실상 안 죽는다. 성도는 사실상 안 죽어요. 왜 안 죽느냐 하면 영생이 영생 값을 하기 때문에. 불신자들이 안 죽는 그것하고는 차원이 다르죠. 영생이 스스로 영생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도에게 찾아왔기 때문에 성도의 자아를 무너뜨립니다.
흐릿하죠.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감사가 나옵니다. 감사가 나온다는 것은, 그동안 내가 주의 일을 막았었는데 주께서 나를 흐릿하게 해서 나를 철거하니까 영생을 주시는 주의 일이 나와버린 거예요. 나오니까 그걸 알게 된 성도가 자기의 죄인 된 것을 도리어 감사하죠. 변명하거나 변호하는 게 아니고 내가 이 땅에서 애 넷 키우는 그것조차도 죄였습니다. 반듯하게 산 것도 사실은 이게 나의 위선이었습니다, 라고 자기 죄를 까발리는 즐거움으로 살죠. 감사가 되면서 사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불신자들은 극진한 자기 위로에 갈수록 거기에 목을 맵니다. 극진하게 자기를 대우해요. 연세 많은 독거노인들이나 이런 사람들, 극진하게 자기를 위로해요. 입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다 극진한 자기 섬김입니다. 자기 방어. 맞죠? 자기 사수하는 거예요. 아주 지독해요, 지독해. 감사라는 게 나올 수가 없어요. 자식보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너희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해줘서 고맙다.”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고 “이놈의 자식, 내가 키워줬더니...... 이런 서러움 받으려고 내가 키워줬냐?” 막 자식들에게 호통치고 그러죠. 그럴수록 용돈이 더 깎인다는 생각을 못하고...... 끝까지 자아를 지키려고 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p.225에 보면 “과거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와 미래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 사이의 균열이” 균열이라는 말이 나왔어요. 이걸 지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 설명은 여러분 딱 들으면 알아요. 마태복음 12장 31절, 32절에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성령에 대해서 이 세대+오는 세대, 성령은 미래에서 온 영이에요. 인자는 현재의 메시아입니다. 미래에서 온 영과 현재 메시아의 활동 사이에 단절이 주어져요. 이 세대와 오는 세대에 단절이 있다 이 말입니다. 인간들은 아무리 살아봤자 이 세대, 내일되면 이 세대, 모레 되면 이 세대, 이 세대 안에서 바깥으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오는 세대라는 것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오는 세대는 예수님이 홀로 이룰 세대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오는 세대는 없어요.
주님께서는 뭘 거론했느냐 하면 오는 세대를 거론했다고요, 오는 세대. 무슨 말이냐 하면 오늘이 현재잖아요. 내일 되면 내일이 현재일까요, 내일일까요? 내일되면 내일이 현재가 돼요. 모레 되면? 지금은 모레지만 실제로 이틀 후는 현재가 된다고요. 현세대, 이 세대를 못 벗어나요, 아무리 살아도. 오는 세대라 하는 것은 뭔가 낯선 세대가 덮쳐야 되고 마중을 나와야 돼요. 그게 성령의 세대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게 하시는 거예요.
성령이 인간에게 오려면,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씻어주려면,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죄인의 몸을 삼키려면, 단절이 있어줘야 돼요. 인간이 왜 오는 세대, 천국에는 왜 들어가지 못하나, 넘어설 수 없는가를 확실하게 증거로서 보여줄 필요가 있는 거예요. 입 다물라는 그 증거가 필요한 거예요. 네가 백날 설친다고 네가 스스로 오는 세대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는 세대는 예수님의 세계에요. 아들의 나라에요. 우리는 넘볼 수 없어요. 인간으로서는 인간 세계로 국한되지, 그걸로 단절된, 그걸 뛰어넘을 수 없는 다른 세계가 예수님 세계거든요. 예수님만 훌쩍 뛰어넘었단 말이죠. 아버지에 의해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그건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사건이에요. 다른 사람에겐 없어요.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나도 그 세계 아니에요. 예수님만 들어갈 수 있는, 또 시작할 수 있는 그 세계가 오는 세대란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들과 함께 있는 이 세대에서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으라 하면 안 믿고 욕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내가 너희에게 이의를 걸지 않겠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하루하루 살면서 내 생각하며 살잖아요. 내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나름대로 착하게 살아야지, 바르게 살아야지, 아무리 내가 바르게 살려고 해도 그 환경 자체가 이 세계 안에 있기 때문에 오는 세계와 무관한 거다 이 말이죠. 바르게 산 게 아니에요. 그냥 죄짓는 거죠. 이 땅에서 아무리 옳게 살아도 이 세대 자체가 안에서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폐쇄적으로 가두어졌기 때문에 바르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산 게 아닙니다.
