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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220519a슥12장8절(보증자)-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스가랴

안양20220519a슥12장8절(보증자)-이 근호 목사

스가랴12장하겠습니다. 스가랴12장에 여러분 아까 제가 읽어보라 했잖아요. 2절에 보게 되면,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모든 민족에게 취하게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취하게 하는 잔은,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그 문지방이 흔들린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걸림돌이 된다. 쉽게 말해서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가 되게 할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예루살렘이 자꾸 다른 민족으로 하여금 표적이 되도록 그렇게 주께서 유도하는 겁니다. 마치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도 계속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끼는 것처럼 예루살렘도 모든 민족으로부터 점령하고 싶은 도성으로 의도적으로 그렇게 주께서 가져가겠다는 겁니다.

8절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한다. 그렇게 되어있지요. 보호한다. 보호하는 방법이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이방 나라들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10절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리 죽 보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뭐냐 하면 나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굳이 예루살렘에 대해서 알아야 될 이유가 뭐냐. 그걸 꼭 알아야 돼? 그 점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나는 1층에 살고, 예루살렘은 2층에 산다. 그러면 만날 일이 없지요. 올라오는 계단도 있는 게 아니고. 엘리베이터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겁니다. 다른 세계. 예루살렘을 2층에 산다 했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1층으로 간주해 버려요. 그러면 우리집 옆집이 되지요. 그렇죠. 우리집 옆집. 옆집이 되게 되면 니나 나나 똑같다. 이리 돼요. 하나님이 갖고 있던 하나님의 계시성, 특수성이 날아가버리지요. 인간은 2층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니나 나나 똑같다 하고 전부 다 같은 1층에 옆집으로 사는 거예요. 니는 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래. 니하고 나하고는 관계없어. 이걸 가지고 보편성이라 하는 겁니다. 보편성. 그냥 다 똑같아.

그런데 2층이 되어보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보편성의 반대말 특수성이 되어버려요. 특수한 예루살렘이 특수한 곳이 되었어요. 1층에 사는 보통 사람, 이방인들은 1층, 사람들은 이리 생각합니다. 신이라 하는 것은 똑같이 하나님 앞에 똑같은 거리를 두고 똑같은 어떤 신이 있다면 혜택을 입는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내가 내리는 비는 너도 내리고, 똑같이 보는 거예요. 그 말은 우리 가운데 똑같은 우리인데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대우 받는 누군가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질투를 느끼는 겁니다. 그게 싫은 거예요. 왜냐하면 차이 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에.

서울이 왜 예루살렘보다 못해야 되느냐, 이유를 대라. 이렇게 나오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공격적으로 들이댈 때 이건 질투심이지요. 왜 서울은 안 되고 예루살렘은 특별대우 받아야 되는가, 전 세계 사람이 서울 올 때 성지 순례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예루살렘은 특별하지요. 하나님의 구원은 스가랴12장에서 나온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은 어디에서 일어난다? 서울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고 제주도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고 어디서 일어난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다. 이리 봐요. 예루살렘에서. 스가랴 예언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예루살렘은 일반도시하고 다른 특별히 주목해야 될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바로 간단한 거예요. 십계명은 하나님부터 온 것. 십계명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겁니다. 모세가 자기가 소설을 쓴 게 아니잖아요. 모세가 스스로 심심해서 산위에 올라 가지지고 목각 깎아 가지고 십계명 만든 게 아니지요. 하나님에게 직접 받은 거예요. 그래서 십계명이 커져서 예루살렘이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십계명은 율법이지요. 율법이 구체화되고 실제로 지금도 예루살렘에 있으니까 실제로 역사 속에 턱하니 자리를 잡을 때 우리는 그냥 단순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리에 대해서 새로운 시선, 새로운 쇼킹한 시선을 가져야 돼요.

이게 뭐야?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예루살렘에 외계의 UFO가 예루살렘에 앉아있다 할 때에 뭐 그럴 리 있겠지? 이 정도가 아니잖아요. 나는 목성에서 온 외계인이다. 이렇게 해가지고 전 세계의 예루살렘에 어떤 UFO에서 생중계가 된다면 집에서 라면 끓이다가 라면 냄비 놔버릴 경우가 있어요. 내가 지금 라면 먹는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요. 일단은 라면은 먹고 외계인은 나중에 하고.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이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기존에 내가 깔아놓았던 인생관 자체가 이게 뭔가 제일 중요한 것을 빠뜨리면서 잘못되게 조립한 거예요. 그걸 조립 또는 그냥 정립이라 할 수 있는데. 제일 중요한 것을 빠뜨린 채 조립된 거예요.

