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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20429a 마태복음12장 32절(선악 바뀜)-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태복음

광주강의20220429a 마태복음12장 32절(선악 바뀜)-이 근호 목사

오늘은 p.219 “2. 발생적 성전 관과 주체”. 지금 를 교재로 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70이레는 성전의 위상에서 배출되어 나온 시간 구조다” 시간이 나왔다는 표현을 하고 있죠. 시간은 이미 인간 속에 시간이 있는데 그 인간 속의 시간 말고 또 나올 시간이 어디 있느냐.

인간 속에 시간 또는 시간의식이 있다. 우리의 상식이죠. 상식은 틀렸습니다. 시간 속에 인간 있습니다. 시간 속에 인간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 속에 시간이 있으면 인간은 죽게 되지만 시간 속에 인간이 있으면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다시 호출되죠.

인간은 죽었다고 하는데, 인간 속의 시간에 의해서 자기 시간이 끊어졌으니까 자기 존재, 자기 생각이 끊어졌으니까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니 생각이고! 인간 속에 시간이 아니고 시간 속에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죽어도 시간은 남아돌잖아요. 인간은 시간 속에 있으니까 시간이 죽지 않는 한 인간은 못 죽죠. 이게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답답하면 죽으면 되는데 죽지를 않아요. 죽을 수가 없어요.

인간을 못 죽게 묶는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몸에서 시간과 공간이 나옵니다. 나오는데 인간들 입장에서는 이게 새롭게 나오는 걸로 이해해요. ‘인간 속에 시간, 인간 속에 공간’ 인간 세계에서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시간과 공간이 나와 버리면 어? 우리하고 다르네. 왜 다르지? 본인들이 잘못 생각한 걸 모르고 예수님의 시간 공간이 생기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시잖아요. 하나님에서 시간, 공간이 나와줘야 시간이 의미를 갖고 공간은 의미를 갖고 시간 공간은 그 의미의 줄을 따라서 어디로 회수되느냐 하면 예수님에게로 도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이 시간 공간은 비로소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가치를 획득하게 돼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영원. 이것은 예수님의 몸이 나올 때 비로소 밝혀집니다. 이게 밝혀져요.

그럼 성도는 뭐냐? 성도는 자기 몸은 거부당하고 예수님 몸의 시간 공간 속에 같이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주님에게서 나온 시간 공간을 혓바닥이라 보면 혓바닥을 내밀 때 찍찍이처럼 딱 달라붙어가지고 혓바닥을 감아버리니까 거기에 딸려서 주님 몸으로 쏙! 들어가는 거예요. 주님 몸으로 쏙 들어가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신약적 안목에서 관점에서 제가 이야기한 것이고 구약적 안목은 뭐냐 하면 성전이 이 일을 해냅니다. 구약적 안목에서는.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몸을 성전이라 해요. 요한복음 2장에 나오죠.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몸이니까 구약에서의 성전은 그 당시에, 이런 단어는 좀 어려운데요, 실제성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 당시에 가건물이 아니고 실제로 건물로서 예루살렘이라는 촌락에 다른 건물들로 인간들이 기거하는 집이 있듯이 여기 예루살렘 한복판 중심부에 하나님의 이름이 사시는 집을 실제로 지었죠.

집의 재료는 누가 마련했어요? 다윗이 마련하고 그것을 총감독해서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 완성시킨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전에는 인간의 손, 인간의 능력이 가미되었다 또는 개입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감당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인간의 손의 능력이 들어간 그 성전이 계속 하나님을 붙잡아둘 수 있는 그런 완성적인 거주지로서 과연 가능하냐 이 말이에요. 가능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 속에 능력이 들어왔다는 말은 인간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 개념이 이 안에 들어갔다는 뜻이거든요.