바르게 살면 효과가 나야죠. 죽어도 부활해야 바르게 살죠. 무슨 인간이 어떤 일을 해서 죽어도 부활됩니까? 우리 인간에게 그런 일을 허락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십일조 한다고, 구제한다고, 선교한다고? 고넬료가 구제를 얼마나 했어요. 고넬료가 그걸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죠. 왜 구원 못 받았습니까? 고넬료가 아무리 구제하고 아무리 기도해도 그것은 자기 세계, 이 세대, 인간들의 공통된 세대 그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오는 세대의 혜택은 입지 못하는 거예요. 오는 세대로 홀로 빠져나가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열두 제자도 못 따라 나갔어요.
그래서 인자에 대해서 거스르는 자는 죄사함을 받되 오는 세대에서 오는 성령을 거스르는 자, 거부하는 자, 성령을 받지 아니한 자는 영원히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 그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사함 받고 사함 안 받고는 네가 너한테 얼마나 했느냐, 얼마나 믿었느냐, 얼마나 회개했느냐 그걸로 결정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성령을 주시느냐 안 주시느냐 하는 예수님 소관이다 이 말이죠. 예수님 소관이에요.
그런데 인간이 생각하는 미래는, “과거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와 미래를 다듬는 현재의 주체 사이의 균열이 내부적으로 따로 시간층을 성사시켰고 수시로 변하는 외부적 동질성을 모색하려고 시도한 것뿐이다.” 수시로 변하는 외부적 동질성, 외부적 동질성을 모색한다, 시도한다.
이런 이야기에요. 어제 내가 나이어야 하는 것에는, 나다운 요소를 하려면 내 속에 나의 믿음, 소망, 사랑, 내가 성경을 몇 독했고 뭘 어떻게 했고 내가 착한 일을 얼마나 했고 이런 요소들을 종합하고 규합해야 그게 나가 돼요. 나라는 게. 육체는 고정된 육체로 세월따라 삭아져가는 육체가 있지만 자아라는 것은 속에 기억이라는 게 있어가지고요. 내가 하는 기억이 있어줘야 현재의 나가 됩니다.
만약에 잘못해서 비누 밟아가지고 두 바퀴 돌아서 킬러가 갑자기 거지되는 꼴, 그런 영화 있잖아요, 라는 영화. 그처럼 기억을 상실해버리면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면 아무거나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은 영화에 보면 자기 이름도 새로 써야 돼요. 자기 수입이 얼만지 새로 적어야 돼요. 내가 나 되기 위해서는 집나간 요소들을 자꾸 끌어 모으는 것을 모색해야 돼요, 그걸 해야 돼요.
모을 때 이것도 내 거고 이것도 내 거고 이것도 내가 한 걸로 끌어 모을 때 그걸 동질성이라 하는 거예요. 동질성에서 나를 빼면 안돼요. 그러면 내가 나 아닌 게 되어버린다고요. 만약에 댄스클럽 나가서 댄스를 잘 췄다. 차차차, 지루박을 잘 췄다. 그런데 비누 밟아서 목욕탕에서 넘어져가지고 기억이 안 난다 할 때 어떤 아는 사람이 ‘아이고, 아저씨. 차차차 잘 추는 분이잖아요.’ 하면 다시 적는 거예요. 나는 차차차를 잘 췄다, 그렇게 하나 둘씩 집나간 나의 정보를 끌어 모아야 그게 얼추 자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연세가 많아져서 끌어 모은 것보다 빠져나간 게 더 많을 때는 그걸 치매라고 이야기해요. 두뇌세포 시냅스 작용에 의해서 두뇌세포가 자꾸 죽어버리니까 그 죽어버린 시냅스가 갖고 있던 기억들이 있잖아요. 그 기억이라는 것, 기억이라는 건 시냅스와 시냅스의 연결망의 활성화를 기억이라 해요. 그런데 이쪽 짝이 되는 시냅스가 죽어버리니까 이거 떨어져나가니까 관계망도 우르르 같이 없어지니까 아들보고 ‘아저씨, 누구세요?’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인간의 육신이 허물어지니까. 그런데 이게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생생할 때도 끊임없이 인간은 모색해요. 시도를 한다고요. 어디까지 왔나, 해서 자꾸 내가 어디까지인가 시도하는 거예요.
