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강-미가 7장 5-6절(주님의 가족)220622-이 근호 목사
24강-미가 7장 5-6절(주님의 가족)2206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7장 5-6절까지입니다.
미가 7:5-6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찌어다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하나님의 재앙이 어디까지 파급이 되느냐 하면, 사회적인 모든 관계에까지 다 파고들어 옵니다. 그래서 전에는 서로 의지하고 믿고 살았던 그 이웃 관계도 찢어집니다. 친구 마음의 벗, 마음의 의지가 되는 친구도 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면 믿지 말라, 의지하지 말라, 이웃을 믿지 말고 친구를 의지하지 말라, 쥐포 째듯이 하나님께서는 족족 인간과 인간관계를 다 찢어버립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왜 주님은 이스라엘을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도록 그렇게 구박을 하는지 상당히 의문점을 나타낼 수밖에 없지요. 친구를 의지하지 않고 이웃을 믿지 않을 때 인간들은 최후의 보루로 어디로 도피하느냐 하면, 가족, 가정에 도피합니다. 가정으로 가는 겁니다. 자기 집안으로 가지요.
그런데 여기 6절에 보면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는데 아비가 아들을 바라보면서 가정에서 편히쉴 수가 없겠지요. 아버지가 퇴근해서 왔는데 아들이 “아버지, 잘 만났습니다. 나한테 오늘 한번 멸시받아 보세요.” 단란해야 할 그 가정의 밤 시간이 아들로부터 멸시받는 시간으로 긴긴밤을 보낸다면 그게 가정이 마음의 휴식처 최후의 안식처가 되지 못하겠지요.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자기 어머니가 살림을 하고 있는데 딸이 바깥에서 부엌칼을 사 들고 와서 어머니를 겨냥한다면 그 가정이 진정 유일하게 휴식처가 될 수 있겠는가? 될 수 없지요. 그다음에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며”, 하나의 가문의 전통을 전수 받아야 될 며느리가 시어머니하고 원수 관계가 되는 겁니다.
“내가 이 떡볶이의 비법을 다른 집은 며느리도 안 가르쳐 주는데 나는 며느리 너에게 가르쳐줄 게.” 그러니까 며느리가 하는 말이 “어머니의 떡볶이 비법은 저에게 안 가르쳐 줘도 됩니다. 저는 어머니 가게 맞은편에서 가게 내서 싸울 거예요.” 이렇게 나오면 도대체 그 가정구성원들이 마지막으로 마음 둘 자리를 완전히 박탈 당하는 겁니다. 쉼이 없어요. 마음의 쉼이.
이웃이 적이 된다는 그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이 세상 믿을 것은 가족밖에 없다는 것이 철칙으로, 진리로 여기고 사회에서 구박받은 것, 설움 당하는 것 가정의 단란함 속에서 어떤 회복, 다시 마음의 회복을 얻고자 가정으로 찾아왔는데 이 가정에 더 큰 원수들이 도사리고 서로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거릴 때 도대체 이스라엘 사람들은 희망이라는 것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주신 재앙이지요. 마지막 은신처마저 하나님께서는 작살 내고 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하나님께서 괜히 겁주려고, 회개하라고 그냥 큰소리 쳐보는 것이겠지. 실제로 이렇게 될 리가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왜? ‘하나님의 마음은 너그럽고 죄를 짓더라도 자비하심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돌아오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단란한 가정 보장해주고 아름다운 사회 하나님께서 유지하도록 해 줄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엄청난 오산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부터 보게 되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예수님이 이 땅에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그 뒤에 말을 하나 넣는다면 “따라서” 또는 “그러하기에” 그 말을 집어넣으면서 37-39절,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이스라엘에게 예고한 그 재앙, 그 재앙은 빈말이 아니고 실제로 이루어지고 그 재앙이 이스라엘부터 시작해서 전 인류에게 전부 다 파급되는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계획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간단해요. 망하면 됩니다. 처절하게 망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잡으면 되는 겁니다.
