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20506a 울산강의-역대기상(10강) 7장 2절 : 숨겨진 우리자유게시판역대상

20220506a 울산강의-역대기상(10강) 7장 2절 : 숨겨진 우리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7장 1절에, “잇사갈의 아들들은 돌라와 부아와 야숩과 시므론 네 사람이며”라고 돼 있지요. 그다음에 7장 6절에 보면,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여디아엘 세 사람이며” 그렇게 돼 있어요. 14절에 가면, “므낫세의 아들들 그 처의 소생은 아스리엘이요 그 첩 아람 여인의 소생은 길르앗의 아비 마길이니” 역대상 7장 20절에 보면, “에브라임의 아들은 수델라요 그 아들은 베렛이요” 그렇게 돼 있습니다. 30절에 보면, “아셀의 아들들은 임나와 이스와와 이스위와 브리아요 저희의 매제는 세라며” 이렇게 돼 있지요. 8장에 보면, “베냐민의 낳은 자는 맏아들 벨라와 둘째 아스벨과 세째 아하라와 네째 노하와 다섯째 라바며”

여기 7장 1절에 등장했던 잇사갈, 그리고 베냐민, 납달리. 13절에 보면 납달리 나와요. 그다음에 14절에는 므낫세, 20절에는 에브라임, 그리고 30절에는 아셀. 이런 사람들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어디에 전부 다 융합이 되느냐 하면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바뀌면서 열두 아들이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적재적소에 그들이 존재해야 될 이유들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제공받은 처지에 있어요.

일본 사람들의 좋아하는 도박 쇠구슬이 위에서 내려와서 사다리 타든지 골짝마다 돌아가는 게임 있잖아요. 그 게임에 보면 인간적인 요소가 일체 들어갈 수 없어요. 그리고 서양에 악기에 보면 종이에다 점을 찍어서 돌리기만 하면 음악이 나오는 오르골이라 하지요. 점 찍힌 대로 음악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굉장히 무정하고 비정한 처지,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형편이에요. 어떤 일체의 인간적인 요소가 들어가질 않습니다. 인간의 의지도 소용없고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축복을 줌으로써 야곱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잖아요. 그거는 바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이길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어요. 이 세상에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영웅도 없고 인물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위에서 내려오는 그 계시의 집단이에요.

계시의 집단이 뭐냐 하면 제가 방금 설명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필히 이긴다. 지는 일은 없다.] 이스라엘이 필히 이기는 것은 야곱에게 내려준 하나님의 언약과 계시 때문에 반드시 이스라엘은 이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이긴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필히 이기고 지는 일 없고 반드시 이긴다면 누구는 지느냐 하면, 나는 반드시 지게 돼 있어요. 이 세상에서. 늘 나에서 늘 이스라엘로 바뀌게 하는 그 일을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서 실시를 하는 거예요.

자, 이게 문제 나갑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한테 질까요, 이길까요? 초장부터 어려운 문제 나왔지요. 이건 변별성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가끔 섞여줘야 돼요. 질문을 이렇게 하면 아무도 못 알아먹습니다. 수능 만점 맞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아무도 못 알아먹어야 돼요. 문제를 고칠게요. 문제를 고치면 더 어려워요. 있는 또는 역사에 나타난 이스라엘은 없는 이스라엘을 이길까요, 질까요? 이게 질문이에요.

역사 속에 나타난 이스라엘은 없는 이스라엘에 이길까요, 질까요? 객관식 문제인데 굉장히 간단해요. ①이긴다, ②진다. 간단해요. 몇 번이겠습니까? 예, 역사에 나타난 이스라엘은 없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반드시 지게 돼 있어요. 결국 제가 무정하고 비정한 이스라엘만 이긴다는 말은 이게 역사에 없는 이스라엘이에요.

역사에 없는 이스라엘은 어떻게 생겼는가? 역사에 있는 이스라엘이 무너지는 가운데 없던 이스라엘이 나타납니다. 그것도 역사 마지막에 종말 때 마지막 때 등장해요. 그러면 없는 이스라엘은 어디를 이기느냐? 있는 이스라엘, 이 세상은 이렇게 돼요. 간단하게 보면 이 세상은 누구한테 지게 돼 있느냐 하면 있는 이스라엘이 이기고 세상은 지게 돼 있어요. 근데 있는 이스라엘은 누구한테 지느냐 하면 없는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지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냐? 이 세상에서는 누굴 이기느냐 하면 이 세상은 반드시 나를 이겨요. 세상은 나한테 이기고, 이 세상은 있는 이스라엘한테 지고, 없는 이스라엘은 있는 이스라엘을 이기고. 이게 성경의 흐름입니다. 그렇게 돼요. 그러면 나는 왜 이 세상에 지는가?

