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4a 부산강의 : [시편]46(30:5)-말씀의 작용
20220314a 부산강의 : [시편]46(30:5)-말씀의 작용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30편.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이 둘이죠. 여호와 있고, 여기에 나라고 하는 사람, 두 사람입니다. 나와 여호와가 관련성이 있다고 시편 30편에서 이야기하죠. 그러면 내가 살아 있으면 누가 살아 있는 게 되냐 하면 여호와가 살아 계시는 게 돼요. 왜? 관련성이기 때문에.
이것은 내가 일한다가 되면 누구도 일해요? 여호와가 일하게 돼요. 잘 아시네요. 그러면 내가 죽는다면 누구도 죽는 게 돼요? 여호와 하나님도 죽는 게 됩니다. 나 안에서 나와 더불어서 여호와께서 일하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신약에서는 ‘예수 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울타리를 둬야 돼요. 예수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셨던 그 일이 나를 통해서 재현되는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수 안에서 그래요.
그런데 예수 안이니까 ‘예수 밖’이 있겠지요. 예수 밖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세상이 되고, 세속이 되는 거예요. 세속세계 또는 같은 말로 육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밖에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나 또는 주님을 바라볼 때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연결돼 있다는 것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들은 어떤 사람 모습, 또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드러냈다는 것을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은 하늘에 있어요. 막연하게 또는 추상적으로 있는 겁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어디 안에 있느냐? 그들은 자연 안에 있어요. 자연 안에 있으니까,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예수 밖입니다.
예수 밖의 있는 사람들의 삶이란 이 전체가 자연이고, 자연 안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 안에서 인간이 살아가다가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되지요? 죽음이 오지요. 그래서 이들은 자연 안에서 바라보는 나는 나이 들고 아파서 요양병원 갔다가 시들시들 앓다 죽으면 이게 그들의 끝이에요. 그들이 아는 게 이거에요.
살아 있을 때 그들은 자연을 통해서 무엇을 발달시키느냐 하면 과학과 기술을 발달시킵니다. 과학과 기술은 무엇에 필요하냐 하면 같은 인간끼리 한 공동체 또는 사회를 이루는데 필요한 것이 과학과 기술이에요. 과학과 기술과 더불어서 또 만들어낸 게 뭐냐 하면 언어(말)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것은 창세기 11장에서 바벨탑 쌓을 때 그들이 의견들을 모으기 위해서 그들이 아는 언어를 주고받고 했잖아요. 예수 밖의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 못할 게 하나도 없지요. 줄곧 이렇게 살아오니까. 언어와 말을 통하고 과학과 기술은 어디에 필요하냐? 이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데 필요해요. 과학과 기술에서 하는 일은 에너지를 개발하고 에너지를 관리 또는 적용하는데 필요한 것이 과학과 기술입니다.
옛날 고대인들은 1인당 12,500킬로칼로리를 하루에 소비했어요. 2020년도에 미국사람이 1인당 소비한 칼로리가 135,000kcal에요. 신라면 하나가 350~400쯤 되지요. 거기다가 김치까지 먹으면 500까지 올라가지요. 짜장면 하나 먹으면 700까지 올라갑니다. 옛날에 12,000킬로칼로리를 자연에서 뽑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힘든 노동을 했는지 몰라요. 지금은 미국사람 135,000 한국도 이 정도 됩니다. 이러면 자연에서 에너지를 얼마나 뽑아내겠어요.
이러한 활동을 그들은 뭐냐? 이걸 삶이라, 살아 있다고 합니다. 삶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이 사회가 가장 큰 규모로 있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국가라고 이야기하고 이 국가를 예수 바깥에서 사회니까 예수 안에서 이걸 뭐라고 보느냐 하면 짐승이라고 봐요. 짐승(악마의 가현체), 악마가 등장하는 모습, 힘으로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장악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예수 밖을 알았으니까 예수 밖에 있는 이 안에 누가 들어오겠어요? 마지막 때 예수님이 들어오지요. 예수님이 들어오면 누구와 부딪치겠습니까? 최종적으로 부딪치는 것은 바로 짐승, 악마의 가현체와 부딪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하는 때가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3장 봅시다. 33절. 13장 32절에서 헤롯을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여우, 간사하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33절에 보면,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그러니까 2박3일 사흘 동안 가다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뭔가 예수님의 목표지점이 있었지요. 그 지점을 누가복음 13장 33절에서는 어느 지점으로 봤습니까?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은 이 공동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언어적으로 종교가 있고 과학과 기술이 합쳐 국가가 되는데 종교와 국가가 다 집대성돼 있는 같이 결합이 되어서 통치가 되는 그 유대 장소가 뭐냐 하면 예루살렘입니다.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곳, 그게 예루살렘이에요.
