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2장 14절 (구원의 진실) 220705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2장 14절 (구원의 진실) 220705a-이근호 목사
처음도 구원이고 나중도 구원이고. 모든 생각하는 것은 ‘나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라는 생각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봅니까? 구원의 하나님으로 보는 거에요. 구원의 하나님.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이니까 그들에게 근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시니까 이 사랑을 앞에 땡겨버리면 무슨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이게 바로 악마가 제시한 하나님이에요. 악마가 제시한 하나님. 여기 구원, 사랑 이걸 딱 기초로 놓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할 때 누굴 건진단 말이냐.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누구를 건지느냐? 여기 나를 건진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보세요. 뭐가 필요합니까? 나 있고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이걸로 이 사람들은 성경에 기본 바탕은 다 갖췄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성경에 나 없거든요. 성경에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게 이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하나님은 끝났어요. 이스라엘이 끝났으면 구원의 하나님도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에 나타난 구원의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의 실패로서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뭐로 변했습니까? 구원의 하나님이 심판의 하나님으로 변했지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이방 나라의 자신의 계시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에게 계시했어요. 이스라엘에게 계시할 때에 이스라엘에 구원의 하나님이 나타났잖아요. 그런데 구원의 하나님의 그 실적이 뭡니까? 구원의 하나님인데 구원받은 이스라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이사야 뒷부분에 나오거든요. “야곱아 너는 택한 민족이다” 나오잖아요. 구원의 하나님 맞아요. 나오는데 그 구원 누가 누굴 구원했어요? 누굴 구원했습니까? 예수님만 구원했지요. 그게 성공이에요. 그것뿐이에요. 예수님 외에는 구원하지 않는다가 확실하고 그럼 예수님 외에는 구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예수님 외에는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심판의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얼마나 정직하고, 제대로 일하십니까. 예수님 외에는 심판을 해버려야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는 그 취지와 이게 일치가 되고 부합이 되는 게 맞지요. 원칙이 일관성이 있어요. 하나님의 원칙에. 심판의 하나님이죠.
구원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가지고 예수님만 구원하잖아요. 아버지가. 예수님만 구원하지요. 예수님만 구원하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에 예수님이 왔다가 떠나버리면 예수님이 떠나버린 이 세계는 구원이 되고요. 구원의 세계가 되고 이 세계는 무슨 세계 됩니까? 이거는 지옥이 되는 거에요.
주님이 왔다 떠나니까 지옥 되는 거에요. 주님이 왔다가 떠나시니까 여기에 주인공이 있는데 이 세상에 주인이 있는데 이 세상의 신, 주인이 누구냐 하면은 이게 악마였습니다. 악마. 이 악마가 이스라엘까지 멸망시켰어요. 이 세상에 속한 것 중에서 악마에게 예속되지 않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구원을 얻기 위해서 교회 나오면 안 됩니다. 교회는 진실이 뭐냐? 진실이 뭐냐를 알아야 돼요. 진실이.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야 돼요. 나를 미워해도 좋으니까 내가 누군지를 알려 달라 이것을 하나님 앞에 호소해야지요. 제가 누굽니까?
여기 다녀갔기 때문에 예수님 따라간 예수님이 바로 천국이거든요. 그렇다면 예수님 천국 빼놓고 나머지는 뭐냐 하면은 지옥이에요. 지옥. 그러면 지옥을 지옥답게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구원의 하나님도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도 아니고 뭐냐 하면은 심판하시는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 교회가 하나님이 달라요. 하나님이. 하나님 자체가 다르다니까요. 아까 처음에 뭡니까?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이런 하나님은 없어요. 왜? 이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아시는 그분은 이 세상을 빠이빠이 하고 떠났기 때문에, 떠났기 때문에 여기 남아있는 하나님은 이방 나라의 하나님이고 이스라엘이 멸망될 수밖에 없던 이스라엘 속에 우상을 섬기라고 독촉했던 그 하나님이거든요.
그게 누구냐 하면은 남아있는 그 찌끄러기의 하나님은 뭐냐? 그게 악마였던 거에요. 그게 악마였다 이 말이죠. 그래서 악마를 악마로 드러내는 이 진실, 이 진실을 알게 된 게 기쁘지 않습니까? 정말 기쁜 일이잖아요.
