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미가 6장 9-16절(예언의 궤적)220608-이 근호 목사
22강-미가 6장 9-16절(예언의 궤적)2206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6장 9-16절까지입니다.
미가 6:9-16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찌니라 악인의 집에 오히려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거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궤사하도다 그러므로 나도 너를 쳐서 중히 상하게 하였으며 네 죄를 인하여 너를 적막하게 하였나니 네가 먹으나 배부르지 못하고 속이 항상 빌 것이며 네가 감추나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네가 씨를 뿌리나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을 밟으나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으나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지키고 그들의 꾀를 좇으니 이는 나로 너희를 황무케 하며 그 거민으로 사람의 치솟거리를 만들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
속이고 속는 세상, 그 세상 속에 더불어 함께 벌을, 벌을 같이 받고 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나는 착한데, 속이는 것은 나 빼놓고 남들 다 속이는 식으로 세상 살아가는데 이상하게 징벌은, 가뭄은, 코로나전염은 전면적이에요. 같이 망하고 있는 겁니다.
억울하다, 뭔가 일이 뭐 잘못되었다,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차이가 나고 차별이 있어 보이지만 이 벌 받는 데 있어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이 다 같이 망해가고 있습니다. ‘나는 착한데 세상이 악하다. 그래서 벌을 받아도 나는 쏙 빼놓고 나 빼놓고 벌 받을 것’이라는 그러한 생각은 실제로 말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보면 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늘 이렇게 말은 안 해도 다가오는 느낌은 같이 망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너 나 차이 두지 않고 같이 애굽에서 나와서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홍해 건너갈 때도 같이 나왔고, 요단강 건너갈 때도 같이 나왔고, 망할 때도 같이 망했고,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우상을 섬길 때도 말릴 사람 아무도 없이 그 우상에 대해서 같이 우상을 섬기는 현상을 여러분이 구약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현대인들이 나만 잘하면 되지, 하는 이러한 의식과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이 세상 다루는 방식과는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나만 잘하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이 세상에 통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메뚜기 떼가 와서 덮친다면 그 수천만 마리 메뚜기가 우리 집 곡식은 동그랗게 비워놓고 옆집 곡식 다 뜯어 먹고, 그런 것 없습니다. 그것도 동그랗게 비워두는 것이 아니고 하트모양으로, 나 ‘사랑해요’ 이렇게 하트모양으로 우리 집만 놔두고 나머지는 다 행악질하고 그런 것 없습니다. 당할 때 다 같이 당하는 거예요.
그게 이유가 있어요. 이걸 저는 ‘우상중독’이라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우상에 대해서 ‘중독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그래요. 그렇게 선지자들이 우상 섬기지 말라, 했지만 그들은 기필코 그것도 전면적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다 우상을 섬겼어요.
이 말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어두운 환경이 감당할 수 없도록, 감당할 수 없는 어두운 세력이 감당할 수 없도록 우리에게 덮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발견해야 돼요. 나만 신앙생활 잘하면 된다는 이것은 정말 이것은 경솔한 어처구니없는, 사태파악이 안 되는 경솔한 생각입니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자신도 모르고.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세상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심판을 가하고 전면적으로 망한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그 속임수, 11절부터 나오는 속임수, 저울을 속인다는 그것도 특정 인간이 속였다는 말이 아니고 다들 속이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12절에 “거민들은 거짓을 말”한다 할 때 “쟤는 거짓을 너무 심하게 하고 나는 가끔가다 거짓말했어요.” 이것은 안 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사람의 입장이 되고 그 사람의 가정환경이 되면 우리도 그 사람 못지않게 거짓말 달고 살아야 되는 그런 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저울을 고쳐서 부정한 뒷주머니를 차는 이야기, 그 이야기가 11절에 나오거든요.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집 다 속이는데 나만 안 속이면 나만 바보 되게요. 이게 뭐 서문시장이나 칠성시장 상인들 다 마찬가지예요. 