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4b 울산강의-역대기상(7강) 5장 1절 : 장자의 허구성
20220204b 울산강의-역대기상(7강) 5장 1절 : 장자의 허구성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르우벤이 첫 번째 태어났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르우벤에게 일어나는 인생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결함, 그것이 장차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그게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르우벤에 일어나는 결정적인 일에 대해서 여기 역대상 5장 1절에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돼 있어요.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했다. 침상을 더럽게 했다는 게 뭐냐? 침상에 올라가서 장난치고 스프링 다 깨고 그 일을 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르우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49장 3절에,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그러니까 빼박이라, 야곱의 빼박이다. 야곱의 그대로 복제물이 첫 번째 아들이에요. 만약에 애가 둘 없고 세 번째 없고 첫 번째 애밖에 없다면 그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첫째 아들이 그것이 끝나지요.
그러면 둘째 아들 태어나면 아버지의 모습은 첫째, 둘째로 분산돼요. 모자이크가. 셋째 태어나면 첫째, 둘째, 셋째로 분산돼요. 아버지가 어떤 인간인가? 첫째, 둘째, 셋째 합치면 돼요. 그러면 되거든요. 왜냐하면 DNA가 아빠, 엄마의 모습을 그대로 복제를 계속하기 때문에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이 있다는 말은 더 이상 자기가 숨을 거둬도 안심이 되는 거예요. 왜? 나는 자식으로 복제됐기 때문에 그래요. DNA 50% 지분이 있잖아요. 애한테.
안 죽고 부활했어요. 부활은 아니지만 나는 영원히 연속되는 거예요. 자식이 있는 한. 그리고 자식이 나한테 제사 드려주게 되면 나는 자식 속에서 불멸의 존재가 되지요.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 자식이 없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옛날 어른들 같으면 큰일 날 일이에요. 세상에 자식이...... 그걸로 대가 끊어져버려요. 그걸 성경에선 뭐냐? 저주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특히 둘째, 셋째는 소용없어요. 첫 번째에 사랑과 정성을 몰빵을 다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출애굽 할 때 유월절에 할 때 누굴 죽였느냐? 둘째 아들, 셋째 아들 필요 없어요. 첫째 아들을 다 없애버렸잖아요. 죽음의 천사가 와서.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대행자입니다. 모든 복은 첫째 아들에게 다 제공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인간세계가 어떻게 자손을 번식하는지 그걸 그대로 사용해요. 그 육적인 요소를. 버리지 않고 더러운 육, 저리 가거라가 아니라 그대로 사용해서 아니라고만 이야기하지요. 육을 왜 그대로 사용하느냐? 인간은 몸부림 만부림 쳐도 그 육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육을 통해서 증명해주고 있어요. 인간은 아무리 육적인 요소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어요.
운동회 때 남의 자식 넘어지면 잘했다, 합니다. 왜? 남의 자식 1등으로 가고 자기 자식 2등 하고 있는데 앞에 남의 자식이 넘어졌으니까 타고 넘어가든지 해서 1등해서 공책 타면 되거든요. 그러니까 자식은 뭐냐? 나의 아바타에요. 자식이 밖에 나가면 내가 밖에 나간 것 같아. 자식이 집에 돌아올 때까지 나는 걱정근심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내가 아직 마저 수금이 안 됐잖아요. 내 것 다 해소가 안 됐단 말이죠. 자식들이 밖에 나가서 열 시 이전에 다 들어와야 내 것 다 해소가 되는데 지금 딸은 나이트클럽에 가서 새벽까지 하고 큰아들은 교회 가서 밤새 철야했다고 가버리고. 그 아이들 집에 다 올 때까지 걱정근심 안 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자식이 먼저 죽으면 자식에 땅에 묻지 않는다 하잖아요. 어디에 묻습니까? 자기 마음속에 묻는다 해요. “너는 나 죽을 때까지 죽으면 안 돼.” 왜? 너의 죽음이 곧 나의 의미의 상실이기 때문에. 나의 의미의 상실이에요. 나의 희망이 없어버려요. 내가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존재가 증명이 안 되니까. 네 죽음이 내 죽음이라니까. 자식 죽음이 내 죽음이거든요. 심지어 결혼한 젊은 사람들 이것을 어디서 경험하는가? 여기서 경험해요. 개, 고양이. 개가 죽을 때 비석 세워주잖아요.