34절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하나님 편에서 온 사람, 선지자들이죠. 선지자를 죽이는 인간 속에 있는 유일한 구멍이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그럼 예루살렘 가면 천국 가는 통로가 있느냐? 그거는 지리적으론 통로가 없고요. 예루살렘 백날 성지순례 해봐야 혹시 천국 가는 문 보셨습니까, 해도 가이드 이야기 안 합니다. 막혀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천국 가는 그 길이 사건화 되지요. 사건화 되면서 자연 속에 갇혀 있는, 그리고 인간의 목숨 끊어지는 그걸 죽음으로 이해하는 그걸 죽음으로 보는 그런 인간들의 지적인 한계, 사고방식의 한계, 예수님 밖에 있으니까 예수님 밖에서 자연과 세속적으로 있는 인간들의 그 지식의 한계, 지혜의 한계 거기에서 천국으로 가는 출구가 되려면 이게 사건화 돼야 돼요.
그래서 주님과 그 당시 유대 공동체 만나서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을 반복을 하면 할수록 거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반복할 때마다 천국 가는 출구가 열려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늘에서 오신 진짜 하나님이 되신 분이 유일하게 인간과 매치가 되는 만나는 지점이거든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천국과 지상에서 유일하게 갈 수 있는 복음은 무슨 사건으로 구체화 되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이야기해요.
그렇다면 이래요. 사도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무슨 사건이 재현된다? 십자가 사건이 되겠지요. 십자가 사건이 재현되려면 사도 바울은 뭐만 증거해야 돼요? 십자가 복음만 전해야 돼요. 그러나 십자가 복음이란 무슨 사건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죽음 사건이죠. 하나님의 죽음 사건이고 인간이 아는 죽음이란 것은 기껏 인간의 목숨 끊어진 걸 죽음이라 보잖아요.
지금 이쪽은 죽어야 가는데, 이쪽은 죽어야 끝난다고 보는 거예요. 죽음이란 의미 자체가 달라지는 거예요. “죽음? 끝났네, 끝났어.” 그건 세상에서 하는 거고. 이건 “죽었다? 됐네, 됐어. 오케이, 성공이다.” 지금 완전히 견해가 다르잖아요, 견해가. 죽음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달라요. 그래서 자연세계에 있는 짐승, 악마의 가현체, 이 짐승은 본의 아니게 누구의 일을 도와주게 됐냐 하면 주님의 일에 충실한 협력자가 된 겁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 가운데 누굴 선택했습니까? 가룟 유다를 선택했지요. 나쁜 역할을 맡은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 자신을 천국의 출구, 또는 천국의 열쇠라 할 수 있어요. 천국의 출구로 데려 갈 충실한 끝까지 그 역할을 다할 제자를 하나 거기다가 집어넣을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 역할 없이는 주의 십자가 일을 완성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역할을 맡았다마는 본인한테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는. 그러나 가룟 유다는 피조물이니까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지요. 개인적 사정 다 못 봐줍니다.
하나님이 가룟 유다를 선택했다는 것은 악마조차도 사탄조차도 주님의 선택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고 필히 주님의 십자가 일에 협력이 될 수밖에 없어요. 심지어 악마조차도. 그리고 악마에 속한 이 모든 인간도 예수님의, 하나님의 하는 일에 피조물로서 못 빠져나옵니다. 주의 일에 협조하는 울타리에서 빠져나갈 구석을 없습니다. 그래서 방금 제가 사도 바울의 십자가를 사건화 했다 했잖아요. 그것이 하나님이 오셔서 비로소 천국이 막혀있었는데 유일하게 천국의 출입구를 뚫는 그 일을 한다고 말씀 드렸지요.
