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0장 21절 (섬) 220322b-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0장 21절 (섬) 220322b-이근호 목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사랑은 인간의 욕망으로 다 메꿔져요. 금방 메꿔져요. 사랑의 이름으로 때리고 사랑의 이름으로 공부하라고 하지만 그 사랑이 없음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내 욕망에 부합되라고 재촉하고 채찍질하는 거에요.
부모가 자기를 미워해서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사랑에 네가 힘 보태라고 사랑하는 거에요. 결국 남는 것은 자식 사랑이 아니고 자식보다 자기 존재가 더 사랑스러운 겁니다. 게다가 남편이 자기 아내에 대해 관심이 없어버리면 거기에 대한 복수심 또는 거기에 대한 보복으로 자식에 대해 집착을 더 하게 되어있지요.
왜? 남편마저 떠난 상태에서 자식마저 떠나버리면 자기의 내용은 텅 빈 공간이 되잖아요. 자기가 텅 비면 되잖아요. 왜? 주님은 아이에게 계시를 했지, 어른 같은 나에게는 계시를 안 했잖아요. 나에게는 숨겼잖아요. 주님 쪽에서 생각해보세요. 주님 쪽에서는 꽉 차 있는 나에게는 들어 갈 틈이 없어서 안 줍니다. 뭔가 비어있어야 되지.
텅텅 비어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욕망이 나의 비는 것을 용납을 안 해요. 욕망 자체가 내가 한시도 비는 것을 용납지 않아요. 언제 왔느냐 멀리 있는 욕망이 벌써 비어있으면 다 채워버려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것을 내 영혼이라고 해요. ‘내 영혼’. 갑자기 찬송가가 확 생각이 나요. “내 영혼이 은총 입어” 하는 거 있지요.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내 영혼. 영혼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욕망이 변형된 게 영혼이에요. 순수하지 않습니다. 욕망이 영혼을 영원토록 가기를 추구할 때 그것이 뭉쳐져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영혼이 됩니다. 마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죄가 올라오게 되어있어요. 끊임없이.
입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게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는 말은 이 욕망이 변형을 한 거에요. 영혼이라는 아주 고상한 용어로. 마치 영혼이라고 하면 굉장히 순수한 것처럼. 마치 창세기 2장에서 진흙으로 숨 쉬라고 하는 그 푸쉬케, 그 기. 그것이 그대로 남아있는 줄 알고 있어요.
주께서 아버지께 대화하고 기도한 내용은 아이가 주인공이다. 아이가 주인공이에요. 기존의 슬기롭고 지혜로운 것을 추구하는 모든 어른의 세계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에요. 왜? 어차피 아이는 얼마 안 지나서 벌써 자아가 발생 되가지고 어른 흉내 내기 바쁩니다.
자, 아까 강의 했지요. 어른이 되는 방법은 존재가 되는 방법은 자기 것이 누적되어 있으면 그게 부풀어져서 어른이 돼요. 풍선 안에 바람이 불면 풍선이 커지는 것처럼 아이도 어른 것이 들어가버리면 어른 흉내내버리면 그건 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새 애들은 애가 아니에요. 작은 어른들이에요. 자의식이 강하죠. 뭐 사춘기라고 하는데 개인의식 강렬하죠. 자의식은 풍선이라면 이 안에 사랑이 있는 게 아니고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욕망이 들었다는 것을 가지고 뭐냐. 내 마음이다 이렇게 하거든요. 그래 그게 네 마음이다. 그게 네 마음이야.
욕망이 한순간의 욕망이 아니고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기대하면서 그게 네 마음이고 그게 네 영혼이 되는 거에요. 이 그림 중요해요. 욕망이 올라가게 되면 영혼이 되는 겁니다. 영원토록. 자, 그렇다면 아이가 없다고 했지요. 아이가 없어요. 아이는 공백 안에 들은 섬이 되가지고 인간들은 거기에 접근할려면 본인부터가 자기가 미워해야 되고 자기가 없는 존재가 돼야 되는데 인간에게는 택도 없는 소리에요.
멀쩡한 내가 왜 없어져. 그렇거든요. 그런 주장하는 거에요. 내가 왜 날 미워해? 미워할려면 나를 괴롭히는 적을 미워해야지. 왜 나를 미워해. 인간은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다는 그 최종적인 결정적인 증거가 뭐냐? 십자가입니다. 왜? 십자가는 인간의 미움의 다 집중되어있어서 터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그래서 흘려진 것이 예수님의 피고 예수님의 살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먹여버리는 거에요. 먼저 먹여버리면 제자들의 운명은 본인의 욕망 따라 갈 수 없고 그들이 먹었던 예수님의 피와 살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제자들의 특징은 날마다 어린 아이같이 돼요.
