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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20214a 부산강의 : [시편]45(29:3)-초월성자유게시판시편

20220214a 부산강의 : [시편]45(29:3)-초월성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9편입니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천사를 말합니다. 천사가 있는 곳은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자리가 있는 곳에 천사가 함께 있어요.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 3절에 보면, “여호와의 소리가 물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하나님의 보좌에서 실시하게 되면 여기에는 물이 등장하고 이 물에 하나님의 소리가 이 위에 같이 작용을 하신다. 그러면 이 물은 하나님의 계시 작용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보좌에서.

물에 하나님의 계시 작용하게 되면 목표하는 것은 바로 천사와 같이 되는 겁니다. 천사가 어떤 존재냐? 2절에 보면, “거룩한 옷을 입고” 여기 거룩한, 아름다운 존재. 원 뜻은 거룩함이 아름다움 뜻인데 거룩한 아름다움 입은 존재. 하나님의 보좌에서 시작한 일은 다시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고 같이 살려면 거룩하고 아름다움을 입은 그런 존재가 될 때 가능하죠.

그러면 하나님의 보좌가 물이 있고 이 물에 하나님의 소리가 작동을 하는데 이 물이라 하는 것은 자연물입니다. 피조된 것. 자연물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 3절에 보면, 자연물에 하나님의 계시 작용하게 되면 여기서 하늘의 뇌성이 나온다, 시편엔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러면 이 사실을 일단 아시고 이 하나님의 보좌 말고 지상의 인간들의 집합체, 인간들의 사회가 있을 거예요.

이 땅에서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이 된다는 것은, 폴리스(시, 사회, 공동체, 시민), 세상에는 사회연합체에 소속되어서 연결되어 있는 존재,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만남과 만남에 의해서 형성된 그 관계망에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인간 되는 거예요. 외딴 데 자연인 한다고 산속에 들어가면 그건 인간 아닌 거예요. 따로 독립....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 사회에 소속이 되어서 남들이 같이 연락 취하고 서로 상호 돕고 도와주고 연결돼 있을 때 비로소 이 사회에서는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산속에 혼자 있으면 수염도 안 깎고 있으면 괴물 되는 거죠. 수염을 뭔 뜻이에요? 누굴 만날 때 예의 갖추고 만난다는 뜻이잖아요. 머리 감는다는 말은 냄새 안 나도록 한다는 것은 누굴 만날 용의가 돼 있다, 만날 요량이다. 그렇게 되는 거죠. 그게 바로 사람다움이에요.

그래서 여기 이 땅에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이미 규정이 지어졌습니다. 사람과 만나고 사귀는 가운데 그게 만남이죠. 만남과 만남, 관계망 이 안에서 사람대우 받는데 이렇게 한다고 제가 아까 이야기한 거룩한 아름다움 입은 존재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인간과 지상의 인간들이 이 정도만 해도 인간이라고 치자는 인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 점을 먼저 아셔야 돼요.

그러면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서 종교라는 게 만들어져요. 종교는 사람이 사람답게 서로 친목을 도모하는 거예요. 이걸 종교라 하고 종교는 필히 절대적 신이 나오지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수호신입니다. 수호신이라 하는 것은 뭘 지켜주잖아요. 그러니까 이 신은 무슨 신이냐 하면 폴리스, 사회, 인간사회를 지켜주고 인간단체를 지켜주고, 자기 가정을 지켜주는 그런 범위 내에서 사람이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잘 유지될 수 있도록 신이 지켜줄 때 그것은 어떤 신이냐? 신은 신인데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이 되는 겁니다.

교회에 사람이 모였을 때 이 세상은 교회에서 말하는 여호와든 하나님이든 예수든 명칭은 관계없어요. 그들의 의식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항상 어떤 개념입니까? 수호신의 개념이 있어요. 남 잘 되는 것 눈꼴시어 못 보겠다. 우리가 잘 돼야 돼. 다른 교회 코로나 다 걸려라. 그러나 절대로 우리 교회는 걸리면 안 돼. 이게 수호신 관점이에요. 자, 수호신을 수호신 하기 위해서 여기서 경전 같은 것도 동원되겠지요.