다윗이 그런 오해를 했었어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는 집 잘 짓고 사는데, 다윗이 하는 말이에요, 하나님은 있을 집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살 집이 있는데 하나님은 살 집이 없잖아, 라고 비교하는 그 비교의 요건이 우리는 우리 몸을 건사하기 위해서 시공간 마련했는데 주님도 우리와 동일한 실존으로서 몸으로서 거주할 곳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집에 있는 개집이, 개가 요청해서 개집을 짓습니까, 주인이 일방적으로 지어주는 겁니까? 주인이 지어주죠. 그러면 주인이 개집에 맞춰서 크기, 안락함 이런 것을 계산해서 개집을 만들었어요. 주인도 그 정도 수준해서 자기 집을 지어야 돼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 개집을 지을 때 그렇지 않죠. 자기 집의 부속으로 짓죠.

그러면 이것은 개집을 지어준 적이 없는 거예요. 자기 집 짓는 가운데 독립적으로 개집을 지어준 적이 없고 자기 집의 하나의 부속 건물로서 개집 지은 겁니다. 개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분 나쁘죠. 그럼 집이라고 하지 말던지. 집이라는 것은 독자성을 보장해줘야 집이죠.

성전을 인간의 손으로 지었다는 말은 개가 개집을 자기 스스로 지었다는 뜻이 돼요. 자기한테 부담이 안 갈 정도로 감당이 될 정도로 하나님 집을 지어준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다윗이 제안을 할 때 우리는 여기서 잘 사는데 하나님의 집이 이렇게 없어야 되겠습니까? 벌판에 계셔서 되겠습니까? 이래서 지었거든요.

그러니 거주하는 그 조건 자체를 누구 쪽에서 제시한 거예요? 인간 쪽에서 제시한 거죠. 이것은 개하고 사람하고 살면서 개 쪽에서 개가 주인님 집은 인테리어 이렇게 해야 되고... 그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기의 협소한 안목에 맞추어서 이정도 지어드리면 아마 하나님께서 흡족하겠다, 하고 자기 안목은 깨뜨릴 생각 못하고 내 쪽에 문제 있다는 생각 안하고 ‘극대의 성의를 보이면 하나님이 사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죠.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다시 해도 벌써 다 잊어버렸어요. 처음에 무슨 이야기했느냐 하면 인간은 시간 속에 인간이냐, 아니면 인간 속에 시간이냐, 그 언급을 했어요. 인간은 나를 살리기 위한 시간 공간이기 때문에 시간 공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의 존재함이 중요한 거예요. 이것은 아까 이야기 안한 거죠. 한번 더 하면 또 다른 게 나와요. 내가 생존하는 데에 고려되는 유리한 시간 공간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실상은 인간을 위해서 시간 공간이 있는 게 아니에요. 시간 공간 들으면 기분 되게 나쁠 거예요. 뭐 이렇게 일방적인 생각이 어디 있냐. 나는 예수님의 몸을 모실 시간과 공간이에요. 예수님의 몸을 위한 시간 공간이기 때문에 시간 공간을 어떻게 결정하느냐는 시간과 공간이 궁극적으로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돌아가느냐를 보면 돼요.

시간 공간이 인간에게서 나왔습니까? 아니죠. 창세기 1장을 보면 시간 공간이 먼저인데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시간 공간을 내 생존에 적합하도록 있어야 돼, 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방적 교만이죠. 거만함이고. 자기 주제파악도 못하면서.

그런데 이 시간 공간은 예수님의 몸에서 나왔기 때문에 필히 어디로 돌아가야 됩니까? 예수님 몸으로 돌아가죠. 그 가운데서 시간 공간은 자기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해야 될 그 완성적 작업을 이룰 수 있는 범주, 형식으로 자리 잡고 활동해요, 시간 공간이.

그래서 이 시간 공간은 그물망 같아요, 그물망. 어부가 그물 던져 고기 잡을 때 그물망 뜯어먹으려고 고기 잡습니까? 이거 맛있다, 비닐 그물망. 이러지 않죠? 뭔가 포획하잖아요. 시간과 공간을 무엇을 포획하는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포획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그물로 사용하는 겁니다. 이것도 아까 이야기 안 한 거예요.

