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0장 21절 (섬) 220322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0장 21절 (섬) 220322a-이근호 목사
성도의 적은 악마입니다. 그래서 인간하고 상대하지 마세요. 만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인간에게 의미 둘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씨름은 공중 권세 잡은 자와 싸운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다.
그 말은 사람하고 상대해가지고 뭐 이기고 지고 자체가 의미가 없는 거에요. 이재명이냐 윤석열이냐 그게 의미가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의 적은 악마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사람하고 상대하지 마세요. 상대할 필요 없다. 이 말은 상대를 무시하지 마세요 하고 같은 말이에요. 상대를 무시하지 마세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상대는 무시할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무시할 만한 가치도 없어요. 너 대로 사세요 그대로 사시면 되는데 상대를 무시하겠다는 것은 내가 무시하는 쪽에 서서 잠시나마 내가 승자, 나는 너보다 더 낫다는 승자가 되고 싶은 심보가 작동하고 있어요. 이 무식한 것. 내가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무시해주겠다. 만화영화에 그런 거 나오지요.
무시하겠다고 하면서도 의식하는 건 또 뭐에요 그건. 그거는 자기 속이는 거잖아요. 무시할 것 같으면 생각도 안해야 되지 무시하겠다 하면서도 자꾸 의식이 되가지고. 우리의 상대는 악마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인간에게 뭘 했는가를 알면 돼요. 그러면 적을 알면 악마를 이길 수 있지요.
그러면 악마가 우리 인간에게 뭘 했는가. 그것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만은 제가 이야기해야 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악마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너는 존재한다. 그리고 늘 존재하라.’ 악마가 인간에게 부추기는 것은 지금 네가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있음’이죠. ‘있다’ 있는데 계속 있어줘. 계속 있어라.
이게 바로 악마가 인간에게 그런 식으로 접근한 거에요. 너는 도중에 죽으면 안돼. 계속 살아있어야 돼. 계속. 우리의 적은 악마인데 악마는 우리를 부추기는 거에요. 너는 죽으면 안돼. 굶어 죽으면 안돼 뭐하면 안돼 아프면 안돼 늘 건강해야 되고 늘 잘 돼야 돼. 그러면 성도가 여기에 대하는 방법은 요한복음 12장 25절에 잘 나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너 자신을,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했지요. 성경은 ‘너 자신을 미워하라.’ 나 존재 안 할래, 나 여기서 그만 은퇴할래 또는 연극무대에서 나는 그냥 여기서 퇴장할래 또는 나는 여기서 사라질래 또는 나는 여기서 없어질래. 전부 다 같은 말이죠. 나 여기 존재 안 할래. 없어질래. 은퇴할래. 퇴장할래. 여기서 그만 사라질래. 전부 다 같은 말이죠.
성경을 해석하는데 왜 제대로 해석을 못하느냐 하면은 요한복음 12장 25절, 너 자신을 미워하는 쪽으로 파고 들어가면 성경 해석 다 돼요. 성경 해석 안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은 성경을 통해서 악마와 하나님과 싸우기 위해서 제공된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성경의 편에 선다는 것은 그 안에 들어가면 되는 거에요.
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악마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그게 뭐냐 하면은 너 자신을 미워하는 쪽으로 하게 되면 성경은 해석 안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건 뭐 족집게 일타강사도 안 가르쳐 주는 거에요. 우리 자신만 미워하게 되면 성경 해석이 안 풀리는 게 하나도 없어요. 반대로 우리 자신을 안 미워하게 되면 해석되는 게 하나도 없게 되어있어요.
만약에 여러분 넓은 집이 소문에 의하면 그 집에서 자살한 사람이 12명이고 그 집에서 귀신이 들어왔다 나갔다 해서 원래 집값이 7억인데 집값이 600만원 된 것은 하도 귀신이 너무 왔다 갔다 해서 그런 집이라고 칩시다. 뭐 귀곡 산장 비슷하게 각종 유령들은 다 오는데 수맥 재면 막 돌아요. 수맥이 막 흘러. 축축해.
