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20317b슥10장8절(불러 모음)-이 근호 목사
안양20220317b슥10장8절(불러 모음)-이 근호 목사
첫째시간에 한 것 중에서 복습 비슷한 거 한 번 해볼게요. 여러분, 어떨 때 증오가 생깁니까? 미움이 어떨 때 생기지요? 아예 지금까지 증오 한 번도 미워한 적 없는 사람 없지요. 그럼 어떨 때 증오와 미움이 생깁니까? 미움이라는 것은 나의 있음을 위태롭게 하는 거예요. 내가 나답게 있는 것을 위태롭게 하는 것. 또는 방해하는 것, 협박하는 것, 위협할 때 증오가 발생되는 거예요.
그럼 증오는 뭐냐, 일종의 방어태세, 방어지요. 방어. 밀어내는 거예요. 미는 것. 밀려면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의 판단과 선택이 여기에 이미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저거 나한테 유리한 것, 불리한 것. 유리한 것을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을 선이라고 하고요, 나한테 불리한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악이라고 하는 거예요. 요 선과 악을 합쳐서 모으면 뭐가 돼요? 선과 악을 합친 지식을 뭐라고 합니까? 선악지식.
선악지식은 창세기2장에 보면 어디서 나왔습니까? 인간이 뭘 따먹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따먹어서 선악을 알게 되었잖아요. 그럼 선악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이고, 과실 하나 도둑맞았구나!” 이걸로 끝나는 거예요? 아니면 뭔가 벌칙이 있습니까? 선악을 알게 되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죽지요.
죽음은 계속해서 우리의 존재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계속 우리가 나의 있음을 위태롭게 하는 이 작용을 뭐냐 하면, 죽음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하는 거예요. 지옥으로 갈 사람들은 바로 요런 식으로 나의 있음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내가 방어한다. 요런 사고방식 자체가 지옥으로 가는 사람의 특징이다, 이 말입니다. 이게 일관되잖아요. 일관.
그래서 나를 힘들게 했다고 미워하고, “니 때문에 내 인생 망했다.” 자식보고 “니는 왜 아빠, 엄마의 마음을 그렇게 못 헤아리느냐? 내가 그렇게 잔소리해도 왜 못 알아 듣느냐?” 이게 미움이잖아요. “니가 있으면서 내 목표와 목적이 지금 방해받고 있잖아. 니는 하여튼 나한테 도움이 안 돼.” 이게 뭐냐 하면 그런 마음자세가 지금 선악과 따먹은 티를 여과 없이 완전히 발산한 거예요. 폭발시킨 거예요. 그래서 이 전체를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니가 따 먹었으니까 죽이라고 하고, 악마는 뭐라고 합니까? 악마는 따먹었으니까 뭐가 됐다? 너가 이제 뭐가 됐다? 신. 니가 하나님이 되었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니까 악마 말을 들으면, 악마 말을 쉬운 말로 들으면 이거에요. “제발 나를 건드리지 말라.” 이겁니다. 모든 인간은 가만히 있어도 이것이 내부적으로 폭발하고 있어요. 제발 나를 건드리지 말라. 잔소리 하지 말라도 포함 돼요. 나를 건드리지 말라. 내 앞 길을 태클 걸지 말라. 이런 거요. Please. 제발 부탁한다. 지금 나를 건드리면 나에게서 무슨 행동할지 나도 종잡을 수 없어. 그 때 니 후회하지 말고 내 건드리지 말라.
첫 째 시간에 이걸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제 뭐냐 하면 존재. 또는 있음의 성격이지요. 이걸 아신다 치고 지우겠습니다. 제가 글을 쓸 테니까 이 글의 공통점을 맞춰보세요. 장미, 낙타, 풍경, 아파트, 사람, 탱크,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전부 있다는 거예요. 공통점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게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뭐냐,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거예요. 이걸 없음으로 바꾸는 거예요. 그냥 없음이 아니고 의미 없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평생을 살아도 똑같은 하루,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고 저녁에 잘 때까지 그걸 일년 같으면 365번, 10년, 100년까지 산다 칩시다. 살아도 아무 의미 없어요. 아무 의미도 없고 왜 사는지도 모르고 그냥 흘러가는 거예요. 시간 때우면서 그냥 가는 거예요. 의미 없어요. 이거 어떡할래요.