왜? 어린 아이의 특징은 뭐냐? 타인으로부터 욕망의 대상이 안 되는 거에요.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안돼요. 부러움의 대상이 안 되는 거에요. 타인들로부터. 그런데 하나님의 적은 마귀잖아요. 성도의 적은 마귀죠.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마귀와 어떻게 전쟁하는가? 어떤 아주 깊은 산골 있다 합시다. 적의 나라에 가까운 산골 깊이 있다 합시다. 여기 사람 한 스물댓명 살고 있는 작은 촌락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국방부의 정보에 의하면 간첩이 여길 통해서 온다는 순간 갑자기 여기서 간첩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난 뒤에는 갑자기 여기 뭐냐? 군사시설 들어서는 거에요. 군부대가 들어서버려요.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은 쌩뚱맞지요. 갑자기 군인들이 왜 오지?
주님께서 우리 성도를 다룰 때 악마가 들어오는 침투 과정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주님의 군사기지로 만들어버려요. 우리를. 나를 위한 전쟁을 하지 않고 주님의 전쟁을 하는 군사시설로 만들어버려요 우리를. 그게 바로 뭐냐?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은 아주 문제없어요. 아무 문제없고 고요해요.
그런데 예수님의 사도,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사도가 복음을 전해버리면 갑자기 거기가 악마와 주님과의 전투지가 되어버려요. 그게 사도행전입니다. 사도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세상 좋은 세상이에요. 물론 완전한 천국은 아니겠지만 자기가 노력한 만큼은 댓가를 얻는 소박한 나만의 행복은 챙길 수 있는 뭐 챙겨봤자 지옥이지만 챙길 수 있는 그런 세계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람들의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복음을 이야기해버렸어요. 그게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나오지요. 유명한 네 글자 나와요. 나한테만 유명하지만, 사도행전 2장 37절이에요. “어찌할꼬.” 사도들이 복음을 안 전하면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서 복음을 안 전하면 이 탄식이 나올 리가 없지요. “어찌할꼬.”
만약에 사도들이 없다고 치는데 ‘어찌할꼬’ 라는 말이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지요. 뭐 사기 당했어요? 이거는 뭐 변호사 찾아가서 상담 받던지 그러면 돼요. 그런데 지금 사도가 무슨 이야기를 해서 이런 ‘어찌할꼬’가 나오느냐 하면은 사도가 딴 이야기 안 했어요. 하나님이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다녀갔다 할 때 평화롭게 다녀간 게 아니고 좋게 좋게 다녀간 게 아니고 하나님이 메시아가 죽어서 떠났다는 이야기를 할 때 유대인들이 그 당시에 제대로 알아들은 유대인들이 ‘어찌할꼬’ 라고 했어요. “회개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라.”
다시 말해서 십자가는 ‘어찌할꼬’ 라는 새로운 차원의 영토를 만드는 거에요. ‘어찌할꼬’에서는 뭐냐? 자기를 미워하겠습니까? 사랑하겠습니까? 미움이 되면서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지요. 왜? 절망적이니까. ‘어찌할꼬’니까.
그러니까 아까 섬에서 뭐를 건너온 거에요? 이 공백의 물을 건너온 거에요. 공백의 물을. 이 섬. 누구의 섬? 아이의 세계. 어린이의 세계, 아이의 세계에서 바깥쪽으로 계속 악마와의 전쟁을 실시했던 겁니다. 이 공백을 건너서. 이 일을 누가 하느냐? 사도가 해야 되는데 이 공백을 못 건넜어요. 사도의 영혼과 마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덕분으로 좀 덕 보자는 쪽에 있어요.
하나님의 능력을 뽑아내서 내 구원에 보탬이 되고자 이렇게 했지 모든 게 나한테 유리하도록 작동하겠지 라고 오해한 거에요. 하나님의 그 모든 선한 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내가 원하는 것과 합치되겠지 뜻이 일치되겠지 라고 오해한 겁니다. 나를 상실하고 나를 공백으로 만들고 나를 빈 잔으로 만드는 건 상상도 못했지요.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0장 25절에 보면 여러분 교회 조금이라도 다녔다 하는 사람들은 이건 잊을 수 없는 거에요. 교회 안 다녀도 다 아는 이야기에요. 이게 무슨 비유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죠. 그다음에 38절부터 42절까지는 마르다 마리아 이야기죠.
