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20331a 다니엘5장 11절(표적 계시)-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20331a 다니엘5장 11절(표적 계시)-이 근호 목사
p.217 중간에,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세기 8장 21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이 대목을 딱 보시면 여러분들이 이것부터 생각하셔야 돼요. 확정, 결정된 것. 확정, 결정된 것이라는 이 성경 말씀에 대해서 일단 기뻐해야 돼요.
확정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 인간 세계거든요. 미지의 환상을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미지의 꿈을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자기의 현실에 충실하거든요. 아침에 밥을 먹었다. 분명히 밥을 먹었잖아요. 나는 지금 시계를 차고 옷을 입었다. 분명하죠. 거기서 인간은 멈추는 게 아니고 어떤 기대감이 있잖아요, 기대.
자, 밥 먹었다. 오늘 할 일을 해야지. 오늘 안 끝났어요. 오늘 이런 일을 할 거야, 라고 되어 있죠. 그게 환상이 되는 겁니다. 시작은 분명한 현실이지만 계획을 잡는 순간 환상에다 이 현실을 (끌어당겨) 가져가는 거예요. 환상이라는 것은 현실이 아니에요. 확정된 것, 결정된 것이 여기 환상에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에서는 아까 창세기 8장 21절 이 자체가 이미 확정되고 결정된 거예요. 그러나 8장 21절의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은 확정된 현실이죠, 이 현실을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현실과 맞추려고 시도를 하는 순간 이 성경은 환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현실 됨을 양보할 생각이 없어요. 하나님께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내 고집대로 세상이 되어졌으면 좋겠어요. 인간의 생각이에요. 그러나 여기 8장 21절은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되어지기로 이미 확정이 났고 결정이 난 거예요. 인간이 양보해야 돼요. 주님보고 양보하라 소리하면 안 됩니다. 인간이 양보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말씀을 대하는 순간 양보할 생각이 없어요. 왜냐하면 내 현실과 내 꿈이 양보해버리면 나는 살 이유가 없어지니까. 내가 살 이유가 없어져버리면 내가 꿈꿨던 환상이 다치게 됩니다. 내 꿈이 다치게 돼요. 다치면 아파요.
그래서 내가 안 다치고 내 뜻대로 환상이 실재 현실화되는 데에 이 성경말씀, 창세기 8장 21절도 마찬가지고 모든 성경말씀을 여기에 억지로 합치, 일치시키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하나님, 기도하면 되겠습니까? 헌금을 좀 드릴까요? 내가 전도를 해드릴까요? 왜 그런 짓합니까? 왜 그런 짓하죠? 자기의 환상이 안 다치고 싶은 거예요.
환상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 현실에 충성한 나에 충실함에서 환상이 나오는데 이 꿈이 깨져버리면 내 자신이 아파요. 그것도 그냥 아픈 게 아니고 많이 아파. 내가 많이 아파요. 내가 많이 아프면 내가 아픈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뜻도 다 부질없는 것이 돼요. 다 쓸데없는 것. 내가 아픈데 주의 뜻만 이루어버리면 하나님은 좋지만 나는 안 좋다는 겁니다.
이것을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것은 훼손시키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 중에서 훼손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것을 훼손시키면 안돼요. 인간이 훼손시키면 훼손되기 때문에 훼손시키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훼손시키면 안 되는 이유가 인간이 훼손하면 훼손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아무리 훼손해도 하나님의 것 중에서 훼손될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나오죠.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갔죠.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직접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만 고생이다. 너만 지금 부질없는 짓을 한다.” 그 말은 인간이 이 땅에 삶 자체가 다 부질없다는 것을, 확정된 말씀에 의해서 통보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아주 고집에 고집을 부립니다. 한국어 담임, 이거 잘 돼야 될 텐데. 자기가 하는 그 기능과 일이 본인에게 만족스럽게 잘 돼야 될 텐데.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환상은 바로 나로부터 나왔죠. 나에게서 환상이 나오죠. 그럼 나는 어디서 왔는가. 바로 외부 또는 외부 환경에서 주어졌습니다.
