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20317a슥10장8절(불러 모음)-이 근호 목사
안양20220317a슥10장8절(불러 모음)-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10장8절부터 하겠습니다.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여기 구속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묶는다는 뜻이 아니고요, 반대말이에요. 어디에 묶였던 것을 풀어주는 겁니다. 007영화에 보면 자기의 본드 걸이 묶여있을 때 용감하게 들어가 가지고 그 묶여있던 자기 본드 걸을 구출해내잖아요. 그걸 구속이라 하는데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구출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구출한다. 같은 말입니다만 다른 말로 하면 탈출한다. 구출한다, 탈출한다, 뜻은 그 전에 묶여있었다는 것. 묶여있었다.
그래서 탈출과 구출에 성공한 사람 이게 구원이지요. 이 구원에 성공한 사람의 한결같은 일관된 고백이 뭐냐, 전에 내가 묶여있었다. 내가 전에 묶여 있었다. 그러니 묶여있었다는 식으로 자기의 과거의 형편을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뭐가 지금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까. 탈출했다는 그러한 감이 전혀 안 보이고 있지요. 구원은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탈출하는 거지. 내가 천국, 지옥, 천국, 지옥 어느 쪽을 선택할까, 이 문제가 아니고 탈출한 거예요.
만약에 묶여있다는 인식이 없어버리면 분명히 구원은 묶여있는 건데, 묶여 있는 인식이 없다는 말은 묶여있으면서 인간들은 뭐냐 하면 천국이냐, 지옥이냐 그건 내가 자율적으로 선택하겠다. 라는 의식이 계속 남아 있는 사람은 결국 이건 뭡니까. 여전히 묶여있는 사람이에요.
죽어서 지옥가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좋은데 가려고 하지요. 나는 부처 안 믿고 예수 믿기로 결정했다. 이 사람은 아직도 마귀한테 묶여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 거기서 나는 탈출해야 돼요. 내가 예수 믿는 거기에서. 내가 믿는다는 말은 내가 선택했다는 말이에요. 내가 잘 물건 하나를 보고도 그냥 안사잖아요. 요리 보고 따져서 그래! 결심했어. 오늘 이거 카드 긁는다. 긁어버린다 하고 사잖아요.
그것처럼 뭐 하나 나한테 유리하고 이익이 된다 싶으면 사람은 그걸 구매하기로 결심하잖아요. 그 구매하는 행위, 구입하는 행위, 그거나 교회 가서 예수 믿기로 손들고 나오는 행위, 동일한 행위에요. 전부다 이게 뭐냐, 자기 자율성이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자율성이. 그러면 거기서 뭐가 유발되느냐 하면 나의 선택의 가치, 또는 가치성, 역시 나는 뭐든지 선택을 잘해. 이런 거요. 나의 선택의 가치성입니다.
그래서 스가랴10장8절에는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이라는 말이 뭐냐 하면 너의 선택의 가치성이냐, 주님의 강제성의 가치성이냐, 이걸 놓고 경쟁하는 거예요. 경쟁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구출하고 구원한다는 것은 구출해 달라, 구원해 달라 요청에 부응하는 게 아니에요. 부응하는 게 아니고 여기에 뭐가 작용하느냐 하면, 요 강제성이 작용해야 돼요. 강제성.
제가 몇 주 전에 연거푸 이야기한 게 있어요. “아버지여, 내가 불타고 있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이미 고인이 된 아들이 시신을 뒀는데 그 시신에 촛불이 넘어져 가지고 그 화장장 전체가 장례식 전체가 불타고 있을 때에 분명히 죽어있는 아들이 꿈속에서 말을 하면서 “아버지여, 지금 내가 내 시신이 불타고 있는 거 보이지 않습니까? 왜 빨리 나를 깨워서 시신을 바깥으로 끄집어 내야지요. 왜? 이렇게 그냥 계십니까?” 하는 그런 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그 말은 시신이 스스로 앗! 뜨거워라. 해가지고 그 상황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그 우스갯말로 오징어를 연탄불에 구울 때 자꾸 신경을 써야 될 이유가 오징어가 뜨겁다고 지가 알아서 돌아 눕고 이런 거 없잖아요. 그렇지요? 구웠다 싶으면 뒤집어 줘야 오징어가 맛있게 굽힌다 말이지요. 이게 뭐냐 전부다 강제성이에요. 강제성. 그러면 주님은 휘파람 불었다 이 말입니다. 강제성이거든요. 주님의 구원은 강제성인데 우리의 구원은 나의 선택의 자율적 선택성이라면 나의 선택성 가치라는 것은 나의 가치가 그냥 살아있지요.