퇴마사 한 12명 왔다 갔다 한 그런 집에 우리가 산다면 거기에 귀신이 우글거린다면 그런 집에 여러분들이 밤 한 10시 되서 누웠다 합시다. 어떻게 하면 잠을 푹 달게 잘 수 있겠습니까? 지금 아이디어 다 제공했는데요. 자신을 뭐하면 된다고요? 자신을 미워하게 되면 잠만 잘 자더라 이렇게 돼요.
나 여기서 사라질래. 나 여기서 존재 안 할래, 그만 은퇴할래, 없어질래, 퇴장할래. 그렇게 하게 되면 눈 떠보면 아침 10시. 늦잠 잤어. 너무 잠을 달게 자가지고. 그 귀곡 산장에 누워가지고 자꾸 마귀하고 싸울라고 하면 안 되는 거에요. 마귀하고 싸울 필요가 없어요. 이러면 마귀가 맛이 안 나서 간다니까요. 뭐 싸울 맛이 안나. 싸울 맛이 안 나거든요.
옛날에 저 어릴 때 레슬링을 하는데 일본에 그 레슬링 선수하고 유명한 세계 헤비급 챔피언 누굽니까? 타이슨 있잖아요. 타이슨. 타이슨하고 돈 많이 준다고 일본의 유명한 레슬러하고 하는데 타이슨이 이렇게 주먹 들고 칠려고 하는데 안토니오 이노키가 어떻게 하느냐? 타이슨은 서서 붙자 이렇게 하고 있는데 안토니오 이노키는 그냥 누워버려요.
때릴려는데 앞에 누워버리는 거에요. 누워서 하자. 그래서 그 자리에서 타이슨이 막 화를 냈어요. “너 창녀야 뭐야!” 그게 신문에 나와 버렸어요. 왜 권투를 안 하고 눕냐 이 말이죠. 성경을 해석할 때 자기를 미워하라 그러면 생명을 얻으리라 되어있거든요.
‘내가 왜 나를 미워해야 됩니까’ 쪽으로 성경 보세요. 성경 해석 그대로 다 됩니다. 하나님 뜻이 그냥 확 다 들어와요. 마귀 이기는 것은 이건 뭐 기본이고요. 세리와 창기가 그 바리새인보다 천국 먼저 가는 것 아시지요? 주께서 이야기했잖아요.
그래서 그냥 한국 교회는 그냥 사기 단체다. 사기 집단이라고 보면 돼요. 왜냐하면 거기에 교회 가는 사람들이 자기를 더욱 더 사랑하기 위해서 빛내기 위해서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갖고 있던 걸 뽑아내는 거에요. 능력, 주특기, 지혜 이런 걸 뽑아낼려고 가는 거에요. 뽑아내서 자기한테 꽂아가지고 자기가 악마가 시키는 대로 어떻게 됩니까? 나는 존재하고 더 존재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 돌리는 방법은 딱 하나만 하면 돼요. 뭐냐 하면은 모든 일에 감사하면 돼요. 모든 일에. 여기 물이 있네. 아 고맙다. 컵이 있다. 고맙다. 컵 없으면 물 그냥 나발 불 뻔했구나. 고맙다. 모든 일에 감사하면 됩니다. 눈이 침침하네. 오 안경 있네. 고맙다 안경아.
모든 일은 주님이 주신 것이고요 주님이 주실 때 너는 너 자신을 미워해야만 하는 마땅한 인간이다. 그런데 이런 것 이런 것 준비했잖아. 햇빛 공기부터 해가지고 모든 게 무엇을 더욱 더 감사해야 됩니까. 감사만 하면 되는 거에요. 그 전제는 나 자신의 감사를 훼방하니까.
내 자신의 이러한 나름대로의 자기 성깔이 자기의 생각이 감사를 방해하고 있으니까 나를 미워하는 순간 미워하면서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면 주님께서는 기뻐하시고 마귀는 짜증내고, 화내고. 주님은 좋아하시고.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그게 제일 입구에요. 입구. 성경에 들어가는 입구가 자기를 미워하는 거에요.
그럼 미워할 수 있도록 뭐했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아담이 마지막 아담을 죽였거든요. 첫 번째 아담이 두 번째 아담을 죽였잖아요. 그럼 첫 번째 아담에 속한 인간들은 두 번째 아담 예수님 입장에서는 원수가 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원수’.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이에요. 로마서 5장에. “내가 하나님께 원수 된 자였으나 하나님의 피로 의롭게 됐다”는 그 구절 나오는 거에요. 내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니까 입장을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는 거에요.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나는 하나님의 원수니까 이게 하나님의 원수라는 그 생각이 각인되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 노릇하고 있는 나 자신이 얼마나 밉겠습니까. 밉지요.