담합 해서 가격도 올리고, 본인만 안 올리면 본인만 바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그런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전면적으로 왜 이렇게 다 속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 14, 15절에, “네가 먹으나 배부르지 못하고 속이 항상 빌 것이며 네가 감추나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네가 씨를 뿌리나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을 밟으나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으나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이것은 뭐냐? 특정 집에만, 나쁜 짓 한집만 경제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온 나라 전체가 전면적으로 경제가 다 나쁘고, 특히 오늘 본문 14, 15절은요, 경제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고 앗수르라는 이방의 힘센 북방 대제국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와가지고 각 집에 비축해 놓았던 여분의 식량과 여분의 재산까지 전쟁통에 다 날아가게 만들었다는 그 이야기를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어요. 이스라엘에게. 자, 이것이 한마디로 어떻게 정리가 되지 않겠는가? 어떻게 정리되겠는가? 정리된 것이 16절입니다.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지키고 그들의 꾀를 좇으니”
특정 사람은 안 지켰다, 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따라갔어요.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지키고 그들의 꾀를 좇으니 이는 나로 너희를 황무케 하며 그 거민으로 사람의 치솟거리(모욕거리, 웃음거리)를 만들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눈치채야 됩니다. 도대체 성경 말씀이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도록, 이 세상 자체가 전면적으로 속고 속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몰아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예언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예언에 대해서 9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완전한 지혜, 이게 하나님의 예언이에요. 율법 정신이고 완전한 지혜예요. 완전한 지혜가 완전한 지혜답게 되기 위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어떤 절차가 필요한데 어떤 절차냐 하면, 속고 속는, 모든 이스라엘 전부 다가 한꺼번에 전면적으로 다 망해도 할 말이 없도록 일단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버려요.
모든 자가 우상을 섬기도록 그렇게 유도해 가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속여가면서 사는 것, 탐심을 내는 것, 그걸 의도적으로 범람케 해 버립니다. 그걸 유행시켜 버려요. 그것은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거기서 유도해 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런 식으로 이끄시고 간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예언이라는 것은 언제 예언이 감지되느냐, 느껴지느냐 하면, 더이상 우리가 다시 일어설 여지가 전혀 없을 때, 쫄딱 망했을 때, 이제 속이는 것도 밑천 다 떨어졌어요, 많이 속여 왔지만 더 남아 있는 속임수도 없을 때 이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망하는 것만 당연하게 주어지는 그런 상황에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전이었지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거였군요.” 안 망하는 자 되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어떤 식으로 살아도 기어이 쫄딱 망하게 하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몰아붙임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듣는 여러분들이 걱정이 늘어지지요. ‘아니 지금 약간 살만하고 숨 쉴 만 한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쫄딱 망하는 일이 더 남아 있었더라는 말입니까?’ 그렇게 여러분이 생각하신다면 필히 망해야 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지금 내 처지가 쫄딱 망했다고 칠 때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의지하지 않겠다.’ 이러면 그 사람은 뭐 한 달 수입 1500만 원 정도, 그런 데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예언을 접할 수 있는 거예요, 예언을! 왜? 더이상 나에게 어떤 기대를 안 하기 때문에.
뭐 가만 있어도 돈이 한 2천만 원 막 들어오고, 땅이 한 열 배 올라버리고. 그런데 그런 것이 전혀 좋지도 않고 그런 것에 신경도 안 써요. 왜?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의 예언하심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러면 그 사람은 한 달 1500만 원 받아도 쫄딱 망한 상태에 있는 거예요. 아파트 100평짜리에 살면서 쫄딱 망한 게 돼요. 망했는데 나한테 무슨 기대를 해? 망해버렸는데!
바로 이러한, 좀 여러분 보기에 이상하다 싶으면 이렇게 정돈하시면 깔끔합니다. 오늘 본문 10절부터 보면 속고 속이는 거지요. 누가 누구한테 속이는가? 사람 대 사람으로 속여요. 하나님께서 출발점은 뭐냐? 일단 사람 대 사람의 관계 속에 인간을 놓이게 합니다. 그럼 뭐 서로 속고 난리도 아니지요. 안 속은 척하면서도 속고, 속이면서도 안 속이는 것처럼 하고, 뭐 그것 연구한다고 굉장히 분주하지요.