이 외부 환경은 나를 위함입니까, 아니면 확정되고 결정된 주님을 위한 겁니까? 외부 환경은 주님을 위한 거죠. 그래서 여기서 날마다 해석 오류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세상을 잘못 읽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고집스럽게 잘못 읽고 있어요, 고집스럽게.
잘못 읽으면 (그다음에) 제대로 읽으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고집스럽게 잘못 읽고 싶어요. 왜? 내가 안 다치기 위해서. 내가 다쳐버리면 하나님이고 뭐고 다 소용없는 거예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어야 된다는 그것이 바로 환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것은 다 아시니까 지우겠습니다. 아시니까 성경구절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답변을 잘 하셔야 됩니다. 제가 성경구절을 하나 말씀드리고 그걸 가지고 질문을 드릴게요. 마태복음 28장 5절에 ‘무서워 말라’는 말이 나와요. 예수님의 시체를 찾으러 온 여자에게 천사가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했죠. 너희는 무서워 말라. 그러니까 천사가 그 여자들에게 먼저, 무서워하는 걸 보고 무서워 말라고 이야기했어요. 왜 천사가 무서워 말라고 했을까요?
조금 전에 제가 쭉 이야기한 것에 의하면 그들은 이 환경에 대해서 인간이기 때문에 해석을 잘못하고 있죠. 그래서 천사가 하는 말이 “무서워 말라” 6절에 나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부활이죠.
그러니까 현재 이 상황, 환경이 예수님이 부활한 환경이에요. 부활이 된 환경이죠.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그 환경이 예수님을 찾는 사람에게 어떠한 변화를 유발해야 되느냐 하면 인생에 대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더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게 된 환경이므로, 그다음에, 확정된 거예요. 결정 난 겁니다. 기분 좋지 않습니까? 기분 정말 좋죠.
여성들 세 명이 있다 합시다. 이 정치적 환경이 어떠냐 하면 예수님을 처형한 권력이 작동하는 정치적 상황이죠. 그런데 처형되어 마땅한 그 죄수의 시체를 이 여인 세 명이 찾으러 간 거예요. 여러분, 이 두 가지 입장을 다 봐야 돼요. 두 가지 입장을 다 알아야 됩니다.
여자들의 입장을 생각해보세요. 누구한테 들키면 안 될 일이죠. 새벽에 몰래 가서 예수님을 몰래 찾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행동 자체가 해석 오류에요. 여자는 몰랐죠. 예수님의 시신 찾으러 갔죠. 그런데 여기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와서 말을 건넵니다. 말을 건넬 때 6절에 보면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냥 살아난 정도가 아니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의 말씀대로.
그렇다면 여자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공포의 대상이 안 되어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처형했던 모든 현실적 권력이 이 여인에게 이제 다시는 공포의 또는 두려움의 환경이 안 되어야 돼요. 그럼 여성에게 그동안 이 정치적 환경, 예수님을 처형한 이 정치적 환경은 이게 바로 환상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개꿈 꾼 거예요, 개꿈. 꿈 속에서는 분명히 무섭죠. 꿈에는 온갖 무서운 게 다 있어요. 그런데 꿈을 깨보면 이마에 땀방울 맺힌 걸 닦으면서 어휴, 이렇게 한숨 쉬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아휴, 다행이다. 진짜 그런 줄 알았지. 그렇게 되면 거기서 나오는 것은 안심 그리고 기쁨, 염려, 걱정 그런 것과 더불어서 자신의 잘못된 현실감에 대한 스스로의 비난,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죠.
아, 이런 차원에서 바로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쫄지 말아야 될 것에 대해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에 자기가 자기 발 저린다고, 내가 구성한 환상의 무게에 자기가 발을 찍힌 거예요. 공포와 더불어서 죽기를 무서워하면서.
