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20317b 베드로후서 2장 1절(주님과 마귀사이)-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220317b 베드로후서 2장 1절(주님과 마귀사이)-이 근호 목사
아까 요한일서에 있는 구절을 말씀 못 드렸는데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사람하고 상대 안합니다. 사람하고 상대 안 해요.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 되지, 같이 협력의 대상이 안 됩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네가 잘 하는지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된다고 자꾸 배후에서 우리보고 재촉해요. 너 요새 너무 태만하잖아. 요새는 성경도 안 보고 기도도 너무 게을렀어. 게을렀다고 자꾸 이렇게 잔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구원의 결핍을 느끼고 구원? 과연 그런 게 있었던가, 피 뿌림에 어디 빵꾸 났나, 피 뿌림 색깔의 농도가 갑자기 옅어져버렸는가. 피 뿌림은 주님이 관리하지, 우리가 관리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천국의 욕망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첫째 시간 끝에 뭐라고 했습니까? 일방적인 사랑. 일방적 사랑이에요. 왜? 죽었으니까.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죽었거든요. 죽었기 때문에 사랑할 자는 그냥 사랑해버리고 사랑할 자를 만들어버리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사랑 안 받을 자가 아니라 그냥 미워하는 자가 돼요.
여기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불만을 가지면 안 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은혜 받을 자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어요 (19절,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은혜를 받는다는 건 은혜 받을 자만 건지고 그냥 너는 너대로 살아, 방치하게 되면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로마서 1장에 보면 “내어버려두사”.
까불고 찧고 촐랑대고 인수위원회가 어떻고 이번에 뭐 복지는 서울대학교 출신 어떻게 하고... 그래, 까불어. 까불어. 그게 막 언론을 장식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게 사랑입니까? 뉴스에 나오는 그 모든 것들이 그게 사랑입니까, 아니면 권세에요? 어두움의 권세입니까, 뭡니까? 어두움의 권세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그렇게 부러워해야 되겠어요? 까불고 찧고 하는 그걸 주께서 그냥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우리도 그냥 내어버림을 당했어요. 당했는데 뒤에서 귓불 잡아당겨서 너 와. 그냥 강제로 당긴 거예요. 사랑으로. 사랑이란 하나님의 아름다운 신성을 관주(灌注)하는 최고의 등급. 사랑을 등급이라 한 것은 나머지는 그냥 과정에 불과하니까 거기에 너무 마음 쓰거나 울고불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신성에 관주(물을 대고 뜻을 둠)하기 때문에 이게 사랑으로 그냥 덮치는 거예요. 용서받은 자에게 그냥 덮쳐지는 겁니다. 덮쳐지게 되면 그 사람은 혼자이겠습니까, 혼자가 아니겠습니까? 혼자가 아니죠. 주님의 사랑과 더불어 함께 있죠.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은 주님으로부터 떨어져본 적이 없어요.
갓난 애 옆에 엄마 붙어있듯이 갓난 애한테 엄마가 떨어진다는 것은 그의 인생에서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6개월 된 6개월짜리 인생은 몇 개월 살았습니까? 6개월이죠. 6개월 평생 동안 엄마가 내 옆에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죠. 그 6개월 된 아이에게 최고의 안식처는 자아다, 아니면 엄마다, 몇 번입니까? 6개월 된 애에게 최고의 안식처는 나다, 아니면 엄마다, 어느 게 정답이에요? 나 아니고 엄마잖아요.
엄마가 있으면 6개월짜리 아기는 실패라는 것도 없고 성공이라는 것도 성립이 안돼요. 엄마와 함께 있으매 좋은 점은 기분 나쁨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더 좋은 점은 목적이나 목표가 사라져버렸다는 거예요. 내 인생에서 목적과 목표라는 것이 사라졌어요.
성도의 목표는 예수 안입니다. 체육관처럼 생긴 그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이 둥근 안에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어느 걸 목표로 지정할 이유가 없죠. 어느 구석이라도 어떤 구석이라도 예수 안이니까요.
항상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같이 있습니다. 같이 있어서 우리는 감쌈, 잘 안 쓰는 말인데 그냥 내가 써봅니다, 감쌈을 당했어요. 마치 쌈 싸먹듯이 우리는 돼지고기이고 주님이 상추로 이렇게 쌈 싸는 것처럼 쌈 싸는 거예요. 물론 때로는 우리 옆에 냄새나는 된장도 있지만 그러나 된장 있다고 너무 섭섭해 하지 마세요. 전체적으로는 상추쌈 안에 있잖아요. 주께서 먹기 좋으라고. 안 그러면 맛이 없으니까.
