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20519a 베드로후서 2장 7절(해체)-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220519a 베드로후서 2장 7절(해체)-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2장 4절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사람 이야기가 아니죠. 천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천사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가 왜 들어야 되는가? 이 천사와 인간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범죄한 천사의 특징이 있어요. 범죄한 천사의 특징은 해체되지 않으려 한다. 산산조각나지 않기를 원한다. 기존의 자기의 영토와 영역을 포기 못하는 자가 범죄한 천사의 특징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범죄한 천사를 꼭 빼닮았죠. 똑같은 식으로 그들도 이 세상은 해체되지 않으려 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여기 5절에 나오는 노아, 그다음에 6절에 나오는 롯, 노아 가정과 롯의 가정의 특징은 뭐가 되겠어요? 당연하게 ‘해체되어버림’입니다. 해체된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자기 것이 날아가 버렸다. 내 것이라는 것이 날아가 버린 거예요.
아주 쉬운 예를 들어서, 요새 고등학교에서는 애들을 못 때리지만 옛날 고등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애들을 많이 때렸거든요. 애들이 잘못했을 때 선생님은 아주 사정없이 팹니다. 팰 때 한번 맞고 도망가는 아이들이 있어요. 도망가는 아이들, 아주 지혜롭고 현명한 아이들입니다. 도망간다는 말은 일종의 비겁함이고 비겁하다는 것은 나는 의롭거나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는 거죠. 나는 아프면 도망가는 비겁한 인간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때릴 필요가 없죠.
그런데 선생님을 아주 화나게 하는 것은 맞고도 그 자리에 버티는 인간. 아주 조져버립니다. 이게 개기냐? 선생님한테 대드냐? 그게 바로 범죄한 천사들의 특징이에요. 개기는 거예요. 대드는 겁니다. 때리면 해체되면 돼요.
무슨 남편이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어도 남편은 룰루랄라~ 자기는 살겠다고 아내 버리고 자기 두 딸하고 그냥 가버리잖아요. 이게 얼마나 멋있는 해체에요. 롯의 경우. 만약에 롯이 뭔가 내 것, 나의 가정을 지키려고 한다면 이것은 개기는 겁니다. 대드는 겁니다.
방금 이 말은 뭐냐 하면 천국은 지옥과 함께 형성된다는 거예요. 천국은 지옥과 함께 형성돼요. 적어볼게요. ‘천국은 지옥을 규정하면서 같이 규정된다.’ 천국은 지옥을 규정하면서 같이 규정되는 거예요. 이 말은 상당히 중요한 말인데요.
이 말은 이런 경우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어떤 경우냐 하면 이것이 라는 영화에도 나오고 흔히 스릴러나 이런 영화에 보게 되면 마지막에 브루스 윌리스, 저돌적인 형사, 나이 많아 대머리 된 형사와 시한폭탄이 있는데 이 시한폭탄에 빨간 선 있고 파란 선이 있다. 어느 쪽을 잘라야 시한폭탄이 멈추겠느냐. 영화 마지막에도 이런 장면이 더러 나와요. 빨간 것, 파란 것. 잘못 건드리면 지옥이고 잘 건드리면 천국 되는 거죠. 이런 경우는 이 세상에 없다는 거죠, 이런 경우는.
장소가 하나, 장소가 둘, 장소가 셋, 이런 경우는 없단 말이죠. 세 개 되는 경우는 없어요. 천국과 지옥이 같이 규정되어버리면 장소 하나, 장소 둘, 둘밖에 없어요. 제3의 지역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너 천국갈래, 지옥갈래? 빨간 선 자를래, 파란 선 자를래?’ 이런 식으로 왜 안 묻느냐 하면 이미 인간은 선악체제 안에서 자아죠, 본인, 본인이 선악을 알았으니까 자아① 있죠, 선② 있죠, 악③ 있죠. 벌써 몇 개 입니까? 장소가 세 개가 되기 때문에 이 형식, 이 형태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믿을래, 부처 믿을래? 어느 쪽을 믿어서 구원받을래? 이 자체가 성립 안돼요, 이 자체가. 대단히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게. ①번, ②번밖에 없기 때문에 천국을 정하면 자동적으로 지옥이 정해지고 지옥을 정하면 자동적으로 천국이 정해져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빠져요? 제3의 지역에 있는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하겠다는 나의 올바른 선택의 자리는 해체돼버립니다. 용납이 될 수 없어요.