내 가치가 살아있어 버리면 누구 가치가 죽어버리느냐 모독 받느냐, 주님의 강제성의 선택의 가치가 이게 말살됩니다. 죽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겠지요. 주님의 자기 강제성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의 가치를 밟아버리겠습니까. 내가 이모저모 생각해서 예수 믿는 것이 나한테 좋다고 생각해서 나는 믿기로 했습니다. 하는 그것에 모든 의미를 묵사발을 만들어버리지요. 어디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
여기에 휘파람을 불어 그 다음에 그들을 그 다음에 무슨 말이냐 하면, 그들을 어떻게 한다 했습니까? 모은다. 되어있지요. 모은다. 자, 하나님이 우리를 끌어 모아요. 끌어 모으게 되면 개인 개인의 개별적인 감각은 날아가 버리고 한 곳으로 끌어 모았으니까 그들을 모았다는 말은 한 곳으로 집합시켰다 이 말아닙니까. 한 곳으로 모은 거예요. 모았을 때 그렇게 주님 앞에 온 사람들은 각자 물어보는 거예요. “너, 어떻게 왔어?” “나는 잠자고 있는데 주님께서 휘파람 불어서 왔어.” “그럼 너는?” “나도 휘파람 듣고 왔어.” “너는?”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여기에 있는 사람은 한결같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주님의 휘파람 소리 듣고 이곳에 온 거죠. 그게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있든 나이가 적든 직업이 있든 없든 한 달 수입이 오만원이냐, 십만원이냐, 상관없이 집이 빌라에 사느냐, 아파트에 사느냐, 상관없이 몸이 암에 걸렸느냐, 멀쩡하냐, 그런 것에 관계없이 뭐만 이야기해요? 휘파람만 이야기하겠지요. 휘파람.
휘파람이 북한 가요입니까. 휘파람이. 그 휘파람에 대해서 출애굽기 19장 4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휘파람이라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벌을 부를 때 그 양봉을 하면서 휘파람을 불어서 랩으로 빨리 집으로 와야지. 할 때 휘파람을 분 답니다. 그러니까 휘파람 분다는 것은 남의 벌이 아니라 내가 부는 양봉 주인은 자기 벌떼를 어느 정도 되어야 벌떼 숫자가 맞다고 사전에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 출애굽기19장 4절 누가 한 번 읽어볼까요.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제가 다시 한 번 읽어볼게요.
너희 애굽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그 다음에 짐승 하나 나오지요. 뭡니까? 어떻게 그 다음에 뭐가 나오지요? 독수리의 날개로 너희를 업어서 내게로 인도했다. 그러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의 남성의 숫자만 60만명이에요. 60만명을 날개로 실으려 하면 도대체 독수리 날개가 몇 평정도 되어야 돼요? 어마 어마해요.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나올 때 각자의 이성이나 판단력이 없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다 과거를 기억을 못하는 자들이 아니지요. 평소에 자기가 할 행동은 본인이 결정하고 판단해서 움직였던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나 이제부터 애굽에 나올 때 독수리 타고 나와야지. 이렇게 생각한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단 한 사람도 없지요. 단 한 사람도 생각 못한 방식으로 주께서는 구원하시는 거예요. 단 한 사람도. 그러니까 독수리 날개로 구원했다는 말은 그렇게 업혀서 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나는 사전에 그럴 줄 알았어. 라는 말을 할 사람은 그 중에 단 한 사람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를 천국 가는 사람이 일괄되게 이야기한다면 그 중에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피로 나 구원될 줄 알았지.” 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한 사람도. 그래야 이 자율성이 빠지는 거예요. 그래야 나의 판단의 가치가 날아가거든요. 요 19장 4절에 내용은 구원에 대해서 함축적으로 중요한 요소들로 요렇게 연결시켜 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게 지금 출애굽기19장4절에 함축적으로 다 나와 있어요. 그걸 제가 한 번 써볼게요.
이것과 오늘 스가랴10장8절 말씀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출애굽기19장4절에 중요한 단어 나열해볼게요. 애굽 나오지요. 뭐냐 하면 집단입니다. 애굽 집단이지요. 집단은 어려운 말로 이데올로기죠. 이데올로기. 이걸 집단 이성이라 해요. 집단적인 사고방식.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라 하는 것은 집단이성이거든요. 집단적인 이성. 그 애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그 이성에 대해서 전부 다 동의가 되어있는 이념을 이데올로기라 하는 거예요. 어떤 나라든 어떤 조직이든 어떤 가정이든 어떤 교회든 그 사람들이 한결같이 “오케이! 그래! 이게 우리의 사상이야!”라고 수긍했던 수긍한 거예요.