라는 영화에 보게 되면, 온 가족이 파리로 여행 간다고 뉴욕에 가족들이 크리스마스 특별휴가로 간다고 부산떨다가 결국은 제일 중요한 막내 악! 하는 거울보고 아버지 수염 크림 바르면서 악이라고 흉내 내는 말썽꾸러기 애 놔두고 다른 사람 다갔잖아요. 하도 애가 많으니까. 들 챙긴 거예요. 내 인생을 살면서 제일 중요한 걸 놓치고 그걸 빵구 난 채 다른 것과 얼기설기 대충 남 흉내 내고 남 모방하면서 인생 이대로 가면 뭐 그렇게 꼴지는 안하겠지. 중간쯤은 하겠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겁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빠진 인생관은 뭐가 없는가? 구원은 없습니다. 그냥 살다 죽을래. 이거에요. 왜, 보편적이니까요. 1층 밖에 없어요. 그리고 2층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계속해서 스가랴에 예루살렘에서 강조점을 두는 이유는 거기에 성전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게 스가랴의 주제입니다. 성전을 만들고 그 성전에서 만나자. 만남의 장소 있잖아요. 서울 고속도로 휴게소에 만남의 장소 있지요. 우리 거기서 만나자. 다른 곳에서는 만나지 않습니다. 그게 신약에 오게 되면 어디서 만나냐, 바로 주의 십자가에서 만나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십자가는 어디에 있는데. 그건 성령께서 없는 시공간을 십가가라는 시공간을 성령 안에서 만들어줘요. 이게 요한복음14장에 그걸 처소라고 합니다. 없던 처소. 없는 처소.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처소가 만들어져요. 닥터 스트레인지 영화에 보면 시공간이 구멍이 뚫리면서 기존 차원 말고 다른 차원이 기존 차원에 같이 이렇게 퉁하고 돌발해서 출몰해요. 다른 차원이. 그래서 이쪽에 있으면서 구멍이 나와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 보면 이쪽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이렇게 다른 세계로 통하는 겁니다.

다른 시공간에 구멍이 나가지고 그 구멍에서 이 시공간을 다른 세계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공간에 그것을 사도바울 편지에서는 그것을 ‘예수 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 안. 안은 무엇을 대립시키느냐 하면 밖을 대립시키지요. 안과 밖을 대립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구원을 얘기할 때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예수 안에서 믿고, 예수 안에서 사랑하고, 예수 안에서 소망하고, 사람들은 예수 안을 떼어버리고 믿음, 소망, 사랑 마구 동원시키는데 그거 안돼요. 베드로가 믿음, 소망, 사랑 없어가지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요, 자기 안에 있어서 그래요. 예수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서 자기 안에 있는 그 영토를 확대시키면 하늘나라가지 않겠는가 내가 만든 세계 안에 예수님을 초대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자기 세계관을 고수했던 겁니다. 그게 일차원적이지요. 베드로가 살았던 그 동네에 예루살렘 있지요. 성전 있지요. 스가랴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 만나고 성전에서 만난다고 하니까 뭐 성전 있겠다. 주께서 성전에 오시면 되니까 우리는 팔짱끼고 기다리면 된다. 이리 생각한 거예요.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생길 줄은 베드로가 상상도 못했지요. 그게 새로운 처소, 그게 스가랴에 예언하는 새로운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을 알지를 못했던 겁니다. 그러면 이 성전 예루살렘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걸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만드는 방법은 처음부터 하늘에서 시내산에서 뭐가 내려왔습니까? 율법 내려왔지요. 율법이 내려와서 성전을 만듭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의 경로를 따라가면 되지요. 율법의 경로를. 참 쉽지요.

율법의 경로가 어디로 가느냐 보면 돼요. 야곱의 12지파 가운데서 율법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처음에는 레위지파로 가요. 레위지파. 레위지파로 갔다가 그 다음에 어느 지파로 가는가, 여기에 야곱의 12지파가 있지요. 12지파 가운데 레위지파로 갑니다. 요셉지파가 둘로 나뉘어지잖아요. 므낫세과 에브라임으로 둘로 나뉘어지거든요. 에브라임은 로마에 중간에 있고요, 므낫세는 이쪽에 반, 저쪽에 요단강 건너 반, 그래서 큰 영토입니다. 에브라임. 므낫세. 길게는 납달리. 조그만 스블론. 앗셀 이렇게 12지파들이 죽 갓, 르우벤. 이렇게 죽 있는데 요 땅을 따로 따로 합치면 요셉지파지만 두 개의 요셉지파가 장자로 등극하면서 희생했다 이 말입니다. 다른 지파는 희생 안했는데 요셉이 희생했다. 그러니까 희생한 자가 장자에요. 로마서8장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맏이가 되는 겁니다.