제가 지난 강남강의하면서 강의에 몰두하다 보니까, 이게 또 구차한 변호와 변명이 되는데 그건 아니고, 진짜 까마득하게 휴대폰 충전해놓은 걸 잊어버렸어요. 전에도 몇 번 그랬어요. 그런데 전에는 오다가 기억이 나서 되돌아가 찾아온 적이 있거든요. 그때 뭐라고 생각했느냐 하면, 오늘 이렇게 했지만 다음에도 충전하다 잊어버리면 되돌아가면 되지. 그런데 지난 화요일 강남강의 때는 되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렸어요. 그래가지고 수서역에 갔는데 진짜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아는 사람한테 500원 줄 테니까 전화 좀 쓰자고 했더니 그 사람이 500원 안 받았어요. 요새 전화는 다 무료로 되잖아요. 전화해서 잊어버렸다고 박 집사님한테 연락해서 찾았는데. 찾을 때 제 아내가 집사님한테 이런 이야기한 게 굉장히 기억에 남아요. ‘휴대폰을 택배로 보내실 때 전원을 다 끄고 보내세요.’
아, 이건 생각도 못했어요. 휴대폰이 사망의 기간에 들어간 거예요. 사망한 거예요. 완전히 꺼야 돼요. 그래서 휴대폰을 왜 다 꺼야 되지? 얼른 그 이유를 몰랐는데 아내가 설명하기를, 휴대폰을 안 끄면 택배 도중에 전화 올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일단은 완전히 죽여버리는 거예요, 휴대폰을. 완전히 죽여버리면서 죽는 순간에 택배는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게 되어있어요. 죽여서 돌아가는 거예요, 죽여서.
내 주인이 뭔지는 난 몰라요. 그냥 자아만 구성할 뿐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잃어버린 자기 동전을 찾듯이, 목자가 잃어버린 자기 양을 찾듯이,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듯이, 자기 것이니까 자기 백성을 찾는 것, 이게 우리의 일입니까, 주님의 일입니까? 주님 본인의 일이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되었으면 구원이 내 일이 아니었음을 이걸 계속 느껴야 성도에요. 구원이, 천국 가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걸 계속 느껴야 돼요. 그러면 내 구원이 내 일이 아니면 나는 전원이 완전히 꺼져버리는 순간일 경우에만 가장 주의 일이 주의 일답게 등장하죠, 가장.
그럼 죽었다는 말은 나와 시간은 상관없죠. 오는 세대의 모든 권한은 주님께 모두 넘어갔죠. 아니, 휴대폰이 자기가 알아서 아이고, 힘들다, 하면서 서울서 대구까지 자기가 기어오는 게 아니고, 헥헥거리면서 천안까지 와서 좀 쉬었다가 30분 쉬고 대전까지 오고 이러지 않고 그냥 본인은 마치 수면 내시경하는 것처럼 그냥 죽은 상태에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죽었다는 말은 시간 흐름은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나를 위한 일생이 아니었다. 운송기간이에요. 여러분의 시간들이 주님이 악마에 속한 인간을 주님 품으로 되돌려 보내는 그런 주님의 시간의 흐름에 우리들이 놓여있는 겁니다.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로 이동하는데 그 택배기사가 성령이죠, 성령.
어느 쪽으로 가야될지 유일하게 아시는 분이 성령이거든요. 왜냐하면 성령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오직 주님에게만 자기 백성을 택배로 보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예수님으로부터 와야 돼요. 예수님의 영이어야 돼요. 출처가 예수님이어야 예수님에게 무사히 자기 백성을 성령께서 예수님께 갖다 바칠 수가 있습니다. 내 것을 도로 찾는 그 작업,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도로 찾는 작업, 주님의 휴대폰을 자기 걸로 되돌려 받는 그 작업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에 속하지 아니했다 하죠. 너희는 이 세대에 속하지 아니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반면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하는 하나님께 속한 이야기를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은 알아먹지를 못하는 거예요, 알아먹지를.