그럼 이데올로기는 쉽게 말해서 뭐냐 하면 여럿 생각을 하나로 합친 것. 이게 이데올로기라 하는 거예요. 우리말로 하면 이념이라 하는 거예요. 이념. 집단 이념. 집단 이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애굽나라에서 그들이 나왔다는 것은 애굽나라의 뜻이었다? 아니었다? 지금 제가 그걸 묻는 겁니다. 애굽나라에서 나올 때 애굽나라의 이념이었습니까? 이념이 아니었습니까? ‘애굽나라를 버리고 우리가 여기서 벗어나자.’ 하는 생각이 애굽나라에 살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요구조건이었어요? 아니었어요? 아니었어요. 특수한 거죠.
그럼 애굽나라는 뭐냐 하면 삶의 거처 아닙니까. 그들의 거처거든요. 출애굽기19장4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들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이스라엘이 된 게 아니고 그들이 어디에서 살던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애굽나라에 통일된 사고방식 안에서 그들은 그냥 그걸 삶의 거처로 살았던 거예요. 삶의 거처로. 이렇게 말을 어렵게 하는 것보다 쉽게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뭐냐 하면 현실의 삶이란 이거에요. ‘육의 번식 과정입니다.’ 육을 번식하는 거예요. 현실의 삶이란.
“왜 돈 버는 겁니까?” 물으면 “자식들하고 나하고 법 먹고 살아야지요.” 이렇게 하거든요. “왜 밥 먹고 살려고 합니까?” 하면 “내가 돈 안 벌면 자식들이 죽잖아요.” 그러면 자식들이 죽으면 어떤 점에서 손해가 납니까? 자식 죽으면 어떤 손해가 나지요? 번식이 안 되지요. 번식이 안 되는 게 그게 왜 화가 납니까? 라고 물으면 번식은 나의 육의 확장이거든요. 확장. 확대다 말이죠. 확대. 나의 영향력의 확대를 말하는 거예요. 육은 그냥 모든 것을 키우고 확산하고 확장하는 그 본능 때문에 인간은 돈을 버는 겁니다.
그리고 돈을 벌고 어제 수요설교에서 한 것처럼 돈을 벌고 나의 확장과 관련해서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현실세계에서는 없습니다. 돈이 있어야 번식이 수월하니까요. 내 확장이 수월하니까요. 이게 뭐냐 하면 애굽나라에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요, 화초를 키운다든지 그 모든 일. 제가 아는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 있는데 이라는 게 있어요. 레미제라블이라는 원래 뜻이 있고요. 우리나라에 올 때 장발장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여러분들이 그 내용을 아신다 치고 제가 질문을 할 테니까 한 번 답변해 보세요.
장발장이라는 그 소설에 보면 빵조각 훔쳤다고 5년 징역 받아가지고 아주 무서운 감옥에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 장발장이라는 사람이. 그래서 네 번 탈옥해가지고 총19년을 사는데. 출석 후에 어떤 주교가 그 사람을 받아줘 가지고 그 사람한테 살다가 자기가 스스로 독립하겠다고 은그릇을 훔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훔쳐 나오다가 하필 타이밍 맞춰서 경찰한테 걸려가지고 주교한테 “당신 물건 훔쳤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 유명한 대목이 나오지요. 주교가 하는 말이 “아이고, 이 사람아! 이것도 가지고 가야지. 왜 안 가지고 갔어?” 하고 은촛대까지 줬습니다. 여러분 젊을 때 읽었던 기억납니까. 그 소설 기억납니까.
여러분, 이 책의 주제가 여러 가지 많이 있어요. 그래서 나중에 시장이 되어가지고 형사하고 여러 가지 있어요. 하지만, 모든 걸 희생하고 이렇게 장발장은 그렇게 남을 희생하고 퍼주는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우리는 본받자. 그게 주제가 되는데 이게 애굽나라에 장발장 소설이 있다고 칩시다. 원래 있고요. 프랑스 이야기잖아요. 그럼 애굽나라잖아요. 애굽나라에서 그 장발장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유명하게 된 것은 이게 뭐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딱 하나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은촛대가 있다. 있음이지요. 감옥 있음이지요. 장발장 있음이지요. 주교 있음이지요. 장발장 추적하는 있음이지요. 모든 게 있음이잖아요. 모든 게. 애굽나라는 뭐로 구성되어있어요? 있음과 있음으로 구성되어있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애굽나라에서 빠져나온다는 것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있음의 세계가 아니라 있음의 세계에 길들여진 우리가 있음이 없으면 죽는다는 우리를 무슨 세계로 만드느냐 하면 있음의 반대가 뭐겠어요? 없음으로 빼돌리는 거예요. 없음으로. 이게 구원입니다. 이 세상이 있는데 지구가 있는데 여기에 신약성경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요한복음12장도 그렇게, 요한복음1장도 그렇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세계에 오셨지요. 오셔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했어요. 떠난다. 자, 떠난다. 유대인들이 어디로 떠나지?