방금 한 이야기를 아주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지양한다. ‘지양(止揚)’이라는 말이 있어요. 지양이라는 말이 참 어려운 말인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득하는 것, 이게 지양이에요.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하는 거예요.
자, 인간은 선악체계 안에 이미 놓여있습니다.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하겠습니까? 답 딱 나오잖아요.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취득하고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버리겠죠. 한번만 그러겠습니까? 어떤 경우가 지나고 난 뒤에 또 다음 경우 오면 거기서 또 선과 악을 잘라내겠죠.
막대기가 있는데 너 오른쪽 할래, 왼쪽 할래? 너 좌하면 나 우하고 너 우하면 나 좌할게,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어느 쪽 할래? 나 왼쪽 할래. 그럼 오른쪽 날라갔죠. 이게 지양이에요. 남은 왼쪽 중에서 오른쪽 할래, 왼쪽 할래? 또 자릅니다. 인간이 평생 하는 일이 이거에요. 인생을 살면서 하는 일이 이거에요. 나한테 유리한 것, 유리한 것 이리 오고 불리한 것, 불리한 것 저리 가 저리 가. 계속 내보내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시집을 갔더니만 서울로 시집와서 서울서 살림살고 있는데 촌에 있는 시동생이 취직한다고 올라와가지고 집값 비싸다고 갈 데 없으니까 같이 살면 되지 않느냐, 해가지고 남편이 일방적으로 내 동생 같이 살자했을 때 그 부인은 그다음부터 시동생이 독립해서 나가는 것만 기다리겠죠. 나가서 잘라내면 그것은 지양이 되는 겁니다. 지양. 귀찮은 거 내보내고 우리끼리 사는 날을 기다리는 거예요.
그렇게 했는데 자기 여동생, 남편 보기에 처제가 취직한다고 데리고 왔을 때 내보내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는 촌에 있는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올라왔다. 다단계 빠져가지고 집 날리고 같이 살자, 손자 봐줄게, 이런 조건 하에...... 또 쳐내는 거예요. 다 쳐냈는데 이번에는 또 동서가 외국 가는데 개 맡길 데가 없다 해서 개 맡긴다고 왔어요. 그다음부터는 개 쳐낼 날을 기다리죠. 이게 지양입니다.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득하는 이 지양을 사람들은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바로 구원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나한테 유리한 것, 천국은 유리하죠. 내가 천국은 선택하고 지옥은 버리는 것, 사람들은 구원의 개념을 이런 식으로 접근해갑니다. 다 엉터리에요. 몽땅 다 엉터리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이것 가지고 장난치고 장사하겠죠.
둘 중에 너 어느 것 할래? 그 물음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너희는 거기에 합세하지 말고 따로 나오라고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 너는 어두움에 참여하지 말고 따로 나오라 할 때 따로 나오면서 생겨나는 게 뭐냐? 따로 나오면서 생겨나는 것. 여러분들은 수준이 있으니까 오늘 아주 독하게 어렵게 갑니다. 여러분들 수준이 있으니까.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네가 그 어두움에 참여하지 말고 따로 나오라 할 때 발생되는 것이 뭐냐 하면 경계에요. 경계선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게 아니고 주님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를 이용하고 있죠. 경계가 생기는 거예요. 따로 나오라 함으로 말미암아 따로 나온 너희와 저쪽 사이에서 와, 나는 구원받았어, 이걸 바라보라는 게 아니고 저쪽과 이쪽을 가로지르는 경계가 어떤 요소로 되어있지? 그걸 증거하는 자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거예요.