제가 고등학교 때 영어선생님께서 교과서 책을 보면서 발음을 하는데 발음을 못 알아듣겠어요. 쎄미얼, 쎄미얼, 이게 무슨 말이지? 보니까 사무엘이에요. 사무엘을 영어발음하면 쎄미얼 이렇게 돼요. 아직도 잊지 않고 있어요. 사무엘이나 쎄미얼이나 맨 그 사람이죠. 세상의 발음 같은 건 글자 쓰면 Samuel 이렇게 되는데 성경 말씀은 쎄미얼보다 더 심하게, 언어로 되어있는데 못 알아봐요.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못 알아듣는 이유가 뭐냐? 천국에서 추방된 공동체 속에 속해있기 때문에 못 알아듣고요. 악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이 세대에 속한 자기들끼리 목사를 만들고 교회를 만들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서 거기서 그들이 만든 예수, 그들이 만든 삼위일체, 그들이 만든 하나님을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소통하고 있겠죠. 그 소통의 방향이 뭐냐?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구원받는가, 하는 이야기를 그들 세계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통한다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 전제가 뭐냐 하면 바로 자기 동일성이고 더 나아가서 자기 동일성들의 뭉치가 자기 공동체의 동일성이 돼요.
어쨌든 간에 동일성인데 이 동일성이 억지가 돼요. 왜냐하면 끊임없이 변하잖아요. 수시로 변하고 늘 변하는데 변하게 되면 동일성을 포기해야지. 동일성을 포기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매일같이 주께서 우리를 있게 하는 것은 주의 일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들이에요. 주님이 현재 엄연히 살아있고 주님께서 일하고 있다는 그 증거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살아있거든요. 따로이 나의 동질성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주님이 없는 사람은 계속 나의 나됨을, 과거 기억을 전제로 해서 어제도 이게 나였고 오늘도 같은 일을 하니까 이게 나다, 자꾸 계속해서 억지를 부리면서 그걸 끌어 모으는 거예요. 그 동질성의 끝이 정치입니다. 또는 정치구조, 정치를 다른 말로 하면 행정. 동질성의 끝을 주장하는 인간들을 규합해서 공동체로 힘을 모으는 그 일이 정치에요, 정치.
인자는 개인에게 당했습니까, 정치단체에게 당했습니까? 정치단체죠. 본디오 빌라도를 포함해서 사두개인도 그 당시에 권력자잖아요. 예수님 재판할 때 개인적으로 테러했습니까? 아니죠. 개인적으로 한 게 아니고 집단적으로 했어요, 집단적. 집단적 공동체, 집단적 동일성이에요. 그러면 개인의 동일성을 날마다 구축하면서 동일성을 구축하는 이 요소 중 하나가 뭐냐? 나는 어느 나라에 소속이다,가 이 안에 동일성으로 포함이 되는 겁니다.
어제 내가 어느 나라 소속이지? 아, 여권 보니까 대한민국이구나. 그렇다면 오늘은 어느 소속이지? 오늘은 대한민국이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중에 나이 들어서 치매 걸려가지고 “할머니, 할머니 국적이 뭡니까?” “국적이 뭐에요?” “나라, 어느 나라입니까?” “내가 어느 나라더라?” 몰라요. 자아를 형성하는 게 얼기설기 되어가지고 툭툭 다 빠져나와가지고 정신이 없어요. 전에는 대한민국 사람인데 지금은 대한민국조차 몰라요.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도 결국은 그렇게 돼요. 몇 년 안 남았습니다. 장로님 한 삼십 년... 몇 년 안 남았어요. 정신없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요. 그동안 우리의 미래가 정신없음이잖아요. 동일성 다 깨져요. 동일성 다 깨지는 게 이게 우리에요, 이게. 현재 나는 나다, 하고 정신 바짝 차리는 게 이게 내가 아니고, 그걸 해리현상이라 하는데 점점 더 쥐포 찢어지듯이 찢어져가는 그 중간과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찢어지기 전에 아주 발악을 하죠. 등 꼿꼿하게 펴서 걷기하고 운동하고 하여튼 오메가3부터 해서 온갖 노력을 해가지고 지연시키는 것, 내가 완전히 해리되기 전에 어쨌든 간에 정신 바짝 차릴 날을 좀더 이어가려고 노력하죠. 그러나 그건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이 정치적 동일성, 정치적인 행정은 뭐냐 하면 바로 소유화하는 거예요. 자기의 구성요소를 소유화시키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인자의 반대모습이기 때문이에요. 이걸 이렇게 쓰겠습니다. ‘실제적 현상은 실체적 현상이 된다.’