그물망이니까 그물 스스로 기준을 세울 수 없고 자기가 복귀해야 될 분의 기준에 시간과 공간이 젖어있죠. 그래서 예수님이 완성한 그것이 기준이 되어서 좋은 고기, 나쁜 고기가 있는데 나쁜 고기의 대표적인 것이 역시 악마라는 피조물입니다. 악마라는 이 피조물은 신약에서는 뭐라고 별칭이 주어졌느냐 하면 이 세상의 신. 절대가치. 이 세상의 절대가치라고 호칭되는 악마도 포획됩니다. 그러니까 악마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싫어하는 이유를 아시겠죠?

현재 기존의 인간들은 죽어라 자기 몸을 위해서 시간 공간이 있다고 생각하고 공간도 가꾸고 경작해야 되고 시간도 계산해야 되고 언제 씨 뿌리고 언제 추수하는지 시간 계산하는 식으로 전부다 인간의 생존과 결부해서 이게 규정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시간 공간이 오직 너의 목숨 유지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이 견지로써 악마는 인간을 꽉 잡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의 언약이 등장해서 시간 공간은 예수님이라 하니까 악마 입장에서는 누구를 척결해야 돼요? 예수님을 제거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이 글을 하나 올렸는데 제가 댓글을 하나 달았어요. 선악과의 취지에 대해서 제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의 취지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갖고 있는 판단기준, 심판기준을 강제로 인간이 빼앗아 와서 이제부터는 내가, 내 신앙이 뭐며 소망이 뭐며 내가 예수 믿는지 안 믿는지 주님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그 판단을 누가 내리겠다는 말입니까? 내가 내리겠다는 거예요. 내용은 생명이고 신앙이라고 말들 하지만 판단기준 자체가 무슨 체계입니까? 선악체계이기 때문에 전부다 거짓이 되는 거예요. 가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이 선악체계가 그렇게 지독해요. 굉장히 독하죠.

어째든 간에 예수님 몸이 시간 공간이기 때문에 악마는 예수님을 배척했죠. 이것은 마치 옛날에 선악과를 본인이 하겠다고 빼앗아 온 것과 마찬가지로 최종 결정권자가 오니까 죽여버렸죠. 그런데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이 되어버리면 인간은 죽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시간 속에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보다 시간이 선행되거든요. 시간은 주님께 속했으니까 선행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시간 계산해가지고 숨 끊어지고 내 생애 끝났다, 해서 죽은 걸로 여기는데 죽고 보니까 이게 안 죽었어요. 아니 못 죽어요. 세상에 이런 저주가 어디 있습니까? 뭐 밟으면 죽어야 되지 않습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죽잖아요. 이게 죽지를 않아요. 주님의 그물망에서 그리스도가 심판주 되기 위해서 끝까지 가야돼요. 나쁜 역할을 끝까지 해야 돼요.

그것이 죽고 난 뒤에 판정 나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을 때부터 판정 나는 겁니다. 살아있을 때는 그렇고 그런 인간들 전부다 죽을 때까지 재미나게 살면 된다, 해가지고 죽어서 천당 가봤나? 이렇게 건방을 떨면서 안일하게 살아가는 것, 그걸 일상이라고 하죠. 그런 안일한 일상이 있으면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오면서 쌓아올린 인식구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쌓아올린 인식구조 또는 인식체제 하에서 현재 지금의 자아관과 세계관이 정해져요. 그럼 내일되면 바뀌겠어요, 안 바뀌겠어요? 또 바뀌죠. 또 바뀌는 거예요. 왜? 내일되면 오늘까지의 내용이 보태져서 자기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자기가 까불고 놀았던 태어났던 그 골목길. 어릴 때는 상당히 길었고 골목도 넓었고 몸체가 작으니까 골목도 넓고 너무 길어서 그 뒤에 도깨비라도 나올 것 같은 인상이 들죠. 그런데 나중에 나이 육십 넘어서 그 골목 가보세요. 덥기만 하고 목만 마르고... 어디 여기 마트 없나? 찾고.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육십 년을 그냥 보낸 게 아니에요. 일곱 살 때 교통사고 당해서 의식 불명 되었다가 육십 살 때 깨어난 게 아니거든요. 누적되고 누적된 게 있어요. 누적된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면 같이 꼬마로 놀던 그 친구들, 순이, 정식이, 영희, 철이 그리고 일가친척들, 젊어보였던 이모님하고 아버지, 엄마, 삼촌들 그런 사람들이 고만고만한 그때 나이로 같이 있어줘야 느낌 아니까 느낌이 확 나는데 그들이 없어요. 그들이 없다고요.