그러니까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 여러분들 모를 사람이 없잖아요. 그 내용이 뭐냐? 제가 지금 이야기 다 해드렸어요 방금. 자기를 공백으로 보는 거에요. 나한테 어떤 이익이 있느냐? 내 욕망대로 욕망의 대상을 찾아서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
여러분 선한 사마리아가 어린 아이입니까? 어른이죠.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게 아이가 되는 거에요. 왜? 선한 사마리아인은 지나가는 대제사장 두 번째 지나가는 사람이 레위인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존재는 애초부터 없던 존재에요.
없는 존재고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그러한 호칭이 그렇게 평되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애매하게 강도 맞은 사람의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강도를 안 만나고 서로 갔던 길을 그냥 간 사람 같으면 저게 선한지 악한지 저게 사마리아인인지 그게 구분될 필요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버지하고 이야기했던 것, 내가 꼭 집어서 아이들에게 나타냅니다 한 그 아이들, 그 아이들은 이 땅에서 찾아볼 수가 없지요. 주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아버지와 협작해서 말씀을 말씀대로 드러나게 하는데 아이라는 것에게 나타낸다면 그 아이는 새로 생산돼야 되는 거에요.
내가 아이 된다고 손 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 나로 하여금 성도로 하여금 아이 되게 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해도 예상치 못한 나, 없던 나를 나에게서 만들어 내는 거에요. 그게 나야? 그게 나였어? 본인도 놀래야 돼요. 본인도. 약간의 아부를 한다면 여러분처럼. 아부입니다. 그냥 아부. 아부입니다. 진담으로 들으셔도 더 은혜가 되겠지요. 아부입니다. 여러분처럼.
이 바쁜 시간에 장사 안 하고 여기 왜 앉아있어요? “미쳤는가봐. 미쳤나봐 나.” 이거 뭐 돈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때는 이렇게 나한테 따지지 말고 위를 보세요. “주님이 했어요!” 이렇게. 약간의 짜증을 애교스럽게 짜증을 내면서 주님이 날 이렇게 만들었지요. 나는 이 스타일 내 스타일 아닙니다. 성경 공부하는 게 내 스타일 아니고 돈 세는 게 내 스타일인데 주님이 이렇게 했지요.
예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걸 아는 거에요. 주님이 그렇게. 왜요? 지옥불의 뜨거운 맛을 안보여주기 위해서. 지옥불. 이거는 뭐 참고로 들어두세요. 여러분이 제 잠자리 어떻게 되는지 알 필요 없잖아요. 저희 집에 가면 홈매트가 있는데 홈매트가 거기가 애들용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이불이 있으면 반쪽밖에 차지 안 해요.
그래서 처음에는 야 이거 뭐 너무 작다 싶은데 지금은 그게 은혜가 돼요. 날씨가 추워서 저녁에 꼽고 자잖아요. 꼽고 자게 되면 조금만 있으면 10분도 안 되서 뜨거워지면 자동적으로 거의 반작용이지만 반대로 옮기게 되면 감사가 나와요.
왜? 뜨거운 데 있어보니까 시원함이 얼마나 시원한지 알거든요. 그런데 시원함이 더하면 춥게 돼요. 다시 반자동으로 이렇게 오면 돼요. 밤새도록 이러고 있어요. 감사만 나오고 있어요. 감사만. 1, 2분이니까 견디지 이걸 영원토록 한다면 이거 기가 찰 일이에요. 그럼 혼자 묻지요. 주여 왜 지옥불에 안갑니까? 십자가 죄 사함, 그게 최고야.
그러니까 십자가 죄 사함만 있으면 다른 기쁨 필요치가 않아요. 다른 기쁨, 다른 즐거움 필요치 않습니다. 오만원 그거 안 받아도 괜찮아요. 그런 거 안 받아도 괜찮아요. 늘 그 기쁨으로 기뻤으면 좋겠어요. 늘 기뻤으면. 그런데 이게 그렇게 되면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되니까 주님께서는 이거 용납 안 합니다. 못 지키게 만들어요.
못 지키게 만들어야 뜨거운 것도 알고 시원한 것도 알고 일부러 또 세상의 복음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자기 스타일로 가요. 자기 타입으로 간다고요. 돈 세는 맛, 이 맛 이거 괜찮거든요. 자기 스타일로 가게 만들어요. 아빠 오늘도 돈 많이 벌어왔어? 돈 많이 벌어왔어. 자랑스러운 아빠. 아빠 힘내세요! 그래! 힘낼게.
