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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강남-누가복음 11장 42절 (율법의 공격성) 220607b-이근호 목사자유게시판누가복음

강남-누가복음 11장 42절 (율법의 공격성) 220607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행한다는 것은 말씀이 증거 될 때만 하나님이 행함으로 인정해주는 겁니다. 말씀이 증거 되는 방법은 말씀을 지키는 것도 말씀의 행함이고요 말씀을 안 지켰다고 지적하는 것도 행함에 속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율법의 기능은 축복과 저주 두 개 다 있어요. 행하면 복이고 안 행하면 저주죠.

그 율법을 행함이 율법을 아는 쪽을 저주하는 바탕이 되고 이유가 되고 근거가 되는 겁니다. “율법을 행하라고 줬는데 왜 안 행했어” 할 때 저주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필히 율법이 다가오게 되어있어요. 인간의 주체는 율법에 다 놀아나는 겁니다. 추궁당하고 궁지에 몰리는 거에요.

그걸 로마서에서는 인간의 율법 없는 인간에게는 양심이 율법 기능을 한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 율법의 마지막은 로마서 2장에 보면 “진노의 날”이에요.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선택한다 하지만 항상 인간의 모든 선택은 극단적 선택입니다. ‘극단적 선택’.

주님께서 어떻게 몰아넣느냐 하면은 포카 할 때 카드가 몇 장입니까? 장 수가. 여러분 잘 모르는 카드 말고 화투로 합시다. 화투는 48장이잖아요. 48장 가지고 너 카드 어느 것 할래 이러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몰아넣는 것은 마지막 카드를 한 장만 남기고 너 어느 것 선택할래 이렇게 이야기해요. 선택할 다른 대안이 만들어 놓고 결국 그걸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 주께서 궁지에 몰아넣는 방법이에요. 인생을 그렇게 몰아넣습니다. 율법이 그렇게 몰아넣어요. 율법이.

그래서 인간은 어쨌든 간에 나에게 양심이라는 것, 이방인에게는 양심이고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죠. 율법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을 어떻게 기피하기 위해서 자기는 많은 선택 중에 자기가 하나 택했다는 쪽으로 자기를 그런 식으로 증명하려고 애씁니다.

예를 들어서 만약에 어떤 카페가 있는데 남자가 앉아있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저 사람 저래 보여도 대단한 사람이야. 세상에 있는 팔천고지 십사자봉을 다 정복한 사람이다. 만약에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래서? 거기 왜 기어 올라가는데? 왜 기어 올라가요? 본인의 선택이야. 본인의 선택이 아니고 복을 피하는 방식이에요 그게. 율법을 피하는 방식이 산에 기어 올라가는 거에요.

어떤 직업을 가져도 율법과 십자가 들이대면 도망 다 가버려요. 나는 율법과 복음은 모르지만 나는 성공했노라고 자랑스럽다. 그거는 율법을 피하는 행위입니다. 곧 율법의 행위에요. 율법을 피해서 천리만길 도망치는 자기의 양심의 책망을 피해서 그걸 덮기 위해서 다른 걸로 성공하는 것을 아까 이야기한 본디오 빌라도가 세숫대야에 손 씻는 행위에요.

나 일류에 기여했잖아! 이런 거에요. 일류에 기여했잖아요. 크게 봉사했잖아. 내가 삼성 재벌이여서 수십만 명을 가족들을 먹여 살렸잖아. 내 밑에 취직해서 월급 받고 다 먹여 살렸잖아. 이 정도 했으면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든 하나님이든 아이고 훌륭하다 대단하다 네가 먹여 살렸구나 해가지고 설마 지옥에 보내겠어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자기 이건희 아버지 죽을 때 신부 불러가지고 하나님 있나.

십일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41절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의와 신과 인이 있으면 반드시 저것을 손 봐야 한다는 겁니다.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 화 있을진저 화. 저주가 왜 그들에게 주어져야 되는가? 율법이 손 보기 때문에 그래요.

십일조 하는 자는 자진해서 기름 짊어지고 불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타 죽어라. 저주의 불이 타 죽을려면 십일조 해. 의와 신이 있는데 뭐 때문에 십일조를 해요. 심보가 아주 더러운 심보에요. 더러운 심보. 화가 나요.

