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1b 울산강의-역대기상(9강) 6장 1절 : 석쇠구조
20220401b 울산강의-역대기상(9강) 6장 1절 : 석쇠구조
(강의:이근호 목사)
진리의 칼날이 오게 되면 관심사가 나 당했다가 아니라 “와, 저게 진리구나. 저게 다른 불과 불의 종류가 따로 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불지를 때에 그 이유가 진리에 근거해서 불을 지르거든요. 주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제단에 나오는 그 불로 이사야의 입을 지지면 이사야가 신기하게 죄가 사해져요.
그러면 이사야는 평소에 자기 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모아놓고 얼마나 연구했습니까? 없어요. 그냥 칼날이 오게 되면 없던 죄가 그것도 새롭게 밝혀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구원 받아놓고 이게 뭐가 개시되느냐? 도대체 내가 어느 정도로 죄인인지를 찬양 가운데서 자기 죄가 끄집어냄을 당하는 배설물로 나오는 그 자기의 면면을 보는 즐거움이 있지요.
그래서 레위기 10장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했는데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 나옵니다. 이게 뭐냐 하면 향로에요. 향로는 놋으로 만들었는데 무거워요. 이 향로에 담기는 불이란 것은 향로가 무서운 심판의 불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 향로의 불은 누구한테 주어지느냐? 놀랍게도 이게 바로 제사장에게,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의 고유의 몫이에요. 이거는 유다 지파 왕도 안 돼요. 레위 지파만 심판의 불을 감당할 수 있는 향로를 다루는 레위 지파뿐입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가 뭘 다루느냐? 인간 전부를 관장합니다. 레위 지파가 없는 것은 그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에요. 레위 지파 없으면 그냥 종교단체에요. 종교적인 바자회 열고 노닥거리는 거예요. 교인 수 불리고 부흥하고 그런 짓하고 있는 거예요. 죄 용서에 좋아하지 마세요.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의 선악체제, 윤리도덕으로선 감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그렇게 향로에 다른 불, 제단에서 갖고 와야 되는데 갖고 올 때에 도구가 있어요. 출애굽기 27장 3절에 보면,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제단의 취지가 어디까지 이동해야 되느냐 하면 향로 있는 장소까지 취지가 아무 탈 없이 이동시켜야 되거든요. 이게 동쪽이라면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 출입구가 있고요, 여기 장막이 있고 둘로 쪼개서 여기서 성소, 지성소.
지성소는 1년에 한 번밖에 안 들어갑니다. 속죄일에. 여기 커튼 쳐 있지요. 여기에 제단이 있어요. 이 제단에서 들어오자마자 양과 소를 잡고, 잡는 것은 바치는 자가 잡아요. 제사장이 잡지 않아요. 제사장은 피만 내요. 여기서 피 뿌리고 성소까지 불을 옮기거든요. 그러면 제단에서 처음에는 멀쩡한 양이 와요. 양이 무슨 양이 되느냐 하면 연기가 되는 양입니다. 양이나 소나 염소가 돼요.
이 연기를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흠향하신다. 향기를 흠향하시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 8장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드릴 때 향기를 기쁘게 받았어요. 하나님은 음식을 스모키한 걸 좋아해요. 숯불구이를 좋아해요. 생회 이런 안 좋아합니다. 다 태워버려요. 다 태웠다는 말은 충분하게 네 죄에 대해서 회개 정리가 끝난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의해서 진노와 죄의 만남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이 어디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이 진노 속에, 먼저 순서가 이렇게 돼야지요. 진노 속에 들어가서 여기서 뭘 만나느냐? 진노의 불을 만나게 되면 그때 그 인간은 자기가 죄인 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인간이 ‘진노+죄’ 이러한 요소로 구성이 돼요. 구성 composition, 작곡을 composition이라 하잖아요.
