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강-YouTube강의(이름과 아픔 출애굽기 3:13)20220510-이 근호 목사
391강-YouTube강의(이름과 아픔 출애굽기 3:13)20220510-이 근호 목사
제391강, ‘이름과 아픔’. 누구의 이름을 부르는데 굳이 가슴 찢어지도록 아파할 이유는 없죠. 우선 이름이라 하는 것은 뭔가 존재한다는 뜻이고요. 존재하는 그 사람과 연관을 지을 때 호명을 하게 되어있고 호출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쪽에서 연락이 되기 위해서 신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인간 쪽에서 신의 이름을 붙이는 거죠. 그걸 우상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우상이 아닌 신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인간 쪽에서 이름을 붙인 신이 우상이라는 말은 결국 우상이 아닌 신이 따로 있다는 말이고 그 우상이 아닌 신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은 연락이 되어야 되니까 인간 쪽에서 아쉬울 때 뭘 불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존재한다는 것은 이름이 반드시 있는 거거든요. 존재하지 않으면 이름을 못 붙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계시다면 인간과 연락이 닿기 위해서 인간 쪽에서 부를 수 있는 호출할 수 있는 무슨 이름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지금까지 우상의 이름은 뭐냐 하면, 이름은 누가 붙인다 했어요? 인간 쪽에서 붙였기 때문에 이름이 인간의 권력, 영역, 범주 안에 들어간 거예요.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창의성, 상상력 그 안에 이름이 갇혀있다고 보면 돼요.
그래서 우상을 부를 때 이름은 인간 쪽에서 지었고 우상은 저쪽에 있으니까 인간 쪽에서 신의 이름을 부를 때 신은 쪼르르 인간 쪽으로 온다는 말은 인간들이 구상해낸 신의 본질에 신이, 우상이겠죠, 신이 거기에 맞춰줘야 될 입장에 있는 거예요.
칠성님이라든지 이런 거. 칠성님 부를 때 별 일곱 개 자기가 칠성님이라고 붙였습니까? 태양신이여, 태양이 우리에게 이름 줬습니까? 아니죠. 저거 태양이네. sun. 인간이 이름을 지었잖아요. 이름을 지을 때 이름 짓는 인간의 아이디어와 의도하는 바, 기대하는 바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 태양신을 부를 때 저 멀리 있는 태양신이 오면서 인간이 연락을 취할 때 인간의 의미의 영토, 의미의 장 안에 권력 안에 힘이 작동하는 작용 자리에 태양은 태양답게 놀아야 되죠, 태양답게.
그러면 이스라엘의 여호와는 모세가 연락을 취하려고 하면 이름을 불러야 되니까 또 계시기도 하고 계신다면 이름이 있으니까 “뭐라고 호출시키면 되겠습니까?”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거절했어요. “아니. 네가 불러서 쪼르르 가는 게 아니고 반대로 내가 네 이름을 부르는 거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을 호출할 권한만 있는 거예요. 인간이 호출해내지 못해요. 호출할 권한만 있습니다. 모세는 대기했다가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고 계시 주시면 따라야 돼요. 인간이 여호와 이름을 부르고 우상 이름을 부르는 목적은 뭐에요?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복 받기 위해서 부르잖아요. 그걸 진짜 하나님은 도저히 용납 못하시는 거예요. 주여 주여 백날 불러도 주께서는 안 나타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3장이나 6장에 보면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남겨주지 않았습니까. 남겨줬거든요. 나는 여호와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름을 남겨줬단 말이죠. 그러면 부르라고 이름을 줬기 때문에 그러면 처음부터 이름을 안 가르쳐줘야 되는데 왜 이름을 남겨두시는가.
여기 하나님 이름에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이름이라 할 때 그 이름은 호출하는 자기 백성과 하나님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고통을 완성시켜나가는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스스로 고통당하는 게 아니고 고난과 고통의 빌미가 되는 자들이 있어줘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의 우상들은 고통을 당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에게 뭘 도와줄고? 그러니까 인간들이 신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우리가 이러이러한 것들을 바칠 테니까 이러이러한 우리의 소원을 들어줘야 거래가 형성되지 않습니까.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으면 된단 말이죠.
새벽에 교회 예배당 썰렁한데 차가운 마룻바닥에 겸손하게 엎드려서 한나의 기도처럼 막 울면서 술 취한 건지 기도인지 분간 안 가게 열심히 할 때 그만한 노동의 대가는 있어줘야 기도하는 보람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일종의 거래 아닙니까, 거래. 겸손했습니다. 희생하겠습니다. 이번 일만 도와준다면 제가 주님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흥정, 거래. 계약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하고 계약하는 게 아니에요. 계약은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하고 계약하는 겁니다. 그 계약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거예요. 죽을 때 그 환경이 필요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언약 안의 내용이 그거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죽이고 다시 살리신다는 그 내용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철딱서니 없는 인간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이방나라하고 똑같아요. 자기 복 받고 자기에게 좋은 이익과 혜택을 입기 위해서 보호받기 위해서 이름을 불렀겠죠.
그러나 그러한 정신 상태로 부르면 부를수록 누가 아픕니까? 바로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 철딱서니 없는 자기 백성 속에 친히 오신 분이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 고통이 선지자의 고통으로 계속해서 불거졌고 마지막에는 주여 주여 이름을 부르는 자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그들에 의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해당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하박국 1장, 2장 전체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1장 12절에 보면 “선지자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해놓고 14절, 15절에 보면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주께서 보내신 만드신 주의 백성이 주께서는 반드시 공정히 심판하시고 우리의 반석이신 것을 우리가 인정하겠는데 왜 바벨론이라는 적을 보내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낚싯밥이 되게 하느냐.
17절에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육함이 옳으니이까” 하박국 보기에 앞뒤가 안 맞다 이 말이죠. 12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반석으로 지켜주는 것이 자기 믿음인데, 14절, 17절에서는 왜 살육을 당하냐 이 말이죠.
지금 하박국이 뭐를 놓치고 있는 거예요? 진짜 자기 백성은 주님이 당하는 아픔에, 그 이름을 갖고 있는 존재의 아픔에 같이 아픔으로 참여하라고 이름을 불러야 되는 것이고 그게 제대로 이름을 부르는 거라는 거예요.
물론 하박국이 선지자니까 그걸 알죠. 아니까 2장 3절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지금 이렇게 괴롭지만 언젠가 마지막 때가 되면 주께서는 우리 백성을 제대로 백성이라고 구원하실 겁니다, 라고 해서 나온 말이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장 4절) 지금은 죽을 지경이라 이 말이에요. 지금은 죽을 지경인데 끝까지 주의 약속은 변치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박국 3장에 유명한 말씀 나오죠. 가스펠송 가사에 나오는 거. 3장 17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미리 당겨서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게 바로 주님의 아픔에 참여한 상태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그게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의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