실체는 실제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 하나하나 덩어리로 손에 만져지는 것, 그리고 실제로 힘을 느끼는 그게 실제고, 실체라 하는 것은 국가입니다. 국가의 부름을 받잖아요. 이게 추상입니까, 국가의 부름이? 입영통지서가 추상입니까? 퇴직한 교사들 70세 이전은 전부다 복귀해. 교사 없어. 이게 지금 추상화 관념이에요, 이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하니까 우크라이나 남자 60세 이하 전원 다 소집, 전원 다 군에 가게 되어 있어요. 60세 이하? 군에 가야돼요? 아, 살았네. 60세 이하 전부다 군에 가야 돼요. 이게 농담하는 거예요, 나라에서? 실체라니까요. 실체. 실체적 현상은 그러한 입영통지서라든지 세금 내는 것, 교통법규 오늘부터해서 만약에 횡단보도에서 2초 정지 안하면 전부다 벌금 15만원 받는다, 전부다 실체적 현상이거든요.
이렇게 하는 이유가 개인을 소유화하는 겁니다. 자기 딴에 똑똑해도 국가는 나보다 더 똑똑해서 국가는 나에게 명령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명령하는 자. 이게 질서의 권력화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권력화에 당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알고 있죠.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갑시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악마로 하여금 규합하도록 의도하셨다.
자기들끼리 다 그렇게 모이도록 한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서로 적이었으나 사도 바울을 재판하는 가운데 또 예수님을 재판하는 가운데 그때는 하나의 동지가 된 거예요. 그들의 끝은 똑같은 곳으로 가고 있었던 겁니다, 절벽으로. 불바다 되는 지옥으로 전부다 가고 있었던 거예요. 아무리 자기들 내부에서 투쟁해도 소용없어요. 예수님 방향 쪽이 아닌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겁니다, 줄 맞추어서.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어요. 누구의 소유화되었기 때문에.
이걸 빠져나오려면 무슨 권력에 대해서 대들어야 돼요? 국가권력에, 국가 정치권력에 행정권력에 대들어야 됩니다. 대들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습니까? 국가권력이 너무 세기 때문에 배신한 거예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왜 팔아먹었어요? 자기의 동질성은 국가가 인정해준 동질성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먹으려면 누구를 찾아가야 되는지 가룟 유다가 알고 있었어요. 그 말은 가룟 유다는 국가라는 어항 속에서 파닥거리고 있었던 겁니다. 못 빠져나오고 있었던 겁니다. 가룟 유다뿐이겠습니까. 오늘날 모든 사람이 다 그렇죠. 각자 소속되어 있는 국가, 국가의 권력 그 밖으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소유가 되니까.
그러면 이 국가가 개인을 소유화시킬 때 뭐로 소유하느냐 하면 법률로 소유해요. 법률로 소유화시킵니다, 법률. 법률을 이렇게 보면 알기 쉬워요. 무질서, 혼돈입니다, 혼돈에서 질서를 잡고 질서에서 권력이 되고 권력이 소유화를 발휘하죠.
그러면 이 무질서는 어디서 나오는가? 자연에서 나왔죠. 자연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죠. 하나님이 만든 자연의 무질서에서 인간들은 질서→ 권력→ 소유화를 이렇게 따로 만들었죠. 자, 묻습니다. 이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가 일치합니까, 일치하지 않습니까? 일치하지 않죠.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질서, 권력, 소유화), 인간의 뜻이 국가의 뜻이죠, 인간의 뜻이 일치합니까, 일치하지 않습니까? 일치하지 않죠. 일치하지 않는 가운데서 인간들은 전부다 인간의 뜻에 함몰되었습니다. 여기에 빠져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행동해도 국가의 통제 하에 있는 이상은 하나님의 일이란 성사시킬 수가 없습니다. 국가에 대해서 청와대에서 교회에서 아무리 철야기도해도 그건 인정되지를 못합니다. 결국은 철야기도해도 겟세마네 기도해도 겟세마네 기도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 배신하고 도망갔잖아요.
물론 기도하면서 잠을 안 잤을 경우냐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없어요. 잠을 안자고 기도하든 잠을 자면서 기도하든 주님께서는 의도했어요. 예수님 말고 어떤 누구도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주께서는 확정지었기 때문에 제자들로 하여금 인간이 만든 질서에 주께서는 그냥 넘겨버린 거예요.