그럼 이걸 지워봅시다. 성경의 해석, 짐승이란 것도 악마의 가현체, 이것도 지워버리고 남는 것은 12,000킬로칼로리, 135,000킬로칼로리 이것만 남는다고 해봅시다. 자, 이 안에 자연세계 있고, 이쪽 세계 아무것도 지금 성경 내용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들끼리만 삽니다. 그냥 나이 들면 죽고 공동묘지 만들고 그러면 되는 거예요. 여기 무슨 문제 있습니까, 이 세상에? 아무 문제없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복음은 아무 문제없는 걸 문제를 유발시키려 온 거예요. 되게 정상적이고 평화롭습니다. 전쟁하면 협상하면 되고요.
우리나라 19세기말 1890년에서 1906년에 조선말에 서울에 성곽이 있었거든요. 동쪽에 동대문 밑에 광희문이 있는데 시구문이라 돼 있어요. 이 성 안에는 시체를 둘 수 없어서 바깥으로 빼내는 문, 그게 시구문으로 지금도 서울에 있어요. 시구문 나가면 옛날 이 시대에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축소된 이 세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창세기 4장에 가인의 후예가 성 만들어서 도시 구획했잖아요. 그렇게 해서 죽은 자는 성 밖으로 내보내고 그렇게 한 겁니다.
히브리서 13장 11절에 보면,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인간이 살고 있는 그 도성에서 나아가자.
거기 14절에 보면,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어디서 만나자는 거예요? 도시 바깥의 공동묘지, 시체가 빠지는 그쪽에서 만나자. 그쪽은 바로 음부로 내려가는 곳이에요. 오늘 시편 30편의 핵심에 지금 여러분들이 접근하고 있어요. 이게 오늘 말씀과 관련 없는 게 아닙니다. 관련 다 있어요.
특수한 죽음, 인간들이 아는 이 죽음에 예수님의 시체가 같이 섞여서 나가는 거예요. 갈보리 언덕이 어디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게 아니에요. 성 바깥에 있어요. 성 바깥에 예수님의 성묘교회라고 지금 비잔틴 시대부터 만들어서 있는데 성 바깥에 십자가를 지고 옛날 채석장이라는 거기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누웠던 반질반질한 검은색 돌이 있고요 그 위에 예수님의 빈 무덤도 있고, 그렇게 지금 돼 있어요.
그러니까 천국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죽음을 통해서 빠져나왔던 주님이 유일하게 뚫어냈던 그 십자가를 사건화 시킬 때마다 거기서 천국의 문은 그때마다 사건을 통해서 열리는 겁니다. 그 십자가 일회적인 사건을 반복적인 사건화 시키는 그 작업은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자기 백성에게 성도에게 찾아오게 되면 십자가 사건 안으로 성도를 집어넣습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 시작됩니다. 이건 예수 밖의 세계죠. 자연, 언어, 국가, 사회, 대선투표 하는 것 전부 다 포함됩니다. 이걸 지우겠습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무탈하게 평화롭게 잘 살고 있다고 그 이야기한 거예요. 이 세상은 복음만 안 전하면 아무 문제없어요. 인간의 대화상대로, “요새 이재명이 뭐하노?” 그런 것 이야기하고, “추미애는 얼마나 불안하겠나.” 복음과 아무 상관없는 그런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하는 것은 바로 예수 안의 세계에요. 예수 안의 세계는 우리가 구약 시편을 하기 때문에 이걸 바꾸겠습니다. 이게 ‘언약 안’이에요. 구체적으로 ‘다윗언약 안’입니다. 언약 안에서 여기 여호와 하나님이 있고요 여기 나가 있어요. 등장인물 두 명입니다. 그런데 이 나는 이 안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여기 시편 30편에 보면 3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신비롭지 않습니까? 여기의 나는 뭘 하나 경험한 사람이에요. 뭘 경험했느냐 하면 음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을 실제로 경험을 한 거예요. 실제로 경험을 했고 그 죽음의 자리에서 스스로 일어난 게 아니고, 자기는 죽음으로 갔고 그 다음에 여호와께서 죽은 나를 음부에서 이끌어내는 거예요.
