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20217b슥10장3절(양의 한계)-이 근호 목사
안양20220217b슥10장3절(양의 한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인간은 한계에 돌파할 수 없다 했습니다. 양은 한계에 돌파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목자에 대해서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인정해야 돼요. 이방나라의 모델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목자를 통해서 양들을 다스리는 체제로 갔거든요. 그런데 목자가 그렇게 되게 되면 목자가 만약에 딴 생각을 먹어버렸다. 그럼 양의 운명은 어쩔 수 없어요. 목자가 양의 한계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자체가 목자 없는 양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목자 없는 양은 양이 아니에요. 그거는. 그거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목자를 공격하고 이제는 양이 목자 노릇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건 없어요. 목자가 썩었고 목자가 없다고 할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세요.
제대로 된 목자가 준비되어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양은 또 기쁜 소식 할게요. 기쁜 소식만 하네요. 양은 이사야53장 말씀처럼 자기 마음대로에요. 그냥 점이에요. 점. 첫째시간에 점은 실수나 실패가 없다고 했지요. 점은. 그리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요. 그냥 점이니까. 포인트니까. 그러니 성도가 자기 실수를 자기 실패를 탓하면 안돼요. 왜? 점 자체가 목자 안에 있는 양답기 때문에 그래요. 목자 안에 있다는 양. 한계는 목자가 정하지 양 스스로가 한계를 정하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목자가 오면 돼요. 새로운 목자 오면 되지 내가 스타 되고 내가 훌륭한 사람 되고 실수 줄이고 악을 줄이고 그럴 필요 없어요.
악을 줄이는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그래요. 전에 이방민족에 있을 때는 이방나라는 목자가 없어요. 그냥 눈치 보는 거예요. 이 세상 전체를 눈치 보는 거예요. 세상 전체를. 목자가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체제에요. 이스라엘 구조에요. 그런데 에베소서2장에 아까 했던 다시 하면 2장에서 주님께서 피 그 다음에 원수, 그 다음에 피, 원수 같이 묶고 너, 나 할 것 없이 한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된 모습이지요. 이제는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구분하지 않고 그리스도 피로 예수님과 한 몸 되는 거예요. 내가 니하고 한 몸이 아니고 예수님과 한 몸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한 몸 되는 게 아니고 이방인이 이스라엘과 한 몸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거예요. 왜? 사라진 분은 예수님뿐이기 때문에. 이 분이 바로 목자거든요.
보이지 않는 목자와 한 몸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양이에요. 그 목자가 올 때까지 눈에 보이는 한시적인 양으로서 양의 구조를 갖춘 것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을 지금 스가랴를 통해서 지금 지적하고 박살내고 있는 거예요. 목자가 썩었다. 목자가 잘못되었다. 자, 그렇다면 다음에 중요한 게 뭐냐 하면 그러면 염소라 했다 말이죠. 아까 10장3절에. 내가 목자에게 뭐를 발합니까? 노를 발하며 내 숫염소를 벌하겠다. 되어있지요. 그러면 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분노하고 화를 내고 염소라고 지적을 하게 되면 그럼 목자는 절로 생깁니까.
이 말 듣고 사람들이 “아이고, 그럼 우리는 새로운 제대로 된 목자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일이 해결 돼요?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고 더 망쳐요. “제가 이제부터는 바르게 살겠습니다.” 이게 어디에 해당되지 않느냐 하면 구약의 선지자의 말에 이게 결합이 안 되게 되어있어요. 선지자의 말은 니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이제부터 정신 차리라, 바르게 살겠습니다. 말을 듣고자 선지자가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선지자의 말은 니가 아무리 용을 써도 내가 너를 예언하는 예언대로 너로 망할 수밖에 없어. 그게 이스라엘의 운명이야. 끝! 이게 선지자에요. 이게. 이게 우리를 향하는 성경 말씀의 전체가 우리보고 그렇게 외치고 있는 거예요.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라. 예. 악은 어떻게라도 버리겠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성령 받고 보니까 나라는 한계에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된 거예요. 그러면 이미 그 자체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가 이 안에서 성사가 되고 있는 겁니다. 왜? 내가 생각한 나는 주께서 알아서 나에 대해서 미련 갖고 애착 갖는 나를 주께서는 신경 안 쓰도록 세상 돌아가는 일이 계속 그런 쪽으로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믿을만한 것들이 실망으로 바뀌는 식으로 주께서 이끌어주시니 이건 뭐 자동적으로 모양이 악의 모양이 버려지는 게 돼요. 세상에 대해서 실망스럽다는 말은 더 나아가서 그 세상에 대해서 희망을 갖은 내가 한심스럽고 진짜 짜증나고 하나님 보시기에 짜증나고 내가 나 보기에 짜증나. 내가 원망스러워. 그 딴 거한테 왜 자꾸 희망을 걸었느냐. 그 딴 거한테. 헛되고 헛된 것들한테. 거기에 희망을 거는 내가 한심스럽고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몰아가시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지자의 말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바르게 하면 니 앞으로 잘될게. 이게 아니라 이미 결정 났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멸망하기로 목자는 숫염소가 되어가지고 분노의 대상이 되기로 이미 하늘나라에서 이미 탕! 탕! 이미 결정 났다는 이야기를 이미 통보하고 있는 거예요. 앞으로 잘할게요. 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앞으로 잘할게요. 니가 니를 믿어? 그동안 니가 니를 믿어서 잘되는 꼴은 못 봤어. 니 안 믿어. 니도 믿지 마! 뭐 장담을 해. 각오를 다지고. 각오 다지지 마! 너 안 돼! 너 끝났어. 그거거든요.