경계,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기준.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우리의 구원보다 주님은 더 중요한 거예요. 왜?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주님은 피조물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하는 계획과 스케줄, 남기고 하는 그것이 주가 되지 우리의 구원은 주가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자기 나름대로의 소원이 있을 거예요. 나는 죽어서 천국 가는 게 나의 소원입니다, 라고 하더라도 그 성도의 소원은 전혀 먹히질 않습니다. 그럼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 ‘내가 지옥을 가든 천국을 가든 하나님이 정해놓은 기준이 뭐냐? 그것을 나는 드러내겠다.’ 이게 바로 성도의 바른 자세에요. 똑바로 앉는 게 바른 자세가 아니고. 성도의 바른 마음자세가 ‘내가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주께서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만 제대로 제시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바른 태도에요. 이게 성도의 삶의 태도입니다.
주님이 가름했던 기준이에요. 주님이 파고들어왔던 기준이죠. 이 기준의 취지를 알려면 반대말을 보면 돼요. 기준의 취지와 반대되는 개념이 뭐냐 하면 소유입니다, 소유. 나는 천국을 소유했다. 나는 천국을 소유했는데 먼 데 여기까지 피곤한데 갈 필요 뭐 있나, 이런 거죠. 나 성도 맞는데 뭐.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했는데 뭐. 난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에 귀찮은 거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자, 이 사고방식이 뭡니까? 이 사고방식에 대해 아까 제가 강의했어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귀찮고 번거로운 일은 하지 않겠다, 이 사고방식을 두 자로 뭐라고 하죠? 나왔는데 두 자로 뭐죠? 지양. 지양이에요. 나한테 좋은 것은 취득하고, 몸이 편한 것은 좋은 거예요, 귀찮은 것은 제거하는 것. 이미 구원받았는데 뭐. 구원받았기 때문에 나 편한대로 살아도 되죠. 구원받았다, ‘받았다’를 다른 말로 하면 소유. 천국을 소유했으니까 난 챙길 건 다 챙겼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지양이고 사람들은 구원을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이 지양 개념을 가지고 구원을 접근해나갑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선악과 따먹은 티가 어디로 가겠어요? 그대로 발산되죠. 이래놓고 마귀 탓을 하고 있어요. 마귀는 지옥 간다. 하지만 난 천국 간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귀가 지옥 가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네가 아느냐고 묻는 거예요.
다시 설명하면 마귀가 지옥 가는 이유는 마귀는 자기 세계를 해체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8장 29절에 나옵니다.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악마가 귀신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 보세요. 이런 태도에요. 당신 것은 당신 거고 내 것은 내 거니까 당신이라는 이름으로 내 거 건드리지 마세요, 그 뜻이에요. 건들더라도 아직 때가 안됐잖아요. 시간이 안됐잖아요. 왜 미리 오십니까?
그에 비해서 성도는, 오늘도 오셨군요. 단골 손님이에요. 오늘도 오셨군요. 악마는, 왜 미리 오십니까? 그 앞에 덧붙인다면, 내 허락도 없이 내 의논도 없이 왜 미리 오십니까? 성도는, 오늘도 날마다 성령께서 오셨군요.
자, 성도의 특징은 내 자리, 내 것이 없죠. 그게 바로 해체에요. 나의 것의 해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게 자기 해체잖아요, 자기 해체. 배알도 없어요. 배알도 없어, 이것은. 자존심도 없어요 그냥. 주님 앞에 흐물흐물해요 그냥.