그 맏이 덕분에 아래 동생들이 다 살아요.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라. 이래서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되는데 그것도 율법체제에 따라서 가족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그럼 12지파가 둘로 나눠지니까 12+1이 되니까 이게 13지파가 되잖아요. 여기서 하나 빠지는 거예요. 빠지면서 메타, 메타라는 뜻은 뭐냐, 초월.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를 메타 위치라. 영어로 하면 메타. 메타 위치. 우리말로 하면 초현실주의. 초(超)라는 뜻이에요. 이 지상의 현실을 초월하는 거예요. 지상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를 말하는 겁니다. 그 초월위치에다가 레위지파를 집어넣습니다.

그 레위지파는 현실에 땅을 갖지 못하고 뭐로 갖는가, 율법으로만 가져요. 그러니 율법을 배우려 하면 율법의 전문가 제사장 레위지파 제사장한테 이스라엘 전 남자들은 1년에 3번씩 1년에 3차례는 기본으로 와가지고 세미나 받아야 돼요. 세미나 받아야 됩니다.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 3절기가 있고, 그 다음에 다른 절기는 수시로 오면 좋고 그렇지요. 기본적으로 그렇게 해야 돼요.

그 율법에 의해서 제사를 드리게 되는데 그 제사가 제대로 운영이 되면 나머지 12지파가 땅을 가졌잖아요. 땅이 그렇게 농사가 잘돼요. 그들의 농업 기술이 필요치 않아요. 레위지파가 제대로 율법대로 살게 되면 율법대로 제사 드리고, 율법대로 살면, 그리고 백성들이 율법대로 지시를 받으면 그 땅은 그냥 잘돼요. 그게 뭐냐 하면 그걸 수혜 또는 다른 말로 혜택, 수혜, 흔히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운영 구조는 뭐냐 하면 그냥 선물로 받는 식으로만 살아라. 선물로 받는 식. 광야에서 만나 받는 거 하고 똑같은 원칙입니다.

레위지파가 제대로 가동되게 되면 엔진이 제대로 가동되게 되면 그들은 그 엔진 가동에 주어지는 복된 그 결과를 그냥 받는 거예요. 적들 신경 쓰지 마세요. 적들이 물러가게 되어있어요. 적들이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있어요. 쳐들어와도. 그 정도 괜찮은 시절이 잠시 있었지요. 여호수아. 여호수아 시절. 그 땐 아직도 언약궤가 살아있었어요. 그리고 사무엘도 언약궤 살아있지요.

그런데 이 레위지파가 땅이 없어요. 땅이 없으니까 양식은 누가 대주느냐, 12지파가 골고루 십일조라는 형식으로 레위지파의 생계를 보장해줘야 돼요. 그런데 이 열두 지파가 어느 때 부터 수혜, 은혜로 살기를 접습니다. 접어버리고 자기의 능력으로 살고 싶은 거예요. 능력으로 살고 싶다는 것은 내 능력과 내 자질을 본인이 다시 점검해서 모든 영광이 나에게로 쏠려서 내가 남들에게 자랑거리 되는 존재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어제 수요일 이야기 들으셨지요. 내가 선행되는 거예요. 신은 나중이고. 신은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미 그들은 유월절날 죽은 자에요. 죽은 자. 죽은 자 입장에서 주께서는 은혜로 살려주는 입장에서는 더 이상 어린양의 존재가 우선이지 자기 존재가 우선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좀 살만하니까 우리의 두뇌는 폼으로 달렸나,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우리 식으로, 내 하는 식으로 해보자. 라고 하면서 여기에 사사기6장, 7장에 보면 드디어. 어제 수요설교는 시간이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안 찾아봤습니다만, 아세라, 바알이 막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사야2장에 보면 바알과 아세라 섬기는 나라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내 나라보다 더 잘 사니까요. 자기는 은혜에 고맙다고 생각했던 게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어요.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어요.