인간이 자기 육의 확장이라 하는 것은 멈추질 못합니다. 반드시 연속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가 있는데 인간은 육 됨을 들춤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지금 하나님의 영역 밖에 있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밖에 있음을 증명해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하나님 안에 들어올 수 없어요. 창세기 3장 24절에 생명나무에 추방됐기 때문에 다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들어올 수 없는 인간을 들어오게 하는 과정이 이스라엘 역사에요. 르우벤은 자기가 아버지의 장자라는 것을 자부하고 있습니다. 자부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르우벤이 창세기 35장 22절에 보면 나오는 데요. 그 대목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집안 꼬라지 자알 나가지요.
레위기 18장에 보면 정말 청소년들은 보지 말아야 될 19금 이야기가 나와요. 레위기 18장 6절인데 제가 아무리 봐도 여러분들은 청소년기를 지나갔기 때문에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찌니라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
이래서 여기는 낯 뜨거운 이야기를 잠간 하고 넘어가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속속들이 다 끄집어내요. 10절에, “너는 손녀나 외손녀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너의 하체니라 네 계모가 네 아비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 하체를 범치 말찌니라 너는 고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고모까지 신경 쓰는 거예요. “너는 고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아비의 골육지친이니라 너는 이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모까지.
“너는 이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의 골육지친이니라 너는 네 아비 형제의 아내를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백숙모니라 너는 자부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런 이야기를 계속 나와요. 이게 무슨 뜻이냐 이 말이죠. 너무나 낯 뜨거워서 슥 지나가는 거예요. 이야기 들으면 세계에 있는 남정네들은 다 때려죽여야 돼요. 그래야 이 말씀이 지켜져요.
테스토스테론 남성호르몬이 미친 듯이 발동해서 숙모고 이모도 분간 못하고 이건 뭐 진짜 발정난 개처럼 짐승도 이런 짓을 안 한다는 할 정도로 인간을 동물 수준으로 보는 이 의미가 뭐냐? 하체의 의미가 뭐냐? 자, 이거는 여러분들 다 어른이니까 이런 말 하는 겁니다.
하체를 범치 말라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 속에 피가 흐르고 있어요. 인간은 무기물이에요. 흙이에요. 인간이 흙인데 숨을 쉬는 흙, 마치 살아 있는 모양새를 한 이유가 인간이란 흙 속에 뭐가 흐르기 때문에? 피가 흐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 피가 흐른다는 건 신약성경에 십자가 피로 인하여 이 피는 어떤 노선이냐 하면 이때는 목숨을 부지하는 피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피는 곧 생명이니라, 라는 말이 나오고요. 생명은 피에 있느니라. 같은 말이에요.
예수님에게 피부가 있잖아요. 예수님 피부 안에 주님께선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이거는 내 피요 내 살집이라 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볼 때에 내부에 어떤 요소가 메시아와 관련성이 있느냐, 이걸 가지고 주님께선 언약적으로 관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흙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속에 피를 흐르게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악인이나 선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전부 다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으로 삼았던 겁니다.
무슨 언약에 의해서? 노아언약에 의해서. 십자가에선 그렇지 않아요. 노아언약에서는 모든 인간은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 모든 인간은 햇빛과 공기를 줘서 북한의 김정은이라도 주께서 지금도 숨 쉬게 하고 다 지켜내겠다는 말은 그 속에 피가 피대로 흐르는 거예요. 그런데 이 피가 흐르면서 피가 무엇과 관련돼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하시는 일과 메시아의 일과 관련돼 있지요.
예수님과 메시아 일은 어디와 관련돼 있는가? 창세기 2장에서 3장 넘어오면서 인간이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 사건을 계속해서 들이대면서 책임추궁하면서 오시거든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뭐하리라? 죽으리라고 돼 있지요. 그러니까 2장, 3장과 관련되어 볼 때에 이게 남자가 먼저 따먹은 게 아니고 여자가 먼저 따먹었어요. 이게 레위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자가 먼저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옛날에 창세기 2장, 3장 시간이 지났다고 잊어버렸다가 아니라 그 있었던 창세기 2장, 3장 사건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그 안에 그대로 집어넣어요. 담아버려요. 이스라엘은 계식의 운반체니까 담아버리면 여성이 먼저 죄를 범했다는 흔적으로서 월경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의미 있게 봐요.