여러분들이 라는 그림 아십니까? 어떤 귀족집 아주머니. 머리 단발 비슷하게 해가지고 눈썹은 없어요. 눈만 있고. 웃는지 분간도 안 되는. 모나리자. 이 모나리자 그림을 제가 직접 봤거든요. 프랑스 르불 박물관에서 봤는데. 이 모나리자 볼 때에 묻습니다. 1번 모나리자 귀족 부인 이 아주머니를 본다. 아줌마 본다. 2번 풍경 본다. 몇 번이겠습니까? 풍경 봅니까? 모나리자 봅니까? 모나리자 보지요. 그만큼 이 풍경을 놓친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의미 있다고 하는 것만 선별적으로 뽑기 때문에 정작 자기만 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있는 것과 관계없다는 것은 전부 다 관계없는 걸로 칩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의미라는 것이 전부 다 본인에게만 의미 있지 억지에요. 쉽게 말해서 인생은 억지로 산다. 사람들은 전부 다 억지로 살아요. 그저 떠밀려서 살아요. 떠밀려서. 어떤 사람이 술을 안 좋아해요. 방송이나 술 먹고 음주운전하면 화를 내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우리나라에 술을 다 없애야지. 술 먹고 저렇게 음주운전하고 술 먹고 나쁜 짓하고 저러면 안 돼. 술을 강제로 못 마시게 해야 돼.” 라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촌에서 영덕에서 방울토마토를 재배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요즘 와서 걱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방울토마토가 판로가 없어요. 안 팔리는 거예요. 이유가 뭐겠습니까? 코로나 때문에 술집 영업을 안 하니까 안주로 방울토마토를 구입을 안 해버린 거예요. 결국 그 사람은 그냥 단편적으로 술 먹는 사람 싫다고 했지만, 술집이 없어버리면 지가 농사 짓는 방울토마토를 팔 수가 없어요.
이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류 되어 있고 얽혀 있는 겁니다. 분명히 나는 나의 의미를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의미를 챙기도록 세상이 그렇게 놔두지를 않아요. 세상 혼자 사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구출한다는 말은 나만 달랑 구출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자체를 뒤 배경 있잖아요. 모나리자만 구원한다면 주님께서 뒤 배경이 있잖아요. 그 배경을 발로 차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출이에요. 구원이에요. 니가 속해있는 세상과 떨어질 수 없는 그러한 팔자. 욕해도 가려가면서 욕해야 돼요. 고객이 있을 수가 있다고요. 고객이.
어떤 사람이 자장면 중국집을 하고 있는데 길가다가 옆에 사람이 옷을 약간 스쳤다고 해가지고 싸워보세요. 나, 지금 저 중국집에 밥 먹으러 가는데 당신 때문에 기분 나쁘다 할 때, 그 사람은 내가 주인인 걸 모를 때 지는 손님 하나 놓친 게 되지요. 그렇잖아요. 안 싸웠으면 우리 집에 와서 먹을 텐데.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의미만 챙겨버리면 이 세상에 그것은 바보같이 사는 거예요. 잘못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막대 자 아십니까. 막대 자인데 접혀서 죽 펴면 죽죽 펴지는. 요새는 잘 안 씁니다만 요새는 기계가지고 하지만, 막대 자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a′-a-A 공식이 있는데요. S를 빗금 쳤는데 우리말로 하면, (나는) a′(상상한다. 뭘 상상하느냐,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상상한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상상한다. 나는 아침에 눈만 뜨면 오늘 이렇게 되어야지.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상상하지요.) → a (상상하는데, 내가 상상한 그것이 a′라고 한 이유가 내가 분명히 상상한 것은 a′인데 실제로 내가 현실적으로 내가 골라요. 내가 상상한 것은 a가 되는 겁니다. 요게 내 상상선이에요.) A(그런데 A는 요게 바로 현실입니다. 현실 속에서는 이 a를 충족시키지 않고 같은 A지만, A는 다른 것을 나로 하여금 강요하게 되어있어요.
그럼 요건( → a′ → a)이 뭐냐 하면, 내가 생각했던 요걸 내가 상상한 이유는 그럴 때 나한테 의미가 있고 내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세상에 나와서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다른 걸로 내가 강요받는다. 강요받게 되지요. 이게 우리들의 무의미한 의미는 내가 시작했지만, 내가 원치 않는 의미로부터 내가 압박을 받고 협상을 요구받고 공격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 의미는 어디 가서 찾습니까? 맨날 손해 보는 것 같고, 맨날 나는 눌리는 것 같고, 좋은데서 쫓겨난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여기에 스가랴10장9절 봅시다. 그들을 여러 백성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이 살아서 그들의 자녀와 함께 돌아온다. 아까 제가 그림 그렸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흩어진 상황. 내가 그들을 애굽땅으로 돌아오게 하며 그들을 앗수르로부터 모으며, 길르앗과 레바논을 그들을 이끌어가리니 그들이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이리 되어있어요. 그러면 여기에 애굽땅, 앗수르, 길르앗땅, 레바논, 그들 속에 살면서 인간들은 역시 나의 의미를 찾는다 말이죠. 나의 의미를.