학교에서 “너희 집 가훈이 있을 것인데 가훈이 뭐냐?” 묻거든 세자 정도, 또는 네자 정도로 적당합니다. 세자로 하면 “망하자” 네 자로 하면 “같이 죽자” 이것은 가훈을 그렇게 정하나 안정하나, 하나님이 재앙을 그렇게 내리나 안 내리나 상관없이 우리의 평소의 일상의 삶속에서 우리가 자꾸 속일 수 없는 본심은 자신을 견뎌내기에,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견뎌내는데 우리가 참 힘들어한다는 겁니다. 하루하루 살면서.
분명히 내 몸은 내 몸인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내 몸, 밥을 먹으면 배부르다는 것을 뻔히 알지만, 밥을 먹고 맛있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지만 한 달간 밥 해주니까 애들도 잘 안 먹어요. “에이, 맛없다.” 진짜 집에서 실습하고 실험해 본 겁니다. “쌀밥이 너무 맛있어요.” 한 게 한 달 전인데 그다음부터 애들이 쌀밥이 맛없다는 겁니다.
애들도 그런데 왜 우리는 내 몸을 철석같이 내 관리하에 있는 내 것이라고 우기면서도 그 내 것을 내가 왜 감당해 내지를 못하느냐, 버텨내지를 못하느냐?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언질을 주셨어요. 그 해답을 수시로 제공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유월절입니다.
죽음의 천사가 와서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들을 다 죽일 때 이미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 이미 확정된 겁니다. 어제 강남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인간은 살려고 하는 게 욕심이었습니다. 살려고 하는 게 자기 인생을 뭔가 잘못 보고 있기 때문에 자꾸 살려고 하는 거예요. 살지 못하는 식으로 주께서는 이끄는데 우리는 그 주님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하면서 억지스럽게 자꾸 살려고 합니다.
살려고 하니까 살다 보면 힘들잖아요. 힘드니까 맨날 생각하는 게 이래요. ‘내가 나를 지킬 대비책이 허술했나? 정기적으로 기도하는데 출장 간다고 두 번 빼먹었다고 이런 재앙이 왔어? 하루에 성경 3장 읽는데 바빠서 한 장 읽었더니만 하나님께서 나를 채찍으로 치시는구나. 앞으로는 더 철저한 대비책으로 나를 지켜내야지.’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살아가는 사고 방향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망하는 인생 왜 망하냐? 어떤 식으로 망하냐?’ 그렇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주님이 나를 바라보는 안목의 방향과 동일한 방향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바깥에서 무슨 문제가 있으면 어디를 도피처로 삼느냐? 자기 가정으로 도망칩니다. 그 가정으로 도망치면서 ‘하나님께서는 양심이 있으면 인간으로서의 최후의 숨 쉴 공간, 그냥 약하나마 숨 쉴 수 있는 공간, 이 가정만큼은 하나님께서 습격하지 않겠지. 지켜주시겠지.’ 자기 맘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와 같은 생각은 가정구성원들이 똑같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살아오면서 가족끼리 어떤 본능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가족 단위의 가치를 최후로 지켜내는 것이 가족으로서의 당연한 의무고 임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회사 사장이라는 것은 아는데 “사업차로 이래저래 바쁘다고 어릴 때 내가 공부하는 것 몇 번이나 돌봐줬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아무리 바깥에서 아버지가 명망이 있고 존경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정구성원의 기본도리는 해야 되지 않습니까? 돈만 벌어주면 그게 아버지입니까?”
다른 애들은 아버지하고 같이 놀러 갔다, 아버지하고 캠핑 갔다, 그런 소리라도 들으면 ‘우리 아버지는 모하시노?’ 막 이런 생각 들거든요. 자식들도 철이 없어요. 그런 소리 한다는 것은 이미 배부르다는 뜻이거든요. 돈 많이 벌어주니 그다음, 계속 그다음, 그다음을 요구하는 겁니다.
가족 구성원이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가족이라는 자체가 철통같은 보안체계가 형성되어 있어요. 그게 가족애입니다. 최후의 마지노선을 형성해요. 가족 내에는 세상이 어떻게 되더라도 이 가족 품 안에서는 일치단결해서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 된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나오는 그러한 본심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그게 진리라는 게 어디 나옵니까? 안 나와요.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도 그렇고 오늘 본문도 그렇잖아요. 마지막 피난처, 가족만큼은 가족끼리 있어야 이게 사람답게 사는 최후의 모습이라 이렇게 버티고 싶은데 주님의 재앙은 하늘에서 구름 타고 오는 그때도 재앙이지만 이미 재앙은 시작되었습니다.