첫 번째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 그 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그걸 역사라고 합니다, 역사. 두 번째,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쫄딱 망하게 합니다. 망하게 하는데 역사를 통해서 역사를 망하게 하는 거예요. 그 역사를 통해서 역사를 망하게 하면서 거기에 위에서, 역사끼리 망하는 그 위에서 우렁차게 들려오는 소리는 “이게 바로 예언이었다!”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 선지자들이 해요. 설교 마지막에 여러분이 아실 겁니다. 그 역할을 오늘날 성도들이 해야 됩니다. ‘성도들이 내 일 바쁜데 그렇게 선지자 노릇을 하느냐?’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다 수가 있습니다. 선지자 되는 방법을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 속고 속이면서, 서로 다퉈가면서, 그걸 역사, history, 역사라고 이야기하고 그 역사는 역사에 의해서 다시 쫄딱 망하고, 무너지고 세워지고, 다시 무너지고 할 때 그 역사가 역사를 치는 그 역사가 벌어지는 그 현장 위에서 하나님이 “내 예언대로 되었다.” 이렇게 해요. 예언대로 되었다.
그래서 예언은 역사에 구멍을 내버리는 거예요. 절망을 주는 겁니다. 내 인생에 태클을 거는 거예요. 내 인생에 구멍을 내버려요. 빵꾸가 나는 겁니다. 더는 내가 내 식대로, 남들과의 관계에서 내 식대로 같이 살자, 같이 살자, 섞여서 같이 살자, 사이좋게 살자, 하는 그 내 수법이 전혀 먹히지 않도록, 내 수법에 완전히 펑크가 나고 구멍이 나게 만드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유명한 말이 “총 맞은 것처럼~” 총 맞은 것처럼. 거기서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슬픔이 쏟아져 나오지요. 그 구멍에서 아픔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게 예언이에요. 역사를 공격해서 역사 한 가운데가 뻥, 하고 뚫리게 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역사는 애초부터 없었다. 모조리 다 하나님의 예언한 대로 진행될 뿐이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세 번째, 세 번째를 지금 미리 말씀드릴게요. 우리의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에. 세 번째가 뭐냐? 예언과 예언이 만나게 되어 있어요. 첫째는 사람 대 사람이 만나서 역사를 이루고, 두 번째는, 그 역사와 예언이 만나서 역사가 구멍이 나고, 세 번째는, 그렇게 구멍 낸 그 예언과 그리고 완성된 예언이 만나는 겁니다.
첫 번째는, 사람 대 사람의 만남. 두 번째는 사람 대 예언자의 만남. 세 번째, 하나님과 하나님의 만남. 이게 바로 하나님 일의 진행 순서입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나서서 하나님이 단독 해결해 버립니다. 완성해 버려요. “인간은 빠져라.” 주님이, 하나님이 나서서, 주님이, 주께서 주에게 복종하고 주의 말씀을 주님이 나서서 실현함으로써 만사가 마무리 지어지는 그 절차, 원대한 하나님의 진행한 일의 대단원이 그 모습입니다.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복음 좀 알았다고 하고, 신앙생활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1번, 2번, 3번 가운데서 1번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내가 세상에서 밥 먹고 살아야 되는데 맨날 인생이 쪼들리고 힘드니까 ‘이제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복음을 갖고 이 세상 살아가야지.’ 이것은 1번입니다.
사람 대 사람에서 자기가 이 망하는 세상과 같이 휩쓸려 가지고 나만 살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처음에 뭐라 했던가요? 인간 대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는 예수 믿어도 코로나 걸리는 것 여러분이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믿는데 왜 코로나 걸리지요? 전면적이에요, 전면적! ‘나는 다를 거다.’ 그런 생각 마시기 바랍니다. 전면적이에요, 전면적. 망해도 다 똑같이, 다 같이 망합니다. 안 망하려고 하지 마시고 먼저 총알, 예언의 총알을 맞고 빵꾸나야 돼요. 총알 갖고 빵구 나겠어요? 대포알을 맞아야지요.
