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9장 60절 (자리 옮김) 220222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9장 60절 (자리 옮김) 220222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9장 51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여기서 제자들 등장하고 사마리아 등장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 등장하지요. 세 등분으로 한번 나눠 봅시다. 예수님이 계시고 이쪽에 여기에 제자들이 있고 여기는 사마리아인들이 있어요.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오지 마세요. 우리는 당신을 필요치 않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인하고 유대인하고 사이가 관계가 좋지를 않았어요.
사마리아인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면 된다는 것이고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면 된다는 것이고. 지금도 사마리아인에게는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어요. 사마리아 오경. 사마리아 오경 있는데 그들은 출애굽부터 해서 홍해 건너와서 이렇게 시나이 반도해서 시내 산에 이렇게 가는 게 아니고 그들은 이렇게 왔다가 돌아가서 갔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에요. 지금도 사마리아인들의 제사장이 있어서 사마리아 오경을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을 위한 메시아로 생각해서 자기들은 거부를 한 거죠. 메시아 아니라고 거부를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하고 제자는 한 통속이다 생각되는데 오늘 55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신다” 했지요. 예수님이 누구 보고 꾸짖습니까? 사마리아인 보고 꾸짖는 게 아니고 제자들을 보고 꾸짖는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기의 영역 속에 이렇게 품었다고 생각했어요. 자기의 영역 속에 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말이 안돼요. 인간은 신을 품을 수가 없다. 또는 인간은 신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신을 알 수가 없어요. 알 수가 없지만 제자들을 보게 되게 되면 인간은 신을 알 수가 없고 신을 품을 수도 없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제자들은 신 그리고 신께서 보내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는 거에요.
여기서 제자들이 신과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다는 말은 하나님 따로 메시아 따로 제자들 따로 가 아니라 자기들이 이해하는 신과 메시아와 자기와 함께 있다고 그러한 상태와 상황이 오기를 고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모든 가족을 버리고 모든 재산을 버리고 오직 누구만 따라갔습니까? 예수님만 따라가는 거에요. 자기 결정이 옳은 결정이기를 바라는 거에요. 옳은 결정이기를.
이걸 오늘날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믿음으로 따라갔다 또는 믿습니다 라고 언급을 하는 거에요. 여기서 이제 믿음에 관한 오해가 크나큰 오해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신과 메시아를 생각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신이나 또는 예수님이나 메시아에 대해서 이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믿음의 대상으로 봐요. ‘믿음의 대상’.
나 안 믿고 나 대신 내가 믿어야 될 분 내가 아니고 저쪽 편에 계시는 하나님 또는 메시아 예수님이 내 믿음의 대상이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말 있잖아요.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에 뭐로 구원받는다 했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했지요.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구원받으니까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보는 거에요. 우리가 믿기만 하면 믿을 수 있는 대상으로 예수님을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게 근원적으로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거에요.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무슨 대상이냐 하면은 살해 대상이고 제거 대상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모든 인간에게는 제거 대상이에요.
인간들의 믿음의 대상은 인간들이 이미 알고 있는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신, 메시아가 그들의 믿음의 대상이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누구를 꾸짖습니까? 이들을 꾸짖는다는 말은 이들이 알고 있는 신과 메시아가 진짜 하나님과 메시아가 아니라면서 꾸짖는 겁니다. 꾸짖어버려요. 그리고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제자들은 같이 합세하지 않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해가지고 심지어 어떤 제자는 옷을 벗고 도망치기까지 했지요. 사도 요한 같은 경우에는.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대표로 배신했지요. “나 저 사람 모른다.” 그냥 모른다 하면 안 먹힐까 싶어서 ‘저 사람을 아주 적극적으로 저주한다’ 했어요. 예수님을 저주한다. 나 예수님을 저주해. 참 희한하지요. 저주해도 구원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본인이 저주한 그 분에 의해서 본인이 구원받았어요.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무엇이 자기한테 늘 장착되어 있느냐 하면은 나는 그분을 밀쳤고 저주했었다. 그런데 내가 저주한 그분이 도리어 나를 구원했다. 그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이것이 베드로에게는 얼마나 큰 사랑이고 복인지 몰라요. 왜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본인이 원하는 길이 있을 거에요. 원하는 길. 본인이 원하는 길이 있으면 본인이 원하는 길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믿음이 나옵니다. 믿음이. 본인이 원하는 길에서 믿음이 나와요.