주님은 자기 백성이 자기 것을 갖는 것을 주께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자기 것을 가져버리면 이게 구원이 안 되고 지양이 돼버려요. 가진 것을 가치 있고 깨끗하고 올바르게 유지하기 위해서 악한 것은 버리고 선한 것은 취득해버리는 것, 이것은 선악체계가 그대로 작동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이것은 내게 필요한 것이고 저것은 필요 없다는 결정을 뭘 노리고 합니까? 결국 나는 구원받았다, 그걸 지금 원하고 있거든요. 나는 구원받았다, 가 되어버리면 뭐가 날라가겠어요? 경계. 주님의 기준을 그 사람한테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자기 구원받은 자랑질이나 하지 주님의 기준이 뭔지를 몰라요, 주님의 기준. 심판의 기준.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 제가 부탁합니다만 여러분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든 이 세상 떠나더라도 주님의 기준은 알고 그걸 전하고 떠나셔야죠. 세상을 언제 떠날지 모르겠지만. 아까 빵 4개 먹었잖아요. 빵 4개 먹고 베지밀 2개 먹었죠. 먹었으니까 이제 떠날 때 됐죠. 떠날 때 떠나더라도 내가 떠난 이유는 베지밀 먹어서였다, 이러진 말자 이 말이죠. 이러지는 말자.
그 기준이 뭐냐? 내가 빵을 4개 먹든 100개 먹든 주께서는 나를 해체시키는 것이 기준이었다. 왜? 난 악마에 속했으니까. 전에 내가 악마와 똑 닮았으니까. 악마는 자기 것에 대해서 절대로 티끌하나 손 못 대게 했어요. 내 것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 관여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런 나, 전에 성령 오기 전까지는 그걸 지키면서 내가 하나님 보기에도 천국에 합당한 구원에 합당한 완벽한 인간으로 새로운 인간이 되겠다는 결심으로서 좋은 건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버리는 그런 식으로 살았을 때, 세상에 그게 악한 천사가 지옥 가는 이유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죠.
이것은 어려운 게 아니고요. 완전히 다른 이야기에요. 이걸 더 어렵게 쓰겠습니다. 자꾸 어렵게 쓰는데...... ‘비교가 가능하지 않은 비교’.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 안 받은 사람하고 비교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비교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본인에게 남아있는 것은 주님의 천국과 지옥의 기준이 남아있기 때문에 굳이 내 걸 다시 조립 또는 정립해가지고 내 것 있는데 네 건 어때? 하고 비교할 하등의 재료는 우리 성도한테는 허용된 적이 없습니다.
“너 어떻게 구원받았어?” “성령이 와서 나를 부정시켜버렸어.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어.” 할 때 이게 뭡니까? 지금 기준이 들어왔잖아요. 기준이 들어옴과 동시에 내 것은 어떻게 됩니까? 주섬주섬 끌어 모을 내 것이 없어요. 내 것이 없다고요.
만약에 구원받지 못한 아내가 남편보고 “당신은 복음에만 왜 이리 관심이 있어?” “누가?” “당신이” “그건 주께서 하셨지.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성령을 모르는 사람들은 남편이 자기만 천국 가려고 복음만 끌어 모으고 나머지는 배제하는, 이게 지양적 활동을 하는 줄 알고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실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는데. 먹든지 마시든지 매사에 주를 위해서 하도록 했는데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본인이 자기 천당 가려고 그렇게 아주 예민하게 정신 바짝 차리면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의 애씀이 주님의 애씀을 가린다.’ 이것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안 하던 짓을 한번 해야 되겠어요. 안 하던 짓이 뭐냐 하면 이 짓이에요. (안테나로 가리키는 것). 나의 애씀이 주님의 애씀을 가린다. 나 천당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주님이 일방적으로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은혜를 완전히 망치고 있는 거예요. 안테나 가리키는 건 끝났어요. 다음에 또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참 애쓴다.
