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미가 3장 5-8절(선지자의 위선)220316-이 근호 목사
10강-미가 3장 5-8절(선지자의 위선)2203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3장 5-8절까지입니다.
미가 3:5-8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리울 것은 하나님이 응답지 아니하심이어니와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본문에 보면 선지자, 하나님의 보내지 않은 선지자지요, 그 선지자와 여기 또 한 사람의 선지자가 나옵니다. 8절에 보면 오직 나, ‘나’라고 하는 미가 선지자가 나옵니다. 그 미가 선지자가 참되게 하나님의 신으로 움직이고 있는 선자지인데 그 선지자의 태도는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이 죄를 그냥 그대로 발설하고 노출 시키는 일을 합니다.
신약에 와서 성령께서 일을 하실 때에 성령의 일인지 아닌지를 객관적으로 어떻게 판정을 내리느냐? 사람들은 그 판정 기준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싶어 할거예요. 요한복음 16장 8절에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을 하는 그것이 성령의 객관적 사역입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이 세상을 책망한다는 말은, 세상이 내리는, 세상이 자기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내리는 죄와 의와 심판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죄와 의와 심판은 사실은 같은 뜻인데요. 인간이 최종판단, 인간의 모든 행동의 끝에는 판단을 하게 되어 있는데 그 판단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최종판단을 하는 그 최고 제일 끝 지점에 우리 예수님이 거기에 관여하셨거든요. 그래서 인간들의 그 판단이, 인간들의 그 합리적 판단이 옳았을 것 같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옳았을 것 같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긍정적일 것 같으면 결코 예수님을 죽이지 않아야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말은 그들이 소규모적으로 또는 여러 가지 일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고 모든 지혜를 짜내어서 정의롭고 올바른 선한 판단을 내렸지만 결국 그것이 어느 것 하나 하나님 보시기에 책망받지 않을 일은 하나도 없었다, 라는 사실을 예수님 후에 성령이 오셔서 인간세계의 모든 구석구석을 책망해 주시는 겁니다.
뿐만 아니고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 사람을 만납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을 만났고 또 한사람은 세리를 만났는데 그 세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감히 얼굴도 못 들고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죄인입니다.” 할 때 주님께서 그 죄인이라 한 사람을 뭐라고 판정을 내리느냐 하면, “네가 바로 의인이다.”라고 판정을 내려요. 그리고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했던 바리새인을 두고 주님께서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 그 자체가 저런 모습이라고 내쳐버립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라는 것이 이렇게 막중한,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이 세상의 것을 탐내지 아니하고. 이 세상의 일, 또 이 세상의 어떤 시민으로서, 구성원으로서 같이 살자고 하는 식으로 그냥 사는데 급급한 자는 결코 이건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했기 때문에 세상 전체를 한꺼번에 판정 내릴 수 있는 그러한 영적 안목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선지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원래 선지자가 그랬어야 돼요. 원래 선지자가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참석해서 그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는 것이 선지자 맞는데 그래서 이 선지자에 있어서 가장 난감한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계시도 주어지지 않는 상태, 이스라엘 선지자로서는 자기 존재감이 끝난 거지요.
오늘 본문 5절에 봐도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이빨이지요)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다투려고 트집을 잡는다, 그렇게 보면 돼요. 이런 선지자에 대해서 벌칙을 내리는데 그 벌칙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달라고 해도 너희들에게 응답하지 않을 것이고, “너희들이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려 해도 깜깜한 밤이 되어서 헤매고 다닐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응답지 않으니까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선지자인데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거지요. 집에서 살림 사는 사람, 가정에서 살림 사는 가정주부의 제일 난감한 점이 설거지할 때 단수되는 거예요. 단수된다고 예고했을 것인데 막상 샤워하거나 설거지할 때 수돗물 딱 끊어져 버리면 그릇을 못 씻잖아요. 물이 끊어지니까.
선지자에게 제일 힘든 것은, 하나님께서 나 너 모른다, 제껴버리는 겁니다. 선지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그 통로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에 있어서 그 복이라 하는 것은 소유가 늘어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민수기 6장 25에서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복이 뭐냐? 축복이 뭐냐?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게 복이에요. 복이라는 것은 소유가 아니고 관계지요. 하나님과 관계 정상화가 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매일같이 쏟아지는 거예요. 매일같이 연결되는 겁니다.