대포 맞으려 하면 북한의 김정은한테 가면 대포 잘 쏜답니다. 자기 이모부도 대포로 쐈으니까. 그래야 구멍이 클 게 아니겠습니까? 예언이 그 하나님의 말씀 예언이 아예 정통으로 내 중심부, 중앙 부분을 바람이 통하도록 뻥, 하고 구멍을 뚫어 놔야돼요. 그게 두 번째 단계입니다. ‘나 더이상 경쟁하지 않는다. 나 사람하고 경쟁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하고 경쟁하지 않는 그것만 해도 여러분 “대한독립……” 이건 아니지, 여러분, “하늘나라 만세!” 불러야 됩니다. 그것만 해도 자유입니다, 자유, 엄청난 자유입니다. 직장생활하면서 사람하고 상대 안 하지요. 어때요? 자유잖아요. 기숙사 방에 누가 들어오든 말든 상대 안 하잖아요. 사람하고 비교하거나 경쟁하거나 상대하지 마세요.
왜냐? 그 사람이 나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내 중심부가 허하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내놓을 것이 이미 뻥, 하고 구멍이 뚫려있기 때문에 상대방과 비교 대상 자체가 안됨을 본인이 알고 있어요. 예언이 지나간 자리, 예언이 지나간 자리에요. 이게 두 번째입니다. 아직 세 번째는 말씀 안 드렸습니다. 그것은 더 큰 자유기 때문에 좀 남겨 둬야 돼요.
두 번째, 뚫고 지나가려면 소위 배알이 없다 하지요. “너는 뭐 위신도 없나?” “예,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에 의하면, 세상이 어떻게 아등바등 출세하려고 성공하려고 애써도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그게 전면적으로 망하는 하나의 절차인데 그들은 지금 그걸 모르고 있는 거예요. 저 높은 곳에 출세하고 성공하고 가 봤자 망해, 가봤자 망하는 거예요.
엄 홍길은 전 세계 8천 미터 영봉 14좌를 등정 다 했답니다. 하니 뭐합니까? 나중에 죽을 건데요. 기네스북에 가장 오랜 사회자로 오른 “전국~! 노래자랑~!” 하니 뭐합니까? 송 해, 죽어버렸는데. 죽고 나면 뭐 아무것도 없어요.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전면적으로 다 죽습니다. 왜냐? 예언에 의하면 인간은 죽도록 되어 있어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죽게 되어 있어요. 참 간단하쥬~! 참 쉽쥬~!
얼마나 예언이……, 그 예언을 미리 폭탄 맞고 빵구 나야돼요. ‘아, 내가 죽는구나. 나는 진즉 그걸 왜 몰랐을까?’ 운 없어서 죽는다고 생각했지 당연히 죽는다고는 생각을 못 했거든요. 우리 맘대로. 우리가 얼마나 건방집니까? 당연히 죽는다는 것이 겸손하지 운 없어서 죽는다? 이것은 교만의 교만입니다.
제가 어릴 때 봤던 영화에 가 있는데 람보 특징이 맨살에 총알로 둘둘 감았어요. 람보, 수건 하나 머리에 두르고요. 베트남 밀림에서 덥기는 얼마나 덥겠어요. 머리는 기르고, 수건은 하나 이마에 두르고, 웃통은 벗었는지 런닝구 하나 입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온 총알로 다 감은 거예요. 왜 총알로 감았는가? 이만한 무거운 화기를 들고 총알로 감았는데 왜 감았는가? 총알 안 맞으려고. 구멍 안 나려고.
그 람보가 그 당시 영웅이었어요. 람보1, 람보2, 람보3, 나중에 람보4까지 나왔어요. 다 늙어가지고. 그 영웅을 우리가 얼마나 나의 영웅시했습니까? 버티고 있고 내세울 것이 있는 것이 부럽다. 그걸 가지고 뭐냐? 그걸 속임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속임수요.
안 그런 척하면서 어떤 목표, 반드시 장악하고 싶은 목표와 목적을 노리고 모든 인간이 살아가니까 하나님의 멸망이 전면적이에요, 전면적. 그저 인간 대 인간의 관계, 그저 역사 속에서 얼마나 유명세를 떠는가, 그것뿐이에요. 자기 안 다치려고.
그래서 좀 다치면 찔찔 짜면서 “위로해 주세요.” 뭐 위로할 게 있어야 위로하지. 위로를 왜 해줍니까? 위로하면 안 돼요. 구멍이나 나 버려라! 왜 위로합니까? 아직도 자기 가진 게 있어서 그거 땜질해 달라고, 위로해달라고. 그거 구멍 더 나버려라. 마땅한 게 뭐냐? 이 땅에 죽는 게 마땅해요.