예수님이 홀로 떠남으로써 제자들도 못 따라갔어요. 홀로 떠남으로써 남아있는 것들은 뭐냐 하면은 뭐만 남아있느냐 하면은 자아들만 남아있는 거에요. 자아들만. 그러면 우리는 나에 대한 질문할려면 어떻게 질문합니까? “내가 누굽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님의 답변은 “너는 심판의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 받아야 될 너다. 그게 진실이다.” “아이고 이제 제가 알게 돼서 감사합니다.” 지금 이래야 이 전체를 다 아는 사람이 되는 거에요. 이래야. ‘아 이제야 나를 아는구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비로소 내가 심판 받아야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이것은 바로 있다가 떠나신 예수님의 안목과 동일한 안목을 바라보기 때문에 비로소 밝혀지는 거에요. 예수님의 시선에서.
내가 어떻게 구원되는가에 관계없이 예수님의 안목에서 나는 어떻게 보일까를 비로소 알게 된 거에요. ‘아 내 구원은 애초부터 내 구원이 있다고 뒤에서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은 마귀가 그런 조종했구나’ ‘네가 예수를 믿고 피를 믿고.. 이러면 구원됩니다. 천년왕국을 믿고..뭐..’
하여튼 내 귀에 캔디, 자꾸 속삭이고 있어요. 속삭이고 있는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 이 속삭이는 모든 속삭임이 마귀가 와서 속삭였던 거에요. 마귀가 와서. 애초부터 구원 대상도 아닌데 구원 대상도 아닌데 자꾸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사기들을 쳐 먹은 거에요. 사기를 친 거에요.
사랑하는 사이는요 멜로드라마하고 에로드라마하고 차이점이 뭐냐? 멜로드라마는 주인공이 눈을 마주칩니다. 눈을 바라봐요. 그래서 부부라도 잠자리에서 눈을 안 마주치면 그게 멜로가 아니라 에로가 되버려요. 눈을 마주치면 우리가 다같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할 게 있다는 거에요. 당신이 보는 시선과 내 시선이 하나가 될 때 이거는 어떤 영화의 묘사라도 그게 아름다운 멜로가 돼요. 그런데 에로는 엉뚱한데 시선이 가고 있어요. 시선이 하나가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오늘 누가복음 12장 13절에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했어요. 자, 지금 이 사람은 예수님의 시선과 동일합니까? 전혀 동일하지 않지요. 자, 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돼요. 오늘 13절부터 시작하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창세기 2장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정녕 죽으리라” 했지요. 그러면 이 죽음 경험, 죽을 때까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다 죽어 버리는 이 죽음 체험 있잖아요. 죽음 경험. 이런 것이 보통 자기 안목, 주님의 안목이 아니고 인간들의 자기 안목에 그냥 머물러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주님만이 아는 죽음의 의미가 확장이 됩니다. 확장이 되어버리면 죽음체험을 하지 말고 무슨 체험을 하느냐 하면은 지옥체험을 해야 돼요. 지옥체험. 지옥체험과 죽음체험과 다른 점은 죽음을 체험해보면 죽기 전에 이런걸 대비해야 되는구나. 왜? 죽기 전에는 내가 살아 있으니까.
죽음 체험은 죽기 전에는 나는 살아있다고 확신하고 그거는 분명하게 우리가 인정할 수 있다. 죽음체험이 되기 전까지는 살아있다 가 되지만, 살아있다 가 용납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옥체험이 되어버리면 지옥체험은 큰 공간을 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지옥에서 죽으나 사나 이건 지옥밖에 못 벗어난다는 체험이 지옥체험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오신 것은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고 너희는 지금 지옥에서 태어나서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지옥 사람으로 살다가 지옥 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거에요.
그런데 지금 여기에 예수님 찾아왔던 어떤 사람인데 형에 대해서 재산 다 빼 돌려서 유산 없다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은 지금 뭐냐? 자기가 죽기 전까지는 아직 살아있다고 자기가 자부하고 있는 거에요. 이거는 지옥 체험이 아니고 죽을 때는 죽더라도 살 때는 살아야지 이런 체험이에요. 이런 안목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안목과 불일치해요. 일치되지 않습니다.
살다 죽는 것은 애들도 다 아는 이야기에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이 사실을 알려주는 사건이 창세기 22장에 보면 거기 이삭이 나오지요. 이삭. 이삭이 아버지와 같이 모리아 산에 갈 때에 아버지가 이삭에게 뭘 짊어지어 주느냐? 불쏘시개 장작을 지웁니다.