마치 북한의 하루 300그램 양식을 배급받고 이리 사는 것이 다 어버이 수령의 은혜라. 해가지고 너무 너무 눈물 흘리며 감사하는 거예요. 그거 하다가 한국에 드라마 나오는 일반인들의 사는 살림살이와 배치되어 있는 전자제품보고 놀라버리는 거예요. 세상에 각 가정에 커피 뽑아내는 기계부터 해서 건조기부터 해서 냉장고는 최소 두 개. TV는 40인치 이상. 50인치. 차로는 여지간한 집 같으면 서울 같으면 두 대씩. 세상에 자기 사는 거 보면 꼬라지가 거지가 됐는데도 거지인줄 모르고 그동안 다 막혀가지고 어버이 수령님의 은혜 이거라도 여기가 바로 낙원입니다. 이러고 살았던 거예요. 여호와고 뭐고 속았어요! 속았어요! 이리 나오는 거예요. 속은 거예요. 선악과가 눈앞에 보이는데 저걸 안 따먹고 뭐하느냐는 거죠.

나를 잘 살 수 있게만 한다면 그까짓 거 부처나 예수나 하나님이나 그게 무슨 소용 있나. 나를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그게 최고의 신이지. 전부 다 어디를 빠져나갔는가, 레위지파한테 십일조가 안 돌아갑니다. 니가 죽든 굶어죽든 말라, 나는 꼴 보기 싫어 세미나도 참석 안 해요. 이제는 누가, 누가 잘 먹고 잘 사느냐 에요. 경쟁에 나섭니다. 그 이방 민족이 잘 사는 이유가 있었어요. 없는 사람을 등쳐먹고 잘 살았던 거예요.

왜냐하면 특히 이방민족 가나안 민족의 해변가의 민족, 해변가의 민족들은 뭐냐 무역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무역을. 시돈. 현재의 레바논의 베이루트 도시들. 무역해서 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외국 문물을 유통시키는 새로운 것을 유행시켜야 상품 가치가 올라가요. “아이고, 외국에서 이거 인기인데.” 하면 뭐 거기에 자기 제품에 식상하는 거예요. 뭐 새로운 거 없나, 눈이 희번둥 해가지고 사치품을 구매하게 되고 이 베이루트해서 어디까지 인도까지 유럽, 인도, 지중해 그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서 신제품과 더불어서 새로운 종교, 새로운 사상들이 막 밀려들어오는 겁니다.

무슨 종교든 관계없어요. 잘 사니까 됐잖아요. 잘 사니까. 잘 사는 걸로 그걸로 진리잖아요. 진리지. 여호와 백날 찾고 교회 백날 찾아도 지지리궁상으로 살아보세요. 그게. 아이고~ 나 같으면 차라리 죽는다. 사는 게 이게. 이게 사는 거냐. 레위지파가 인기가 시들했어요. 젊은 애들 교회 안 나갑니다. 이건 뭐 말씀이고 뭐고 관심 없어요. 돈이 안 되는데 뭐 관심이 돼요. 돈이 안 되는데. 그래서 레위지파가 “주여! 이대로 죽겠습니다.” 라고 할 레위지파가 아니지요. 레위지파가 돈이 안 되니까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레위지파 이 사람들이 뭐하느냐 이방종교의 제사장으로 사업을 확장합니다. 점 쳐주는 거예요. 점쳐주고, 타로점 쳐주고, 배운 게 그거 밖에 없어가지고 하나님을 빙자해서 행복하소서! 이런 쪽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만약 어느 집에 가가지고 제사장으로 늘 복을 빌어줬는데 갑자기 그 가정이 잘된다고 하면 더 큰집에서 큰 단체에서 스카웃 해가지요. 그게 사사기에 나오는 미가 집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니가 한 가정의 제사장 될래? 그 제사장 레위인 소년이 있었거든요. 이 가정의 제사장 될래? 우리 지파의 제사장 될래? 해가지고 단 지파가 이 땅 버리고 올라가면서 납치해서 가지요. 그런데 그 미가 가정에서는 그동안 연봉계약을 했다 말이지요. 옷 주고 계약금을 받았는데, 계약금을 달라고 찍찍 울고 따라오니까 단지파가 안 갈래? 하니까 예. 하고 갔지요. 완전히 그쪽은 마동석이니까. 주먹가지고 손바닥으로 쳐버리는 거예요. 힘이에요. 아까 이야기한 군사, 정복, 노예, 쟁취, 소유가 모든 게 진리가 되는 그 시대로 접어듭니다.