조금 전에 했던 예수 밖의 세계, 자연세계, 일반적인 세상이란 곳에는 죽으면 그걸로 끝이에요. 이 말은 어떤 인간도 남 죽었을 때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너 죽는데 같이 죽자, 해봤자 그거는 화장터 7번이고, 이쪽은 4번 되어 같이 태워지고 합체해도 소용없는 겁니다.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언약 안에서는 따라잡는 게 가능해요.
언약 안에선 무슨 장치, 무슨 시스템이 가동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죽고 다시 살아날 때 언약 백성도 주님의 죽음 안에 동참해서 같이 살 수 있는 시스템을 여기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언약적으로. 아까 자연세계와 판이하게 완전히 다르죠. 장치가 이거는 죽어도 사는 장치를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여호와와 나 사이가 단순히 그냥 아는 사이 정도 되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이 나에서 인간이 배제됩니다. 인간은 빠지면 이 나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잖아요. 이 아들 개념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사무엘하 7장 14절에 있는 그 다윗언약에서 비로소 그 아들이 인간세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이 언약적으로 보장이 되게 돼 있어요.
사무엘하 7장 14절에 뭐라고 돼 있느냐?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그렇게 돼 있지요.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이게 가족관계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어요. 왜냐하면 아버지 없이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지만 아버지는 이 인간세계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누구만 나타나게 돼 있느냐 하면 아들만 나타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 시대 말고 다윗 시대에는 이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다윗이 그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함께 있다는 이것을 다윗 시대에는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바로 성전으로 나타내요. 그래서 시편 30편에 제목이 나옵니다. 노래제목이 있듯이 여기는 제목이 나오지요. [다윗의 시] 다윗이 시라면 다윗의 노래. 이 노래가 어디에 쓰이냐 하면 [성전 낙성가] 성전을 낙성했을 때 부르는 노래가 이 다윗의 시를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배제되니까 사람이 사는 일반적인 공동체, 또는 살림살이하는 살림집이 아니고 하나님이 언약적으로 줬던 하나님의 아들과 아버지가 같이 있는 그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거기에 다윗언약을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이 이야기가 된다는 말은 접합 점, 인간이 배제되면서, 인간은 배제돼야 돼요. 왜? 인간은 이 언약적 일을 수행을 못해요. 다윗도 실패했어요. 다윗도 성공한 적 없습니다.
다윗은 성공하지 못하지만 그건 있어요. 틀은 있어요. 장차 하나님께서는 언약적으로 이런 것을 원해, 라는 그 틀을 다윗은 일단 부여받은 겁니다. 어떤 드라마나 영화에서 배우에게 디자이너가 옷을 해 입히는데 옷을 그냥 배우한테 주기 전에 혹시 조수 가운데 그 배우와 체형이 비슷한 사람에게 옷을 먼저 입혀보잖아요. 그 먼저 입어보는 역할을 다윗이 한 거예요. 입히고 딱 맞네, 하고 벗겨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도행전에 보면 다윗의 무덤은 그대로 있으니까요.
일단 시편 30편 말씀대로 음부에서 끌어올리는 것은 예수님의 몫이지 다윗의 몫이 아니에요. 베드로 설교에 그게 나와요. 사도행전 2장 29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다윗의 묘는 그대로 있다 이 말이에요. 근데 그는 어떤 역할이냐? 선지자 역할이에요. 선지자 역할이기 때문에 일단 마네킹 같은 역할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31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그렇게 돼 있지요. 하나님이 철저하게 인간들 가운데 자기 백성 될 사람들을 영원히 천국에서 부활의 세계에서 살리기 위해서 빈틈없는 시스템과 메커니즘을 작동시킨 거예요.
모든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본인이 알아서 실천해서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는, 인간세계 자체가 하나님이 오셔서 사람에게(악마의 앞잡이죠) 죽임을 당해야 이게 비로소 출구가 열리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성경강해를 듣잖아요. 지금 내가 여기 있다. 천국은 여기 있다. 그럼 내가 이걸 이해했으니까 들어갈 수 있습니까? 못 들어가요.