이것이 일상에서 우리가 늘 느끼는 거예요. 식사를 할 때, 맨날 말다툼하고 싸우고 짜증내고 하면서도 밥을 먹을 때 앞에 애들이나 남편이 있을 때 그때 밥을 먹는 것하고 다들 어디 놀러가고 애들 수학여행가고 아무도 없이 허전할 때 동일한 반찬, 물론 홈쇼핑 배달한 거죠, 동일한 반찬, 국거리, 똑같은 밑반찬 내가지고 냉장고 앞에서 한번 잡숴보세요. 한번 먹어봐요. 처음에 밥맛 하나도 없습니다. 몸이 말해줘요. 생각은 동일한 단백질, 탄수화물, 동일한 영양소 똑같은 음식인데 그 맛인데 인간의 몸이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의식화된 몸이에요. 이 몸 자체가.

그래서 보통 남자들이 일찍 죽으니까 그렇게 괴롭히던 남편이 일찍 죽고 난 뒤에 제일 많이 우는 사람이 누구나 봐도 남편한테 구박받았다고 동네소문 다 났던 그 아내가 마지막 화장터에 불속에 들어가는 것까지 붙잡아 당겨가지고 “여보, 나 이렇게 못 보낸다.” 관 아래 손으로 딱 잡아들 수 있는 게 있어요. 지금 막 가는데 그거 붙들고... “어머니, 왜 이럽니까? 그렇게 영감 잘 죽었다 해놓고 왜 한입으로 두말하십니까?” “아이고, 영감. 나 우에 사노. 난 이제 못 산다. 난 못 산다.” 죽기 전에 얻어터져가지고 볼에 멍들어도...... 남이 아니에요.

그런 분들이 있어줘야 내가 구상돼요. 어떻게 구상되는가? 인간의 인식체제 안에서 내가 구상이 돼요. 그럼 그 남편이 내 인식체제 안에서 잘려나가 버려요. 잘려나가 버리면 그건 그 나가 아니에요. 이걸 가지고 주체의 삭제라 해요. 주체가 삭제된 거예요. 삭제되면 여기서 생기는 게 주체의 싱크홀. 싱크홀 알죠? 갑자기 땅이 확 꺼지는 것. 싱크홀.

그래서 우리 몸은 성도가 아니에요. 우리 몸은 성도가 될 수 없어요. 우리는 죽을 몸이지 성도가 될 수 없어요. 성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식을 줘놓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동일한 팔자로 가라고 우리 속에 뻥 하고 싱크홀이 만들어지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그래야 나는 주님 없이는, 영감 나는 못살아, 하는 것처럼 난 주님 없이는 못 살아요. 남편을 상실해버린 새댁의 마음. 신랑 어디 가있어요, 지금? 하늘로 가있기 때문에 땅에 대한 어떠한 기대와 미련이 없는 거예요.

그러려면 예수님에게서 시간과 공간이 나왔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은 어디로 회수되겠습니까? 완성형으로 도로 예수님의 몸으로 돌아가겠죠. 마찬가지로 우리 죄인이 성령이 와서 성도가 되어버리면 완성된 시간과 공간이 와서 성도가 되는 겁니다.

누가 한번 찾아볼까요? 마태복음 12장 32절,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희한하죠. 예수님을 거역하면 용서를 받는데 성령을 거역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세상에서 용서를 받지 못할뿐더러 저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되어있어요.