그런데 주님께서 뭘 이기느냐 하면, 애굽을 이긴다. 애굽을 이기고 자기 백성을 빼낸다는 것은 애굽을 이긴다는 뜻이에요. 그 다음에 앗수르라는 나라가 있잖아요. 앗수르를 빼낸다는 말은 앗수르를 이긴다는 거예요. 또 레바논을 이겨요. 레바논을 이긴다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이길 때 나와 주님 사이에 누가 이기느냐, 그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걸 묻고 싶어요.
주님이 이깁니까? 내가 이깁니까? 내가 이기면 나는 구원되지 못하고, 누가 이겨야 돼요? 주님이 나를 이겨야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주님한테 날마다 지면 되는 거예요. 나의 의미가 나한테 소중한 나의 의미가 주님의 의미한테 패배하면 비로소 거기서 진짜 의미를 우리가 찾을 수가 있는 겁니다. 날마다 지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남하고 시합 붙을 때, 그냥 빈손으로 나가요? 아니면 무기를 들고 나갑니까? 자기 무기 들고 나가겠지요. 자기가 무기 들고 싸우는데 저쪽에서 칼 들고 나오는데 나는 나무 칼 들고 나갔는데 저쪽에서 칼 들고 나의 나무 칼을 잘라버리면 나는 패배했잖아요. 어때요. 이게 기분 나쁩니까? 기분 좋습니까? 세상에서는 기분 나쁘지요. 앗수르, 레바논, 이런 데서 애굽에서는 기분 나쁘지요. 그런데 주님한테 내 무기가 무용지물이 된다면 이건 그동안 내가 추구했던 나의 의미를 이제는 놔버리는 것이 이게 좋다는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의 무기를 우리의 자랑거리를 전부 다 댕강 댕강 다 치워버리는 것.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주님이 찾아와가지고 주님이 방향을 거꾸로 와가지고, 나는 → a′ → a → A 로 나가는데, 주님은 거꾸로 오셔가지고 결국은 마지막 누구를 겨냥하느냐, 나를 주께서 이렇게 미사일을 쏴서 공격( ← a′ ← a ← A)을 해버리는 겁니다. 공격을 해버리면 나의 의미라는 것이 댕강하고 날아가 버리잖아요. 그러면 이게 바로 구원이 되는 거예요. 구속이 돼요. 구출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감사하고 모든 일에 고맙습니다. 가 되는 거예요. 나를 이렇게 만들어서 고맙습니다.
그래서 방금 요 그림을 문장으로 써보겠습니다. 이렇게 합니다. ‘나를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살려고 하지 마세요.’ 사회인으로. 이 땅에 사회인 되어가지고 아무 소용없습니다. 사회인이 되어가지고 남과 어울릴 때 무엇 된 양 내가 사람 사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그러나 그게 다 허망해요. 왜냐 하면 사회인이 되는 순간 주위에 나를 뜯어먹으려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거든요.
닥터 피시 하는 게 뭐냐 하면, 발을 담그면 내 각질 뜯어먹으려고 고기가 다 달려드는 것처럼 좀 산다, 좀 이렇게 밥 먹고 산다, 소문만 나도 와르르 달려듭니다. 가까운 일가친척부터 해가지고 멀리는 동창생 친구 다 달려듭니다. 온갖 소리 다해가면서 닥터 피시처럼 가만히 있어도 달려들어서 뜯어먹고 배부를 때까지 뜯어먹다가 자기 좋은 데로 다 나가버려요.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감사할 일이에요. 만약에 주님께서 안 찾아오게 되면 그건 감사가 아니고 뭐로 바뀐다고 했습니까? 증오로 바뀌는 거예요. 미움으로. “이것들이 친구라고 잘해줬는데 나는 니한테 최선을 다해서 잘해줬는데 니는 나에게 상처만 주는구나!” 라는 노래의 가사에 있어요. 나는 니한테 정성을 다해줬는데 니는 상처만 주는구나.
그래서 이렇게 되어버리면 감사가 되어버리면 우리한테는 상처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뭐 내 것이 있어야 상처가 되는데 내 것이 없는데 무슨 상처가 돼요. 상처를 받아도 주님이 받지 내가 내 것도 아닌데 주님의 것을 갖고 있고 내 것이 아닌데 내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마치 그동안 나를 내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났거든요.
사람이 상처를 받게 되면 그 후유증이 굉장히 심하게 돼요. 상처는 뭘 낳느냐 하면 보복과 복수심을 유발합니다. 상처를 받으면 그걸 보복과 복수하고 그래서 만회, 다시 원상회복하기를 노리게 돼요. 그래서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스트레스가 발생되고, 스트레스는 말기 암을 유발합니다. 말기 암. 말기 암은 면역성이 약화되어가지고 오미크론에 걸리면 남은 들 아픈데 혼자 아파요. 면역성이 약해가지고. 3차 맞아도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아픈 것도 전부 뭐냐 하면 자기가 상처 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 것이 있으면 상처를 받는데 애초부터 내 것은 없어요. 없는데 무슨 상처를 받아요. 왜 남하고 비교합니까. 비교 없으면 천국이고, 비교하면 지옥이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구원을 하실 때, 약속의 땅에 끌어 모을 때,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 뭐냐 하면, ‘존재 너머로 가지 말라.’ 주님이 계신데 흩어진 사람을 모으되 절대로 이 주님 너머로 넘어가지 말라. 예수 안으로 들어와야 되지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는 건 좋은데 예수님 재끼고 예수님 뒤에 뭐가 있노? 들어가지 말라. 이거지요.