십자가 앞에서 나를 세울 때 내 앞에 면전에 나를 세우게 되게 되면 내가 저런 존재밖에 안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고집부리고 내가 기어이 살아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 때문에 주께서 억울하게 죽으셨구나를 안다면 우리는 충분하게 미워할 수 있습니다.
뭐 다른 모임 같으면 따라하세요 하겠는데 그런거 하면 안돼요. 자! 따라하세요. “할 수 있다. 미워할 수 있다!” 뭐 이런 식으로. 나 혼자 할게요. 나 혼자. 하지마세요. 꼴 사납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자기 자신을 미워할 수 있고 그 십자가를 앞장 세워서 미워함을 통해서 들어가보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해석 안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666 맞으면 그건 마귀에 속했다라는 구절 나오잖아요. 요한계시록 13장인가 나오잖아요. 내가 맞을게요. 내가 맞을게요. 해석 다 됐잖아요. 해석 금방 됐지요? 666 안 맞고 내빼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존재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나 오래 더 살고 싶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어디까지 이어진다? 영생까지 이어지고 싶다는 그 뜻이거든요. 영생에까지. 밥이죠 밥. 누구 밥입니까? 누구 밥이에요? 마귀의 밥이죠. 귀신의 밥이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 귀곡 산장에 못 살아요. 마귀가 달려들까 싶어서. 그럼 자기 집에는 삽니까? 잠이 안와. 살아야 되니까. 심지어 어떤 걱정하느냐 하면은 잠 안 오면 죽겠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이거 왜 세는 거에요? 잠 못 자면 다크써클 생겨서 죽겠지. 죽으면 안 되는데.
그러니까 그 자체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거에요. 미워하면 될 걸가지고 자기 자신이 주님 앞에서 미움의 대상이잖아요.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에.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요 그거는 시체 위에 주의 성령을 새로 주셔서 새로 만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이지 기존 인간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죄인을 사랑하사 건진다는 것은 죄인에게 사랑할만한 게 있는 게 아니고 죄인에게 덮치는 예수님 자신의 포개져 있는 자신의 희생한 것, 예수님 자신의 피를 가지고 사랑하는 거에요. 주님이 자기 제자를 사랑할 때 ‘그래 사랑할게 와!’ 이게 아니고 그 제자들에게 뭔가 미리 먹이는 게 있어요. 맥이는 거 말고 먹이는 것.
그럼 뭘 먹이겠어요? 자신의 그 피를 먹이고 자신의 살을 먹이는 거에요. 제가 이번 주일날 설교할 때 뭐냐 하면은 ‘헌금’이라는 제목으로 했거든요. 혹시 들어봤습니까?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주시는 분이거든요.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에요. 예수님은 주시는 분이에요. 죄인 것 더러워서 안 받아요.
예수님의 자기의 피를 주고 그 피를 땡기면 딸려오는 거에요. 찢은 살을 주면 자기 것을 잡아당기면 그 살은 죄인을 위해 흘리고 찢긴 살이기 때문에 그 죄인이 있어줘야 예수님의 찢기신 살의 그 취지가 사니까 붙어서 잡아당기는 거에요. 자기 피와 자기 살을 도로 회수하게 되면 그게 붙어 들려 나오는 자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영체의 확장인 겁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기 백성을 번식해요.
뭐 결혼해서 확장되는 거 아닙니다. 자기의 이 세상의 육은요 남녀가 결혼해서 번식을 하지만 주님은 그런 식으로 번식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의 살과 피로서 번식해요. ‘그러니까 너는 내 피에 동참하라’ 내 피에. 동참한다고 저도 죽겠습니다 이런 거 하지 말고요.
야쿠자가 연대감을 할 때 야쿠자가 부하들과 할 때 하나의 의식이 있어요. 손목에 그어서 피 흘려서 같이 마시는 거 있잖아요. 알지요? “느그 서장하고 같이 밥 먹고 마!” 하는 거 있잖아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민식이 했던 거에요. “다 하나야” 이런 것처럼. 우리 형제라서 피를 나누는데 주님은 우리 피를 안 받아요. 우리 순교를 안 받습니다. 더러워서 안 받아요.