그리고 난 뒤에 마태복음 28장 10절에 보면 예수님이 또 등장하셔요. 또 뭐라고 하십니까?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뭐에요? “두려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예수님께서 그냥 조용히 살아계신 것이 아니고 계속 어떤 일을 하시면서 살아계신 거예요.
지금까지 했던 것을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지금 p.217에 나오는 창세기 8장 21절에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그러니까 이 말은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고 다른 요소 때문에 땅을 저주하겠다는 그런 뜻이에요, 이게. 나는 너하고 상대 안한다 이 말입니다. 나는 인간하고 상대 안한다. 인간은 이미 버린 존재에요. 자꾸 환상하고 꿈을 꾸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딱 듣는 순간 우리는 무엇에 기뻐해야 되느냐 하면 새삼스럽게 우리가 애쓰거나 노력할 필요도 없이 걱정, 염려할 필요 없이 모든 것이 말씀대로 확정 난 것이고 결정이 난 거예요. 그 결정 난 것 중에 제가 마태복음 28장으로 확 옮겼잖아요. 28장에 보니까 뭐가 결정 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지금 살아서 죽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살아계신 예수님이 그것도 그냥 살아있다, 바이바이가 아니라 살아계셔서 활동하시는 그 결과물 속에 우리가 새로운 환경으로 지금 안에 놓여있는 거예요.
그래서 천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무서워 말라 했고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무서워 말라는 거예요. 그만큼 인간들은 자기가 꿈꾸는 환상 때문에 자기가 지레 짐작해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만든 환상에 의해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그 환상은 바로 정치적 상황으로서 모든 인간들이 거기에 동조하거나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 이제는 우리 안 무서워하기로 약속해요~! 안 무서워하기로. 지금 안 무서운 상태에서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해석 오류는 어디서부터 해석 오류가 생기느냐 하면 환상 때문에 해석 오류가 생긴다, 그렇게 이야기했고 이 환상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 나 중심의 현실관 때문에 환상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나 중심의 현실인 환상이 왔을 때 여기에 주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마중을 나오죠, 택한 백성에게. 마중 나오는 그 방식 전체가 공포스럽고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그러한 속성이 이 안에서 작용하고 있으니까 두려워 말라고 하는 거예요.
두려워 말라고 한다면, 나 중심의 현실관에서 인간들이 환상을 끄집어낼 때 기대나 희망으로 환상을 만들어냈잖아요. 이제 두려워 말라는 주의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부셔버립니다. 그걸 제가 아까 강의 전에 예상 밖의 일이라 했습니다. 인간에게 예상 밖의 일을 가지고 두려워 말라는 것과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별로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상당히 많이 어려워요. 인간들이 말씀을 보잖아요. 아까 마태복음 28장 5, 6, 10절도 그렇고 창세기 8장 21절도 그렇지만 인간이 이 말씀을 볼 때 혼자 보는 게 아니고 이 나 중심의 현실관에서 비롯된 환상을 대동하고 이걸 끌고 말씀을 드디어 찾아옵니다, 말씀대로. 물론 해석 오류가 있기 때문에 제대로 안 믿는 거죠.
인간은 성경말씀을 문자로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말씀이 인간에게 마중 나갈 때는 문자로 하는 게 아니고,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문자를 영으로 해석하게 해요. 그럼 문자에서 영으로 바꾸어서 해석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지만 이게 쉬운 게 아니에요.
문자로 아는 우리를, 죽었다가 살아나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죽임으로써 나의 모든 환상과 나 중심, 기대, 희망 다 죽임으로써 죽이는 그 힘이 바로 영의 힘이 되는 거예요. 이 영은 말씀의 완성되시는 예수님에게서 영이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는 십자가라는 언약으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십자가라 할 때 십자가에 대해서 인간들이 하는 행세, 인간들이 했던 결정, 확정된 것은 저 자는 죽여 없애야 된다는 거죠. 주님께서는 콜. 가져와. 내가 죽어줄게. 그러면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다 털어냈어요, 이제는. 인간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들은 두려워하기 때문에. 뭐가 두렵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 중심을 다치게 하죠. 아프죠. 이게 파괴되니까 아픈 거예요.