왜냐하면 여기서 무슨 사건이 벌어져야 됩니까? 십자가 사건이 벌어져야 돼요. 십자가 사건의 담당자가 누구라 했습니까? 성령이 오셔야.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보게 되면 33절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누구한테 줍니까?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라고 돼 있어요.
성령을 왜 주십니까? 안 주셔도 되는데 왜 주시느냐 말이죠. 주실 때 고맙습니다, 하고 받지 말고 따지세요. 성령을 왜 주십니까? 그거는 우리 능력으로 종교적 힘으로 우리가 실천과 지식으로 지혜로써 천국에 가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이 온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 시편을 보면서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모든 지혜와 지식은 무엇과 충돌을 일으킵니까? 실제로 성령께서 가져다 준 십자가 내용과 이게 어떤 생각을 해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일치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고 어떤 상상을 해도 그 상상한 것이 우리 구원의 능력이 아닌 거예요.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상은 자유라고 상상은 마음대로 할 수 있거든요. 그러면 성령께서 어떤 작업보다 하느냐 하면 네가 살고 있던 네 고향, 다시 말해서 악마에 속한 자연세계, 예수 밖의 세계의 속성을 우리의 상상력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내서 그걸 분석해서 그래서 탈락이고, 그래서 안 되는 거고, 그래서 안 맞는 거야. 성령께서 친절하게도 그걸 다 알려줘요.
제가 방금 친절하다고 이야기했지만, 내 십일조 40년 했는데 이것도 버릴 겁니까? 교회 교육관 지을 때 목돈 냈는데 이것도 버릴 겁니까? 나이지리아 가서 전도 이백 명 했는데 그것도 버릴 겁니까? 온 불만 요소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성경 공부한다고 짜장면 배달했는데 이것도 버릴 겁니까? 불면 불평이 되지요.
그건 한 마디로 왜 불평이 오느냐 하면 시편에 죽음, 음부, 우리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것이 죽음을 경유해서 다시 올 때 이게 오늘강의 제일 어려운 대목이에요. A라는 인간이 죽음을 경유할 때 이미 A라는 인간은 이미 죽음을 통해서 A는 날아가 버렸어요. 이게 죽음을 경유해서 다시 성령을 받아서 부활의 영을 받을 때 A라는 이것은 이 죽음을 통해서 이미 끝났어요. A라는 인간은 자기 이름이 있는데 여기 주님의 성령이 올 때는 이게 성령 주신 분의 이름을 따릅니다.
그게 뭐냐? 주의 이름으로 삽니다. 적어볼게요. 주의 이름으로 삽니다. 내 이름은 이미 죽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요소가 같이 성립이 되는 장소가 뭐냐? 예수 안이에요. 이게 언약 안입니다. 나는 죄인으로 죽었는데 그 죽었다는 것이 예수님이 살아 있음으로 죽은 이름이 주님의 이름을 살리기 위해서 계속 재료로 자원으로 활용되는 이 관계가 뭐냐 하면 제대로 살아 있음이 돼요. 나 죽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거예요. 내 이름이 죽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겁니다.
이게 과학과 철학과 일반사회에서는 성립이 안 돼요.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왜 성립이 안 되느냐? 그들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에요. 시구문 통해서 시체 공동묘지에 묻으면 더 이상 그 인간은 아무리 아버지를 사랑하고 엄마를 사랑하지만, 뭐 흔히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다, 백날해도 그거는 비유적이고 실제로 그들은 내가 사는 동네에 그분은 없어요.