레위지파 작살났지요. 아무 맥도 못 추는 거예요. 언약궤 빼앗깁니다. 여기서 레위지파가 뭐로 바뀌느냐. 레위지파가 아무 맥을 못 추거든요. 이게 사사시대입니다. 여기서 누가 나오느냐, 하나님의 특별선택이 나옵니다. 그게 여기 8절에 나옵니다. 그날에 여호와가 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날에는 무엇과 같겠고? 다윗 같겠고. 다윗족속은 하나님 같겠고. 레위지파에서 유다지파로 바뀌어요. 유다지파. 다윗은 유다지파입니다. 레위지파 율법이 제사 또는 십일조 받아먹는 식으로 가동되는 그 율법이 이제는 다윗 쪽으로 갔을 때는 율법이 어떤 식으로 변형이 되어서 그 실효성, 실제적인 효과를 드러내는가, 히브리서 한 번 봅시다.

히브리서7장을 보게 되면 상당히 어렵지만, 간편하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7장3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모세가 누구를 만나지요. 시내산에서. 하나님 만나지요. 아브라함은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 다른 차원의 존재가 살렘왕 살렘이 뭐냐 하면 나중에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의 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그 예루살렘의 왕은 이상해요. 차원이 일차원적인 보편적인 이런 세상의 사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3절에 보면 없고가 그리 많아요. 아비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도 끝이 없어요. 없음으로 가요. 분명히 있는데 없어요. 멜기세덱 제사장이 있는데 그걸 사람들은 있다고 말하지 말고 없다고 이야기하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이게.

그 멜기세덱을 없다고 할 때는 그걸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사람이 실체가 있으면 있다, 없다가 되잖아요. 실체가 있으면 있는 거잖아요. 실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할 때는 이게 뭐냐 하면 이걸로 바꿔야 돼요. 맹세가 있다. 그 사람은 있어도 맹세가 있다는 거예요. 맹세덩어리가 멜기세덱이에요. 맹세덩어리. 그 맹세인데 맹세가 히브리서6장 17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 멜기세덱은 뭐냐 하면 보증이 되는 거예요. 보증. 보증인이 되는 거예요. 보증인이 되면서 아브라함은 스스로 자기를 보증하면 안돼요. 보증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자기 믿음을 믿는다든지 하면 안돼요. 그건 자기가 자기를 보증하는 거니까. 그건 소용없어요.

보증인을 따로 세웠다는 말. 보증인이 따로 있다. 오늘 강의 제목을 ‘보증인’으로 할까요. 보증인이 따로 있다는 말은 보증인을 보증인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어떤 아래 직원 자기가 다루는 직원 또는 종. 종이 누가 되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임무와 미래와 인생에 대해서 본인이 걱정할 권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미래에 걱정하면 안 되지요. 자기는 보증인이 따로 있음을 이 세상에 없고 따로 있음을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따로 새롭게 등장했음을 그 출현, 그 등장함을 보여주는 그냥 난데없는 종으로서만, 지방 지점의 어떤 직원들이라. 그냥 직원이지요. 본사 있고 협력단체 직원 정도 되는 거예요.

그럼 아브라함의 운명은 어디가 있습니까? 이 보증이 얼마나 이 인간시대가 더럽고 썩어빠진다 할지라도 보증만큼은 보증할 만큼 굳건하다, 를 보여주는 변형이 되겠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손자가 누구지요? 야곱. 야곱에게 자식이 몇 명 태어났지요? 열 두명. 처음에 이 멜기세덱의 보증이 그 열 두명 가운데 레위 지파로 갔다가 그 다음에 어느 지파로 간다? 유다지파로 가면서 보증의 굳건함을 보장해 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7장 6절에 나옵니다.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레위 지파는 아무것도 안 받았지만 레위 지파가 율법의 제사하는 일에 가담해야 되는 것은 그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났잖아요. 레위 지파는 안 만났잖아요.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브라함 안에 레위지파가 이미 합류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거예요. 여기서. 이미 그 안에 합류되어 있는 거예요. 그걸 영어로 하면 디벨롭(develop)이라 하는 거예요. 디벨롭이라 하는 것은 우리말로 발전이라는 말이 있어요. 발전. 그런데 발전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디벨롭이라 하는 것은 그것보다도 더 깊은 뜻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화, 또는 현상 같은 말이지요. 사진 인화하고 사진 현상이지요.