연극 볼 때 연극세트장 뒤를 기웃거리는 꼬마아이 있잖아요. 서커스 할 때 애들 뒤에 뭐가 있나? 분장실에 들어가고 그런 짓 하지 말라, 는 말이죠. 만약에 예수님 뒤로 넘어가게 되면 여기는 나의 의미가 살아있고, 나의 의미가 살아있으면 이건 스트레스 받습니다. 소위 상처를 받고 내 뜻대로 안 된다는 데서 울분을 터트립니다.
11절 봅시다. “내가 그들이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규(권세)가 없어지리라” 애굽나라의 경계선 자체가 존재 의미 자체가 앗수르의 의미 자체가 나일강의 그 자체가 모조리 전부 다 없어진다 이 말이에요.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부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있음은 누구만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존재만 있음이 되고, 나머지는 전부 다 실은 있어도 없는 셈이 되는 겁니다.
인생을 백년 살아도 백년 살았다 하지만, 백년 살고 돌아가실 때에 백년 살았던 기억도 날아가 버려요. 처음부터 인생은 없었던 거예요. 죽을 때 되게 되면 아~ 내가 살아온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죽는 이 순간만 있지 그 전 것은 백 살 때 죽는다면 99살도, 97살 때 한 번 찾아보세요. 없어요. 인생은 원래 없는 거예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초와 같아요. 초가 타면 어떻게 됩니까. 초가 이렇게 길게 있다가 없어지고 마지막 농만 있고, 이렇게 초만 까닥 까닥 있다면 이 모든 옆에 있던 거 어디 갔습니까. 없지요. 이걸 누가 하느냐, 시간이 하는 거예요. 시간은 인간을 없애는 일을 하기 위해서 시간이 있는 겁니다. 모든 걸 없애는 거예요.
다 없어져도 누구만 있습니까? 우리 주님만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없어지면서 주님과 관계를 맺으라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겁니다. 니가 없어지는 자리에서 영원토록 안 없어지는 자리로 옮겨 주는 것. 이게 바로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목숨의 한계와 대비해서 영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생. 영원히 사는 것. 이제는 없어짐이 없는 것. 없어짐 자체가 이제는 남의 이야기가 되고요, 남의 이야기가 되는데 왜냐 하면 이 존재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예수님이 영원하다면 그 안에 우리도 영원한 거예요. 예수님이 영원하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아까 ‘육의 번성’이라 했지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영체의 번성’. 예수님의 몸의 부활 번성이라고 대비할 수가 있습니다.
나의 번성이 아니고 주님의 몸의 번성. 자기 백성들을 끌어 모으는 그 번성을 주께서는 하는 겁니다. 들어보니까 전혀 어렵지 않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들의 고집 있잖아요. “나의 의미, 나는 무조건 살아야 돼.” 이거 하고 하나님의 고집이 있다고요. 하나님은 모든 것은 내 백성 만드는데 나는 지치지 않는다. 나는 양보 없다. 그것이 정면으로 이렇게 같이 마주해서 역사를 이어온 유일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리고 지금 스가랴를 보고 있는데, 스가랴는 누구 민족 이야기이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 이야기에요.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 다시 흩어 모으리라. 그런데 요 이스라엘이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신약이 되게 되면 이런 이스라엘 말고 진짜 마지막 이스라엘. 전체 이스라엘을 바로 요 원칙대로 구원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11장 넘어가기 전에 방금 했던 것을 요약하게 되면.
주님께서는 휘파람을 불어서 자기 백성을 한 곳에 모은다. 그 때 나라는 것은 사라지고 어디에 합류하느냐, 우리에 합류한다. 기억나시지요. 기억이 나서 그들을 한 장소에 모으는 거예요. 한 장소에 모을 때 구원 받은 사람끼리 모으는 게 아니고, 그 안에 본드처럼 하나를 결속시키는 어떤 한 분이 중심으로 모아지는 거예요. 그 분이 누구냐 주의 이름으로 그들을 모으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빠져버리면 우리가 안돼요. 그냥 친목 모임이 되지, 우리가 안돼요. 주님 이름으로 모여야 돼요. 내 이름으로 모이면 안 됩니다.