장작을 지우는데 이삭이 가면서 아버지한테 물어요. “아버지여 불쏘시개는 있는데 그리고 불도 있는데 제물이 없네요. 아버지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어요. 지금 어린 이삭은 지금 뭐냐 하면은 어린 이삭이 생각하는 것과 오늘날 우리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이삭은 본인들이 무슨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지시한 일. 하나님이 지시한 일을 하는 주체, 주인공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본인들이 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일이 성사될려면 본인들은 죽어야 됩니까? 아니면 멀쩡해야 됩니까? 멀쩡해야 주의 일을 하잖아요. 이삭이 그 점에 대해서 의아해한 거에요.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준비를 하는데 아버지 뭐 빠트렸습니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제물은 어디 갔습니까? 아버지가 이야기합니다. 제물이 제일 중요한 거에요. 거기서 캠핑할 것도 아니고. 제물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제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고 이렇게 말을 얼렁뚱땅 넘어갑니다. 차마 “너야 너. 네가 제물이야.”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어린 이삭이기 때문에.
나중에 이삭은 알아요. 나의 삶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나에게 삶이라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은 나는 죽음을 이 땅에서 드러내야 되고 이동시키는 거기 때문에 삶이라고 할 수 없어요. 내가 죽음 자체를 이 세상에 기입시키는, 집어넣는 그 역할이 이삭이었다는 사실을 이삭이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방식, 예수님의 시선은요 죽음이 찾아드는 방식. 죽음이 이 땅에 찾아드는 방식이 예수님의 일이에요. 아무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이 땅에 들어오면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은 지옥체험을 해야 돼요. 본인이. 지옥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지옥, 하나님 아버지가 안 계신 곳이 지옥이에요.
아버지한테 버림받은 구역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구역. 인간세상 이 자체, 이 아름다운 세상 자체를 고스란히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지옥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에요. 천국은 없어요. 천국이 없는데 교회가 천국이 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 자체가 마귀가 거짓말하고 있는 거에요. 이 땅에 천국은 없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냥 저주의 바다에 누워서 해 저문 노을을 바라다본다. 그냥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냥 저주에요. 예수님도 예외가 없어요. 예수님도 예외가 없어요. 예수님이 아는 아버지가 진짜 하나님이거든요. 진짜 아버지 입장에 의하면 예수님 너도 가서 지옥체험 하라고 보낸 거에요.
죽음체험은 살아있을 때는 체험을 못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살아있을 때 지옥체험을 그냥 죽는 체험이 아니고 살다가 늙어 죽는 그 체험 말고 죽음, 하나님이 정해놓은 이 죽음의 의미가 확장되니까 영원한 저주에요. 영원한 저주를 이 땅에 찾아드는 집어넣는 방식이 이삭을 통해서 하게 하신 거에요.
그럼 이삭의 목숨은 뭡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자기 십자가를 지시는 누구의 모습이에요? 예수님의 모습을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앞당겨서 보여준 겁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아버지 제물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말을 했지요. 극히 인간적인 발언이에요. 인간적인 발언을 하고 그 인간적인 발언의 의도와 이삭의 요구하는 그걸 완전히 인간적인 것은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걸 묵살하면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계획된 대로 이삭을 몰아넣어 가버려요.
이게 오늘날 예수님의 운명도 마찬가지지만 이게 오늘날 성도의 삶이 이런 삶입니다. 내 원과 뜻이 있지만 주께서는 지옥체험을 우리 등짝에다가 짊어지게 하셨어요. 그럼 우리는 고생이고 슬픕니다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내가 이익이 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진실이 뭐냐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 역할하라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진실이 뭐냐?
그런데 이삭이 말을 하던 말던 이삭의 말은 완전히 무시하고 제물을 이렇게 이삭 자체를 제물로 만들었지요. 만들었는데 여기서 뭐가 있느냐 하면은 숲속에 준비된 하나님의 양이 있었습니다. 이거는 아브라함도 몰랐어요. 아브라함은 막장이었습니다. 아이 모르겠다 양이 한 마리 있는데 내가 시늉이나 하자. 이거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에요. 그냥 몰랐지요.
아시는 분은 누구만 아셨어요? 하나님만 아셨어요. 왜?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지옥 갈 사람이기 때문에. 갇혀 있는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양을 준비했다. 그래서 양 대신 잡아라. 양 대신 잡으면 거기 피를 내지 않겠습니까. 피를 내지요.