아빠도 어른이고 아이도 어른이고 우리 집은 애가 하나도 없어. 전부 돈만 세는 인간들. 애도 애 같지도 않는데. 없습니다. 없다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0장 22절에 나옵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없나이다. 끝났지요. 저 있는데요?! 하면 안 됩니다. 없어요. 주님이 작용하지 아니하면 아버지의 뜻대로 주님이 작용하지 아니하면 없습니다. 인간 같은 인간은 그 다음에 뭡니까? 네 자로 ‘없나이다’ 주님이 원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게 정답이에요. 매일 없습니다. 매일. 일주일 단위로 없는 게 아니고 매일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늘 살아계시기 때문에. 내가 늘 살아있을 필요는 없어요. 주님이 늘 살아있으면 주의 말씀 늘 살아있고요 주의 말씀 늘 살아있으면 주의 말씀대로 구원 받을 아이는 늘 있게 마련이거든요.
내 쪽에서 말씀을 강제로 끌어오지 마시고 나를 공백의 물로 바닷물을 건너서 내가 없는 상태에서 말씀에 들어갔다가 말씀에서 그냥 나와버리면 이제 말씀의 사람으로 살지 내가 전에 내가 알던 나로 사는 게 아니에요. 전에 알던 나.
전에 알던 나는 뭐냐 하면은 힘으로 사는 어른. 내 욕망이 꽉 차 있는 그런 영혼. 그게 전에 알던 나 잖아요. 나를 미워하지 않고 더욱 더 사랑하는 나. 이 아이에 대해서 좀 더 어렵게, 설명 들으면 어렵지 않아요. 이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두 언약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두 언약이 뭐냐? 두 여자지요. 이건 대구강의에서 약간 언급했어요.
이제는 대구강의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아이가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아이가 없다고 했지요. 인간은 후딱 어른 되고 싶어요. 아이가 후딱 어른 되고 싶어요. 어른이 되고 싶은 것은 뭐가 있어야 되느냐? 내 소유가 있을 때 어른 돼요. 내 존재가 된다고요. 소유가 존재를 만드는 거에요. 아무것도 없으면 이거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소유를 위해서 무슨 관계? 나와 너의 관계라고 했지요. 이건 야곱의 두 아내 이야기했지요. 야곱의 두 아내. 야곱의 두 아내들은 자식이 12명이 있어도 12명 아이들은 없어요. 뭐냐 하면은 남편과 아내, 다시 말해서 여자와 남자만 있는 거에요. 이게 어른의 세계에요. 이걸 염두해 두시고 보세요.
자, 아브라함에게 육의 번창이니까 하나님께서 네 자식을 그냥 한 두 명이 아니에요. 하늘의 별 만큼 많다고 했을 때에 그래서 이름이 많은 무리의 아버지, 아브라함이거든요. 그런데 자식이 몇 명 있습니까? 아브람 때 단 한 명도 없었지요. 아브람 때 자식이 한 명도 없는데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지었다고요. 많은 자식을 거느리는 아버지로서 자식 하나도 없는 너는 그렇게 돼야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누가 봐도 이거는 내가 아내하고 자식을 많이 낳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인간으로서는. 아브람이 사라지고 없는 아브라함이 나에게 나타난다는 생각은 감히 못한 거에요. 그런데 이 생각이 여기서 사라가 자식이 없어요. 사라가 자식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은 사라가 자식이 없다는 게 중요할 뿐만 아니고 같이 중요한 게 하갈에게는 뭐가 있느냐? 자식이 있어요. 이게 중요한 거에요. 하갈에게 자식이 있는 거에요. 하갈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있습니다. 그것도 어디 바람피운 게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식이에요. 지금 하갈이 종이라는 것은 잠시 잊어주시고 두 여자라고 봅시다. 두 여자.
그런데 두 여자는 대구강의 때 했지만 두 비유라고 했습니다. 두 비유. 이 말은 뭐냐?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비유에 해당돼요. 이 말은 인간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와 가치는 생성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누가 찾아와서 인간에게 너는 나를 증거하는데 필요하다고 먼저 다가와줄 때 비로소 인간은 비유라는 조건하에 인간이 돼요.
예수님을 증거했다는 조건하에 비유가 돼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예수님의 증상이다. 또는 아바타다. 또는 마스크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비유증상은 인간이란 성도란 홀로 있지 않다. 인간은 혼자 있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 특징이 뭐냐 하면은 갓난 어린 아이 특징이 내가 있다를 자기가 몰라요. 자기 있다는 것은 관심이 없어요. 엄마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해요. 아이한테는. 제가 서울강의 때 약간 언급했지요? 아이한테는 자기 존재감을 본인이 인정하게 되면 이미 아이가 아니에요. 그거는 독립할려는 의가 벌써 개시된 거에요. 갓난아이는요 독립의지가 없어요.