촌에 있는 부모 집에 보일러 놔드리는 것이 효도가 아니고 늘 연락 취하는 거예요. 보일러 한번 놔 드리면 10년 가잖아요. 10년 동안 아무 소식 없는 그게 효도가 아니라 매일 전화하고 안부 전하고, 부모가 그런 것을 원하지요. 물론 뭐 너무 거기에 빠져버리면 직장 생활 못 하겠지만.
이렇게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 성도는 그것보다 더 욕심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알고 지내는 사이, 그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전화통화 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주신 것 이것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이것도 받았습니다, 주의 것입니다, 이게 쉬지 않고 기도하는 방법이에요.
주시는 거예요. 내가 끌어모으는 것이 아니고요. 그래서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자기 쪽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마당인데 사람들이 선지자에게 뭘 물을 게 아니겠습니까? “선지자님,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앞으로 국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번 대선에 누가 되겠습니까?” 묻게 됩니다. 자꾸 묻잖아요.
사람이 뭘 묻는다는 것은 나를 보호해달라는 요청이에요. 나를 보호해달라. 아내가 남편한테 아무 말이나 말을 거는 것은 나를 지켜 달라는 뜻이에요. “이제 왔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당신이 늦게 들어왔어도 ‘이제 오셨어요’ 인사하는 나를 끝까지 책임지고 지켜주고 보호해달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답변도 안 하고 “애는? 밥 먹자!” 이런 식으로 되어버리면 그것은 자기 생각하는 것이지 말 건네는 그것에 담긴 요구조건, 의미, 이런 것을 무시하는 게 되지요. 그래서 백성들이 선지자한테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어떻게 살면 됩니까, 자꾸 물으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 선지자들이, 단수된,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진 선지자들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돈을 주면 축복을 이야기하고, 잘 될 겁니다, 잘 풀릴 겁니다, 하고 돈을 안 주면 저주를 선포하는 거예요. 교회 헌금 많이 내면 복 받을 것이라 하고 헌금 하나도 안 하면 저주나 받아라, 그렇게 욕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복이 끊어졌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졌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아야 본인이 밥 먹고 살잖아요. 그러니까 고객이 원하는 것, 고객이 왕이니까 소비지가 원하는 것을 본인이 제공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살 궁리를 챙기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미가 선지자가 하는 것은 딱 그거예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백성들도 알아야 되고 선지자들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미가 시대 말고 예수님시 대에는 드디어 확실하게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 대표자가 뭐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확정 났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에. 제자들도 못해요. 그래서 예수님만이 참된 선지자예요. 다른 사람들은 선지자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 오실 때 그 당시 선지자 노릇 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 선지자 노릇 했던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결국은 예수님과 충돌되는데요. 그 충돌되는 지점을 보게 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계시가 끊어진 상태에서 백성들이 선지자 노릇 하라고 하니까 그들에게 마지막 내놓는 것이 뭐냐 하면, 선악체계에요. 돌을 들고 간음한 여인을 죽인다든지, 하여튼 선악체계입니다. 선악체계.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것, 기껏 할 수 있는 게 선악체계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선악체계와 최후로 맞서게 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그 끝 지점, 마지막에는 선과 악에 대한 지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류고자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선과 악으로 율법을 지켜서 이루고자 한다면 그 주체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주체가 뭐냐? 각자 본인들이에요. 본인들.
그러니까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것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뭘 믿느냐? 자기 자신을, 최후의 보루로 자기 자신을 믿는 거예요. 자기가 이렇게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그들의 모든 신앙의 핵심내용입니다. 핵심내용.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그거예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왜 죄인인가’를 알라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의사는 병든자에게나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 그 추종자들은 뭐냐 하면, 내가 왜 착한 존재인가를 증명하는 것,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같이 매 순간 생각하는 것은 그겁니다.