이 대신 잡힌 본인 아니고 너 말고 다른 나 말고 다른,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나 말고 다른 분이 구원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되는 거에요. 내가 구원되는 게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이 구원되는 거에요. 예수님 이름이 구원되는 거에요.
그리고 예수님 이름 안에 내 이름이 짤리고 예수님의 이름이 덮쳐서 구원되는 거에요. 쉽지요? 쉬운데 기분은 뭐 별로. 나 말고 다른 분이 언약의 피, 유월절의 피로 구원된다면 피가 피 되기 위해서 필히 여기 피를 만나는 것은 죄인이 될 경우에만 피를 마주할 수가 있어요. 죄인 경우에만.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비로소 보이는 거에요. 죄가 있는 곳에.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지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악마가 선악과를 조장하고 부추깁니다. 선과 악 중에서 네가 선하면 구원될 수 있다고 자꾸 “율법 있잖아 율법에서 선하면 너 구원되는 거야. 성경은 구원의 하나님께서 너 구원하려고 성경 줬으니까 성경대로 지키면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야.” 이런 식으로 구라를 거짓말을 치고 있었던 거에요. 이게.
내 안에 선악체계 있다는 것은 이건 아예 고려를 안 해요 지금. 이게 고장난 게 들어있다는 것, 저주받을 요소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은 생각 안하고 바깥에 이런 것 준비해놨으니까 이거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행함 말고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다고요.
내 자체가 구원의 대상이 안 되는데 이걸 이야기를 안 해요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버리면 교회 안 나오기 때문에. 구원받으려고 교회 나오지 진실이 뭐냐를 알기 위해서 교회 나온 사람 없거든요. 교회 나왔으면 헌금 좀 했으면 어떤 돌아오는 이익이 있어야 될게 아닙니까. 이익이 어디를 중점으로 한 이익이에요? 다른 사람 이익이에요? 누구 이익이에요? 나 이익. 나의 이익을 생각하는 자체가 이게 저주받을 짓이거든요. 이게.
그런데 모든 인간 치고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행위에 나서지 않습니다. 모든 행위의 동기는 이익이에요. 내 이익.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시선과 주님의 시선과 합치될 수가 없지요. 피가 죄인을 요구하기 때문에 주님이 이야기하는 건 그거에요.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어요. 오늘 제목을 간단하게 할 수도 있고 세 자로 하면 이겁니다. 제목이 ‘죽을래?’ 다섯 자로 한다면 ‘나랑 죽을래?’
피를 흘린 자존심이 있어서 너는 우리보고 죽으라고 초청하면 그게 구원이 돼요. “나랑 죽을래?” 그냥 ‘죽지마’란 뜻이에요. “홀로 죽지 말고 나랑 죽을래?” 그걸 또 줄이면 ‘죽을래?’ “죽을래? 너하고 나하고 붙어볼까?” 그런 뜻이 아니고. 죽어야 될 자를 우리는 자꾸 살라고 하니까 우리가 진실을 기피하잖아요.
“아버지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이거는 몰라서 그렇지만 진실을 왜곡하는 거에요. 본인이 제물이에요. 양은 대타고요. 본인이 죄인으로서 죽어야 돼요. 죄인으로서. 그래야 죄인으로 죽어야 될 걸 죄인으로 죽으면 구원되는 게 아니고 죄인으로 죽는 이유가 이게 지옥가기 때문에 지옥 보내기 위해서 죄인으로 죽이는 것이 주님의 일관된 취지입니다.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죄인이니까 죽이겠다는데 주님의 결정이 잘못 있습니까? 잘못 없지요? 문제는 우리는 죽는 건 당연한 거에요. 한 거고 주께서 대신 뭘 준비했다는 것. 철딱서니 없는 제물이 어디 있습니까? 왜? 제물 있어야 내가 살지요. 이게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거에요. 네가 왜 살아야 하는데? 죽어야 될 것은 너야. 제물 찾지 마! 예수님 찾지 마. 네가 지옥가야 돼. 그게 예수님의 안목이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 대신했으면 그 다음부터 우리의 삶은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하는 삶만 남아있어요. 그러니까 죽어가는 즐거움이 남아있다 이 말입니다. 또는 죽어가는 자유가 남아있다는 거에요. 그 죽이는 방법이 직장생활이에요. 직장생활하면 그 다음부터 직장이 나를 죽입니다. 이 세상 삶이 죽이는 거죠.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의 상식은 이렇습니다. “저는 직장생활도 하지만 복음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저는 묻지요. 복음이 밥 먹여주던가요? 묻고 싶어요. 복음이 밥 안 먹여줘요. 복음 믿는다고 알아서 아침에는 짜장면 배달해주고 저녁에는 짬뽕 배달해주고 그런 거 없어요. 그러면 복음은 밥을 안 먹여줍니다. 복음은 복음대로 제쳐두고 일상생활은 밥 먹여주는 일을 해야 돼요. 이게 직장생활이거든요.