왜? 나한테 끌어 모을 욕망이란 게 없어요. 그러니까 어른들에게는 아이가 짐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아이 낳으면 얼마나 이쁘겠느냐 했는데 막상 아이 낳고 난 뒤에는 자기가 밤 10시에 퇴근해서 잠 좀 잘려고 했는데 새벽 두시에 울어가지고 아침 6시까지 울어보세요. 성질 급한 남자 같으면 문 열고 애 던져요. 바깥으로.
이거는 엄마도 마찬가지에요. 엄마가 애 우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밤새도록 업고 달래고 바깥에 나갔다가 안에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안에 들어왔다가 해가지고 애는 손 뻗고 세상에 무슨 우크라이나 전쟁처럼 고함지르면서 세상 지 세상인줄 알고 고함지르면서 이건 뭐 눈치도 안보고 고함지르고 있고요. 다들 그렇게 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과거 아이 때를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돌아갈 수가 없어요. 남은 것은 우리가 슬기롭고 지혜롭다 그것만 남았지 돌아갈 수가 없는 거에요. 슬기, 지혜 가지고 뭐할 건데? 혼자 살지요 뭐. 혼자 사니까 이게 문제되는 거에요. 혼자 사니까.
하갈은 지금 애가 있잖아요. 자기들끼리 혼자 사는 거에요. 사라는 애가 없어요. 아이가 없으니까 남편의 여자가 될 수가 없는 거에요. 남편의 여자가 될 수가 없으니까 사라는 뭐냐 하면은 사라가 만약에 아이를 낳게 되면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 되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가 없었더라 이 말이에요. 남자가 관여하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보통의 세상의 육은요 아이 낳아 봐야 누구 아이 되느냐 하면은 여자 자식이 아니에요. 남자의 자식이에요. 여러분 일깨우기 위해서 남자의 자식 족보 한번 읽어드려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전부 다 이게 뭡니까? 남자가 아들을 낳잖아요. 정철의 시조에도 나오지요.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어머니는 보조에요. 백날 길러봐야 그건 아버지 족보에요. 여자 족보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여자는 자식을 낳고 그걸 남자 집에 뇌물로 바침으로서 그 남자의 여자로서 완성체가 되는 거에요. 그게 배필자로서의 그게 한계입니다. 여자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고 남자의 것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여자가 여자로서의 완성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여성가족부 생긴 건가요?
성경 자체가 도저히 기존의 자연스럽다고 하는 인간의 인식과 의견으로서는 성경은 바깥 세상입니다. 전혀 이게 예상할 수 없는 세계에요. 이 세상과 천국은 이게 그만큼 물로서 공백이라고 했지만 떨어져있어요. 건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사라에게 뭘 줬습니까? 사라에게 계시를 담은 자식을 줬지요. 이 계시를 담은.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주어진 계시를 담은 거에요. 이 계시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누구를 바꾸느냐? 남편을 바꿔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서 아브라함이 사라의 종속되게 만들어버려요.
여자의 후손에 새롭게 종속된 이 땅의 남자 없이 태어난 자로서 아브라함이 되게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을 낳은 게 아니고 사라가 아브라함을 낳는 거에요. 사라가. 여자 하나 잘 만나서 인간됐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물론 여자 본인도 마찬가지지만. 여자 본인도요 사라가 처음엔 사라가 아니었어요. 사래였어요. 사래가 사라가 된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계시가 인간이 도저히 예상 못하는 다른 존재로 다 바꾸어놓는 거에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 하갈보세요. 아브라함의 종 하갈은 너무나 정상적으로 아이를 낳았잖아요. 남편은 누구다? 아브라함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낳은 자는 본인이죠. 자식을 낳아준 남편의 자식을 낳아주었기 때문에 이로서 우리는 온전한 가정이 된다고 생각한 거에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시는 뭐냐? “내어 쫓아라.” 내어 쫓아라. 참 이게 얼마나 충격입니까? 오늘 제목을 이걸 하고 싶어요. ‘내어 쫓아라.’ 인간 세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빠져나갔지요.
자, 묻습니다. 누가 누굴 쫓아냈습니까? 인간들이 죄인들이 누굴 쫓아냈어요? 하나님을 예수님을 쫓아냈지요. 이거는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게 아니고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을 계기로 인간들을 전부 다 쫓아냈다고 본거에요. 어둠 속에서 흑암 속에서 쫓아낸 거에요. 인간들이 예수님을 쫓아낸 것은 인간 중심입니다. 인간 중심, 육의 중심이죠.