월경은 뭐냐? 몸에 있는 어디로 나옵니까? 바깥으로 나오는 거예요. 바깥으로 나오면 이건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의 땅에는 피를 흘리지 말라. 몸 안에 들어있을 때 니는 목숨 부지하는 줄 알아라. 그러나 그 피가 밖에 나오면 그건 죽은 거예요. 그래서 살인은 뭐냐? 몸 안에 있는 상대방의 피를 몸 밖으로 내는 게 살인이 돼요.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지라는 이 말은 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메시아 됨을 증거해야 될 그 재료가 너희들끼리 하나님께 묻지 않고 지 마음대로 죽여 버린 거예요. 하나님은 사람은 아예 죽이지 말라가 아니에요. 안식일에 나무하면 돌로 쳐서 죽여 버려라. 돌에 맞으면 피가 흐르게 돼 있어요. 하나님이 메시아와 관련되어서 죽이라 할 때는 필히 죽어야 돼. 안 죽이면 안 돼요.
아말렉 장수와 모든 족속을 다 죽이라 하면 진멸해야 돼요, 죽여야 돼요. 이방민족을.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이 들으면 전부 다 하나님 지 마음대로다 이러거든요. 그게 지 마음대로에요.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에요. 다만 정확하게 하나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주로 세우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고 작전이지만.
이 하체에서 피가 흐르게 되면 이건 뭐냐 하면 전에 있던 창세기에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할 때에 남자가 먼저 따먹은 게 아니고 여자가 먼저 따먹었기 때문에 여자는 그 하나님의 책임을 남자보다 여자를 우선적으로 책벌을 벌칙을 받게 돼 있는 조건 하에 뭐로 태어났습니까? 여자로 태어난 거예요.
여자, 남자의 구분은 이 땅에 임시적이에요. 이 땅에 있을 때만 가능한. 죽게 되면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고 하늘나라의 천사와 같아서 시집장가 가지도 않아요. 여자, 남자라 하는 것은 그 무기물, 육이라는 게 있을 때 그 안에 피가 흐르고 있을 때 그래서 그걸 흔히 사람이라고 이야기될 때 그 사람의 의미가 뭐냐? 그건 남자, 여자로 구분되면서 연관성 속에서 비로소 밝혀지거든요. 사람은 단독으로 밝혀지지 않아요.
왜 여자는 남자한테 당하기만 하느냐? 그거는 창세기 3장에서 여자가 먼저 따먹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주님께서 항상 선악과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자, 여자를 사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는 항상 구박을 받고 남자한테 치이기만 하고 당하기만 하고 무시당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시당하는 그 여자가 누굴 살리느냐 하면 남자를 살려요. 그게 룻 또는 다말, 기생 라합 또는 마리아,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이것이 이스라엘의 속도가 아니라 강력함이 아니라 방향을 땅에서 하늘로 바꾸게 하는 겁니다.
자,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하나님 계신데 인간은 어디 있습니까? 인간은 밖에 있지요. 밖에 있는 인간이 어떻게 안으로 들어오느냐 이 말이죠. 여기서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분리해서 남성에게 철저히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여성에 의해서 방향이 천국 가는 길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남자의 자손이 아니고 여자의 자손이죠. 그걸 약속이라 하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 그래서 남자의 이름은 그냥 흙이지만 여자의 이름은 생명이라, 하와라.
하나님께선 고집스럽게도 창세기에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 사실을 절대로 하나님 머리에서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뒤끝 있다. 잊지를 않습니다. 그 사건을.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개인적으로 윤리도덕 아무 짝도 소용없습니다. 인품, 인간성이 좋다, 성격 좋다 아무 소용없어요. 그거는 그 아버지의 DNA 받아서 그런 거고. 아무 소용없어요.