하나의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수십 년 복음 듣고 열심히 교회생활하지요. 그런데 그 복음이고 들었던 모든 성경 내용이 나한테는 이게 윤리도덕으로 변질이 되어서 장착이 돼요. 내가 아는 윤리도덕이 바르게 살아야 되고 착하게 살아야 되고 깨끗하게 살아야 되고 훌륭하게 살아야 된다는 나를 깨끗하게 만들고 훌륭하게 만들고 착하게 만드는 윤리도덕으로 변질되어서 나한테 딱 들어붙어요. 이게 나의 특성이에요. 그래서 이건 다 안다 치고 지우겠습니다.

[선한 사람 되겠다는 것이 십자가를 모독한다.] 이 원칙입니다. 십자가는 네가 어떤 경우라도 선한 경우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받아버리면 십자가의 취지를 수용하게 되면 같은 경우에요. 어떤 경우라도 감사 안할 경우는 없다가 됩니다. 왜? 내가 몰랐던 나를 십자가가 너는 윤리도덕으로 무장하든 어떤 경우라도 처음부터 악한 자라는 것이 변동이 없어, 라는 그 사실을 내게 알려주니 감사하지 않을 순간이 없는 거예요. 모든 게 감사가 되는 거죠.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아담의 나는 누굴 이기느냐 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마저 이길 때 나가 돼요. 왜? 이 세상에 태양은 둘이 될 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은 하나님을 다루려고 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을 내 밑에 두려고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하나님보다 누가 더 가치 있다? 내가 더 가치 있는 거예요. 하나님보다 누가 더 중요하다? 내가 더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성경말씀에 자기를 미워하라가 될 수 없어요. 인간이 자기를 미워함이 될 수 없는 증거를 제가 알려드려요? 알려드릴게요.

인간은 자기를 미워할 수 없음을 주님께서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슨 지시를 내리느냐? 원수를 사랑하라, 이런 지시를 내렸습니다. 친구를 사랑하라가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니까 원수 되기 전에 사랑하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성질 나쁜 사람 사랑하는 그것도 원수를 사랑하는 것 아니에요. 원수는 직접적으로 나한테 피해를 줘야 되고 나의 소중함과 나의 가치를 건드려주는 존재여야 돼요. 그 존재를 사랑하라는 거예요.

이 율법은 이 세상의 어떤 경우라도 지킬 위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절대적인 나의 집합체, 이걸 이방나라라 해요. 이방나라는 나의 절대성을 추구하는 세상입니다. 지금 여기 교회 왔으니까 성경이야기 듣지요. 하루 스물네 시간 가운데서 우리가 소중하다는 이야기 빼놓고 들려오는 것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역시 울산은 잘 살아야 돼. 그 이야기 빼놓고 울산 시에서 나오는 이야기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없습니다.

KBS, MBC 뉴스 가운데 우리나라 잘 돼야 된다는 그 이야기 빼놓고 나오는 이야기 있습니까? 없지요. 회사 가 보세요.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우리 회사 살아남아야 돼, 그것과 연관 이야기 빼놓고 나오는 이야기 있습니까? 없습니다. 노동현장에서 전부 다 뒷짐 지고 손가락으로 안전제일, 안전제일 이것 하는 이유가 뭡니까? 회사가 살아야 내가 산다는 그 이야기란 말이죠. 성질 급하게 해서 39층 아파트 무너지고 그걸 다시 짓고 하면 엄청난 손해가 오니까.

우리는 내가 소중한 거예요. 내가 소중한 것을 방해하는 자를 뭐라고 하냐? 원수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 원수를 사랑한다고요?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유가, 원수가 있을 때 내가 정립이 돼요. 내가 규정이 된다고요. 나라는 것은 나의 대적과의 차이 남을 통해서 내가 따로 정해진다 이 말이죠. 그런데 원수를 사랑해버리면 내가 나를 규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밖에 안 되니까 그거는 내가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가 아니고 이스라엘을 내세운 이유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난제, 문제점은 뭐냐 하면 나의 가치를, 나를 망각시키는 어떤 공간을 찾지 못한 게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나를 없앨 수 있는 어떤 공간, 그런 자리, 그런 상황, 그런 순간, 나를 말소시키고 말살시키는 그런 자리를 인간은 찾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인간은 문제해결이 되질 않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를 느끼는 것은 남과의 비교에서 뛰어나고 잘났을 때에 인간은 뿌듯함을 느끼게 돼 있어요. 남과의 비교에서, 그리고 지금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과 비교해서 자기가 더 뛰어나다면 자기는 발전했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 발전한 나를 너무 아까워서 그걸 어떻게 삭제시킵니까? 그동안 발전한다고 공들였는데.