작곡할 때 음표 하나가 자기 가치를 주장하면 안 되지요. 음표, 쉼표 이런 걸 모아서 하나의 작품이 되잖아요. 악보가 되지요.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내가 죄인과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같이 연합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양식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광이 되는 거예요. 찬양의 내용이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개인 구원이란 것은 애초부터 성경에 없어요. 왜냐하면 개인 구원일 것 같으면 주님께서 애초부터 사람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도 않았지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아닙니다. 진노의 하나님이에요. 증오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예수님뿐이에요. 이는 내 사랑하는 자라, 예수님만 사랑해요.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될 정도로 그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던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신 분이 희생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결과가 우리가 사랑의 대상이 된 거예요. 예수님 빼놓고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예수님이 품었다는 조건 하에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 사랑, 사랑보다 더 귀한 것은 없듯이 말이죠.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야 죄인답지요. 내 이야기가 요한일서 4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그저 노래에는 나오지요.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지요. 너를 소유했지만~, 소유지요. 그걸 사랑이라 하지 않고 소유욕이라 하는 겁니다. 그걸 고상하게 말해서 사랑, 니 내 꺼다 뭐 그런 뜻이겠지요.
요한계시록 15장 2절에, 개인 구원 같은 건 없어요. 그거는 선교단체에서 간사가 백날 이야기해도 성경에 아예 없는 겁니다. 뭐 4영리 갖다놓고 하는 전부 다 그거는 성경적이 아니에요. 인간은 구원을 요구한다는 자체가 욕심이에요. 얼마나 자기 자신을 모르면 구원을 해달라는 그런 시건방진 요구를 합니까. 니가 뭔데? 죽어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하지. 어떻게 구원을…, 그 터진 입으로 건방지게 구원을 언급합니까? 정말 그거는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그건 왜냐? 종교가 장사하려고 기독교가 장사하려고 교회가 장사하려고 그것을 이천 년 동안 유포한 거예요. 거짓말을.
여기 2절에 보면,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불이 섞인 유리 바다인데 1절 끝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 나오지요. 하나님의 진노를 옛날 홍해 같은 위치에서 하나님께서 가로막아놓은 거예요.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통과할 수 있을까? 같은 말로, 누가 홍해를, 애굽 사람이 건방지게 홍해를 건너올 수 있을까? 이 홍해 자체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자기의 어린양의 피가 있는 사람, 이미 심판을 이긴 사람만 통과해주고 뒤따라오는 애굽 사람들은 그 홍해가 다시 닫혀서 다 죽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대목을 설명하면서 제가 자주 언급하는 중에서 “목사님, 왜 히브리 사람들은 보내고 애굽 사람들은 물에 잠기게 합니까?” 그러한 반발심 같은 게 있는데 제 답변은 간단해요. 왜 인간이 바다에 들어가려 합니까? 이것부터 잘못된 거예요. 바다는 물고기 사는 데지 인간이 사는 데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으로 코스를 그것으로 인간은 못 넘어오도록 오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이 살고 있지만 울산이 있으면 그 모든 둘레에 홍해를 둘러서 어떤 인간도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셨다, 일부러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구원은 애초부터 없는 겁니다. 그냥 사시다가 지옥 가세요. 그게 우리의 아담의 본성에 자연스런 현상이고 딱 맞아요. 왜 그리 욕심을 내요. 욕심낼 걸 내야지.
그래서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오지요. 그 뒤에 2절에 보면, 비로소 그 유리 바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뭐가 나오느냐? 적이 나와요. 그 적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 그러니까 짐승과 우상, 드디어 진노의 불로 말미암아 짐승이라는 하나님의 원수가 자기 정체를 노출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개인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도를 낚시 미끼로 사용해서 진정 이 세상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원수를 들춰내는 노출시키는 기능으로 자기 백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그러니까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사람과 하나님을 이겼다. 개코도 재주도 없고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이겼데.