하나님이 찾고자하는 조건은 하나님이 주신 조건이에요. 우리가 만들어낸 조건 아닙니다. 그런데 야곱의 열두 아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어떻게 되느냐? 본인이 조건을 만들어요. 만들면 뭐합니까? 자기 아버지의 첩이죠. 야곱의 첩과 육이 참질 못해서 통간을 해버렸는데. 나는 먼저 됐다, 나는 장남이다, 뭐 요새 드라마 식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대통령후보다.
대선후보면 뭐합니까? 젊은 대학생 성폭행해서, 유명한 사건 란 사건, 대선후보가 여자관계가 복잡해서 일어난 일이 있어요. 그처럼 내가 아무리 지도자가 뭘 해도 대통령 되도 말이죠. 이 말은 인간이 아무리 개인적으로 천사 같이 살고 바르게 살아도 하나님께선 그것을 받아주는 정체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건 자기가 자기 꾸미기에요.
그러나 우리가 르우벤이란 말은 오십 년 동안 신앙생활 바르게 해도 한 방에 훅 가는 겁니다. 뭐 젊을 때 사색하면서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하면서 진짜 진리 찾다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 어떤 항구에 다방에서 화장 떡칠한 마담과 쌍화차 계란 띄워놓고 하면 그게 아닙니까. 이것도 몰라도 되는 이야긴데. 영일만 친구라고 백날해도 낭만을 대하여 하면 다 무효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아무리 조심하고 자기관리 철저해도 본인의 정체성은 주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제가 전도했습니다, 선교했습니다, 헌금을 집을 바쳤습니다. 왜 쓸데없이 그 짓했느냐 말이죠.
그래서 열두 지파는 아까도 했지만 야곱의 육의 펼침이에요. 육을 부챗살처럼 쫙 펼친 거예요. 야곱에게 빌하, 야곱과 동침함으로써 이거는 르우벤에게 통간할 수 있는 간음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거예요. 결국은. 결국은 이 열두 아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실패한 나의 모습과 불가피하게 마주침, 우리는 세상 속에서 남을 만날 때 실패한 내 모습을 상대에게 찾아내기.
결국 이걸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아까 이야기한 여인의 하체, 그것은 하나님이 다루실 월경문제라든지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하실 그 의미인데 창세기 3장과 관련된 그건데 인간의 육은 그런 걸 완전히 개 무시해버리고 자기의 욕정의 대상으로 본 거예요. 같은 일가친척 이것은 서민들에겐 지켜지지만 왕족한테는 어떻게 됩니까? 안 지켜지지요. 왕족에겐 권력이란 게 있어서 권력을 대대로 독점하기 위해서 왕족끼리만 결혼하게 돼 있잖아요. 이것이 왕족에게만 문제입니까? 오늘날 우리들 문제거든요.
교회 다니고 기도 열심히 해도 만약에 아들이 와서, “사귀는 아가씨 집안이 어떻게 되나?” “집안이 어려워서 고등학교 밖에 안 나왔습니다. 검정고시 쳐서 대학에.” “가만있어봐. 내가 해결해줄게.” 엄마가 가서, “아가씨 미안하지만 내 남편과 나는 아가씨를 우리 집안에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그동안 돈 쓴 것 봉투에 담아서 쓱 내밀면서, “아가씨가 현명하니까 아가씨 장래를 위해서” 아주 아가씨를 위하는 것처럼 해서, “조용히 헤어져줬으면 고맙겠습니다. 아가씨의 이성 같으면 내 말 알아들을 거라 생각한다.” 해놓고 마지막 하는 말이, “내가 아가씨 찾아왔다는 말을 아들한테는 하지 마라.”
이거는 편견에 상담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너무나 치사스러운 어떤 특정 가정의 문제가 아니고 그것이 우리 가정에 일어났다면 가능성이 아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형편입니다. 우리가 아직 그런 상황이 안 돼서 그렇지요.