그러면 성령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분이 되는 거예요. 죽어서 천국 가겠다 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성령 받지 못하면 죽어도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성령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면 저 세상에도 내침을 당하죠. 버림받은 자가 되죠.

예수님이 인자거든요. 십자가 전까지는 인자라 해요.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주님이 되고. 주시고 하나님이시라. 그래서 인자로 계셨던 그곳에 성령이 임해버리면 성령은 인자와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시킬뿐더러 예수님 자기 본연의 임무를 완성시켜버려요, 성령이. 완성시켰다는 말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완성시켜버린다는 말이죠.

혓바닥 이야기했죠. 예수님에게서 시간과 공간이 쫙 뻗어 나오면 거기에 이 세상의 나쁜 고기, 좋은 고기가 묻어 가지고 회수가 돼버리잖아요. 필히 나쁜 고기가 있어줘야 돼요. 인간은 죽지 않아야 되니까. 지옥에 가기 위해서 부활되어야 되니까. 진짜 예수님 무서운 분이죠?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게 뭐라고 했습니까? 곶감이죠. 곶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외손자, 외손녀 와서 실험을 해봤어요. 곶감보다 더 무서운 게 있었어요. 호떡. 집에서 호떡 만들어주니까 아주 환장을 해요. 저는 분명히 단언합니다. 호떡보다 더 무서운 분은 바로 예수님이에요.

애한테는 돈 같은 건 전혀 소용없어요. 종이는 집어던져 버리죠. 애한테는 전부다 실물경제입니다. 약속어음 같은 건 필요 없어요. 화폐도 필요 없어요. 실제 사물화 되어야 돼요, 애한테는. 솔로몬과 다윗이 애 아닙니까? 왜? 구약이니까요. 성전을 인간의 건물처럼 실제로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겁니다. 실제로 성전을 만들어냈죠. 아까 개집이야기도 했는데 개집을 개 같은 인간이 지어놓고 그 개집에다가 하나님보고 살래요. 물론 자기 집보다 더 좋은 개집이죠. 인간들 손으로 지은 건 다 개집입니다. 예배당이 되었든 뭐가 됐든.

그것은 뭘 모르는 것인가? 인간의 실존과 주님의 실존 사이에 갭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그들은 모르는 거예요. 인간의 실존은 어디서 형성되는가?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서 형성되고 주님의 실존은 주님께서 새롭게 덮치게 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을 인간은 오해했죠. 창세기 1장에 보면 시간과 공간은 인간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에. 인간보다 먼저 있었잖아요, 공간과 시간이. 그런데 인간은 범죄하고 난 뒤에는 이 세상 돌아가는 시간과 공간이 나 자신을 위해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육십 될 때 날 부르러 오거든 내가 할 일이 많아서 못 간다고 아뢰라, 이런 거. 못 간다고 전해라 하죠. 그 인식이 바로 악마가 인간을 장악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아까 마태복음 12장 32절에서 사함을 받지 못한다,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 하는 것은 예수님이나 성령님이나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는 죄가 있다는 거예요. 그럼 죄의 결말은 뭐에요? 파멸이고 심판이고 저주죠. 예수님께서 죄가 발생된 그 원인을 보니까 거기에 누가 있었어요? 악마가 있었고 악마가 인간의 마음을 장악해서 죄가 성립되었으니까 예수님 오신 이유도 성령 오시는 이유도 이 죄를 사하러 오신 거예요. 어떻게 사하시는가? 예수님 단독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요단강에서 누가 오죠? 예수님께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의 사함이 오는 세대에 적용이 됩니다. 그러면 성령은 예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완성시키는 일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과 성령이 하시는 이 일을 구약으로 가서 확대시켜보겠습니다. 이 지점을. 돋보기로 하는 거 있죠? 잘 안보일 때 돋보기로 확대하는 것처럼 확대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여기 바로 성전이 나오는 겁니다. 기존에 인간 손으로 지은 성전에서 성령으로 지은 성전. 이건 스가랴에 나오는 거죠. 사람의 힘으로 능으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한다고 나오죠 (스가랴 4장 6절).