자, 주님은 떠난다고 이야기했어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예수님이 어디로 떠납니까? 유대인들은 ‘저 사람이 죽으러 가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 유대인 생각과는 달리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떠난다 할 때에 어디로 떠나는 걸로 여러분은 이해하고 있습니까? 어디로 떠나느냐 하면 아버지께로 떠나는 거예요. 아버지께로. 요한복음에서 아버지께로 가는 거예요. 그럼 아버지가 그 시대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지구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여호와는 인간들이 지어낸 기호에요. 어려운 말로 기표라 하는데. 그냥 기호에요. 그걸 상징이라 해요. 상징.
왜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닌 이유는 그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여기 있음. 내가 있음과 관련돼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이 가짜가 되는 겁니다. 구원은 있음에서 벗어나서 없음이 되는 거예요. 있는 내가 구원받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내가 상상도 못한 내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저것은 내가 아니라고 여기는 그것을 구원하시거든요. 우리는 내 이름으로 살잖아요. 그렇죠. 우리는 내 이름으로 살기 때문에 구원 받더라도 내가 내 이름으로 사는 현재 내가 천국가야 된다고 고집부리면서 교회 나간다 말이죠.
그러나 정작 주님께서 구원하신 것은 나의 있음과 내가 구원받고 천국 가있는 상상되는 천국 가서 주와 함께 있는 그 상상되는 나 사이에 무엇이 이게 절단 되어 있느냐 하면 그렇게 상상하는 나. 나가 도중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걸 제거해 버립니다. 죽어라 인간아! 제거해 버려요. 구원받고자 나를 제거해 버린다고요. 여러분이 목제소에 가면 큰 통나무 제거하잖아요. 자르잖아요. 자를 때 전기톱으로 자르지요. 그러면 두 동강 나지 않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007 살인 영화 보면 007이 위기에 있어서 전기톱에 잘릴 위기에 있는 그 장면이 나와요.
그림으로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피라미드를 두 개 그리겠습니다. 피라미드를 두 개 그리면 하나의 작은 다이아몬드가 돼요.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를 자르겠습니다. 요 잘라 낸 요 판.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입니다. 현실이고, 하나의 다이아몬드를 두 개의 피라미드로 잘라내요. 그러면 밑에 있는 피라미드는 잠재적, 판으로 잘라진 위에 있는 피라미드는 현실이고, 현실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 밑에는 숨어있는 것.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지요. 이걸 도중에 현실이 잘라버려요. 그럼 이 현실적이라는 말은 추상적, 이상적, 상상한 것. 이상적으로 상상한 것. 나는 이렇게 되고 싶어. 밑에 있는 피라미드는 자기 자신은 여기에 대해서는 무지. 모르는 겁니다.
내가 뭔가 되고 싶은데 내가 뭔가 현실적으로 성과를 가지고 싶은데 회사 부장에서 임원진 된다든지 성공하고 싶은데 정작 밑에 숨어있는, 빙산이라 합니다. 물에 떠 있는 것. 북극에 얼음에 떠 있는 산. 빙산의 아래쪽 물속에 뭐가 있는지는 이 나는 본인이 몰라요. 내가 과장에서 부장되는 그걸로 목표했지 부장되는 그 날부터 내가 갑자기 말기 암이라는 사실을 본인은 알아요? 몰라요? 모르지요. 부장되어서 좋다고 했는데 앞으로 살날은 6개월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런 거요. 모르는 겁니다.
이걸 모르면서 대칭적으로 점점 더 높은 곳으로 가는 거예요. 계속 이게 피라미드니까 끝이 어떻습니까? 뾰족하잖아요. 니나 나나 다 하는 거 말고. 우러러 볼 수 있는 그 최고 정점을 향하여 인간은 욕망은 멈추지 않고 올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현실은 우리의 뜻을 계속 잘라주는 거예요. 니 주제파악이나 해라. 니 실력감이 돼? 잘라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현실을 바라보면서 내 뜻대로 하라고 뭘 하느냐 하면 이 현실을 사랑하게 되는데 실제에서 결과는 뭐냐 하면 사랑이 뭐로 변화느냐 증오로 변하는 거예요. 세상은 매사가 내 뜻대로 안 해주는 이 더러운 세상. 본인이 그 감량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못하고 전부 다 내가 내 원대로 안 되는 것은 전부 다 남 탓이고, 세상 탓이라고 그렇게 비난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원인은 숨어있는 어두운 자신의 무지 때문에 발생되는 거예요. 무지함. 이게 전체가 바로 현실이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아까 이야기한 애굽이에요.