다시 창세기 48장 봅시다. 그래서 르우벤이 요셉 지파로 옮겨갈 때에 야곱이 눈이 먼 가운데서도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줘버려요. 그러면 다른 지파는 복이 할당이 자기밖에 없지만 이 요셉 지파는 야곱의 복이 두 아들에게 줬기 때문에 곱빼기로 두 배로 주어져요. 장자한테는 유산을 곱빼기로 주는 거예요. 곱빼기를 줌으로써 장자가 되고 이 장자란 단순히 재산이 많다는 게 아니고 모든 하늘의 복이 장자를 통해서 다른 형제들에게 내려오는 중추적인 위치에 장자가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오늘 역대상에 봅시다. 이런 말 나와요. 역대상 5장 1절에 보면 르우벤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하면서 르우벤 이름 나오지요. 그 다음에 1절 중간에 요셉 나오지요. 그 다음에 2절에 보면 유다 나오지요. 열두 지파가 가운데서 세 지파 이름이 같이 한 문장에 다 들어있어요. 이거는 장자의 위치가 차츰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장자의 변신이죠.
원래 르우벤 지파에 있어야 될 장자가 요셉 지파로 갔기 때문에 장자의 자리에 요셉 지파가 들어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건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서 국무총리 되잖아요. 여러분 잘 아시지요.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게 아니고 국무총리가 요셉을 미리 찾아온 거예요. 미리 찾아온 게 뭐냐? 꿈이란 것.
꿈은 우리를 덮치는 겁니다. 밤중에 우리를 덮치는 게 꿈이에요. 덮치기 때문에 꿈을 당한 사람은 꿈을 변경시킬 자격이 없어요. 바꾸질 못합니다. 일방적인 침입이기 때문에 바꾸질 못해요. 그래서 꿈을 꾼 요셉 입장에서 본인이 잘했다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꿈이 와서 덮쳤으니까요. 이 말을 달리 하면 요셉의 일평생은 뭐였다? 한 자로 이야기하면 ‘꿈’이었다.
이게 하나님 밖에 있는 인간이 하나님 안에 있는 그 꿈같은 세계가 요셉처럼 덮쳐버리면 우리는 어느 세계로 가느냐? 꿈의 세계로 끌려가는 식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신비롭지요. 복음을 아는 사람의 공통적인 고백이 뭐냐 하면 이거는 내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뜻이 아니었다.
내 뜻은 내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내 뜻이에요. 전혀 신비롭지 않습니다. 왜? 내가 기도를 하던 헌금을 하던 나의 목적과 나의 이유가 사라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 구원받겠다는 일념에 내 기도와 전도와 헌금이 뭔가 도움이 된다고 여기고 교회 나왔거든요. 교회 출석한 것조차. 이거는 전혀 신비로움 아니에요. 이거는 꿈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생생한 현실이죠. 생생한 현실이 꿈에 의해서 작살나는 그 과정이 뭐냐? 요셉의 일대기거든요.
요셉의 일대기에 요셉이 장자가 돼버리면 뭡니까? 나머지 열두 지파를 꿈의 지배를 받는 거예요. 요셉 같은 상황을 겪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육적인 이스라엘에서 뭐로? 영적인 이스라엘로 전환되는 과정입니다. 꿈이 나를 통치하는 거예요. 꿈이 통치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도가 되었으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겠지만 우리가 논리로 딱딱 들어맞는 것은 전부 다 제쳐라. 그건 네가 믿을 게 안 돼.
기도했더니 응답받았다. 제쳐버려라. 그건 니 착각이야. 기도 안 했는데 뭐가 됐어. 고거 받아들여. 내 행한 것 없는데 되어진 모든 것은 이건 꿈이 나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꿈 위주의 세계입니다. 내 위주의 세계가 아니고. 그래서 뭔가 증거하고 고백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나 아니라는 이야기부터 먼저 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대표적인 사람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꿈을 꾼 게 아니고 너무나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죠. 내가 율법을 배우면 이게 나한테 보탬이 될 것이다. 내가 하나를 얻게 되면 내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하는 거예요.
오래 전부터 휴거와 관련되어서 7년 대 환난 그런 것 있지요. 이란과 이스라엘이 붙으면 드디어 마지막 3차 대전 벌어지게 되면 이스라엘에 제3성전이 세워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미국이 도와주고 세계역사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게 있지요. 그런 것에 빠진 사람들, 다니엘 해석하기, 묵시적으로 해석하기, 비밀조직 같은 것, 유대인이 어떻게 활동해서 세상을 장악하느냐. 그게 굉장히 퍼진 거예요.