제가 지난 오후 설교 때 했잖아요. 주변 정리하라고요. 사람들이 자유를 얻는 방법은 죽을 준비하면 제일 자유로워요. 자꾸 살려고 하는데 죽을 준비하면 목적과 목표가 날아가 버리거든요. 목적과 목표 날아가니까 뭐 살 이유가 없잖아요. 지금 죽어도 괜찮지요.
그렇다면 16절, 진짜 해답을 봐야 되겠지요.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지키고 그들의 꾀를 좇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경에 사람 이름, 우리나라 사람 이름도 아니고 남의 나라 사람 이름이 이렇게 있으면 짜증이 나요.
오므리는 누구고 아합은 누구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렸을 때, 요새 말로 하면 북쪽 북한에 왕들의 계보가 있어요. 첫째가 여로보암, 두 번째가 그 아들 나답입니다. 그 신하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바아사라는 신하가 나답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노릇 했어요. 왕 노릇 좀 오래 해 먹다가 자기가 왕이 되었으니까 또 자기 아들 엘라한테 왕위를 물려줬습니다.
그랬는데 시므리라는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켰어요. 군사 정변을 일으켜서 그 엘라를 죽여버렸어요. 죽이고 난 뒤에 디브니라는, 이름도 어려운데, 그 사람이 또 시므리를 죽여버리고 왕이 되었는데 그 왕의 통치 기간이 일주일입니다.
열왕기상을 보겠습니다. 15장 28, 29절에 보면 그 이야기가 죽 나옵니다 “유다 왕 아사 제 삼년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 종 실로 사람 아히야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아히야는 선지자입니다. 또 30절에 보게 되면 “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죄로 인함이며 또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동시킨 일을 인함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을 때에 무엇을 여러분은 감을 잡아야 되느냐 하면,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이게 짜인 각본대로 간다는 사실, 여러분이 그걸 감을 잡아야 돼요.
예언이 예언되기 위해서 역사가 있는 거예요. “역사, 너 똑바로 살아.” 훈계하려고 예언이 있는 게 아니고! 아, 여러분, 이점 모르면요, 전혀 하나님 모르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각본대로 범죄해야 돼요. 무엇이 중헌디! 무엇이 중허냐 하면 예언이 중하기 때문에 그래요. “역사 속에서 내가 사는 게 중한 것이 아니고 너도 각본대로 갈 뿐이야.”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언이 중요한 거예요, 예언이!
인간이 속고 속이는 것은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속이는 거거든요. ‘나 살고 너 죽자.’ 하지만 주님께서는 뭐냐? 네가 중요하고 또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언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그들을 멸망할 때 전면적으로 멸망시키는 겁니다. “어느 것 하나 내 멸망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날 위인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름대로 뭐 착실하고 착하고,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언대로 다 망해라.”
예언대로 모든 인간은 탐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우상 섬김이 이게 대세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나답이 누구한테 죽는가? 바아사한테 죽어요. 그다음에 16장에 들어가서 마찬가지입니다. 2, 3절에 보면, “내가 너를 진토에서 들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저희 죄로 나의 노를 격동하였은즉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여기서 집이라 하는 것은 아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바아사의 아들이 엘라거든요. 이 이야기들이 너무 길기 때문에 시간관계상 생략을 좀 하겠습니다. 9, 10절에 “엘라가 디르사에 있어 궁내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마시고 취할 때에 그 신복 곧 병거 절반을 통솔한 장관 시므리가 왕을 모반하여 들어가서 저를 쳐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 곧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칠년이라.”
시므리라는 사람은 국방부 장관이지요. 그 사람이 엘라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다. 그런데 열왕기상 16장 12절에 보면,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후로 바아사를 꾸짖어 하신 말씀같이 되었으니”
그러니까 항상 일은 터지고 난 뒤에 “그럴지 알았지롱!” 이렇게 되는 거예요. 13절에 “이는 바아사의 모든 죄와 그 아들 엘라의 죄를 인함이라” 죄를 인함이라.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한 느낌이 드는 게요, 죄짓기 전에 말리면 되는데 절대로 안 말립니다. 왜? 하나님의 망함은,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안 망하고 할 것 없이 전면적으로 다 망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인간은 다 망해야 돼요.