방금 사랑에 의해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같이 있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거짓 선지자를 언급했기 때문에 그럼 거짓 선지자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걸 알 필요가 있어요.
천국에서 예수님 십자가와 함께 있으면 십자가가 (골짜기에서 위로) 이동합니다. 십자가가 이동할 때 예수님과 우리가 같이 있기 때문에 이 십자가가 이동하게 되면 우리도 같이 이동하잖아요. 이동해서 올라가요.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어린 양의 보좌까지 올라가죠. 하나님 우편까지 올라가죠. 하나님 보좌에 누가 있습니까? 바로 성도의 대표들, 이십 사 장로들이 천사와 함께 같이 있어요, 천사와 함께.
성경에 나와 있는 천사의 이름들이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미가엘. 이것은 전쟁하는 천사. 그리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 가브리엘. 문제는 이 이름이 이 세상에서의 이름이지, 사실 이들은 이름은 없습니다. 그냥 이름 없이 기묘한 자에요, 기묘한 자.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그 이름이 있지만 그 이름은 인간세계에 작업에 참여할 때 발생되는 이름이에요.
하나님도 이 땅에 오면 이름을 가져야 돼요. 그 이름이 무슨 이름입니까? 예수이고 그 내용은 임마누엘이고. 하나님과 함께 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성도의 원형인 것을 예수님이 몸소 보여준 거예요. 나 혼자 있지 않다. 너희도 앞으로 너 혼자 있지 않을 것이다. 자꾸 혼자 있다고 생각해버리면 본인이 결정해야 되죠.
혼자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악마 쪽에서 이야기합니다. 악마 쪽에서 인간은 이렇게 있습니다. 악마 쪽에서는 주체가 등장해요, 주체 또는 자아. 자아가 등장하고 이 자아 쪽을 쳐야 되는데 자꾸 악마는 자아 쪽을 키워 줘요. 잘 할 수 있어. 성공할 수 있어. 너는 포부를 가질 수 있어. 입을 벌려라. 내가 채우리라. 뭐 이런 식으로 해서 계속 자아를 부인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자아를. 자기를 미워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요. 자신의 믿음을 사랑하고 자신의 소망과 사랑을 사랑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예수 믿는 것도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가 자체적으로 생산한 그 믿음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그렇게 조작해보는 거예요. 교회에서들 그렇게 하는 거예요. 주위에서 믿음 조작하잖아요. 뭐로 합니까? 믿씁니다, 믿씁니다. 쌍시옷해가지고 자꾸 반복시켜서 스스로 자기에게 최면 걸게 만듭니다. 믿씁니까? 믿씁니까? Repeat after me. 나를 따라하세요. 자, 하면 된다. 하면 된다. 따라하세요. 이런 식으로. 우리교회는 그게 없어가지고 제가 뭘 부탁해도 안 해요.
주체를 키우기 위해서 주체가 주체되려면 값을 해야 되거든요. 근사한 자아, 근사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 여기에 베일이 있어요. 베일이니까 휘장이죠. 휘장을 딱 깔아놓고 그 뒤에 어떤 대상이 있다는 거예요. 대상이 있는데 네가 원하는 대상이 있다는 겁니다. 대상이 있으니까 빛을 쬐어버리면 이 대상의 흐릿한 그림자가 휘장에 얼른거리는 하나의 무늬로 생겨나겠죠. 그러면 이 나는 대상에 다가가기 위해서 휘장에 있는 무늬에 도전하겠죠, 도전. 이걸 도전하겠죠. 여기서 아까 얘기한 결핍이 생기고 욕망이 세상에 있는 것을 네가 골라잡아서 네가 노력하면 네가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어렵지만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도전되는 대상과 사물은 같지 않습니다. 대상≠사물. 사물은 A, B, C, D,... 여러 개가 있는데 내가 뭐 하나 의미 있게 관심 둘 때 이것은 사물에서 대상으로 바뀌는 거예요. 사물에서 대상으로. 그냥 있는 것은 사물이고요. 대상이란 그 대상으로 인하여 내가 조정당하고 내 쪽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냥 15평짜리 빌라 살다가 내가 어떤 고급 메이커 있는 푸르지오든지 롯데캐슬 하나 딱 지목할 때 롯데캐슬은 나한테 대상이 돼요. 그다음부터는 그 집을 사서 이사 가면 나는 전에는 그냥 나인데 지금은 저 롯데캐슬에 사는 사람이 되고 그것도 동네가 압구정동이라든지 강남이 되어버리면 나는 그다음부터는 나를 함부로 대하지마. 나를 우습게 보지 마. 나는 압구정동에 있는 롯데캐슬에 사는, 그런 게 압구정동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사람이라고 자기 변신을 시도하고 시도된 그 자아를 새로운 주체로서 등록하게 되는 겁니다.
