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392강, 393강) 거짓말 , 있음과 없음 220524
392강-YouTube강의(거짓말 요한계시록 22:15)20220524-이 근호 목사
제392강, ‘거짓말’. 사람 대 사람 사이에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죠. 그러면서도 인간은 하루에 수백 번 본인이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이냐, 아니냐의 평가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남들은 모르고 본인이 거짓말했다, 안 했다를 본인이 알고 있어요.
사람들은 ‘거짓말하지 말라’라고 모르는 사람한테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아는 사람한테는 뭐라고 하느냐면 ‘될 수 있는대로 거짓말하지 말라’라고 해요. 될 수 있는대로. 될 수 있는대로 거짓말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본인이 뭘 아느냐 하면 인간은 거짓말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 세상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본인이 인정하는 셈이 돼버렸어요.
그런데 출애굽기 20장 16절에 보게 되면 ‘거짓말하지 말라’라고 십계명에 그렇게 나와 있죠. 십계명에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라는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자기가 착한 사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될 수 있는대로 거짓말 안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도자체가 거짓말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성경에서 거짓말하지 말라는 그 기준이 하나님의 거짓 없음과 동일하게 거짓이 없게 될 때 ‘거짓말하지 말라’가 성립이 됩니다. 하나님은 거짓을 모르거든요. 그와 같이 하나님처럼 거짓이 없는 경우만 ‘거짓말 안 했다’가 성립이 돼요.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역대하 18장 22절에 보면 미가야 선지자가 등장할 때에 미가야 선지자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왕이 우리가 전쟁하게 되면 승리할 것인가에 대해 조언을 구했던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다 ‘올라가면 승리합니다.’ 그렇게 이구동성으로 왕에게 대단한 아부를 하죠. 그들이 국가로부터 월급, 돈을 받기 때문에 일종의 직장이거든요. 말 함부로 해가지고 평생 직장 날라가면 자기만 손해잖아요.
그런데 이 미가야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18절에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기 모든 선지자가 있어요, 모든 선지자.
그러니까 미가야 선지자 빼놓고 전부다 거짓말하는 영이 미가야 선지자 외에 다 들어갔어요. 그때 이 거짓말하는 영이 온 것을 다른 선지자들이 그들의 결심과 각오로써 그걸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거부할 수 없죠.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의 윤리 도덕 차원에서 거짓말하고 안 하고는 그것은 자기 차원에서 본인이 알고 있는 ‘거짓말이다/ 거짓말 아니다’ 본인이 평가한 거예요. 그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에요. 또 거짓말 아닌 것도 거짓말 돼버리는 거예요.
거짓말이란, 하나님이 말하는 거짓말이란 하나님의 예언을 모르는 게 거짓말이에요. 이 말은 모든 인간은 다 거짓말쟁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예언과 차이나는 것이 거짓말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은 복음과 관련되지 않는 것은 전부다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대통령 취임사 같은 것. 그거 거짓말이죠. 뭐 목사 설교도 거짓말이죠. 입에서 나왔다 하면 다 거짓말이에요. 하나님의 예언과 전혀 상관없기 때문에.
그러면 거짓말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예언과 관련된 말은 어떤 말이냐? 그것은 본인이 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나는 거짓말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기 때문에.’ 그런 마음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그 자세가 유일하게 거짓말하지 않는 거예요.
예언되지 않는 것이 거짓말이라 하는 것은 성경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제일 마지막에 요한계시록 나오죠. 요한계시록 22장 19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렇게 돼있어요. 18절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그렇게 말씀하시기 전에 바로 이런 자들이 천국에 못 가고 기록된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와 같은 취지로서 요한계시록 22장 15절에 보면,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22장 입장에서 보게 되면 누가 지옥에 가고 누가 천국 가느냐?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 가고 거짓말하지 않는 자는 천국 간다. 요한계시록 22장 입장에서는 그렇게 아주 말끔하게 정돈이 돼요. 정리가 된다고요.
그런데 성도에게는 누가 있느냐 하면 바로 성령이 계시잖아요. 성령께서 오시면 성령께서는 인간의 말을 제키고 주님의 말을 하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10장 19절에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하게 되게 되면 성도한테는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본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같이 동반해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내 노력과 내 지식과 내 힘으로 하나님에게 영광 돌린다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내가 죽을 때까지는 그건 있을 수 없다. 그걸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고 예수님의 마음이거든요.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오게 되면 그냥 예수님의 하신 일이 나오는데 그 하신 일에 성도 자체가 죄인으로 엮이어진 상태에서 주께서 성도들의 일을 하시잖아요.