지금 스가랴10장8절하면서 내가 무슨 이야기하면서 여기까지 왔느냐 하면 휘파람으로 불러낸다는 거예요. 그 휘파람 불러낼 때, 휘파람으로 불러낸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게 현실적으로 나잖아요. 나.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나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고 나는 구원되지 못하고 나는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나가 우리로 가야 돼요. 나가 우리로 바뀌면서 구원이 된다고요.
나의 구원을 원했는데 주께서는 나의 구원은 애초부터 나의 구원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이 있어요.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주기도문에 보면 하늘에 계신 무슨 아버지? 나의 아버지가 아니지요. 무슨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누구만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의 대표자. 우리의 대표자만 나를 쓸 수 있어요. 그 분이 누굽니까? 그 분이 바로 주님이다 말이지요. 주님만이 아버지로부터 나라는 것을 유일하게 인정받은 거예요. 요단강 세례 받을 때 이는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유일하게 나라고 인정받고 나머지는 인정받지를 못한 겁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는 숨어계시니까요.
숨어계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겁니다. 숨어있다는 말은 들키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어떤 인간의 지혜와 천기에도 진짜 하나님은 자기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고 감추는데 성공하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만 오직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아니라 누구를 통해서만? 예수님을 통해서만 아버지라는 자격으로 나타나요. 아버지. 누구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니에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만 아버지가 돼요. 우리 아버지 아닙니다. 만들어줬다고 아버지 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휘파람 불지 않고, 독수리 날개를 동원하지 않았더라면 뭐가 없다? 구원이라는 게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믿을까, 부처님 믿을까, 선택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휘파람을 불러줘야 돼요. 휘파람 소리를 들어야 되고. 독수리 날개로 업어야 돼요.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독수리 날개로 구원된 아이디어가 이렇게 우리라고 집합된 그런 사람들 속에 어느 누구도 꿈꿔본 적 있습니까? 없지요. 걸어서 구원한다. 보따리 얽어매고 나온다. 그런 건 할 수 있는데 독수리 날개 업어서 애굽에서 나온다는 아이디어는 인간치고 그 누구도 거기서 이야기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휘파람 부는 거와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 원인이 이미 우리에게 나 여기 있음 자체가 지금 구원을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나 여기 있는데 나 여기 있도록 그동안 나를 잘 관리하고 인생을 이만큼 살도록 애썼는데 이게 나의 구원에도 뭔가 보탬이 되는 아이디어가 제공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나를 관리한 것처럼 뭔가 시켜만 주이소. 제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인생 이만큼 살도록 애썼는데 까짓 것 구원 받는 것도 애쓰면 들어갈 수 있겠지요. 내가 여기 있다는 이유 때문에 계속 궁시렁 궁시렁 다른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그럼 휘파람 불어서 나온 것은 다 빠지지요. 독수리 날개 업은 거 다 빠지지요.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내가 착실해서 구원 받는 것은 그런 구원이란 없습니다. 애초에 성경에서는 그런 구원 없어요. 아니 구원 자체가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는 아예 없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지,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옆집에 어떤 아저씨가 있는데, 아저씨보고 “아저씨! 요즘 왜 늦게 오십니까?” 아저씨 뭐라고 합니까. “니 누군데?” “여기 101동 아닙니까?” “101동은 네 집이고 나는 102동이야.” 이게 남의 아버지 가지고 왜 그리 닦달 내요. 말 안되지요. 예수님의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에요. 그리고 예수님만의 아버지에요. 우리라는 것은 없습니다. 없는데, 예수님께서 호출하게 되면 여기서 없던 나. 그냥 죽을 때까지 나만 챙기는 그들이 나가 해체되고 그게 “헤쳐 모여!” 나가 해체되고 우리 안에 다시 모이게 돼요. 이산과 집산. 뿌리 채 다 조각 조각나고 그게 다시 집산, 모아지는 것.