우리 죽음을 왜 받습니까? 자신의 피를 그냥 회수한다니까요. 그 피 흘림이 죄인을 위한 피 흘림이기 때문에 죄인이 필요했던 거고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가는 양이 필요했던 거에요. 그래야 예수님의 자기희생이 빛이 나는 겁니다.
참 그러니까 여러분이 속해 있는 세상 한번 보세요. 세상의 특징이 뭐 말로는 악마가 이 세상의 신이고 이렇게 말로 하는데 구체적으로 여러분 살아가면서 온 몸으로 느끼잖아요. 이 세상은 여러분 일가친척이나 주변 사람들, 여러분 아는 사람들, 소위 여러분들을 사랑한다는 사람들, 여러분에게 뭐라고 자꾸 부추깁니까?
‘너는 너를 사랑해야 돼.’ 그걸 부추기잖아요. 저도 많이 부추겼습니다.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뭐 이런 식으로. 저도 많이 부추긴 거 맞습니다만은 그건 주의 일 하라고 했지. 밥 먹고 더 건강하라고 한 거지 놀라고 그렇게 부추긴 것은 아니고요. 건강해야 주의 일도 하기 때문에, 밥도 잘 먹고 그렇게 하시라고 한 거고.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오래 살아라.” 욕도 그런 욕이 없어요. “아버님 오래 사셔야 됩니다.” 그런 세상에 그런 쌍욕을 해야 되겠어요? 그래? 이 지옥인데 거기서 무슨 낙을 보겠다고 오래 살아요 그래. 진짜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준다고 누구 미운 사람 있거든 그런 덕담을 하세요. “오래 사셔야 됩니다. 건강하게.” 나중에 뒤에 괄호 열고 (가봤자 지옥입니다, 당신은.)
지옥은 뜨거운 불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마귀가 거기에 가도록 결정되어 있고요. 마귀는 혼자 가지 않고 어떤 연대감을 가지고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를 다 꼬셔서 데려가는데 악마는 실패가 없습니다. 악마가 도사거든요. 반드시 악마는 악마의 일을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 지옥이 뜨거운 불로 되어 있다고요. 뜨거운 지옥불. 이건 뭐 뜨거운 지옥불 체험 학습할려면 사우나하면 됩니다. 요새 목욕탕 자주 안 가지만 사우나 가던지 안 그러면 밤에 주무실 때에 보온매트 있잖아요. 최고로 올려보세요. 최고 7도. 처음에는 좀 이 세상 삶처럼 기분 좋아요. 뜨근뜨근하니. 그러나 계속 해보세요. 도저히 뜨거워서 못 견디죠. 그 잠시 그것도 못 견디거든요. 1,2분도 못 견뎌요.
그런데 지옥은 뭐냐 하면 뜨거운 불에서 영원히 있어야 돼요. 퇴소하는 날이 없어요. 한번 들어갔다 하면 나올 줄을 몰라요. 영원하니까. 그 지옥 불, 뜨거운 지옥 불 어떻게 하면 안 들어가느냐 이 지옥 불에. 살아있을 동안에 행동을 지옥 안가기 위해서 행동을 똑바로 하면 지옥 갑니다.
그러면 지옥에 안 가는 방법은 이 지옥에 뜨거운 불을 모든 일에 항상 잊지 않고 있으면 돼요. 그러면 뭐가 나오겠어요? 뜨거운 불이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안 뜨겁지 하잖아요. 그럼 여기서 뭐가 나오지요? 감사가 나오지요. 모든 일에 아무리 혜택이 있고 아무리 아버지 빽 써서 군대 안가고 어떻게 해서 갑자기 주식해서 대박 나고 땅값이 몇 배 오르고 아무리 행운을 누려도 결국은 지옥가게 되면요 그게 소용없잖아요.