인생 뭐 있어요. 이게 사는 거 아닙니까. 인생 사는 게 이거에요. 악마가 쳐놓은 각가지 골라 골라 골라 잡아, 해놓고 나는 그 많은 사물들 가운데서 내가 내 욕망, 마음에 드는 것을 대상으로 삼아서 삶의 목표로 해가지고 그걸 쟁취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게 만들어버려요.
그 보람 느껴가지고 몇 달 가겠어요? 얼마 못가요. 그럼 아파트만 사면 됩니까? 아무 가구도 없이요, 그냥? 그냥 방안에 대자 누워서 그게 사는 겁니까? 뭔가 1억짜리 자개농이라든지, 요즘 자개농 쓰지도 않지만, 이케아 핀란드 가구, 명품 가구, 멀쩡한 바닥을 이태리 대리석으로 새로 깔든지 대공사를 벌이든지 뭔가 해야 되지 않습니까. 멈출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이 세상은 조금만 지나버리면 이게 구닥다리가 돼요. 자본주의는 새로운 자극을 할만한 소비를 부추길만한 신상을 계속해서 만들어내어서 여전히 쓸모 있는데도 그걸 아낌없이 폐품으로 처리하게 중고로 만들어버려야 자본주의라는 자전거는 달리게 되어있어요. 멀쩡하게 쓸 수 있는데 새롭게 조금만 뭘 더 바꾸고 비용은 더 크게 해가지고 그래야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라고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커텐 이거 치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커텐 치우는 것은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 나옵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이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이 대상획득에 실패해가지고 살맛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밤에 술 먹고 또 그냥 물에 빠질 용기는 없어가지고 술김에 한다고 술 먹고 바닷가에 가서 바다에 이제 뛰어들려고 하는데 자기가 스스로한테 격려 한마디 마지막 이별의 말을 본인이 본인한테 해야죠. 그동안 수고했다든지 그동안 네가 애쓸 만큼 애썼다. 사회가 너의 가치를 안 알아주는데 이 더러운 사회에서 더 살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 잘했어. 악마가 어깨 두드려주고요. 그래, 지금 보니까 물 때가 조용한데 지금 죽으면 덜 아프고 잘 죽겠다, 해서 이제 그 사람이 검은 바닷가에, 속초 바닷가가 적당하겠죠, 바다에 뛰어내리려고 딱 하는데 마침 거기에 등대 불빛이 환하게 비췄단 말이죠. 검은 물 안인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등대의 밝은 불빛이 비추는 걸 보고 아무리 세상이 더럽고 악해도 빛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그 사람은 다시 발길을 돌렸다는 내가 지어낸 이야기에요. 그 순간.
베드로후서 1장에 분명히 어두워요. 모든 게 깜깜한 것 맞습니다. 인간은 악마가 쳐놓은 베일 바깥 저쪽 대상을 찾아갈 길 없고 어른거리는 것만, 이게 천이거든요, 어른거리기만 하는데 전부다 헛것이란 말이죠. 그럼 이 베일 뒤에 뭐가 있는가? 궁금하죠? 궁금합니까, 이 뒤에 뭐가 있는지? 뭐가 있느냐 하면 ‘없음’이 있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다 꿈같은 거예요.
뭔가 베일이 있어줘야 뭐 있어 보이잖아요. 부잣집 재벌이 행복합니까? 행복해보이죠. 부잣집이 여러 가지 행복의 요건들, 고급차에다가 많은 것하고 뭐 맛있는 식사에다가 뭐 이렇게 잘 해보죠. 막상 그 부잣집에 들어가서 한번 살아보세요. Nothing! 아무것도 없어요.