재앙은 어떠냐? 사회적인 실용성 속에서, 일상성 속에서 주님이 겨냥해서 재앙을 내려요. 사회를 삭막한 사회로 만드는 것 자체가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는 중입니다. 활동 중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사회의 각박함과 그 서러움과 사회에서 도태되는, 낙오하는 그 아픔에서 최후로 어디로 도망하느냐? 가족으로 도망해서 가족끼리는 서로 위로하려고 자기의 본때를,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주님께서 몰아넣은 거예요.
‘자, 보자, 보자. 너의 본색까지 다 드러내야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마지막 피난처는 가족애지. 철통같은 가족애.’ 그 안에 다 들어가는 거예요. ‘다 들어갔지?’ 다들 사회에서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가족만큼은 전부 다 한자리에서 “즐거운 곳에서는~” 노래 부르면서 있다 이 말이지요. 그걸 딱 겨냥해서 마지막 러시아 미사일 날아갑니다.
마지막, 설마설마 최후의 원수가 자기 가족일 경우가 있을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희망마저 완전히, 가족애라는 희망마저, 가정의 화평과 안식처마저 주께서는 박살 냅니다. 그러면 더이상 인간들은 피할래야 피할 곳이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본색에 부합되고 합당한 모습이에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질게, 끝까지 가정까지 파괴 시켜 가면서 결국 어디에도 쉴 데가 없도록 그렇게 만드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요, 하나님 자신의 것을 인간이 더럽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그 제사가 인간을 지켜주기 위한 제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켜주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인간들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이 오염되고 더럽혔다고 해서 주어진 것이 제사법입니다.(에스라 9:11)
우리가 성경을 항상 내 중심으로 보니까, 내 죄를 씻는 데다 우선순위로 보니까 은혜롭다 하는데 우리는 은혜로울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레위기 4장 5절에서 7절에 보면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인간들 때문에 못 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더러워서 같이 못 있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 위주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자기 위주입니다. 이거 오해하시면 안 돼요. 왜 하나님은 자기 위주냐? 이걸 기본적으로 아셔야 돼요. 왜 하나님이 자기 위주냐?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인간은 없음이 기본이기 때문에, 없는 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없음이에요.
인간은 죽음이에요. 결국 인간은 살다가살다가, 살다가 죽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죽어야 되고, 죽는 것은 인간의 본래 인간 자리는 인간이 없는 그 자리가 인간의 본래 자리에요. 가정이, 인간들 생각에는 가정이 자기 마지막 자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산입니다. 없는 자리에요.
없는 인간이 등장한 것은 만드신 하나님을 위해서 등장했지 인간이 자기 행복을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우기면서, 교회 다니는 교인이라고 자처하면서 항상 평소에 버릇이 어떤 버릇이 있느냐 하면, 자신의 행복을 정조준해서 그것을 향하여 살아가고 있어요.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행복하면 참 기쁘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은 네 마음이고!” 그것은 지마음이거든요.
뻔히 아는 이야기해 봅시다. 창세기 1장을 생각해 봅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혼돈부터 출발했지요. 그러면 인간은 혼돈으로 돌아가야 돼요. 혼돈으로. 아까 쥐포 찢는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인간들끼리 모여서 어떤 모양을 인간의 행위와 노력으로 구성하면 안 돼요. 인간이 어떤 노력에 의해서, 구성해서, 인간들 생각입니다, 하나님 뜻이 아니고,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구성해서 만든 첫 모습이 뭐냐 하면, 가정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출생지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가정을 원하고 가정의 행복을 원하는 것은 본디, 본래 인간은 가정에서 출발했고, 탄생했고 그래서 어릴 때 사랑받던 그 가정을 못내 잊을 수가 없어요.
저는 이러한 생각을 실험을 해 봅니다. 가끔은. 포르투갈하고 우리나라하고 월드컵 우리나라에서 했을 때 박지성이 가슴으로 볼을 트래핑해서 떨어지는 볼을 골 앞에서 차 넣어서 골인되었거든요. 그때 만약에 운동장에 자기 어머니 아버지가 있고 또 감독인 히딩크가 있었다면 어딜 향하여 달려갔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딜 향하여 달려갔겠는가?