베들레헴 근처에서 양치는 목자의 학력이 서울 법대를 나왔습니까, 뭐예요? 자기 부인은 옷을 많이 사 입었습니까? 뭡니까? 내세울 게 뭐가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새로운 땅에 새로운 환경, 찬양이 가득한 그 환경 안에 완전히 포획되잖아요. 놓이게 되잖아요. 그 찬양소리를 다 듣잖아요. 하늘에서는 영광이고 땅에서는 네가 바로 하나님이 너를 기뻐했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목자가 뭐라 하겠어요? 이것 진짜입니까? 괜한 위로삼아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진짭니까?” “그래 증거 보여줄게. 빨리 가거라, 베들레헴에. 지시한대로.” 그래서 베들레헴로 245-7에 들어가 보니까 거기에 아기 예수가 있었던 거예요. 아기 예수가 누워있었단 말이죠. 이미 목자는 다녀갔겠지요.
1순위는 아니지만 목자가 먼저 갔는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아기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아기가 왕이라는 거예요. 새로운 왕의 등장이에요. 새로운 나라의 등장입니다. 이미 승리한 나라에요. 이 세상과 전쟁하는 게 아닙니다. 시시하게. 이 세상 지배자 악마와 전쟁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레위기 10장을 봅시다. 레위기 10장에서 두 사람이 죽어요. 누가 죽느냐? 제사장이 죽잖아요. 나답과 아비후가 죽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죠. 아론과 모세가 레위의 둘째 아들 그핫 계통이에요. 나답과 아비후도 아론과 모세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핫 계통인데 그런데 둘이 죽어요. 죽고 난 뒤에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보시고 그러니까 여기서 제가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레위 지파는 시간과 공간을 관장한다, 통제한다, 지배한다, 이것을 분명히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민수기 16장입니다. 여러분 힘들더라도 같이 보도록 합시다. 16장 1절에 보면,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자, 이렇게 돼 있어요.
고라 이 사람들 뭐하느냐 하면 제사장이 아닙니다. 제사지낼 때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 그리고 제사 장비를 분해해서 이동할 때 거기에 짐꾼으로 동원된 사람. 어쨌든 간에 하나님의 제사라는 엔진부분, 이스라엘의 엔진부분이에요. 다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엔진이 가동돼야 되는데 그 엔진이 뭐냐 하면 레위 지파만 할 수 있는 제사에요. 그게 제단이 있어야 되고 성소 있어야 되고 지성소 있어야 돼요.
거기서 제단에 있는 불은 성소까지 이동을 시킵니다. 제단의 불을 성소까지 이동을 시키면 여기 성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떡이 열두 개 있어요. 테이블에 떡이 여섯 개, 여섯 개 있거든요. 열두 개 떡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상징물이에요. 우리나라 상징이 뭡니까? 태극기죠. 태극기 걸려있다고 보면 돼요. 거기 조명기구가 있는데 이게 등불이고.
이스라엘을 등불로 비추는데 그게 기능이 계속 가동되려면 바깥에 있는 제단이 안쪽까지 들어와야 돼요. 안쪽까지 들어오면 성소 불나잖아요. 그렇지요. 맹렬한 불. 그래서 불나지 않기 위해서 향로에 담아서 향을 피워요. 향을 피우게 되면 제단 기능의 연속성이 보장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테이블이 있는데 여섯 개씩 총 열두 개의 떡은 무엇을 받느냐 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기쁨의 심정, 마음을 열두 지파를 둘러싼 향기로 지배를 받고 관장을 받아요.
인간 존재를 누가 지배합니까? 제사가 지배하는 거예요. 그 일을 누가 해요? 레위 지파가 하는 겁니다. 그 레위 지파가 하는 그 기능, 장차 예수님께서 홀로 하시는 거죠. 그런데 레위 지파 안에 아삽이라든지 헤만이란 사람 있지요. 그 사람들 뭐하다고 했습니까? 다윗 시대부터 전국적으로 월급 받는 찬양대에 있었어요. 찬양할 때 노래만 하는 게 아니에요. 재롱으로 악기, 관악기 동원해서 나팔까지 부르면서 찬양을 합니다.