인간 손으로 지은 성전에서 성령으로 성전을 짓는 이 과정 속에서 인간 손으로 지어진 이 모든 것은 파괴되어야 됩니다. 파괴되어야죠. 그러면 성도 안에도 인간의 시간 공간이 있겠죠. 여기에 주님께서 성령이 와버리면 싱크홀이 돼요. 이게 삭제가 되고 제일 한복판에 뻥! 하고 구멍이 나버려요. 구멍이 나버리죠. 구멍이 났다는 말은 비어있다, 공백이다 이 말이죠. 공백이 되니까 근심 걱정은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죠.

근심 걱정이 나왔던 그 자리에 뻥 하고 구멍이 뚫려버렸으니까 허하니까 통째로 밑둥치가 없어졌으니까 근심 걱정이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고 성도는 하나의 파이프가 되죠. 굴뚝으로 연기가 이동하죠. 이건 관통하는 거예요. 시원하게 관통하는 것. KTX가 지나가면 하나의 KTX가 지나가도록 허락하는 터널 역할. 또는 예수님이 버스라면 우리는 차고지. 성도는 차고지. 그리고 비행기 같으면 격납고. 이 취지가 뭐냐 하면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거예요.

증인이라는 게 뭐냐 하면 소개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창조주요 플러스 심판주라는 사실을 소개하는 일. 그걸 주일 낮 설교할 때 우리 교인들에게 써먹었는데 저도 한번 써먹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심판주요 창조주라는 사실을 소개하는 증인 역할을 누가 해야 됩니까? 여러분! 그러니까 성도가 개인적인 자기의 의로움이라든지 완벽함, 철저함, 실수 줄임,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 그건 싱크홀이 돼서 그런 걱정과 염려가 나오는 그 자체가 날아가 버려야 돼요.

공포와 불안의 차이는? 공포는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외부의 대상 때문에 생기는 게 공포이고 불안이라는 것은 내부에서 내부로 이어지는 것이 불안이에요. 예를 들면... 예를 들어야 이해가 돼요. 예를 안 들면 이해가 안돼요. 절벽이 있는데 누가 나를 들어서 절벽에 떨어뜨릴까 걱정하는 것은 뭐냐? 누가, 덩치 큰 누가 와서 하면 그 대상, 나 말고 바깥에 저벅저벅 다가오는 그 대상보고 느끼는 게 공포이고 내가 그 절벽을 팔 벌리고 한번 날아봤으면 좋겠다 해서 내가 스스로 나를 절벽에 못 던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은 불안이에요. 자살이죠. 우울증이죠 뭐.

왜냐하면 사람의 유혹 가운데 가장 큰 유혹 중 하나는 내가 지금껏 쌓아온 시간과 공간에서 자기가 보았던 것을 쌓고 난 뒤에 거기서 자기 이해를 하거든요. 지금껏 안 해본 것을 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미친듯이 높은 산에 올라가는 것. 에베레스트산 14좌 세계 고봉 14좌 등정하고 난 뒤에 그것도 성에 안차가지고 이제는 첫 번째 누가누가 빨리 올라가는가. 두 번째 누가 안 가본 루트를 통해서 올라가는가. 세 번째 산소통 없이 올라가는가. 네 번째 오십 되기 전에 다른데 가보는 것. 마약도 그런 마약이 없어요. 마약도 그런 마약이 없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요. 98학번 40대 중반 가까이 되는 어떤 여자 분인데 어느 경찰서에 수사과장인가 그래요. 여자인데 수사과장. 이 사람은 동양화 전공했다가 은행이 취직했다가 그다음에 싱가포르 승무원 됐다가 아이고 이것도 뭐 성에 안차서 변호사 시험 쳐서 한번에 1,2차 합격 다 돼서 변호사하고. 변호사로 로펌에 한 2년 있다가 경찰 특채 하는 게 있어요. 경쟁하는 그게 되가지고 지금 6년째인가 7년째하고 있답니다. 물론 결혼 안 했죠. 이 사람이 사법고시 준비를 하는데 아침 10시부터 공부해서 새벽 4시까지 공부를 했답니다. 그야말로 자아가 싱크홀 되는 거 같아요.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불안해서 그런 거예요. 내가 자기 단도리를 단단히 하겠다는 거예요.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그 여자한테 공포는 문제가 아니에요. 이 세상에 무서운 대상은 없어요. 가장 문제는 내가 내 욕망을 마저 달성 못하고 이 청춘을 헛되이 보낼까봐 오는 불안. 세상에 이런 병도 다 있습니다. 그런 병도 다 있어요.