지옥 가는데 먼지 쓸 때 쓰레받기를 똑바로 놓으면 쓰레기가 안 들어가지면 이렇게 기울이면 매끈하게 쏟아지잖아요. 이 땅에서 지옥으로 그냥 연결되어 있어요. 그냥 가속도. 나중에 나이 60,70 되면 가속도가 더 빨리돼요. 미끄러져 내려가요. 브레이크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돈 벌었다고 감사하고 건강하다고 감사해 봐야 그거는 지옥불만 하겠어요? 지옥불에서 빠진 것만 하겠습니까? 행동 똑바로 한다고 지옥불에 안 빠지는 게 아니라 지옥불 생각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을 때에 그 사람은 이미 지옥 불을 의식하기 때문에 반대쪽으로 가고 있는 사람이에요.
왜? 한시도 감사가 끊어질 새가 없어요. 한시도. 어깨 수술했다 해도 지옥에 안 간 것만 해도 어딥니까. 그런 생각 좀 하셨지요? 그러니까 지옥불이라는 것은 24시간 잊으면 안 되는 거에요. 그러면 지옥불과 연결되어 있는 게 뭐냐? 내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 십자가를 죽게 한 피를 흘리고 살을 찢기게 만든 원수니, 내가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내가 밉겠느냐 하는 그 자기 미움의 생각.
자기 밉다는 생각 그리고 자기 지옥불 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생각 이 모든 것이 저쪽 편, 이미 영생을 얻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그런 내 모든 만사가 매사에 감사로 이어지는 겁니다. 감사의 근거는 십자가 그리고 그 결과로 주어지는 지옥불 이것이 항상 밤부터 새벽까지 아니 밤새도록 24시간 항상 그게 유지가 돼줘야 돼요.
이게 유지가 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이 세상에 나가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잖아요. 많이 만나지요? 많이 만나잖아요. 만나면서 상대방이나 누굴 만나도 그 사람을 뭐하지 말라고 했어요? 상대하지 않는 상태에서 만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어있어요. 상대방에게.
상대방하고 한판 싸울까 이게 아니기 때문에. 상대가 너 나하고 한판 싸울까? 너 누구 찍었어? 나하고 한판 싸울까? 하면 속으로 너는 무시할 가치도 없어. 우리의 싸움은 악마지. 혈과 육이 아니야. 이것이 그 사람의 모든 행동과 태도와 표정 속에서 상대방에게 안정감을 줘요. 정서적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기 것을 가지게 되면 이거는 공포가 자동적으로 온다고요. 자기 것을 갖게 되면. 성경 해석할 때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자기를 미워하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됩니다. 그리고 성경에 주신 모든 완성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홀로 다 이루어내시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 10장 21절에 이제 본문 들어갑니다. 이제. 밑밥 깔고 이제 본문 들어갑니다. 누가복음 10장 21절에 예수님은 누구 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아버지보고 이야기하지요. 예수님 누구하고 상대 안 합니까? 인간하고 상대 안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기 거에요.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말씀을 주었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다 자기가 지키고 십자가에서 그걸 다 이루었어요. 그래서 인간의 추가적인 행함이 말씀 성취에 기여하거나 가담할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 목사들이 당신 이 말씀 안 지키면 당신은 이제 망한다고. 계속 자꾸 말씀 지키는데 당신이 해야 될 것은 해야 되지 않겠느냐. 말씀을 들으면 뭐해 실천에 옮겨야지 자꾸 그런 식으로 추구하라고 자꾸 집어넣는 거에요.
인간은 말씀을 지키고자 나설 때 이미 그건 자신을 미워하는 태도가 아니에요. 자기를 사랑하는 태도고 내 인생은 내가 지킨다는 태도에요. 그거는 벌써 동네방네 일곱 귀신 다 들어옵니다. 지나가는 귀신이 그거 보고 다 기어들어와요.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정말 어리석어요.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성령으로 한다는 것은 아버지하고 대화했다 이 말입니다. 성령 안에서만 이렇게 대화가 되고 아버지와 하나가 돼요.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또 이 대목 보고 저 어린 아이같이 될래 또 손 들지 마세요. 이거는 자기를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몇 번을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자기를 미워하는 식으로 성경 속에 들어올 수가 있어요. 자기를 사랑하면 들어오면 안돼요. 어린 아이 할래 이러지 마시고 나 슬기롭고 지혜롭고 우기는 게 내 쪽이구나 라고 하면서 들어오면 돼요. 주께서 싫어하는 바가 나, 우리 쪽이에요.