얼마 전에 우리 고등학교 동창생을 제가 거의 안 만나는데 연락이 왔어요. 몇몇 친구들한테 만나자고. 만나가지고 미나리에다가 요새 팔공산 미나리 유명하거든요. 미나리에다가 삼겹살 구워 먹는 게 그게 세팅이 되어있어요. 대구 사람들. 미나리 삼겹살 구워 먹자고 하는데 그렇게 카톡에서 모이자 하는 거예요. 4월2일날 되느냐, 안되느냐, 보고 싶어 한다. 그때 동창회 모였다 칩시다. 그거 누가 불렀지요? 그 모임이 누가 불렀어요? 그건 아무도 부른 사람 없어요. 본인들이 선택한 거예요. 나도 얼굴 보고 싶다. 결심하면 모으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교회 갔을 때 모였잖아요. 누가 불렀습니까? 누가 불렀지요? 주님이 불렀습니까? 아니면 본인이 교회 가서 뭔가 자기한테 이익이 될까 싶어서 간 거예요? 본인의 결심이었습니까? 누가 불러서 간 거죠? 동창회하고 교회하고 오늘 본문 주께서 불러 주심하고 차이점을 한 번 이야기해 보세요.
동창회, 교회를 같이 보는 거예요. 동창회 미나리 삼겹살 먹으러 모였다. 모이자고 이야기했지요. 그거보고 “그래, 결심했어. 모여서 한 번 보자.” 이거하고 교회에서 모이자. 교회 모이라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꿈에 교회오라고 모이자고 했어요. 누가 오라고 한 거예요? 교회조직에서 이야기한 거죠. 교인이라면 집사라면 적어도 11시 본 예배는 재방 말고 본방. 본방사수. 11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교인의 책무요, 임무다,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법이고, 그게 규례지요. 그러면 법은 내가 지키려면 지키고, 안 지키려면 어떻게? 안 지킬 수 있잖아요. 인간의 자율성이 그대로 살아 있지요.
그러면 제일 마지막에 주님의 몸으로 모일 때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모이면 모이고 말면 말고 그렇게 되는 겁니까? 주님의 모임은 모일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 그가 서울에 있든, 목포에 있든, 대구에 있든 어디에 있든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에 있음 자체가 주님 안에서 모여 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님께서의 모임이에요.
니가 독일가든지 미국가든지 북극에 가든지 우크라이나 전쟁하러 가든지 어디를 가도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왜 우리가 되게 했기 때문에. 우리. 영어로 We지요. 우리가 되게 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집구석에 가만히 있어도 우리가 돼요.
여기 교회에 몇일 안 나오면요, 안면 바쳐요. 눈치 바치고. 목사 만나면 괜히 변명하고 싶어지고. 코로나 걸려서 온 나왔습니다. 시집간 딸이 애 데리고 와서 애들 놀아주느냐고 못 왔습니다. 오려고 했는데 차 밧데리가 나가서 고장 나서 못 갔습니다. 여러 가지 변명들 하는데 그 변명을 왜 늘어놓습니까. 그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게 뭐예요. 결국은 자기 방어잖아요. 자기 의로운 방어잖아요. 나 그렇게 막 되어먹은 사람 아니라고. 막 되먹은 사람 아니고 무식한 사람 아니라고. 누구 보고 자랑질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대상이 누굽니까? 목사에요? 장로에요? 누굽니까? 그들이 뭔데? 그들에게 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습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인간이 뭔가 선택하게 되면 의식해야 되는 타인들이 그 순간 쫙 깔리는 것이 여러분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거예요. 내가 뭔가 변명하는 순간 변명을 들을 만한 사람들을 내가 무시하지 못한다는 그런 새로운 스트레스 받는 긴장된 관계가 또 스스로 자기가 만들어냈어요. 마치 촌에서 오래간만에 시어머니 올라온 것처럼. 촌에서 시어머니 와가지고 갑자기 주는대로 먹으면 되는데 “보자, 냉장고는?” 냉장고 열어보고, 부엌 열어보고, 설거지 상태, 청소 상태, “우리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니 까지게 와가지고 그래! 응? 이렇게 살림도 안 살고 내가 니 같은 여자 만난 걸 내가 처음부터 반대한 걸 알지?”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거기다가 김치 싸대기까지 날리고. 그리되면 뭐예요? 그 다음부터는 촌에서 따르릉~ 해가지고, “야, 야, 며느리야! 내가 다음달 2주 동안 내가 너희 집 갈게.” 갑자기 뭘 받습니까? 스트레스 받지요. 나의 영토 아닙니까.