밥 먹여주는 직장생활을 하면 뭐가 살아 있어야 되느냐 자아가 주동해야 돼요. 나를 놓쳐버리면 정신 바짝 안 차리면요, 쫓겨나요.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미스 김 커피!” “예예!”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엉뚱한 직장에서 복음 생활하다가 다른 짓하게 되면 큰일 나는 겁니다. 절대로 복음, 밥 안 먹여줍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바짝 차리면 자아가 철저해야 되고 완벽해야 되고 남한테 밑지지 않는 재능과 기술을 연마해야 됩니다. 연마. 갈고 닦아야 돼요. 숙련돼야 되고 누가 봐도 일 잘한다 소리 들어야 돼요. 그래야 이 땅에서 오래 살 수 있고 그래야 이 지옥에서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이 지옥에서.
그러니까 복음은 자아를 인정하지 않고 밥 먹고 살려고 하니까 자아가 돈독해져야 되고 양쪽에서 지금 치일 판이라. 이게. 자아가 돈독한다는 것, 자아가 더욱 단단해 진다는 것.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선악 지식을 작동시켜야 된다는 말.
선악이 무엇임을 분명히 해야 되고 선이 무엇임을 분명히 해서 내가 악에서부터 악한 사람으로부터 선한 쪽으로 악한 쪽에서 선한 쪽으로 점점 더 자기를 개조해야 되고 개선해나갈 때 이게 돈으로 이어져요. 착하고 훌륭하고 뛰어나고. 이건 뭐 사람들이 이런 사람 쓸려고 하지요. 게으르고 악하고 말썽꾸러기 이건 퇴출 1순위죠. 이건 안돼요.
악에서 선으로 사회가 통용화된 선, 저 사람 너무나 착실하고 착하고 맡은 일에 충실한다 이건 돈이 안 들어올 수가 없지요. 돈이 들어오지요. 이렇게 선악체제를 지탱해야 되고 이걸 붙잡고 있어야 돼요. 그런데 복음은 생명체제가 이 선악체계를 제거해요. 파괴시켜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13절 한번 봅시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지금 13절에서 선생님 하고 예수님을 찾는 이 사람은 선악체제 가운데서 형은 악한 쪽에 속하고 나는 상대적으로 선한 쪽, 다른 말로 하면 악 때문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 입장에서 지금 상담하러 온 거에요. 호소하러 온 겁니다.
‘이 사회의 정의가 죽었어!’ 이 사회의 악이 활개 치는 것을 개탄하는 사람이에요. 아주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그 선하다고 소문난 그 예수님에게 나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 자체는 이거는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닌 것을 확신하고 찾아온 거에요. 주님의 선한 것과 내가 선을 행하는 나의 마음과 같은 방향이라고 자부했던 겁니다.
예수님한테 욕을 들을 짓은 아니라고 이렇게 확신했건만 14절에서 지금 주님은 누굴 나무래고 있습니까? 자기에게 상담하러 온 그 사람을 가족 때문에 문제 있어서 해결하러 온 그 피해 입은 자, 피해자를 호되게 지금 꾸중하고 있지요. 억울함을 품고 온 사람을 되려 나무래고 있단 말이죠. 나무래는 이유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15절에 나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ㅁㅁ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그 네모가 뭡니까? 인간의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자, 이 찾아온 동생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걸 한번 생각해봅시다. 동생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이제부터 좀 난해합니다. 난해해도 할 수 없어요. 여러분들이 수준이 되니까 감당해야 돼요.