왜냐하면 살아 있는 내가 살았다는 개념을 살리기 위해서도 죽은 자는 우리 동네에 있으면 안 돼지요. 아버지 죽은 시체를 안방에 모시면 썩은 냄새 나지, 엽기적인 그런 행동은 정신병자 아니면 그런 일이 없지요. 이상하게 그 집에 가면 냄새 나더라, 이러면 석 달 전에 죽었던, 그러면 신고 들어오지요. 그렇게는 못 살지요. 어쨌든 내가 사는 동네에는 나만 살아야 돼요, 나만. 그것도 홀로 나만 있어야 돼요. 누구와 같이 있다는 것은 여고괴담이나 귀신영화에나 있지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그걸 굉장히 싫어해요. 귀신이 구천에 떠도는 것, 아주 싫어합니다. 이건 도를 아십니까, 해서 천도제 드리든지 절에 가서 제물 바쳐서 귀신을 쫓아내든지 해야지요. 절에 가면 천도제라는 걸 드립니다. 어린아이들 강제시술해서 죽여 놓고 몸은 죽었지만 영혼을 떠도니까 그게 살아 있는 내 신상에 장애요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쫓아내게 돼 있어요. 그냥 쫓아내면 두고 보자 해서 귀신 들어오기 때문에 그때는 좋게 뇌물 줘서 미안하다, 하고 돌려보내지요.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은 자를 내보낸다면 하나님의 세계, 언약의 세계, 시편 30편 이런 세계, 다윗언약의 세계에서는 반대로 산 자를 내보내야 돼요. 산 자를 죽음에다 내보내요. 그걸 아까 인간 배제, 살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죽어서 오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냥 죽어버려. 네가 죽은 척하고 나중에 20일 지나고 깨나서 오란 뜻이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전에 살던 나와 새로 산 나와 그대로 나의 이름이 유지가 돼요. 이건 지식을 하나 얻은 것뿐이지 음부의 세계 구경 한 번 잘했네. 팔도강산 유람하는 겁니까?
단테의 신곡에 보면 내가 지옥을 다녀왔다, 천국을 다녀왔다 하는데 다녀오면 뭐합니까? 멀쩡하니 지가 살아 왔는데요. 이 세계에서 내 이름은 이미 죽은 이름이에요. 죽은 이름은 다시 거론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요. 우리는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죽였다가 살려준 주님을 위하여(for) 살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장 15절. 이제 산 자는 주님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럼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원인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나는 그냥 내 존재가 정답이에요. 새삼스럽게 정답을 만들지 말고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내 자체가 주님의 작품이고 결과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범사에 감사는 것밖에 없어요. “오늘도 코로나 걸려서 감사합니다, 주여.” 이런 것. 모든 일에 감사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나한테 너 이것 해, 라고 맡길 수 있는 일은 우리에게 전혀 맡긴 적이 없습니다.
헌금을 하던 전도를 하던 전부 다 어느 안에서 한다? 성령 안에서 하는 거예요. 성령은 누구의 영입니까? 예수님께서 형편을 마련해요. 아까 성령의 일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성령의 일은 두 가지거든요. 육을 육이라고 지적하는 거예요. 책망한다, 이건 요한복음 16장 8절.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육에 대해서 책망하는 거예요. 두 번째, 주님을 생각하게 하는 거예요. 이 두 가지뿐이에요.
그래서 영으로 했다가 육으로 돌아설 수 있는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단 한 명도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마치는 법은 없어요. 그래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으로 마치겠느냐, 라고 묻지요. 다시 말해서 성령에서 육이 되는 것이 이미 인간이 손을 댈 그 능력에서 한계에서 벗어나버린 거예요.
성령에서 육이 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주님께서 육의 일을 다 들춰내고 발라내면서 성도로 하여금 뭐만 생각하게 하십니까? 주님만 생각하는 그 통로를 지속시키는 거예요. 어디 가느냐 하면 육으로 들어가서 뭘 생각한다? 주님 생각하는 거예요. 바로 주님 생각하는 것은 육입니다. “주여, 십자가 감사합니다.” 이러다가 누가 와서 뭐라 하면 5초 전에 주님의 십자가만 생각하다가 갑자기 성질 팍 내요. 반드시 육을 통해서.
그래서 성질나는 사람 만나서 한바탕 성질낼 것 다 내고 싸우고 난 뒤에 “주여, 감사합니다.” 방금 저 사람과 한 판 싸웠던 이 죄인을 주님께서 이미 살려내셨으니까 이런 감사가… 이것 6초 내지 8초갑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이 성령 안에서 없어요.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구원 안에 있는 거예요.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구원이 소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안에 있는 거예요. 예배당 안에 있지 예배당을 주머니에 갖고 다니는 게 아니잖아요. 시멘트 이게 얼마나 무거워요. 그걸 왜 들고 다녀요. 그 안에서 사는 거예요.