지양을 한다는 것-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 유리한 것, 필요한 것, 도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취득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그 지양적인 것으로 자기 구원을 챙기려 하면 이게 무엇에 걸리느냐 하면...... 선악체계 자체가 함량과 관련되어 있어요. 함량 알죠? 함량 미달 또는 함량에 충족하는 것. 함량과 관련되어 있어요. 좋은 것이 얼마나 퍼센트가 많은가를 보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평가할 때. 이게 얼마나 악마적이에요. 해체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를 가꿀 생각하는 거예요.
마당에 정원이 있다. 마당에 정원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집 정원 가운데서 몇 퍼센트는 잡초고 몇 퍼센트는 알곡이고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의 마음밭을 정원이라 본다면 몇 퍼센트 알곡이 있고... 이건 함량의 문제거든요. 질의 문제가 아니고 양의 문제에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아주 단호하게 반박해버리죠. 함량의 문제에 대해서 누가복음 5장 38절, 마태복음 9장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다는 말은 주님께서 준비한 새로운 영토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은 새로운 영토에 포획이 되는 거죠.
포획, 삼킨 바 되는 것, 포획이 되어버리면 그 자체로 그 사람은 선악체제의 함량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거죠. 함량이 아니고 둘러싼 외부환경이 그 사람의 미래를 확정지어놨기 때문에.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부대 안에 있는 것은 모조리 함량 문제와 상관없이 그 술은 새 포도주가 되는 거예요. 이게 주님께서 구원하는 방식이에요. 새 술은 새 부대입니다. 이게 구원방식이에요.
그럼 부대는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 부대는 우리 인간이 못 구해요. 격리시키잖아요. 옛 부대와 새 부대를 격리시킬 때 옛 부대는 그 자체로 지옥이 돼버려요, 지옥.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천국과 지옥은 같이 시작한다. 같이 개시가 되는 거예요. 천국 등장하면 지옥 등장하고 지옥 등장하면 천국이 같이 등장해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너 둘 중에 어느 것 갈래? 이렇게 묻는 게 아니에요. 그냥 일방적으로 뽑히는 거예요. 청군, 백군 뽑히듯이. 청군 뽑아놓으면 나머지는 백군이고, 백군 뽑아놓으면 나머지는 청군이고. 뽑는 거예요. 뽑을 때 그걸 언약이라 합니다.
그게 노아 때 있었던 거예요. 노아 때 하나님께서 언약 주실 때 언약은 노아를 삼켜버리죠. 그러면 그 노아는 선악체계의 함량과 전혀 상관없이 두둥실 바다를 유유히 떠돌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다 죽고. 그래서 노아가 떠다닌 방주 밑에는 그 당시에 언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시신이 깔려있어요. 시신 위에 유영하고 있는 노아의 방주.
y∣→ x, 이 말은 x: 무한, y: 유한이고, 유한(y)은 무한(x)에 삼켜진다는 뜻이에요, 논리학에서. 무한은 일부인 유한을 삼켜버리고, x∣→ y 그 무한에서 유한이 새롭게 탄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삼킴을 당하는 1단계, y∣→ x, 내뱉어지는 2단계, x∣→ y 이것을 누가 먼저 실시하십니까? 1단계, 2단계를 먼저 실시하시는 분이 누구시게요? 그렇죠. 예수님. 아버지로부터 저주에 삼킴 당하고 아버지로부터 부활로 다시 나오신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저주를 받으시고 그게 해소되면서 부활이 되었다는 그 과정,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보여준 전과 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전/후. 예수님의 전/후가 그대로 기준으로 적용되는 것이 성도의 전/후가 되겠죠, 성도의 전/후. 그러니까 지옥이고 천국이고 간에 지옥, 천국 가름하는 것이 인간의 일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주의 일이에요. 주님의 일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구원 문제, 천국 지옥 문제에 있어서 이미 인간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어버렸잖아요. 그렇죠? 따먹어버렸으니까 인간의 운명을 인간에게 일임할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인간에게 준 적이 없어요. 인간이 자기 결정을 뭘 하든 인간 말고 예수님의 전/후가 구원의 기준이 되니까요. 잘 알아들으셔야 됩니다.