그럼 이젠 내가 이제부터는 내가 양을 원수로 보지 않고 내가 좋은 목자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없는 원수를 유발합니다. 없는 원수를 유발해요. 유발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바로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메시아가 옴으로서 그들에게 뭐가 발생되느냐, 피가 발생되고요, 배척되는. 배척되는 사건이 발생되고 그로 인하여 바로 과연 원수는 원수이었었다. 하는 것이 들통 나게 하는 거예요. 적이 발생되는 거예요.
주님이 하는 모든 말씀은 적이 없다는 현장에서 적이 나타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이 예언의 선지자의 말씀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그랬구나! 그래서 미리 그 말씀을 확정지었구나!” 라고 고개 끄덕이게 만들어요. 고개 끄덕이게. 니 집안사람이 원수라고 할 때, 이건 앞으로는 싸우지 말고 화목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고 “그랬구나! 집안이 내 원수가 아니고 일단계는 주님의 원수가 되고 그리고 내가 주님의 몸과 하나가 될 때 내 집안 식구가 주님의 원수인 동시에 그 안에 들어있는 나의 원수가 되도록 주께서 일을 그렇게 매끄럽게 깔끔하게 처리해 주시는구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늘 아들한테 며느리한테 무시당하는 그 시어머니가 잘 할 수 있는 게 김치 담그는 거 하나 잘한다. 예를 들어봅시다. 그러면 일년중에 시어머니가 값을 하는 날이 와요. 그게 김장하는 날입니다. 며느리 다 불러놓고 자기 솜씨를 마음껏 보여주는 거예요. 나 이 정도야. 이래도 무시할래. 그래가지고 한 다라이 해가지고 퍼주면 며느리 김치 갔다가 지 집에 쓰레기통에 버려버리고 사먹고.
우리 자신은 믿지 마세요.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 제대로가 뭔지를 몰라요. 무엇이 제대로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실패, 실수라는 게 성립이 안돼요. 뭐 제대로 한 게 있었는데 실수했다. 이러면 실수라는 게 있는데 제대로가 뭔지를 모르는데 무슨 실수, 실패가 있겠어요. 그래서 여기서 필요한 것이 뭐냐 말뚝이 필요하고요, 모퉁이 돌이 필요하고요, 그 다음에 싸우는 활이 필요하고요, 권세가 필요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4절에 나옵니다.
모퉁이 돌, 말뚝, 싸우는 활, 권세 잡는 자. 이 네 개를 합치면 메시아의 할 일이에요. 메시아가 하신 일이에요. 워낙 우리가 부실하니까. 우리는 눈치 보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까. 워낙 부실하고 우리의 한계는 목자밖에 못 벗어나요. 본인이 사기꾼이 와가지고 내가 목자라 하면 뭐 어쩔 수 없어요. “총신 나왔습니까?” “예. 목자 나왔습니다.” “예, 아이구, 목자 맞구나!” “내가 성만찬한다. 내가 세례 베푼다. 당신 나한테 대들지 마! 세례 누구한테 받았어? 나한테 받았지. 니가 나한테 대들어. 니는 니 스승도 몰라?” 이러면 그 때는 마태복음 23장을 또 몰라요. 교인들이. 목사가 알려준 적이 없어가지고 이 땅에 있는 지도자를 지도자라 하지 말라. 들어본 적이 있어야지요.
‘아하, 맞아. 지도자 없이는 우리가 구원 못 받는구나! 더럽더라도(혀를 차며) 나보다 나이가 적더라도 고개를 숙이자.’ 이런 식으로. 월급 올려 달라 맨 날 이 핑계, 저 핑계 세미나 비용대고 맨 날 비용 빼먹을 때도, 아이고 참자 주의 종은 하나님이 다룬다 하지. 일반 양은 다루는 법이 아니라 하지요. 주의 종은 하나님도 안 다루어요. 왜? 쓰레기이기 때문에. 다룰 가치가 있어야 다루지요. 뭐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 다루지요. 다루지도 않아요. 쓰레기는 버리면 되지 안 다루어요. 안 다룹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다루어요. 쓰레기는 안 다룹니다. 주의 종을 벌하는 것은 하나님이 벌한다고. 아니에요. 이 세상에 피 흘려서 원수 된 자만 주의 종을, 주의 목자가 되고 그 사람만이 염소를 염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주의 종가지고 니는 가짜야. 목자라 하는데. 누가 봐도 돈만 챙기는 목사가 어느 날 내 남편이 대장암 말기에 걸렸는데 기도하고 나서 나았다. 어떻게 됩니까? 남들은 전부 욕해도 그 사람만큼은 표를 그 사람한테 덮어야지요. 자기 이익을 받았으니까요. 그러니까 목사들이 목회할 때 딴 목회가 딴 게 아니에요. 심방가가지고 자기 표 밭다지는 게 목회에요. 아, 참 이제야 말한다. 이거에요. 표밭 다지는 거예요. “애가 요번에 대학 들어갔지요.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장로님 오늘 생일이잖아요. 아내가 기억하네요. 해가지고 작은 거나마 케익 들고 왔습니다.” 이런 거. 아이고 우리가 목사님 사드려야 되는데. 아닙니다. 섬기는 자가 높으다 했습니다. 온갖 성경구절 다 동원해가지고 자기 자리를 보전하려는 그런 발악을 그냥 발악을 해요. 발악을.