본인이 원하는 것은 본인이 달성하고 싶고 되고 싶은 그 목적 같은 것 목표 같은 게 성립되거든요. 그 목표를 위해서 인간은 간절히 믿습니다 열심히 믿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는 주님을 믿는 것을 주께서 아시잖아요 뭐 이런 식으로 자기의 믿음을 티를 내는 이유가 자기가 원하는 게 목표로 앞에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원치 않는 길이란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은 베드로에게는 어떤 목표나 어떤 목적되는 것을 주님께서 비켜서 인도하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믿음은 내가 노리고 있던 노림수, 네가 이런 걸 노리고 있고 이런 걸 얻기를 원한다는 것을 아시고 그게 믿음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그 개입이 바로 믿음이에요. 그 개입이.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은 예수님을 일관되게 살해 대상, 제거 대상 여기 하나 더 보탠다면 미움의 대상이에요. 미움의 대상. 그런 노래도 있잖아요. 미워 미워 미워 라는 노래 있지요. 미움의 대상이에요. 일 안 되면 누구 탓을 해야 되는데 그 탓을 할 때 누구 탓을 하겠어요? 주님 탓해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려서 본인이 원하는 것을 본인이 포기를 못하는 한 이 사람은 지금 믿음이 없는 거에요. 믿음이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래도 나를 믿지 않고 주를 믿습니다 로마서 보세요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라는 자꾸 성경구절 끄집어내가지고 자기 원하는 것, 자기 원하는 목표라고 하는 것 다른 게 뭐가 있겠어요. 성도의 목표가 뭡니까? 구원받는 거에요. 천국 가는 거죠.
천국가기 위해서 나는 행하지 않고 믿겠다는 그것. 그것은 이미 본인이 원한다는 조건 때문에 이게 믿음에 해당되지 않고 이게 바로 행함에 해당되는 거에요. 이게 행함에 해당되는 거에요. 믿음은 인간이 뭔가 원한다는 점에서 믿음은 인간 세계에 없습니다. 인간은 원하고 내가 바라고 있다는 점에서 믿음은 없어요.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뭐가 생겼느냐 하면은 믿음과 행함을 인간들은 자기가 판단을 하는데 이 판단은 어떤 판단이냐 하면은 내가 원하는 그 목표를 위해서 믿음이 나을까? 행함이 나을까를 가지고 판단을 하는 거에요.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천국 갈까? 아니면 예수님의 그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을까? 둘 다 이게 행함이에요. 둘 다. 둘 다 행함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겠다는데 왜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이 왜 그리 자꾸 생기는지. 자꾸 생기는지. 오늘만 살고 그만 죽어야지 하다가도 뭐 팔순 생일 되면 내가 더 살아서 손자 시집가는 건 보고 가야지. 왜 자꾸 원하는 것이 자꾸 발생되는지. 모든 일에 감사가 없는 이유, 짜증이 나는 이유가요 내가 뭔가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살해 대상, 제거 대상, 미움의 대상이라는 말은 왜 내 뜻대로 안 해주냐고 이런 일이 발생되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은 결국 예수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내가 믿는 거에요. 예수 믿는 나를, 내가 믿는 거에요.
자,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이제 내린 결론은 결국 인간에게 예수 믿는 것은 없다 이렇게 되죠. 인간에게 있어서 예수 믿는 것은 없다. 간단하잖아요.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게 있는데요. 원하는 게 있으면 내가 원한다는 이유 때문에 믿음이 아니고 전부 다 행함이 되어버리니까 행함이 된다는 말은 내 행위 한 것을 내가 기대한 것 내가 마음에 쓴 것을 내가 믿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예수 믿고 싶어요 하는 그 ‘나’를 내가 믿는 것은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성경말씀처럼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그 존재가 내가 되고 싶어요 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상 더 이상 인간은 믿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말씀을 왜 주셨는가? 믿음 자체를 만들어내요. 인간에게는 없으니까 믿음 자체를 만들어내요. 주님께서 믿음 자체를 만들어 내는데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와의 관계가 바로 이게 믿음입니다.