오빠가 서울에 가가지고 오빠 올 때 뭐 사옵니까? 오빠 생각 왜 하는 거에요? 오빠 올 때 뭐 사옵니까? 비단구두 사오지요. 비단구두 사왔으면 자기는 허름한 짚신 갖다버려야 될게 아닙니까. 이 비단구두를 갖다버려 버리는 거에요. 비단구두를. 그럼 비단구두가 가만히 있습니까? 오늘 손 보자. 오늘 좀 맞자,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그 뜻이 뭐냐? 행하는데 저들을 방치하지 말라. 용서하지 말라 하는 것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원 뜻이에요. 이것 저것이라는 뜻은 원래 원어에 보면 이것 저것이 아니고 이것들과 저것들이라고 했어요. 이것들은 뭐냐? 의와 신과 인이고 저것들은 뭐냐? 박하와 근채 십일조 행위 그 마음을 저것들로 한 거에요.

그래서 이것들 했으면 완료가 완료다우면 미완료에 대해서 시비 걸어라 이 말입니다. 누가 누구한테 시비 건다? 정말 주님의 완료된 주님의 의가 들어왔으면 시비 대상이 누구에요? 본인이 시비 대상인거에요. 너 좀 맞자. 십자가로 의가 됐는데 너는 왜 십일조 해서 새삼스럽게 있는 의에 추가해서 의 하나 더 보탤려고 이러한 비 복음적인 행동을 하느냐? 너 저주 받아도 마땅하다 됐냐 이런 식인 거에요.

그래서 작은 권력이라는 p126부터 p130까지 십일조에 대해서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를 작은 권력이라는 제가 쓴 책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작은 권력, 집에서 한 권 씩은 다 있지요? 여기 보게 되게 되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것들을 행하고 저것들을 그냥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고가 아니라 이것들을 행했다면 필히 저것들이 저렇게 행하는 것이 마땅하냐고 물음을 던지는 거에요. 의와 신과 인이 완성됐는데. 십일조가 완성 됐거든요. 됐다면 어떻게 완성의 그 가치를 모독할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것들 자체만으로 완성되었기에 그래서 저것들은 용납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에요. 하지 말라가 아니라 우리는 육신이 있어가지고 육신은 자기 안에 그 법을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왜? 우리에게는 선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율법이 가만 있어도 율법이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뭐든지 행하게 되어있다고요. 행하라 해서 행하는 게 아니고 자동적으로 행하게 되어있어요. 그 행함을 네가 주시해봐라 이 말이죠.

129p 보면 의와 신과 인을 마음으로 표현하지 않고 행함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이미 바리새인들이 자기들 십일조 행함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구현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회향과 박하와 채소의 십일조를 행함으로서 그걸로 그들은 율법의 십일조가 더 이상 남김 없이 완성됐다고 여기는 거에요. 완성됐다고 여기는 거에요.

완성됨으로 여겼다면 주님의 말씀하신 의와 인과 신은 필요치 않아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떠미는 겁니다. 가슴팍을 떠미는 거에요. “저리 가” 라고 떠미는 거에요. 그게 십일조 행함이에요. 내가 십일조 행한 나에게 나를 찬미하고 흐뭇해하고 장하다 여기면서 이 정도 하면 됐지요 하나님 앞에 자기 율법의 지킴으로서 그 십일조 지킴으로 나가고자 하는 그 길을 주님이 “여기 잠깐, 검문이 있겠습니다” 하고 막아서는 거에요.

“십일조 율법 어떻게 한다고요?” 하고 시비조로 나오는 거에요.. 시비조가 아니죠. 아예 “화 있을진저.” “저주 받아라 인간들아.” “의와 신과 인 그게 십일조의 완성이야.” 십일조의 완성이란 예수님의 행하심. 예수님의 일하심 이게 십일조입니다. 예수님의 일하심.

예수님의 일하심이 성도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의와 신과 인이 춤을 추지요. 성도 안에서요. 춤을 춥니다. 제가 주일학교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술 먹는 인간은 자기가 술 먹는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술이 인간을 먹어버립니다. 그걸 술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도는 예수님 꾼이 되는데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주님이 안에 차지해버렸어요. 차 주인이 바뀌었어요. 차지해버리니까. 성도는 뭐냐? 예수님을 운반하는 술잔처럼 주님의 잔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노래 안부를 수가 없었어요. ‘찰랑 찰랑~~~찰랑대는’

성도는 주님의 의가 찰랑되는 자리에요. 좀 더 찰랑되면 막 넘치겠지요. 넘쳐도 괜찮아요. 또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괜찮아요. 술 잔 특징이 유리로 되어있기 때문에 투명합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이 있어야 돼요. 용서하심이 될려면 반드시 내가 무엇을 행해도 죄가 돼야 돼요. 죄 더 지으라는 말이 아니고 뭘 해도 이게 바리새인이 돼야 돼요.