이 경전이 동원되는 방법은 인간이 계시를 포착하는 방법, 인간이 계시를 포착해요. 아, 저 말씀 같으면 우리의 인간이 인간됨에 보탬이 되겠다. 우리 가정이 잘 되는데 저 하나님의 말씀 같으면 우리 가정에 행복을 줄 수 있는, 그러니까 수호신이 수호신답게 모실 수 있는 방법이 되겠다. 인간 쪽에서 계시를 포착하고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시편 29편, 제일 앞에 보면 누구의 시라고 돼 있어요? “다윗의 시”죠. 다윗의 시는 다윗이 포착한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윗을 포착한 거예요. 다윗이 뭐 애국심이 많아서 골리앗 이겨볼까 하고 힘 겨루고 이런 것 없었어요. 그냥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이기게 했고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은 그것을 이것은 내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 전쟁이다.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내게 지게 만들었다. 나는 그 현장에 도달했을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거기에 골리앗이 배치돼 있고 그 앞에 이스라엘 백성 있고 사울 있다는 이러한 배정과 배치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활용된 거죠. 인간의 수호신 관점에서는 진짜 하나님을 포착해낼 수 없습니다. 이 수호신을 버려야 되겠지요. 그래서 저는 이건 다 아신다 치고 이건 지웁니다. 지워도 상관없는 것이 이게 동영상으로 촬영돼 있으니까 보시면 돼요.

다윗이 있다면 하나님이 다윗은 뭐냐 하면 초월성을 지닙니다. 초월성이란 아까 수호신 관점에서 벗어나는 데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를 먼저 끄집어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일반인과 달라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했다고 돼 있잖아요.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수호신 삼겠다고 택한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쥔 거예요. 이게 초월성이에요.

초월성은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하나는 직접 현재성, 현재에서 하나님과 관계, 현재에서 항상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는 초월성.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다윗이 인생을 살면서 죽고 난 뒤에 이게 과거라면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이 있을 것 아닙니까.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죽고 난 뒤에 만나는 하나님. 초월성 방향이 두 가지에요. 지금 다윗이 그냥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게 초월성이고, 다윗이 인생을 다 살고 마치고 이렇게 하나님께로 가도 요 과정 자체도 수평적인 초월성이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미 초월적이죠. 사울에서 바울 됐잖아요, 초월적이잖아요.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이, 내가 소원이 있는데 이 몸을 벗어버리고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 지금 이 초월성에서는 나는 예수 안에 있다, 십자가 안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이미 초월성이에요. 성령 안에 있다 같은 말입니다. 성령 안에 있고 예수 안에 있고 십자가 안에 초월성이다. 이것도 초월성이고 내가 죽고 난 뒤에 이 몸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다. 이것도 초월성이란 말이죠. 두 개다. 둘 다.

사울이 하나님을 수호자로 섬겨서 포착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이란 사람은? 핍박했지요. 자기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 당시 사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그 당시의 폴리스, 그 당시의 사회에서 사울은 스스로 생각하고 남들도 그렇게 봐주는 것처럼 자기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부족함이 없는 거죠. 뭐 아쉬운 게 없어요. 예수 안 믿으면 아쉬운데? 그런 것도 없었어요. 이쯤해서 예수까지 믿어볼까, 인생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보태볼까? 이런 것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내린다. 그러니까 이거는 아브라함의 사적인 개인적인 감정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아브라함을 장악하다보니까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복이 아브라함이 개인적으로 주는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는 방식이에요.

그럼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뭐냐? 아브라함은 비어있는 빈 통, 뭔가 하나님의 복과 저주가 관통하는 터널 같은 존재에요. 분명히 아브라함은 있는데 속은 비어있어요. 그 비어있는 자리는 누구 몫으로 넘겨갑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관통하도록 하는 거예요. 마치 난로 피울 때 통 있잖아요. 연기 통. 애들 그것 보고 장난치고.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파이프처럼 돼 있어요. 그냥 통과하는 거예요. 주의 계시가.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복 받은 사람 누가 있느냐? 아브라함에게 복 받는 것도 아브라함이 선택하거나 그 사람이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상대방은 여호와께서 자길 선택했다하니까 이 사람도 일반적으로 출발점이 뭐냐? 수호신 개념이에요. 저 여호와 믿으면 나한테 복이 오지 않겠는가, 이렇게 덤벼들다가 진짜 복은 기존의 수호신 이것을 쫓아내버리는 거예요. 쓸어버리는 거예요.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삭입니다. 이삭은 자기가 하나님의 복을 예상 못했어요. 또 그 다음에 여러분 아시다시피 야곱이에요. 그리고 야곱의 자녀들 가운데 요셉 같은 경우에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열한 명은 요셉이 눈엣가시에요. 우리 야곱이란 가정이란 폴리스에서 요셉은 너무 튀어서 밉상거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좋은 옷을 입히고 특별 대우해줄 때 그게 더욱더 밉상이 된 거예요.