감추어졌는데 어떤 화학 물질이 들어가면 거기서 발그스레 이미지가 거기에 사진이 비로소 발그스레 드러나지요. 성도는 별 볼 일 없는데 성도가 사건과 만나면 거기서 누가 나오느냐 하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보증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그런 사건에 말려드는 존재에요. 이게 성도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게 없다는 거예요. 내 운명, 내 미래, 내가 걱정하고 염려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율법으로 니는 죄인이기 때문에 저주받아야 된다는 하나님의 맹세와 계시 안에서 그 안에서 그걸 받아들이는 안에서 성도는 이미 용서 받은 자로 죄 지은 사람은 지옥 간다는 것을 발설해야 될 임무를 갖고 있습니다.

본인은 이미 용서 받은 입장에서. 그럼 남들이 뭐라고 하지요. “니는 어떻게 용서 받았느냐?” 하지요. 그렇다면 성도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그건 맹세 때문에 그래요. 맹세.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 만났던 맹세 안에 레위 지파만 들어있는 게 아니고 유다 지파만 들어있는 게 아니고 오늘날 모든 성도가 다 들어있었던 거예요. 좀 이런 예를 들어서 더럽기는 하지만 구더기처럼 다 들어있는 거예요. 구더기처럼. 그 안에 구더기처럼 다 들어있는 거예요. 된장 뜰 때 잘못 떠버리면 구더기..., 아이고, 괜히 했다. 오골 오골 다 들어있지요. 된장 맛있어요. 그러면.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설명이 안돼야 내가 나를 지킬 이유가 없어요. 왜? 멜기세덱이 나보다 먼저 선행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도는 온갖 이단들을 다 접해야 돼요. 온갖 종교. 온갖 이단들 다 접해야 돼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선행 존재로 보면서 나왔던 그들이 조작해낸 하나님. 그 하나님이 그들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거 우상이거든요. 있지도 않은 하나님은 맹세로 오지, 이렇다 하고 신으로 오는 게 아니거든요. 맹세로 와요. 맹세로.

그래서 이 맹세에서 아까 레위지파까지 왔잖아요. 유다 지파 오게 되면 유다지파가 알려주는 바는 그 맹세는 결코 우리 인간이 이루질 못한다.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유다 지파가. 유다 지파의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건이 뭐냐 하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게 아니에요. 소년 다윗이에요. 소년 다윗.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거예요. 진짜 골리앗 입장에서는 화날만해요. 소년 다윗 얕보다가 한 방 먹었잖아요. 만약에 안 죽었으면요, 그 다음부터는 우리 정식으로 한 판 하자. 너 이리 와! 내가 그 때 너를 얕봐서 미안한데 삼심판이잖아. 진짜 니가 센지 한 번 해보자. 이리 나온다면 다윗은 그 도전에 응합니까? 응할 필요가 없지요. 왜? 본인이 이긴 게 아니니까.

내가 이겼으면 나한테는 어떤 대단한 게 있는 줄 알아. 이렇게 하는데. 본인한테는 아무 능력이 없어요. 능력이 없는데 능력이 없고 뭐만 있느냐, 사건만 있어요. 자꾸 사울이 가만히 있는데 자꾸 찝적거려. 나를. 다윗은 자꾸 도와주려고 해요. 자꾸 도와주려고 해요. 사울은 계속 달려드는 거예요. 갑자기 정치적 상황이 떠올라서 차마 말을 못하겠습니다. 말을 못한다 했다가 말을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광주 간 거요. 전라도 당이라는 빌미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자기 국민당 다 데리고 간 이유가 우리 이제 광주 사태 너그 땅 아니다. 이리 된 거죠. 광주 사태 책임지라. 이런 식으로 더 이상 공격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인용하는 자체가 무리이기 때문에 제가 여기서 말을 아끼겠습니다. 더 하게 되면 정치에서 색깔 드러나요. 저 정치에서 색깔 없습니다. 그냥 무채색이에요.