그러나 성령으로 봐서는 뭐냐? 누구 중심이냐? 예수님 중심이에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이 인간들은 이미 바깥 어두운 데 이를 갈면서 지옥으로 쫓겨난 거에요. 그 쫓겨난 그 재벌들 쫓겨난 그 대선후보들 그게 그렇게 부럽습니까? 쫓겨났는데.
그들이 가는 방향성이 지옥으로 가는데, 원래 돼지 잡기 위해서는 잘 먹이잖아요. 좋은 집에 좋은 아파트에. 돼지 잡기 위해서 호강은 일단 해주고 영원한 전기매트에다 뜨거워도 돌아누울 곳이 없도록 온 천지 뜨겁게 그렇게 하듯이. 이런 강의는 이런데서 듣는 게 아니고 뜨거운 전기매트에서 들어야 되는데. 오늘 새벽에 올려놓을 테니까 전기매트 틀어놓고 들어보세요. 뜨거운 지옥불이 진짜 뜨거운 맛이 얼마나 뜨거운 지를.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인간이 기대하는 그런 선물, 은혜하고는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감사하고 기쁘냐 하면은요 목숨도 내 목숨도 하찮을 정도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뛰놀아야 돼요. 그 정도로요. 율법에서 벗어나서 영생을 얻은 게 우리 족쇄처럼 수갑처럼 채웠던 율법, 선악체제, 사법권.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것. 지옥 간다는 것. 거기서 벗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지옥에 가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지옥인가를 벗어났기 때문에 아는 거에요. 벗어났기 때문에. 있으면서 아는 건 소용없어요.
벗어났기 때문에 그 무서운 너무 강렬하고 거기서 벗어나면 너무 기쁘기 때문에 지옥불 입에 달고 달아도 우리는 신바람 이박사다. 달고 달아도 괜찮아요 이제는. 이제는. 이제는 말한다 지옥에 대해서. 아내가 남편을 이렇게 이름까지 바꿔서 구원했습니다. 그럼 주도권이 뭐냐 하면은 아내한테 있어요. 아내는 여자의 후손이지요.
여자의 후손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남성의 세계에서 없는 존재에요. 그래서 성도는 아이 같아요. 없어요. 누구든지 어린 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했지요. 아이는 이 땅에 없어요. 없는데 성령을 주니까 비로소 섬의 주민이 된 거에요. 시민권이 아이의 나라에 있어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빌립보서 3장 17절에 있잖아요.
우리의 시민권은 아이의 나라, 없는 나라의 시민권 없는 나라에 존재하는 사람이 된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주님이 영혼이 되어서 영원한 영생을 얻지요. 창세기 2장에 보면 주께서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한 것은 영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상태로 저주 받은 상태로 영원히 멸망하는 것을 주께서는 그게 선악 먹지 않는 상태에서 영생을 기대해서 생명나무를 심어놓은 거에요. 그래서 그걸 분리시킨 거에요.
뭐냐 하면은 보이지 않는 담장. 이 세상에 이것이 그어져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담장이에요. 그래서 성도가 가게 되면 거기 군사기지이기 때문에 주님의 군사기지이기 때문에 가면 성도 주위에 보이지 않는 담장이 있고 성도가 부산에 가면 부산에 있고 성도가 만약에 캐나다 가면 캐나다에 보이지 않는 담장이 쳐져있어요.
왜? 주께서 악마를 의식해서 성도를 가지고 그렇게 사용하기 때문에. 성도는 아이에요. 성도는 남성의 세계에 속하지 않습니다. 여성의 세계에 속해요. 남성이 없는 그런 세계에요. 그래서 성경에 출애굽기에 보면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라” 하지요. ‘고아와 홀아비를 불쌍히 여기라’ 하지 않아요. 그런 게 있어요? ‘고아와 홀아비를 불쌍히 여겨라’ 이런 거 있어요?
주께서 여성을 없음을 표기하기 위해서 여성으로 하여 없는 존재로 활용하기 위해서 여성을 태어나게 한 거에요. 그래서 이사야 3장 같은데 보면 이사야 3장 잠깐 볼까요. 이사야 3장 16,17절이죠. 시간 관계상 제가 빨리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작거려 걸으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가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이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얼굴 가리개와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쭉 나오지요.