그러니까 세상사는 게 왜 힘드냐 하면요, 힘든 이유가 시어머니 때문에 힘든 게 아니에요. 교회 목사 때문에 힘든 게 아니고. 내가 나의 의로움과 내가 얼마나 괜찮은 존재인가를 자꾸 떠벌여야 될 대상들을 내가 지금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자체가 본인을 스스로 힘들었다 말이지요. 그게 11절에 뭐냐, 그게 바로 앗수르의 교만입니다. 애굽의 규(권세) 규례. 법.
자, 교만. 앗수르. 여러분, 오늘 공부를 제대로 했는지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할 테니까 가만히 있으면 돼요. 앗수르는 이방나라입니다. 이방나라.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아는 거 생각하면 돼요. 이방나라는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안 계시지요. 하나님의 이름이 안 계시지요. 하나님 대신 뭐가 있습니까? 그들에게 신은 뭐가 있느냐 하면 우상이 있지요. 우상은 뭐가 없느냐 하나님에 직접 오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 대접해서 복 받는 게 우상이거든요.
왜냐 하면 아까 배웠지요. 선악이지요. 선악. 착하면 뭘 받고 복 받고, 악하면 뭘 받고. 벌 받는 것. 이런 관점이기 때문에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선악체제에 의해서 나한테 유리하도록 작용할 수 있기 위해서 세워 놓은 신, 하나님, 이게 바로 우상입니다. 우상은 내가 하기 나름이에요. 내가 다루기 나름이에요. 내가 뇌물 바치면 복주고 내가 삐지면 그냥 멍청이처럼 가만히 있고, 그러다가 아쉽다, 병 들었다 하면 기도하면 병 낫게 해주고, 그게 우상이거든요. 그 목적이 뭡니까? 우상은 자체적인 목적이 없어요. 내가 신을 찾는 목적은 나한테 있지, 신한테는 없어요. 내가 필요한 대로 이용해먹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이에요. 우상이라는 게.
저쪽을 이겨야 돼요. 같은 교회 집사를 이기기 위해서 최집사를 이기기 위해서, 갑자기 최집사가 나쁜 사람이 됐는데, 김집사가 최집사를 이기기 위해서 우리 애가 최집사보다 공부 잘하기 위해서 새벽기도 나가는 이유는 신은 내 열심에 대해서 호응하기 위해서 저 최집사 애보다 더 좋은 대학을 가게 해줄 때 내가 아낌없이 십일조 드릴 수 있는 용의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약속을 언약을 누가 만듭니까? 내가 뭘 만든다? 계약 요건을 내가 만들어서 신에게 그냥 앵겨주는 거예요. 나의 선약체계에 의해서. 누이 좋고 매부 좋다고. 이러면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지 않습니까. 내가 헌금하면 헌금해가지고 하늘나라 확장하게 되면 하나님도 좋을 거고. 나는 헌금했기 때문에 나는 복 받고 나도 좋고. 윈윈할 수 있잖아요. 이런 사고방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나라? 앗수르에요. 앗수르.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디서 벗어나게 한다? 이런 가짜 신으로부터 빼내주는 거예요. 가짜 신에서 빼내주는 거예요. 빼내고 보니까 앗수르가 뭐다? 앗수르가 교만했다.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이 세상에 교만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왜냐 우리가 없을 때는 교만 안한 거 같지만 우리가 없음의 자리에서 있음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좀 사람들이 가졌다 싶으면 교만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어요.
아까 그 작은 다이아몬드있지요. 다이아몬드가 현실에 부딪히게 되면 잠재되어 있던 나의 무지했던 모습이 교만한 자리에서 그게 발현이 되는 거예요. ‘아! 내가 이 정도로 시건방지게 사는 그런 성질을 갖고 있었구나!’ 내가 없을 때는 이게 발휘할 기회가 없었는데 내가 딱 좀 있어보니까 나보다 못난 건 완전히 밟아버리고 잘난 것엔 아부를 이렇게 잘할 줄 나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내가 이 정도로 돈에 미쳤고, 돈한테 끔쩍 못하는 존재인 것을 내가 어릴 때는 내가 상상도 못했지요. 이 정도 비굴하고 추잡스러운 존재인지를. 상상도 못했지요. 나는 나만 챙기는 이기주의자인걸.
그럼 우리가 이기주의자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기주의자를 못 벗어나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기주의자, 얍삽한 인간 채로 어디를 간다? 천국을 가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복된 겁니까. 뭘 알아야 고치지요. 내가 어떤 인간인 줄 알아야 내가 알아서 고치는데, 내가 모르는데 뭘 고쳐요. 내가 뭘 고칩니까? 어려운 사람 도와주면 그게 겸손이에요? 더러운 사람 오면 박대할 수밖에 없는데요.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모르고 나에 대해서 너무 모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우리는 자기를 착한 사람으로 자꾸 주장하는 경향들이 있어요. 착한 사람으로. 착한 사람 코스프레 한다 그러죠. 자꾸 선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주께서 우리보고 사람 되라고 한 이야기가 없어요. “야, 인간아! 인간처럼 살아라.” 이런 것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우상이 요구하는 거고. 그건 오늘날 교회가 요구하는 거죠. 당신이 병 아프고 못 사는 것은 당신이 저질이기 때문에, 당신이 당신을 안 고쳤기 때문에, 그런 벌을 받기 때문에, 징계를 받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고쳐보면 복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가 계속 사기를 쳐왔잖아요. 그 사기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고. 왜? 인간은 자기 잘난 것만 생각하니까 스스로 사기꾼에게 넘어가는 거예요.
