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1장 42절 (율법의 공격성) 220607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1장 42절 (율법의 공격성) 220607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1장 37절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초청 받아 놓고 초청한 자가 실컷 욕 얻어먹는 그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과연 주님을 초청했는가. 아니면 주님이 그 인간을 만나줬는가. 분명히 해야 돼요.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초청했다고 주장하는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 초청에 응하면서 그들의 속내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지요.
주님의 그 말씀에 오늘 본문 11장 끝까지 나오는 그 내용 바탕에 들어 있는 그 뜻은 이겁니다. ‘네가 거기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율법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율법의 완성자와 마주하고 있어요.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완성자와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고 나는 여기 있고 예수 당신은 저기 있다. 둘 다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입니다. 율법을 주시는 분이고 또 완성자거든요. 율법 완성 앞에서 인간은 거기 존재할 수가 없어요.
뭘 존재를 해야 나쁘다 좋다가 이게 되는데 아예 존재할 수 없는 자들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완성을 다 보이시기 전이기 때문에 그들은 일시적으로 한시적으로 율법도 있고 그들도 있는 그런 형편에 있어요.
그러나 나중에는 율법만 있고 인간은 그 앞에서 사라져야 됩니다. 법만 있고. 법만 있고 인간은 사라져야 한다. 이 법, 법은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유가 뭐냐? 언어가 있어야 존재 있음은 집을 갖는다. 언어는 존재의 house, 집이기 때문에. 말씀 안에, 말씀이 있어야 거기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인간을 거기서 새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말씀이 없는 것은 말씀 밖에 있는 것은 주님께서는 있음으로 간주하지 않고 사라져야 돼요. 누구 면전에서? 진정한 있음, 예수님 앞에서 사라져야 되요. 면전 앞에서 사라져야 돼요. 그곳을 지옥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옥은 예수님이 없는 곳이 지옥이에요. 요즘 세상은 예수 안 믿어도 잘 살고 코로나 풀렸다고 난리도 아니지요. 지옥입니다.
예수님 없어도 사는데 전혀 지장 없고 오히려 반대죠. 예수님 있음으로 사는데 지장 있다고 느껴지는 그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의식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율법의 완성인 복음을 전해버리면 그들은 복음이 들려지는 곳을 피해서 천리만리 다 도망치고 없어요. 다 도망가 버립니다.
심지어 복음이 없어도 교회 성당 나오지도 않지요. 현재 천주교 신자들의 성당 미사 참여율은 8.6%입니다. 8.6%. 10%도 안 된다는 거에요. 10명 중에 한 명만 미사에 참석한다는 거에요. 완전히 유럽식이에요. 유럽 스타일. 앞으로 교회도 그렇게 되지요. 유럽 스타일.
토트넘 축구를 언제 하느냐? 일요일 날 하거든요. 일요일 날 하는데 아침부터 와가지고 표 사고 앉아있는데 교회는 언제 가는데. 영국 사람들은 교회 갈 수 없어요. 왜? 토트넘 손흥민 축구하는 거 봐야 하기 때문에. 교회 갈 수가 없습니다. 독일도 마찬가지고. 분데스리가. 미국도 마찬가지고. 야구.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그 스케줄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스케줄이 나오는 거에요. 인간은 한 번도 내가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인간은 해보지를 않습니다. 내가 왜 있지? 이거 여러분 물어본 적 있습니까? 내가 왜 있지? 내가 왜 여기서 나와?
그것은 사람은 살만큼 살다가 수명 다 되면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오늘 본문 11장 50절에 보면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여기에 두 사람 등장합니다. 51절 아벨 나오지요? 또 한 사람 나옵니다. 사가랴. 이 두 사람은 사라진 사람입니다. 사라진 사람이에요. 무엇 때문에 사라진 사람이냐 하면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때문에 사라진 사람이에요.
그럼 이 사람들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한 이유가 뭐냐? 율법 때문에 사라진 거에요. 율법 때문에 사라지면 이들은 사라지고 그 현장에 율법의 완성만 덩그러니 남고. 그러면 덩그러니 남은 율법의 완성은 하나님의 제사로서 받으시고. 예배로 받으시고. 끝.