그리니까 우리는 더 가속해서 우리를 미워하는 즐거움을 가져야 돼요. 미워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혜택주신 것을 감사해야 된다고요.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대상인 나를 주의 성령에 의해서 미워하게끔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숨기시고 이렇게 한다면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는 누구냐? 우리 자신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이제부터는 설명을 합니다.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설명할 때 좀 어렵더라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는 어디 있느냐 하면은 아이는 섬이에요. 섬이고 섬은 물로써 둘러싸일 때 섬이 되잖아요.
이 물이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공백’. ‘비워있음’. 비워있음을 건너지 아니하면 섬에 도달할 수 없어요. 그러면 여기는 육지가 되겠지요. 육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 이 아이의 반대편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로 하나로 묶었어요.
여기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바보에게 나타났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아이에게 나타났다. 아이에게. 아이에게 나타난 거에요. 그러면 여기는 뭐가 되느냐. 아이의 반대말이니까 서로 대척 관계니까 반대말은 뭐가 되겠어요? 이거는 뭐냐? 어른이 되는 겁니다.
어른 또는 어른이 되고자 하면서 지금도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는 아이들. 어른들의 특징이 뭐냐? 어른들의 특징은 도로 아이가 될 수 없어요. 도로 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아이의 선을 넘었으니까. 어린이 그때 그 시절을 이미 지나갔어요. 도로 그걸 되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역전되는 것도 아니고.
아이 때가 그리운 것은 맞지만 “다시 아이 될래?” 하면 다 싫어해요. 왜? 그만큼 무엇이 축적되어 있는가? 나름대로의 지혜와 슬기가 축적되어있거든요. 이게 아까운 거에요. 슬기, 지혜라고 하는 것은 슬기 지혜가 어디 동원되느냐 하면은 여기 공백이라고 했지요. ‘공백’.
제가 왜 섬으로 했느냐 하면은 공백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없음’을 뜻하는 거에요. 지혜롭고 슬기로운 어른들에게는 아이는 없습니다. 없음이에요. 어린 아이가 몇 살이다 하지만 그 아이들 몇 년 지나면 다 어른 돼요. 가는 방향이 아이로 멈춰있는 게 아니에요.
세계 노벨문학상 받은 소설이 있어요. 퀀터 그라스의 양철북 있어요. 양철북이라는 그 소설은요 어른들이 저질러놓은 2차 대전의 그 모순점을 자라지 않은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그걸 평가한 책이에요. 자라지 않는다. 자라지 않는 인간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없어요.
인간은 날이 갈수록 계속 나름대로의 슬기와 지혜가 축적이 되기 때문에 자라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리고 도로 뒤로 어른 됐다가 도로 아이로 가는 인간도 없어요. 거듭난다고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올 수 없고요. 그래서 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이 어른’은 모든 인간을 대변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은 인간들에게는 숨기시는 거에요. 모든 인간에게 숨기는 겁니다. 어른이 안 되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숨기는 겁니다. 인간은 여기에 공백이라는 물, 이걸 물로 둘러쳐서 섬으로 표시하는 이유가 인간에게는 ‘있음’이 돼요.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음, 존재감을 느껴요.
그런데 아이는 뭐가 없느냐 하면은 존재감이 없어요. 아이는. 한 6개월 된 아이가 나는 무엇인가. 물인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이런 아이 봤습니까? 아이의 특징이 어른 인간들과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설정해놨어요. 이 아이라는 것을 반대로. 그러면 어른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여기 있음’이 돼요.
인간이 있다는 것은 뭘 있느냐? 인간은 소유가 있음으로서 있다가 돼요. 인간들은 자꾸 내 것을 끌어모을 때 점점 더 ‘내 있음’이 확실해 지는 겁니다. 뭐 재산이고 뭐 건강이고 아무것도 없어버리면 자살할 생각부터 먼저 해요. 있던 명예 날라가버리고 우사스럽고 남한테 욕 들어 먹은 게 있다면 그동안 내가 있다는 말은 그동안 내가 남 앞에 자랑거리가 있을 때 있다가 돼요. 그런데 자랑거리가 있는 게 아니고 웃음거리가 있다면 인간은 자살하든지 안 그러면 산속에 들어가서 자연인으로 살던지.