목자는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누구냐, 나의 원수 되신 그 분. 그 분이 목자에요. 나의 원수 되신 그 분이 목자에요. 피 흘렸다는 뜻이 뭔 뜻이에요? 나의 원수였다는 거잖아요. 아무도 못 알아봤다 이 말아닙니까. 그 분이 나의 유일한 목자이고 다른 목자는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1장에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나는 너희를 위해서 피 흘린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메시아가 아니야.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세례주지 않는다.
세례는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성령세례 외에는 다른 세례는 없습니다. 물세례는 성령세례 오기 전에 한시적인 거였던 겁니다. 한시적인 것. 만약에 물세례 없으면 구원 못 받을 거 같으면요, 물세례 줄 때 아무나 못 주잖아요. 애들 물 뿌리고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뭐가 필요해요? 목사 필요하지요. 목사 필요하면 신학교 필요하지요. 신학교수 필요하지요. 월급 줘가지고 목사 시키는 이유는 나한테 세례주려고. 왜 그래야 되는데. 그래야 내가 양인데 구원받기 때문에. 이러한 이데올로기, 이념, 이런 세뇌, 이건 바로 진짜 피 흘린 분이 나의 내가 그 분의 원수라는 것을 흔쾌히 안 받아 들여서 이런 사단 난 거예요.
십자가 졌다 하면 주여, 제가 주의 원수입니다. 이런 고백만 하면 돼요. 그걸 세례는 뭐라고 했는줄 알아요. 누가복음 18장에서. 내가 죄인입니다. 그 이야기한 거예요. 주님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감히 고개를 못 들겠습니다. 그러면 될 문제를 가지고요. 수요일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과의 공통의 자리는 주님은 의인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죄인으로 돌아가고 끝나는 거예요. 그 공통된 자리에 우리는 죄인으로 돌아가고 주님은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분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양은 양이 죽었다는 말은 이삭이 죽는 자리에 양이 죽었다는 말은 양은 하나님의 표상이고, 거기에 누가 죽어요. 이삭이 죽잖아요. 양과 결합이 될 때 이삭이 살아나잖아요. 스톱! 해가지고. 양 잡고 이삭은 이미 죽은 자지만 양 덕분에 살아난 자로 새로 언약 개시. 언약 스타트! 언약 새로 개시. 그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잖아요. 그게 새로운 피조물이라고요. 이게 벌써 구약 때 창세기22장부터 벌써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유월절 되게 되면 어린 양 피 바르고 이스라엘 백성은 살고.
자, 그러면 이제 첫 번 시간에 처음 나온 거 어려운 거 해보겠습니다. 왜 기존의 모든 목자, 제사장도, 선지자도 세워놓고 거짓 선지자죠. 물론. 세워놓고 왜 그걸 염소라고 짐승이라고, 양을 뜯어먹는 짐승에 불과하다고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게 무슨 문제 때문에 그런가, 혈통 문제 때문에 그래요. 혈통 문제. 혈통 문제가 어려워요. 쉽게 이야기해서 기존의 혈통을 아담의 혈통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기존의 혈통. 이스라엘과 이방나라 둘 다 공통점이 뭐냐, 둘 다 혈통으로 유지되는 나라들이에요. 혈통으로. 아버지 없는 아들 없고, 할아버지 없는 아버지 없어요. 혈통이 혈통으로 내려온 나라에요. 둘 다. 둘 다 메시아 올 때까지는 구약적이에요. 구약적. 구약적이라 하는 거예요.