여러분 이거는 쉬울 거예요. 산토끼는 이 세상에서 누구 것이냐? 사냥꾼의 소유로 인정해줍니다. 그냥 산에 돌아다니는 토끼는 사냥꾼 것이 아닌데 총 쏴서 잡으면 사냥꾼의 소유로 인정해줘요. 네 총알 박았다고 네 것 되는 근거가 어디 있냐? 이렇게 안 따집니다.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데 총 쏜 사람의 것이 되도록, 어느 질서가? 주님이? 아니에요! 인간 질서에서 그렇게 해준다고요.
바다에 물고기는 어부 것. 바다에 물고기 많잖아요.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 것이죠.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그걸 잡은 어부의 소유로 해주는 겁니다. 어부 것으로 해주는 거예요. 인간세계에서는 이걸 정당한 걸로 봤죠. 그 대신 여기서 고기 잡은 게 다 자기 것 됩니까? 여기서 뭘 떼내죠? 세금. 세금은 일부를 받아가는 게 아니고 조세권이 조세 내는 사람을 이미 소유화시켰다는 그 증거입니다. 그다음 지상권-토지주. 땅은 토지 주인 것이 되는 거예요. 국가에서는 세금 떼면 되죠. 그다음에 저작물-작가. 보세요. 이 세상의 특징이 뭡니까? 제각기 자기 소유를 가지고 질서 잡아서 형성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인 거예요, 이 세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보고 뭘 물었느냐 하면 “너 어느 신학교 나왔어? 너 율법 누구한테 배웠어?” 갑자기 옛날 기억이 확 올라오네요. “너 율법 누구한테 배웠어?”, “너 누구 허락 맡고 나한테 그런 질문 하냐?” 주님께서는 그 이야기하고 싶었죠. 그러나 의도적으로 주께서 그렇게 인간 쪽이 하나님 쪽을 몰아세우도록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그걸 벌이신 겁니다.
이 소유권의 특징이 뭐냐, 오늘 중요한 것 나옵니다, 정말 중요한 건데 이게 안정권입니다. 이게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매혹거리고 유혹거리고 인간이 원했던 겁니다. 자연은 있지만 거기서 보이지 않는 질서가 결국 돌고 돌아서 어디로 안착했어요? 이거는 내 것, 안정적인 내 것으로서 귀착이 됐어요. 다 돌아와 버린 거예요. 무슨 반칙이 있어서 이렇게 된 거예요? 결국 모든 세계는 다 주님의 것인데 어떻게 해서 여기서 내 것이 발생됐죠? 이게 바로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 삽비라가 헌금해서 죽은 이유잖아요. 내 것이니까.
소유에 여러 가지 성질이 있는데요. 소유에서 시효를 묻게 되어있고 취득여부 묻고 승계, 자식들에게 주느냐 아니면 양도, 남들에게 주느냐, 이 네 가지 요소를 다 지녀야 제대로 소유라고 할 수 있거든요. 아나니아, 삽비라가 헌금을 누가 결정했습니까? 얼마를 드릴까 누가 결정했습니까? 자기가 결정했죠. 그러니까 이것은 양도 결정권이 나한테 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너한테 있어도 네 것이 아니고 내놔도 네 것이 아닌 걸 네가 왜 몰랐는가.
다시 말해서 헌금이라는 뜻은 이것은 나한테 있어도 내 것이 아니라는 표시로서 내놓는 게 헌금이에요. 그리고 돈만 그런 게 아니고 그 돈을 갖고 있는 내 자신도 나의 것이 아닌 거예요. 자, 이 시점에서 다시 묻습니다. 구원은 누구 일입니까? 주님의 일이죠. 그런데 자꾸 사적인 나의 구원으로 전환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 것은 내 소유라는 더러운 습관이 계속 그런 습성이 남아있어서 그런 거예요, 이게.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예수님을 탁구공으로 여깁니다. 자기들끼리 재판하다가 핑퐁 핑퐁 핑퐁해서 이건 빌라도가 하라 하고 빌라도가 다시 너희가 재판하라 하고 이건 뭐 탁구공도 아니고 오고가고 오고가고.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서 이쪽도 치고 저쪽도 치고. 헬라인이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모조리 전부다 예수님의 원수가 됨을 다 드러내는 일을 벌이시는 겁니다. 오늘날 예수님 오셔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에서 우리가 중요한 것 두 개를 뽑아내겠습니다. 하나는 동질성, 또 하나는 안정권 확보. 이것이 바로 가짜 질서죠. 이 가짜 질서는 외형적인 거예요, 외형적. 아까 실체적이라 했죠. 그게 뭐였습니까? 국가죠. 국가를 다니엘서에서는 짐승이라 했죠. 짐승.