율법을 내가 양심껏 행했던 것에 대해서 자신이 흐뭇해하는 것, 그 모습이 주님의 의와 신과 인이 들어와버리면 십자가 들어와버리면 이게 바로 죄구나. 나는 나로 인하여 내 행함으로 인하여 주의 행함을 모독하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화 있을진저”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바리새인만 욕 얻어먹을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욕 얻어먹는 거지요.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이 왜 욕을 얻어먹는가?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표상적 대표자라고 합니다. ‘표상적 대표자’.

어떤 모집단이 있는데 거기서 하나를 발췌해버릴 때 그 집단의 주체가 됩니다. S1 되고 나머지는 뭐가 되느냐. S1 바라보면서 자기는 뒤로 빠지잖아요. 자기가 대표자가 아니니까. 이거를 S2라고 해요. S2에는 뭐가 있는냐. 반드시 여기에 결여가 있고요.

결여, 모자람이 있고 이 모자람을 인간들은 견딜 수 없어서 내 흠집이 뭔가 텅 빈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이걸 뭘로 채우느냐 하면은 나의 이상향으로 이상적 인물로 채웁니다. 그 인물의 후보감에 부처, 예수, 하나님, 여호와 다 들어있어요. 나의 결여,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 이름을 도입해서 그걸 마저 채우는 거에요.

그래서 S1, 표상적 대표자와 일치시킬려 합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인데 이게 인간의 한계거든요. 한계인데 주님께서 인간의 한계로 누구를 뽑느냐? 바리새인을 뽑아서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바리새인하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누가 예수님을 죽이는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죽여요. 왜? 그들은 언어가 있으니까. 무슨 언어? 율법이라는 언어로 그들은 자기의 결여, 모자람을 율법으로 채우는 겁니다.

모세가 직접 하나님과 독대해서 말씀을 받았던 그 율법을 자신의 완전의 완전성, 온전함. 자신의 온전함을 율법을 가지고 온전함에 턱걸이하는 거에요. 주님은 온전함을 위해서 얼마나 고통을 많이 겪었던가. 그 가사가 생각나네. 이미 의와 신과 인은 완료에요. 완료. 완료가 완료 될려면 미완료를 살펴야 돼요. 미완료.

내속에 미완료가 어떤 어떤 것이 있었기에 주님의 행하심만이 율법의 십일조, 율법의 완성이 되는지를. 그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기 전에 항상 하라, 뭘 하라고 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해줘야 내 식대로 내 결여, 내 모자람을 채울려는 육신적인 그러한 노력이 들통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그 자기 주체는 자기 주인공은 자기 모자람을 늘 알고 모자람을 늘 채울려고 하지요. 그래서 교회가 꼭 주유소 같아요. 오늘도 기름 넣으러 가자. 기름 넣어서 뭐할 건데? 돌아서면 다 빵꾸나서 다 샐 건데. 오늘도 복음으로 에너지 한번 채워보자. 전부 채워가지고 누구 좋아라고 채우는 겁니까?

우리가 결여를 느끼는 것은 우리 연료통이 아직 빵꾸가 난 걸 몰라서 그래요. 아예 고장난 거에요. 아예. 그래서 세리와 창기가 먼저 천국 가는 거에요. 세리와 창기는 압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해도 내 빵꾸난 것을 때울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고장난 빵꾸난 차를 조기에 주에게 주님께 반납하면 되지요. 폐차 다 됐는데 반납하면 되는 거에요. 고물차 시동도 안 걸리는 거. 그냥 밀어서라도 주께 반납하면 되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는 뭐냐? 진짜 교회는 늘 폐차, 또는 폐차 반납하는 곳이에요. 주님이 그 폐차를 온전케 함으로 또 시동 걸리게 만들어요. 부릉부릉. 주님이 타고 계속 늘 가게 하시죠.