만약에 히딩크한테 달려가서 안겼다면 그 아버지 어머니가 박지성 쫓아냈습니다. “너는 아비도 어미도 없나?” 이렇게 돼요. 우리나라 유교의 제1계명이 뭐냐? “너는 어미 아비도 없나?”에요. “보이지 않는 신 찾지 말고 부모나 섬겨라.” 이게 유교 사회의 기본 모토입니다. 헌법 제1조와 같은 거예요. “내가 없으면 네가 없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가정으로 돌아오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가정마저 펑크 내버리는데요? 하나님의 재앙은 인간이 구성한 인간의 어떤 구성체도 주께서는 그걸 혼돈으로 환원시켜 버립니다. 되돌려버려요. 혼돈. 어떤 형체도 없는 거예요.
창세기 1장에서 첫째, 둘째, 셋째 날은 뭐냐 하면, 혼돈에서 형태를 만드는 날이에요. 넷째, 다섯째, 여섯째 날은 무슨 날이냐? 그 비어있는 형태에, 공허한 형태에 내용을 채우는 겁니다. 그런데 되면 모든 이 세상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채워준, 복 되라고 채워준 그 내용을 담지 아니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형태, 가정이라는 구성도 마땅히 혼돈으로 되돌아가야 돼요.
그 채워지는 게 뭐냐?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채우시는 그 채워짐이 뭐냐?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예요. 창세기 1장 26, 27절에서는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거예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이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예수님이십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14, 15) 따라서 모든 피조 세계는 예수님의 손길, 예수님의 창조성을 담고 있을 때만 피조물이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모양 있는 그것이 애초부터, 처음부터 모양이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애가 태어났다. 그러면 애가 태어나기 전에 어떤 모양, 어떤 구성이 있었는가? 아빠 엄마라는 구성이 주어졌지요. 아빠 엄마가 있고 애가 태어났으니까 이 아기는 먼저 구성된 아빠 엄마, 부모라는 가정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서 자식을 줬다고 이렇게 오해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아빠, 엄마, 자식, 자식이 결혼해서 며느리, 그 네 명을 원수로 만들어버려요. 원수로 만듭니다. 원수로 만든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상당히 어려운데요. 나 자신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타자, 타인, 남이지요. 타인의 안목에서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가 내가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확인될 수 있는, 내가 신임할 수 있는, 내가 수용될 수 있는 나의 진정한 모습이 됩니다.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학교에서 학생이 수학 문제 못 풀었다고 좀 맞았어요. 요새 는 때리는 게 없다 하지만 때려야 말을 듣지요. 때렸습니다. 그리고 선생님한테 모진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 공부 그렇게 못할 것 같으면 나가 죽어라.”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순진해서 집에 가기 전에 다리가 있는데 자신은 그 다리 밑으로 빠져 죽어야되는 존재인 줄 알고 순진하게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내가 죽어야 될지 아닐지는 일단은 선생님 말은 죽어야 된다는데 집에 가서 엄마 말도 들어보고 엄마도 죽으라고 하면 그땐 내가 죽겠다고 했어요.
엄마한테 가서 “선생님이 내가 수학 못 한다고 죽으라, 하는데 엄마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너같이 귀한 자식은 이 천하에 둘도 없다. 둘도 없다!” 그럴 때 그 아이는 내가 수용할만한 내 모습은 엄마의 의견을 따라서 내가 거기서 안식처를 얻습니다. 마음의 안식처.
사람은 언제 자살하느냐? 내가 원하는 답변을 해줄 수 있는 어떤 가까운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은 자살합니다. 내가 원하는 내가 듣고 싶은 그 말을. 그래야 그게 자아인데 내가 자아임을 증명해줄 그 주위에 어떤 사람도 없을 때 이것은 살아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뭐냐? 인간은 처음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일단 구성된 것, 일단 나타난 것, 요 제한된 작은 영역이나마, 가정이라는 작은 영역이나마 내가 스스로 질서를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질서를, 모양을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재앙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왜? 예수 그리스도가 빠졌기 때문에, 주님이 빠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점에 대해서 일체 양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리원칙이라는 게 있어요. 원리원칙도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원리원칙.