아버지가 요셉을 사랑한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 사랑했기 때문에 먼저 죽어야 했던 그 여인의 맏이가 요셉입니다. 라헬의 맏이에요. 다른 자식은 안중에도 없어요. 그 자식을 볼 때마다 날 두고 일찍 죽었던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빼앗아버리듯이 야곱에게는 누굴 빼앗아버립니까? 그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 요셉을 죽여 버렸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수호신 할 때 이 빈 통, 굴뚝 통을 수호신이 막고 있다는 걸 알고 막을 때 그냥 막고 있는 게 아니고 딴 건 말고 이것만큼을 못 놓겠다는 게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걸 치워버리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믿음이 좋아서 별로 사랑하는 게 없잖아요. 정말 믿음이 좋으면 누굴 치워 달라 하지 말고 나를 치워주세요, 나부터 그만 확 치워버려요. 컬링 할 때 돌들, 스톤 치워버리듯이. 사울이란 사람이 그랬던 사람이에요. 나부터 치워주면 안 됩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초월성을 할 때 인간들은 기존의 수호신으로는 이미 초월성을 받을 자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에게 하나님이 초월성을 주었을 때 이 다윗을 통해서 계시가 주어지게 되면 인간들은 그 계시를 장악하거나 내 것 만들 자격은 전혀 없고요. 오히려 하늘의 계시가 초월성이 인간의 수호신 의미를 추방시켜버립니다. 내보냅니다.

내보내는 그 현장에 나타나는 게 뭐냐 하면 복된 나라죠. 축복된 나라. 이스라엘은 무슨 나라냐? 선택된 나라,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나라. 이스라엘이 이렇게 등장하는 거예요. 다윗은 무슨 나라의 왕입니까? 이 선택된 나라의 왕이죠. 그렇지요. 다윗이 선택한 이스라엘이 있고, 그 다음에 다윗 이전의 왕이 뭡니까? 사울 왕이 선택한 이스라엘이 있지요. 그러면 사울 왕과 다윗은 좋게 지냈습니까, 싸웠습니까? 싸웠지요.

그래서 여기서 정리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누구와 싸운다? 인간과 싸운다. 딱 이 공식이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과 싸운다. 하나님은 나랑 싸운다. 인간과 싸우시는 하나님. 자, 성경해석을 성경을 천 독, 만 독한다고 해석하는 게 아니고 성경해석의 기본이 있어요. 성경해석은 어떻게 하든 그것이 딱 나와야 돼요. 그것부터 출발해야 되고 그것으로 되돌아와야 될 핵심 시작점이 있습니다. 내가 객관식 문제 낼 테니 어느 것인지 알아 맞춰보세요.

예수님의 존재성, 그 다음에 인간의 구원, 그리고 인간의 행복, 네 번째 십자가. 인간의 행복 하지 말고 같은 말이니까 하나님 주권. 성경해석이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으로 와야 됩니까? 십자가.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존재성, 이거는 영에 속한 자나 육에 속한 자나 다 인정해요. 예수님 살아 계신다. 우리는 그분을 인정하자.