구약틀을 안 벗어나요. 구약틀은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주어지는데. 두 번째 요소가 중요해요. 첫 째는 땅이 실제로 주어집니다. 그 다음에 자손이 실제로 주어진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실제로 주어지고 아브라함의 땅이 실제로 주어진다. 이 땅이 무슨 땅이냐 가나안 땅입니다. 이거 어디에서 이루어졌어요? 여호수아 할 때 이루어졌잖아요. 지난 수련회 마지막 할 때 여호수아의 마지막에 요셉이 어디에 묻힙니까? 세겜이라는 곳에 요셉 뼈가 묻히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은 사실은 내부에 이스라엘 중요핵심부에 요셉의 뼈가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럼 요셉은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산 사람이에요? 죽은 쪽이지요. 이미 죽은 쪽에 영향력이 산 사람 쪽에 미친다는 거예요. 이미 죽어서 없어지고 사라진 쪽이 있다고 여기는 쪽에 영향력을 계속 주고 있다는 그것을 실제로 증거로 보여주는 것이 여호수아전쟁이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방민족에서는 어처구니없지요. 도대체 아무리 봐도 무기도 변변치 않고 훈련된 군사도 아닌데 이상하게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아이고 성이 무너지고 요단강 갈라지고 도대체 어디서 든든한 백이 누구야? 배후에 백이 뭐가 있어? 그건 죽은 자의 백이지요. 죽은 아브라함의 백이고, 이삭의 백이고, 야곱의 백이지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죽은 자의 아버지 이게 바로 하나님 아닙니까. 이게 이방민족의 신과 다른 언약의 하나님이잖아요.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혈통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살아있는 자가 살겠다는 혈통을 뭐로 바꿔야 돼요? 죽은 자의 혈통 속에 가입하는 것. 이게 관건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미 죽으신 분이 영향력을 산 쪽에다가 영향력을 입혀줘야 돼요. 산 사람이 자살한다고 혈통의 족보가 언약의 족보에 가입이 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백신, QR코드 한다고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시 할게요. 첫 번째 한 거 원칙을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원칙은 원수가 없이는 새로움이 없다 했지요. 아까 에베소서2장에서. 아까 새로운 피조물 했잖아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원수를 일부러 만드는 거예요. 원수. 혈통과의 원수. 혈통과의 원수는 바로 언약에 속한 분이 혈통과의 원수를 유발시켜 버려요. 어떤 인간도 자기 혈통, 자기 살아있는 몸에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꼼짝 마라! 지요. 살아있으니까 밥이나 먹고 먹으려면 돈이나 벌어야 될 거 아닙니까. 이건 뭐 너무나 상식이고 이건 뭐 이걸 문제 삼는 사람이 문제이지. 이게 무슨 문제가 되겠어요. 이게 무슨 악의 모양이에요. 이게. 이게 무슨 악입니까. 내가 사는 게 무슨 악이 되겠어요. 그럼 죽으라는 말입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이 너무 항상 과해요.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말 같으면 우리가 들어주지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집안 식구가 원수다. 이 말은 항상 너무 과도해요. 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런 말도요, 한 마디 한 마디 이렇게 너무 심하지 않다는 말이 하나도 없어요. 전부다 너무 심해요. 이건 예수님 말씀뿐만이 아니고 선지자 말도 그래요.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어쩌라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혈통 자체를 원수로 하기 위해서 스스로 뭐냐 하면 버림받는 자 되신 거예요. 스스로 버림 받아버려요.
그럼 버림받으면 뭐냐 하면 버림받게 되면 이 세계는 여전히 건재한 세계가 되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뭡니까? 버림받은 쪽이 되겠지요. 버림받을 때 곱게 나가주세요~~ 하고 버림받은 게 아니고 여기서 원수가 되지요. 원수. 원수된 것은 버림받았지요. 버림받은 쪽에 여기에 여전히 건재한 세계에서 자진해서 버림받은 쪽이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지요. 아무도 없는 거예요. 이게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만 제공하는 양, 또는 나의 한계입니다. 전에 한계는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요새 같으면 시장경제가 한계이고, 그 당시 유대인 같으면 지도자들이 한계가 되고. 율법이 한계가 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 바로 너는 나의 원수고, 나는 너 때문에 나는 죽었다고 이야기할 때 이게 뭐냐 하면 나의 양이 나의 한계가 십자가까지 이게 확장된 거예요. 십자가까지. 아~ 이 세상 넘어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 넘어 가보니까 산 넘어 가보니까 거기에 제대로 된 저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어린 애들이 동네 산을 보면서 특히 연약한 감성을 가진 애들은 꿈을 꿔요. 저 산 넘어 뭐가 있을까? 산 넘어 어떤 이상세계가 펼치는 거예요.
옛날 내가 알던 노래 이런 노래가 있어요. 산 넘어 산 또 넘어 산. 아득한 고향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산 넘어 산 또 넘어 또 산. 아득한 고향 있어요. 굉장히 노래가 슬퍼요. 여러분이 아시는 오빠생각 같은 거요. 오빠생각도 고향에서 벗어나요. 오빠가. 벗어나서 서울 갔던 오빠가 내 한계선에서 벗어난 외부에 있는 오빠가 나에게 비단구두 사주지요. 그게 애들의 여망이고 이게 바로 교회 다니는 사람의 여망 아닙니까.