퍼졌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백신 이야기도 하고 백신 속에는 인간을 추적하는 게 들어있다는 둥 트럼프 대통령 다시 재선해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에 왜 관심 있느냐 하면 내가 저것을 알면 내게 사는데 도움 된다고 생각하는 이 공포심 때문에 그래요. 마귀 작용이죠. 바들바들 떨면서 계시록을 저렇게 풀고 다니엘을 저렇게 풀고 성경을 저렇게 푸는 사람, 그게 대표적으로 신천지 아닙니까. 풀어줘야 내가 겨우 구원될 수 있을 거야. 이 환난 때에 666 이것 안 맞고 백신 1차, 2차, 3차, 4차, 5차 안 맞고 그러면 나는 살 수 있을 거야. 그게 나의 목적이고 나의 유가 되는 거예요. 교회가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 지식으로 해도 나만을 다 가려주질 못해요. 내가 만든 내가 생각하는 성경지식으로 아무리 그럴싸한 해석을 다 해도 여분의 내가 지켜야 될 또 삐져나와요. 그러니까 이게 가짜가 된 거예요. 그리고 가짜인 동시에 그게 현실세계입니다. 현실세계가 가짜입니다.
요셉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 뜻대로 된 일이 없습니다. 나는 이제 보디발 집에 가야지, 이런 것 없었어요. 이쯤 되어 보디발의 아내가 나를 유혹해야 되는데, 그런 것 없었습니다. 이쯤 되어 바로 왕이 꿈을 꾸어야 되는데, 이런 것 없었어요. 그냥 억울하고, 세상에서 제일 참기 힘든 게 뭐냐 하면 일 저지르지 않았는데 모든 결과를 내가 책임져야 할 때 내가 잘못한 걸로 모든 게 몰아세워질 때 진짜 그것 못 참으면 자살합니다.
내 목숨 바쳐서 나의 정당성을 알려줄게, 해서 쓸데없이 산에 가서 목매달고. 이러면 너희들이 날 믿어주겠나. 믿어줘서 뭐하는데? 주님께서 뭐라고 해요? “너 지금 뭐하노? 가룟 유다야? 왜 쓸데없이 그 짓해?” 내가 나의 의로움을 지키는 방식으론 안 받습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주께서는 야곱의 육의 열매기 때문에 안 받습니다. 요셉처럼 꿈이 덮쳐져야 돼요.
꿈이 덮쳐지면 나는 빈자리가 여기서 생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틈이 생긴다 하는데. 내가 나를 마저 설명을 못해요. 그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내 행동, 내 생각, 내 태도에 대해서 내가마저 그걸 해명을 못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실제 내가 더 커요. 그 빈자리에 대해서 내가 내 이름으로 내 것이란 이유 때문에 나를 관리하려 하지 마세요. 남겨놓으세요. 주께서 하시도록.
르우벤은 빌하와 통간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사람 되는 거예요. 이건 상상도 못하는 거죠. 다른 말로 르우벤은 장자에서 탈락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역대상 5장에 요셉 나오거든요. 요셉이 왜 나오느냐? 마지막 유다가 나올 때 르우벤이 장자가 아니고 요셉이 장자에요. 유다 입장에서. 유다 입장에서 르우벤이 장자였던 사람이죠. “장자 꼴좋다. 장자 됐다고 까불다가 기껏 아버지 첩과 통간하느냐, 인간아. 너 같은 인간은 장자 될 자격 없어. 요셉이 돼야 돼.” 이렇게 되겠지요.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요셉이 그렇게 해서 곱빼기로 땅을 분배받아서 땅이 두 배로 제일 많아요. 므낫세 지파, 에브라임 지파 있기 때문에 양쪽 다, 이번 수련회 때 혹처럼 튀어나왔다 했지요. 바산의 그 지역까지 약속의 땅, 제비뽑기도 하지 않은 땅까지 다 차지해서 있었단 말이에요. 그 넓은 땅 어떻게 됐어요? 제일 먼저 우상 숭배해서 다 망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78편에서는 내가 애초부터 요셉 지파는 선택하지 아니했다.