그래서 이 성도는 이 말씀이 사람은 떡으로 못 살고 말씀으로 산다는 것처럼 이 말씀이 기쁩니다. 말씀이 늘 기뻐요. 비록 바리새인이 욕 얻어먹는 것에 대해서는 그 현장에 자기가 알아서 그 욕 얻어먹는 현장에 자기도 끼어들어요. 제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인정해버려요.

그래야 주의 말씀이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주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서 완성의 티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와요. 거룩한 율법의 완성 내가 지적할 때 나중에 로마서 7장 끝나고 보면 “오호라 찬양하리로다.” 찬양으로 끝나버려요. 내 몸이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님을 다시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활동 현장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고 확인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계속해서 아까 그 헬라어, 마태복음에서는 ‘아피에미’라고 되어 있고 누가복음 ‘파리에미’ 뭐 그런 거는 알 필요 없는데. 그 뜻은 방금 제가 충분히 설명해드렸습니다. 예수께서 의와 신과 인을 추가적으로 언급하신 이유는 그들의 위선적인 마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추가적인 의와 신과 인을 의도적으로 이후에 도입했다는 것은 바리새인 짝을 이룰 때만 의와 신과 인이 진가가 드러나죠. 어떤 진가냐? 십일조 지킨 자가 십일조 지적한 주님을 죽여버립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십일조는 무슨 용도로 사용됩니까? 메시아를 죽이는 아주 극단적 선택이 되게 만들어버리죠. 인간의 모든 극단적 선택은 메시아를 죽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표상적 대표자인 우리를 대표해서 바리새인이 우리 마음을 대표해서 그 마음을 예수님 앞에 완전히 폭로했습니다.

그럼 오늘날 십일조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문제는 십일조 하고 안 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십일조 받는 자가 없어요. 십일조 받아야 될 그 받는 분이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을 받으시는 분은 아버지인데 아버지는 누구 것만 받습니까? 예수님의 피만 받아요. 우리 십일조를 안 받습니다. 십일조 받고 피 받고 이런 거 없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11장 50절에 나옵니다.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이렇게 나와 있거든요. 자, 한번 봅시다. 제가 물어봅니다. 아벨이 죽은 것이 아벨의 제사를 받기 전에 죽었습니까? 받고 난 뒤에 죽었습니까? 아 쉽다. 이 문제는 정말 쉽다.

아벨의 제사를 아벨이 죽기 전에 받았습니까? 죽은 후에 받았습니까? 아벨이 살아 있을 때 제사를 받았지요. 제사 받았잖아요. 제사 받았습니다. 제사 받았으면 아벨의 죽음은 어디의 연장입니까? 이 제사 받음의 효과에요. 완성의 효과가 아벨을 죽이는 거에요.

가인의 제사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안 받았지요. 가인의 제사를 안 받음의 효과는 뭐냐? 가인을 안 죽이는 거에요. 살리는 거에요. 왜 살리느냐? 이 살인자가 여기 살아있어야 돼요. 살인자가 살아있어야 제사의 핵심이 하나님의 죽음을 본질로 해서 제사가 된다는 사실을 이 주변에 가인 같은 후손들이 있어줘야 계속해서 제사에 합당한 죽음이 반복될게 아니겠어요. 이해되시죠?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51절에 보면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역대하 24장에서 22절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요아스 왕이거든요. 요시아 왕 아닙니다. 요시아 왕은 괜찮은 왕이었고 요아스 왕은 그 사람은 처음에 괜찮았어요. 역대하 24장 20절에 거기 여호야다라는 제사장이 있거든요.

그 제사장이 시키는 대로 잘 해가지고 요아스 왕이 어리니까 제사장 시키는 대로 해가지고 산당도 이렇게 제사도 드리고 제대로 말씀도 전하고 이렇게 성전도 수리하고 여러 가지 해가지고 다시 여호와 종교로 되돌렸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호야다가 늙어 죽었어요. 살만큼 살았어요. 죽을 때 나이가 130세에요. 송해보다 더 오래. 130세에 죽었습니다.

죽고 난 뒤에 사람의 심보가 희한하죠. 사람은 이게 진리냐 이게 안 진리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결정을 최종 결정을 내가 내리느냐 아니면 누구 시켜서 내리느냐 그게 자기한테 더 큰 문제에요. 그래서 사람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혼자 있고 싶어요. 모든 결정을 혼자 하고 싶으니까. 같이 있다는 것을 굉장히 짜증스럽게 느낍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님이 부활했잖아요. 부활했으니까 주님이 함께 있다는 그 자체로서 더 이상 우리의 걱정 근심이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나 혼자 있으면 내 걱정 내 근심이 되는데 같이 계신 분의 그 존재성을 걱정 근심을 해버리면 이거는 무시하는 게 돼버려요. 그렇잖아요.