어디에 치장합니까? 여성에게 치장을 했지요. 그 여성들이 남자, 부자 남자, 재벌 남자 만나서 이렇게 치장을 했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이 사람들이 여성적인 여성이 아니에요. 남성의 것으로 꽉꽉 채웠던 여성을 의미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단독적인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게 종속된 여성이 이들이 사치한다는 것은 곧 남성의 세계에 추구하는 방향이 이렇게 육적이라는 것, 세속적이라는 것을 여자를 통해서 나타나 보이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멸망한 도성은 뭡니까? 음녀, 더러운 여자라고 하지요. ‘음녀’. 세속적이고 더러운 여성을 통해서 이 세상을 통째로 표현하는 방법.
그런데 그 여성에 비해서 이 사라 같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갈 말고. 사라 같은 경우에는. 남성이 필요해요? 안 해요? 남성 자체가 필요하지 않아요. 그 사라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죽어요. 그 사라가 낳은 자식이 바로 이삭.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있는 이삭입니다. 계시가 담겨있어요.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언약의 몸통이 확장되는 거에요. 여자의 후손이 그런 식으로 이어져가는 거에요.
여자의 후손은 반드시 뱀의 후손과 대립관계를 세우면서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는 거에요. 성도라는 것은 반드시 그 주변에 보통 같은 경우에는 악마가 신경 안 쓰는데 성도가 생겨버리면 악마가 계속해서 거기서 자꾸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키듯이 계속 시비 걸고 들어오는 겁니다.
왜? 요주의 인물이니까. 특이하잖아요. 악마의 권세 바깥에 존재하잖아요. 그러니까 악마는 끊임없이 성도를 향하여, 보통 사람은 그냥 놔둬버리고 성도를 향하여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착해야 구원받는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착하게 되면 누가 착해? 주인공이 누굽니까? 내가 착하지요. 그럼 착하면 어떻게 돼요? 하나의 슬기와 지혜로써 누적이 되겠지요. 아까워서 못 버리죠.
교회에 목돈 내놓으면 그 교회가 복음을 안 전해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목돈 낸 것 있고 안면 사람 바친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목사가 문제가 아니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 있으면 그 친구 따라서 교회를 못 빠져나와요. 특히 일가친척 한꺼번에 있으면 못 빠져나오지요. 안면 바쳐서.
안면 바친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그런 사람 없으면 내 가치가 형성되지 않지요. 그걸 설명하게 되면 시간 너무 많이 가요. 이게 뭐냐 하면은 너와 나의 관계에요. 누가 너와 나의 관계를 뿌리칠 수 있는 사람 누가 있겠어요.
나라는 것은 너가 있음에 있고, 너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있음에 있다. ‘나’가 있는 곳에 반드시 너가 있고 네가 있으면 내가 있어서 나는 네가 나한테 요구하는 것대로 너의 욕망대로 내가 있어 줄게. 그 대신 너는 나에게 내가 내가 욕망에 필요한 것들을 나한테 채워다오. 이게 바로 뭡니까? 이게 바로 인간관계 아닙니까. 이게 인간관계잖아요.
인간관계는 혼자 못 살아요. 너와 나와 많이 엮이면 ‘아 그 사람 사교성 좋다 친구 많다’ 이런 소리 듣잖아요. 외톨이는 살 수 없습니다. 외톨이라도 그거는 나를 위해주는 위로해줄 친구를 찾기 마련이에요. 여러분들 모든 사람들이 결혼을 하잖아요. 결혼하니까 결혼이 당연히 해야 되는 줄 알고있어요.
그러나 제가 아는 기억에 의하면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가 이런 이야기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이 나요. “혼자 살아라. 결혼하는 것이 죄지은 것까지는 아니라도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억지로는 하지 말고 혼자 살아라.”
“어차피 아내 있는 자는 없게 되고”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너와 나의 관계 안에서 나 스스로 자기를 미워할 수 있기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안면 바쳤기 때문에요. 사람은 이렇게 아는 사람 있으면 혼자 못 살아요.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고 배려해야 될 상황들이 너무 많이 생기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자, 누가복음 10장 계속 봅시다. 22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두 단계로 내려오지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아들과 성도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아들과 성도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이걸 그대로 Ctrl V. 복사를 복제를 해버리면 그게 아들과 성도 사이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야 계시가 딴 게 침범을 안 하지요.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 사이에 있는 일은 그걸 그대로 복사를 해버리면 이삭과 야곱 사이가 되고 그걸 그대로 복사를 해버리면 야곱과 12아들의 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 언약이 계속 복제, 복사를 계속 해나가는 겁니다. 언약으로. 그래서 언약으로 구원받아요.
마지막 언약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 살과 내 피가 언약이죠. 그걸 그대로 Ctrl V. 복제해가지고 우리한테 예수님 제자들에게 먹이듯이 성령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공로를 성과를 우리에게 그대로 먹여버립니다. 먹이고 그 먹인 것을 그걸 그대로 가져와버리면 우리가 딸려서 덩달아 양자로 구원되는 거에요.