이순신 장군 반대하는 사람 봤습니까? 이순신 장군 없다는 사람 있습니까? 아니지요. 조선시대가 없는 대한민국 없잖아요. 고려시대가 없는 조선시대가 없잖아요. 그러면 왕건이 없는 이성계가 없잖아요. 고려는 누가 세웠습니까? 최수종(^^) 고려는 왕건이 세운 그걸 알기 위해서 꼭 성령 받아야 됩니까? 그래야 돼요? 예수님 훌륭하다는 것, 나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 나는 희생하지 못하는데 예수님은 남을 위해 희생했잖아요. 그걸 아는데 굳이 양심만 있으면 되고 이성적으로 윤리도덕만 있으면 되지 그걸 꼭 성령 받아야 되겠어요? 아니지요. 제가 너무 일부러 아니어야 하는 것처럼 응원하는데.

인간의 구원, 모든 종교에서 하는 거잖아요. 지옥 갈래, 천당 갈래? 천당 갈래. 불교도 마찬가지고요. 죽고 난 뒤에 천당 가기 싫은 사람, 꼭 영을 받아야 천당 가고 싶어 해요? 나 죽고 난 뒤에 꼭 지옥 가야지. 이런 것은 성령 받고 안 받고 관계지요.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는 데, 자기뿐만 아니고 자기 가족도 좋은 데 가겠다는 데 성령 받을 필요 없잖아요.

하나님의 주권. 이것도 모든 종교+모든 철학이에요. 심지어 과학까지. 보이지 않는 설계자가 있을 수 있고 이 우주의 설계자. 보이지 않는 그분에 의해서 그분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절대자란 의식이 생겨났다. 인간 속에 절대자란 의식이 생겨났다는 것은 의식이란 자체가 이미 의식에 해당되는 그 상대가 있기 때문에 의식이 생긴다는 거예요.

괴델이라는 20세기 최고의 수학자가 신의 존재를 증명했어요. 방금 이야기한 게 괴델이란 수학자가 한 신의 존재 증명이에요. 모든 좋은 것은 신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좋다는 의식이 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뭐가 있다? 신에 대한 의식이 있고 신 의식이 있으면 그것은 바로 신이 존재한다고 봐야 된다.

이게 바로 괴델이란 세계 최고의 수학자가 신의 존재를 증명한 거예요. 이게 바로 뭐냐?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까지 전부 다 섭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 정통개혁신학까지 포함해서요. 그건 뭐 신학 자체가 철학이니까요. 인간들에게 육적으로 이성에 호소해서 납득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네 번째 십자가는 왜 육에 있는 사람은 모든 게 십자가로 할 수 없느냐 하면 십자가에서는 자기가 소멸하고 자기가 소멸해요.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는 걸려 넘어지는 거예요. 십자가에서는 꽈당하고 인간 자체를 넘어지게 만드는 게 십자가거든요.

체크합시다. 하나님, 예수님 존재 인정한다. 하나님의 구원 체크, 하나님의 주권 인정한다. 이 정도 지식 갖췄으면 주님이 재림하든 어떻게 하든 뭔가 천국 갈 가능성이 있겠지, 라는 것이 어디서 깨지는가? 십자가에서 깨져요. 왜냐하면 예수님 십자가에 죽었을 때 죽이라고 둘러 선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유대지도자들이에요. 유대지도자들의 사고방식이 전부 다 이거에요. 그들은 예수님이 아니죠. 메시아 존재지요.

메시아 존재, 인간의 구원, 하나님의 주권, 여호와의 통치, 그게 하늘나라. 그것 하는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우우 했는데 비아냥거렸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이에요. 놀랍지 않습니까? 직접 눈으로 봤어요. 그냥 들은 게 아니에요. 눈으로 봤어요.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도망쳤던 열한 제자 있지요. 열두 제자 다 도망쳤다 보면 그 열두 제자가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동참했습니까, 도망쳤습니까? 도망쳤지요.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졌지요. 왜? 그들은 인간이고 싶은 거예요. 어디에서? 그 폴리스에서, 그 사회에서, 그 시대에서 남한테 사람이란 소릴 듣고 싶은 거예요. 그게 자기에게 장착된 인간 의식이거든요. 내가 사람이고 싶은 거예요, 남들로부터. 내가 봐도 사람이고 남들에게도 사람 구실한다고 듣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 사회가 예수님을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사형시키기로 결정됐잖아요. 마치 코로나 걸리면 마스크 쓰기로 결정한 것처럼. 그것 안 쓰겠다는 사람은 마스크 안 쓴 게 문제가 아니고 그러면 넌 산속에 너 혼자 살라는 이런 결과만 낳지요. 안 그래도 힘든 인생에 굳이 남한테 욕 얻어먹으면서 살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 한 번 어느 게 실익인지 계산해보세요.