그러면 여기서 아벨과 사가랴는 소모품. 무슨 소모품? 율법을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불쏘시개, 원료. 소모되는 원료와 같은 존재. 이럴 때 인간은 율법과 관련 있다 이렇게 이해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율법이라는 은혜가 있으면 그 사람도 율법의 세계에 완성의 세계에 그 사람도 함께 있을 것입니다. ‘임마누엘’.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있다’고 한다는 것은 아직 율법의 완성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있는 것이고요 나중에 율법의 완성이 되면 인간은 진정한 ‘있음’, 예수님이죠. 율법의 완성자부터 ‘있다’가 성립돼요.
그 있음의 세계에 영원히 합류하는 것을 천국생활이라고 하고 예수님의 면전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옥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기준은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존재가 아니고 그 귀한 그 거룩한 율법 완성은 누가 이루었느냐? 율법 완성은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다 완성됐느냐? 그게 핵심에요. 그게 핵심. ‘나’라는 존재 이전에 언어, 주의 말씀이 우선 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나의 있음을 이상하게 봐야 됩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하지 말고 왜 제가 여기 있는 겁니까? 물으신다면 아벨과 사가랴의 운명처럼 너는 율법의 완성 복음을 위해서 너는 아직은 이 땅에서 살아야 돼. 그런 응답을 마땅히 받아야 되겠지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4절. 두 개의 사물이 나와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하나는 바늘구멍 나오고 하나는 낙타가 나와요. 약대, 낙타. 바늘구멍이 낙타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차단합니다. 바늘구멍이 낙타의 통과를 차단함으로서 거기에 천국이 수립됩니다.
그러면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방법은 위주가 천국을 수립하는 위주이기 때문에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걸 그 가는 방법이 없어야 성립하는 것이 천국이기 때문에. 그래서 천국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에요. 낙타가 바늘구멍 안에 통과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그래야만 되는 거죠.
질문 자체가 “어떻게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갑니까” 라는 질문을 하면 안돼요. 천국을 그러면 어떻게 들어갑니까 이건 되는데 자꾸 낙타 입장에서 천국 갈려고 하면 안되죠. 그러면 천국 어떻게 들어가면 됩니까? 입장을 낙타 입장에서 바늘구멍 입장으로 바꾸면 되죠. 참 쉽죠? 역할을 바늘구멍 하면 되는 거에요. 뭐냐 하면은 ‘너는 이제부터 바늘구멍 역할 해.’
다시 말해서 어떤 인간도 천국에 못 간다는 사실을 이제부터 발견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도 천국에 가지를 못한다. 심지어 죽어서도 가지를 못하죠. 그렇다면 천국은 바늘구멍과 낙타를 통해서 천국이 만들어져요. 그러면 천국에 바늘구멍 못가는 낙타 없이는 천국은 수립되지 않는 겁니다.
왜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은 천국이 될려면 율법이 있어야 되고 율법이 율법답게 될려면 지옥이 있어야 돼요. 저주 받는 집단이 있어야 돼요. 집단체. 저주받는 군집체. 저주 받을 군집체. 집단이죠. 그런 집단이 있어줘야 돼요. 왜냐하면 율법은 저주받는 쪽이 없으면 율법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저주 받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거죠.
그렇다면 하나님 왜 천지를 창조했는가. 창조했다는 말은 말씀으로 왜 사람을 존재케 하는가. 천지를 창조해 놓고 생긴 게 있잖아요. 해와 달, 별, 낙타 있잖아요. 그걸 전부 다 지워버리기 위해서. delete. 지워버리기 위해서 만드신 거에요. 없애기 위해서.
이렇게 지우개는 왜 있습니까? 지워버리기 위해서. 이 지워버림으로서 뭐가 등장하느냐. 지우는 주체가 등장하지요. 지우개를 갖고 있는 주체가 등장합니다. 누가 지우느냐? 지우는 분이 누구냐? 율법을 가진 분이 지우지요. 완성한 분이 지웁니다. 그 분만이 ‘있음’이 돼요. 그분만이 언어가 되고. 주님의 그 완성된 언어의 혜택을 입는 자가 바로 주님과 영원히 사는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유투브 동영상 첫 번째 시간에.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언약맨이다. ‘언약맨’. 노아만 노아 언약을 받는 게 아니에요. 성도가 오늘날 언약맨입니다. 십자가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그걸 증거하면 돼요. “나 성도인데 할 일이 없어” 이러지 마세요. 할 일 있어요.