여러분 세상에 있는 종교가요, 종교 들어봤지요. 기독교, 천주교, 불교를 종교라 합니다. 세상 종교의 목적이 있어요. 목적과 목표는 다르긴 하나 같이 보고요. 목표라 하는 것은 도달점이고 목적은 지향점이라 하는데 같다고 보고 목적과 목표가 있다는 말은 나를 망각하기 싫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나를 잊어버리기 싫은 거예요.

내가 나에 대해서 잊어버리지 않으면 인간은 반드시 목적과 목표를 기대를 품고, 그리고 만들어내고 그걸 계속해서 추진하려고 애를 쓸 거예요. 그럼 거기서 미흡점이 생겨버리면 인간의 행복은 날아가 버리고 행복은 없어요. 아직 자기 욕망에 도달 안 했는데 무슨 행복이 있습니까. 아등바등 애쓸 뿐이죠.

세상 종교는 나를 망각하기 싫어서 만들어낸 게 종교입니다. 천주교, 기독교 전부 다 마찬가지인데 목적과 목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도 닦는 거고 다른 말로 하면 인격수양. 교회 다녔으면 사람이 돼야지, 이런 것 있잖아요. 인격수양이에요. 도를 닦는 거예요. 내가 내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는 어떤 건더기를 내가 수집하는 거예요. 금요철야기도하든지 이렇게 해서. 그래서 이거는 에 나오는 계모와 마찬가지입니다. 멀쩡한 계모 또 의문의 일패 당하지만. 맨날 거울 보면서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멋있느냐, 이런 식으로.

우리는 매일 삶이 자기 거울을 들여다보는 삶이에요. 오늘은 얼마나 순수하고 깨끗하고 인격수양이 되고 어지간한 그런 시험에는 빠지지 않고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늘 나, always 항상 나, 나다운 나, 나답게 나 그게 종교의 이상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 다니고 절에 안 다니는 사람도 무슨 인입니까? 종교인이 되죠. 왜? 종교도 나의 인격수양, 나를 받들기 위해 교회 간다면 그 교회 안 가도 일반사람들 전부 다 사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 자신을 떠받드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떠받들면서 근처에 붙는 게 뭐냐? 내 자식 잘 되고, 우리 가문 잘 되고, 내 회사 잘 되고. 이건 겉절이 가장 붙어있는 거거든요. 그러나 젖히고 젖히면 제일 에이스가 뭐냐? 나에요. 나의 가치와 나의 명예와 나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해서 내가 나를 궁극적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 종교라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거는 굳이 교회 안 나오고 절에 안 가도 사람들은 평소에 다 그런 자기 인격수양, 이게 자기 수련인데 자기 수련에 연마하는 거예요. 필라테스만 하게 아닙니다. 뱃살만 빼는 게 아니게요. 자기 연마에요. 내가 어디까지 순수하고 순결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테스트하고 싶은 겁니다. 시험은 본인이 본인을 늘 시험하는 중이에요. 자기 자질과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자기가 망가질 생각을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모든 일에 범사에 뭐라 했습니까? 감사하라 돼 있지요. 감사할 건더기가 있어야 감사하지 근거가 있어야 감사하지 감사할 게 어디 있어. 감사할 시간이 없습니다. 목표에 미달됐는데 무슨 감사를 합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이 그 누구한테 지기 싫어하고 이기고 싶어 해요.

그러나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는 것은 우리가 아니에요. 뭐냐? 이스라엘입니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 없으면 안 되니까. 계시가 오게 되면 나는 말살되면서 나의 구원은 잘라지고요, 우리의 구원으로 이게 바뀌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한테 누가 져야 돼요? 나가 패배해야지요. 나는 망각되고 삭제되고 우리로 들어가야지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나오지요. 탕자가 가출하기 전에는 탕자가 아닙니다. 멀쩡한 둘째 아들이지요. 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탕자가 언제 탕자냐 하면, 여러분한테 문제를 내야 되겠어요. 탕자가 돈 들고 아버지한테 가출해서 독립할 때 탕자입니까, 돈 다 날릴 때 탕자입니까, 어느 게 탕자입니까? 가서 성공하면 탕자 아닌 게 돼요, 어떻게 돼요?