나는 죽고 우리로 모으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우리입니다. 내가 아니에요. 그러면 그 우리는 어디서 나왔다 했습니까. 구원받은 나, 너, 너가 우리가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될 때는 접착제가 있어야 돼요. 우리끼리 모여서 교회 만든다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런 건 없어요. 접착제가 뭐냐 하면 유일하게 나,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 들어야 이게 우리가 돼요. 예수님이 빠진 우리는 성립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빠지면 안 되거든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러 줄 때 너가 알아서 나한테 오라가 아니라 예수님이 불러줘요. 휘파람 불 때.
그걸 신약에서는 뭐냐 하면 이걸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의 영향력 또는 작용이라 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게 되면 나의 이름은 주의 이름 앞에 죽습니다. 의미 없이 이건 박살나야 돼요. 깨져버립니다. 이제는 우리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고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이름으로 사는 새로운 존재로 픽업당하지요. 픽업당한다고요. 그래서 그동안 내 이름을 위해서 내 명예를 사는 것은 내가 자율성으로 선택해서 결심해서 오기로 버티고 노력해서 애써서 힘들여서 내 인생을 나답게 살아왔지만 이제 일체 그런 것은 인정하지 않고 주님이 애쓰고, 주님이 노력하시고, 주님이 희생하시고, 그것만 소복이 우리한테 차게 될 때 그게 주의 이름으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19장4절에 보게 되면 내가 애굽사람에게 어떻게 행했음과 애굽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애굽에 살던 사람은 그 애굽에서 빠져 나올 생각이 있다? 없다? 전혀 없습니다. 그 히브리인들이 출애굽하겠다는 아이디어를 히브리인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은 나라에서 나가게 기도한 게 아니고 압제가 너무 심하니까 좀 온순한 사람이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줘서 여기에서 내 육의 번식이 원활이 되도록만 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한 겁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의 번식인데, 우리의 뜻은 뭐냐, 나의 육신의 번식이에요. 인간이 태어나서 자기의 육의 번식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탈출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나지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 생존에 유리하게 행동하는 게 인간인데 어떻게 자기 육을 파괴해요. 안되지요.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자기 있음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멀쩡하니 있는데 없음이 되고, 죽음이 되고, 이건 내가 가장 원치 않는 바지요. 내가 원하지 않는 사항이다, 이 말이지요.
현재 멀쩡하게 살아있는 나를 어떻게 더욱 더 멀쩡하게 달라고 해버리면 아까 한 이 피라미드에서 자꾸 위쪽의 뾰족한 곳에 출세와 성공을 지향해 버리면 이건 점점 더 자기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점점 더 멀어지지요. 실제 현실과 점점 멀어지는 거예요. 이게. 실제와. 그래서 이런 사람이 교회가면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하나님 좀 도와 주이소.” 이런 식이에요. 그냥 묻지 말고 그냥 도와 달라는 거예요. 도와주시고, 우리 가정 잘 되게 해주시고, 화목하게 해주시고, 내 아들 취직 잘 되게 해주시고, 우리 딸 빨리 시집가게 해주시고, 자꾸 자기 육의 확장이에요.
주께서 묻지요. “왜 그래야 되는데?” 교회는 이야기합니다. “주님, 저 몰라요? 저? 새벽 기도한 저 모릅니까?” 이런다고요. 주님하고 사적으로 아는 사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를 총체적으로 관리합니다. 개별적으로 나를 상대 안 해요. 예수님이 중심이 된 그 우리만 상대한다고요. 그럼 나머지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요건 여러분에게 질문 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나머지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나머지라는 것은, 애굽에서 빼기 히브리인들 나오면 이게 뭐냐 하면 애굽의 나머지가 되겠지요. (애굽-히브리인들=애굽의 나머지)이건 산수 중에 산수 아닙니까. 이거 어려운 거 아니지요.
애굽에서 히브리인들 빠져버리면 애굽에 있었잖아요. 애굽에 있는데 히브리인들 빠져버리면 히브리인들은 그들에게 없음이 되지요. 애굽에서 빠졌으니까 없음이 되지요. 그러면 현재 나머지는 여전히 있음이 되겠지요. 있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조치했느냐 이 말입니다. 제 질문이. 히브리인들 빠지고 난 뒤에 애굽사람들 어떻게 했습니까? 재앙을 내린 거죠. 그리고 애굽의 군사들은 홍해에서 어떻게 죽었습니까? 애굽의 군사들은 홍해를 무사히 건너왔습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물에 다 빠져 죽었지요. 저주지요. 죽음이지요. 이걸 가지고 약속의 땅에서는 진멸이라. 하나 남김없이 다 죽이는 겁니다. 이게 신약에 오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지옥이지요.