주께서는 그런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의인이 아니에요. 뭡니까? 죄인을 원하고 있는 거예요. 이빨 아파서 치과에 갔는데, 치과의사가 “좀 아프실 겁니다.” 하고 딱 올려가지고 야무지게 딱 묶어놓고 이~ 하니까, 아야 아야! 하더니만 대번 치우고 내빼지요. 왜? 아프기 때문에. 교회가 좀 달래야 되는데. 교회가 진짜 복음을 전해보면 아프라고 도망 다 가버려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러면 큰 예배당 다 가버리면 예배당 어떻게 됩니까?’ 라고 생각하실텐데 감사하게도 복음 전해서 큰 예배당 된 적이 없어요. 그냥 집에서 서너명 모이지요. 복음 전해가지고는 절대로 예배당 커지지 않습니다. 가짜를 전해야 돼요. 마귀를 전해야 교회가 크게 돼요. 우상을 섬겨야 크게 되는 겁니다. 고객 만족이 되어야 고객이 오거든요.
앗수르는 이방나라입니다. 이방나라는 하나님이 달라요. 우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빼내줬다는 말은 이제는 그냥 죄인인 채로 못난 존재 자체로 주께서 이 자체로 부르신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할 것은 뭐냐, 내가 죄인인데 어느 정도로 깊이 관여했는가를 알아야 돼요. 내가 이 죄라는 게. 어줍잖게 지은 죄는 죄도 아니에요. 더 깊은 죄와 연류 되어 있어요. 모든 분야의 뿌리가 온 땅에 죄와 다 관여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무지하고 못났다는 것을 이미 구원받은 사람을 통해서 주께서는 그걸 계속해서 하게 하셔요. 그래서 여기 11절에 보면 앗수르의 교만은 낮아지겠고, 나중에 앗수르가 망합니다. 사람이 아주 큰 나라에 있을 때는 자기가 천년, 백년 갈 것 같지요. 나중에 망해버려요. 사람이 어떤 집안에 우리 집안은 어릴 때부터 아주 부잣집이라서 남들이 백년 먹을 것은 끄덕 없다. 넉넉하다 했을 때에 나중에 그 애가 고등학교 될 때에 집안에 보증 잘못 서가지고. 맨날 보증 잘못 섰데. 사업에 실패해가지고 집안이 홀라당 망해버리고 나는 공납금도 없어서 대학교도 못 나오고 내가 친히 노래 불러가지고 가수해야겠습니다. 이리 해가지고 남도 가요제 나가서 트로트 불러가지고 우승해가지고 아나운서 만나서 결혼하고. 사연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연들 보세요. 옛날에는 다 잘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잘 살을 때의 나와 자기가 집안 망했을 때의 나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본인이 달라졌지요. 잘 살 때는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대요. 자기는 대학교갈 때까지 돼지고기가 뭔지를 몰랐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소고기만 먹었기 때문에 돼지고기가 어떤 종류인지 몰랐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듣고 있던 다른 사람이 나는 고기라는 것을 지금까지 먹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있는 앗수르, 애굽, 이 모든 환경이 그 사람의 현재 지식을 결정합니다. 이걸 아까 처음에 이데올로기라 하는 거예요. 이데올로기. 이념이라 하는 거예요. 그 이념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고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냥 이 이념자체가 죄에요. 이제부터는 어떻게 사느냐 하면, 도대체 내 죄가 어디까지 뿌리가 있는가를 교회 다니면서 성경을 보면서 기도하면서 그 뿌리를 칡뿌리를 강제로 그걸 한 번 뽑아보세요. 도저히 우리 힘으로 못 고칩니다. 고칠 생각하지 마세요. 죄에서 어떻게 빠져나옵니까. 죄에서는 고쳐지지를 못해요. 죄 자체가 습관화 되어있기 때문에 절대로 고쳐지지 않는 거예요. 관행이라는 게 있잖아요. 관행. 그건 고쳐지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내가 온 것은 의사가 온 것은 병든 자를 위해서 왔다. 그냥 올 때도 병든 자. 와서도 병든 자. 병든 자가 되어야 의사 빛이 납니다. 주님만이 의사입니다. 빛이 나지요. 그게 진짜 하나님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갖고 있던 조그만 가방이라든지 책이라든지 우리의 건강이라든지 목숨, 이건 내가 어떻게 관리해서 노력해서 얻은 겁니까? 아니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거져 주신 은혜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은혜잖아요. 그걸 가지고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모든 것 하나 내 것은 없고 주께서 주신 선물로 여기는 것.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요걸 한 번 따져 봅시다. 나는 있는데 어떤 나다? 죄인이다. 다른 말로 나는 교만하다. 나는 저질이다. 저질보다 더 나쁜 게 있어요. 나는 추잡하다. 추잡스럽다. 이게 더 나쁜 거죠. 저질보다 더 나쁜 게 추잡스러운 거예요. 알랑 떨고 하는 거. 먹고 살려고. 이런 나. 이건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 태어나기를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다만 우리가 지금 모르는 것은 죄인의 그 깊이를 모르고요. 아직까지 살아있으니까. 죽을 때까지 살아있으니까. 교만에 더 교만할 가능성이 뭔지를 모르고 더 깊이 저질해야 될 것을 모르고, 추잡스럽다. 어느 정도로 추잡의 깊이를 아직 다 경험하지 못한 거예요.
