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0장 17절 (탄로 난 악마) 220308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10장 17절 (탄로 난 악마) 220308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0장 1절.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그렇게 4절까지 보았습니다.
여기 칠십 인을 보낸다. 보내심의 그 반대가 4절에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보내심의 반대말은 소유성, 뭐를 갖고 있다는 거에요. 인간이 뭐를 갖고 있으면 내가 어딜 밖에 나가도 후딱 갖고 있는 그것이 소중해서 후딱 자기에게로 되돌아와요. 보내심이 성립이 안 됩니다.
모든 인간에게 보내심이라는 것이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내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것을 중심으로 해서 반경 아무리 멀리가도 다시 정들었던 그리고 소중한 나의 것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내가 잠시 떠나는 건 되지만 누구로 인하여 보내심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내가 나를 어디 다녀올까? 갔다 올까? 이것은 본인이 본인을 보내심이기 때문에 다시 본인 자리로 오기 때문에 이것은 진정한 보내심이라 할 수 없어요. 진정한 보내심이 성립될려면 내 것이 내 것으로 돌아오지 않는 방식으로 누군가에 의해서 보내져야 되겠지요.
그런데 그 보내심을 받을 때 “전대나 배낭이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이것은 상당히 청빈해보이죠. 가난해 보이잖아요. 그것은 새로운 나라의 원리를 보내심을 통해서 구성을 합니다. ‘원리 구성’. 이 사람들의 특징은 이 새로운 나라에 가격은 기존의 가치와 가격으로 셈할 수 없을 정도. 셈할 수 없을 정도.
기존의 갖고 있는 소유성을 가지고 갖고 있음을 가지고 새로운 나라의 가치를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런 뜻입니다. 그럼 새로운 나라, 영생의 나라에 가치, 가격은 뭐로 표현 하느냐? 빈손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빈손으로.
빈손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빈손으로 표현되면 어떤 점이 좋으냐 하면은 빈손이기 때문에 여기는 무엇이 성립되지 않느냐 하면은 이익 혹은 손실이 빈손한테는 여기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내가 이익을 봤다 손해 봤다 빈손한테는 할 소리가 아니지요.
아무 재산이 없는 어린아이 6개월이나 1년 된 어린아이. 돌 지난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자기 명의의 통장이라든지 부동산이 전혀 없잖아요. 재벌 같으면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 아이에게 네가 만약에 2021년도에 작년에 2월 달에 태어난 아이, 그러면 원래는 올해 3월달 되면 돌 막 지났잖아요.
그러면 아이에게 물어보는 거에요. 네가 1년 동안 인생을 살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이익을 봤고 얼마나 많은 손실을 봤느냐 물으면 그 아이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까까. 엄마.” 이럴 거에요. 손실과 이익은 어린아이한테는 전혀 해당이 안되지요. 어린아이한테는. 이익이냐 손해냐 하는 생각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거죠.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70명을 둘씩 짝 지어서 주님이 다닐 그 동네에 미리 이렇게 보낸다는 것은 특이한 인간들을 배후에서 주님이 조종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에요. 배후에서 주님이 조종한다. 그러면 이 칠십 인의 집단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새로운 나라의 원리, 원리 구성을 칠십 인의 집단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기존의 세상 말고.
그냥 보내심 자체로만 구성이 되는 나라. 내가 마음먹고 어디 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보내심 그것으로 그 나라의 빈손이라도 괜찮을 정도로 충족되는 것. 모든 요소가 충족이 돼요. 주님이 보냈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 새로운 나라에서는 더 필요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보내심’의 반대말은 뭐라고 했습니까? ‘소유성’이죠. 내가 내 것 갖고 있는 것. 소유성은 다시 누가 누굴 보낸 게 아니고 내 가진 것으로 이렇게 귀환하지만 보내심은 누군가에 의해서 보내졌기 때문에 결국은 나의 삶이란 그 속에 뭐만 가득 들어 있느냐 하면은 보내심의 취지로 가득한 거에요 취지로. 보내신 자의 보내신 뜻만 가득한 것. 이게 보냄을 받은 자의 배짱이죠. 전혀 꿀릴 게 없어요.