그래서 성령께서 이야기할 때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태도가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항상 그게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냥 툭 치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자기 부인이. 세상 사람은 툭 치면 자기 방어와 방어체제가 나와요. 방어적인 자세가 나오죠. 내가 뭐 그리 잘못되었느냐, 이런 식으로 탁 나오죠.
우리가 그런 경험은 일상에서 뭐 너무너무 매일 겪는 겁니다. 사춘기 애들한테 말만 건넸다 하면 곧장 되받아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내가 뭐 그리 잘못되었습니까?” 이렇게 되죠. “네 방에 들어가서 문 잠그지 마라.” “문 잠그는 게 뭐 그리 잘못되었습니까?” 이런 식으로.
그래서 사춘기 애들 철이 없다고 하죠. 그래서 모든 인간은 철없이 거짓말하는 중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거짓말만 배웠고 거짓말만 쏟아내는 것, 이걸 누가 아느냐. 성령 받은 성도만 알죠. 그게 바로 거짓이 아닌 진짜 말씀입니다.
이하림gblayer('gblayer4', 'summerwood', '이하림', 'summerwood96@naver.com', '', '1', './program');(IP:219.♡.37.139)
22-05-25 03:44
393강-YouTube강의(있음과 없음 시편 74:7)20220524-이 근호 목사
제393강, ‘있음과 없음’. 이 세상에서 있음과 없음이라 하는 것은 어떤 사물, 물체 그 전부 다에 해당되는 겁니다. 앞에 뭐 동전 놨다가 동전이 없다든지 지갑이 있었는데 지갑이 없어졌다든지 식당에 신발 벗고 식사하러 갔는데 돌아보니까 신발이 없어졌다.
‘있다, 없다’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들이 나름대로 누가 뭐래도 우리는 있다, 없다 정도는 충분하게 옳게 구분한다고 자신만만해요. 설마 하나님께서 그것까지 거짓말이라고 할 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해요. 있다, 없다.
뭐 내가 있다, 없다를 포함해서 화초가 있다, 없다. 달이 있다, 없다. 월식 같은 것은 달이 있다가 없다. 있다, 없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그것은 틀린 개념이 아니라고 자부를 하죠.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있다, 없다라 하는 것은 인간이라든지 이 세상에 관해서 우선적으로 있다, 없다를 적용시키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를 아시고 그걸 다 비틀어버립니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게 만들어버려요, 인간에게 나오는 것은. ‘아이구, 너희들은 그건 아네.’ 이런 것은 하나님에게 해당이 안 됩니다.
그럼 하나님께 있다, 없다의 핵심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성소가 있다, 없다’로 모든 것이 귀결돼요. 모든 것이 모여지게 됩니다. 시편 74편 6절을 보면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7절에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8절에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자, 이 시편에 나오는 6절에서 8절까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관심사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 그 관심사로 모든 것이 집약이 됩니다. 다 거기 모아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있다, 없다에 대해서 하나님이 관심 있는 것은 들에 돌멩이 있다, 없다, 인간이 있다, 없다, 누가 살다가 누가 죽었다 그런 데에 우선적으로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실 자리, 성소 또는 성전이 있다, 없다 중심으로 세상의 있다, 없다의 개념을 결정지어 버립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이 땅에 살다가, 태어났으니까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네가 태어나서 있고 죽으면 보통 장례 치르고 없어지죠. 네가 태어나서 네가 죽는 것, 그거 내 관심사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러나 인간은 반대로, 죽음을 겁내는 이유가 내가 여기 있다가 죽는다는 말은 결국 내 가치가 내 의미가 소실되는 것을 뜻하거든요. 내 신체도 물론 소실되어 없어지고.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없어지는 것이 은근히 겁나는 일인 거예요. 내가 없어지는 게.
내가 어디에 가다가 그쪽에서 내가 여기 왔기 때문에 없어지는 것 말고 내가 어디 가든 여기 내가 있으면 안심이 돼요, 내가 여기 있으면. 안심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사람은 생각이 어리석은 것이 자기가 어디에 있든 자기가 여기 있으면 안심을 해요.