언약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은 언약을 전해야 돼요. 야곱도 그렇고. 오늘날 우리는 마지막 언약 새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새 언약을 증거하면 되는 겁니다. “뭐 할 일 없습니다.” 이러지 마세요. 언약이 뭐냐 하면은 하늘나라의 언어에요. 말씀이 되겠습니다.
사람이 있고 말씀이 있는 게 아니고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의 효과, 말씀의 진리, 그 진리를 위해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진리 아닌 것을 삭제해나가는 그 작업을 주님께서 하셨죠. 그래서 여기 누가복음 11장에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했지만 초청 받은 예수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들의 존재를 제거할만한 정당성, 이유 그것이 바로 예수님 쪽에서 나오는 겁니다.
39절에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뭐 개과천선하라는 이야기입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사람 정신 차리면 새 인간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 하면은 42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라고 단언해버리죠. 단언한 거에요. 화라는 것은 저주고요. 너희들은 저주를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 저주를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국민교육헌장 외우듯이 이 바리새인들은 저주 받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에요. 그리고 그들 역할을 저주 받을 이유를 펑펑 쏟아내야 될게 아니겠습니까.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십일조 드린다고 박하와 운향과 채소의 십일조를 드린 거에요. 십일조를. 자, 십일조는 율법에 속합니다. 그들은 건들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려 버렸어요. 율법을 주신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저주 받게 하기 위해서. 저주 받는 자는 주님이 계신 나라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워져야 돼요. 없어져야 돼요.
낙타는 바늘구멍으로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은 지금 뭘 건드렸느냐? 감히 십일조를 건드렸어요. 십일조의 율법을 십일조라는 율법이 자기 안에 들어오도록 한 겁니다. 욕망은 대상이 아니라 주체 안으로 들어옵니다. 주체 안으로. 그러니까 이 욕망을 자극하는 게 뭐냐 하면은 율법이라는 거죠.
지금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대상으로 본거에요. 내가 여기 있고 십일조를 지키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율법을 지키면 그 복이 나의 일부로서 내 안에 합류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한 거에요. 그러나 율법은 욕망을 자극해서 일으키고요.
아시는 분은 다 아시죠. 로마서 7장, 선한 것이 율법은 선해도 너무 선해요. 너무. 그냥 너무 선하기 때문에 율법 앞에서 모든 것은 너무 악해요. 왜냐하면 율법이 너무 선하기 때문에. 그 선을 따라 붙일 속도를 낼 수 있는 대상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 선해서.
아무도 율법을 따라서 계속 “율법대로 지켰습니다 율법대로 지켰습니다 헥헥” 나중에 숨 차가지고 “아이고 너무 지쳤습니다 더는 못하겠습니다” 하고 나자빠지게 되지요. 율법이 뭐해 “빨리 율법대로 해야지!” 하면 “아휴 그만 그만 그만.” 따라 붙일 역량은 없습니다. 율법은 그 정도로 너무 선해요. 율법을 지킨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너무 선해서.
그리고 뿐만 아니고 율법이 계속해서 추가가 돼요. 과거 율법 말고, 계속 추가가 되가지고 지켰다고 했는데 그럼 이거는?! 하고 새로운 율법이 들어오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너무나 음식을 잘 먹기 때문에 주는 족족 음식을 다 먹지요. 사람들이 계속 줬습니다. 이제 그만 더는 들어갈 데 없습니다. 그것처럼 뒤로 나자빠지는 것처럼 율법의 완성은 모든 사람을 피해갑니다. 한 사람만 겨냥해서 율법의 완성을 줍니다.
율법이 너무 선하기 때문에 너무 선한 그 분에게 응집이 돼요. 마치 빛이 볼록렌즈에 빛이 한 초점에 모이는 것처럼. 율법은 줄기차게 한분을 겨냥하여 쏜살같이 질주해서 그 분에게 다 집합이 돼요. 모이게 되어있다고요. 그 모이는 과정에서 모든 인간을 제쳐버립니다. 너 아니야 너 아니야 너 아니야 제껴버리죠. 그냥 아닙니까? 너는 저주 받아 저주 받아 저주받아. 이렇게 모이는 거에요.