그 기능은 사실 천사의 기능이에요. 왜냐하면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예수님 재림할 때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나팔소리 들려요. 그리고 출애굽기 19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 올라갈 때 시내 산이 멀었다, 가까이 왔다, 멀리 있다를 뭐로 조정하느냐? 산 위에서 나오는 나팔소리가 가까이 들리면 시내 산에 가까기 간 거예요. 이천 미터 넘어요. 높아요. 나팔소리 들리면. 하늘나라 관악대에요. 거기는 하나님 계시고 그 주변에는 찬양대만 가득한 거예요.
찬양할 때 그냥 찬양하지 않고 자기 면류관을 던지면서 찬양해요. 죄가 설 쨉이 됩니까? 내가 설 깜냥이 안 돼요. 제가 서면 안 되지요. 자기가 썼던 면류관도 도로 반납해서 그냥 던지지요. 방탄소년단 공연할 때 꽃이나 들고 와서 누구 발 앞에 던집니까? 모르시는구나. 팬들이 들고 온 꽃을 자기 발 앞에 던집니까, 누구 발 앞에요? 주님 발 앞에 던지잖아요. 그럼 왜 교인들은 지 발 앞에 던지고 합니까? 주면 그만이지, 내가 얼마 냈다, 피아노 기증했다, 꽃꽂이 내가 했다 그걸 왜 자꾸 기억하고 있어요. 과거는 지나간 건 다 지나갔는데.
민수기 16장 16절 보겠습니다. “이에 고라에게 이르되 너와 너의 온 무리는 아론과 함께” 내부 반란을 한 거예요. 네가 뭔데 너희들끼리만 제사장 하느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에 고라에게 이르되 너와 너의 온 무리는 아론과 함께 내일 여호와 앞으로 나아오되 너희는 각기 향로를 잡고 그 위에 향을 두고 각 사람이 그 향로를 여호와 앞으로 가져오라“
향이 총 몇 개냐? 250개를 가져왔어요. 사람들 보기에 동일한 제품에 동일한 놋 재질의 향로입니다. 똑같아요. 인간들 보기에 동일한 인간인 것처럼 각자 향로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251개지요. 아론도 들었으니까. 고라 자손 250개에다 거기에 아론의 향로, 아론이 제사장이니까 향로 있지요.
251개 향로 가운데서 어디서 나온 불이 나머지 향로 들고 있는 모든 사람 불을 다 살라버렸겠습니까? 바로 아론의 향로에서 나온 불이(아론의 불은 물론 제단에서 나왔겠지요) 나머지 불은 불도 아니에요. 불은 의식도 없고 감정도 없는 줄 알았지요. 불이 알아서 사람을 구별합니다. 심판 받아야 될 자와 심판을 대신할 자를 구분해요. 어디에도 심판은 있어요. 있는데 너 대신, 그게 십자가거든요.
대신 심판해야 될 대상자와 그리고 향로 드렸잖아요, 교회 나와 줬잖아요, 성경공부 나와 줬잖아요, 헌금했잖아요, 이렇게 자기 향로, 자기 공로를 채워서 들이미는 것, 내가 선교했잖아요, 전도했잖아요, 설교했잖아요. 들이미는 것, 머리 홀라당 다 타버려라. 불같지도 않은 것 들고 있는 이게 불이야? 그걸 달리 말 바꾸면 인간 같지도 않는 게 성도 같지도 않는 게 성도라고 맨날 자기 행한 것 생각하는 게 무슨 성도냐.
그래서 30절에 보게 되면, 땅을 열어서 사람들을 땅에 파묻었고요 동시에 31절에 땅이 갈라지면서 땅이 입을 열어서 거기에 몇 명이 죽었느냐? 35절에 거기 참석했던 향로 들고 있던 250명 다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게 아론의 제사가 아니고 하나님 스스로 아론 속에 침투해서 아론을 조종했던 거예요. 하나님이 친히. 그게 하나로 모아요. 인간이 민족과 다양성이 있더라도 한 지점으로 모은다고요.