지금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 때에 걔가 성공하고, 성공 안 하고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 곁을 떠난 거예요. 아버지 곁에 있을 때 탕자가, 둘째 아들이 어떤 오해를 하느냐 하면 아버지 있고, 형 있고, 나 있고 하나, 둘, 셋 이거는 단수가 아니고 셋 사람이니까 합체하면 우리가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우리.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하나같으면 단수가 되고 우리는 복수니까 우리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아들이 가출해서 외지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 다시 아들로 돌아왔습니까. 종으로 돌아왔습니까? 종으로 돌아왔지요. 돌아와도 우리가 돼요, 안 돼요? 우리가 안 되지요. 둘째 아들 생각에 아버지 있고 형과 자기가 있으니까 이거는 우리가 맞지요.

그런데 둘째 아들 생각에 돈 다 날리고 염치불구하고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우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명히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자기를 아들로 여기지 말고 종으로 여기라 했지요. 종은 노예니까 남의 식구잖아요. 둘째 아들 입장에서 우리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우리라고 생각 안 된 그 둘째 아들을 품어줬지요. 가락지와 소 잡았지요. 잔치 벌였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일방적 우리가 되지요. 일방적 우리 안에 그 탕자는 자기는 우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완전히 자기를 상실하고 말살해버리지요. 그럴 때 아버지 중심의 새로운 우리가 등장하는 것, 그게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이에요. 이게 이스라엘이라고요. 나 구원 받고, 너 구원 받았으니까 우리는 구원 받았다. 그건 이스라엘이다. 아니에요.

구원의 주체가 되는 내가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게 우리가 되는 거예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 때 우리가 된다 이 말이죠. 만약에 내가 살아버리면 나는 윤리도덕의 주체가 돼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자시고 어떤 복음을 이야기해도 그 복음이 나한테 올 때는 역시 나는 구원된 훌륭한 사람이라는 자각으로, 너도 그렇지? 새로운 이게 기존의 변하지 않은 우리 개념이 돼요. 숫자만 채우는 우리가 된다고.

본인이 안 망해서 그래요. 안 망한다는 말은 어떤 경우라도 뭐가 안 나온다? 감사함이 나올질 않아요. 다시 할게요. 십자가 앞에서는 이미 우리가 죽은 자요 죄인인 걸 알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감사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만약에 감사를 안 해버리면 그거는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 돼요. 예수님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나온다고.

아버지 당신이 나한테 뭐 해줬다고? 이거는 가출하기 전의 이야기죠. 자기 자신을 모를 때 하는 이야기에요. 아들이 벼슬이라. 교회에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게 벼슬이에요. 되게 안 해도 될 일을 지가 믿어준 것처럼 행세하는 것 보면 가관이에요. 웃기지도 않아. 쓰레기 같은 것 건져줬는데 자기 주제도 파악 못하고요. 주님은 주특기가 죄 사함이니까 받아주자, 받아주자, 이런 식이야. 여전히 자기가 살아 있어요. 그래놓고 복음 안다고, 복음 좀 들었다고.

여기에 여러분,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했어요. 제목이 열두 지파 변천과정이에요. 오늘 강의가 역대상 7장이잖아요. 잇사갈 나오고 그다음에 베냐민도 나오고 납달리도 나오고 아셀도 나오고 스블론도 나오고 쭉 나옵니다. 잇사갈, 스블론, 납달리 굳이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데 꼭 알아야 됩니까, 라는 의문을 할 수 있지요. 여러분들 보기에 열두 지파 명단 나와 있지요. 사람으로 보입니까? 율법의 조각들이에요. 하나님의 계시, 언약의 계시가 떨어지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거기에 레테르, 브랜드 딱지 붙이듯이 사람이 계시로 바뀌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여러분 보기에는 이스라엘 사람이니 사람이지 율법의 조각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계시의 조각들이에요. 생일케이크 자를 때 조각 있지요. 그리고 피자조각 있지요. 주님의 계시의 열두 조각들이에요. 그걸 축복 순서로 해놨어요. 창세기 29장 30절에 보면 나와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너희들 존재는 언약이 없고 계시가 없고 야곱에 주신 그런 축복이 없었으면 아예 생길 리도 없었어, 그런 뜻이에요.