환상, 기대, 자기 중심, 이런 문자 모든 것이 해석 오류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이 주어집니다. 이게 어려워서 제가 주저하게 되는데요. 할 수 없다.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다음 둘 중 어느 것이 멸망의 전조냐, 징조냐? 둘 중에 하나니까요. 1번-별이 떨어진다. 별이 파괴된다. 별이 파괴되면 인류도 멸망한다. 별이 떨어지는 것, 파괴되는 것이 인류의 멸망의 징조입니까, 아니면 2번-내가 파괴되는 것. 어느 것이 인류 멸망의 징조요, 전조가 돼요?
네. 내가 파괴되는 거예요. 별이 떨어지는 것을 징조로 봐버리면 우리는 아직까지 내가 파괴되는 지점까지는 오지 않았어요. 그 정도까지는. 그래서 주님께서 해와 달을 건드리면서 궁극적으로 목표로 해서 건드리는 게 있어요. 그것은 나 자신을 노리고 인간 자신을 노리고 주께서 성경말씀으로 해석을 해버리는 거예요. 기다려라. 내가 너 파먹으러 갈게. 너를 파먹으러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자살하면 안돼요. 주께서 파먹도록 해야 돼요. 그야말로 신화처럼 우리는 그냥 산에 묶어놓고 독수리가 와서 내 심장을 파먹도록. 주님이 만든 이 부활의 환경은 나를 ‘꼼짝 마라’ 하고 나를 묶어놓고 나의 심장과 폐와 또 뭐 내장, 내 눈까지 내 뇌까지 파먹히도록 해주시는 그러한 환경에 우리를 박아놓고 두려워 말라. 염려하지 말라. 기뻐하라. 이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과연 그런지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오늘 성경 좀 찾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했죠. 그 위 3절에 보세요. “시험하는 자가” 시험하는 자라 하는 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만 창세기 8장 21절에서 하나님은 사람하고 상대 안 합니다. 사람의 배후 조종자 악마와 상대하는 거예요. 그 악마가 하는 말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혁명하는 사람이 한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어요. ‘무기를 든 자만이 빵을 얻을 수 있다.’ 19세기 중반, 1800년대 중반에 블랑키라는 프랑스 혁명가가 있었는데 파리코뮨(Paris Commune, 1871년)이라고, 노동자가 계급을 타파하기 위해서 혁명을 일으켰어요. 프랑스혁명(1789-1794년) 이후에 일어난 큰 혁명이 파리혁명이거든요. 19세기 노동자 혁명이에요.
블랑키라는 사람이 33년 동안 교도소 수감되고 맨날 데모만 하다가 잡힌 사람인데 이 사람이 말하길 가장 진실 된 것은 빵이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 가장 진실 된 것은 빵. 우리 한국 같으면 밥이 되겠죠. 다른 말로 하면 돈. 빵이 없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진실 된 것은 없어요.
그럼 제가 아까 처음부터 강의한 것 한번 생각해보세요. 인간들이 뭘 하느냐. 나에게 있어서 가장 진실 된 것. 이건 어떤 반론도 제기될 수 없는 가장 진실 된 것을 찾는 거예요. 그게 본인한테는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확실한 거니까. 나한테는 빵이 필요하다. 자, 그다음부터는 빵을 얻기 위해서 노동을 하든지 뭘 하죠. 그럼 그게 뭐가 되겠어요? 환상이 되는 거예요. 그 논리를 인간들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빵이 필요하다. 그래서 빵을 얻고 싶다. 빵을 얻고 싶은 이게 왜 환상이냐? 인간의 철학과 과학을 아무리 동원해도 이게 환상인 이유를 몰라요. 그래서 정신분석 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환상은 분명한데 꼭 필요한 환상이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정신병 걸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해서 환상을 만들어내는 사람만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가? 다 이루었다, 이런 사람 있잖아요. 그거는 정신병자라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
가장 확실한 것, 인간들이 보기에 가장 확실한 것은 빵이 필요하다. 그런데 마태복음 4장에 주님의 확정된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누구 소리입니까? 사람의 소리가 아니요, 악마의 소리에요. 악마의 소리. 마귀의 소리인 거예요.