그러면 그들은 왜 율법을 못 지키느냐? 율법이 욕망을 하게 되면 그 인간이 지켰다는 그 인간이 율법한테 자극된 인간 속에 있는 숨어있는 욕망이 있고 욕망이 뭐냐 욕심이죠. 욕심이 있고 욕심은 율법이 와서 욕심을 건드려버리면 그 욕심은 주체 안으로 들어가서 주체의 본질을 구성하게 돼요. 욕심으로 가득 찬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바리새인이 되는 겁니다. 욕심으로 점점 더 풍선에 바람 넣으면 나중에 뽈록해져서 터지는 것처럼. 평생 욕심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만 어린 아이의 특징은 자기 옆에 같은 애가 죽어도 죽음의 의미를 모른다고요. 그걸 자연스럽게 본다고. 자연스럽게. 애가 죽었더라도 나는 장난감 가지고 놀면 그만이에요. 죽음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고 자연스러워요. 죽음이라는 것을 몰라요. 어린 아이는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그 단어를 몰라요.
그런데 욕심으로 가득 찬 인간은 누구냐? 나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꼴통들. 꼰대들. 고집불통. 넉넉하게 잡읍시다. 90이상. 이건 뭐 말릴 수도 없어요. 말릴 수도 없어. 어떤 말도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때까지 사시는 게 저주 같애. 그냥 곱게 사는 게 아니고 욕심이 본인을 그 나이만큼 올리도록 만드는 거에요. 욕심이. 삶에 대한 욕심. 집착.
이만큼 살았으니 그만 살겠다가 아니라 말은 그렇게 하지요. 이만큼 살았는데 더 살아야지. 그렇게 되는 거에요. 어느 누구도 자기의 죽음 앞에서 여유를 가질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래서 돈 앞에서 바들바들 떠는 거에요.
그렇다면 인간의 욕망의 주체가 들어오거든요. 그럼 뭘 하느냐 하면은 인간이라는 것은 없고 욕망이 욕심이 죄가 인간을 갖고 논다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서 드디어 이게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에요. 율법은 세상을 영적 문제로 전환시킨다. 율법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인 인간의 근원적인 본질 자체가 이게 악마냐 아니면 주님 쪽이냐.
이게 주님과 반대되는 성향을 갖고 있느냐? 주님과 동일한 안목과 성향을 갖고 있는가. 그 구분을 가늠하는 그러한 전쟁터로 전환시킵니다. 율법은. 만약에 율법을 기피해버리면 그 사람은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요. 윤리고 도덕이고. 윤리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내 욕심과 욕망을 조정할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거에요.
죄와 욕망과 욕심은 내가 알아서 조절이 가능하다고 보는 거에요. 그러면 욕심과 욕망과 죄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를 지배하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죽으면 안돼요. 내가 죽으면 내 죄는 누가 다스립니까? 따라서 내가 기어이 살아있어야 과거에 지은 죄를 지금 선한 것으로 만회해서 괜찮은 인간으로 생애를 끝낼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90 넘어도 송해도 안 죽을려고 그렇게 애 쓰는 이유가 생애 거의 끝까지 갈 때까지 내신 성적을 올리고 죽겠다는 거에요. 내신 성적을. 휴전 앞두고 전쟁이 치열한 이유는 휴전되면 그걸로 영토가 결정되기 때문에 치열한 백마고지 전투가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지금도 우크라이나 전쟁 있잖아요. 협상을 앞두고 지금 치열하게 하잖아요.
지금 이 순간 stop! 그때가 내 본 모습인 것을. 선함의 발전을 도모하는 거에요. 선함의 발전. 그런데 여기 누가복음 11장에 보니까 네 속에 더러운 그것이 있기 때문에 바로 손을 씻느냐 안 씻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손을 씻음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가리는 셈이 돼요? 속에 더러운 것이 있음을 가리는 그런 욕망의 현상을 드러낸다고 예수님은 보시는 거에요.