믿는 자가 없으니까 인간은 믿음이라고 해봐야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새로 만들어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믿고자 해도 주께서는 브레이크를 딱 걸었잖아요. ‘다시 태어나야 돼. 다시 태어나면 하나님 볼 수 있어.’ 보는 것이 자기가 원하는 건데 보고 싶은데 다시 태어난다는 그 조건을 본인이 만들 수가 없어요.
내가 엄마 뱃속에 있다가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못 태어나면 할 수 없지 뭐 안 되지 뭐. 그 조건 빼고 어떻게 볼 수 없습니까? 안돼요. 다시 태어나야 돼요. 그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태어나는 그 방법 그러한 방식, 장치, 구조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 하는 일이 그게 다시 태어나는 일이에요.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있는 인간은 무효로 돌리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우리와 함께 죽어서 현재 믿어서 천당 갈려는 우리를 없애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과 구원받고자 하는 소망은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너무 절박하기 때문에. 자기 뜻을 자기 스스로 철회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어요. 나 죽어서 지옥갈래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24절에서 분명히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동산 쫓겨났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생명나무 있는 곳과 격리 조치한 거에요. 자택 격리.
생명나무에서 떨어지면 그곳에 같이 있지 않은 상태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것을 저주라고 이야기해요. 저주 또는 진정한 죽음이에요. 왜? 생명이 없으니까. 생명나무에 없는 것을 저주 또는 죽음이라고 하는 거에요. 인간이 자기가 죽고 저주가 있으니까 생명 쪽으로 막 가고자 하지요. 그런데 ‘어딜 넘봐’ 해서 불 휘두르는 천사들을 가지고 강제로 못 가게 만들었어요.
천국에 못 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참 좋으신 하나님이죠. 천국에 못 가게 하시는 하나님. 천국에 갈려면 천국에 갈려는 나를 죽여버리고 예수님께서 새로 만든 자만이 만들어 보니까 그 자궁, 그 만드는 그 자궁이 여자거든요. 여자에게만 자궁이 있다 이 말이죠. 여자의 자손으로서만 새로 지음을 받는 거에요.
그래서 여기 이사야 7장 14절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 여러분들이 외우고 계시는 분 있지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잉태하여, 여자지요. 남자 없습니다. 처녀란 말은 남자 없다. 처녀가 인간적으로 보면 스스로 잉태한 거에요. 스스로 잉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다음에 뭡니까? “그 이름을 임마누엘”.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그 새로운 인간을 여기서는 우리라고 이야기하고 그 우리는 어디서 나오느냐? 처녀의 자궁에서 나오는 거에요. 여자의 후손에서 나오는 거에요. 창세기 3장 15절 약속대로.
그러면 남자-여자에서 태어난 자식은 전부 다 ‘NO’가 돼요. ‘아니요’가 되는 겁니다. 육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오’에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한 것처럼 육으로 난 자에게는 할례 언약을 해서 피를 내버리잖아요. 죽었다는 걸로. 태어난 것을 죽은 자로 보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의 출생은 무엇의 징조냐 하면은 죽음의 출현입니다. 한 서른 살 살았으면 죽은 몸이 30년 된 거고 한 80 사셨으면 죽은 몸이 80년까지 계속 왜 죽어야 하느냐를 그걸 까발리면서 나오는 거에요.
안쪽에서 생명이 있는 사람은 바깥으로 뭘 밀어내느냐 하면은 죽음을 밀어내요. 죽음을 밀어내요. 그러면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마땅한 것이라는 것을 그걸 즐기면서 그걸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마리아인들은요 무엇을 모르느냐 하면은 자신의 죽음을 시시한 걸로 보지 못하는 게 잘못이에요. 자신의 죽음을 시시하게 보지 않는 게 문제에요.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은 옆에 제자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54절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과 한 통 속이라고 자부하는 제자들은 인간이 죽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거에요. 주님과 멀어지면 그것은 살아도 산 게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겁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완전히 싹쓸이해버리세요. 이거는 사람 죽이는 것을 볏 짚단 태우는 것 폐기물 태우는 식으로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왜? 인간의 죽음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시시한 문제이기 때문에. 시시한 문제.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거부했을 뿐이지 그걸로 인하여 자기들이 죽는다는 생각을 감히 못한 거에요. 뭐 우리 맘에 안 드니까 가세요 이랬을 뿐이지 그걸로 인하여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당장 죽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그들은 못하는 겁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죽음을 바깥으로 내미는 게 아니고 죽음을 자꾸 안으로 숨기려고 하는 거에요. 죽음을. 쉽게 말해서 안 죽을려고 하는 거에요. 안 죽을려고. 내놓으면 되는데 생명이 있기 때문에 쓰레기 같은 이 목숨은 바깥에 내놓으면 되는데 생명 없는 사람은 있는 게 목숨밖에 없기 때문에 그 목숨을 아등바등 어떻게든 쥐고 있어야 되는 거에요. 코로나 걸리면 자택격리해가지고 해야 되는 거에요. 그게 다 시시한 일인데.