아브라함이 없으면 이삭은 생길 길 없고요, 이삭이 없으면 야곱은 생길 수 없었어요. 정확하게 말해서 아브라함의 언약 때문에 없는 자식이 생긴 게 뭐냐? 이삭이에요. 그리고 이삭 때문에 없는 자식이 야곱이 생긴 겁니다. 그리고 열두 아들도 야곱이 있다고 열두 아들 생긴 게 아니고 야곱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줄 때 열두 아들이 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열두 아들이 그냥 사람이 아니고 전부 다 거기에 딱지 붙여놓은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란 계시가. 그들의 운명이 바뀐 것은 곧 무엇을 확인하라? 계시가 어떤 식으로 변천하고 어떤 식으로 변해 가는 것을 과정을 보란 뜻이에요. 이게 계시의 인격화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신약에 오게 되면, 방금 한 말은 여러분 이해하시지요. 아버지 있고 아들 있고, 아들 있고 손자 있고, 이해하시지요.

신약에 오면 반대가 됩니다. 자식이 먼저 있고 아버지가 나중에 있어요. 계시의 시간은 반대로 가요. 반대로 가면서 나중에 왔던 최종 계시가 완성된 계시가 그 완성 계시의 취지를 위해서 미리 왔던 계시를 삼켜버려요. 장악해버립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예수님 오기를 기다렸다가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는 기다린 게 아니에요. 그냥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거예요. 아브라함이.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도 엘리야도.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도.

저와 여러분이란 말을 참 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몰라요. 제가 수요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게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데.... 영화 에 나오는 한 장면이에요. 김광규가 학생 볼떼기 쥐고,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표준말이 뭐냐 하면, “너희 아버지”거든요. 부산표준말로 하면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조폭인데요.” 선생님이 기가 차서 한동안 창을 보다가 시계부터 풉니다. “오늘 너 좀 맞자.” 장난 치냐 이런 식이죠.

수요일에 그런 예를 든 이유가, 우리가 한시도 잊지 말아야 될 것은,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한전에 다니는 데요.” “우리 아버지 세무서에 다녀요.” 그 따위 소리하지 말고, “우리 아버지는 태초고 근본이고 하나님인 데요.” 그럼 세상은 어떻게 해요? 오늘 좀 맞자. 불도 심한 그 집안의 아가씨가 결혼해서, “실례지만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하나님인 데요.” 시집살이가 자알 풀리겠습니다. 불도 심한 집안의 제사가 일곱 번인 데요.

왜 멀쩡한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놔두고 왜 말을 못해요. 너는 내 사람이다, 왜 말을 못해. 너는 내 여자다, 말을 못하듯이. 박신양처럼. 왜 하나님 보고 주님 보고 주님이라고 말을 못해요. 나를 너무 아껴서 그래요. 내가 나를 관리하고 내가 나를 삭제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 있던 열두 지파가 변천이 되는 거예요. 바뀌는 거예요. 이게 역사 속에 나타난 계시 쪼가리 열두 지파가 숨어 있는 열두 지파를 위하여 자리바꿈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역사에 나타난 이스라엘은 숨어 있는 이스라엘한테 지게 돼 있다. 이 말은 뭐냐? 이스라엘은 싸움하면서 새로 생겨난다. 이스라엘에다 뭘 대입하느냐 하면 교회를 대입해도 괜찮아요. 여기다가 성도를 대입해도 됩니다. 성도는 나와 나랑 싸우는 거예요. 어떤 성경말씀을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내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 내가 인격수양을 하기 위해서 윤리도덕으로 변질된 나를 누가 이기는가? 주님 안에 계시된 나가 나의 가치를 사수하려는 나를 이기는 거예요.