악마가 그 뒤에 시험할 때 보면 4장 6절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이 성경말씀을 악마는 문자적으로 해석한 거예요. 실제로 뛰어내리면 천사가 와서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해준다. 이게 문자적 해석인 거예요.
문자적 해석은 뭐냐. 살아있는 내가 나의 환상을 어떻게 달성하면서 행복하게 즐겁게 살아 있느냐, 그게 문자에요. 그런데 제가 아까 말했지만 영은 그런 나를 바위에 묶어놓고 주님께서 와가지고 그런 환상을 꿈꾸며 미쳐있는 우리의 모든 내장을 독수리가 와서 다 뜯어먹도록 하는 거예요. 먹히도록 되어버리면... 밧데리로 가는 전자제품에 밧데리 빼버리면 밧데리실 안이 텅텅 비죠. 내 속에 있는 나의 모든 것을 텅텅 비게 만드는 거예요. 껍데기만 남기는 거예요. 이게 영적 해석입니다.
이게 어느 정도로 놀라운 이야기냐 하면 엄마가 아이 목욕시킬 때 욕조에 따뜻한 물 받아서 하잖아요. 만약 욕조가 2층에 있고 2층에 창문이 있다면 따뜻한 물 받아놓고 ‘아기야, 목욕시켜 줄게’ 해놓고 발가벗은 애기를 2층 창문에 집어던져버리고 옷을 욕조에 담가서 목욕시키는 것, 이거 엽기적인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애야, 목욕 잘 하고 있지?’ 이건 영화화해도 괜찮아요. 공포영화, 호러물이에요, 호러물. 공포영화 아닙니까.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악마 너 나와, 호출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만약에 옷은 놔두고 애를 집어넣으면 엄마는 그다음부터 걱정과 염려가 됩니다. 애가 또 물이 식어버리면 감기 들지 않을까. 감기 들면 코로나 걸리겠지. 코로나 걸리면 걸렸다고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이래가지고 계속해서 논리구조로... 이거 다하면 또 숙제 시켜야지. 자꾸 환상과 환상을 계속해서 유발하는 그 바탕을 처치 안하고 그걸 없애는 것이 아니고 그 환상이 공포와 두려움과 걱정을 유발시키는 바탕을 벌벌 떨면서 쥐고 있는 거예요. 벌벌 떨면서.
자, p.217 창세기 8장 21절 다시 봅시다. 다시 읽지는 않겠습니다. 읽는 것도 지루해요. 여기 8장 21절에 보면 이미 결정 났어요. 결정 났는데 내가 사람 때문에 저주하지 않겠다는 말은 저주가 없다, 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저주하겠다. 그러니까 이것은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여분 없이 몽땅 다 태우는 거예요. 몽땅 다 태우고 빠져나올 사람은 빼돌리고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빠져나올 사람은 나중에 주님에 의해서 육은 놔두고 독수리 보내서 홀라당 내장 다 파먹어서 내 쪽에 있는 것을 주님 자기 쪽으로 전부다 옮겨놓는 거죠.