주님이 천국을 줄 거라 생각하지요. 그러나 내가 했던 막상 그 한계를 그냥 꿈으로 여지로 남겨둔 이건 내가 미처 모른다고 한 그것을 몽땅 알게 하셨습니다. 그게 뭐냐 내가 내 너머에 내가 죽어 마땅한 십자가 죽어 마땅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고 내가 바로 당사자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게 바로 우리가 느끼는 한계입니다.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내가 누군지를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마치 군대생활 힘들어서 철조망 넘어 탈영을 했는데 탈영해서 보니까 더 넓은 철조망이 있었던 거예요. 더 넓은 철조망이 있어가지고 탈영 괜히 했어. 그냥 탈영하지 말고 그냥 종교생활이나 할 걸. 주님께서는 이 아담의 혈통 자체를 이걸 한계로 삼아버립니다. 인간은 왜 살고자 하느냐 아담의 한계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혈통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내가 있음으로서 부모가 나의 한계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할아버지가 있음으로서 내가 백날 애써도 할아버지 틀을 못 벗어나는 거고, 내가 백날 애써도 증조할아버지 틀을 못 벗어나고, 백날 노력해도 아담의 틀을 못 벗어난다는 것. 선악과 따 먹은 그 정녕 죽으리라에 그 사실만 계속 내 자식들에게 전수하지요.
우리가 자식을 키워서 남겨 준 것은 자식이 늙어죽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준 게 없어요. 아이고, 아이고, 이 볼때기 이쁜 것. 이쁘다 해도 그렇게 해도 결국 그 이쁜 볼때기 나중에 늙어 죽는 볼때기. 뭔가 이렇게 사라지고 흘러가요. 강물처럼. 자꾸 없어져. 닳아지고. 그러면서도 해답은 없고요. 그래서 요 문장을 쓸 텐데 ‘인생은 문제만 야기한다.’ 살면 살수록 계속 문제만 야기합니다. 너무나 힘든 문제가 등장하면요, 심지어 이런 말을 해요. 내가 5년 전에 일찍 죽었으면 좋았을 걸. 괜히 5년 더 살아가지고 문제만 더 크고. 이런 꼴 보려고 더 살았나. 자식들에게 그러잖아요. 자식들이 마구 싸우면, “내가 이런 꼴보려고 눈을 못 감은 줄 아나” 부모들이 화를 낼 때 그런 말을 한다고요. 내가 못 볼 걸 봤다. 이런 식으로. 인생은 살면 살수록 문제만 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흘러간다는 것. 아담 혈통. 아담 혈통 문제는 계속 흘러가게 하는 거예요. 인간 세상에서 성공한다. 출세한다, 하는 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KTX 기차를 타는데 어떤 염치없는 아주머니가 오성역에서 타가지고 그 다음에 천안역까지 한 10분밖에 안 걸려요. 아무도 표 검사를 안 하니까. 오성역에 들어갔다가 앉아 있다가 천안역에 후딱 내리면 돈 벌었잖아요. 앉아있으니까 승객 관리하는 아가씨가 딱 와가지고 이 자리에 앉으시면 요금을 내셔야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돈을 낸 게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른 자리에 앉아요. 이게 인생입니다. 이 자리에 앉으면 돈 낸다 하니까 옆에 옆에 자리 앉는 거예요. 결국 오성역에서 돈 냈어요.
이 세상, 이 자본주이 안에 있는 모든 남자나 여자나 자식들이나 부모나 모든 하는 일이 이 짓하고 있어요. 이 사업하면 걷어치우고 딴 사업하고, 도박을 쳐도 이 자체가 아담 열차 계통 자체가 지금 흘러가는 거예요.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비고정적이에요. 비고정적. 오늘 제목 이걸로 하겠어요. 비고정적 혈통. 그러니까 이 목자가 와가지고 “똑바로 살아. 바르게 살아.” 이게 됩니까? 안 됩니까? 이 열차 자체가 흘러가는데 여기에 앉지 말고 저기에 앉아. 이게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그러면 목자가 해야 될 것은 이 자체를 기대하지 말아야 돼요. 원수를 만들어야 돼요. 원수를 만들기 위해서 만들고 그 다음에 뭐해야 되느냐 혈통을 고정시켜 놔야 되지요. 앞침으로 못으로 박는 것처럼. 그게 바로 4절에 모퉁이 돌, 말뚝, 그리고 싸우는 활이라 하는 것은 결국 싸움을 통해서 이 일이 벌어져요.
그 다음에 권세 잡은 자. 마지막에 권세 잡은 자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28장18절이요.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제 감이 오지요. 아~! 이 분이 목자구나! 왜? 권세는 확정적이에요. 그래서 점 같은 우리한테는 실수, 실패를 우리한테 묻는다? 안 묻는다? 우리 자체를 안 물어요. 아예.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묻지를 않아요. 왜냐? 이사야53장6절에 양은 각지 제 갈 길로 가거늘, 양의 특징은 제 갈 길로 가는 거예요. 왜? 목자가 확정이 안됐으니까. 이 목자가 괜찮은 목자일까, 저 목자가 괜찮은 목자일까, 11호차 탔다가 12차 탔다가 그냥 자리 이동해가지고 그냥 눈치 보면서 꽃꽂이 하다가 치우고 술집하다가 치우고 노래방하다가 치우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다가 커피점 때려치우고 뭐 그냥 뭐 계속 아담의 혈통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17장2절 봅시다. 성경 이렇게 찾아보는 것은 하나라도 기억하라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그 다음 뭡니까?)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니라.” 영생을 받을 자에게만. 더도 덜도 말고 딱 영생 받을 자에게만 아버지와 아들이 창세전에 이미 의견한 대로 그 사람, 그 사람 천국 들어와. 들어와야 돼. 탁 탁 집었던 그 집었던 사람에게만 영생이 가도록 그래야 영생이 허비가 안 되니까요. 영생이 허비가 되면 안돼요. 낭비가 되면 안 되잖아요. 영생은 딱 그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 권세를 조정해요. 권세를.