“너 좀 십자가 그만 모독할래? 네가 모독하니까 네 입에서 감사가 안 나오잖아. 걱정이 되지 감사가 안 나오잖아. 그게 바로 네 모습이었었어. 복음으로 칭칭 감은 네 모습이었다고, 이 가짜야.” 주님 생각 안 했어요. 주님을 이용했지요. 스물네 시간 자기 생각만 하고. 지금 열두 지파 이 사람들이 전부 다 율법이에요. 다른 말로 쉽게 하면 말씀이에요. 전부 다 말씀들이거든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이 말을 어디서 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누구 보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세상의 신, 이 세상을 관장하고 있는 신, 악마에게 이야기한 게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왜 이야기했느냐 하면 신 안에 누가 놀아나고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거기에 놀아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행동과 태도는 바로 어디서 나왔는가? 생존본능이에요. 생존에 대한 충동과 본능과 연관되어서 말하고 행동하고 태도가 다 나오게 돼 있어요. 친절하든 양심적이든 뭐든 전부 다 그 밑바닥엔 뭐냐? 생존본능이에요. “나 죽으면 안 돼.” 이게 있다고요. 그래서 인간들이 악마를 못 이기고 세상을 못 이기거든요.

그런데 말씀이 조각들은 뭘 이기느냐? 바로 죽음을 관통하면서 이겨요. 나의 죽음으로써 나를 죽이는 세상을 무사히 용감하게 그걸 관통하는 겁니다. “나, 나한테 신경 안 써. 나는 삭제돼야 마땅해.” 그게 하나님이 내게 딱지 붙인 말씀의 위력이고 말씀의 완성이죠. 아까 이야기했지만 모든 계시의 완료는 마지막에 있잖아요. 마지막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오게 되면 완료됐지요.

그러면 모든 정점은, 마지막이라 하는 게 시간이 창조로부터 마지막 종말까지 이렇게 직선으로 가는 게 마지막이 아니고 위로 가는 게 마지막이에요. 위에서 뭐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지막 남은 것은 이미 위에서 올라가는 점에서 이거는 뭐냐? 역사에서 시작해서 비행기가 막 뜨는 거예요.

그러면 너희는 이미 땅에서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어디로 올라갔습니까? 골로새서 3장 3장,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어디 있다 했습니까? 골로새서 3장 3절, 여러분 다 외우지 않습니까. 생명은 어디 있어요? 하늘에 간수된바 돼 있다 했지요. 그러니까 역사가 이렇게 올라가는 게 아니고 시간도 따라서 위로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시간이 재분배 되는 거예요. 공간과 시간이 재할당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 아브라함이 있다면 아브라함이 붕 뜨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마중을 나오니까 같이 합류를 하니까 아브라함은 이미 생명을 얻은 거죠. 오늘도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 재림 안 해도 이미 생명을 얻은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말씀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말이나 저 말이나 똑같은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주어와 술어의 계층을 관점을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말씀부터 시작해야 돼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말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말씀 있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대로 하는데 너희가 거기에 말려들었다 이 말입니다. 왜? 말씀의 딱지가 붙어있으니까.

그래서 열두 지파가 이렇게 바뀌는 거예요. 열두 지파가 있을 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스라엘은 그 자체로 완성됐다 하거든요. 완성된 게 아니에요. 완성된 것은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이고 이것은 완성되기 위한 밑바탕이 되어서 여기서 변천이 일어나야 될 그러한 한시적인 이스라엘이에요.

우리 성경 하나 찾아보겠습니다. 역대상 7장 2절 끝에 보게 되면, “그 아비 돌라의 집 족장이라 대대로” 그다음 단어가 뭡니까? “용사”지요. 그럼 5절에 봅시다. “그 형제 잇사갈의 모든 종족은 다 큰” 뭐라 합니까? “용사”지요. 7절에 봅시다. “다섯 사람이니 다 그 집의 족장이요 큰 용사”지요. 9절에 봅시다. “저희는 다 그 집의 족장이요 큰 용사” 11절에 봅시다. “이 여디아엘의 아들들은 그 집의 족장이요 큰 용사라” 40절에 봅시다. “이는 다 아셀의 자손으로 족장이요 뽑힌 큰 용사요” 8장 13절 봅시다. “브리아와 세마니 저희는 아얄론 거민의 족장이 되어 가드 거민을 쫓아내었더라” 쫓아냈지요. 전쟁과 관련돼 있지요. 8장 40절, 제일 마지막에, “울람의 아들은 다 큰 용사요 활을 잘 쏘는 자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조각들, 계시의 조각들의 기능은 뭐냐? 싸움하는 거예요. 용사니까. 저와 여러분은 누구와 싸웁니까? 우리가 지금 악마에 속했기 때문에 악마에 속한 특징이 뭐냐? 나의 가치를 포기 못하는 거예요.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어요. 나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나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어요.