그래서 애굽사람들은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모세와 아론이 찾아오지 않았을 때에는 그들이 정상적인 인간다운 삶을 산다고 그렇게 오해를 한 거예요. 우리 사는 것은 아무 하자가 없고 나라가 제대로 잘 굴러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백성 히브리인들을 데려가 보니까 이 나머지는 무슨 꼴이 났습니까? 진멸당하고 전부 다 지옥 가는 꼴이 난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물어보면 답변은 맨날 내가 하고. 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갈라질 때 하나님의 방법은 뭐였습니까? 어떻게 구분 짓고 어떻게 갈라 세웠습니까? 어린양의 피로. 그렇죠. 그거지요. 히브리 갈라질 때 열심하라, 기도하라 이런 거 했습니까? 헌금하라 그런 거 했습니까? 입구에 뭘 바르라 했습니까? 피 발라라 했지요. 왜 히브리인들의 열심과 충성, 봉사는 왜 안 받습니까? 둘 다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의 애굽의 이데올로기에 같이 살던 오직 자기의 육의 번식밖에 모르는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그런데 자기 피가 아니에요. 자식 피가 아니고 무슨 피? 외부에서 투입된 피. 어린 양의 피를 발라서 구분해 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의 피를 잡아라 한 게 아니고 사랑하는 이삭의 제물을 바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드러내듯이. 여기는 이 피라 하는 것은 흠 없는 어린양의 피가 들어가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이 구원받는 히브리인들이 흠이 있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이들이 흠이 있다는 말이에요.
흠 있는 자가 기도를 하던 흠이 있는 거고요. 흠 있는 자가 충성 봉사해도 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안 받습니다. 왜냐, 히브리인들이 하는 모든 그 기도나 요구사항은 오직 자기를 위해서 에요. 우리가 아니에요. 이 애굽사람하고 똑같아요. 자기의 육의 번성과 번창밖에 몰라요. 내 잘되는 것밖에 몰라요. 아무 생각 없어요. 그냥. 내 도와주면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라고 인정해 줄게. 어떤 흥정이나 거래에 나선 거예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뭘 했는지를 몰라요. 그냥. 그냥 자기 욕심과 욕망 외에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절에 가서 비는 거 하고 전부 다 똑같아요. 전부 다. 절인지, 교회인지, 성당인지, 다 마찬가지에요. 내 잘되게 해주면 좋은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건 애굽이에요. 애굽. 왜 그래야 되느냐 물으면 내가 여기 있잖아요. 있음이에요. 있음.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있음을 키우겠다는 겁니다. 주님은 없어졌는데 계속 있음만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있는 내가 내 욕구에 만족하기 위해서 있게 해 달라. 니가 뭘 했다고 요구를 해요. 뭘 잘 났다고 그런 요구를 합니까? 하나님을 무당하듯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스가랴10장8절 봅시다.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지요? 그들을 구출시켰다. 어디에서? 나밖에 모르는데서 구출한 거예요. 나에서 우리로 바뀌게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구속하였음이라. 그 다음 말이 뭐예요? 우리나라 말로 세자? 그들이. 바로 그들이 집단화 됐잖아요. 그들이. 이 그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전부 다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휘파람 불어서 우리가 구출되었다는 것을 동일하게 고백하는 거예요. 그 중에서는 내 힘으로 했다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다시 장발장이야기 해봅시다. 장발장에 은촛대가 있었다. 거기에 감옥이 있었다. 형사가 있었다. 주교가 있었다. 이 세상에 유명한 문학이라는 장발장에서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은 모든 게 뭐냐, 있음이에요. 있음. 있는데 착하게 살고, 있는데 괜찮은 인간이고, 있는데 복 받아서 잘 됐고, 전부 다 있음이라고요. 있음. 그럼 이 장발장이야기를 오늘날 교회하고 연관시켜 봅시다.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가 뭐예요. 전부 다 뭐예요. 있음이잖아요. 있음. 있음이 잘 될 거라고 이야기하지요.