이 점이 상당히 어렵습니다만은 알기 쉽도록 노력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4절에 보면 빌라도가 손을 씻습니다. 왜 빌라도가 손을 씻지요? 이거 미신 아닙니까? 왜 빌라도가 손을 씻지요? 빌라도한테 손 씻으라고 로마황제가 빌라도한테 명령했습니까? 아니면 유대인들이 요구했습니까? 이거는 자발적이죠.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손 씻고 싶어. 왜? 복음 몰라. 안 씻으면 안 될 거 같애. 왜? 몰라. 모르는 게 아니에요. 빌라도 마음속에 있는 그것이 빌라도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빌라도는 자기 속의 욕망의 지배를 받아서 자기 욕망이 만들어 낸 그 갈라진 그 균열을 어디 다른 대책이 없어서 손 씻는 걸로 그 간격을 없앨려고 시도한 거에요. 저주와 복의 간격을.
왜 빌라도가 손을 씻느냐. 왜 빌라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제일 높은 사람인데 누구한테 명령 받아요. 본인이 한 거에요. 시키지도 않는데 왜 손을 씻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손 씻어요? 자기 내부 틈바구니에서 저주가 올라왔어요. 저주가 올라와서 손 씻는 거에요. 그 저주에서 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그래도 저는 깨끗하게 했습니다 라는 누구한테 변명? 본인 내부한테 본인이 변명하라고 하는 거에요.
그럼 누가 대장이에요? 본인 빌라도 자아가 대장이에요. 자아보다 더 쎈 게 본디오 빌라도를 작동하고 있습니다.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마치 느부갓네살이 자기가 제국의 총수고 왕인데도 불구하고 어젯밤에 내가 무슨 꿈 꿨는지 알아내라고 애꿎은 부하들한테 닦달 내는 것하고 똑같은 거에요. 본인이 견딜 수가 없어요. 본인이.
내가 내 내부와 협상이 안돼요. 내 내부와 타협이 안돼요. 내 내부의 어떤 힘이 나를 괴롭히는데 대책이 없는 거에요. 나의 꿈이 나를 지배하고 있어요. 나는 거기 휘둘리고 있고. 인생이 뭐 이런 게 다 있어. 지금 느부갓네살은 그렇게 최고 높은 직위에 있는 자가 세상에 무서울 거 없는 그 사람이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그 말은 사람은 그 무서움 앞에서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지요. 약한 존재. 이게 미신이라도 좋고 이게 사주팔자라도 좋으니 뭔가 손 씻듯이 궁합이라도 봐야 되고 타로 점이라도 뭐 해야 되겠어. 인간은. 교회 새벽 제단을 가서 엎드리던지 뭘 해결을 해야지 도대체 내가 견딜 수가 없어. 내가 미치겠어.
미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현실에 내가 일치감이 없어 붕 뜬 상태를 미쳤다고 합니다. 현실의 다가가지 못하는 현실에 튕겨져 나오는 자아상이 미친 거에요. 성도는 그런 의미에서 좋게 미친 거에요. 왜 성도가 천국의 백성이 왜 즐겁게 미쳤는가? 고맙게 미쳤는가?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내가 행하던 내가 아니 행하던 은혜를 주시니까,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내가 행하던 행하지 않던, 내가 실수를 하던 뭘 하던 상관없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뭉치다. 은혜의 뭉치. 솜뭉치. 솜사탕 알지요? 그게 전부 다 솜이에요. 솜뭉치에요. 은혜의 뭉치. 이것은 말씀의 완성 주님의 자기 은혜의 확산, 확대에요. 오늘 한 첫 번째 동영상 부분과 전체 참고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은 주님의 피부 조직이라서 주님 계신 곳에 성도는 자동적으로 주님의 피부 조직으로 피부 세포로 같이 거기에 현장에 있게 되는 거에요. 그게 바로 ‘있음’이에요. ‘있음’이라는 것은 혼자 있는걸 있음으로 쳐주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만 있음이 되고 그 있음은 주님이 다 이루신 거룩과 의를 증거하는 용도로 성도는 현장에 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거에요.