여러분들이 드라마 보면 직장생활 하다가 잘린다든지 퇴직한다든지 할 때 문구점에서 파는 나무상자 들고 이렇게 가죠. 가는 거 봤죠.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그거? 그거 진짜 해보고 싶어. 책상에서 소지품 꺼내서 들고 가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아담에 속한 것을 그리스도로 옮겨놓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전부다 들고 가는 거예요.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 이렇게 하시면서 그냥 들고 가는 거예요. 그리고 네가 갖고 있었던 옛날 너의 바탕은 기존의 잘못된 해석에 의해서 환상에 불과한데 그걸 실재라고 느꼈던 거기에 전부다 맡겨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말로 하는 것보다도 하고 있는 이 논문 자체가 다니엘 논문이니까 다니엘을 봅시다. 다니엘 3장 8절을 보면 거기에 단어 하나 나옵니다. 다니엘 3장은 다니엘 이야기가 아니고 다니엘의 세 친구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때 다니엘은 어디 출장 갔는지 안 보이고 다니엘 세 친구가 걸렸어요. 거기에 단어 하나 나옵니다. ‘참소’한다는 거예요, 참소.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고자질했다 또는 나쁜 의미로 고발하는 거예요. 좀 제거해줬으면 좋겠다. 요새 뉴스에 온통 거의 80-90%가 참소아닙니까. 옷값이 얼마냐, 브로치 값이 얼마고 진짜냐. 전부다 참소와 참소의 충돌. 그게 정치판 아닙니까.
다니엘 세 친구도 예외가 아니에요. 그들에게 진실로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권력이에요. 정치적 권력이죠. 이게 인간들로서는 그 출신이니까...... 그래서 그들이 왕한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상을 만들어서 나팔소리가 들릴 때 전부다 금 신상에 절하게 하도록 합시다. 그런데 그들이 유다 사람 다니엘 세 친구를 딱 주목하니까 절을 안했다 이 말이죠.
일종의 올무를 놓는 거예요. 이게 표적 계시에요, 표적 계시. 하나님의 이미 확정되고 결정된 그 뜻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 백성에게 모든 환경이 집중되도록 집약되도록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이렇게 보시면 다니엘이 이해가 확 됩니다. 다니엘 5장에 보면 벨사살 왕 앞에서 손가락이 나왔죠. 손가락이 나와서 글을 쓰죠. 글을 쓰는데 인간들의 문자적 이해로서는 그 글을 해독할 수가 없습니다. 표적 계시이기 때문에. 그래놓고 12절에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이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었음이라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드리리이다”
그러니까 모든 성경해석은 택한 백성만을 겨냥하게 만들어요. 이것이 계시의 주체가 되는데요. 택한 백성, 계시의 백성에게 말씀이 그들만 해석되도록 제대로 해석되도록 그렇게 만들어서 그들 주변에 비로소 저주가 현실화되게 하는 거예요.
아까 제가 강의하면서 환상이 있고 실재가 있다 했죠, 진짜 현실. 하나님께서는 이 환상을 저주로 바꾸고 실재를 복으로 바꾸시는 겁니다. 그렇게 보시고 다시 다니엘 3장 8절을 봅시다. 계속 다니엘 5장과 3장을 왔다갔다 합니다. 다니엘 3장 8절을 보게 되면 참소를 했습니다.
참소를 하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그들을 아껴서 의도적으로 한번 더 기회를 줘요. 다른 사람한테는 안 주는 특혜를 줘요. 내 앞에서 한번 해봐라. 저 사람들이 너희들을 미워해서 하는 걸 내가 다 아니까 너희들은 너무 아까운 사람이니까 한번만 여기서 그들이 너희들을 고자질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하게 해 달라. 자, 여기서 내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을 불 테니까 한번 절해라. 아니, 절하는 게 뭐 어렵노? 절하면 내가 용서해줄게.
그런데 그들이 16절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주여,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맙시다. 특히 그 세 사람의 이름이 누가 지어준 이름이냐? 느부갓네살 자기들이 이름을 지었어요.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내 부하다, 내 종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들은 왕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다니엘 3장 같은 경우에는 저주가 먼저 찾아왔죠. 다니엘 세 친구한테 찾아왔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다음부터는 아시잖아요. 21절에 세 명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집어넣죠. 22절이 재밌잖아요.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붙든 사람을 태워 죽인 거예요. 소방수가 소방 장비 갖춰도 소용없어요, 얼마나 뜨겁던지.