이제 요나를 한번 봅시다. 요나의 그 일어난 일은... 주의 이름의 동질성과 요나의 동질성이 같이 겹쳐있는 게 선지자에요. 아까 경쟁관계에 있다 했죠.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이 경쟁관계에 있는 것을 함축해서 포개서 같이 딱 보여주는 게 선지자에요. 그러면 인간들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가를 선지자가 유감없이 다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인간들이 움직이는 것을 표본적으로 샘플로 보여주기 위한 환경으로 해서 안에다가 집어넣죠.
p.225 위에서 6번째 줄을 봅시다. “아무리 쇄신해도 몽상에 불과하며, 기존의 인간의 이름이라는 독자적 주체성을 갖다 버릴, 적당한 역사 밖의 처소를 구하지 못해서 오는, 폐쇄적 성질을 그냥 자꾸만 내부 깊숙이 쑤셔 넣고 있을 뿐이다. 즉 수평적 시간선이 쌓여서 자기 내부적으로 수직적 시간층을 가중시키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있는데 과거는 기억이라 했죠, 미래는 희망입니다. 그런데 희망은 과거의 기억에서 결핍된 것, 모자란 것을 미래에서 보충하려고 미래를 은근히 기대해요. 그러면 이 미래는 세상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꼭 필요한 일이 벌어지는, 너무나 일방적인 미래상을 상상하게 되죠. 너무나 일방적인 미래상.
지금 다음 달에 딸이 결혼할 때 결혼하는 딸 부모가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원합니까? 아니죠. 예수님의 재림은 미래의 일 아닙니까? 미래 일 맞잖아요. 왜 미래 일중에 재림은 안 구하고 그날 날씨 좋기를 구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의 기억 속에 한달 뒤 자기 딸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 인생의 보람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신랑감을 얻어서 결혼하는 결혼식이 있죠. 이 결혼식이 자기 선이죠, 자기 시간선이죠, 일방적인 것. 자기 시간선이 왜 필요하냐? 그럴 때 한달 뒤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질하다고 우기고 그게 나에게 내 삶의 안정권을 보장하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안 걸리는 사람 없죠. 다 걸리죠.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세상 참 좋다는 사람이 있고 안 좋다는 사람이 있어요. 각자 자기 고유한 시간선, 시간라인을 따로 가지고 포기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고맙게도 이제 슬슬 70, 80 넘어가면 내 시간선이 뭐였지, 자기 과거가 무너지면 과거에 알알이 소세지처럼 붙어있던 미래도 같이 날라가거든요. 내가 내일 뭐할라 했더라? 그건 50돼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뭘 하려고 했는데 뭘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뭘 하려고 했는데 도대체 뭘 하려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나죠. 자기 시간선이 기억이 안 되니까 내일 뭐 할 계획이 날라가버린 거예요. 점점 그것이 심해집니다. 그때는 메모하고 냉장고에 적어 갖다 붙이고 하죠.
그러니까 여기 한번 보세요. 시간선이 따로 있으니까 그게 자꾸 고착되면서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나라는 것은 오뚝이처럼 로봇처럼 따로 만드는 거예요. 내가 나를 만드는 거예요. 이거 반칙 아니에요? 주님이 만드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만든다고요. 그럴싸한 자아상을. 고집부리죠. 가룟 유다처럼, 제자들처럼.
우리가 죽어야 될 이유를 아시겠죠. 아니, 죽이는 게 얼마나 큰 복인 줄 아시겠죠. 이 자기를 만드는데 괜찮은 미래를 기다리다 보면 우리가 진이 빠져요. 진 빠지는 걸 네 자로 스트레스라 해요. 스트레스에서 위염 나오죠. 나중에 이게 암 걸립니다. 왜 스트레스 받습니까? 잘 돼야 될 텐데. 잘 될 턱이 있나. 맨날 잘 돼야 될 텐데. 아무리 잘해줘도 그건 당연한 거고 또 내일 생각하면 내일은 잘 돼야 될 텐데.