이게 이제 마귀병인데 성도는 보세요. 성도는 본인의 손으로 능으로 성전을 짓지 않는 거예요. 뭘 해내지를 않는 거예요. 무슨 개가 주인을 위해서 집을 지어드려요. 개인데 개가 솜씨를 부려봤자 그것은 개집 되지요. 개집 된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악마가 인간을 다루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다룹니다. 이미 완성된 안에서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 의해서 이 시간은 우리 인간들이 그동안 악마한테 사로잡히고 농락당했던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이 말이죠.

자, 시간 봅시다. 청춘을 허비하지 않겠다는 말에서 청춘이란 말은 무엇을 이미 전제로 한 거예요? 내가 이 시간의 진열대 앞에서 흘러가고 있고 이 시간은 어디까지나 누구를 위한 시간이다? 나를 위한 시간이다. 이 시간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고 어느 정도 능력이 대단한가를 스스로 자기 증인되기 위해 사용하는 시간과 공간이었어요. 자기 증인. 뭐 자연인 돼서 산속에서 체조나 하는 게 아니고 세상에 나가서 어떤 공간을 점유하는 거예요.

그 어렵다는 외국계 은행, 그리고 그 어렵다는 승무원. 어떤 외국 항공사 승무원은 경쟁률이 3000대 1이에요, 미국 항공사 승무원은. 참 미국도 취직난이 대단하죠. 3000대 1이에요. 그 어렵다는 승무원. 변호사는 더 어렵죠. 변호사 학원 다니는 데서 책이 왔는데 자기 키높이만큼 책이 왔답니다. 계산을 딱 해봤대요. 계산을 해보니까 하루 200페이지를 독해해야 이 책을 다 뗀다 해가지고 그다음부터 하루에 200페이지를 다 봐서 한번 만에 다 됐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뭡니까? 자기를 위한 시간이죠. 불안감이 없어졌습니까? 더 생기죠. 뒷산에 올라가니까 더 높은 산이 그제서야 보이는 거고 그게 자기를 미치게 만들죠.

지금까지는 시간을 이야기했고요. 이제는 공간입니다. 공간은 더 어려워요. 공간은 어렵기 때문에 수요일에 했던 것을 잠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수요 설교의 주제는 이거였어요.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이고 예루살렘이고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의미는 지상에 처음부터 없었어요. 예수님이 태어나는 장소가 베들레헴 되도록 미가 5장 2절에서 예언되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성도되고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복음이 올 때 택한 백성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주님의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내 시간과 같이 만남으로써 비로소 말씀은 생겨나는 거예요. 그러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베들레헴이라는 세상적인 지명은 무엇과 결합되느냐 하면 인격, 베들레헴에서 일어날 사건의 의미를 완성시킬 인격, 그 분과 결합될 때 베들레헴은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런 경우를 성경에 있는 중에서 유명한 데를 제가 한번 뽑아봤어요. 유명한 것만 한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호수아 7장 26절에 아골 골짜기. 아간이 하나님 전쟁했는데 자기는 전리품만 되면 될 것을 전리품 주제에 자기가 주인 물건을 도적질한 거예요. 본인 자체가 전리품 되면 되는데 획득물 되면 되는데 본인이 따로이 자기 소유물을 얻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돌에 묻혀져 죽게 만들었어요. 그 골짜기가 아골 골짜기에요. 아골이라는 뜻은 괴롭다는 뜻이니까 괴로운 골짜기.