그래서 보냄을 받은 자는 뭐가 날라가느냐. ‘내 인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지요. 빈손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가져가기 때문에 이익이나 손실 같은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한 평생 회계, 계산해서 인생이 다 끝난 지점에서 나는 내 인생을 돌아보니까 나한테 얼마나 이익이 되었고 얼마나 손해가 되었느냐 그런 것을 따질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은 아무도 나를 보낸 적이 없다는 그것을 그냥 티를 내는 거에요. 그러면 이들이 따로 모여서 누구한테 가지 말고 산 같은데 칠십 인들 보내서 너희들끼리 살아라 이러면 될텐데 왜 칠십 인들 기존의 세상에 각처에 왜 둘 씩 해서 보내느냐. 그것은 바로 이게 오늘 강의에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요, ‘타인과 나를 교환시키기 위해서’. 타인과 나를 교환시키는 거에요.
주님이 보낼 때는 이미 보내기 전에 나는 기존 세계의 일원이에요. 구성원입니다. 우리는 그냥 진공 상태의 내가 아니라 이미 구성된 기존 세계의 일원으로서 한 사람으로서 이미 나 라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어요. 그때는 주님이 우리를 보내지 않을 때에요.
보내지 않을 때는 기존 세계 안에 들어있으면서 그 세계 안에 하나의 시민으로 살 뿐이에요. 그런데 보내심을 받아버리면 이것은 보낸 쪽이 기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분, 예수님에 의해서 보냈기 때문에 기존의 세계의 모든 세계는 전부 다 뭐냐 하면은 ‘타인’, 남이 돼요. ‘남’.
남이 되고 그 남 중에 내가 바로 그 기존 세계의 일원이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남이 되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남이 되는 거에요. 산 속에 도 닦는 게 아닙니다. 기존 세계에 나가서 정 들었던 내가 나 답게 살려고 애썼던 그 동네에 그 나하고 똑같은 나의 분신들, 나를 빼다 박은 나, 또는 그들을 닮고자 애썼던 나를 기존의 보내심의 나로 교환을 하는 과정을 몸소 체험케 하는 거에요.
그들은 소유 가지고 사는 보람을 느끼며 사는 반면에 우리는 주님의 보내심 가지고 버티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거에요. 그런 차이를 느끼게 하는 거에요. 이게 뭐냐? 교환이에요. ‘교환’. 전에 나였던 것을 전혀 예상 못한 새로운 나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걸 어디서 하느냐? 기존 세계 속에서 하는 거에요.
그것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아 놓고도 아직도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새삼스럽게 바꾸어라가 아니라 이미 바꿔진 것이 기존의 세상 속에 나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그걸 몸소 체험케 하는 거에요. 그래야 체험해야 보내심의 이 특별함이 날이 갈수록 우리에게 계속해서 올라오기 때문에. 감격스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보내시는 분, 우리를 보내신 분 자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늘에 속한 분이 오셨기 때문에 이 보내심을 받을 때는 무엇을 빼야 되느냐 하면은 웃음과 울음 또는 기쁨과 슬픔을 쏙 빼야 돼요. 이런 감정적인 요소를 빼야 됩니다.
마치 길거리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신정네거리에 가면 뭐 있느냐 하면은 트럭에 통닭해가지고 기름 쫙 빼가지고 바짝 굽는 통닭 기계 있잖아요. 그처럼 우리에게 웃음과 울음 그런걸 다 빼야 돼요. 슬퍼하지도 말고 기뻐하지도 말아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옛날에 우리 내 소유가지고 기뻐했고 내 소유가 달아날 때 울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야 교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당히 냉정하고 차갑지요.
그런데 기쁨과 슬픔 자체가 이 감정적인 요소를 뺄 때에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4절에 보면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기존의 기쁨과 슬픔 이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이렇게 표현될 수가 있어요.
일상 속에는 탄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는 멈추기가 힘든 탄력이 있어요. 살아왔던 습관 같은 것, 관행 같은 것이 강력하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일상속의 탄력은 어디서 탄력을 받느냐 하면은 내가 그동안 모은 지식. 왜 인간은 자꾸 지식을 모으느냐 하면은 지식을 모아야 살 수 있기 때문에.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요양사 자격증. 지식이 있어야 누가 요양사로 써주니까. 그동안 내가 모은 모든 지식의 총량은 내가 만나야 될 타인이 내가 모은 지식을 타인이 능가해요. 능가한다고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살기 위해서 모아 놓은 모든 지식은 주께서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마주치는 그 타인의 탄력한테 우리가 이기지를 못해요.