민수기22장에 보면 선지자가 등장해요. 무슨 선지자냐 하면 발람 선지자가 등장해요. 민수기22장23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나귀를 타고 가는데 나귀가 말을 안 듣고 자기 길로 안가고 밭으로 막 들어가지요. 그럴 때 이 발람 선지자가 나귀를 어떻게 했습니까? 달랬습니까? 채찍질 했습니까? 때렸지요. 때릴 때에 28절에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이렇게 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말하는 사람이 누구에요? 나귀입니다. 나귀가 말을 하는 거예요. 무엇을 꾸짖기 위해서? 발람 선지자를 꾸짖기 위해서. 이 말은 선지자는 누구 말을 들어야 돼요? 나귀는 누구 말을 듣습니까? 여호와의 말을 듣지요. 그럼 선지자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돼요? 본인의 의지에 따라야 됩니까? 아니면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야 됩니까? 여호와의 지시를 따라야 되겠지요. 나귀를 통해서 책망하는 거예요. 나귀를 통해서. 자기 뜻대로 안한다고 때리는 거예요. 그러나 이 나귀가 만약에 예수님이라면 여러분이 예수님을 얼마나 쥐어 팼겠어요. 바로 교회가 하는 일이 바로 그 일이에요. 예수님을 쥐어 패는 거예요. 왜 내 뜻대로 안되느냐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만하지요. 피 흘릴 만하지요.
모든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께서 죽으신 거예요. 전부 다 주님한테 달라고 하느냐, 지가 잘난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없앨 의향이 없습니다. 키울 의사만 있어요. 차라리 발람보다 김유신이 더 낫습니다. 김유신은 유연히 말을 타는데 말이 평소의 버릇대로 기생집으로 막 가는 거예요. 그 때 김유신 장군이 자기 말한테 무슨 행동을 했습니까? 칼을 들고 “이~ 내가 대선전의 김유신인 줄 아느냐, 이제는 대통령 당선자인데 이런 행동하면 안 되잖아.”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김유신의 말은 평소에 이럇! 하면 어디로 갔어요? 항상 기생집에 술 먹으러 간 거예요. 그러니까 김유신만 타면 어디로 갈까요? 개인택시처럼 그럴 필요 없어요.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기생집으로 가는 거예요. 김유신이 정신을 번쩍 차리고 니 같은 말은 더 이상 탈 필요 없다. 해가지고 죽여 버립니다.
따라서 제가 어제 이야기한 수요설교에서 인간은 자기를 배신해야 돼요. 내가 나의 목을 쳐버려야 돼요. 자기 욕심만 챙기는 나의 목을 치지 아니하면 그것은 지금 절에 온 겁니다. 교회에 온 게 아니고 점집에 온 거예요. 천국에 가는 나는 지금의 나가 아니에요. 목을 침을 당한 나에요. 유월절 어린양과 바꿔치기 한 거예요. 예수님이 유일한 나가 되고 그 예수님한테 휘파람 부름을 당한 거예요. 독수리 날개로 업어온 거예요. 따라서 내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다시 스가랴10장을 봅시다. 9절에 “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으려니와” 되어있지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각 나라, 주변 나라에 씨 뿌리듯이 뿌린 거예요. 어휘~ 어휘~ 하면서 씨를 뿌린 거예요. 그러니까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살던 거예요. 약속의 땅에. 약속의 땅에 갈릴리 바다 있고, 요단강 있고, 사해바다 있고, 지중해 있고. 위에는 레바논, 아래쪽에는 이집트. 그 중간지역 지금 팔레스타인 이 지역 현재 이스라엘 사는 이 지역이잖아요. 여기서 살던 사람을 주님께서는 여기에 분명히 사람이 살고 있었잖아요. 이스라엘이 살고 있었잖아요. 있음이지요. 있음을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각 나라로 앗수르, 바벨론, 북쪽은 앗수르, 남쪽은 바벨론, 그 당시 바벨론 나라가 어디까지 통치했느냐 하면 이집트까지 통치했거든요. 심지어 터키까지 통치했어요. 그러니까 바벨론 나라에 포로 잡힌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이집트로 가고 아라비아도 가고, 현재 이집트 밑에 있는 수단, 이디오피아, 거기에도 가고, 여기에 그리스도 가고 여기에 살아야 될 사람들이 다른 우상을 섬김으로서 온 나라에 다 흩어져 살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는 어때요? 그냥 무의 자리에요. 비워있는 자리가 되는 거예요. 바깥으로 다 흩어졌고요. 마치 씨앗 뿌리듯이 흩어진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곳에 오셔가지고 휘파람 불어가지고 흩어졌던 자기 백성을 바로 이 자리에 불러 모은다는 그 약속을 하고 있는 겁니다. 불러 모을 때에 어떤 사람을 불러 모으느냐 하면 우리가 이 자리에 살 만한 가치가 없었다,를 뼛속까지 이미 그걸 알고 난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이곳에 이 약속의 땅에 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에요. 안다는 말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나의 가치와 주님의 가치의 경쟁에서 누가 이겼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구원의 가치가 나의 생존, 나의 번식의 가치를 억눌러서 이겨버린 그런 사람들만 천국에 가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