초등학교 애가 자기 학교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한다면 같이 있는 엄마 아빠는 뭐가 되버립니까. “얘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리 인상이 안 좋아?” “어머님은 제 일 관여하지 마세요.” 도대체 엄마 아빠 존재 가치가 있다는 의미가 없잖아요. 그 아이는 밥은 엄마한테 얻어먹고 지금 혼자 살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햇빛과 공기는 주님한테 받아 놓고 모든 결정은 나 혼자 하게 되면 나 혼자 끙끙 앓고 있어, 어떡하지 어떡하지 맨날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본색이 드러난 겁니다. 그 본색이 어디까지 이어졌는가. 이제는 내가 혼자 하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전에 버렸던 아세라 목상의 우상을 섬기고 다시 여호야다의 그걸 치우고 이제는 김일성도 필요 없어 김정일도 필요없어 내가 김정은이야 내가!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할아버지고 아버지도 다 치워! 현재 내가 지도자야.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에요.

해가지고 그때 하나님의 신이 임한 여호야다의 아들 제사장 스가랴가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 나라 왕이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여호와 계십니다. 그러니까 요아스가 화가 나가지고 네가 감히 푸틴을 공격해! 이래가지고 네가 그렇게 나오면 이 백성들이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겠느냐. 맨날 지도자들이 독재하는 이유가 맨날 국민들이 날 우습게 본대요. 그럼 안 우스울 정도로 착각하게 만들어야 돼요. 원래 우스운 거에요 인간은.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죽이는데 돌로 쳐 죽여버립니다. 무리가 함께 꾀하고. 무리는 또 뭐에요. 왕의 명령을 뭐 공무원이라고 시키는 대로 했다 이 말이거든요. 아히만처럼. 당신은 수백만 육백만 죽였습니다. 나는 공무원인데요. 나는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야 돼요. 그냥 공무원이에요. 월급 받는 공무원이에요. 가정적으로 얼마나 인자하고 주위에 착한 사람인지. 자기 주위에 착한 사람이 육백만 죽였습니다.

인간을 보세요. 인간은 어떤 일이라도 자기의 의로움을 포기 못 하잖아요. 그게 욕망입니다. 욕망은 그야말로 신이에요. 내 안에 욕망 들었다 내 안에 신이 들은 거에요. 나도 그 신한테 꼼짝 못해요. 그래서 죽여 버렸어요. 죽였는데 자, 여기에 오늘 본문에 죽었지요. 죽었잖아요. 그러면 이것은 제사입니까? 제사 아닙니까?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가 된 거에요.

그 제사가 됐다는 증거가 요아스가 몇 명 되지도 않는 아람 군대가 쳐들어와서 지금 시리아죠. 아람군 쳐들어와서 요아스가 크게 상처를 입었고 부하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을 죽여버렸어요. 요아스를.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역대하 24장 24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유다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들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 ‘징벌하였다.’

저주한 거에요. 율법이 작동한 거에요. 어떤 율법? 스가랴 선지자가 죽음으로서 율법이 그 시대에 완성이 되었고 그 시대에 해당 되서 완성이 되었고 율법의 완성은 반드시 두 가지. 하나는 복이고 하나는 뭡니까? 저주가 이루어지잖아요. 그래서 요아스는 저주 편에 서서 저주 받은 겁니다. 스가랴는 어디 속했느냐. 예수님과 같은 노선에 들어간 겁니다.

왜냐 하면은 아벨과 스가랴 그 다음에 누굽니까? 그 다음 차례는 예수님 차례거든요. 예수님과 같은 차원의 같은 노선이다. 차원을 1차로 본다면 아벨, 스가랴(사가랴), 그 다음에 예수님. 같은 선상. 이 노선, 노선에 들어가지요. 아벨하고 스가랴 만났다면 아이고 반갑습니다 인사했을 거에요. 예수님도 이 노선.