안에서 살기 때문에 성령의 일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육으로 들어와서 육을 지적하고 주님께 감사하는 이 일, 이게 루틴이 돼요. 계속 되풀이 돼요. 발걸음 하나, 머리카락 하나, 어느 것 하나 주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다 주 안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을 전체적으로 신약에선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열두 제자 뽑아서 일단 육으로 살게 해서 예수님 배반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도망치고 난리 났지요. 그래, 그래 가, 가. 예수님 혼자 십자가 지셨잖아요. 강도 둘과 지셨단 말이죠. 그리고 난 뒤에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께서 오셔서 뭘 주셨습니까? 다시 교육시켰습니까? 교육시키는 것 없어요.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오순절 성령. 성령을 주시니까 그때부터 제자들이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배신과 육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유감없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원치 않는 주께서 나와 주님 사이에 내가 원하는 게 있었고 주님 원하는 게 있었는데 주님께서 고맙게도 내가 원하는 걸 족족 전부 다 좌절시키시고 내 계획을 다 무산시키시고 나로 하여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실패로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더 이상 나에 관한 성공은 기대할 필요 없어요. 뭘 해도 나에 관한 것은 실패로 해주시는 그 작업, 그분이 누구냐? 주님의 나라기 때문에 주도권이 주님에게 있기 때문에 이런 조치가 일어나게 해주시는 겁니다.
첫째 시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나의 끝이 주님의 시작이다.] 주님께서 인간 속에 오셔서 인간의 끝을 만들어요. 인간을 끝까지 가게 합니다. 당연히 죄인이기 때문에 그 끝까지 가서 주님께서 인간을 음부에 집어넣으시고 그 음부에서 주님이 같이 뛰어들어요. 그 죽음에.
인간 죽음에 하나님이 뛰어들어서 죽고, 그 다음에 죽은 자를 일방적으로 끄집어내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구약이니까 주의 이름이라 해도 되는데, 언약의 이름으로 또는 언약의 세계, 천국을 향하여 천국을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일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자력갱생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게 하나도 없어요. 이것을 실제적으로 그대로 적용시키면 나를 위한 기도는 없습니다. 모든 기도는 뭐냐 하면 주님을 위한 기도기 때문에 기도 마지막에 뭘 붙이라 했습니까? 내 이름으로 해라. 제가 감히 제 이름으로? 아니 네 속에 내가 들어가 있으니까 너의 기도를 통해서 나의 기도를 하겠다는 거예요. 인간, 너의 기도를 통해서 나의 기도를 하겠다는.
그래야 주께서 그 인간을 부려먹을 게 아니겠습니까. 어떤 기도라도 괜찮아요. “이 토마토 좀 맛있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 그럼 주님께서, “맛있어서 네가 뭘 원하는데?” “그래야 주님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요, 뭐.” 고런 기도. 육으로 들어가서 주님께로 마감이 되는 그런 순환, 루틴이라 하는 순환하는 그런 기도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서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가 돼요.
자, 그렇다면 이런 일에 대해서 세상은 그냥 아무 역할이 없는가? 세상, 아까 말한 예수 밖의 세계는 그냥 방치만 하고 있는가? 멀뚱하니 구경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아까 이야기한 자연세계, 인간의 세계에 들어올 때 예수님이 서 있으면 여기서 갑자기 주름이 일어나요. 여러분 주름 알지요? 치마에…
저는 그런 경험해봤는데 와이셔츠 다려봤거든요. 보통 여자들은 다리미질을 반듯하게 하는데 내가 다리미질할 때는 온 주름이 다 모여요. 이것 다리면 다려놓은 것도 같이 쭈글쭈글해지고. 주님이 가는 곳에 모든 관심사가 집중되는 현상을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늘날 성도가 가는 곳에 뭐가 집중된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성도가 가는 곳에 세상이 악마가 눈치를 채고 갖가지 일에 방행공작이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그것을 다윗도 체험했고 주님도 체험했고 오늘날 우리도 지금 그것을 체험을 해야 됩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