그리고 여러분 잘 아시는 창세기 32장 30절, 브니엘. 브니엘 알죠? 부산에 가면 브니엘 고등학교 있어요. 그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봤다. 환도뼈가 작살나서 절었는데 그때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생명을 얻은 거예요. 사건이 일어난 곳이 지명이 되는 거죠.

그다음 창세기 32장 2절에 보면 마하나임이라는 지명. 그것은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을 만나러 왔다는 거예요. 사다리로 내려왔던 군대 숫자가 왜 그리 많은지. 그 많은 군대가 야곱에 집중하는 거예요. 야곱은 자기한테 집중하는 줄 알았는데 자기가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집중한 겁니다. 그러니 야곱 안에 이스라엘이 잠복되어 있고 잠재되어 있었던 겁니다. 야곱은 자기 시간과 공간에서는 그것을 알지 못했는데 밤중에 천사가 와서 얍복강에서 씨름한 그 공간, 그리고 그 시간 속에 장차 오실 예수님이 이스라엘로 오셨다는 그 내용이 언약 속에 함께 자기 안에 더불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다음에 브엘세바. 창세기 21장 31절 브엘세바. 아비멜렉 추장에 의해 땅도 한 뙈기 없는 아브라함에게 땅이 처음으로 생긴...... 언약적으로 약속 맺어서 외지인데 아브라함의 땅이 생긴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 공간 속에 삽입된 사건이 브엘세바 사건입니다.

그다음에 여호수아 5장 9절, 여기는 굴러가는 것, 수치가 떼굴떼굴 굴러가는 것. 광야 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가 요단 강 건너가서 할례하고 난 뒤에 할례를 행하자 비로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언약 백성이라 해서 나머지 잘라낸 것은 떼굴떼굴 굴러가죠. 그게 어떻게 떼굴떼굴 굴러가는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수치가 굴러간다, 길갈. 길갈이라 하는 거예요.

뭐니뭐니해도 지명과 관련해서 그다음에 또 유명한 곳이 여호와 이레라는 지명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해서 바친 곳(창세기 22장 14절). 그리고 사람들에게 여호와 이레도 유명하지만 여호와 닛시라는 곳도 유명해요. 아말렉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이에요 (출애굽기 17장 15절).

그리고 또 지명 중 하나가 출애굽기 17장 7절에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그런 뜻이에요. 다퉜다, 시험했다. 맛사와 므리바.

그 지명도 유명하고 또 사무엘상에 보면 사무엘이 전쟁에서 승리했어요. 승리하면서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는 게 있어요. 사무엘상 7장 12절, 에벤에셀. 교회 다니는 사람은 에벤에셀은 잘 알고 있어요. 에벤에셀 기도원이라든지...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그러니 성경에서 전부다 언약개념인데 전부다 자기를 위해서 성경을 도입하니까 뭐 좋다고 하면 막 끌어다 쓰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전 이런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패치 또는 파스. 거미줄 나부랭이. 여호와의 증인처럼 성경 말씀 아는데 걷어내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요. 파스도 그렇지만 얼굴 팩. 붙이고 난 뒤에 떨어지면 그만이에요.

성경말씀이 이상하게 안 붙어, 이게.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주지 않아요. 그냥 내가 알던 시공간이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뭐 설교야 듣죠. 생중계로 듣고 하는데 떼버려요, 그냥. 예배 듣다가 돌아다니면서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얼굴 팩하는 것도 아니고...... 파스야 떼면 그래도 다리털이라도 뜯어져 나오죠. 이건 뭐 생생하게......

그냥 거미줄 귀찮아서 걷어내듯이 인간 본인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십자가 앞에서 아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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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8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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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