하여튼 산속에 들어간 인간들치고 과거에 일 안 저지른 인간이 없어요. 왜 산속에 가겠어요? 싫다 싫다 세상이 다 싫다. 왜 싫었겠어요? 뭔가 해볼려다가 자기 뜻대로 안되가지고 도피하듯이 도망간 거에요. 도피하듯이. 산속이 그렇잖아요. 뭐 공기 좋다. 공기 좋아서 간 게 아닙니다.
소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 소유에 대해서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느냐 하면은 이 소유를 가질려면 욕망이 작용합니다. ‘욕망’. 그리고 이 소유를 얻기 위해서 뭐냐? 나와 상대를 찾아요. 너가 있죠 ‘너’. 너를 만들어요. 너를 만들고 그 너를 생각하는 거기 ‘나’가 있고. ‘나와 너’의 관계가 성립됩니다. 어른들의 세계에.
그런데 아이들 생각해보세요. 아이들은 소유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이들은 소유에 대한 욕망이 없어요. 내 옆에 엄마만 있으면 되지, 여기서 소유라는 것은 나의 것으로만의 소유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의 것으로만. 내가 끌어 모아서 이제는 나의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나의 것을 의미하는 거에요. 지식도 마찬가지고 슬기도 마찬가지고.
이거는 독자적으로 내가 나를 미워할 필요 없고 내가 스스로 내 것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력을 장만하는 있는 그게 바로 어른들이 하고자 하는 거에요. 어른들이 인간의 욕망을 하는 겁니다. 욕망은 반드시 뭐냐? 소유 있는 것을 내가 가질 수 있는 대상, 그 있는 것이 욕망을 자극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아이는요 어른들이 아이를 욕망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개뿔도 아무것도 없어요. 아이가 너 주식 갖고 있어? 이런 거 안 묻잖아요. 너 통장에 돈 있어? 아이는 욕망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아이는 있어도 뭐냐? ‘공백’, 없는 쪽이에요. 주님께서 아이에게 나타났다 해도 인간 어른들은 그 아이 찾아갈 수가 없는 이유는 이건 뭘 건너와야 됩니까?
아무것도 없음을 건너 와야 되는데 없음을 건너 올 생각이 없어요. 왜? 없음은 내 욕망의 표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욕망의 대상이 아니에요. 없다는 것은. 친구도 뭐 돈 꽤나 있을 때 친구지요. 빌붙을라고 와서 친구야 하면 문 안 열어주지요. 남자들 나이 60 넘어서 친구 찾는 이유가 뭐냐 전에 여러 번 했는데 이유가 뭔지 알아요? 혼자 먹으면 술 맛이 안나. 술 먹을라고 만나요.
아 이거는 바깥 세상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린 마음 놓고 할 수 있잖아요. 무시할 가치도 없는 그 이야기. 여자들 친구들 만나는 것은 내 수다 좀 들어달라고 전화한 거고요. 수다 떨라고 전화한 거에요. 속풀이 화풀이 전부 다. 어린 아이 붙들고 속풀이 화풀이할 수가 없어요.
인간의 대인 관계, 나와 너의 관계는 거기서 뽑아 낼 소유가 있고 그 소유가 내 것이 될 때 나는 있음은 더욱 강화됨, 더욱 더 견고하게 강화된 존재가 돼요. 우리는 그것을 내가 더욱 더 힘을 끌어 모은 그런 나를 나는 미워할 수가 없어요.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럴싸한 내가 될 때 나한테 자부심을 느끼면서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되어있어요.
아이들이 아빠 퇴근하면 아빠 오늘 얼마 벌었어? 그 이야기가 나올 때 나도 너처럼 됐으면 좋겠다 그런 욕망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어린 아이를 욕망하지 않아요. 빨리 그때 그 시절을 벗어나고 싶어요. 지금 사춘기에 있는 청소년들 또는 여자 하나 남자 하나. 걔들한테 들어 있는 속마음은 뭐냐? 대통령? BTS? 방탄소년단 아니에요.
빨리 어른 되고 싶은 거에요. 빨리. 어른 되어서 따로 나가 살고 싶은 거에요. 빨리 어른 되어서. 나가 살아서 빨리 회사 취직해가지고 우연히 커피 들고 가다가 재벌 3세와 부딪혀가지고 “이름 뭐야?” “신금희” 이래가지고 드라마 나오잖아요. ‘신데렐라’. 신데렐라처럼 갑자기 수직으로 출세하는 것.