15절에 보면, “유다 왕 아사 제 이십 칠년에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칠일 동안 왕이 되니라” 7일 동안 왕이 되었어요. 누가? 시므리가. 디르사라 하는 것은 수도 이름이고요, 북쪽 이스라엘 수도 이름이에요. 7일 동안 왕 되고 난 뒤에 누구한테 당하는가? 디브니한테 당해요. 디브니는 누구한테 당하는가? 오므리한테 당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므리의 율례와” 그 오므리 아들이 누구냐? 아합이에요. 자기가 정권을 쟁취해 놓고 그들도 똑같이 후손들에게 또는 다른 장군들에게 당해서 자기 자식의 대가 끊어져 버리는 것, 이걸 가지고 역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역사. 역사는 이렇게 흐릅니다. 역사 안에서는 성공은 없습니다. 역사 자체가 이미 “다 죽자.” 이게 역사입니다. “어느 하나 죽음에서 빠져나올 인간 없다.” 이게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안 망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역사 자체가 망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안 망하는 방법은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역사 안에 있으면서 예언에 대해서 미리 눈치채는 겁니다. 예언이 와서 내 가운데를 뚫어서 미리 망하는 거예요. 나 자신이 미리 망해버리는 겁니다.
구멍 난 것처럼 완전히 내 안에 구멍이 나서 이제는 시시하게 인간하고 상대하고 인간하고 경쟁하는 일은 없기, “그런 일은 있기 없기?” “없기!” 절대로 그런 일은 없기. 뭘 해도 지금 살아가는 이 모습이 하나님의 예언에 의하면 망하는 각본이기 때문이에요.
각본을 받았는데 모든 사람 중에서 성도한테만 해당 되겠지요. 성도는 예언을 알았기 때문에, 예언은 완전한 지혜를 말합니다,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완전한 지혜를 받았기 때문에 각본을 받게 되면 이렇습니다. 〔오늘 아침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어머니, 잘 주무셨습니까?”〕 할 때 각본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 각본의 제목이 시나리오 제목이 그래요. 영화 제목입니다. 중간 26페이지 보게 되면, 〔어머니 일어나실 때 “잘 주무셨습니까?” 하고 인사한다.〕 그래서 인사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출근해라.” “예, 알겠습니다.”〕 이거 전체 망하는 가운데 하나의 대사입니다. 뭐 재미있지 않습니까? 인사하나 안 하나 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도 전면적으로.
그렇다면 세 번째가 중요하지요. 다 망하고 망하게, 예언은 역사가 망하도록 추동한다. 추동이라 하는 것은 부추기는 거예요. 역사를 끌고 갈 때 질질 끌어서 “망해라! 이 인간 역사야.” 망하도록 한다면, 그렇다면 세 번째 예언과 예언의 만남은 어떻게 되는가?
열왕기상 11장 3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열왕기하 8장 19절에 보면 좀 더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
왜 북쪽은 다 망하는데 남쪽은 꾸역꾸역, 이렇게 가늘가늘 이어가는가? 그것은, 유다 지파는 마지막 하나님이 준비한 다윗에게 약속한 예언한 등불이 있어요. 그 등불은 장차 다윗이 와가지고 영원한, 영원한 왕국 하나님 나라를, 왕국을 세우겠다는 그 예언을 위해서, 그 마지막 예언을 위해서 구약의 다윗의 등불이라는 이름으로 그 예언이 역사 안에서 같이 흘러가다가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다윗의 영원한 왕과 예언과 예언이 입맞춤을 해요. 만나요.
이것을 좀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그때그때 역사를 하나의 A4용지로써 생각해 보세요. 그다음 왕 때의 역사는 뒤편에 있는 A4용지, 그 용지에 그 당시 왕들이 한 행적이 죽 되어 있지요. 다시 그 뒤에 A4용지가 첩첩이 있다 합시다.