마스크 쓰기 싫어서 산속에 간다. 그게 내 인생에 편하냐? 마스크 써주고 백신 1, 2, 3차 맞아주고 그냥 해운대 가서 산다. 어느 것이 나한테 이익이에요? 어느 것이 덜 요란스럽고 유난 떨지 않는 행동입니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뭐예요? 안 쓰고 돌아다니고 침 튀기고 이런 게 평화롭게 사는 거예요?

사람은 왜 하나님의 존재성, 예수님은 훌륭하신 분이고 남을 위해서 희생하신 분이고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분이고 이런 고백을 하고, 사랑의 하나님이라서 인간을 위해서 천국을 마련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통치,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주권이 없는 곳이 없다. 이걸 인정하고 싶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것이 바로 수호신 의식에서 이것들이 충돌되지 않는 거예요.

나를 위한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내용들이 지식으로 추가가 될 뿐이지 나를 전적으로 발로 차고 나를 짓밟는 내용들은 아니잖아요. 이순신 장군 있다고 내가 인간 대우 못 받고 이런 것 아니지요. 이순신 장군은 나를 사람 취급 안 하게 만드는 게 아니고 오히려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되면 이순신 장군 후손들에게 칭찬받아요. 그 사람들 칭찬받을 필욘 없지요.

그러나 십자가를 알고부터는 이거는 데살로니가 교회도 그렇게 빌립보 교회도 그렇고, 빌립보 교회는 마게도니아의 수도에요. 로마의 정치적인 수도가 빌립보인데 빌립보 교회도,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보세요. 가면서 가는 곳곳마다 십자가 복음을 전했는데 주위에서 예수님 보고 우루 죽이라고 하는 것처럼 동일한 고난을 받았어요.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에서는 기존의 인간성, 나, 나로부터 해서 나로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여기 나가 죽고 다시 살아난다는 이렇게 불연속성, 단절을 언급하기 때문에 나로부터 끊어짐을 의미 하거든요.

아까 인간의 폴리스에서 사회에서 인간은 뭐냐? 인간은 남들이 나보고 조롱하거나 전면은 아니더라도 뒤 담화하면 여기서 우리는 뭐냐 하면 그러면 내가 굳이 그 모임에 갈 필요 없잖아. 안 갈래. 왜 안 갈래가 되냐 하면 그래야 나의 가치가 연속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굳이 거기 가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고 개 취급받는 것을 내가 용납지 못해요. 거기 아니면 다른 모임 없나. 집에서 혼자 하지, 이러고 가버려요.

그런데 십자가는 하늘의 초월성에 의해서 너 말고 예상 못한 다른 너를 내가 구원하겠다, 이렇게 되거든요. 네가 예상하는 너 말고 네가 전혀 예상 못한 너 자신을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구원하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그러면 내가, 이걸 다시 그림을 그리면 이렇습니다. 아까 그린 것 봅시다.

다윗이 하나님과 초월적 관계가 있지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이것 말고 뭡니까? 또 다윗이 수평적으로 죽음을 향하여 가지요. 이것도 초월성이에요. 수평적 초월성은 뭐냐? 다윗으로 하여금 뭘 겪게 하느냐 하면 바로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났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의 모든 나됨을 어디서 출발한다는 말이에요?

내가 없었을 때 모친이 있었잖아요. 나 있기 전에 어머니가 먼저 있지요. 그 어머니 죄 속에서 뭐가 태어났습니까? 시편 51편에 보면 내가 태어났잖아요. 죄에서 내가 태어났다면 죄의 일부로서 바깥에 그냥 삐져나왔다면 나의 모든 행동과 모든 태도와 신을 믿는 모든 것이 뭐가 된단 말입니까? 이게 죄가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다윗은 여기서 자기가 잘났다 하는 것은 밧세바라는 여인을 만나면서 실선으로 갔던 다윗이 여기서 갑자기 사라져버려요. 실선은 뭐냐? 나는 이스라엘 왕이다, 잘났다, 내가 구원 안 받으면 누가 구원받으랴, 왜? 난 율법을 너무 잘 아니까. 이런 식으로 가던 그것이 뒤태가 아름다운 여인 하나 누굽니까? 뒤태가 아름다웠지요. 뒤태가 아름답지 않으면 다윗 상대를 안 해요. 뒤태가 아름답기 때문에 상대한 거예요.