행복이란 자기를 잊어버릴 때 나타나는 게 행복이에요. 인간은 자기의 욕심의 엉덩이로 이걸 깔아뭉개버렸어요. 기도 안 하면 행복한데 기도해서 불행해지는 거예요. 기도도 자꾸 개발해내는 거예요, 목표와 목적을. 그냥 있어도 주는데 꼭 내가 영험한 기도해서 응답받는 식으로 이걸 갖고 싶은 거예요. 그래야 내가 신앙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 그렇다면 신앙 있는 것처럼 보이면 그게 마음에 만족스럽고 행복하고 편안합니까? 살림살이 나아졌어요? 그런 거 없습니다.
이 거짓된, 아무것도 없는데 베일 깔린 요근래 유명한 사람 있습니다. 성은 허요, 이름은 경영, 허경영이에요. 일단 허경영 아이큐가 430입니다. 전주 길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차로 1시간밖에 안 걸렸어요. 축지법을 써가지고. 그때 네 명이 동승했는데 전부다 의식을 잃어서 나중에 와보니까 서울이라. 1시간 축지법을 써서. 그다음에 어떤 장님도 허경영 눈만 바라보면 그 장님 눈을 뜨게 되어있습니다. 내 눈을 바라봐, 하는 거 있잖아요. 허경영 눈만 보면 장님이 눈을 뜨게 되어있어요. 그다음에 허경영은 23초간 공중부양이 가능합니다. 물론 두 손 짚지만 공중부양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허경영이 대통령 되면 결혼한 사람 1억 주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허경영은 자기 재산의 99.9%를 전부다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줬습니다. 나머지 0.1%인데 그 재산이 430억. 도대체 얼마나 끌어 모은 거예요. 얼마나 끌어 모아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 허경영 수법을 오늘날 모든 목사가 다 하고 있습니다. 베일을 치는 거예요. 베일을 쳐서 여러분 고객님들, 교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하나님께 헌신하시면 여러분, 제가 드립니다. 그리고 실제로 받은 사람들 쭉 서서 간증집회 하게 합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는. 왜냐하면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구원받을 가치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행복할 가치도 없고 천국 갈 가치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샛별이 떠오르고 난 뒤에 비로소 발견한 거예요. 내가 빛이 아니고 빛이 따로 있었던 겁니다.
그 빛과 내가 이제는 따로 노는 게 아니고 같이 가는 겁니다. 그걸 예수 안이라 하는데 예수 안에서 함께 있습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등급은 다른 거 필요 없어요. 그냥 사랑이에요. 요한일서에서는 그 사랑을 유일한 계명으로 봅니다. 유일한 계명, 최후 계명은 그냥 사랑이에요.
그런데 이제부터 여러분들 골치 아프게 만드는 이론이 시작됩니다. 여기 민간에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했잖아요, 베드로후서 2장 1절. 그럼 선지자가 하나일까요, 하나 이상일까요? 여기 보면 하나 이상이에요. 그렇죠? 그런데 마태복음 24장 잠깐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마지막 때 징조 가운데서 15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여기 가증한 것이 필히 멸망되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멸망이라는 운명에 완전히 고정되어버린 절대로 구원될 수 없는 자가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멸망이 가까웠다는 거예요. 그러면 거룩한 곳과 멸망은 합치될 수가 없죠. 거룩한 곳에는 멸망을 안 세우니까. 세우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거룩한 곳에 멸망하는 자가 세워지는 것을 주께서는 허락을 해버려요. 허락을 해버린다고요.
이 말은 멸망의 것, 그러니까 사탄이죠, 악마, 적그리스도. 적그리스도의 모든 활동의 최종 목적이 그냥 막연하게 돈 잘 번다, 부자 된다, 행복하다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노리는 게 있어요. 악마가 노리는 것은 바로 유사 십자가, 유사 복음이에요. 거룩이에요, 거룩. 악마가 마지막 노리는 것은 거룩입니다. 그래서 혼돈이 일어나는 거예요.
모든 성도는 거룩하고 싶어요. 그런데 너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너만. 너만 그런 게 아니고 악마도 거룩하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악마의 운명은 이미 멸망되기로 작정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제 설교에 그런 말했죠. 모든 철저한 위선자들은 다 종교계에 모인다 했어요. 모든 위선자들, 거의 들킬 수가 없는 위선자들은 종교계에 다 모입니다.