그래서 38절 보면, “사람들은 범죄하여 그 생명을 스스로 해하였거니와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편철을 만들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표가 되리라 하신지라” 그때는 제사장이 아론이 아니고 엘르아살입니다. “제사장 엘르아살이 불탄 자들의 드렸던 놋 향로를 취하여 쳐서 제단을 싸서”(39절) 제단을 새롭게 인테리어된 거예요. 까불면 이렇게 불타 죽는다는 것.
이 제단은 너무나, 너무나 귀한 거기 때문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니가 가면 나도 간다,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그 모습을 아예 제단 자체가 250명이 불타 죽었다는 증거들로 덕지덕지 붙여놓은 새로운 제단이 마련된 거예요. “불탄 자들의 드렸던 놋 향로를 취하여 쳐서 제단을 싸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물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아론 자손이 아닌 외인은 여호와 앞에 분향하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함이며”
자, 이렇게 볼 때 제단 있는 곳만 하나님이 계신 장소지요. 그러면 시공간, 인간들이 계산하는 울산, 부산, 대구 이런 시공간은 가스 불로 불타버려야 될 아무 의미 없는 공간이에요. 사람들은 친구 만나 하지요. “네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뭐 서울 살다가 목포에도 살아보고 그것도 재미없어서 미국에도 가보고 세상 다 돌아다니면서 다시 늦게 한국에 왔다. 나 그래 살았다.”
보통 자기 공간이동을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칼날 같은 모세 율법, 제사 율법에 의하면 불탄 데만 돌아다닌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 제단이 신약에서 예수 안만이 유일한 공간이지 나머지 공간은 의미 없습니다. 미국 가지 말라는 게 아니라 미국 가더라도 예수 안에 들어가 있어야 돼요.
버블, 예수라는 풍선 안에 있으면 미국에 가든 러시아, 북한을 가든 이미 심판을 벗어났기 때문에 주님 앞에 빼앗김을 당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은 이미 완료된 겁니다. 찬양해야 돼요. 감사해야 됩니다. 찬양하면 잘해줄 거죠, 가 아니라 이미 잘했다는 상황을 확인하는 반응이 그게 찬양이고 감사에요. 그래서 감사하라 때는 반드시 찬양이 같이 나오게 돼 있어요. 에베소서 5장에. 너희는 성령에 취해서 시와 신령한 노래로 찬양하라 하잖아요.
이 레위 지파에 관련해서 또 볼 데가 있어요. 이것만 보는 게 아닙니다. 그 다음에 17장에 보면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나오는데,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다른 지팡이를 해보니까 그중에 열두 지팡이 가운데서 싹 난 지팡이가 몇 개였어요? 하나,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건 어디 갔느냐? 언약궤 속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한다는 말은 언약궤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거든요. 함께 한다는 것은 너희들이 토해놓은 저질러놓은 모든 죄를 내가 품으면서 함께 게신 거예요. 착한 것, 훌륭한 것, 기특한 것 이걸 품는 게 아니고 우리가 토해놓은 그 더러운 죄들과 주와 함께 하기 때문에 주의 몰골이 뭐냐 하면 십자가에요. 주님은 인물 훤칠하게 오시는 게 아니고 그냥 냉정하게 십자가 죽으신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죠. 네 대신 내가 죽었다는 죽으신 분.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네 자아하고 나와 같이 껴안고 무너지자. 무너지게 되면 그 사람은 사는 거예요. 내 자존심과 내 자아 무너지면 그 사람은 사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이 아이고 맛있다, 하고 하나님은 숯불 좋아하시니까 탄 음식 좋아해요. 이 연기 새카맣게 타버린 몽땅 타버린 그 연기만 주께서 마십니다. 그게 율법의 칼날이에요.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법이 와서 잘났다는 우리를, 멀쩡하고 싶은 우리를 아주 조각조각내서 이게 나다, 라고 하는 구성을 못하게 만들어요.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지 이게 납니다, 하면 안 돼요.