나이가 70됐다면 80되게 되면 좀 더 70때보다 추잡스러움이 더 강도가 질이 노골적으로 되겠지요. 바로 이렇게 나를 계속 몰아가는 거예요. 누가? 주님의 용서가. 주님의 용서의 사죄의 피가, 은혜가, 나로 하여금 계속 몰아가니까 주님의 용서하심과 나의 수준과의 격차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이것이 뭐로 나오느냐 하면, 이것이 감사와 고마움으로 나온다 말이지요. 감사와 고마움으로. 어느 것 하나 고맙지 않은 게 없고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범사에 감사하라. 또 항상 기뻐하라. 고맙다고 늘 기도하는 것. 쉬지 않고 기도하라. 이것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니라. 만약에 우리가 여기서 더 저질스러워야 되는데 여기서 “그래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착해야지.” 이렇게 스톱이 되어버리면 여기서 만약에 스톱! 멈춰버리면 그 다음부터 무슨 일이 생기느냐 하면, 나보다 더 저질스러운 사람을 만날 때 자기가 졸지에 의인이 되어버려요. “아휴, 저런 인간 죽여야 돼. 어떻게 저것도 짐승이지 인간이야.” 주님이 나를 그렇게 본다는 것은 생각 못하고 본인이 본인보다 더 저질스러운 사람보고 지보다 못하다고 규정짓고 욕하는데 급급하지요.
그 말은 만약에 내가 이 사람보다 더 착하게 되면 또 어떤 스트레스가 기다리고 있어요.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저질인데 어떻게 저런 죄인이 대통령이 되고 나는 왜 이렇게 착한데 나는 0.7%차이로 왜 떨어지느냐, 국민 여러분 미안하고 내가 못났습니다. 백날 이야기해도 사람이 어떤 스톱이 되어 버리면 저질로 스톱이 되어버리면 나보다 더 못난 것은 묶어버리고 지보다 잘난 건 따로 묶어서 자기는 잘난 편에 속하다고 자부하고 그걸 우기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갑자기 뭐가 사라졌지요? 자기가 잘난 쪽이 되니까 갑자기 뭐가 날아가 버렸어요? 감사 날아갔지요. 고마움 날아갔지요. 하나님의 은혜 다 잊어버렸지요. 사는 게 박박하지요. 더 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스톱하다 보니까 지가 스트레스 받지요. 사는 게 힘들지요. 남하고 경쟁해서 안 지려하지요. 이기려 하지요. 지면 잠을 못 이루지요. 잠을 못 이루어서 아침에 일어나면 다크서클 다 끼지요. 그리고 뿔다구 나니까 탓을 남 탓 돌리지요. 말할 때 부드럽게 말이 안 나오고 강력하게 말이 나오지요.
“니가 뭔데 나를 힘들게 해. 니가 뭔데? 나는 나를 내 식대로 살고 싶은데 니가 뭔데 내 인생을 방해해. 태클을 걸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한테도 닦달내고. 집에 있는 애들한테도 닦달내고. 남편은 물론, 아내도 물론, 심지어 강아지한테도 발로 차고. 세상 모든 것이 나는 착한데 나는 훌륭한데 세상이 더러워가지고 세상이 나의 가치를 안 알아줘서 내가 사는 게 다 남 때문에 힘들다고. 그게 바로 아까 앗수르에서 뭡니까. 이야기한 너는 신이다. 너는 남한테 밀리면 안 돼. 이겨야 돼. 그게 앗수르고, 그게 애굽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애굽에서, 앗수르에서 무조건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선함이 아니고 피로, 행함이 아니라 피로, 우리를 이미 건져내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하나님 말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그걸 알게 된 것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