밧세바 만나고 난 뒤에 졸지에 멈출 수 없는 욕망에 의해서 이게 끊어져버린 거예요. 나가 연속되지 않고 내가 끊어져버린 거예요. 이게 수평적인 다윗의 초월성이에요.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했지요. 밧세바 만나기 전에 이미 다윗은 누굴 이겼습니까?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하나님 사람 맞아요. 사무엘에 의해서 기름 부어서 왕으로 이미 성령을 받았어요.

하지만 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혜택은 뭐냐? 너로부터 네가 죽을 인간이란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이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 이야기했지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둘 다를 볼 수 있는 사람, 인간들의 폴리스 세계 있잖아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얼마나 분투노력하는지 그걸 훤히 다 아는 사람.

오직 자신의 가치를 위해서 서로서로 만남을 유지하고 서로 사귀어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너도 인간이지만 나도 인간이라는 그걸 서로서로 인정해주는 그 사회, 심지어 사회는 냉대해도 가족만큼은 나를 사람 대우해주고 자식 대우해주잖아요. 취직 안 하고 놀아도 아들 대우해주고 가족만큼은 인정해준다 이 말이죠. 다른 사회에서 얼굴 못 생겼다고 하지만 남편만큼은 니가 최고고 예쁘고 여왕 같다, 이렇게 부추겨주잖아요. 다 속셈이 있지만.

그 일을 계속 죽을 때까지 하셔야 돼요. 왜냐하면 그래야 무엇이 확인되느냐 하면 내가 생각했던 나는 죄에서 태어났음을 계속 알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노선, 여기서 노선이 돌로 갈라지지요. 실선의 노선, 그냥 가던 길로 가세요, 하고 가는 이게 우리의 육체, 육신.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은 날마다 후패해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갈림길이 생겨요. 점선, 초월성이 개입하면서 말씀에 의해서, 이 말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말씀에 의해서, 라고 할 때 이걸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언약이 완성된 토대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라는 것은 쪼개보면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이루시거든요.

아버지와 아들이 언약을 맺었는데 그냥 맺으면 안 되고 그 뒤에 반드시 뭡니까? 완성된 상황이 여기에 다윗에게 미리 와서 있어버리면 다윗은 건널 수 없는 것을 건너서 초월성, 주의 나라로 들어가서 아름다운 옷을 입은 천사와 같은, 부활 때는 성도가 어떻게 돼요? 하늘의 뭐와 같이 돼요? 시편 29편에 나오지요.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골인하는 거예요.

차 운전하시면서 옛날 내비게이션 수정 안 되어 있다가 새로 난 길을 가게 되면 내비게이션이 이상하게 돼버려요. 이 길은 옛날 길이고 지금은 터널 뚫려서 옛날 내비게이션이 공중에 붕 떠서 혼자 가요.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의 초월성이에요. 붕 떴어요. 본인도 놀래요. 자꾸 본인도 미치는 게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요. 그냥 큰 교회 폴리스 있잖아요. 거기서 남들이 집사님, 장로님, 목사님으로 인정해주는 그게 그리워요. 왜? 그때 내가 그들로부터 사람답다는 인정을 받았으니까.