죽고 난 뒤에 29절 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지금 29절에서 다니엘 세 친구가 불에서 멀쩡하게 나오니까 왕이 감탄해서 이런 조치를 내리는데 이 결과를 우리가 모른다 친다면 느부갓네살 이쪽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 길이 없었죠. 그런데 29절에 보니까 다니엘 세 친구의 하나님을 만약에 우습게 보면 거기서 저주가 생기는 거예요.
지금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 백성 성도에게 하는 활동이 이거에요. 표적해서 계시를 주는 거예요, 표적해서. 그래서 성도는 할 일이 많아요. 할 일이 많습니다. 본인은 아무것도 안 해요. 아무것도 안 하지만 아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어요. 주님의 확정된 것은 결코 인간이 훼손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훼손해봐야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 이 사실을 아는 거예요.
성도가 살아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악마 너 나와. 악마 너 나와. 인간에게 환상을 심어놓고 거기서 공포와 벌벌 떪과 절망에 빠뜨리고 허무에 빠지도록 조장한 악마, 너 나와. 그게 성도가 해야 될 일이라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도에게 표적해서 계시를 주는 겁니다.
그 계시가 뭐냐 하면 예상 밖의 일이에요. 성도 본인도 예상 밖의 일입니다. 네가 뭐 했지? 나 뭐 아무것도 안 했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예상 밖의 일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를 활용하기 위함이에요. 네가 살아있다, 가 아니라 주님이 살아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계시 받은 주체가 되는 거예요.
자, 다시 다니엘 6장에 보게 되면 다리오 왕 때에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모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말하되 다리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라의 모든 총리와 총독 등이 법을 만들고요. 법을 만들어서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거예요.
왜 이런 사람들이 왜 이런 법을 만들었습니까? 4절에 이유가 나와요. 또 뭡니까? 또 참소하는 거예요. 총리와 방백들이 다니엘을 고소(참소와 같은 뜻)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어떤 틈, 아무 허물이 없으므로 여기에 그들이 화가 난 겁니다.
그러니까 다니엘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니엘을 훼손하고 훼방하는 것은 곧 누구에 대한 훼손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셨습니까? 주님께 하나님께 훼손이 되도록 관계를 그렇게 설정하고 만든 거예요. 이것이 환경입니다. 이게 계시의 환경이에요.
우리가 주인공 아닙니다. 주님이 주인공이에요.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그냥 놀아날 뿐이에요. 이제 우리 성도가 할 일이 명확해졌죠? 우리를 낚시의 미끼로 삼는 거예요. 악마가 걸려들라고. 물론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슬아슬하죠. 그런데 주님께서 먼저 뭘 선언했습니까?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 이 말은 인간적이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받은 성령이 없고 신앙이 없다면 매사가 두렵고 무서운 일들만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예상 밖의 일이 자꾸 벌어지는 거예요. 내 환상대로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어요.
그래서 다니엘 6장에서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드디어 사자 굴에 집어넣었죠. 사자 굴에 집어넣어놓고 다리오 왕이 잠을 못 잤어요. 잘 있는가 싶어서. 그래서 아침 일찍 가보니까 다니엘이 멀쩡하거든요. 그다음에 다리오 왕이 한 명(命)이 24절에 나옵니다.
“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그 처자 알죠. 윤석열 같으면 김건희. 처자. “처자와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 이것이 저주에요. 이게 징조입니다. 인류 멸망의 징조에요. 이게 저주에요.
그래서 첫째 시간 끝나면서 두 번째 시간까지 이어지는 그런 문장 하나 쓰겠습니다. 사랑이 지나가면. 사랑이 지나가면 그다음에 무엇이 생긴다? 오늘 첫째 강의 주제, 무엇이 생깁니까? 비로소 저주가 생기고 심판이 생기고 멸망이 생깁니다. 사랑이 지나가면.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 몰라요. 10분 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