독재자들의 특징은 전부다 종교적이에요. 대표적인 것이 지금 우리나라에 통일교가 있다면 휴전선 이북에는 누가 있습니까? 김정은이 있잖아요. 똑같은 종교단체에요. 북한은 종교단체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단체입니다.
종교라는 것, 거룩이라는 것, 그것은 근원적으로 인간의 정신을 최종적으로 장악하는 악마의 수법의 가현체에요. 심지어 모든 국가도 마찬가지고요, 짐승이니까. 인간의 마음을 휘어잡고 인간의 마음을 자기 것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못할 게 없죠. 희생, 봉사, 헌신, 충성 다 합니다. 고난 받기, 십자가 지기 다 해요.
그 많은 것을 다 하면서도 딱 못하는 게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세리가 고백했던 나는 죄인이라는 이야기는 추호도 그 입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이렇게 희생하는데 왜 내가 죄인이야, 이렇게 봉사하는데 왜 내가 죄인이야. 그런 것은 큰 교회 권사님들이나 목사님들, 집사님들한테 한번 푹 치고 들어가 보세요. 난리 납니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0%이겠지만 제가 만약에 헌신예배해가지고 “여러분의 봉사와 모든 헌신과 기도와 예배는 가증스러운 것들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겠어요? 장로석에서 막 뛰어올라오고 하겠죠. 난 도망가면서 맞아 죽는다 하겠죠.
그 소리를 왜 감당을 못하냔 말이죠. 그게 진리인데. 그걸 욕한다고 하지 말고 지금 제대로 내게 감추어놓은 진리를 와서 이야기해준 고마운 사람이잖아요. 아까 무슨 은인이라 했습니까? 생명의 은인이 아니고 뭡니까? 죽음의 은인. 너 죽어도 할 말 없어. 넌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게 얼마나 좋은 은인입니까.
전부다 자기 자랑 못해서 환장한 세상에서, 전부다 악마가 쳐놓은 헛된 비닐에 있는 무늬에 불과한 꿈에 불과한 것들을 쥐고 서로 내것이라고 잡아당기면서 그것도 권력이라고 청와대 안하고 어디 가냐...... 아휴, 어디 가든 화장실 하나만 있으면 됐잖아요. 그것 때문에 그게 문제가 되고...... 이명박이라는 사람은 장로라면서요. 그러면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알 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어디에 있든지 주와 함께 있다. 그럼 뭐 교도소 있으나 사면하나 관계없이 천국이잖아요. 장로라며? 장로라서 그런가.
내가 어디 있든지 주와 함께 있으면 천국 아닙니까? 성령이 함께 있으면. 북한에 있는 사람이 남한에 내려오는 것도 이해 안 돼요. 그냥 북한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조기에 죽으면 되잖아요. 그게 왜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신앙을 빙자한 돈이 탐나서 그런 것 아니에요? 돈이 탐나서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자기 욕망대로 하고 설치고 싶은 것. 이제는 만나러 갑니다, 줄여서 이만갑. 나는 담배 이만갑인 줄 알았어요.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식으로 빠져나올 것인가가 아니에요.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입니다. 내가 어떻게 빠져나오는 게 아니에요. 사면되는 게 아니고. 나를 위한 용서는 없어요. 주를 위한 용서죠. 주님을 증거 하라는 거예요. 주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했음을 증거 하라고 우리를 구원한 거예요. 나 구원받았다는 자기 자랑하라고 한 게 아니고요.
지금 뭐가 어려우냐 하면 거짓 선지자가 하나냐 둘이냐 하는 겁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이게 악한 사탄의 역사라고 되어 있거든요. 진리는 포함되지 않은 채 기적만 있는 게 사탄의 역사라 되어 있어요. 진리는 없어요. 복음의 진리는 없고 진리보다도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제공하면 그게 사탄이든 뭐 절에 가든 천주교 가든 뭐 자기 원하는 것 챙기면 그만 아니냐, 라는 것이 마지막 때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가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거예요.
악마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활동을 제대로 잘하고 있습니다. 잘한다는 말이 옳은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악마는 말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허락했기 때문에. 악마가 무슨 짓 하느냐 하면 거룩을 빙자해서 이렇게 기적을 베푸니까 이것은 할 수만 있거든 믿는 자라도 유혹하게 만드는 거예요, 우는 사자와 같이.