선택하지 아니했으면 처음부터 유다를 선택하면 되는데 왜 선택해놓고 선택하지 않았다 하느냐? 구원이라 하는 것은 타락이 아니고 탈락이에요. 탈락하는 겁니다. 탈락하게 되면 뭐가 생기지요? 빈자리가 생기지요. 그러니까 요셉의 아들들아 전부 다 물러가. 중앙에 빈자리 남겨두고 다 물려가. 그 빈자리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지파가 그 빈자리를 잠시 이어갑니다. 그게 무슨 지파냐? 레위 지파에요.
레위 지파는 장자라고 할 수 없어요. 왜? 대대로 이어질 땅이 없어요. 땅이라 하는 것은 지금 내가 땅이 있다고 땅이 되는 게 아니고 대대로 이어져야 돼요. 메시아 올 때까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했거든요. 이 땅에 하나님 메시아가 합류하면서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만든 땅, 그 땅까지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레위 지파는 땅이 없기 때문에 아예 제쳐놓는 거죠. 일종의 내시? 땅의 측면에서 내시 같은 거예요. 땅의 기능만 하고 죽으면 그만이지 계속해서 우리 지파는 오래가야 돼, 그게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레위 지파가 없다는 말은 레위 지파가 있다는 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레위 지파는 땅을, 다른 쪽은 땅이 있잖아요. 땅이 있다가 되잖아요. 레위 지파는 하나님이 있다, 이렇게 돼요. 땅이 있다가 아니라 땅 대신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 언약궤가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레위 지파가 제사장이잖아요. 오늘날 우리들 성도로 뭐냐? 왕 같은 제사장, 오늘날 성도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우리 집에 일하시는 분들에게는 집이 없다, 이런 것. 우리 집에 차가 일곱 대 있는데 운전사들이 너무 가난해서 집이 없어, 이런 것. 그러니까 운전사 일곱 있다고 자랑하지 말고 ‘없다’로 번역해서 이야기해야 돼요. “목사님, 저는 다이아가 별로 없어요.” 이렇게. “목사님 안녕하세요. 우리 집에 벤츠 차가 없어요.” 이렇게. ‘없다’로 이야기해요.
그러면 목사가 이야기하죠. “요새 집마다 다 있는 벤츠 차가 없어요. 벤츠 차도 없이 우에 사노?” “저한테는 영생이 있어요.” 이렇게 이야기가 되도록. 항상 성도는 뭘 자랑하냐? ‘없다’를 이야기해요. 왕 같은 제사장이니까, 땅이 없으니까. ‘없다’에요. “우리 집은 아파트 네 채가 없어요. 세 채는 있는데 네 채는 없어요.” 항상 세 채 있더라도 네 채 없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세 채 있다고 하면 자랑 되니까. 이건 하나의 요령입니다. 세 채 있다 하지 말고 네 채 없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우리 애들 둘인데 둘 다 두 채도 안 돼. 한 채 밖에 없어. 양쪽 다 아파트 한 채 밖에 없다. 그러니까 ‘없다’로 이야기해야 돼요. “아파트 두 채도 없는 자식이 우에 걱정이 되지 않습니까?” “영생이 있거든요.” 이처럼 장자의 자리는 지진이 일어나서 틈이 벌어지는 거예요.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장자는 될 수 있는 자격은 아무도 없었다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시간이 필요한데요. 지난주일 낮에 한 걸 잠시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상태가 있고 과정이 있다 했습니다. 이미 다 이루어진 거예요. 이루어진 것을 과정을 통해서 솔솔 풀어내는 거예요. 과정을 통해서 하나둘 씩 풀어내는 겁니다. 장자는 맏아들은 누구냐? 로마서 8장에 나오지요. 예수님을 맏아들 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신 것은 그분으로 맏아들 되게 하심이라. 맏아들은 확정되었어요. 맏아들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장자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흘러가는 역사가 다 필요했던 거예요. 오늘날 우리 인생이 필요했던 겁니다.
“나, 장자 아니야. 나, 내 이름으로 구원받지 않아.” 그 흐름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흐름을 보여줄 때 어떻게 보이느냐? 육을 마음껏 폭발하면서 보여주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는 아들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40일 철야기도 해봤다. 이게 마귀 짓이었다.” 이런 것. “나는 구원받기 위해서 부흥사가 요구하기에 우리 집을 팔아 교육관 짓는데 갖다 바쳤다. 이게 마귀 짓인지 그땐 몰랐다.” 이런 것.