이게 다윗의 입장에서는 내가 왜 사울에게 쫓기는 이유를 몰라요. 그런데 왕이 되어가요. 그게 희한한 거예요. 심지어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부하 직원의 아내와 간음하고 뭐해요? 죽여버리지요. 그럼 이건 누가 봐도 뭡니까? 다윗은 사형감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왕이 아니라 초월적 왕이 되어버려요. 이스라엘.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아무 능력이 없어요. 내 구원에 내가 보탤 수 있는 아무것도 없음을 깔끔하게 정리가 되기 때문에. 나의 모친에서 내가 태어났습니다. 나는 죄 그 자체입니다. 세상에 누가 니가 어떻다 라고 누가 이야기해줬겠어요? 주께서 유다지파 다윗에게 그런 식으로 작용을 한 거예요. 그 작용을 한 것을 시편51편에서는 뭐냐 하면 그게 성신으로 이렇게 한 겁니다. 요새는 성령이지요. 성령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간음하고 살인하도록 그렇게 조정을 한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죄인의 것은 받지 않음으로 이게 뭐냐 하면 율법의 대완성이 되는 거예요. 상한 심령을 받음으로 비로소 율법은 완성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예루살렘이에요. 시편51편 한 번 봅시다. 17~18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은혜지요)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그 다음에 무슨 성을 쌓습니까?)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이미 다윗은 선지자에요. 선지자라는 말은 보증인이 따로 있다는 말이에요. 보증인. 멜기세덱은 변하지 않아요. 있음의 세계에서 없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늘 없음이 메타에요. 초월적 입장에서.

있음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증거로 활용하는 권한이 없음에 있어요. 있음에 있는 게 아니고. 없음에 있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그것이 모든 아비도 있고, 어미도 있는 인간들을 자기의 종으로서 드러내지요. 일종의 사건의 흔적처럼.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라. 그 때 주께서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 이건 누가 하느냐 하면 이건 원래 레위 지파가 해야 되는데 레위 지파가 날아가고 지파가 어느 지파로 바뀌었지요? 유다 지파로 바뀌었지요. 유다 지파는 왕의 지파지요.

왕 자신이 번제와 제사에 제사장도 되고, 그 다음에 제물도 되는 거예요. 왕 자신이. 그러니까 이건 다윗이시라고 하면 안 되고 다윗 같은 분이 오실 때. 그 분이 오실 때 그게 가능한 겁니다. 그 분이 오실 때. 그래서 다시 히브리서 7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히브리서 7장에서 15절에 보면,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멜기세덱이 살렘, 예루살렘의 제사장이었잖아요. 아브라함 만날 때. 그렇지요. 이건 2층이에요. 2층입니다. 초월의 세계에요.

1층이 뭐냐, 1층에 레위 지파가 이미 1층에 제사장 되었지요. 그런데 이게 별다른 다른 지파의 제사장 레위 지파가 제사장 되다가 이제는 유다 지파에서 영원한 멜기세덱의 내용의 보증을 맹세를 품은 제사장이 등장하는데 그게 히브리서7장23절에 보니까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이 제사장은 어느 지파입니까? 레위 지파지요. 그 다음에 24절,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예수님은 어느 지파입니까? 유다 지파로 오셨어요. 지금 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다지파로 왔다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이 율법대로 시행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증명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율법이 무효화된 게 아니고 실효성을 가져서 그 결과가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 그 자체가 온전한 제사장으로서 온전한 제물로 더는 다른 제사가 필요치 않다. 다른 제사가 필요치 않는 거예요. 다른 제사가 필요치 않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 구원 받은 자가 내놓을 게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그러면 처음부터 유다지파가 오지 왜 예수님이 마지막에 레위 지파를 거쳐서 오느냐, 레위 지파를 거쳐야 인간은 왜 율법을 못 지키는가, 죄인으로 드러나는 거죠. 바로 그 과정을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과정을 반복되는 거예요. 왜 나는 아닌가, 왜 나는 아니어야 하는가, 왜 내가 내 힘으로 내 믿음, 사랑, 소망으로 구원되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이미 나 말고 특수한 분이 모든 일을 마감시키기 때문에 일이 이미 끝났어요.

노가다 시켜가지고 취직했다 하는데 뭐 통보를 잘못 받아가지고 11시부터 일한다고 잘못 받아가지고 가보니까 초자 현장 일군 되어 가보니까 벌써 고참들 다 집에 가고 없어요. 왜? 일이 끝났어. 11시가 아니고 새벽4시에 오라고 했잖아. 4시에 와가지고 덥다고 11시까지 하고 그 다음부터는 오후에 일 안 해버렸어. 현장에 그런 일 많지요. 이렇게 날씨가 비가 온다든지 이렇든지 하면 빨리 와서 진도는 나가야 되겠고 공정은 맞춰야 되겠고 날씨 안 좋을 때는 빨리 와서 하는데, 지가 딴 생각하다가 시간을 못 맞춰가지고 다 끝나버렸어. 끝났지요. 우리는 이미 끝났음을 보여주는 전리품이 성도라 하는 겁니다.