그리고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12장 11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이 어린 양의 피로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를 이겼으니 악마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런 방법 이상한 방법이죠. 사람이 멀쩡해야 이기는 건데 우리 알기에는 그게 아니고 어린 양의 피 증거하는데 성공한 게 승리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내가 어떻다가 아니라 내게 속한 노선이 어린 양의 피로 만든 노선임을 증거했다면 이건 살아도 죽어도 이거는 이긴 것이 되는 거에요. 이긴 것이 되는 겁니다. 증거하다 죽을 수도 있고 증거하다가 한 100살까지 살수도 있고. 중요한 것은 증거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승리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노선에서는 아벨이나 스가랴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 노선에서는 이거는 이렇게 하면 구원 받는다가 아니라 이미 내가 너를 예수님 노선에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제는 네가 어떻게 죽던지 살던지는 이거는 네가 그렇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그런 뜻이 돼요. 자기 죽음에서부터 free, 자유를 얻는 것이에요. 내 죽음에서부터. 오후 설교 제목처럼 슬슬 주변 정리하시면 됩니다.

자, 다시 본문 돌아와봅시다. 같이 욕 얻어먹어봅시다. 43절에요.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네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구나. 여러분 이거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들이. 왜냐하면 이 본문을 알고 자기를 낮추기 때문에 그래요. 수를 써. 수를 써.

‘상석에 앉는 것들은 화 있을진저’ 하니까 목사들은 어디 가는 줄 압니까? 말석에 가요. 그 말석이 상석 되어버립니다. 도대체 주의 말씀이 우리의 숨겨진 우리의 욕망을 건드려서 죄인 되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내가 인사 받으면 바리새인 될까 싶어서 먼저 인사하는 것. 어디 선거 나옵니까. 먼저 인사하는 거에요. 1번입니다 한번 찍어주세요. 2번입니다 한번 찍어주세요 이런 식으로요. 굽신 거리면서 자기를 막 낮추고 그거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제가 언제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꼭 이단 목사가 교회에서 월급 주니까 나는 가난한 사람 생각하면 이런 월급이 너무 많습니다. 반 깎아서 주세요. 꼭 이단들이 이런 짓하고 있어요. 그냥 주는 대로 그냥 뭐 이천만원 주면 그냥 이천만원 먹으라 이 말이죠. 먹고 죄인 돼. 골프 치다가 죄인 걸려라 이 말이에요. 뭐 겸손한다고 반 깎아서 어떻고 가난한 사람을 같이 생각합시다. 어려운 사람 생각합시다. 무슨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립니까. 진짜 천불나서 안 되겠다.

나의 현 존재는 나로서는 불가능함을 견지하세요. 나의 나 된 것은 나의 솜씨가 아니에요. 내가 의도해서 된 게 아니에요. 이건 불가능한 거에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자기가 자기를 조작해요. 그게 위선이에요. 인사 받는 것이 바리새인 같아서 먼저 나와서 인사하고 또 상석에 앉으면 안 된다 해가지고 말석에 앉아가지고 식당에 가서 신발 벗는 말석에 앉아 가지고 이게 뭐냐 하면은 자꾸 이건 말씀을 의식하는 게 아니고 자신의 가치와 의를 손상되지 않는 그걸 의식하는 거에요.

그저 교인들이 목사님 여기 앉으세요 상석으로 안내하거든 고맙다 하고 감사합니다 하고 거기 앉으면 돼요. 뭐든지 고맙고 감사하는 게 최고입니다.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고맙습니다 감사하게 여기고 앉으면 돼요. 왜냐 하면은 겸손은 인간들이 해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들이. 인간들이 아는 겸손은 인간이 불가능이 아닙니다. 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인간들이 이걸 불가능함을 자꾸 조작을 해서 자기는 성령 받은 성령의 능력이라고 이걸 가능함으로 자꾸 바꾸는 거에요. 가능함. 왜냐하면 자기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거에요. 목사로서. 무슨 죄인이 모범을 보입니까. 죄인은 죄인다우면 되지. 죄인이 모범을 보이는 거에요? 죄인의 모범을 보이겠다는 겁니까? 의인의 모범을 보이겠다는 겁니까? 의인의 모범을 보이겠다는 거에요.