그런데 주께선 그리로 데려가는 것이 그게 바로 죄였고 그게 하나님을 내 수호신처럼 착각했다 그런 경우고. 지금 경우는 뭐냐 하면 그냥 길도 없는데 데려가는 거예요. 이럴 경우에 너무 당황하지 마시고요. 이게 바로 예수 안이에요. 말씀 안인데 예수 안, 성령 안, 십자가 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 안이라는 게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뭔가 안이 있다는 말은 공간적으로 장소를 점유, 딱 지정돼야 안과 밖이 성립돼요. 만약에 A라는 지점 같으면 이 바깥에 이건 A 바깥이 되고 A 안이라 하면 A 안이 되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의 어떤 공간의 일이 아니고 사건이거든요. 사건 안에 들어있다? 이미 그 사건 끝났는데. 십자가 사건 이천 년 전에 끝났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십자가 안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사도 바울이 그런 말 할 때는 십자가 안이 초월성적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월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무엇과 대비를 시키느냐? 이게 성령 안에 있는 것과 그리고 육, 우리가 흔히 육적으로 살아왔던 그 안, 그 세계와 이미 각도 상 내비게이션 상 빠이빠이 한 상태인 것을 점점 보게 하는 거예요. 둘 다를 보게 하는 거예요.

아아, 저렇게 살았던 것이 내가 살던 모습이었구나. 그게 하나님을 위하여, 주님의 주권사상, 예수님을 위하여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사실은 캐보면 날 못 버리겠다는, 나를 지켜줘야 하나님답고, 내게 복을 줘야 하나님답다는 그 고집 있잖아요. 그 죄성으로 나는 그들과 합류해서 그렇게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은 별로 어려운 게 없어요. 여러분들이 다 그렇게 평소에 살아가시기 때문에 제가 아무 부담 없이 합니다.

문제가 뭐냐 하면 아까 보좌에서 하나님의 자리에서 소리가 나오는데 그 소리가 어디에 있다 했습니까? 물 위에 있다 했어요. “여호와의 소리가 물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위에 계시도다”(3절) 소리가 여기서 들리면 뇌성이 된다는. 번쩍번쩍 번개도 포함돼 있을 때 이게 왜 물이 여기 등장하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 있다면 십자가 올 때 구약시대는 물의 심판에 근거해서 계시가 주어지는 시대, 여기서부터는 물이 아니고 불의 심판의 당위성(당연하다는 뜻)에 근거해서 모든 일이 벌어지는 시기. 십자가를 통해서 이쪽은 물에 근거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차이가 뭐냐 하면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시간을 끌 수 있는 여지를 줘요.

창세기 8장에 보면 내가 다시는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 심판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미 물로써 심판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물로서는 않겠다. 이쪽은 불로써 다 태우겠다는 거예요. 신약에는. 이게 여러분 아시는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잖아요. 전에는 물로써 심판했지만.

생각해보세요. 물로서 심판했는데 다 심판했다, 남은 자 있었다. 어느 쪽입니까? 물로써 심판할 때는 몽땅 다 죽인 게 아니고 남은 자가 여덟 명 남았지요. 여덟 명 남아서 거기서 꾸역꾸역 일을 꾸밀 여지를 준 게 물이라면 불은 뭐냐 하면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온 지구를 불로써 다 태워버려요.

태울 때 모나리자라는 값으로 측정할 수도 없는 유명한 명화도 포함돼 있고 쇼팽, 베토벤 고상한 음악 있잖아요. 찬송가부터 해서 전부 다 태워지고 심지어 노벨상도 불에 태워집니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 근거거든요. 바탕이라고 바탕.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노벨상을 걸치고 스케이트에서 금메달 따도 네가 놓여있는 것이 불 위에 놓여있으면 메달도 다 녹아버리고. 금메달, 은메달 관계없어요.

중국 사람들 메달 다 가져가라 해. 다 가져가도 불로 다 녹아질 거예요. 여기서 백 평짜리 아파트 살고 이것도 다 해. 어차피 해운대든 송도든 반송에 살든 전부 다 불 위에 있는 거예요. 이거는 여지가 없어요. 하나도 없이 다 태워버려요. 지구 상 전체가 불로 다 녹아버리니까. 들어보니 깔끔하지 않습니까, 신나지 않아요? 감사한 것은 이게 소설이 아니란 거예요. 이게 소설 같으면 에이 소설일 줄 알았어. 이게 소설이 아니고 실제상황이라는 겁니다.

이게 기뻐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아까 다윗의 경우에 실선으로 빠질 때 마음껏 빠지라 하세요. 옛날 내비게이션 마음대로 가면 돼요. 어디로 가면 돼요? 불 속으로 가면 돼요. 문제는 공중으로 날 때 이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이게 앗싸, 신바람 나는 거예요. 마치 풍선을 타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땅 밑과 벌어질 때 이사야에 믿는 자는 독수리처럼 높아간다. 간격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이게 신나는 겁니다.