우는 사자가 결핍 돼서 울어요. 배고프다 우어어~ 킬리만자로의 헤매는 하이에나가 좋은 고기, 나쁜 고기 가리지 않고 배고프니까 다 먹잖아요. 하지만 나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가지고 썩은 고기는 안 먹겠다는 거예요. 배부르구나. 눈 덮인 킬리만자로에 올라가가지고 좋은 고기만 먹겠다.
여기(데살로니가후서)는 적그리스도가 하나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에 보면 2장 18절에 “아이들아” 아이들이라 하는 것은 자기들이 후배니까 나이 많은 사도 요한이 아이들이라 한 거예요.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는데 앞에 무슨 말이 있죠. 무슨 적그리스도입니까? ‘많은’ 적그리스도. 어? 갑자기 하나가 아니고 적그리스도가 왜 많아졌습니까? 하나같으면 아직 적그리스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최종적인 적그리스도가 안 나타났으니까. 그런데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버리면 우리의 마지막 때 기다림 자체가 소용없게 되어버렸어요. 하나를 기다렸는데 다수가 나타난 겁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야 돼요. 현재 지금 악마 쪽에는 다수가 등장한 거예요. 그럼 보조 맞춰서 예수님 쪽에도 여럿 예수님이 등장해야 됩니까? 악마 쪽에 다수 등장했으니까. 축구 11명 등장했는데 여기는 손흥민 혼자 뛸까요? 여기도 11명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님 혼자서 아무리 많은 적그리스도가 온다 할지라도...... 적그리스도가 북한 미사일 한 500개라 합시다. 그러면 여기 대응하려면 우리 남한에도 미사일 한 1000개는 준비해야겠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 쪽에서는 한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요한일서에서는 그 한분을 셋으로 나누었어요. 피와 물과 성령이 오직 한분만을 증거 합니다. 피와 물과 성령이. 그 대목을 한번 봅시다. 요한일서 5장 5-8절 읽어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과 피라 하는 것은 바로 물세례, 십자가 세례를 불세례라 하죠, 심판 세례. 그다음에 또 무슨 세례가 있습니까? 성령 세례죠.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 셋은 합하였는데 이 셋은 방향이 뭡니까? 셋이 셋으로 되는 게 아니고 방향이 하나로 꽂히죠.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랬죠. 믿음, 소망, 사랑은 분명히 셋이라 해놓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잖아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소망도 사랑으로 귀환되어야 되고 믿음도 사랑으로 귀환되어야 돼요. 사랑으로 통합되지 않는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믿음과 소망은 믿음과 소망이 아닙니다.
이것을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결핍과 나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식의 믿음, 소망, 사랑은 아예 그런 믿음, 소망, 사랑 없습니다. 나는 죽어야 되지, 채워야 될 대상이 아니에요. 날마다 죽어있음을 확인할 뿐이죠. 그냥 믿음, 소망, 사랑이 주님 쪽으로 그냥 가게 만들어요.
잘 이해가 안 되시죠? 그럼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말합니다. 실제로 그런 일 있었다는 게 아니고 예니까 또 오해하지 마시고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난 그냥 스쳐지나갔습니다.’는 말을 어떤 분이 한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스쳐지나가세요.’
이 세상의 사랑은 반드시 한쪽이 사랑을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나도 사랑한다고 주고받는 게 있을 때 성사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 사랑이에요. 사랑의 보람을 느끼잖아요. 내가 만약에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께서 나도 너 사랑한다고 응답해주면 그것은 바로 악마가 만든 가짜 사랑이에요.
사랑은 다시 주님께로 최종 돌아가게 되어있지, 죽은 나의 것으로 되돌아오지 않아요. 나를 가져가는 거예요. 나를 가져가면서 그 요한일서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나와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벌써 우리의 사랑은 주께서는 안 받죠. 우리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안 받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천주교 교리의 대가.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천주교가 그 사람 이론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는 천주교의 모태가 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이론을 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에요, 신학대전. 그 사람이 이런 소리를 했어요. ‘주님이 나 토마스 아퀴나스를 사랑한다면 내가 주님이 되고 주님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됐다고 칠 때 그때 그 사랑을 해주시옵소서.’ 라고 이야기했어요.