한번 적어볼게요. 죽음은 시시하다. 시시해도 너~~~~무 시시하다. 성도의 입장에서 이 죽음은 무슨 죽음이냐 하면은 가죽음이에요. 죽음도 아닌 가짜 죽음이에요. 가짜 죽음이라는 말은 그 죽음 때문에 부들부들 떨거나 주눅들 일은 필요치 않다는 겁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그래요. 그래서 인간들은 이 가짜 죽음을 무서워해서 어떤 목적을 갖는데 그 목적이 뭐냐 하면은 될 수 있는 대로 죽음과 멀리 떨어지기. 될 수 있는 대로 죽음과 멀리 떨어져야 내가 한숨 쉴 수 있다는 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오면서 주께 원망한 이유가 죽음이라는 것을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너무 불안해서 주께 원망한 거에요. 물이 있어요? 뭐 양식이 있습니까? 떡이 있습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이끄시는 지를 그들은 납득이 안되는 거에요.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려가는 것은 주님의 땅에 약속의 땅에 함께 살기 위한 목적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목적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겠지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살려주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들어가 있지를 않아요. 광야는 교체기간입니다. 생명이냐 네 목숨이냐 분명히 하라. 그 두 차이를 알라는 거에요. 목숨 지킬려고 하는 그 방식 있잖아요. 양식 먹고 물 먹고 그러나 생명은 그게 아니에요. 생명은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신명기 8장에 나오는 거에요. 그들에게 만나를 주었는데 그걸 눈에 양식으로 보이느냐? 양식이 아니고 그것은 뭐냐 하면은 말씀이에요. 만나가 말씀이에요. 만나가 내려올 때 눈 내리듯이 펄펄 내려올 때 말씀이 내려왔다고 봐야 돼요. 사람은 양식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식구들은 오늘 아침 뭐야? 오늘 밥 드셨어요? 이렇게 하지요. 오늘 말씀 드셨어요? 오늘 아침 말씀은 뭔데? 이렇게 물어봅니까? 학교 급식할 때 빵하고 이런 거 내놓지 성경 말씀 쭉 펴 놓고 오늘 학교 급식 끝. 급식할 것도 없어요. 급식 그렇게 하는 거에요? 저는 지금의 2,30대를 보면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40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들이 결혼을 잘 안하잖아요. 결혼.
결혼을 안 하는데 그들이 왜 결혼을 안 하느냐 하면은 마음에 맞는 사람이 없어서 결혼을 안 한다 하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마음에 맞는 사람이 없어서 결혼을 안 하는 게 아니고 현재 20대 30대 MZ세대 이 사람들이 결혼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에요. 젊은 애들이.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교육이 결혼이라는 것을 할 자격이 안돼요.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왜 인간이 자기밖에 모르느냐 하면은 인간은 요새 모든 교육이 뭐냐 하면은 인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이렇게 바꿔요. 계산하는 사람으로 전부 다 교육을 바꿔놨어요. 계산하는 사람, 카운트하는 사람, 측정하는 사람. 계산하고 측정하고. 전에 인간의 질서가 수학이 됐다. 수학은 수를 헤아리는 겁니다. 수를 헤아리는 것.