어린 아이들은 자기라는 개념이 없어가지고 자기 대신 누가 없음에 관심을 갖느냐 하면, 갓난 애기를 말합니다, 엄마가 없으면 애는 울어요. 나 없어짐은 모르고 엄마 없어짐을 자기 없어짐과 일체화시키는 거죠.
이거는 커서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뭐 부모도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겠어요, 자식이겠죠, 자기가 죽는 것은 겁 안 나는데 자녀가 죽을 때 우리는 정신 나가죠. 정신 나갑니다. 남편 죽는 것도 물론이고 아내 죽는 것도 물론이고 요즘은 자기 집에 개나 고양이 죽는 것도 뭐 혼절하죠. 기절할 정도죠.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은 본인 자신이 사라지는 겁니다. 없는 거예요. 생각 같아서는 뭐 없을 수도 있지, 되겠는데 이상하게 모든 행동과 모든 말씨와 태도 자체에 항상 그 바탕에 깔린 것은 기어이 내가 안 없어지고자 하는 그러한 욕구가 본능적으로 충동적으로 작동을 해요. 나는 안 없어져야 될 나. 절대로 없어지면 안 되는 나. 세상은 없어져도 나는 없어지면 안 되는 나. 그걸 전제로 해서 행동이 나옵니다.
그걸 성경적으로 보게 되면 본인이 신이기 때문에 본인 자체가 신이라는 가치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가 절대자요, 완전한 자유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신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걸 아셔요. 인간이 자기 이름에 얼마나 애착을 갖고 집착을 갖는지. 절대적으로 거기에 매여서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평생을 자기한테 매여 살아가는 겁니다.
아침에 나 있느냐. 저녁에 없느냐. 거기서 발전하게 되면 내가 어디에 있느냐. 더 발전하면, 있는 내가 오늘 뭘 먹을 것인가. 내가 몇 살을 더 살 것인가. 그래서 배부른 사람들의 관심사가 자기의 건강문제 아닙니까. 건강문제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는 이 의미와 가치가 풍성하게 계속 지속적으로 있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자기 이름 외에 다른 이름 있는 것은 나중 문제에요. 후차적 문제이고 다급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시편 74편에서 정작 하나님이 관심 있는 것은 “주의 성전 어디 있냐?”라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이 그 자리에 있는 건 내가 아는데 너희들 말고 주의 성전 어디 있느냐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어디 있느냐.
광야에서 주의 이름 때문에 홍해를 건너왔던 이스라엘 백성, 두 사람 빼놓고 다 죽었습니다. 광야 자체가 사람 죽여 버리는 곳이에요. 사람을 죽임으로써 ‘이곳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확인시켜주고 증명하는 거예요.
천하가 다 없어져도 주의 이름만은 영원해야 돼요, 주의 이름만은. 그리고 성도가 되면 ‘주의 이름만 영원하옵소서.’라는 찬양이 나와야 됩니다. 이 말은 ‘내 이름 그 까짓 것, 내 이름 같은 것은 주여, 신경 쓰지 마옵소서. 주의 이름이 내 이름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됩니다.’ 그 고백이 나와야 그게 성도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왜 망했는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기 이름 챙긴 거예요. 그래서 망한 거예요. 그러나 시편 74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의 성전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 성전은 불탔죠.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성전을 별로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 이름이 우선이기 때문에. 자기 이스라엘 나라가 우선이기 때문에. 네가 이스라엘 나라가 유지될래, 주의 성전 유지될래? 이스라엘 나라가 유지되는 게 급했던 겁니다. 주의 성전보다 주님이 계신 것보다 본인들이 그 땅에 약속의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이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거예요. 마음에 와 닿았던 겁니다.
교회 가서 참, 말씀에 은혜 받았다 칩시다. 그때 그런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세요. “그렇게 은혜 받으니까 교회에서 살래?”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12시 넘었네. 빨리 집에 가야지.” 집에 가야죠. 교회가 아니고. 그만큼 우리는 내가 사는 데에 필요한 집들 그리고 토지, 부동산, 가족들 이것 챙기는 데에 너무 온몸에 절어 있어요, 이게. 절어 있어서 이걸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침에 눈 뜨고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주님이 여기 계시다’가 아니라 내가 여기 있다는 거죠. 이걸 어떻게 체질화되었는데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인간은 있다, 없다 그 생각만으로 이미 우리는 주의 뜻에 위반된 채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