이게 좀 어려운데 어떤 가정주부가 애들 학교 보내는 준비하잖아요. 그 다음에 가고 난 뒤에는 애 기저귀부터 빨래도 하지요. 학교 보내는 것도 나고, 기저귀 빠는 것도 나고, 점심식사도 나다. 자꾸 나 쪽으로 오면 안 되고요 하나님이 학교 보내게 하셨고, 빨래하게 하셨고, 그 다음에 식사 준비하도록 하셨다.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주님으로 전환돼야 돼요.
왜냐하면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주께서 살려줘서 살기 때문에 그래요. 이건 지금부터가 아니라 과거 태어난 것부터 주님께서 필요해서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태어난 것도 주의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에요. 죽는 것도 주께서 죽여야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 죽으란다, 하지 마세요. 지가 그런 권한도 없어요.
민수기 25장에 보면 거기에 우상을 섬깁니다. 바알브올 우상을 섬기는데 이것 때문에 11절에 보면 제사장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러니까 모세 때 있었던 아론, 그 다음에 아론 죽고 난 뒤에는 엘르아살, 그 다음에 엘르아살 아들 비느하스, 이게 레위 계보가 살아 있기에 역사는 흐른다. 이스라엘 역사가 흘러가는 거예요.
레위 지파를 살리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는 레위 지파가 유효할 때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유일한 마지막 제사장이기 때문에 예수님 오실 때까지는 시간이 계속 흘러가야 돼요. 말라기 선지자가 바로 그것 아닙니까. 레위 지파의 유효함이 말라기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질투심으로 우상 섬겼다고 전염병 퍼졌는데 죽은 자가 몇 명이냐 하면 9절에, 이만 사천 명 죽였어요. 그러니까 아까 레위 지파는 인간의 모든 것을 관장한다. 인간의 운명, 목숨을 관장하는 거예요. 누가? 레위 지파가. 그럼 레위 지파가 사는 동네가 어디냐? 이게 바로 역대상 6장 끝에 나옵니다. 역대상 6장 거의 다 한 거예요.
끝부분에 61절에 보면, “그핫 자손의 남은 자에게는 므낫세 반 지파 족속 중에서 제비 뽑아 열 성을 주었고 게르손 자손에게는 그 족속대로 잇사갈 지파와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와 바산에 있는 므낫세 지파 중에서 열 세 성을 주었고 므라리 자손에게는 그 족속대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스불론 지파 중에서 제비 뽑아 열 두 성을 주었더라”
그러니까 열두 지파에서 각출해서 그 지역마다 파견해서 레위 지파가 살도록 그렇게 한 거예요. 왜? 레위 지파가 시간과 공간을 그리고 인간의 목숨을 관장하고 주도적이고 지배하니까요. 각 지파에 각 동네마다 구청처럼 중심에 있어서 그들에게 십일조해서 그들을 먹고 살게 한다면 그거는 이스라엘에 제대로 가동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전쟁,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이길 수 없는 자와 그 진노의 불을 레위 지파를 통해서 제사에 의해서 감당해서 그 안에 들어온 사람과 구분하는 그 기능이 레위 지파가 해야 될 기능이죠. 뭐 이스라엘 안에서는 찬양소리가 일어나지요. 시편에 나오는 그게 찬양의 가사지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역사대로 흘러가게 되면 마지막에 레위 지파는 어떤 땅을 얻는가? 그게 에스겔 48장에 나옵니다. 이게 아주 복잡해요.
에스겔 48장에 보면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이 만들어집니다. 이번에 여름수련회를 하는데 코로나 제한조치가 풀려서 동구청에서 이백 명 모여도 됩니다, 하고 왔어요. 에스겔 할 거예요. 거기에 특별히 레위 지파의 땅을 강조해요. 왜냐하면 에스겔이 레위 지파거든요. 아버지 이름이 부시에요.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 에스겔 1장 3절에. 레위 지파가 가면 역사가 뒤따라가는 거예요. 예수님을 향하여 역사가 시간과 공간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48장에 나오는 지도에 의하면, 13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제사장의 지계를 따라 레위 사람의 분깃을 주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일만 척으로 할지니 이 구역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각기 일만 척이라 그들이 그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그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나 여호와에게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니라”
땅이 하늘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땅을 하나님이 그냥 준 거기 때문에 인간이 사고팔고의 대상이 안 된다, 부동산 거래가 안 되는 거예요. 땅에 하늘의 요소가 박혀버렸다. 그 박힌 장소가 뭐냐? 어느 지파다? 레위 지파가 있는 장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오늘날 이스라엘이 자부심을 갖겠습니까, 안 갖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그들이 차지하고 있으니까 얼마나 자부심이 있겠어요.