사람들은 도 닦기를 원하지 남 만나기를 싫어해요. 이 세상에 기술도 없고 배운 재주도 없을 때 특히 여자분들이 일거리 해서 용돈이라도 좀 벌고 30대 여자분들은 자기 시집 갈 미천이라도 할려면 제일 쉽게 할 수 있는게 뭐냐 하면은 콜 센터. 콜 센터. 콜 센터 알지요? 안녕하십니까! 이런 거. 뭘 도와드릴까요?
카드 회사 콜 센터에다가 물류회사 콜 센터, 은행 콜 센터 많지요. 그 콜 센터, 상담센터, 보험회사 상담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아무 기술 없어도 그 전화 그냥 하면서 그 힘든 직업을 하는 이유가 그들이 제일 정면으로 타인과 타인의 목소리와 만나요. 아주 이게 심리적으로 힘든 직업이죠. 술 먹고 무슨 소리를 다 지껄일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과 상대하는 것.
그래서 고급인력일수록 직접 사람과 만나지를 않습니다. 대통령같은 거. 장관, 경기도 지사, 검사. 직접 사람과 안 만나요. 수사관들 통해서 대충 다 하고. 그중에 하나 포함하면 목사. 큰 교회 당회실에 갈려면 비서를 거쳐야 해요. 어중이 떠중이 오면 안되니까 비서 거쳐야 되고 재벌 회장님. 그런 것은 전부 비서실이 있잖아요. 미리 예약 안하고 오면 안 만나주고 이런 거요. 사람 만나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사람 만나는 게.
그래서 돈 좀 있고 좀 살면 집을 어떤 동네에 집을 사느냐 하면은 사람을 안 만나는 동네에다가 집을 지으면 됩니다. 사람이 눈에 안 띄는. 길 거리에도 사람이 없는. 외판원부터 해가지고 고물 사세요 이런 것도 못 들어오는.
그리고 못 사는 사람일수록 왜 그렇게 부딪히는 사람이 많은지. 한 집에 왜 그리 많은지. 아가씨가 밤 11시에 가면 뒤 따라 오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가방 들고 가면 뒤에 막 따라 오는 거에요. 옆집에 사는 줄도 모르고 “왜 자꾸 따라오는데요!” “나 우리집에 가는데” 이런 식으로. 왜 그 동네는 조용할 날이 없어. 3층에서 부부싸움하면 1층에서 애 울고 아이고 돈 벌어서 빨리 탈출하든지 해야지.
그래서 사람 만나는 게 타인은 내가 그동안 끌어 모았던 모든 지식의 힘을 가볍게 넘겨버립니다. 초과해버려요. 사람 만나는 게. 직장에서도 영업 사원들이 제일 힘들어요. 실적 해야 되고 사람 꼬셔가지고 성과 얻어야 되고요. 그러면 주님께서 보내시면 영업사원도 힘들고 상담 직원도 힘든데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우리는 힘들어서 얼마나 고생이 되느냐.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그러면 우리가 너무 힘들지 않느냐 생각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누굴 만나느냐 하면은 이걸 만나요. 타인을 만나는데 무슨 타인을 만나느냐? 악마, 귀신을 만나기 위해서 보내심을 입는 겁니다. 시시한 사람은 가라. 너 말고 너 배후자.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10장 17절부터 나옵니다. 17절부터 20절에 보면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세상의 기쁨과 슬픔은 다 쏙 빼야 된다 이 말이죠. 세상적인 기쁨과 슬픔은 일상에서 보면 탄력이에요. 내 것이 증가하고 내 것이 잘 된다는 것으로 기뻐했던 그 일상적인 습관, 그것을 정돈하는 명목으로 그걸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사람에게 문안하지 말라는 말은 인기 있는 것. 인기 있는 것 이런 거 원하지 말라는 이 말이거든요.
유명한 것과 인정받는 것과 차이를 줘야 되는 겁니다. 유명하다는 것은 여기에 뭐가 있느냐? 여기에 속임수가 가미될 수가 있어요. 유명하다는 말은 나의 추종자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추종자의 증거는 숫자로 표현되겠지요. 그럼 이 숫자를 전에 있던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수작을 부릴지 우리 자신도 알 수 없어요.