자기만의 폐쇄된 성질을 자꾸 자기 내부에다가, 움직이는 사건들을 일방적으로 내 이름으로 거기다 꾸역꾸역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인간입니다. 그 동질성한테 핍박받은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 쓸데없는 일을, 배후에 악마가 시켜서 쓸데없는 일을 해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마음 가지고 제가 미래에, 또 미래에, 구원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Shut up! 그 입 다물라 했지! 네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너밖에 몰랐으면서 너의 구원을 거기다 또 욕심 내냐? 입 다물어! 구원은 내 일이야.
요나가 바로 그 일을 했던 거예요. 요나가 하나님의 계시 듣고 이건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고 난 그냥 쉬러 가면 되겠구나, 하고 다시스로 도망을 쳤어요. 도망을 쳤는데 주님께서는 어떤 환경을 만듭니까? 요나가 갖고 있던 인간적인 생각과 똑같은 인간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배를 전세내서 거기서 합승을 하게 된 거예요.
풍랑이 일었습니다. 오늘 살아 있잖아요. 그런데 풍랑이 일게 되면 어떤 조짐이 있습니까? 지금 동질성으로 살아있는 내가 풍랑이 심하면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있다는 그것을 요나 말고 다른 사람도 동질적으로 똑같이 생각한 거예요. 인간은 모조리 똑같이 생각한 거예요. 내가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똑같이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요나에게 여기서 선지자다운 면모가 나오죠. 죽으면 죽으리라.
놀라운 사실은 요나 자신이 하나님 낯을 피해 도망쳤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도망쳤는데 주께서 드론 띄워서 나를 발각했다는, 나 말고 하나님의 원초적인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 나에게 지시를 내리고 지금 일을 벌이고 있다는 이 감이 왔다는 사실, 이게 바로 선지자 아니고 뭡니까? 이게 바로 선지자잖아요. 자기가 얼마나 착하고 훌륭하냐가 아니라 지금 나만 일한 게 아니고 주께서도 일하셨고 나는 그 주의 일을 도망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죽음 속에서 죽어가는 속에서 파악된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요나가 배타고 있을 때 풍랑이 일 때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까? 자기보고 나 물속에 집어던져라 할 때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요나는 그걸 기꺼이 받아들였어요. 죽는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건 오는 세대의 일인데요. 이건 미래의 일, 내가 건너갈 수 없는 주님의 고유한 자기만의 일을 나한테 적용시키는데 여기서는 나의 일이 발각되고 벗겨져야죠. 주의 하는 일에만 참여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누가 벌벌 떱니까? 누가 요나를 물속에 집어넣기를 주저합니까? 같이 배타고 있던 사람들은 요나를 집어넣는 걸 두려워한 거예요. 그건 요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요나를 집어넣고 그 다음날을 살아가는 내가 어떤 사람을 우리 살기위해서 물속에 집어넣었다는 양심의 가책이 된 그 모습이, 내일의 모습이 내가 싫은 거예요. 나의 동질성과 위배되는 거예요. 나의 동질성은 정당해야 되는데 나 살기위해서 누구를 집어넣었다는 그것이 평생 트라우마가 될 수밖에 없다는 내일의 내 모습이 싫은 거예요.
싫거나 말거나 그건 하나님의 일이 아니죠. 그러니까 요나를 집어넣어서 인간들이 기껏 생각하는 것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다 까발리시는 겁니다. 그게 선지자의 기능이에요. 요나는 자기가 죽을 줄 몰랐죠. 그 다음 모든 순서는 일방적으로 요나를, 휴대폰 전원 다 끈 상태에서 요나로 하여금 죽은 상태에서 그 나머지 일을 누가 처리합니까? 우리 주님이 처리해나가시는 거예요. 그게 선지자입니다. 그게 선지자의 말씀, 계시고요.
우리가 이 계시를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나이 80되기 이전부터 꼭 80되어서 정신 나갈 때... 정신 나갈 때 되면 그 말씀도 안 떠올라요. 정신 아직도 있을 때에 내 일은 나한테 없구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주님이 일한다는 사실을, 어설픈 우리의 나의 이기주의를 통해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저 변호하고 변명에 허덕대지 말고 거기에 몰두하지 말고 늘 감사만 나오는 저희들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