인간이 무슨 몸부림을 치든 어떤 노력을 하든 주께서는 그걸 완전히 개무시 해버리고 하나님의 천국과 지옥은 뭐로 결정됩니까? 따로이, 인간 말고 인간 속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예수님 즉 말씀을 이 땅에 보내셔서 보내신 그 분에 의해서만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기준이 가름되고 결정되는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경계가 되는 거예요, 경계. 기준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이 나름대로 애쓴다는 것은 뭐냐 하면 선악체제 안에서 자기가 선악체제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거거든요. 그건 제가 아까 얘기했죠. 함량의 문제라고요. 선한 비율을 많이 가지고 악한 비율을 적게 가짐으로써 뭔가 배려 차원에서 아이고, 예수는 안 믿지만 많이 착했구나. 착한 만큼 천국에 넣어줄게. 네가 예수는 안 믿지만 너무 착해서 천국 넣어줄게. 이게 연옥설이에요.
천주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천국 갔다고 하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 그 아씨 집안이 뭔데 천국 가요? 왜 천국 가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데 뭘 천국 가요? 천주교에서 왜 그런 주장을 하느냐 하면 천주교는 말씀 복음 중심이 아니고 교회 중심이잖아요. 교회가 되려면 사람들이 모여야 되거든요. 그럼 사람들이 원하는 것, 고객이 원하는 것을 고객이 왕이니까 제공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맨날 주장하는 게 진심이 문제이고 정성이 문제다, 맨날 그러는 거예요. 분투노력하자. 열심을 내서 노력하자. 진심으로 순종하면......
본인 진심은요, 진심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게 비교 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의 전후를 비교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안 쳐줍니다. 나는 전에 담배 피웠다가 지금은 담배 끊었다. 나는 착하다. 이것은 본인이 결정하는 거예요. 그런 요소를 거론하려면 담배만 그래요? 그럼 술은? 술은 아직 먹는다. 그럼 안 되지. 그럼 술 담배 말고 다른 것은? 기준을 대면 기준이 수천 수백 가지가 돼요. 수백 수천 가지가 된다고요, 요소가.
직업, 성격, 남녀 성별, 나이, 재산 특히 건강. 이런 것들이 자아를 이루는 요소가 되잖아요. 이런 것들이 지양을 해요, 지양을. 구원을 하는 게 아니라 지양을 한다고요. 건강에 안 좋은 것은 버리고 건강에 좋은 것은 취득하고, 이걸 지양하니까 이런 노력을 하는 것, 인간이 기껏 하는 게 이것밖에 없어요. 더 좋은 직업. 성격 개조, 괜찮은 성격.
이런 것이 전부다 해체되어야 되는 거예요. 해체되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방주 밑으로 전부다 버려야 돼요. 방주가 물에 떠다닐 때 물에 이런 것들 다 갖다버려야 돼요. 성별, 나이, 건강 이런 거. 아프면 지옥 갑니까? 그런 거 아니잖아요. 아프면 지옥 가는 거 아닌데 왜 주님보고 병 고쳐달라고 그렇게 달려듭니까? 달려든 사람들 전부다 결국은 예수님 버리고 가버리고. 병 고침 받은 사람이나 병 고쳐준 베드로나 전부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어떻게 했습니까? 다 떠났죠.
목자를 치니 어디로 갔습니까?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졌잖아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목자를 치니 침을 받은 때림을 받은 목자만 있더라, 이렇게 되는 거죠. 목자가 있던 자리에 애초부터 목자만 있었더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양들이 한때 있었었던 것처럼 됐지만 그건 ‘처럼’이고. as if, 마치 있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은 양들은 제 갈 길로 다 가버리고 목자로부터 시작된 일이 마지막에는 목자 되시는 주님만 남았던 거예요. 주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끝나는 일이에요. 이게 기준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비교, 내가 나 된 것은 나의 전과 후의 비교가 아니에요. 내가 전에는 불신자였는데 지금은 신자라고 비교가 안 돼요. 전의 나와 후의 나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전에는 마귀 안에 있었던 나와 지금은 예수 안에 있는 나.