유명해야 된다는 것은 타인에게 많이 알려진다는 것이고 그러면 내가 타인과 교환할 필요는 없고요 오히려 타인이 나에게 매료될 조치만 생각하는 거에요. 숫자에 신경을 쓰는 거죠.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다음부터는 온갖 수작을 다 부린다 이 말이죠.
인정받는다는 것은 나 자신부터 과연 나를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가를 타인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물어보는 겁니다. 이게 인정이에요. 그러니까 인정은 뭐냐 하면은 다 떠나도 지금 내가 처해 있는 것에 대해서 내가 감사하는 것이고 유명하다는 것은 다 떠나버리면 이게 절망하고 원망하고 슬퍼하는 거죠.
그러니까 인정받는 것하고 유명한 것하고 어떻게 됩니까? 정반대지요. 너희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보람을 느끼는 것은 인정 쪽이지만 유명이라고 하는 것은 유투브나 이런데 ‘좋아요’ 많이 올라오고 SNS 거기에 팔로워가 많고 교회 목사는 교인들이 점점 늘어나서 자기 알아주는 사람들 많을 때 그렇게 되어버리면 진정 스스로 자기 인정이 거기서 날라가버립니다.
그래서 가정주부 같은 경우에 나이 50 넘도록 애들 둘이고 셋이고 키워놓을 때 남들 보기에는 ‘아이고 아이 잘 키웠습니다’ 하고 칭찬들 하지만 그 자식들이 엄마를 엄마의 수고와 애씀을 인정하지 않으면 굉장히 어떤 허무함을 느끼죠.
대외적으로서는 동네에서 자식 잘 키웠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정작 자식들은 이제 엄마한테 더 배울게 없고 엄마한테 더 뜯을 돈이 없고 엄마한테 노동력이 더 필요치 않을 때 엄마는 소외됐다는 느낌이 안 들겠어요? 들지요. 그럴 때 엄마는 그 자식들부터 인정받을 생각하지 말고 그 인정하는 그 스스로의 기준을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 과연 나를 인정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되겠지요.
예수님의 칠십 인 같은 경우에는 보내실 때 원칙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마귀를 만나라. 귀신을 만나라. 이거는 세상 사람들은 귀신, 마귀 그런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이것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칠십 인이 만나야 될 것은 낯선 것, 같은 말로 다른 것. 기존의 세계에서 없는 것. 기존의 세계에서 없는 것. 낯선 것, 다른 것, 없는 것.
이런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가서 만나라는 거에요. 그러면 만날 때 안녕하십니까. 혹시 이 세상에 없는 것 갖고 계십니까? 이럴 수는 없고 뭘 하느냐 하면은 주께서 보내실 때 악마와 귀신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칠십 인들에게 부여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말씀’, 주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보낸 거에요. 주님의 말씀으로.
주의 말씀 보내가지고 저 사람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런 이야기하지 말고 그 사람이 우리한테 항복하는 거 말고 그 사람을 그동안 배후에서 지배했던 귀신과 마귀가 자기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그걸 보라고 주의 말씀을 주신 거에요. 그걸.
그러면 여기 칠십 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라고 하시는지 그게 누가복음 10장에는 안 나타났는데 같은 누가복음 10장 이야기를 마가복음 9장에서도 미리 나옵니다. 마가복음 9장 38절에서 40절에 보면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이게 마가복음 9장 39절에서 40절까지 나오는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보게 되면 누가복음 9장 49절에서 50절까지 딱 나옵니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칠십 인들에게 이야기한 그 내용이 누가복음을 통해서 그걸 전제로 해서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이 바로 누가복음 10장에 나온 그들에게 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너무 길기 때문에 제가 혼자 후딱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짧게 보게 되면 마가복음 9장 43절에 보면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7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라는 이야기를 세상에 나와서 한번 전해봐라 이 말입니다.
전해 보게 되게 되면 그동안 인간 세계를 장악했던 그 귀신과 악마가 발작을 일으키면서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반응을. 쉽게 말해서 극단적이다. 극단적이다. 우리의 소박한 삶의 행복을 당신은 모독한다. 예수님께서 칠십 인들 보낸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뭐냐 하면은 생태계 파괴에요. 정신적 생태계를 파괴하는 겁니다. 정신적 생태계를 파괴하는 거에요.