수를 헤아리는 이유가 수를 헤아리면서 별 하나 별 둘 헤아리면서 이게 내 것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 하면은 지금 이 시대가 가족 중심이 아니라 공동체 중심이라는 것을 배운 게 아니고요 나만 잘되면 우리 식구들 좋아하더라 그 교육을 받은 거에요. 나만 잘되면. 그러니까 식구들 좋아하는 건 뒷전이고요 일단은 나만 좋아하면 식구들 참 잘했어요 이렇게 하니까 모든 집중을 나만 잘되는데 집중을 하는 거에요. 나만 잘되는 것에.
그런데 결혼은 뭡니까?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둘이 사는 거죠. 혼자 잘 되는데 왜 한 사람이 더 필요하지요? 결국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내 하인이 되든지 아니면 내 몸종이 되든지 내 하녀가 되든지 아니면 내가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어떤 동업자가 되던지. 그런 조건 아니면 결혼할 이유가 없는데. 그들은 결혼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데 본인이 결혼할 수 있는 그런 자격자가 안돼요.
자식들보고 결혼하라는 소리하지 마세요. 교육을 계산하는 인간으로 만들어 놨는데 무슨 결혼이 됩니까. 그래서 결혼을 억지로 했다 해도 소용없어요. 또 계산해요. 또 계산한다고요. 결혼하고 나니 계산하는 인간을 완전히 정면으로 받아치는 그러한 사태가 뭐냐 하면은 애가 생겼네. 애가 생기니까 자기는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잠을 자야 되는데 애가 2시에 깨네요. 이건 계산에 없는 거에요. 미치는 거에요. “애 네가 키워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애 네가 뭔데 내 인생에 이렇게 태클을 거느냐. 그만큼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내가 힘을 길러야 죽음에서 좀 멀리 죽음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다. 연금이 많다든지 부동산이 많다든지 안심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 더러운 세계에서는 더러운 세계, 이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면은 통화 또는 화폐, 돈으로 취급됩니다. 유통을 시켜요.
뭐 설교 말씀만 하면 할렐루야. 아멘. 이게 뭐에요? 예수님이 통화에요. 통화. 통화수단. 돈 수단. 돈 유통하듯이 하는 거에요. 예수님 얼마 갖고있는지 보자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전하니까 예수님을 가지면 그 분을 가지면 가질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거에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무엇의 대상이다? 인간에게? 예수님은 살해 대상이고 미움의 대상이고 대적의 대상이다. 내가 싫어하는 대상이에요. 진짜 예수님은.
그런데 자기가 계산하니까 예수에 대해서 많이 가지면 자기 목숨부지에 많은 복이 오기 때문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말씀이 양식입니다. 말씀이 양식이고 그 말씀 중에 하나가 믿음이고 그 믿음 자체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있는 새로운 인간을 현재 아빠 엄마에서 태어난 자식 말고 육 말고 하나님께서 임마누엘로 ‘새로운 우리’라는 그러한 자기 백성을 친히 누가 만드는가? 예수님께서 친히 만들어요.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창조라고 해요. ‘창조’. 예수님을 위한 창조에요. 인간은 나를 위한 창조이기를 원하는 식으로 이미 인간은 타락해버렸습니다. 모든 세상에 보이는 모든 자연이 나를 위해서, 나 인간을 위해서 세상 돌아가는 게 나 좋아라고 내가 원하는 바를 제공하는 쪽으로 돌아갔어요. 주님께서는 그걸 다 제거해버립니다. 그걸 다 죽여버려요.