그러면 영생 받을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 한계를 저주 받아 마땅함을 깨닫게 돼요. 안 그러면 주님 주신 영생에다가 내 착함을 거기다가 자꾸 보태려고 하는 거예요. 이러면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 된 자, 나는 세리요, 창기요, 하는 그게 완전히 날아가 버려요. 주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졸지에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의인이 되어버리니까. 그건 주의 일을 일종에 훼방하는 게 되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권세를 가지고 우리에게나 세상 사람에게나 딱 적합하게 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애착과 미련을 안 갖게 만들어요. 그건 니가 모자란다. 나쁘다가 아니라 니가 니하는 일에 스스로 시시하게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니 자체가 어떻게 성공하고 어떻게 실패하고 이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시시한 일. 주께서 원하지도 않는데 지 혼자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그 자체 그것이 주님께서는 그 비고정적인 것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라고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권세는 그렇게 봤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주님의 권세에 의해서 자기 원치 않는 길로 가가지고 세상 사람보기에 고생 직사게 해요. 그런데 고생 직사하게 해도 고생 누가 하겠습니까? 주님의 권세가 고생하는 쪽으로 몰아넣었어요. 그러니 그들은 범사에 감사했지요. 그걸 고생이라 여기지 않고 그걸 고난이라 하지요. 주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 것을 앗싸! 한 거죠. 아! 주께서 또 일을 벌리셨구나! 이런 식으로.
그 다음에 봅시다. 말뚝 봅시다. 말뚝. 이사야22장23절에 있습니다.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사실은 못이 단단한 것과 그 다음에 아까 스가랴10장 4절에 나오는 모퉁이 돌 전부 다 같은 겁니다. 그리 보시고 그 다음에 스가랴4장7절 보겠습니다. 이건 모퉁이 돌이에요. 이렇게 보시면 성경 전체가 여러 권이 아니라 한 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한 권이죠.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은혜에 은혜가 또는 긍휼하심, 주께서 불쌍히 여기심이 거기서 있다는 거예요.
머릿돌, 말뚝, 모퉁이 돌, 전부다 이걸 합쳐버리면 고정된 것이지요. 고정된 것. 고정된 이것을 주께서는 이걸 뭐라고 하시느냐 성전이라 합니다. 성전. 요번에 여름수련회는 에스겔로 할 예정입니다. 에스겔은 성전 이야기입니다. 성전이 없는 성전이에요. 눈에 안 보이는 성전이에요. 그 벌거벗은 임금님이야기알지요. 누가 봐도 옷을 안 입었는데 신하들은 입었다고 이야기하지요. 성전은 없는데 천사가 와가지고 측량합니다. 희한하지요. 성전이 없는데 왜 측량을 해요. 측량하는 그 숫자가 뭐냐, 사람 숫자에요. 사람들 머릿수를 모아서 인간을 벽돌로 간주해서 모아지는 성전. 그게 바로 주께서 만드신 성전입니다.
그래서 어떤 그림에 보면 약간 흉측하기는 하지만 어떤 그림이 멀리서 보면 하나의 몸이 인체가 되어있어요. 멀리서 보면. 단 하나의 몸이에요. 옛날 신학교 다닐 때 어떤 그림을 봤는데 멀리서 보니까 한 그림인데 자세히 보면 하나, 하나가 사람모습이에요. 사람 하나, 하나가 세포로 구성되어있는 모습. 좀 징그럽지요. 좀 징그러워요. 내 기억으로서는 루터교에서 나온 전도용에 이렇게 나왔어요.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너와 나가 모두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서 이렇게 되어버리면 여기서 고유의 개별적인 것, 개별적인 고유성 독자적인 것은 날아가 버려요. 이걸 에베소서4장에서 뭐냐 하면 몸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여기 믿음도 하나니까 나의 믿음도 아니지요. 무슨 믿음, 우리의 믿음, 우리의 믿음이 성령을 통해서 에베소서2장8절에 믿음은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니까 주님의 이 세상에 가졌던 주님이 세상에 살면서 가졌던 아버지라는 믿음이 여기서 하나의 흘러내려서 전부 다 예수님과 합하여 이게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뭐냐 주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거예요. 주님의 이름. 주님의 갖고 있던 그 믿음을 우리가 분양 받아가지고 내게 아니고 주님의 것을 같이 흘러 제공받아 가지고, 제공받았으니까 무슨 힘이냐, 당기는 힘이 있어요.