그 부자 청년이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 왔을 때에 바로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자기 자신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킨 이 훌륭하고 착한 나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물은 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 그 사람의 진짜 본 모습을 드러냅니다. “모든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다 주고 나를 따라오라.” 그러니까 그 부자 청년은 예수님과 “바이 바이!”, 이별하지요. 그 말은 돈 없으면 나도 없다는 뜻이에요. 돈 없으면 나도 없다. 그러면 인간이 선악 체계, 나는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겠다는 그 말의 이면에는, 그러한 생각을 하는 그 바탕에는 돈이 있다는 것은 곧 착함을 의미하고, 착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부자 되게 해준다는 그러한 공식으로 하나님의 선을 노골적으로 구체화하는 그런 것을 본인이 갖고 싶은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가 못살면 그걸 굉장히 억울해합니다. ‘나같이 착한데 왜 못살아?’ 그래서 인간은 억울해하면서 남 탓하고 있는데요. 사람은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예수님도 이야기하고, 복음도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 하지만 더 깊이깊이 들어가면요, 인간이 가장 위협을 받는 것은 내가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 가장 공포를 느끼고 그것을 위협으로 간주합니다.
여러 가지 종교가 있잖아요. 율법, 그런 것 다 포장지고 포장을 딱 뜯어내면 죽는 것이 가장 싫어요. 죽는 것을 가장 겁냅니다. 가장 싫어하는 죽음 앞에서 발발 떨고 있는 그러한 그 모습이 자신의 본 모습이에요. 그래서 살기 위해서 노골적으로 돈을 밝혀야 되는데 노골적으로 돈을 밝히면 하나님의 말씀 율법 앞에서 돈 밝힌다고 해대니까 돈을 안 밝히는 척하고, 뒤로 미루고 ‘착한 것이 중요하고 돈은 보상으로 부수적으로 주어지겠지.’ 이런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인간은 살아가거든요.
현대에 와서 과학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은 60조 개의 세포와 200조 개의 미생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세포 하나하나가 살려면 뭐가 필요한가? 에너지가 필요한데 에너지는 어디서 얻는가? 이 대자연 자체가 에너지 덩어리입니다. 에너지 덩어리인데 그것을 어떻게 캐내느냐? 노동으로 캐내는 겁니다. 노동으로.
캐내서 자기의 노동을 돈으로 교환해 가지고 그 돈 가지고 필요한 것을 구하고 밥 먹고 사는 것, 이게 인간 세상이에요. 돈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돈이 우선이에요.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우기는 사람, 그것은 망상가고 몽상가입니다. 그것은 정신 나간 사람이지요.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어요? 교회 좀 나오고 강의 좀 나오다가 어느 날 안 나올 때는 돈 벌러 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돈 떨어졌다고 보시면 돼요.
돈이 우선이에요, 돈이! 돈이 본인의 가치를 결정하는 겁니다. 돈 있으면 자기는 착한 사람이 되고 돈이 없으면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어요. 왜? 돈 없으니까, 죽음에 가까우니까. 죽는다는 것은 질이 나빠서 하나님께서 벌 내려서 죽인다. 이런 생각을 인간은 선악 체계 안에서는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돈을 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 트집을 잡고 저주를 하는 거예요. 이런 선지자를 탓하지 말고 이런 선지자에게 그들이 돈을 왜 갖다 주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일반 백성들이.
종교는 인간 최후의 피난 처입니다. 정신적인 피난처, 마음의 피난처가 종교에요. 힘들고, 어렵고, 돈 없고, 가난하고, 매일 매일 기계처럼 살아가는, 일거리에 묻혀서 기계처럼 살아가는 사람에게 유일한 탈출구, 그것은 종교밖에 없지요. ‘하나님은 이 서글픈 내 사정, 억울한 사정을 알아주겠지.’ 매달리는 것은 그것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전공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다가 전파하는 그게 선지자라고 이미 그 사회에서 인식이 되어 있는 상태에요. 그러니까 본인이 ‘하나님이여……’ 이렇게 해도 본인이 그게 의심이 돼요.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전공자도 아니고 말씀도 모르는 게 내가 뭐 안다고 전문가한테 물어야지.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 해서 잘못돼서 지옥 가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전문가한테 가자. 돈푼이나 들고 가자.’
그래서 내 마음의 마지막 피난처, 은신처, 마지막 마음의 내 소굴은 종교밖에 없으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밖에 없으니까 사나 죽으나 교회 매일 출근하고, 매일 묻혀 살고, 그게 마음의 마지막 위로니까 이것에 대해서 격려해주고 잘한다, 해주면 돈푼이나 줄 용의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이 시대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아까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선지자는 주님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다 사기꾼들입니다. 사기꾼들! 이 시대의 참된 설교자, 선지자는 어떤 사람이냐? 그것 하기 전에 어떤 사람이 사기꾼이고 가짜 선지자냐? 그걸 손가락으로 한번 접어봅시다. 손 이렇게 내어도 괜찮아요. 하여튼 말도 되게 안 듣지만.