동생의 문제점은 사람하고 상대했다. 사람하고 상대한 거에요. 자아의 특징은 사람하고 상대한다는 것. 사람하고 상대합니다. 자, 그러면 제가 어렵게 한다 했으니까 어렵게 하겠습니다. 자아가 이것이 ‘나’가 최종적인 겁니까? 어떻습니까? 자아가 최종적인 거에요? 내가 처음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좀 어렵더라도 그냥 들어놓으세요.
원자 구조에서 여기 핵이 있고 주변에 전자가 있습니다. 있는데 핵과 전자 사이에 여기 원자가 축구장 면적이라면 핵은 모래 알갱이 하나에요. 그럼 그 중간에는 텅텅 비어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원자로 되어있잖아요. 원자로 되어있는데 세상에는 왜 꽉 차있는 걸로 보입니까? 텅텅 비어있는데 꽉 차있는 걸로 보이는 이유는 뭐냐?
무슨 말이냐 하면은요 제가 어렵다고 분명히 언급을 했어요. 내가 여기 있고 만약 어떤 상가 집이 여기 있는데 여기가 한 20km떨어져 있다. 상가집이 여기 있다. 그런데 내 꿈속에 여기 20km 떨어진 상가집 무시하고 같이 있다. 이건 꿈이니까 그럴 수 있지요. 실제로는 안되지요. 한참 가야 되잖아요. 상가집 아닌 곳. 상가집 아닌 곳, 상가 집 아닌곳.
중간에는 관계없는 게 있어야 되는데 실제로 원자에서는 전자하고 핵 사이에 이만큼 떨어져 있는데 20km 정도가 아니에요. 더 떨어져 있는데도 이 세상은 왜 가득 차 보이느냐? 이걸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전자는 마이너스고 핵은 플러스 양전자로 되어 있어요. 플러스로 되어있어요. 이것 가지고는 설명이 안돼요.
여기서 뭐냐 하면은 빛이라는 게 있어요. 빛이 1870년에 맥스웰이라는 사람으로 빛이 파동으로 되어있다. 파동으로. 파동으로 되어있다는 말은 아주 쉽게 생각해서 빛이 가는 곳에 전기와 파동이 이렇게 수직으로 또는 수평으로 이런 식으로 같이 이렇게 흐르고 있습니다. 파동이 있으니까 어떤 물질은 원자로 되어있거든요. 촘촘한 원자의 배열로 되어있다.
여기에 뭐가 오느냐 하면은 빛이 비취게 되게 되면 이 빛의 파동이 플러스 마이너스 되어있는 이 전자구조 속에 들어와 버려요. 들어와 버리면 전자와 빛이 만나면서 가만있겠습니까? 작용을 하겠어요? 작용을 하겠지요. 그러면 이 빈자리가 뭐냐 하면은 에너지 파동으로 가득 차게 되는 거에요.
빛의 에너지 파동이 뭐냐? 색깔입니다. 색깔. 전부 다 색깔이에요. 나뭇잎을 떼 가지고 보게 되면 핵하고 전자하고 멀어도 우리 보기에는 그 빈공간이 파란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게 빛이 산란되어서 가득 차 있는 거에요. 빛은 빛으로 하지 않고 마주침으로 말미암아 증폭되고 상쇄되고 파동이니까. 증폭되고 상쇄돼가지고 이것이 이런 눈에 보이는 것, 우리 눈에도 빛이 들어오고 눈에도 그 파동을 받아서 그런 모습으로 되는 거에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에는 뭐가 없는 거에요? 물질이라는 건 없고 에너지의 파동의 장, 전체는 핵과 전자 또는 플러스, 마이너스의 에너지의 필드, 에너지의 장이 이 세상이 되는 거죠. 이걸 힘의 장, 힘의 영역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자아에 적용시켜 봅시다. 자아에게.
우선 성경을 모르는 사람 두 사람을 제시하겠습니다. 실존 인물이에요. 네비나스, 라캉. 두 사람의 의견이 둘 다 공통점이 뭐냐? ‘자아가 어디서 나오느냐’ 자아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연구한 사람이에요. 보통 옛날에는 ‘내가 있고’ 시작하잖아요. 이 사람은 더 깊이 들어간 거에요.