줘놓고 당기는 거예요. 줘놓고. 그리스도에게 팍팍 당기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봤던 말뚝에요, 말뚝 다시 돌아가 봅시다. 정말 이런 거 보면 책이 66권이 아니고 한 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사야22장22절에 보면,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에스겔34장에서 제가 아까 봤잖아요. 목자를 치지요. 그러면 에스겔35장, 36장, 37장, 보면 목자가 오는데 누가 목자가 되느냐 하면 다윗이 목자가 돼요. 다윗이. 그 다윗은 이미 죽은 걸로 되어있는데 죽은 걸로 되어있는 그 다윗이 목자로 등장합니다. 그걸 가지고 무슨 언약이라 하는가, 다윗언약이라 해요.
다윗 후손이 왕이 되는 식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구성되는 약속, 다윗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은 로마서1장에 보면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분이 메시아다. 그런데 그 혈통은 다윗의 혈통인데 다윗 가문에서 온 혈통이 아니라 다윗의 가문 자체를 혈통으로 간주하지 않은 채 다윗이 다윗의 혈통이 되시는 겁니다. 다윗의 혈통을 부정하기에 다윗의 혈통이 되는 방식. 아, 어렵다. 정말.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그 분이 혈통과 바이 바이하면서 죽어버려요.
죽었는데 그것이 끊어져야 될 다윗의 혈통이 본격적으로 생명을 얻는 부활의 새로운 다윗이 혈통으로 하나님 앞에 고정적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그 족보를 가지고 무슨 족보냐, 멜기세덱 족보라 해요. 하늘에서는 족보가 없는 멜기세덱이 내용은 멜기세덱 족보고 땅에서는 다윗의 혈통이고. 그래서 단군의 후손, 단군의 자손, 단군의 자손이 멜기세덱에 들어가려면 지상에서 뭐를 거쳐야 돼요? 다윗의 혈통을 거쳐서 올라가야 돼요.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이 누굽니까? 우리를 마중하러 하늘에서 오신 분이 누구지요? 바로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영으로 우리 한국 사람에게 영으로 왔다 합시다. 예를 들어서 쉽게 금메달 딴 최민정이라 합시다. 최민정 금메달 땄잖아요. 연금 얼마 주나 그거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성령이 임했다. 성령이 임했다 하는 것은 죽은 적 있었는데 그 죽었다는 이야기가 옛날이야기였다. 라는 게 성령이에요. 왜냐 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거든요. 죽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살아있다. 능력을 품고 있는 것이 성령이잖아요. 그럼 성령이 왔다는 말은 죽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살아 있다, 에 그 경유, 그 절차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켜 줄게. 해서 오신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옛사람도 알고 새사람도 알고. 이 자본주의도 알고, 하늘나라 다 알고. 흘러가는 아담의 혈통도 알고, 확정된 최종적으로 다 이루었다. 확정된 혈통이 따로 있는 걸 알고. 보이는 세계도 알고, 보이는 세계는 너무나 잘 알지요. 왜? 본인이 한계를 느꼈던 그 세계기 때문에 본인이 못 빠져나온 세계. 늘 눈치코치보고 산 그 세계를 너무 잘 알고, 눈치 본다는 것은 누구 눈치를 본다는 겁니까? 내가 내 눈치 본다는 거예요. 니 이러면 미쳐. 니 너무 광신도야. 니 너무 나대지 마. 적당히 해. 좋은 게 좋은 거야. 남하고 원수지지 말고. 이렇게 늘 내거 챙기는 세계도 알고, 이제는 안 그러는 게 아니고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세상의 재물은 결핍을 느끼고 성도는 만족함을 느끼고, 이게 아니고 만족할 필요조차 없는 거예요. 나는 이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야지. 그것도 시시해. 그러지 마. 만족한 삶이 어디 있어요. 인간에게. 만족해도 안 해도 둘 다 시시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삶, 그 기쁨이 오래 안 간다는 것을 아는 삶, 그게 별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삶, 그게 바로 성전 안의 혜택입니다. 성전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내가 만든다 하는 게 성전이에요. 성전 자체가 주님의 확정되고 고정된 겁니다.
이제 스가랴 봅시다. 스가랴4장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요것도 좀 설명해 드릴게요. 하나님께서 솔로몬 성전을 이스라엘에게 지라 했잖아요. 박살났지요. 바벨론해서 완전히 불로 다 태웠습니다. 해놓고 난 뒤에 70년 후에 다시 와가지고 또 성전 지라 하는 거예요. 또 성전 박살나요. 왜? 어디까지나 원수가 아직 안 나타났으니까. 이방민족이 같이 겸해서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장갑 한 짝을 잃어버리면 그 한 짝 못 씁니다. 마찬가지로 둘 다가 등장해야 돼요. 양말도 마찬가지고. 짝이 있어요. 이스라엘의 원수가 등장해야 그 중에서 둘 다가 의미 없이 날아가고 이스라엘 내부에 또 원수가 발생해야 되고.