1번, 청빈한 생활, 가난하게 남 구제하는 목사는 일단 이단입니다. 이단이에요. 월급 적게 받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 월급 적게 받고 청빈한 생활 하면서 모범으로 살겠다는 것, 그것은 백 프로 이단입니다. 백 프로 가짜에요. 커피집이나 식당에서 손님들에게 주문받을 때 서서 주문 안 받고 손님보다 눈높이를 낮춰서 주문받는 것 있지요. 역겹습니다, 역겨워. 역겨운 거예요. 그런 짓 보면 정말 저는, “일어나세요. 이러지 마세요. 그런다고 겸손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목사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자기의, 겸손함과 청빈함을 가지고 밥 먹고 살려고 수작을 벌이는 겁니다. 손가락 하나 접었지요. 두 번째는, 사회정의 부르짖는 사람, 사회정의, 백퍼입니다, 백 프로 이단입니다. 사회정의, 정치에 관여하고, 사회정의 부르짖고, 구약의 선지자 코스프레 하는 사람,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외치는 사람, 백 퍼센트 이단입니다.
손가락 두 개 접었지요. 하나는 스스로 청빈하고, 월급 줘도 스스로 반 끊어주고 ‘나는 가난하게 살겠다’는 목사. 또 하나는 부교역자 잘해주는 사람, 요거 이단입니다. 부교역자 잘해주는 것. 왜 그러냐 하면, 목회자 카르텔을 만들어요. 선배 목사로부터 대우받으면 그게 공짜가 아니거든요. 교역자 회에서 당회장 목사를 하늘처럼 떠받들면 그게 기존의 당회 세력과 목회자세력을 세력화해서 정치적 대결구조를 가져가는 겁니다.
첫째, 둘째 다 기억하시겠습니까? 다 알지요? 경험상 다 알잖아요. 모든 철두철미한 위선자들은 종교계에 다 모이거든요. 네 번째,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 이거 도 닦는 사람입니다. 목사 아닙니다. 그냥 도 닦는 거예요. 도서관에 파묻혀서 공부하는 사람, 지식욕에 빠져서 유식한 체 하는 사람입니다.
이 네 가지만 이야기할게요. 이 네 가지만. 왜냐? 나머지 다섯, 여섯……, 이것은요, 앞에 있는 첫째, 둘째, 셋째, 넷째에 해당하는 목사들이 그렇게 비판했던 사람들, 돈만 밝힌다, 교회 부흥 외친다, 기복신앙 외친다, 그런 것들은 이 가짜 들이 자기는 청빈하게 살고 유식한 사람이라는 티 내기 위해서 저쪽에 적을 만든 거예요.
또 한가지, 다섯 번째 마지막 하면, 인품 좋고 성격 좋고 인물 좋은 것, 이것은 거의 백 퍼센트까지는 아니고 95퍼센트 정도로 봐줍시다. 5 퍼센트 빼줍니다. 거의 대부분 이단입니다. 얼굴 좋은 사람들 있잖아요. 중인지 목사인지 구분 안 되는 것, 달덩이 같은 얼굴, 귀는 부처 귀해서……, 남 인상까지 이런 식으로 하면 곤란하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는 것, 이거 목사 아닙니다.
그러면 1, 2, 3, 4, 5, 6, 7, 8, 9, 10, 다 빼버리면 그러면 진짜 목사는 뭡니까? 진짜 목사는 모든 일에 자기가 불신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신자가 아니고 불신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불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저주와 지옥이 기다립니다. 그러나 불신자임을 아는 사람은 천국이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예수님의 영향력의 결과가 신앙이기 때문에. 신앙은 주님 자신의 활동의 확장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없는데 주님의 활동으로 확장되어 주어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아까 제가 했잖아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주님이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해야 된다고요. 지금 미가 선지자가 그 당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 본인이 남들이 안 알아줘서, 서러워서 ‘너도 한번 당해봐라.’ 하는 식이 아니에요. 성신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성신께서!