‘내가 있고’ 라고 하지 말고 나는 육신 아닙니다. 육신은 DNA에서 나왔기 때문에 육신 말고 나, ‘나’라는 의식은 어디서 나왔느냐. 이거 따지는 사람이에요. ‘나’라는 의식. 이걸 따져야 육신 죽고 난 뒤에 나는 살아 있는가 그 문제도 해결되기 때문에 나에 관한 거에요. 나. 자아에 대해서. 육신 말고 자아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거에요. 자아가. 옛날에는 이걸 생각 안했어요. 내가 있다고 생각했지 내가 어디서 나왔느냐를 몰라요.
우선 라캉이라는 사람. 라캉은 ‘타인이 있어서 내가 있다’ 타인이 있어서 내가 있다 하는 거에요. ‘타인’. 타인은 누구냐 하면은 엄마부터 해서 가까운 가족. 가족이 있는데 처음에는 나는 없고 가족에 포함이 되어있어요. 신생아들. 신생아는 ‘나’가 없어요. 엄마 몸과 자기 몸과 지금 분리가 안 된 상태에요. 분리가 안 된 상태입니다.
안되다가 라캉이라는 사람이 뭐냐 하면은 거울을 보면서 어느날 유모차에 앉아있던 아이가 좀 커가면서 거울을 보면서 거울에 있는 내가 ‘나’라고 안다는 거에요. 이걸 어떻게 자아가 아느냐 하면은 동물에게 실험해보면 동물은 이걸 몰라요. 동물에게는 자아가 없어요. 그냥 육신이 있을 뿐이지 자아는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이걸 여기 비치는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나’라고 생각하니까 육신이 뭐로 변하느냐 하면은 나로 변해요. 육신이 있는 건 맞는데 나는 일방적입니다. 내가 나를 대상으로 보는 순간 이미 자아가 생긴 거에요. 나를. 거울 앞에 비친 것이 저것이 내 모습이다 하는 순간 여기에 ‘나’가 같이 동반해서 같이 생겨버린 거에요.
그래서 그 전까지는 엄마가 시장에 간다 그럼 엄마가 시장에 가면 내가 없어져요. 이런 시기부터는 엄마가 시장 가도 나는 여기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거에요. 내가 나를 있다고 보는 거에요. 내가 나를 대상화하는 시기가 왔다는, 내가 나를 대상하는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독립되는 거에요. 엄마로부터의 독립이에요. 엄마로부터 독립.
여기에 대해서 반박하거나 이의 걸 사람 있습니까? 철학자들은 논리적으로 철저함을 기해서 반박이나 논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 쪽에서는 치열하게 그 논리싸움을 하고 있는 거에요. 치열하게. 지금 육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살덩어리 말하는 게 아니고 ‘나’가 어디서 나왔는가? 나는 인간의 어릴 때부터 ‘나’가 없을 때 있었고 없었다가 크면 있게 되는데 그 있다가 없었다가 있게 된 그 계기가 뭐냐?
그거는 거울이 왜 등장하느냐 하면은 거울 없이는 내가 안 비취니까. 거울 기능이 없으면 나를 나 자신을 대상화할 수가 없어요. 거울 속에 나는 내가 아니거든요. 내 육신이 아니잖아요. 비친 이미지잖아요. 이미지. 이미지는 거기 거울 속에 내가 있습니까? 비췰 뿐이지 내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뭐다? 나는 허상이다 이 말입니다. 의식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육신은 여기 있는데 따로 놀고 있는 거에요.
어렵기도 하지만 당연하지요. 우리는 왜 그걸 생각 못했을까? 너무나 당연하게 했기 때문에 생각을 못한 거에요. 이 생각 하나 안 하나 사는데 지장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걸 왜 따지느냐 하면은 이 정신병 때문에 그런 거에요. 정신병. 정신병이 뭐냐 하면은 그 나는 내가 대상화되지요. 그 대상화 되면서 나는 대상 없이는 나는 규정이 안 됩니다.
그 다음부터 나를 내가 생각하는 거 말고 내가 생각하는 나 말고 다른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그때 그때 다른 거에요. 그때 그때 달라지는 겁니다. 아버지가 되가지고 비트코인 그거 돈 하나도 못 벌고 돈 이천만원 날려가지고 우리 가정 어떻게 사는데! 이렇게 나오니까 아버지가 뭐랬습니까? 가자! 너 한 달간 학교 못 간다 하잖아요. 아우디 타고 물론 아우디 그것도 빌린 거지만. 완도 가자. 내 인생 조져놨다고 같이 죽자. 아버지 죽으면 저 죽겠습니다. 당신 죽으면 같이 죽을께. 이게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에요 지금.