생태계라는 것은 이게 안정적으로 유지되야 우리는 일관된 삶의 원칙을 구성할 수가 있어요. 편안하게. 그리고 심리적 안정을 원하고 있는데. 이렇게 극단적인 발언. 네 눈을 빼라. 손을 찍어 버린다든지. 발을 찍어버린다든지. 만약에 그걸 찍지 아니하면 그것도 그냥 불이 아니고 영원히 죽지 않게 타는 불. 불 타면 속 시원하지요. 그게 아니고 죽지도 않으면서 계속 타들어가는 그런 고통. 그 지옥불에 네가 들어간다.
자,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 참다 참다 숨어 있는 귀신들이나 마귀들이 나오는 겁니다. 이걸 뭐 마태복음 10장에서는 그 결과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그 지역 동네에 너희들이 내 말을 듣고 회개했으면 너희들이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가 너희들보다 더 나을 지경으로 너희들은 내 말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칠십 인의 생태계의 파괴잖아요. 파괴. 이 말씀 말고 예수님의 전체 말씀이 다 제자들 입을 통해서 칠십 인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그대로 다 쏟아졌지요. 파괴라는 것은 이것은 협상이나 양보 그런 것은 전혀 없거든요. 그냥 멸망 선언입니다. 일방적인 멸망선언이에요. 소련 탱크나 러시아 탱크가 와서 밀어버리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칠십 인들이 외쳐야 될 이 일이.
다시 이야기합니다. 칠십 인들을 보내는 목적이 뭐냐 하면은 “숨어있지 말고 나와 이 귀신아. 숨어있지 말고 나와 이 악마야” 그 이야기에요. 말을 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어 나오게 말씀 앞에서 나오도록 하는 거에요.
그래서 주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는 말은 꽁꽁 숨어 있는 악마와 귀신이 튀어나오게 하는 능력, 그 능력이 바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의심하게 만들어요. 같은 말로 생태계 파괴, 멸망선언. 멸망 선언의 결과로서 그들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세상에 대해서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의심하게 만들어라.
의심이 믿음의 시작이다. 의심한다는 것은 이미 믿음이 시작된 거에요. 의심한다는 것은. 그 의심이 세상에 대해서 의심한다는 말은 세상의 일원으로서 자기의 꿈과 희망을 펼칠 그 미래의 무지개 꿈에 놀아나고 있는 나 자신부터 의심의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이게 지금 옳은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 사람들은 전부 다 저게 천국 가는 길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 길이 옳은지. 지금 생태계 파괴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인간의 삶을 조립할 수 있도록 모든 재료가 다 구비되어 있는 생태계, 이 정신적 생태계를 파괴한다. 이 생태계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이게 많아요. 길. 길들이 많아요. Way. 길이죠. 길이 많아요. 이리 가야 되고 저리 가야 되고.
그러나 파괴는 모든 길을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길은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너희들이 지나간 그 흔적이 바로 새로운 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가고 난 뒤에 생기는 것이 길이고요 그 내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보내심,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이 땅에 길이 없어요. 그냥 예수님 자체가 길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고난 뒤에 돌아보면 거기에 없던 길이 새로 생긴 겁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라고. 이 길은 주님이 가신 그 길은 기존의 모든 길을 무시해버리는 겁니다. 인간들의 길은 길이 아니었었습니다. 길이 아니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악마는 뭡니까? 인간보다 악마가 뛰어나니까 악마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서 뭐로 보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는 말씀이 유일하게 천국 가는 길인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귀신과 악마는 알잖아요. 그래서 귀신과 악마는 바로 그들이 그렇게 감추고 싶고 막아서고 싶은 거에요. 그 길을 들키고 싶지를 않은 거에요.
왜냐하면 악마는 예수님을 아니까요. 귀신이 예수님 만날 때 뭐라 했습니까? “우리를 멸망하러 왜 일찍 오십니까?” 이 말은 이미 자기는 멸망하게 될 것은 끝장나는데 그 전에 인간들 많이 꼬셔서 자기 세계로 가고 싶은데 미리 왔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땅에 길이 많다는 것은 악마는 알아요.