이 대표자가 누구인줄 압니까. 이게 누구냐 하면은 주기철이에요. 손양원.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전기를 찾아 봤어요. 정말 이 사람이 진짜 복음을 아느냐? 내린 결론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짓하고. 또 있어요 영락교회 누굽니까. 한경직.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짓하는 거에요.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이 사람들 보고 은혜 받아서 기독교 입문 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하는 거에요. 기독교에 입문했겠지요. 복음에 입문 안 했어요. 기독교에 입문했어요. 이 가능함이 뭐냐 하면은 이겁니다. 인사가 이거에요. “부족합니다 목이 좀 쉬어줘야 돼.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45절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드디어 본색이 나왔어요. 본색이. 결국 율법을 지키는 이유가 본인이 그만 폭로해버렸어요. 율법을 지키는 이유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 지키는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주님이 초청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초대해놓고 욕 바가지 바가지 얻어먹고 있어요 지금. 46절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하여튼 주님도 저주를 있는 대로 퍼붓습니다.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율법 지키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능하지 않는데 그걸 누가 아느냐? 율법사 그들이 알아요. 그런데 율법사를 존경한다는 사람에게는 뭔가 모범을 보이기 때문에 본인은 안하면서 남들에게는 이렇게 해야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는 거에요.

그거 왜 그러느냐 하면은 언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정신적인 지배자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멘토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도 가스라이팅. 그들이 지키지 못한 것을 해줘야 그래서 그들이 “헥헥 아이고 선생님 저는 못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자기가 지위가 계속 우위에 유지가 가능해요.

“그렇지 도사 함부로 되는 거 아니지! 까불지 마.”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너하고 같이 놀 군번이 아니야’ 이런 뜻이에요. 왜 주님께서 이 바리새인을 이렇게 하느냐. 표상적 대표자라는 것은 모든 인간은 결국 바리새인이 하나의 모델이 돼요. 나도 저 사람처럼 되면 하늘나라가 곧 손에 닿을 것 같애. 그들은 그러한 위기 체제를 그런 식으로 구성해서 질서를 잡았던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보고 너희들은 마귀 자식이라고 하죠. 너 바로 위에 손에 잡힐 듯이 주님이 계신 게 아니고 마귀가 손에 잡힐 듯 있는 거에요. 마귀가 그 사다리를 만든 거에요. 47절 보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몇 번 나오는지 모르겠어.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옛날에 구약 때 선지자들을 죽였던 그 세력 그 권력을 너희들이 지금 그대로 반복 되풀이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절대로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요. 왜냐 하면은 우리는 과거에 이스라엘이 까불다가 포로 잡힌 것을 너무나 알아요.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역사를 통해서 다시 과거 같은 잘못은 두 번 다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것을 역사를 교훈을 배움으로서 우리 조상들과는 정반대로 나가겠다고 다짐을 한자들이 이들이에요. 그래서 율법을 그런 차원에서 지키는 겁니다. 그들이 금식을 안했다면 우리는 금식을 하는 거에요.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취지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뭡니까? 불가능함이 아니고 뭐로 만들어요? 전부 다 그 기초가 인간은 가능하다부터 출발하는 거에요. 가능하다. 십일조도 마찬가지고요. 행함보다도 우리 속을 들여다보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49, 50, 51절에서는 완전히 과거 역사까지 다 끄집어내서 나와 다른 노선을 두 개를 만들었어요. 이게 갈라디아서에서는 두 언약이라고 하는데 그건 너무 어려워서 지금 설명 못하고요.

하나는 인간이 육신이 있으니까 자기 육신이 있음으로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행함의 노선, 그거는 저주입니다. 그리고 육신으로서는 불가능한 노선. 그거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에요. 갈라디아서 4장 25절 우리의 내가 나를 만든 것은 하늘에 있는 어머니가 만들었다는 거에요. 하늘의 어머니가 뭐냐 하면은 율법이 아니고 약속이라고 되어있어요.

율법은 뭐고 약속은 뭐냐? 율법의 완성이 약속이에요. 율법의 원천이 약속이에요. 율법은 중간다리에요. 두 계곡 사이에 다리가 축 늘어져 있는 거에요. 이게 율법이에요. 율법. 약속에서 시작해서 여자의 후손부터 시작해서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 그 사이에 뭐가 걸쳐 있습니까? 율법이 걸쳐있는 겁니다.

율법을 함으로서 이거는 예수님의 면전에 존재하지 않아야 될 세계. 지옥을 만들고 예수님과 함께 곳은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지창조는 하나였지만 나중에 결과는 천국과 지옥 두 구역으로 나누어집니다. 목사님 그 말이 맞습니까?