그런데 성전을 지라하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짓고 있었던 거예요. 아직까지 구약적이에요. 자, 구약적이라 하는 것은 다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면 아브라함 자손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또 아브라함의 자손이 약속의 땅에 사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 짓고 또 지라는 말은 그 성전이 어디에 있는 땅입니까? 약속의 땅이라는 것이 아직도 유효한(종말이 아니라서) 땅에 성전 지으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성전 지라고 해놓고 둘 다 다 날아갔다는 말은 약속의 땅이 드디어 마지막이 되면 그것마저 이제는 의미 없게 되는 그날 그게 종말이에요. 종말. 그럼 땅이 하늘로 올라가지요. 그럼 성전은 어디에 하늘로 올라가지요. 땅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성전이 로켓처럼 죽었다가 사흘 만에 하늘로 승천하잖아요.
승천했다는 말은 모든 언약의 완성은 이 지상에서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지상에는 오직 자본주의 사회뿐이에요. 주님 찾아봐야 주님 없어요. 하지만 고정된 것은 하늘에 있으니까 하늘에 있는 고정된 원칙 안에서 지상의 모든 것은 이제는 갇혀있는 상태에서 모든 일은 영생 줄자에게만 영생이 돌아가도록 권세를 발휘하는 그런 장이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그러니까 여기에 4장6절에 보면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성전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영으로) 되느니라” 성전이 안 보인다는 말도 되지만 성전은 바로 내 몸이 성전이라는 말도 돼요. 여러분의 몸이. 고린도후서6장에. 그리스도 영이 임한 자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다. 여러분이 아시지만 찾아 읽어드리겠습니다. 고린도후서6장16절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이리 되어있지요. 이런 말씀이 나올 때 “그래, 불신자하고 결합하면 안 돼!” 이런 식으로 하지 마시고요, “이 말씀 지키겠습니다.”가 성립이 안 되는 시대라고요. 이 시대가.
성령이 그냥 놀고 계시는 게 아니잖아요. 고린도전서3장도 마찬가지입니다. 3장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선언했잖아요. 거룩하다. 이게 확정된 것이고 모퉁이고 이게 못이에요. 이 못 내가 박았어요? 여러분이 박았어요? 내 인생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우리는 한계에 있고 갇혀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양이 되어가지고 어디로 갈지를 몰라요.
목자가 와서 양을 딱 자기 안에 집어넣으면 우리는 그 목자의 그 양이 되어가지고 목자가 선언하는 모든 성전이 되어라, 뭐가 되어라, 되어라, 너는 될 수밖에 없다. 그냥 혜택을 다 입는 거예요. 그냥. 그래서 우리가 성도가 할 것은 뭐냐 하면 주께서 다 이룬 것만 그냥 뽑아내듯이 하루, 하루 뽑아내면서 살면 돼요.
아침에 치약 짜면서 치약도 주님께서 주신 겁니다. 이리 하면 돼요. 그게 뭐어렵습니까. 말로 하려하니 길고 어렵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가지고 새벽3시반에 잠깨가지고 오늘도 잠 깨워주셔서 그것도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루 일과 시작해가지고 30분 깨다가 또 잠 자가지고 아침 10시에 일어나더라도. 그것도 주께서 하신 일이잖아요. 내가 할 게 아무것도 없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시시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것도 별게 아니기 때문에.
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점. 제목을 바꿔야겠다. 점. 전에는 악마에 속한 기계였다면 이제는 주님에 속한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기계 같아요. 끝으로 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천사가 기계에요. 천사가. 융통성이라는 것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냉정하고, 냉혹하고, 봐주는 것도 없고, 그 천사의 기능. 하나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싸우는 활. 시편45편5절이요. “왕의 화살은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왕의 원수를 염통을 뚫지요. 우리가 압니까? 양이 압니까? 아니면 새로운 확정지은 목자가 원수를 뚫어야 그래야 최종 권세를 주님이 갖고 있습니다.
인생이 힘든 것은 자꾸 정상을 찍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우리에게 정상이란 없습니다. 그냥 세례 왔을 때, 평탄케 하라 했거든요. 높아진 건 낮아지고, 낮아진 것은 높아져가지고 예수님 눈앞에서 어떤 높은 것도 없고 어떤 낮은 것도 없고 출세한 것도 없고, 실패한 것도 없고, 우리 원래 자체가 실패니까요.
우리가 목표할 정상은 우리 눈앞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정상은 없어요. 전교1등하는 거 정상 찍는 거 아닙니다. 1등하라고 주께서 환경을 그렇게 조성해서 구차 없이 1등한 거예요. 구차 없이. 나오는 건 다 아는 것만 나와 가지고 찍어서 그만 100점 맞은 거예요. 모든 것은 어쩔 수 없이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에, 종말 때에, 일어난 일을 앞당겨서 저희에게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숨어있고 세상에 보이지 않는 그 분의 활동에 의해서 죽은 우리가 이미 살았고 이미 벌써부터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천국 백성 되게 해주셨사오니 이 기쁨을 항상 잊지 말고 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