그 어떤 길도 천국으로 통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 때문에 악마는 인간들이 길을 만다는 것에 대해서 흔쾌히 그냥 동의하고 그걸 후원해준 겁니다.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전부 다 사적인 길이거든요. 부분으로 하면 다 희극이고 전체로 보면 비극이라고. 인간은 자기 전체가 비극인 것을 모르고 코 앞에 있는 어떤 성과 잘되고 회사 잘되고 가정 행복하면 자기는 웃어도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러다 코로나 걸리면 울어야 되는 줄 알아요. 코로나 걸려서 울었어요? 그게 길인 줄 알고 있는 거에요. 이 땅에 길은 없습니다. 전부 다 막혀있는 거에요. 길인 줄 알지만 길 끝에 가면 전부 다 막혀서 없어요. 그냥 몸부림쳐본 거에요. 악마는 알아요. 천국 가는 길이 없다는 걸. 악마는 알고 있어요. 그런데 없는데 예수님의 그 말씀이 유일하게 천국 가는 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어느 길로 가면 천국 가는 길입니까? 그게 말이 안돼요. 왜? 애초부터 천국 가는 길은 없어요. 세상에서 지옥 가는 길이 마련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오셔서 세상에서 천국 가는 길이 열렸잖아요. 주님 자신이 길이기 때문에.
따라서 세상에서 지옥 가는 길이 아니고 세상 자체가 지옥입니다. 세상 어디에 갈 필요 없어요. 지옥 가는 길로 안 갈 때 그냥 살아. 그냥 살면 지옥 가요. 그냥 살면 지옥 가요. 자동이에요. 무슨 나쁜 짓해서 지옥 간다. 아니에요. 그냥 살면 그게 지옥 가는 길이에요. 새삼스럽게 지옥 가는 길은 없습니다. 일상에 탄력 받아 살면 그게 지옥이에요. 벌써 지옥생활 시작했고요.
제가 문제를 하나 낼게요. 어떤 문제냐 하면은 어떤 사람이 딱 죽어보니까 천사 둘이 서 있는 거에요. 하나는 거짓말하는 천사, 악마지요. 또 하나는 진실만을 말하는 천사에요. 그럴 때 그 사람에게 조건이 뭐냐? 천사에 대해서 두 개의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으면서 그 다음부터는 천국 가는 길을 찾아야 돼요. 문제가. 질문을 두 개만 해야 돼요.
그런데 질문을 똑같이 하는데 거짓말만 하는 천사와 참말을 하는 천사가 둘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인지 몰라요. 자, 어떤 질문을 던져야 그 사람은 천국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이에요. 머리 쓰는 질문이에요. 여러분들은 머리 쓰지 말고 제가 답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 손으로 해가지고 “이 길이 천국 가는 길입니까?” 질문 두 개 중에 한 개를 써먹는 거에요. “이 길이 천국 가는 길입니까?” 라고 묻는 거에요. 물으면 진짜 둘 중에 하나는 진짜 천사는 “예”라고 이야기할 거고 그중에 악마도 거짓말하기 때문에 “예”라고 거짓말 할 거란 말이죠. 둘 다. 그러니까 질문 한 개 가지고는 몰라요. 분명히 둘 중에 하나는 거짓말인데. 둘 다 “예” 하니까 모르잖아요.
그때는 카드가 하나밖에 안 남았어요. 질문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 길이 천국 가는 길입니까라고 할 때 ‘예’라고 답변할겁니까?” 와 어렵다. “이 길이 천국 가는 길입니까라고 할 때 ‘예’라고 답변할겁니까?” 라고 할 때 악마 천사가 곤란하게 된 거에요. 거짓말하는 천사가. 진짜 천사는 “예”라고 할 거고 악마 천사는 “아니요”라고 하지요.
그러면 내가 지적한 방향은 천국 맞아요. 만약에 하면 반대쪽이 되는 것이고. 참 그런 식으로 말 잘해서 논리적으로 하면 좋겠는데 문제는 성경에서는 어떤 인간도 이미 그 거짓말하는 악마와 한 패이기 때문에 내가 어느 쪽이 천국 가는 쪽입니까? 물을 자격조차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복음적으로 복음적인 질문을 제가 할 테니까 이거는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다리를 건너는데 여기 파수꾼이 있어요. 파수꾼이 굉장히 다리 건너는 사람에게 겁을 주면서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이 다리를 건너고 싶어도 내가 허락한 사람만 건너지 만약에 허락하지 않은 사람이 건너버리면 당신은 교수형에 처하겠다 하고 기세등등하게 파수꾼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답변 한 개만 해가지고 어떻게 무사히 다리를 건널 수 있느냐. 질문은 뭐냐? 그건 복음적으로 답변하면 돼요. 답변은 이겁니다. 나는 지금 저 교수형 당하기 위해서 저 다리를 건넙니다. 이러면 파수꾼이 할 말이 없어요. 죽겠다는데 뭐.