예수 그리스도를 품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것은 피조물 값도 못한다는 것을 이미 규정을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출생이 되었기 때문에 출생된 입장에서 가정에서 얻었던 그 행복을 사회생활 하면서 그 사랑과 칭찬과 그 행복을 가정을 벗어나서 이제는 사회적으로 많이 얻고자 해요.
얻어서, 그렇게 해서 자기중심의 새로운 구성체, 나 중심의, 크지는 않지만 나 중심의 작은 구성체로서 내가 숨 쉴만한 나만의 공간을 이렇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공간 그 구성원의 내용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아니고 누구냐? 바로 본인이 되는 거예요. 본인이 되면서 그것을, 세상의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이라도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열심히 세상을 살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참 세상 살기 힘들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세상 살기 힘들다. 친구한테 진심을 다했지만 그는 나에게 상처를 주네.’ “친구야, 너 도와줄게.” 해놓고는 나중에 뒤통수 쳐서 내 돈 홀랑 빼먹고 연락 끊어버리고. 그럴 때,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야, 내 몸이 내 몸이지만 참 이 세상 긴긴 인생 버텨내는 게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그때 그 마지막 말이 뭐냐? “모르겠다”입니다.
‘달고나’ 있지요. 설탕 넣고 소다 넣어 부풀려서 납작하게 만들잖아요. 눌러서 문양을 콱 찍습니다. 어릴 때 달고나 해보면 약점이 있어요. 달고나가 바닥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문양부터 해서 콘크리트 바닥에서 산산조각 나버리는 거예요.
이게 주님께서 원하는 바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구성한 모든 것들이, 어떤 형태가 달고나 시멘트 바닥에서 문양까지 다 산산 조각나서 깨지듯이 다 깨지기를 바래요. 그게 주의 뜻입니다.
그게 주의 뜻이라고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느냐, 여러분이 불만을 갖고 있다면 바로 창세기 2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버지가 아들을 친히 죽이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을 친히 죽이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너를 위한 가정, 너의 출생이 있었던 그 가정, 너를 태어나게 했던 그 가정, 나는 그 가정이라는 것을 돌파한다, 나는 그걸 용납하지 않겠다. 마지막 행복이라는 가정이 마지막 내가 숨쉴 수 있는 유일한 쉼터라고 생각하느냐?” 우리가 가정을 마지막 행복의 보루라고 생각한다면 무엇을 놓친 것이냐 하면, 본인은 용서받아야 될 존재라는 사실을 깜빡 한 거예요. 놓친 거예요.
어제 듣기로는 로켓 누리호가 고흥 우주센터 기지에서 발사됐답니다. 그런데 그게 우주 궤도에 안착했다는 겁니다. 누리호가 우주 궤도에 안착하면 용서받습니까? 사람들은 이걸 모르는 거예요. 사람들은, 뭘 해도 용서받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재앙을 내린다는 하나님의 원칙을 우리는 아주아주 무시를 하고 있어요. 용서받은 기쁨보다 내 인생이 행복 한데서 오는 기쁨을 용서의 기쁨보다 더 우선시하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백성이라면 주님께서는 용서의 기쁨을 가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의 기쁨을 사정없이 달고나처럼 박살 내시는 그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고마워해야 돼요. 아까 했잖아요. 인간은 자기 행복을 정조준하면서 살아간다고요. 자기 행복을 지켜내기 위해서 교회도 다니고 예수도 믿고 무슨 일이든 다 해요.
그러나 마지막 목적은 주님의 용서가 내 안에 있다는 기쁨보다도 나 자신이 행복하고 싶은 그 욕망이 더 강렬해요. 마지막 최후가 내가 안 부서지고 안 깨지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겁니다. 천국 가서 계속 살기를 원해요.