육신이 다르잖아요. 육신이. 지금 육신이 다르다고요. 꿈도 다 달라요. 다 다른데 그 식구는 한꺼번에 차 타가지고 자살하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남편 없는 나는 없고요 자식 없는 나는 없고 아빠 없는 나는 없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타인이 나를 규정할 때 그게 나라고 내가 이미 그렇게 젖어버린 거에요. 혜은이가 한 말 있잖아요. ‘그대 없이는 못 살아.’ 그대 없이는 못 산다는 거에요. 그대 없이는.
이게 왜 중요하느냐 하면은 저는 예수님 없이는 못 살아 그게 진짜 복음이냐. 우리가 주님을 대신 할 텐데 아직도 주님이 우리를 대신 한다고 우기고 있단 말이죠. 이제는 주님은 우리의 심판받을 자로 저주받을 자로 다 까발렸으면 더 이상 나한테 기대를 걸지 않아야 되는데 제대로 된 타자가 주님 아닙니까. 주님이 말하기를 진실을 이야기했어요.
너는 이 땅에 태어난 그 자체가 선악체계 자체가 너는 저주야. 이건 하나님의 일관된 거야. 변동이 없어. 죽어 인간아. 같이 죽을래? 그런 이야기가 그런 시선이 왔다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 성경에 보니까 대신 치뤘다는 거에요. 네 자아 대신 내가 네 자아 되서 아버지 앞에 나섰다는 겁니다. 그게 주님의 이름이잖아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 다음에 뭡니까? “구원을 얻으리라.” 그게 진실입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악마가 작동하고 있는 거에요. 계속 작동하고 있는 거에요. 타인이여 이제부터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게 체면이라고 이걸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우사스럽다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 빚지고는 못 살겠다. 누가 그랬는데? 남들이 나를 잘해주면 나는 살고 남들이 나를 우습게 보면 내 안에 있는 타인의 욕망으로 인하여 나는 더 이상 그 타인의 욕망에 부합되지 않으면 난 자살할거야.
그래서 하루에 38명이 자살한답니다. 한국에. 1등 했어요. OECD에서. 선진국에서 1등 했습니다 자살율. 옛날에는 40등 했는데. 교회? 교회는 뭐가 있어요? 타인들의 눈이 있지요. ‘나’가 있으니까 피 앞에서 죄인으로 부름 받는 것이 성령의 역사인데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나’가 어디 갑니까? 공동체에 가요.
공동체에 가 가지고 내 신앙이 맞지요? 그래서 사람들 교회 생활해야 구원받는다는 거에요. 자기 자아성으로 맞지요. 그거 맞는 이야기죠. 악마가 가르치는 대로 맞는 이야기에요. 이게 라캉의 주장입니다. 누가 반박하겠어요. 맞는데. 그런데 네비나스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네비나스는 뭐냐 하면은 자아는 불면증부터 시작해요. ‘불면증’. 잠을 못 자는 자아.
네비나스가 불면증부터 시작해서 자아 넘어 에는 불면증이 있다. 불면증의 특징이 뭐냐? 자고 싶은데 잠을 못 자는 것. 내 육신을 내가 통제 못해요. 자고 싶은데 잠을 못 자요. 자야 되는 데 잠이 안와요. 자야 되는데. 내 육신은 내가 자야 된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육신 자체에서 균열이 생겼어요. 육신은 자라고 명령하는데 육신은 잠이 안와요. 어떡하면 좋겠어요?
육신은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인데. 내부적으로 균열되어 버렸어요. 내부적으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육신을 감당할 수 있는 다른 어떤 통제되는 어떤 게 없다는 게 밝혀졌지요. 여기서 불면증에서 뭐냐 하면은 몸을 눕힙니다. 네비나스는 유대인 철학자에요. 몸을 땅에 눕혀서 숙면 취합니다. 숙면 취할 때 잠을 잤잖아요. 이게 바로 자아입니다.
육신의 혼란을 그걸 우뚝 세우는 하나의 스스로 내 육신의 통제를 벗어난 따로이 성립된 통제수단. 이게 자아에요. 네비나스. 이게 자아입니다. 따라서 자아는 타자에 휘둘리는 게 아니고 내 육신적인 생물학적인 본심에서 자아가 나왔다고 하는 거에요. 둘 중에 어느 말이 맞습니까?
10분 쉬고 이야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