예수님을 위한 창조. 그럼 예수님을 위한 창조는 뭐냐? 예수님 없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새로 생긴 그 창조와 함께 임마누엘 그게 바로 예수님의 나라고 그게 천국입니다. 천국은 들어가는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하늘에서는 못 만들어요. 왜? 예수님의 공로, 십자가에 죽는 공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을려면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인간들에게 살해당해야 돼요.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싫어한 바 되고 어떤 인간도 예수님 하는 일에 나는 기여했습니다 할 사람이 아무도 없게 만들어요. 모든 인간도. 어떤 인간도 주님이 하신 일에 기여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발생한 믿음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내가 믿는데 내가 보탠 게 하나도 없다는 그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어찌 이렇게 믿음을 주셨습니까 이렇게 되지. 내가 믿을려고 산 기도 많이 다녔어 이런 거 있을 수 없어요.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에베소서 2장. 믿음은 사람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 믿음이 예수님의 믿음이 바탕이 되어서 만들어진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거듭난 사람이에요. 거듭났다는 말은 전에 없던 인간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믿음이란 전에 없던 인간,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인간 그 백성들, 그 백성들 관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바로 구원받는 거에요.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에요.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만들어냄으로 만들어내서 예수님의 믿음만 담겨 있는 사람. 그게 믿음이에요. 그런데 54절에 보면 제자가 이런 이야기하지요.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하늘을 따라서 내려오게 하겠다 하지요. 하늘이 어디 있느냐? 제자들은 하늘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한 거에요. 하늘에 있다 생각한 거에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미 하늘을 통해서 하늘이 열려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셨으면 예수님 자신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지상에 내려온 하늘이 돼요. 예수님 자신이. 이걸 요한복음 15장에서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엄청난 말이죠.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너희들은 자꾸 아버지를 보이라고 이야기하느냐. 내가 하는 일이 곧 아버지의 일이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하늘이 열려서 불이 떨어지게 되면 “하늘의 불을 명하여서 불이 떨어져서 그들을 다 멸하게 하소서” 이것은 제자들이 신나는 어디 감히 우리 주님을 거부해. 한번 맛 좀 봐라 하는 식으로 뭔가 떨어졌으면 참 좋겠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다는 말은 실제로는 예수님이 하시는 이 모든 말씀이 이게 하늘의 불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뭘 오해하느냐. 불이 떨어지게 되면 새까맣게 연탄 되던지 재가 되어야 그들은 그걸 뭐로 생각하느냐 하면은 그걸 죽음이라고 생각한 거에요. 제자들이 아직도 예수님을 모릅니다. 사람이 숨 끊어지고 피부 조직이 새까맣게 타야 비로소 그들은 죽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들은 진짜 죽었다는 게 뭔지를 몰라요. 인간이 죽었다는 게.
주일 낮 설교 때도 했지만 다시 하게 되면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마지막 결과로서가 될 때만 죽음이에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럼 인간이 따먹은 선악과는 그거는 죽음의 끝이 아닙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할 때 그 죽음 안에 누가 뛰어 들어가느냐?
예수님이 그 안에 뛰어 들어갑니다. 뛰어 들어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 이게 바로 죽음이에요. 그러나 지금 인간들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게 없어요. 그냥. 물론 힘들게 인생 살아가지만 버림받는다는 것은 최종적인 버림받음. 최종적인. 그 버림받음은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든다고 해서 그 버림받음이 다 성사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그 버림받음에 홀로 그 자리에 들어가 있어야 제대로 된 버림받음이 되는 겁니다. 이게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글로 한번 적어볼게요. 십자가에서 그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말을 하셨잖아요. 이것은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소환하는 거에요. 자기 죽음에.
이게 내가 십자가 죽는 것은 여기에 누구의 뜻이 들어오느냐 하면은 아버지의 뜻이 여기 관여되어 있음을 십자가에서 외치는 거에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뭐 시편 21편 그거 외워서 한 것도 아니고요 자기가 너무 아파서 주님에게 버림받은 것이 억울해가지고 한번 죽을 때 죽더라도 한번 나는 옳았다 그거 과시할려는 게 아니고 ‘아버지 어서 이 자리에 함께 오세요’
오셔가지고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틈새, 없는 틈을 만들어버려요. 없는 틈을. 이건 건너갈 수 없어요. 틈을 만들어 버려요. 그게 바로 뭐냐. 그게 죽음입니다. 생명과 완전히 갈라져서 틈이 되어버리는 거에요. 마치 천국은 지옥으로 지옥은 천국으로 왜 못 가느냐? 거기 틈이 생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틈은 누가 만드는가? 아버지와 아들이 아주 작심하고 만든 틈이에요.
그래서 지옥 간 사람 천국 못가고 천국 간 사람 지옥 못갑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아요. 그 틈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요 예수님 안에서 어떤 틈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 아버지는 점잖게 계시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일 잘 하시면 거기 같이 일했다고 협조된 자기들도 예수님과 한 편이라고 인정 받아가지고 예수님과 더불어 구원받을 생각하는 거에요.