그러니까 싸우는 것이 누구냐 하면 내가 나와 싸우는 거예요. 나를 없애주는 것에 감사할 거냐, 아니면 나를 인격도야하고 교양 갖추어서 괜찮은 나로 해서 내가 신으로 등극할 거야, 그 싸움이에요. 나 건드리지 마. 나는 신이야. 이것 주장할 것이냐, 아니면 내가 있으나마나 소실됨으로써 내가 품고 있던 걱정근심도 같이 다 날아가 버리는 것, 무슨 뜻이냐, 쉽게 하면 이런 거예요.

내가 나를 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내 대신 내 책임, 내가 할 것, 내 인생을 대신 해줄 분은 만났다는 이야기에요. 그분이 그냥 커피숍에서 만난 게 아니고 그분이 나의 모든 것을 다 없어져야 마땅한 존재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새로운 나를 만든 거예요. 기존의 나 말고 새로운 나. 거울에 비친 나 말고 나타나지 않은 나, 주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나, 우린 아직 부활 안 했거든요. 그러나 부활 되는 그 나,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예수님의 신부로 부활 되는 그 나를 위해서 이 시답지 않은 너 좀 꺼져줄래, 그런 뜻이에요. 그 싸움이라니까.

이 변천과정에서, 그러니까 처음부터 바뀐다는 것, 그 바뀌는 것의 최종점이 뭐냐 하면 여기에 제일 위에, 창세기 야곱의 12아들들(창세기 29장-30), 그다음에 족보가 또 나오는데 재편되지요. 민수기 가나안 입성 전에 인구 조사했을 때에 열두 지파의 순서(민수기 13장), 그다음에 세 번째가 여호수아 가나안 땅 분배 제비뽑기할 등장했던 열두 지파의 순서(여호수아 13장-19장), 그다음에 에스겔 48장에 에스겔 땅 분배할 때 나오는 열두 지파, 그리고 최종적으로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열두 지파. ** 첨부자료 참고

그러니까 순서가 바뀌는 정도가 아니고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지파 하나가 빠져버렸어. 단 지파가 빠져버렸다고요. 이게 왜 빠졌느냐 하는 거예요. 궁금해요? 단 지파 빠져버립니다. 단 지파 누락됐다, 빠졌다. 이게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주냐 하면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이 다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게 최종 모습이 아니라는 거예요. 현재 있는 우리 모습이 완성으로 가는 게 아니고 우리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으로 생각하는 나는 빠져야 될 거예요.

만약에 안 빠지면 우리 자신이 우상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를 모독하는 게 된다고. 자꾸 괜찮아 지려는 나를 이젠 젖혀버려라. 미련 같지 말라. 이래도 쓰레기고 저래도 쓰레기야. 여기서 더 개선, 발전 쫌 please제발 그런 짓 좀 하지 마. 나 잘 되고, 우리 가정 잘 되고, 자식 잘 되고, 우리 교회 잘 되고, 우리 국가 잘 되고. 제발 그런데 손 놔버리란 말이죠.

그것이 감사가 나타나지 않게 하고 그것이 주님이 주신 계시를 계속해서 모독하게 하는 작동으로 가동이 돼요. 자꾸 내가 있으니까 열심을 내는 거예요. 악바리처럼 버티는 겁니다. 자꾸 조심하고. 특히 자꾸 뭘 하느냐 하면 관찰해요. 사람이 관찰하게 되면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자식이 한 열 명 돼 보세요. 가지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 있잖아요. 이쪽 가지 조용하면 저쪽 가지 시끄럽고.

생각이 단순하지 않고 갈수록 복잡해져요. 복잡한 만큼 초조해져요. 혹시 한 구석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초조해진다고요. 그래서 현대인들은 스트레스가 많은 거예요. 아는 게 많아서. 단순하질 않아요. 단순한 분도 계시지만. 단순하지 않고 복잡해져요. 철저하게 아껴야 되고 손해 보면 안 되고 이익은 최대로 챙기고. 남 놀러가는 해외여행 다 챙겨먹어야 되고.

이 말은 뭐냐? 내가 누굴 관찰한 것처럼 저들도 나를 관찰할 것인가? 남들의 관찰에 대해서 조금도 내가 흠 잡힐만하거나 지적질 당할 일은 내가 용납하기 싫어. 그런 생각으로 사니까 감사는커녕 늘 시무룩하고 심기가 불편한 가운데 인간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바보에요. 참 바보같이 살았습니다. 10분 쉴 때만이라도 바보 멈추시길 바랍니다.