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설교자, 목회자, 이 사람들은 인간의 끝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신자가 단 한 명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기쁘게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아까 제가 바리새인과 세리 언급했잖아요. 그 세리가 뭐라고 이야기했던가요? 주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가슴을 치면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하는 고백을 한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고뤠? 지옥 보내마.” 이러지 않고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바로 의인이라고 한 거예요. “네가 바로 의인이다.”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율법대로 산다고 걸핏하면 고난받고, 걸핏하면 구제하고 십일조하고 자기 마음을 낮추면서 금식하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성경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교회 오래 다니고 성경공부 오래 많이 다니고 이렇게 해도요, 결국 사람이 성령 없이 오래 교회 다니면 점점 더 뭘 이해하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이 사람들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굉장히 합리적이거든요. 양심적이고 합리적이라 그 말이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나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은인.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 받고 난 뒤에 제자들은 뭐냐? 예수님이 생명의 은인이 아니라 죽음의 은인이 된 거예요. 죽음의 악인이 아니라 죽음의 은인, 죽음이라는 은혜를 주신 분, 내가 죽어 마땅함을 깨닫게 해주신 그 은혜를 주신 분, 그분이 바로 주님이고 성령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 질 때까지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다닐 때에 세상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예수님 보고 귀신들렸다고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9장 34절에도 그 말씀이 나와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그리고 요한복음 10장 19, 20절에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귀신들려서 미쳤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오늘날 누가 진짜 성령 받은 설교자요, 진짜 목회자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답변은 아주 깔끔하게 답변됩니다.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돼요. 어디에 간주해서? 철저하게 선악 체계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그들에 대해서 그들의 선악 체계가 바로 마귀의 짓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그대로 노출 시키는 사람, 그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네가 미쳤구나.”라는 소리를 듣는 그 사람이 진짜 설교자지요. “내가 미쳤으니까 설교자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남들이, 남들이 나를 그렇게 평하도록 맡겨야 돼요.
고린도후서 5장 13, 14절에도 나오는데 사도바울이 미쳤다는 소리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닙니다. 가는 곳 마다 들었어요.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미쳤다, 그래!” 그 사랑만으로 끝!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어떤 착한 일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 그걸로 모든 것이 종결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빠졌으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미친 거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사랑으로 하여금 내가 왜 죄인인가를 날마다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은 절대로 이런 사람이 될 수 없어요. 내가 왜 구원받아야만 될 정도로 착한 사람인가, 내가 왜 복 받아야 되고 부자 되어야 될 정도로 착한 사람인가를 그걸 증명하고 확인하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여러분, 삶의 동기라는 것, 누가복음 16장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고 욕하기를, 너희는 하나님보다 돈을 더 섬기는 사람이다, 돈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거든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고 욕을 했다는 그 성경을 대하니까 우리는 일방적으로 예수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바리새인은 나쁜 사람들이 되지만 여러분, 세상을 한 번 더 살아보세요. 이 세상을 더 사는 삶의 추진력과 삶의 동기는 뭡니까 돈이에요. 표정들이……, 세상 나만 사는가?
돈보다 더 기쁨을 주는 게 없습니다. 글쎄 50년 신앙생활, 목사, 장로, 그거 다 떼고요, 그런 것 생각하지 말고 50년 60년 교회 다니면 다닐수록, 복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예수님 그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보다 역시, 신사임당 그려진 5만 원짜리 그 현찰이 역시 내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신자 없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밖에 없어요. 우리는 모두가 강남 스타일로 갑니다. “갈 때까지 가 보자~” 갈 때까지 가 보면 돈이죠, 뭐. 세상에 어느 부모가 “우리 딸은 돈도 하나도 없고요, 손자 손녀 하나씩은 낳았는데 돈은 하나도 없고요. 우리 사위는 백수고요. 뭐 어떻고……” 그 모든 이야기를 자랑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 아들은 이번에 주식 투자해서 25억을 꼴아 박아서 얼마나 기쁜지요!”
그럴 때 뭐라고 합니까? “네가 미쳤구나.” 미쳤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리새인은 뭐냐 하면, 선악 체계는, “하나님께 선을 행한 사람에게는 하나님 약속대로 소유라는 것, 부자 되는 복을 주신다는 데 있어서 너희들 이의 없지?” 누가 이의를 답니까? 신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요. 백성들이나 선지자들이나 다 불신자들인데. 거기에 대해서 다 아멘, 하고 동의하지요.