특히 아이에 대해서 우리가 주님께서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는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을 더 깊이 해봐야 돼요. 어른들은 아이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지요. 왜냐 하면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아이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이 안돼요.
그런데 만약에 여자에게 남편을 갖고 싶다. 저 남자를 내 소유로 삼고 싶다. 그러면 남자가 원하는 것이 뭐냐? 아이이기 때문에 아이 낳아주고 아이를 담보로 해서 남자를 소유할려고 하는 거에요.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목사님 함부로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습니까? 되지요. 어디 나오느냐?
야곱의 두 아내 사이에 질투의 역사. 그 야곱의 12아들 하나 하나가 무슨 역할 하느냐 하면은 엄마가 자식을 사랑해서 자식 보고 낳은 게 아니에요. 남편의 사랑을 내 것 만들기 위해서 경쟁자로부터 내 것으로 완전히 내 것 차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그래야 하나의 여성으로서, 여성은 비우고 있는 것이거든요. 비우고 있는 것이 남성 것이 채워질 때 비로소 여자는 남자의 여자가 되면서 여자가 완성이 되는 거에요. 창세기 3장에서. 그럼 자식은 뭐냐?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하나의 재료가 되는 거에요.
아까 제가 언급했지요. 인간의 모든 일은 노리는 것이 목적이 뭐냐? 육의 번식이에요. 육의 번식. 나의 확장이에요. 쉽게 말해서 내 영향력의 확장, 뭐든 내 유명세 뭐든 좋아요. 나의 확장이에요. 나를 미워한다? 어림도 없어요. 사랑스러운 내가 더욱 더 사랑할 만큼 더욱 더 범위를 넓혀가는 것.
이것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잠잘 때나 뭐 밥 먹을 때나 오직 내가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가 그것만 생각하는 게 인간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그래서 어린 아이라는 것은 방향이 반대쪽 되면 절대로 어린 아이가 아니에요. 어린 아이는 가질 게 얼마 안돼요. 뭐 사탕 몇 개 주고 등에 업고 잠 재워주면 그걸로 족한 것. 그게 인간입니까?
돈이나 좀 오만원짜리 이만큼 쥐어줘야 좀 사는 것이지 잠만 재워줘서 인간 같으면 그게 인간노릇 다 했다 볼 수 있겠어요? 우유만 입어 넣어주면 인간입니까 그게. 빨리 탈피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 되게 되면 아이는 아이 자체의 가치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공백’입니다. ‘없음’입니다. 없는 물 건너야 아이의 나라가 나와요. 아이의 나라. 천국이죠. 천국의 나라죠.
그래서 천국은 인간들에게는 천국은 예수님은 아이가 있다고 했는데 여기만 나타낸 거에요. 하나님께서. 그런데 인간들에게 아이는 뭐냐? 욕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이 아닌 것은 뭐가 되느냐? 아이는 이 땅에 없어요. 존재하지 않아요. ‘비존재’가 되는 거에요. 아이는 없는 거에요 이 땅에.
그럼 아이가 없다는 말은 그러면 누구의 모습을 보여주느냐? 그게 바로 예수님은 인간에게 안중에도 없는 거에요. 왜? 내가 확실하고 내가 진실이고 인간에게 각자 자기 자신이 너무나 생생한 유일한 소중한 현실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것이 망가지고 부서지고 이것이 다 채워지지 못할 때 아쉬워서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어 가지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자. 그때나 예수님 찾지요. 하나님 찾고 예수님 찾는 거에요. 자기를 안 미워해요. 그래서 교회는 사기 집단이에요.
자기 귀하다고 그거 내세울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목사 앞에서는 물론이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귀한 나, “주께서 그냥 버려두시렵니까. 어찌 합니까. 제발 저 여자만 주시면 제가 뭐라도 포기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냥 저 어떻게 이렇게 방치하실 거에요? 주님” 영어로 “WHY ME?” “왜 하필이면 접니까” 이런 거. “왜 제게 이런 재앙을.” 뭐에요 그게. 미워하라고 했잖아요. 왜 본인을 안 미워해. 미워하는 시간 드릴까요? 10분.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