굉장히 복잡하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이여, 주님이 저를 일방적으로 사랑할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도 주님 사랑 못지않음을 주께서도 좀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이 세상의 남녀 간에 사랑과 하나님의 인간 사랑이 동일한 속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런 생각을 왜 합니까? 교인들 끌어 모으려고 하는 거예요.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특히 어미의 사랑은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천주교가 어미의 사랑 대신에 거기에 박아 넣은 사람이 누구죠? 예수님께 직접 부끄러워서 못하는 사람은 우회해서 그걸 엄마찬스라 하거든요, 엄마찬스. 누구한테 하란 말입니까? 성모 마리아한테 빽 써가지고 사랑해달라고 하면 사랑한다는 거예요. 이거 뭐 장난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남의 말 할 것도 없이 기독교도 비슷하죠. 성모 마리아 없다 뿐이지 비슷해요, 뭐든지. 여기 성모 마리아대신에 기독교에서 나온 게 중보기도 아닙니까? 애들아, 아버지 믿음 좋으니까 내 빽 써서 아빠찬스 해서 구원 받아라, 이게 중보기도 아닙니까. 여보, 당신은 지금 돈 번다고 바빠서 교회 못 갔지만 내가 그동안 교회 다녔으니까 아내 찬스 써서 당신도 구원 받아, 내가 중보기도 해줄게. 이거거든요.
이 천주교나 모든 이단들의 원인은 여기에 있어요. ‘있음’. 있음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나 있음. 아까 적그리스도가 어떻게 해석한다고 했습니까? 일어나는 모든 사태를 누구 중심으로 해석한다? 나 여기 있음 중심으로 이걸 끌어 모으는 거예요. 그게 나한테 뭐가 이익이고 손해냐, 그걸 따지면서 이익 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손해 되면 하나님께 기도하겠다는 거예요. 더 달라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들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이 있는데.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옵니다. 적그리스도가 뭐냐? 2장 18절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 그러면 이 적그리스도가 뭐냐가 나와요. 4장 1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이 왜 그리 많이 범람하고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 하나만 해도 충분히 그걸로 대체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훌륭한 예수님으로 대체되는 게 아닙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긴 증거가 뭡니까? 훌륭하신 예수님, 거룩하신 예수님이 아니에요. 뭡니까? 예수님의 뭐에요? 예수님이 흘린 피와 물과 성령이에요. 예수님의 피라니까요, 예수님의 피!
이것이 요한일서 1장에 나옵니다. 그의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된다는 이야기에요. (요한일서 1장 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모든 죄는 피 흘림으로 끝났어요. 거짓 선지자가 어떤 경우라도 거짓 선지자는 이 말을 못해요.
왜 그런 말을 못하는 줄 알아요? 궁금해요? 왜 거짓 선지자가 피 흘림으로 죄가 끝났다는 말을 못하는 줄 알아요? 거짓 선지자는 내가 여기 있잖아. 있다면 꿈을 꾸어야지. 하상 너는 행복해야 돼. 너 천국가야지. 너의 그 결핍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족스럽게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자꾸 현재 있다고 여기는 나, 죽지 않고 있다는 나를 자꾸 자극시키는 거예요, 나를.
나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닌데 우X우X 와가지고 이렇게 어깨동무하고 격려하고 하는 거예요. 너는 여기서 주저앉을 위인이 아니야. 성경 몰라? 일곱 번 자빠져도 몇 번째 일어난다고요? 여덟 번째 일어나자. 이 성경말씀 보이잖아. 하여튼 욥의 친구가 성경말씀 인용하는 데에는 도사에요. 악마도 마찬가지고요.
하여튼 모든 성경말씀을 ‘예수님이 죽어야만 했다. 왜? 우리는 워낙 죄인이라서.’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고 성령이 없는 사람은 사람은 있는데 성경말씀이 부족해가지고 이것만 채우면 너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네비게이토나 여호와 증인들, 그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역량을 총동원해서 구원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럼 그들이 누구한테 배웠겠습니까? 네비게이토가 초대교회에 있었어요? 아니면 중세에 있었습니까? 누구한테 배운 거예요? 바로 개신교에서 배운 거잖아요. 개신교가 그들의 모토가 된 겁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봅시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그다음에 뭡니까?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았잖아요.
그러니까 택하지 않으면 무엇과 만남이 안 된다는 거예요? 택하지 아니하면 피 뿌림이 그 사람에게 연결이 안 되죠. 피 뿌림을 증거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오직 한 가지 일로 모든 것을 끝내버렸다는 것을 증거 하시기 위해서 택하심이 있는 거예요.