틈이라는 것, 완전히 균열된 건널 수 없는, 예수님께 있다는 것은 제자들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예수님 자신도 틈에서 못 벗어나요. 자신도. 아버지와 자기 자신의 틈도 본인도 못 건너가요. 성령이 오셔야 가능해요. 성령이 오셔야 예수님께서 사흘 뒤에 부활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실을 모르는가? 알아요. 마태복음 16장에 내가 고난 받고난 뒤에 사흘 뒤에 살아난다는 것 다 아시고 여기 5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한이 차가매”, 예수님도 다 알아요.
알지만 지식이 되는 게 아니고 바로 이 틈이라는 그것에 대해서 그 틈 자체를 위해서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되고 희생해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죽음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죽음은 어떤 걸로 이것은 지울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지울 수 없는가? 온 우주가 불바다 돼도 이 죽음은 지울 수가 없어요.
이 죽음을 세 자로 이야기하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에요. 그 틈이 복음이에요. 그 틈이. 틈을 건너왔기 때문에 뒤돌아보면서 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이게 성도에요. 입을 살짝 가려야 돼. 내가 저걸 어떻게 건너왔지? 이거는 성령 아니면 다른 길로 설명이 안돼요. 내가 어떻게 건너왔지? 건너올 수가 없는데. 교회 다닌 것도 안 되고 신앙 생활한 것도 아무 소용없어요.
주님도 못 건너는 틈을 어떻게 건너왔지. 죽었다가 살린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 이제는 그 영이 아버지의 영이 아니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영이 되어서.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늘의 우편에서 성령을 주시거든요. 주시는 이유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그것을 예수님이 그 주의 자리에 앉아서 아버지가 한 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하시는 거에요. 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 설교.
성령을 주심으로써 요한복음 1장도 나와요. 성령으로 오신 그 분이 성령을 받은 그 분이 우리에게 성령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요한복음 1장에서 예언되어 있지요. 요한복음 1장 요단강 세례받을 때.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거에요. 성령을 주시니까 이거는 어떻게 거듭나야 됩니까 라는 니고데모에 대한 말의 답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된다. 다시 태어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면 성도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외칠 이야기는 딱 하나 밖에 없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이 죽음 이야기. 모든 인간은 죽었고 예수님도 죽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자기 택한 백성을 위한 대신의 죽음이었다. 이 이야기가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게 유일한 현실이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에. 온 우주의 핵심 비밀이 이거에요. 다른 것은 없어요.
그래서 인간들이 안 죽을려고 하는 모든, 살면서 죽지 않고 더 오래 살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죽음이라는 십자가 앞에서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살려고 하는 모든 것은 죄가 되지요. 예수님과 인간의 틈새가 곧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틈새였고 그것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틈새가 되는 겁니다.
미리 한번 보시면요 여기 59절에 보면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이렇게 나오지요.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장례 치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죽음을 한 가지 종류로 이야기해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해라”
다시 말해서 살아있다, 죽었다라는 그 너희들의 생각 자체가 그것이 갭을 뛰어넘을 수 없는 저주받은 상태, 죽음의 상태다 이 말입니다. 61절에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인사,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이것은 장례가 아니고 인사, 이제는 당분간 못 보게 되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효도할랬는데 돌아와서 효도할게요. 인사를 할려는데, 62절에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뭡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 있잖아요 예수님의 이 말씀. 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번 조립을 해보자. 다시 한번 정리를 시켜보자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개념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이 세상에 효도한다든지 장례 치른다든지 이 세상에서 뭐 어떻게 뭐 해볼까 하는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죽음 현상이 되는 거에요. 저주받을 일이 되는 거에요.
첫째 시간을 이제 끝내면서 이 이야기를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하고 제자들하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이제 자리 옮겨서 이야기하자. 식당에서 이야기하다가 이제 식당에서 눈치 보이니까 요 옆에 자리 옮겨서 카페에서 이야기하자. 이 세상 자리, 이 죽음의 자리에서 이야기해야 될 그런 자들을 주님께서 만들어내시기 위해서 그 근거, 바탕이 되는 과정을 주께서 몸소 겪은 거에요. 다른 자리에 가서. 그 다른 자리가 뭐겠어요? 천국 아닙니까. 생명이 있는 자리잖아요. 이 자리 말고.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