그래서 성도는 뭐냐? 불신자는 뭐냐? 불신자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되잖아요. 성도는 생각한다 ‘주님이 생각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인공이 주님. 내 생각은 주님의 생각에 의해서 발생된 생각이고 불신자는 내가 생각하니까 내가 생각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생각만 하면 되는데 건방지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렇게 되지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거에요. 얼마나 불안했으면 ‘내가 있다’를 이런 식으로 폐쇄적으로 증명하겠어요. 그러니까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자기가 마땅한 이유가 없는 거에요.
내가 왜 있는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이유를 모르는 거에요. 이유는 모르고 그냥 존재하는 방법만 제시하면서 그걸 이유로 억지로 붙이는 거에요. 나는 생각하잖아. 생각하니까 여기 있잖아. 내가 다른 건 다 부정해도 생각하는 나는 있으니까 나는 있는 거 맞다.
여러분 내가 여기 있어버리면 뭐가 문제냐 하면은요 내가 여기 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너만 거기 있냐? 이게 또 나온다고요. 너만 거기 있는 게 아니야. 민코프스키 좌표라는 게 있습니다. 수학자인데 민코프스키 좌표라는 게 이게 물리학에 나오는데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아주 극단적인 불신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잘 설명한 사람이에요. ‘극단적인 불신의 세계’.
점은 0차원이에요. 점은 차원적으로 봤을 때 점은 0차원이거든요. 여러분들 굳이 우리가 알아야 됩니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한번 들어보세요. 아 불신의 세계가 이렇구나. 이래서 사람들이 자기 주장하는구나 알게 될 거에요. 점은 차원이 없어 0차원이에요. 선은 1차원입니다.
그러면 선이 쌓이면 여기 면적이 되거든요. 면적은 2차원이에요. 이 면적이 이렇게 쌓이면 이건 뭐냐? 공간이 생기죠. 공간이 이게 3차원입니다. 3차원에서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3차원 세계에서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는 것은 X,Y,Z 세가지 좌표로 표시를 하는 거에요. 나 여기 있고 너는 여기 있다. 따로 있다.
문제는 뭐냐?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기 때문에 같은 시간에 속해 있다. 지금 여태껏 인간의 과학은 이렇게 생각했던 거에요. 공간은 달랐어도 네 시간과 내 시간은 동일하게 있다 이렇게 보는 거에요. 프랑스의 에펠탑 그 시간이나 뉴욕에 있는 시간이나 동일한 같은 시간에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민코프스키 좌표에 의하면 이게 시간이 1차원 3차원 차원에 들어가요. 시간 차원에 들어간다고요. X,Y,Z 전부 다 길이거든요. 시간을 길이로 바꿀라 하면은 빛의 절대 속도, 절대 속도니까 변함이 없는 절대 속도 1초에 30만km를 곱해버리면 시간이 뭐로 바뀌냐 하면은 길이로 바뀌어가지고 같이 묶을 수가 있어요.
3차원에서는 시간이 없으니까 앞에 ict해서 X,Y,Z,해서 이게 하나의 집합이 돼서 4차원 되는데 이거는 뭘 의미하느냐 하면은 시간이 이렇게 같이 돌아버리면 지금 내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좌표, 이 공간 시간 3차원 이렇게 좌표로 해 놓으면 이 사람이 어디 있든지 간에 나는 내 임의의 시간일 뿐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나한테는 과거가 되지만 남한테는 미래가 되고 남한테는 현재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다른 ‘나’가 다른 시간대에 살아있을 수가 있다는 거에요. 인간마다 동일한 시간이 아니고 인간마다 느끼는 미래, 과거, 현재가 각각 따로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10명 있으면 10명 다 신이에요. 전부 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현대 생성 원리의 세계에서는 하나 하나가 신이에요. 하나 하나가. 네 시간하고 내 시간은 달라요. 나는 특별한 나만의 절대 시간을 내가 갖고 있어요. 그러니 개인주의가 활기를 치치요. 과학적으로 개인주의가 정당화되고 만 거에요. 나는 죽어도 영원히 산다 이런 게 막 활기 치는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성경은 인간에게는 시간이라는 게 인간 시간이라는 게 아예 없어요. 다 무슨 시간이냐? 주님이 자기 일을 하는 자기 시간이에요. 왜? 시간이 어디로 합류를 하느냐 하면은 주님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시간과 공간을 전부 다 주님께서 훅! 진공청소기로 다 빨아 땡기기 때문에 그래요. 공간, 이 세상, 피조세계.