자진해서 그 시대에서 미친 사람 된다는 것은요, 이것은 스스로 자신을 배신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자기를 배반해야 돼요. 사람들은 평생을 살아도 뒤돌아보면 본인만 열심히 살았지 주님은 열심히 안 산 것 같아요.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아요. 나라에서 뭐 보상금 받은 것도 다 내 덕이고 월급 좀 오른 그것도 다 내 덕이고, 요번에 월급 오른 것도 꼬박꼬박 백신 맞으라고 할 때마다 다 맞은 덕분에 보너스 더 받는 느낌도 들고요.
장사하는 사람들 보세요. 장사하는 사람이 ‘요번 주에는 손님들이 왜 그렇게 많은가 몰라? 가만있어 보자. 내가 지난주 무슨 착한 일을 했기에 이렇게 손님들이 오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에요 이걸 반대로 생각하게 되면 이것은 미친 겁니다. 그 미친 자의 표상,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오죽 관찰하고 오죽 분석했겠습니까? 진짜, 행여 메시아일 수도 있잖아, 이렇게 아무리 요모조모 뜯어보고 분석해도 내린 결과는 ‘죽이자’ 주 씨, 그래서 주기자 아니고 그냥, 그냥 ‘죽이자!’ 그냥 죽여서 우리가 이기자.
인간은 우리 자신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조금만 비난받으면 욕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만반의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고는 못사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죽기까지, 죽는다는 것은 소멸이잖아요, 그냥 반짝, 하다가 소멸 되신 거예요. 그렇게 가면서 그야말로 봄철에 트랙터로 땅 갈아엎듯이 우리 마음을 다 갈아엎은 거예요.
훌륭하게 살고, 자기 훌륭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래서 이 세상은 한마디로 말해서 착한 불신자들, 착한데 몽땅 다 지옥 가는 사람들, 착한 불신자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이라고 자처하는 모세와 엘리야 그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신자로 보겠습니까?
마태복음 17장 변화산 보면 예수님하고 모세하고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본인이 이야기했겠어요? “주님, 저 믿음 괜찮았지요?” 엘리야가 있다가 “선배님, 제 믿음이 월등했습니다. 우리 까놓고 이야기하지만 제 믿음이 월등했어요.” 하고 자기 자랑했습니까?
거기 대화 내용이 뭐였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냥 제 삶을 살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죽어야 된다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별세하심에 대해서 언급을 했어요. 누가복음 9장에도 나와요. 이 말은 뭐냐? 그냥 예수님 가신 길 그냥 예수님만 가게 합시다. 예수님만. 우리가 시건방지게 따라가지 마시고요.
예수님만 가시면 예수님만 가시면서 가시는 그 길을 기준으로 해서 그다음에 성령께서 그 길로 도로 오셔서 주님만 가셨던 그 길에 영향력을 행사해 버리면 우리는 ‘주님으로 하여금 죽음의 길로 몰아세웠던 자가 바로 나입니다.’라고, ‘내가 얼굴 못 들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할 때 그게 바로 주님의 믿음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걸 신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의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신학교 가는 게 나쁜 일이 아니에요. 안 가도 나쁜데 가도 나쁜 일이지요. 신학교 갔다는 게 별다른 일이 아니라 신학교 가고 목사 자격을 따고 하는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니고 목회를 하고 뭘 해도 그 모든 현장에서 내가 왜 신자가 아니고, 나는 왜 불신자며 죄만 나타내는가를 감사와 기쁨으로 드러내는 것, 그게 우리가 아직 안 죽고 주께서 살려주시는 이유입니다. 선지자, 주님의 선지자 됨, 선지자 노릇 하라고 우리보고 이 세상의 죄를 들춰내는 그 직분을 우리에게 줬습니다. 미쳤다는 소리를 영광스런 축복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대로 세상 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자신조차도 제대로 보게 하옵소서. 돈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면서도 마치 예수님이 더 좋아요, 라는 가증스러운 위선적인 것을 내뱉는 그 모습을 보고 주께서 얼마나 역겨워하시는지, 그 사실을 알고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