다시 할게요. 네가 내 허락 없이 건너면 교수형에 처한다 이렇게 하니까 예 나 교수형 당할라고 이 다리를 건너고자 합니다. 허락해주세요. 허락해도 안 해도 곤란하게 되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은 우리가 나 같은 인간은 지옥가야 됩니다 라는 답변을 내놓으면 돼요. 그게 우리 모습이고 이제 답변됐지요. 저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식으로 저는 매일 살아갑니다. 이 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죽어 마땅한 걸로.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은 그동안 악마와 귀신들이 인간을 장악하고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 하면은 옳고 그름과 그리고 선과 악을 주님 쪽에 일임한 게 아니고 그걸 내 쪽에서 내가 처리할려고 그걸 유혹받아서 그렇게 됐다는 게 그게 화근이 된 거에요.
선과 악을 내가 처리해야 돼요. 내가 말을 어떻게 말하고 내가 질문을 어떻게 던지고 이런 생각 자체가 이미 선과 악을 내가 인수했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나는 가치 있다고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거에요. 그게 바로 마귀 들린 상황입니다. 따먹지 말아야 될 것을 따먹은 상황이 존재가 그 상황이에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주님의 대처 방법은 이제는 여러분도 아셔야 돼요. 거기에 대한 주님의 대처 방법은 뭡니까? 내 결정과 내 선택과 내 행함과 내가 선과 악을 판단해가지고 옳은 길로 가는 그것이 배후에 누가 있다? 악마가 있는 것을 악마가 있다는 것을 그것을 발췌시키는 말을 칠십 인에게 담아서 보내야 돼요.
왜? 그 보낸 자리에 주님이 길이 되시기 위해서 가시기 때문에. 보낸 자리에 가시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선과 악을 내가 판단해서 내가 옳은 길로 가겠다는 이 자체가 마귀 들린 모습이다라는 것을 일깨워주게 하는 겁니다. 이 모습이 뭐냐? 내가 판단하겠다는 것은 뭐가 없다? ‘보내심’이 없는 거에요. 내가 판단하니까 내가 시작점이니까 내가 판단하니까.
그러면 주님의 방법은 뭡니까? 자, 내가 문제를 던질테니까 이걸 네가 선과 악으로 해가지고 이걸 실제로 행할 수 있는가 한번 보라. 네가 오른 눈이 범죄하거든 어떻게 하라? 빼버려라. 오른 팔이 범죄하거든 손을 잘라버려라. 오른 발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려라. 그래야 나머지라도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 말은 주님의 말씀에서 지금 우리가 무엇에 초점을 두어야 하느냐 하면은 결국은 이 지옥불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거에요. 그리고 이 지옥불에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에 인간 세상, 이 세상에 주님께서 지옥불이라는 그 단어를 개념을 언급했다는 자체가 이 세상과 지옥불이 관련성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옥불 속에 우르르 지금 침몰되고 있다는 거에요 이 세상이. 이 세상이 너희들 옳은 판단하면 지옥불 안 간다는 말은 지옥불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문제는 옳은 판단인데 문제는 옳은 판단을 하겠다는 그 순간 무엇이 날라가버립니까? 누군가로부터 보내심이 없다는 것이 완전히 들통이 나버린 거에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면 나는 교환할 타인이 없잖아요. 교환할 타인이. 지금 궁극적으로 칠십 인이 뭐라고 하느냐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지요. 너희 이름이. 그 기록된 것이 뭐냐? 누구의 생명책이냐? 예수님의 이름의 생명책이에요. 그럼 예수님이라는 그 타인과 교환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는 겁니다.
누구를 보냈다는 말은 사람하고 싸워서 승리해서 쾌감을 느끼라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하고 싸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 현재 이런 인간들이 기껏 생각하는 것이 자기밖에 모르게 만드는 그 배후에 숨어 있는 그 영적 사람들, 영적 존재들 그것을 어차피 주님이 만날 거니까 칠십 인 보고 너희들이 먼저 만나봐라. 그리고 그 만나는 그 과정이 내가 해야 될 그 길과 일치되는 길이라고 하는 거에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