그러니까 이게 예수님이 나를 붙잡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를 덮치잖아요. 예수 안이 나를 덮쳐버리면 y(유한)라는 것, 인간이 어떻게 이동하든 간에 주도권은 x에 있는 거예요. 무한에 있는 거예요. 무한이 덮치고 무한이 거기서 새롭게 토해내고.
그렇다면 성령받기 전 나는 나 홀로 나였지만 구원받은 나는 새 부대를 뒤집어쓴 그런 포도주가 되는 거예요. 구원받았다 해서 나에게 주도권이 있는 게 아니라 나는 뭔가 뒤집어쓴 거예요. 병아리 그림에 그런 게 있잖아요. 병아리 중에 그냥 병아리가 있는 반면에 머리에 계란 껍질 깨진 걸 뒤집어쓴 병아리가 있죠. 주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이러한 병아리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럼 주도권은 뭐냐? 머리에 뒤집어쓴 계란 껍질.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도된 거예요.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불신자는 뒤집어쓴 계란 껍질, 이게 없는 거예요. 태어남이 없어요. 다시 태어남이 없어요. 옛날의 나는 나쁜 나였는데 지금의 나는 좋다,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지양이 되는 거예요. 뭘 바라보는 지양. 더 발전된 나. 전에는 나쁜 것의 함량이 많았는데 지금은 좋은 것의 함량으로 많이 채워진 나. 이것은 새 부대가 아니에요, 이것은. 옛 부대에서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옛 부대에서.
그러니까 나이트클럽에서 철없을 때는 아무 여자나 들이대면서 부비부비 하다가 이제는 나이 오십 되어서 추어대니까 점잖게 달라진 나이트클럽 출입자. 맨 나이트클럽 안에 있는 건 마찬가지인데요. 나이트클럽이 나쁘다고 내가 단정한다면. 나이트클럽 자체가 나쁠 수가 있겠습니까? 그냥 음악 나오고 술 팔고 춤추고 그게 나쁘진 않겠지만, 나이트클럽이 밤의 문화라면 그 밤 문화가 문제 있다면 그 밤의 문화 속에서 아주 점잖게 행동한다 해서 그 밤의 문화에서 벗어난 건 아니잖아요. 내 것을 지탱하고 내 것을 사수하겠다는 이 사고방식, 나는 죽어도 해체 못하겠다는 이런 사고방식이 있는 한 그 사람은 지양했지, 구원된 게 아닙니다.
아까 4절 보면 범죄한 천사와 노아의 차이점을 아시겠죠? 언약이 뒤집어썼다, 언약이. 언약이 주도권을 가진다. 개인적인 노력과 애씀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다음 6절 봅시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인간이 달라지지 않을 때,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은 그 인간은 그대로 있고 좀더 개선되는 식으로 또는 발전되는 식으로 쭉 나갈 때 그 원판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죠. 달라지지 않을 때 이것은 영어로 하면 and, 수학에서는 플러스(+)가 돼요. 새로운 요소를 자꾸 추가하는 거예요. 김정은이 평양 대광장에서 뭐 할 때 김정은 옆에 장군들 복장 보세요. 뭐가 주렁주렁 달렸습니까? 훈장들이죠. 옷 늘어지겠어요. 전부다 훈장 플러스하겠죠. 플러스하는 거예요. 플러스. 그 인간 원판은 그대로 있는데 훈장 개수만 늘어나는 거예요.