전에는 이게 굉장히 부러웠어요. 남들이 잘 살고 좋은 주택에 살고 부동산 많이 갖고 사법고시 합격하고 의사 되고 이런 게 되게 부러웠는데 부러워봐야 어디 갑니까?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기도할 때 뭐냐? 불 속에 들어가는 것을 위해서 달라고 기도한 거예요. 그것 없다고 아쉬워서 내가 넓은 아파트 없어서 친구한테 사람대접 못 받았는데 나도 사람대접 받도록 복 주시고, 주께서 뭐하십니까,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 능력 많은 것 조금만 주시면 지금이라도 당장 돈 주시면 이런 식으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걸 좋아해요.

특히 만약에 여러분들 자녀가 지금 베이징에서 스피드스케이트 타는 선수라 해보세요. 기도 뭐하겠습니까? 저 자식이 메달, 그게 불구덩이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시고 그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게 하옵시고 그저 몸이나 해서 선수촌에서 밥이나 먹고 집에 돌아오게, 그렇게 하겠어요, 아니면....

우리 집 일 층에 인라인스케이트 한다고 잘 타는데 부모가 새벽 네 시부터 나와서 뒷바라지하고 있어요. 이게 메달을 따야 연금이 된다니까요. 선수들 보이콧하고 오라, 속은 시원한데 연금 타려고 운동하는 부모와 애들한테는 중국 기분 나쁘다고 와버리면 돈은 누가 주는데? 더럽더라도 참아가면서 심판의 학대와 박해를 이겨내면서 타야지요. 뭐 메달을 따야 연금이 나올 것 아니겠습니까. 그 부모들은 그것 때문에 자식에 매진했는데. 하여튼 인간은 지밖에 몰라. 스포츠 하는 사람들 얼마나 애간장 태우는지 몰라요.

그러니 이게 그림은 앗싸 하고 간단한데 성령으로 했다가 복음 말씀 잊어버리면 여기 합세해서 안 돼, 다시 성공해야 돼. 이러한 의식으로 돌아오지요. 그러다만 또 말씀 주시면 내가 또 죄 지었구나 하고. 내가 죄 지었구나가 아니라 내가 죄인이구나, 이래야지요. 내가 죄 지은 게 아니고요. 내가 원래 그런 인간이었구나. 하나님을 나 잘 되는 데 이용했구나, 하고 원래 내 자리로 돌아오면 돼요. 그러면 이 앗싸, 하고 벌어지는 이걸 범사에 감사하는, 항상 기뻐하는 거예요. 이 차이가.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구약 시편 29편 하고 있잖아요. 물로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이 뜻이 무슨 뜻인가? 이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장 7절에 보면 두 번째 날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 했지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보좌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것은 이게 나중에 에스겔도 그렇게 요한계시록도 그렇고 하나님이 갖고 있던 보좌의 취지를 위해서 그 건물을 지으시고 그 건물이 인간을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건물을 지으시고 천지창조를 하시고 여기에 뭐도 포함돼 있느냐 하면 바로 생명나무와 선악과도 포함돼 있어요. 생명나무, 선악과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밀어내고 중심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인간은 생명나무, 선악과 주변에 있어요. 인간이 낙원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인공은 생명나무와 선악과에요. 이 취지가 합해버리면 예수님 되거든요. 에덴동산의 주인은 예수님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했다 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예수님 안에 있는 예수님 갖고 있는 예수님의 속성으로서의 인간을 하나님은 사랑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인간이거든요. 그 인간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 안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이 갖고 있는 인간을 어떻게 자기 아들로 품으로 이렇게 경로 거쳐서 회수하느냐, 다시 데려오느냐? 데려오면서 하나님의 자기 뜻을 이루시는 겁니다.

우리 인간을 사랑할 것 같으면 지옥을 만들 이유가 없지요. 예수님 안에 있는 인간, 예수님 갖고 있는 인간성, 이는 내 사랑하는 기뻐하는 자라 그 인간, 그 물은 어떻게 되느냐? 그건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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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8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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