여기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준 약속이 있어요. 그게 다윗의 등불입니다. 그 다윗의 등불의 화살을 첫 번째 종이에 쏴버립니다. 쏴버리면 화살이 궤적을 보여주면서 구멍을 뚫고 가는 거예요. A4용지를 뚫고 가는 거예요. 마지막 A4용지를 뚫어서 마지막 도달되는 지점이 뭐냐? 다윗의 아들, 약속한 모든 약속을 집대성한, 그 약속이 구현한, 예언이 구현한 진짜 그 인물이 하나님이에요. 주님이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께 화살을 쏘아서 하나님이 친히 그 모든 예언을 다 이뤄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 선지자들은 뭐냐? 선지자들은 그 시대에 살면서 인간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후, 아히야, 이 사람들은 예언자들이에요. 오늘 보고 있는 미가,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은, 반드시 역사는 그렇게 망하는 쪽으로 가야 된다는 것, 그것을 마땅한 것으로 미리 눈치채 버렸어요. 알아버렸어요. 백날 까불어도 전면적으로 다 죽는다. 그러니까 그 시대의 예언자는 뭘 이야기하느냐? 그 시대에 구멍을 뚫는 화살의 궤적을 두고 “저것 봐. 저게 다윗의 등불이야!” 다윗의 등불이야 - 다윗의 등불이야……, 릴레이에서 바통을 이어가듯이 다윗의 등불의 궤적, 그 벡터 방향을 한번 보라는 말이지요. 그게 어디로 가는지? “장차 하나님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이 홀로 다 이루신다.” 이게 바로 구약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가 어떻게 선지자 노릇을 합니까? 우리는 밥 먹고 살기도 힘든데, 뭐 예언이고 뭐고 이 세상 역사 속에서 부대끼면서 인간 대 인간, ‘저 인간만 이기면 나는 과장이다.’ 이런 것, 맨날 경쟁하는데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언약을 믿지 말고 자기 자신을 언약에다가 꽁꽁 묶어 버리세요. 사극 영화에 어떤 군인이 사랑하는 공주를 충실하게 지키는데 손에 짧은 칼밖에 없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산적을 만났다 합시다. 이 군인이 나뭇가지에 칼을 꽁꽁 묶어 버려요. 그러면 칼은 제일 앞에 있고 나뭇 가지를 쥐고 흔들면 이게 창이 되거든요. 칼보다 창이 낫잖아요. 공격하기가.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앞에 이렇게 매달아 버려요. 밧줄로 꽁꽁~, 밧줄로 꽁꽁, 내가 이제 내가 아니라 언약의 사람으로 묶어 버리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언약의 사람으로 사용하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 끄트머리에 나를 강도로서 거기 같이 묶어 버리는 겁니다. 죄인으로, 세리와 창기로서 묶어 버려요. 기생 라합으로서. 옛날에 기생 라합은 창기였습니다. 세리로서.
그러면 우리에게 뭐가 있느냐? 사명이 생깁니다. 사명이 내 목숨보다 우선될 때 우리는 자유를 느낍니다. 내 목숨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 이것은 사명 없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사명이 있어 버리면 먹고 사는 것보다 주께서 십자가 언약, 새언약, 다 이루었다, 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창 끝에, 나뭇가지 끝에 묶어서 이 시대에 역사의 A4용지를 뚫고 지나가게 하는 거예요. 직장에서도 뚫고, 가정에서도 뚫고, 동창회에 가서도 뚫고 ……. 동창회 모임에서 전부 다 술 마시면서 “위하여!” 하는데 ‘나는 술 안 먹는다. 그거 먹어도 죽는데 뭐하러 먹냐.’ 역사의 한계를 보여주고.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이 바로 “이 어두운 깜깜한 역사 속에서도 예언은 살아 있잖아, 예언은.” 딴 것은 다 망하지만 그 심판 가운데서 예언이 살아나는 모습을 예수님이 친히 보여줬습니다. 역사 속에서 나는 죽지만 영적 세계에서 나는 사흘 만에 부활했는데 그 부활의 세계가 역사 속에서, 역사의 심판 속에서 부활의 사랑의 나라가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우리를 이 쓰레기 같은 역사 속에 묻으시고 주의 성령이 와서 성령의 세계의 사명자로서, 창끝에 달린 칼날로서, 하나의 압침으로서 조그마한 면도날이라도 주님이 부리시는 사명자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지자들이 외치면서도 자신만만하게 진리 그 자체, 온전한 지혜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앞에 붙잡힌 바 된 사실인 줄 압니다. 저희들 내 식대로 살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작대기 끝에 달려 있는 복음의 증인으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