그것뿐만 아닙니다. 그 레위 지파의 땅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과 가장 가깝고 그리고 왕도 레위 지파와 함께 있어야 돼요. 왕은 어느 지파? 유다 지파. 레위 지파와 유다 지파 투톱, 레위 지파와 유다 지파 왕이 함께 있는 거예요. 나중에 두 지파가 같이 섞여버리면 그게 바로 왕이요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여기 에스겔 48장에 나오는 그 이야기를 제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가운데 성소가 있어요. 여기는 제사장이 여기 살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다윗 때는 사독 계통의 제사장. 이게 일만 큐빗, 성경에선 척이라 돼 있는데 일만 큐빗, 그 다음에 오천 큐빗 이것은 성소의 일꾼들 땅이에요. 그리고 여기에 제사장, 레위 자손들 땅이 있고, 이게 일만, 그 다음에 왕의 땅이 이만 오천 큐빗.
이게 어디까지냐? 지중해부터 사해까지 꽉 차있어요. 이만 오천 큐빗이라 하면 잘 모르겠지요. 이게 13.5킬로미터. 그래서 총 합쳐서 얼마나 하면 이게 구만 오천, 킬로미터로 한 50킬로미터. 이런 땅을 줘요. 그러면 이 땅에 여호와삼마,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고 돼 있는데 이 땅이 지금 어디 있느냐? 이게 에스겔 48장에 분명히 예언돼 있다고요. 이런 땅이 주어진다. 영원한 곳이에요.
그리고 나머지 파는 뭐냐? 나머지는 이쪽에 베냐민, 유다 해서 저 위쪽으로부터 갈릴리 바다, 사해로부터 저 남쪽 이집트까지 전부 다 나란히, 나란히 해서 레위 지파, 단, 아셀, 므낫세, 아브라함, 르우벤, 유다, 그다음에 베냐만, 시므온, 잇사갈. 스불론, 갓 해서 위에서부터 저 아래쪽까지 꽉 차는데 문제는 이 땅이 지금 어디 있느냐는 거예요. 분명히 약속돼 있거든요. 여호와삼마라 하는 것은 여호와 거기 계시다.
아까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레위 지파, 유다 지파 이걸 전부 완성시킨다 했지요. 예수님이 제사장이시고 선지자고 또 로마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우리의 주요 왕이십니다. 호산나, 왕이거든요. 그러면 시간과 공간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하여 바라보게 집중하게 돼 있어요.
스파이더맨 손목에서 뭐가 나옵니까? 거미줄 나오지요. 거미줄을 회수보자 말이죠. 그러면 다시 거미줄 어디로 들어오죠? 스파이더맨 몸체 안으로 들어오잖아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체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모든 시간과 공간은 예수 안으로 쑥 거기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들어와서 예수님께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어떻게 되느냐? 지상에서 하늘로 떠서 올라갑니다.
그러면 에스겔부터 해서 약속한 모든 땅은 어디로 갑니까? 하늘로 올라가는 예수님 안에 같이 완성되어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울산에 있다가 아니라 우리의 시민권은 땅에 있는지, 하늘에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는 거예요. 왜? 하늘에서 성령이란 거미줄이 우리한테 꽂혔으니까요.
제가 아까 했지요. 하늘의 요소가 우리 안에 침투했다고요. 침투했으니까 우리는 뭐냐? 내 종교적인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리고 구원받을 권한도 없었는데 오직 십자가의 그 기능을 들춰내기 위해서 그냥 찾아오시고 그냥 강탈하시고 그냥 방문하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울산바닥이고 늙어가는 이 몸은 뭐냐? 이거는 제한된 시공간, 우리가 육신으로서 어쩔 수 없는 시공간이죠.