우리가 율법의 종인데 아들 되는 이유가 예수님이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를 그대로 우리에게 복제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이 고난의 길이었잖아요. 마찬가지로 성도에게도 바로 의미 있는 고난과 환란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 환란의 내용은 뭐냐? 이거는 주일 낮 설교에 할 거에요. 그때까지 기다려야 되냐? 기다릴 필요 없지요. 지금 이야기하면 되니까. 우리의 싸움은 영적 악마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환란과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주님의 구원과 십자가 복음을 주님의 은혜를 내가 가로막고 있어요. 내가. 너무나 육적인 내가. 옛사람이, 나의 옛사람이. 주님이 거저 줬다는데 우리는 자꾸 어떤 행함을 통해서 내가 정당한 성과로서 내가 했다는 이야기를 자꾸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사라처럼 그냥 약속의 아들을 낳았는데 어떤 결과를 낳았는데 우리는 자꾸 하갈처럼 내가 타고난 내 능력으로 자식을 얻었다 자꾸 그러고 싶은 거에요. 우리 마음이. 그래서 그것이 우리 주어진 가운데서 감사함을 쉽게 놓쳐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그 환란을 제공하는 쪽이 어디냐. 그거는 미리 이야기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나의 추억이에요. 나의 추억.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이선희가 불렀던 노래보다도 박정현이 불렀던 노래가 더 괜찮아요. 추억을 책장을 넘기며. 맨날 추억에 확정된 슬기와 지혜로서 내일을 대처해 나갈려고 합니다.
어제까지 모아놨던 모든 지식으로 나의 난관을 헤쳐 나갈려고 해요. 난관. 난관 없어요. 죽는 마당에 무슨 난관이 있어요. 악마보고 죽이라고 하고 있는데 무슨 난관이 있어요. 그러나 난관이 있다는 자체, 환란이 있다는 차제 이게 의미의 고난이거든요.
주님이 당한 환란과 고난은 주님께서 당했던 것을 우리에게 주는데 우리는 그거 말고 ‘내가 끝내 이기리라’는 환란 고난을 내 힘으로 끄집어내고 싶어요. 그럼 나의 추억은 어디서 오는가? 나의 추억은 지옥에서 뽑아낸 겁니다. 나의 모든 추억은 지옥에서 뽑아낸 거에요. 지옥에서. 지옥이 돼야 될 요소를 우리는 좋다고 거기서 뽑아낸 거에요. 그게 너무 좋아보여서 우리는 그걸 계속 담고 있는 겁니다.
혹부리 할아버지가 이렇게 혹이 있는데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 했습니까? 욕심이 담겨있지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결혼도 뭐였다? 결혼도 욕심이었다는 거에요. 아 이 사실을 이제야 말한다. 결혼하고 난 뒤에 말해야지 결혼 안하고 말하면 섭섭하지. 결혼도 욕심이었어요. 성경에 의하면. 심지어 이혼도 욕심이었습니다.
아들 낳겠다는 것도 욕심이고 딸 낳겠다는 것도 욕심이고 온 천지가 욕심뿐인데서 괜찮은 욕심을 끄집어내서 추억의 책장에 일기장에 써놓는 거에요. 그것 가지고 남한테 안 질려고 하는데 이거는 남자의 후손입니다. 뱀의 후손이에요. 이거는 없는 데서 없는 곳을 겨냥하고 알려주는 주님의 뜻은 아니에요.
바로 환란이나 이런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감사를 삭제하기 위해서 마귀가 우리를 충돌질 해서 너 과거에 잘 나갔잖아 왜 이래 여기서 물러설 거야? 챈스가 왔는데. 찬스도 아니에요 챈스가 왔는데 물러설 거야? 한 몫 잡아야지. 물 들어올 때 뭐 저어라?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물 들어와서 노는 저었지요. 감사는 어디서 찾는데? 지옥불의 감사는 어디서 찾는데요? “좀 있다가 나중에 가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고.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그렇게 일이 일어났을 때 그거 할 때 중첩해서 지옥불로 같이 생각해주시면 돼요. ‘그런 거 하지 말라’가 아니라 노 저어야죠 뭐. 그러면 손가락만 빨고 있을까요, 저어야죠.
..하되 지옥과 관련해서 주께 더 다른 차원의 감사가 늘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우리 일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받기만 했는데 그런 주의 일을 방해하는 자가 우리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놀라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것 조차도 감사로 이어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