순서

창세기 야곱의 12아들들
(창세기 29장-30)
민수기(가나안 입성 전 인구조사)
민수기 13장
여호수아 가나안 땅 분배 제비뽑기
(여호수아 13장-19장)

에스겔 땅 분배
(에스겔 48장)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12지파

1
르우벤
르우벤
르우벤
단
유다

2
시므온
시므온
갓
아셀
르우벤

3
레위
유다
므나셋(반)
납달리
갓

4
유다
잇사갈
유다
므낫세
아셀

5
단
스불론
에브라임/므낫세(반)
에브라임
납달리

6
납달리
에브라임
베냐민
르우벤
므낫세

7
갓
므낫세
시므온
유다
시므온

8
아셀
베냐민
스불론
베냐민
레위

9
잇사갈
단
잇사갈
시므온
잇사갈

10
스불론
아셀
아셀
잇사갈
스불론

11
요셉
갓
납달리
스불론
요셉

12
베냐민
납달리
단
갓
베냐민

특징

장자권이 르우벤에서 요셉으로 바뀜
레위지파(1)
요셉(1)
에브라임(+)
므낫세(+)
레위지파(-)
단지파가 첫 번째 등장
단지파(+)
레위지파(-)
요셉(-)
에브라임(+)
유다지파가 첫 번째 등장
단지파(-)
레위지파(+)
에브라임(-)
요셉지파(+)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83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9,092 묻고답하기 성령의 거룩하심 - 최고관리자 22-05-15
19,091 자유게시판 5월 부산 성경공부 안내 시편 최고관리자 22-05-14
19,090 자유게시판 18강-미가 5장 7-9절(앗수르와 남은자)220511-이 근호 목사 미가 최고관리자 22-05-12
19,089 묻고답하기 [가련한 양]-송민선 성도님의 글 - 최고관리자 22-05-11
19,088 자유게시판 가련한 양 - 최고관리자 22-05-11
19,087 자유게시판 391강-YouTube강의(이름과 아픔 출애굽기 3:13)20220510-이 근호 목사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22-05-11
19,086 자유게시판 390강-YouTube강의(한계 시편 104:9)20220510-이 근호 목사 시편 최고관리자 22-05-11
19,085 강의 유튜브강의(390강, 391강) 한계, 이름과 아픔 220510 - 최고관리자 22-05-10
19,084 자유게시판 20220506b 울산강의-역대기상(10강) 7장 2절 : 숨겨진 우리 - 최고관리자 22-05-09
열람 ➜ 자유게시판 20220506a 울산강의-역대기상(10강) 7장 2절 : 숨겨진 우리 역대상 최고관리자 22-05-09
19,082 자유게시판 9강-데살로니가후서 2장 8-10절(선택 아닌 선택)220508 - 이 근호 목사 데살로니가후서 최고관리자 22-05-08
19,081 자유게시판 134강-욥기 42장 1~6절(나로부터 구원)220508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2-05-08
19,080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천사 빠진 세상 / 220508 - 최고관리자 22-05-08
19,079 묻고답하기 진리와 불의 - 최고관리자 22-05-08
19,078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11장 2절 (주기도문) 220419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2-05-05
19,077 자유게시판 강남-누가복음 11장 2절 (주기도문) 220419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22-05-05
19,076 자유게시판 17강-미가 5장 5-6절(작을지라도)220504-이 근호 목사 미가 최고관리자 22-05-04
19,075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20429b 마태복음12장 32절(선악 바뀜)-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2-05-03
19,074 자유게시판 광주강의20220429a 마태복음12장 32절(선악 바뀜)-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2-05-03
19,073 자유게시판 8강-데살로니가후서 2장 4-7절(메시아비밀)220501 - 이 근호 목사 데살로니가후서 최고관리자 22-05-01
19,072 자유게시판 133강-욥기 41장 1~4절(변신의 허망함)220501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2-05-01
19,071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우리 고향은 하늘 / 220501 - 최고관리자 22-05-01
19,070 묻고답하기 구원받지 못함 - 최고관리자 22-05-01
19,069 자유게시판 수요설교 요약(바뀐 인생 : 220413) - 최고관리자 22-04-30
19,068 자유게시판 안양20220414b슥11장13절(사라지는 매개자)-이 근호 목사 - 최고관리자 22-04-30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