뭐 예수 믿는다고 해서 산으로 들로 공중으로 날라 다니는 그런 것 없어요. 육신의 한계 때문에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육신의 한계 때문에 먹을 것 먹어야 되고 잘 땐 자야 된다 이 말이죠. 주님도 피곤했었어요. 주님도 피곤하고 주님도 밤새 주무시고 했다 이 말이죠. 죄 있는 육신 때문에 썩어진 우리가 감당할 수가 없어요.
항상 성령의 열매해서 항상 방긋방긋 웃고, 그거는 이빨 안 아플 때나 하는 이야기지. 어금니 아프면 무슨 화평과 양선과 자비에 형제우애입니까. 이가 아픈데 뭐 그런 게 돼요. 이 뽑고 대상포진부터 해서 코로나 걸려보세요. 어떤 사람은 코로나 걸렸는데 사흘 동안 얼마나 기침을 했는지 허리가 아프데요. 쉬지 않고 감사하라가 아니고 쉬지 않고 기침하라.
주와 함께 주 안에서 풍선처럼 붕붕 떠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찬양을 하도록 지금도 성령께서 그렇게 레위 지파의 효과를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은 마귀가 작동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레위 지파의 율법의 칼날 내가 중심이 아니고 나는 조각난 거예요. 토막 난 거예요. 나는 쪼가리난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제단의 진노의 불을 감당할 수 없어요. 다 태워집니다. 다 태워지는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미련을 두면 안 되지요. 세상에서 돈 좀 많다, 적다 그런 시답지 않는, 이번에 홀인원 했다고 그걸 자랑질 한다고 뭐. 세상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 남들이 못 가져서 환장하는 것, 그것 다 고린도전서 3장에 의하면 불에 태워집니다. 너의 공력을 불에 태워보라 했지요. 계속 불이 나와요. 우리의 육신은 화장해도 괜찮아요. 불에 태워도 괜찮습니다. 끝으로 한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율법이란 석쇠구조로 보면 돼요. 장어구이 할 때 석쇠 있지요. 석쇠구조가 어떻습니까? 연탄불 위에 이런 식으로 돼 있지요. 고등어도 얹고 갈치도 얹잖아요. 우리 몸은 항상 하나로 통합돼 있어요. 자존감으로 똘똘 뭉쳐있다고. 그러면 석쇠구조가 위에서 우리로 내려와 버려요. 법이라 하는 것은 제사법이라 해서 중간에 숭숭 구멍이 뚫렸거든요.
구멍이 뚫렸으니까 하나하나가 칼날이라면 율법이 오면 우리를 작게 잘게, 잘게 토막 내버린다 말이죠. 그러면서도 주께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격자구조 하나하나에 마치 물리학에서 말하는 원자의 운동에너지가 작동해요. 그러니까 애를 학교 보내고 설거지 하고 이 모든 것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이 말은 어느 것 하나 내 운동에너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 이 말이죠. 이게 만약에 내가 돼버리면 우리는 좀 착한 일했다고 이젠 농땡이 부려도 되겠지, 이렇게 돼버리면 격자구조가 날아가 버려요. 내 말은 말씀이 위주가 돼야 되지 말씀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게 왜냐하면 천사가 이렇게 살아요. 천사는 지 존재를 주장하는 게 아니고 주께 시킨 대로 기능대로 움직이거든요.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십자가의 기능자로 살아야지 내가 십자가 믿고 내가 천당 간다고 우겨버리면 그러한 결심은 나중에 치매 걸리면 꽝이에요. 정신 차리자? 지가 정신 차린다고 정신 차려집니까? 나이 들면 안 되는데. 항상 십자가 말씀으로 평소에 움직이면 치매가 걸리든 노인네가 되던 정신이 있든 없든 그것조차도 주께서 하신 주의 것이니까 주의 소유를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한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찬양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기능이 우리의 생존보다 더 귀하고 우선적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