십자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 유일한 증거입니다. 부활 안됐으면 이거는 다 헛방이에요. 부활이 없으면 내가 말한 것이 진리가 아니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런 이야기했다고요. 죽은 자와 산 자가 없으면 지금 우리 이 말은 소망도 없고 쓸데없는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고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활이 거짓이 아니라면 무엇이 거짓인가. 우리 인간들이 거짓이지요. 이 세상 자체는 거짓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부활이 없다고 하거든요. 결국 싸움은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 싸움이에요. 그냥 부활이 아니에요.

십자가 죽으신 분을 세상의 모든 의견을 다 집대성해서 죽여라! 했던 그 분을 세상이 모든 세상이 다 싫어하고 부정했던 그 분을 하나님께서 이건 부정이 아니라 이분을 심판자로 세웠다는 이 사실은 우리는 거기에 가담된 또는 가담되어 있는 모든 사람, 연류된 모든 사람은 마땅히 저주 받아야 마땅하지요. 무슨 사적인 고민 걱정이 그건 있을 수가 없어요.

8000미터 산을 다 정복했다. 그 사람 누구에요? 엄홍길. 그래서 뭐? 왜 올라가는데? 집 놔두고 왜 올라가는데요? 내 남편 대통령 됐다. 김건희. 그래서 뭐? 그래서 뭔데 그게. 그거 인간이 가능하잖아요. 대통령 된 게 부활된 겁니까? 우리는 부활한 주를 믿는다 하지요. 사도행전에. 너는 대통령 믿어라 나는 부활한 대통령 믿겠다. 여러분 할 일이 있습니다. 그 부활한 주님을 증거하는 할 일. 팽팽 논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 바빠요.

52절에 보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열쇠만 있으면 뭐합니까. 자물쇠를 맞춰놨는데. 52절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자기도 못 들어가요. 안 들어갈 뿐더러 더 나쁜 것은 들어가고자 하는 자를 막아섭니다.

그들의 막힌 자는 누구냐? 일단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중에 성령을 주게 되면 제자들도 세상으로부터 밉상을 받는 사람이 되겠지요. 오늘날 성도들이 바로 세상으로부터 막히고 있습니다.

자, 끝으로 어떤 식으로 이 복음의 자유, 자유로운 영, 은혜의 뭉치로 살아가는 것을 악마는 어떤 식으로 우리를 방해하느냐. 그것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대구 강의에서 했는데 일곱 귀신이 마귀가 내 문제로 따로 유발시켜버려요. 주님 바라보고 사는 성도에게 마귀가 수시로 찾아 와가지고 내 문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한테 각인시켜 버려요.

그럼 여기서 갑자기 복음으로 기뻐하다가 우리는 슬픔에 잠깁니다. 절망과 낙담에 잠깁니다. 주여 어떤 죄도 용서하셔서 감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복음전파 임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는데 “엄마 나 또 떨어졌어” 이러면.

주님 감사합니다 하다가 복음 문제는 나중에 하고요. 애를 공부를 시켜야 합니다. 재수를 시킬지 아니면 다른데 원서를 내서 가야되는지 갑자기 내 문제로 와버려요. 고민 고민이 되는 겁니다. 그 귀신 누가 보냈게요? 주님이 보냈지요. 주님이.

왜? 자칫하면 구원받은 내가 나의 우상이 되기 때문에. 얻을 것 얻었고 내 결여를 채웠다는 것. 구원 받는 나를 신봉하는 것 그거 안 되게 하기 위해서는 아직 마귀가 활동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계속 마귀한테 뜯겨서 다시 한번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닙니다.

마지막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매일 나의 주체를 새롭게 정립한다. 매일. 매일 나의 주체를 새롭게 정립합니다. 그날의 환경에 따라서.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고 오늘 주님의 새로운 주체를 계속 활동하는 거에요. 찰랑 찰랑 주님의 주님 꾼으로 새롭게 활동하시기 위해서. 또 내일 되면 내일 치 따로. 항상 매일 주님과 죽고 매일 같이 살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리새인이 들은 욕은 바가지 바가지 들은 욕은 사실은 우리가 들을 욕인 것을 이제는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처럼 주께서 의인을 구하러 오신 것처럼 그 죄인의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자유함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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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8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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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