베드로후서 다시 봅시다. 여러분 지금까지 강의 들으면서 거짓 선지자가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어디를 노리는가 보세요. 그들이 성전에 섰다는 것은 거룩한 곳에 섰잖아요. 그러면 이미 거룩한 곳은 거짓 선지자에게 점령된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거룩한 곳. 그러니까 교회는 마귀 손에 다 넘어가요. 그런데 그걸 누가 허락했습니까?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미끼 던진 거예요.
아무리 미끼 던져도 피 뿌림으로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된 이 사실은 그들이 어떤 점령군이 된다 할지라도 점령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은 성령을 통해서만 갈수 있기 때문에. 그걸 제가 주일 오후 설교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도가 없는 대지. 그리고 하나 더 썼어요. 지도에 없는 대지.
같은 말이 아니에요. ‘지도에 없는 대지’라 하는 것은 예수 안은 인간이 만든 지도에는 구글 지도에는 예수 안이 표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 안이 엄연히 있어요. 성령으로만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중첩된 새로운 공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어요. 그 예수 안.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같이 있어요.
문제는 지도에 안 나온다는 거예요, 구글 지도에. 구글 지도에는 평양도 나오는데 예수 안은 나오지를 않아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한곳에 모이든 안 모이든 상관없어요.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그것은 이미 교회 안에 있게 돼요. 바빠서 못 나와도 할 수 없어요. 그것도 교회 안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 입장에서는 없는 나라, 지도에 나오지 않는 나라. 세상에 없다고 여기고 없으니까 답답하니까 교회를 세워가지고 뭔가 모여야 성이 차잖아요. 모여 봤자인데. 동창회 모여 봤자 그게 하늘나라 안 되잖아요. 이 세상에는 없는데 있어요. ‘지도가 없는 대지’라 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는 미국에 있든 북극에 있든 관계없이 전부다 같은 장소라는 뜻이에요. 지도가 없는, 지도가 필요치 않은 영토.
그러면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지도에 없는 대지, 예수 안.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바깥을 보면 돼요. 투명한 튜브 있잖아요, 투명한. 놀이기구인데 투명해요. 높은 데서 굴러 떨어지게 되어있는데 굴러 떨어지게 되면 좀 어지럽기는 하지만 재밌답니다. 그런데 40이상은 타면 안 된대요, 너무 어지러워서. 이 안에서 보면 투명해요, 투명하고 여기 물도 들어있답니다. 너무 굴러가지고 마찰력 때문에 나중에 다칠 수 있으니까 물도 있어서 타고 나오면 나중에 물에 흠뻑 젖어 나온답니다. 안 타봤지만.
이 투명한 예수 안에 있으면 바깥에 부르스 난리가 다 보이는 거예요. 이럴 때 이 사람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해도 소용없는 짓을 종교란 이름으로 교회란 이름으로 미친 짓을 다 하고 있는 거예요. 베드로가 여기서 보고 있는 겁니다. 샛별이 떠오른 베드로가 해라, 해라, 해라. 마음대로 해라.
여기 바깥은 온갖 적그리스도 나와가지고 온갖 좋다는 신상 다 이야기해요. 뭐 거룩하고 성화되고 어떻고. 칼빈주의가 어떻고 구속사가 어떻고 언약이 어떻고 십자가까지 이야기하고요. 온갖 이야기 다 하고 있어요, 여기서. 사람들을 현혹하죠. 이걸 보고, 아이고 참 주님과 함께 있는 게 아니고 홀로 천국 뚫으려고 어지간히도 발악을 하는구나. 종교적으로 발악을 하는구나.
그런 차원에서 베드로후서를 보시면 이해 안 될 것이 하나도 없이 깔끔하게 이해가 다 됩니다. 그것도 초조함이 없이. 벌벌 떪이 없이. 까불어라. 아, 이렇게 까부는구나. 실컷 까불어라. 까불 땐 놀이동산 가서 까불어라, 실컷. 바로 베드로후서 1장 피 뿌림을 위해서 택하심 받은 그것, 이것이 수천 수만 명의 적그리스도를 이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주께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용서해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이 용서로 주님의 주되심을 증거케 하기 위해서 받은 용서이오니 이 용서가 나를 위한 용서가 되지 않고 주를 위한 용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