그러나 달라진다는 말은 차원이 다른 거예요, 차원이. 차원이 다른 거예요. 예를 들어서 수학에서 플러스(+)라 하는 것은 선이 10cm이다. 더 플러스하게 되면 15cm, 더 플러스하면 20cm 되겠죠. 선이라는 차원은 그대로 있어요. 이게 더하기에요. 10+5+5+... 계속 더하기 더하기 나오는 겁니다. 차원은 그대로 있고 추가해서 더 보태게 되면 뭔가 자기가 양적으로 달라졌다고 자부하게 되는 거예요. 전에는 한 달 수입이 백만 원인데 지금은 백오십 만원, 이백 만원되면 뭐 달라졌어요? 수입은 늘어났는데 본인이 달라졌어요?
차원이 달라질 때는 플러스가 아니고요. 곱하기에요, 곱하기. 이 더하기하고 곱하기의 차이점을 알아야 돼요. 곱하기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더하기는 알겠는데 곱하기는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선을 1차원이라 한다면 면적은 2차원이 되는 겁니다.
여기 (동일 선상의 한 지점에) 있는 개미가 몇 시간 만에 이리로(다른 지점으로) 기어갈 수 있느냐? 이것은 1차원 문제죠. 그런데 이 개미가 어떤 면적 안에 있느냐? 이것은 이미 1차원이 아니고 면적이 되면 2차원으로 차원이 다른 거예요. 개미는 이 선상에서 왔다갔다 할 수 있지만, 더하고 빼고 이런 건 되지만, 면적 안에서 이런저런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어요. 그래서 면적은 밑변×높이가 된다고요. 다른 차원끼리 결합이 가능한 거예요. 그러면 선은 뒤와 앞이 되지만 면적은 안과 밖, 바깥과 안쪽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소돔과 고모라에 있어서 롯으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얼마나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는가를 보려는 게 아니고 네가 차원적으로 네 환경에 의해서 얼마나 시달렸는가를 보는 거예요. 얼마나 시달렸는가.
노아 때는 뭐 고통한다 이런 게 있었습니까? 그런 거 없죠. 노아가 개인적으로 믿음에 의해 고통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노아를 다룰 때는 방주에 있는 사람, 방주에 없는 사람 이렇게 나누잖아요. 그것도 방주 안은 사실 의미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 안이라는 그런 거대한 안이 아니고 방주는 좁은 하나의 배니까 방주와 더불어 함께 있다. 방주가 추가되어 있고 저쪽에 물에 멸망한 사람들은 방주가 하나님의 언약이 추가되지 않았으니까 더하기가 안 됐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 같은 경우는 방주가 아니고 새삼스럽게 뭔가 추가된 게 아니고 불신자나 신자나 소돔과 고모라에 같이 살았잖아요. 같이 살았죠. 같이 살면 운명이 같아야 된다는 게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같이 살면 동일한 운명이 되어야 돼요. 동일한 운명에서 롯이 소돔과 고모라 바깥 사람이라는 특징이 뭐냐? ‘고통 받았다’ 이게 특징이에요. 훨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깊이 있는 내막을 언급해주죠. 세상을 떠나자, 이것은 노아 같죠. 그런데 이 세상에서 고통 받아라, 이건 뭡니까? 롯 같잖아요, 롯.
성경에 그런 경우가 많아요. 롯과 비슷한 사람의 이름이 뭡니까? 룻이죠. 룻은 바깥에 있는 사람, 이스라엘 택한 민족 바깥에 있는 사람이 안쪽으로 들어온 거예요. 훨씬 더 내용이 더 깊이 있어요. 언약적 내용에 추가적인 내용들이 이렇게 십자가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거기다가 덧붙여지는 겁니다.
언약 지키면 율법 지키면 복 받는다, 이것하고 이사야 53장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어느 것이 십자가에 가깝습니까? 율법 지키면 복을 받는다, 레위기에 나오고 신명기 28장에 나오잖아요. 율법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는다, 이것하고 이사야 53장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어느 쪽이 십자가에 가깝습니까? 이사야가 가깝죠.
10분 쉬고 그 이사야 53장이 왜 중요한가를 드디어 계속 이어 설명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