“예수님 내가 홀로 다 이루었어. 니는 원수도 안 되고 합격되었어.” 라는 통보를 품어야 돼요. 우리가. 그 통보를 품고 살아야 돼요.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종교 이런 거 성경의 내용들을 우리가 다 알고 있어야 되지요. 인간이 부질없는 짓이 어떤 짓이 부질없는 짓인지를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전부 다 경험에 나서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21장42절,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건축자들의 버린 돌. 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일하실 때에 왜 인간이 필요한지를 아시겠지요. 인간이 필요해야 인간의 보편성 안에 들어있지 않는 방식으로 너희들이 구원됐음을 인간이 동원해야 그걸 보여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바리새인들이 기도하니까 그 기도 아니다. 금식하니까 그 금식 아니다. 구제하니까 그 구제 아니다. 바리새인이 왜 필요합니까? 아니다, 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거 아니거든. 그거 복음 아니거든. 계속 아니다, 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가 필요한 거예요. 이게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다. 이 말이에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로마에 어떤 한 여인이 있는데, 이름이 아리아인데 한 여인 아리아는 그 남편 이름이 가에시나 포에투스인데 그 사람이 왕의 신하인데, 왕한테 믿보여가지고 반역했다는 혐의를 받아가지고 왕의 진노를 사가지고 왕이 칼을 던지면서 “어이! 가시 죽어!” 그러니까 그 가에시나포에투스가 벌벌 떨면서 “흐흐흐 못 죽겠어요.” 이렇게 하니까 옆에 아리아 남편이 칼을 뺏어가지고 “거 봐! 자기 가슴을 확 찔러 봐! 거봐. 죽는 거 별거 아니잖아.” 물론 지가 칼로 찍어 죽었지요. 나처럼 죽으란 말이야. 죽음 별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건 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그동안 인간들이 자기가 자기 인생을 보증한 거예요. 반칙이지요. 내 인생을 내가 나를 격려한 거예요. 참아. 잘 될 거야. 막 이리 하면서 계속 격려한 거예요.

힘 들 때는 소주 한 병 까가지고 노래방 노래 불러가면서 내일은 해가 뜬다. 노래 막 부르면서요, 스스로 자기에게 힘을 부여하면서, 사표는 내더라도 내일 또 열심히 싸워야지. 직장인이 매일 그렇지요. 뭐. 여기서 주저하면 안 돼. 다시 일곱 번 넘어져서 여덟 번 일어나야 돼. 이런 식으로. 베드로 같아요. 주님, 제가 저 사람 여섯 번 용서했는데 대단하지 않습니까. 일곱 번 용서해야 됩니까.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여섯 번 용서하고 자랑질 할 때 주님께서는 숫자를 확 늘여버렸지요. 일흔번에 일곱 번 하고 나 찾아오너라.

그러니까 이게 인간은 오직 자기만 믿어요. 자기 할 도리를 믿어요. 자기가 자기를 보증하는 그런 인생. 이게 일차원적이고 1층에 있는 거예요. 아래층. 누구의 보증인이 아니고 내가 나를 보증하면 아무도 내 인생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 라는 그 발상 자체가 이건 성공해도 절망적이에요. 200억 벌어도 절망이고 수천억 벌어도 절망이에요. 이건희 딸이 자살했잖아요. 뉴욕에서. 1번, 밥 못 먹어서 자살했다. 2번, 용돈 떨어져서 자살했다. 몇 번입니까?

허무한 거예요. 우울증 걸려서. 허무한 거예요. 도대체. 성과는 내야 되겠지. 니는 삼성의 집안이라 성과내야 되지. 해보니 일이 잘 안되지. 뜻대로 안되지. 집안에서 원하는 것과 지가 하고 싶은 일에 또 어떻게 됩니까. 충돌이 일어났지요. 김도올 하는 사람이 있어요. 김용옥. 김용옥 그 사람 딸은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무슨 희한한 예술한다고 돌아다니면서. 내 인생 내가 산다.

우리는 내 인생 자체가 아예 없음을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감사해야 돼요. 그건 마귀가 쓸데없이 허풍만 댔다 갖다 부은 거예요. 지금껏 살아온 것은 주님의 약속, 십자가의 맹세, 복음 때문에 살아 온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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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