그러나 성경 히브리서 9장 11절에 보면 아주 냉혹하게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버리고 주님의 만든 자신이 모양을 만들고 질서를 갖춘 그 세계만 고집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장막을 챙기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께서 피를 흘리셨어요. 내 몸을 지키려고 피 흘린 게 아니고 주님의 장막을 지키기 위해서 피를 흘리신 거예요. 23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양이나 염소가 필요하다. 이것은 구약이지요. 그러나 모형에 의해서 한 제물은 애초부터 그게 정답이 아니었어요.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더 완전한, 모형이 아닌 진짜 주님이, 자신의 장막을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거기다 바쳤습니다. 우리의 스위트홈이 마지막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모형과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께서 명하지도 않은, 단지 출생했고 탄생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나는 내 가정이 최후로 진리의 내 안식처라고 여기는 것, 그것 주께서는 허락한 적 없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나라에 가고 싶어서 따라가려고 할 때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출생지와 주님의 오신 장소가 다르기 때문에 너는 오지 못한다고 했어요. 베드로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7-20절에 보게 되면,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세상은 알지도 못해요. 이런 사실을.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새로운 처소, 새로운 자리를 친히 주님께서 만드시고 거기서 주님이 우리의 내용물로 채워지는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져서 우리는 주님과 한 가족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 46-50절, 좀 길지만 염치불구하고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내 형제와 내 자매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져야지 기존에 너희들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나 자신의 것으로 가득 채워서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주님은 우리의 타인으로서 오셨어요. 먼저 주님께서 인간세계에 오셔서, 인간세계는 주님 보시기에 타인입니다, 타인의 세계에 오셨는데 튕겨 나갔어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튕겨 나갔어요.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예수님이라는 타자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질서를 구성해 줍니다. 기존의 우리를 모형과 그림자로 부숴버리시고, 없애버리시고, 죽여버리시고 예수님 자신의 요소로서 다시 새로운 창조를 성령을 통해서 하시는 겁니다. 이걸, 베드로와 열한 제자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그걸 해내신 거예요.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내가 살았다, 가 아니라 내 속에 예수님이 살고 있다는 거예요.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졌기에 주님이 나를 떠나지 않는 방식으로 내 창조 안에 주님이 들어있는 방식, 이것이 바로 진정 혼돈에서 복된 하나님의 창조의 최종 목적에 부합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주님의 피로 용서를 받지요. 이 용서받은 기쁨이 우리가 원하는 우리 가정의 행복, 나의 행복 그것보다 더 우선돼야 돼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희한한 안경을 쓰면 내가 원하는 세계가 펼쳐질까, 또 어떤 사람은 내 몸에 뭔가 부착을 하게 되면 뾰로롱 해서 내가 원하는 세계가 펼쳐질까, 또 어떤 사람은 어떤 신기한 알약을 먹으면 내가 원하는 세상이 펼쳐질까?
왜 그래야 됩니까? 이미 그 심보 자체가 글러 먹은 거예요. 내가 원하는 세계를 왜 펼치려 합니까? 어떤 안경이나, 몸에 부착하는 것이나, 알약을 먹으면 그렇게 된다고 할 때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혹은 교회 다니기 때문에 막 비웃지요. 저런 미신이……, 이렇게 막 비웃는다고요.
그러면 한 가지 더 보태겠습니다. ‘어떤 주문을 외우면 내가 원하는 세계가 펼쳐질까?’ 주문. 천주교는 떡과 살, 기독교는 주기도문 외우기, 어떤 문장 외우기, 예배당 앞자리에 않기. 자동적으로 은혜가 되는 자리, 이거 주문 아닙니까?
어떤 안경을 쓰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그것은 미신이고, 그것은 미신이라고 욕하면서 왜 우리는 스스로 미신을 원합니까? 어떤 미신이라도 좋으니 어떤 능력자를 왜 원합니까? 그것은 주님 원하고 좋아하는 게 아니고 내가 원하는 세계를 펼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내가 원하는 기쁨, 이것은 무로 돌아간 상태도 아니고요, 우리가 죽음으로 돌아간 상태도 아니에요. 여전히 자기의 욕구와 욕망에 차 있습니다.
자기의 가족, 우리 가족은 행복합니다, 우리 가족은 참 다행스럽습니다, 이런 것, 나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정에 오면 마음이 편합니다, 그런 것 자랑하지 마시고요, 혹시 여러분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서 하나님 용서에서 제외되어 가지고 지옥 가는 그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는 그런 가족이나 친척이 있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 주변에서 발견하는 주님의 재앙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나 좋게 여기지 말게 하시고 지금도 일하고 있는 주님의 재앙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지를 이제는 눈을 열고 깨달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