피조세계 시간과 공간을 다 빨아 당기기 때문에 주님이 완성이 되어버리면 그때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요 뭐. 주님의 세계만 있고 나머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땅과 이 하늘 그 모든 것도 전부 다 소멸하고 없습니다. 다 삭제됩니다.
아까 처음에 했지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네가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네가 알아라. 너는 있을 이유가 없어. 네가 왜 있느냐? 내게서 나오는 그 율법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우리가 존재하는 거에요. 이 바리새인들아. 율법이 죄를 향하여 저주하기 위해서 있단 말이죠.
그래서 저주하는 용도로 바리새인들이 있는 것도 모르고 오늘 본문에 11장 37절에 바리새인이 누굴 초청했습니까? 예수님을 초청한 거에요. 있는 내가 있는 당신을 초청하겠다는 거에요. 초청해서 욕 바가지 바가지 얻어먹었어요.
예수님이 있는 것은 있음이 되지만 네가 있는 것은 있다는 것이 안 되도록 제거해줄게. 뭘로? 율법으로. 우리가 율법을 지키면 되잖아요. 율법은 네 속에 들어갔어. 네 속에 들어가서 네가 주인공이 아니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그 죄가 너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까발려주는 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42절에 “화 있을진저” 라고 이야기한 거에요.
그러면 십일조 이야기, 한국 교회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 십일조 이야기 한번 봅시다. 42절.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 다음에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 한국 교회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에요.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완전히 빠져버렸어요. 저것도. 십자가 복음도 좋지만 십일조는 반드시 이것도 해야 돼. 왜? 주의 명령이니까. 참 바보도 아니고 명령은 우리를 저주케 하는 것이 명령이에요.
저 십일조 하니까 살려주세요 그런 거 없어요. 십일조 했냐? 죽여버려라 이 인간. 이건 건들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려버렸어요. 네가 왜 율법을 지켜 왜 네가. 웃기는 인간 네가 뭔데 율법을 지켜. 율법은 저주 대상 만들기 위해서 하는 건데. 네가 왜 율법 가지고 스스로 자기를 긍정해서 변호할려고 나서느냐 이 말이죠.
여기서 주님께서는 십일조의 완성을 미리 이야기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공의와 하나님의 대한 사랑을 버리는도다. 이것을 세 가지로 되어있는 게 마태복음 23장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의와 긍휼과 믿음. 세 가지 되어 있지요.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서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이 원어 단어가 헬라어 단어가 누가복음하고 마태복음하고 달라요. 희한해. 같은 단어를 사용한 게 아닙니다. 그걸 좀 설명드리면 이렇습니다. 골치 안 아프게 설명해드릴게요. 쉽게. 여기 누가복음 11장 42절 “이것도 행하고”. 이것이라고 하는 것은 공의와 의를 말합니다. 이 공의와 의라고 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 곧 예수님을 이야기해요.
예수님만 행합니다. 다른 사람은 행할 수가 없어요. 행한다는 말은 본인이 팔 다리가 움직인다고 행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고 율법이 춤을 춰야 행함이 돼요. 말씀이 말씀대로 이렇게 활동해야 행함이 돼요. 왜냐 하면은 있음은 존재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 때문에.
말씀의 집이 존재거든요. 말씀이 먼저 있고 존재는 나중에 생겼어요. 빛이 있으라 라는 말씀이 있음에 뭐가 생겼습니까? 빛이 생겼잖아요. 탁 다가오지요. 사람은 태어나서 이름 짓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없는데 불러요.
야곱아 너는 사랑을 받아야 된다. 야곱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야곱이 아직 태어나기 전에 야곱은 사랑하기로 이미 선언을 해버렸어요.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야곱은 불임의 엄마로부터 쌍둥이의 하나로서 이 땅에 태어나야 됩니다.
태어날 때 짝을 통해서 태어나요. 저주가 없으면 사랑의 의미가 없으니까요. 짝이 있어야 되니까. 저주받을 쌍둥이가 나와야 되는데 이름이 누구냐? 에서죠. 에서는 아무리 애써 봐도 저주입니다. 그 이야기 10분 뒤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