“나는 십일조 하면 30배 줄줄 알고 십일조 했는데 그 다음 달 십만 원 했는데 삼백만 원 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나의 욕심이었다.” 이런 것은 여러분은 이미 안 할 거예요. 왜? 주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돈이 아까워서 안 하는데 이런 건 있어요. “나는 나 하나 헌신하기 위해서 내 자식을 아프가니스탄 선교사로 보냈다. 그런데 그게 헛짓이었다.” 이런 것.
“그래서 나는 교회 갖다 바친다고 30배 안 주는 걸 알고 나는 교회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헛짓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렇게 살아도 헛짓이었고 저렇게 살아도 헛짓이었고 그 헛짓을 뭐라고 하느냐? 그게 바로 현실이 되는 거예요. 꿈이 아니고 현실이에요, 이게. 요셉이 꿈을 쫓아간 게 아니고 요셉은 현실을 쫓아갔고 그 요셉의 현실을 누가 이겼느냐? 하나님의 꿈이 이긴 거예요. 하나님이 이긴 거예요. 그래서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고 요셉이 구원받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해주니까 축복받은 므낫세과 에브라임 지파가 착각을 하기 시작한 거예요.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다른 지파는 한 지분 받았는데 우리는 두 지분 받았다. 이게 자기가 착각인 줄 몰랐던 겁니다. 그 두 지분 받은 땅 홀라당 우상숭배로 다 날려버리고요 북쪽에 있던 제사장과 신앙인들이 어디로 피신했느냐 하면 남쪽으로 피신했어요.
왜? 남쪽 유다 지파는 다윗의 등불이 켜져 있기 때문에 선지자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북쪽은 신앙을 버렸지만 남쪽은 하나님이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남쪽이 B.C.586년에 다윗의 등불이 커져버렸어요. 남쪽에 피신하면 되는 줄 알고 제사장들과 신앙인들이 남쪽에 집결했는데 역시 우상숭배에 감당하질 못해 결국 바벨론 제국에 포로 잡혀가게 해서 전 세계에 공중분해 뿔뿔이 다 흩어졌어요.
흩어졌을 때 내가 다시 이스라엘 만들겠다고 할 때에 사람들은 70년 만에 에스라 느헤미야가 돌아와서 유다에다 성전 지으면 그 성전은 영원한 성전 될 줄 알았지요. 그때 성전 지을 때 그들이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이뤄진다. 에스라 느헤미야에 하나님의 말씀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구원받는다 했습니다. 이거 또 착각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인간이 착각할 수 있는 마지막 착각까지 다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뭐냐? 사두개인은 성전이 있으면 성전 지키면 하나님께서 이 성전에 찾아오실 것이라. 그것 착각이었습니다. 이 성전을 누가 헐라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 예수님의 몸이 부활의 몸이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부활의 세계는 조건이 있어요. 십자가 죽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는 세계입니다. 부활의 세계에요.
죽으면 들어가는 세계가 부활의 세계가 아닙니다. 사람이 죽으면 살리라, 이것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이야기했고, 그리고 안중근이 그걸 인용해서 죽으면 살리라. 천주교 신자 안중근이 그 이야기했잖아요. 죽으면 사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들어가야 살아요.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에 들어갈 위인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십자가의 죽음에 들어갈 위인이 없어요.
베드로가 십자가 죽음 말고 다른 죽음을 제안했지요. 제가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니 목숨 안 된다. 그것도 펼쳐진 야곱의 육입니다. 야곱의 열두 지파는 이방 모든 민족,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거예요. 대변해주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가. 그래서 이스라엘의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과 통간했다면 모든 인간이 그럴 가능성을 다 내포하고 있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육을 가진 인간은 언제든지 그럴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아직 그럴 사람이 안 나타나서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이.
요셉 지파가 우상 숭배한 것은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누구든지. 유다가 메시아를 죽이는 것, 그럴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메시아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죽여 버릴 수밖에 없는 요소를 갖고 있어요. 가룟 유다 자살했다? 우리도 언제든지 자살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하루에 오십 명 자살합니다. 신문에 안 나서 그렇지 오십 명씩 자살해요. 그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에요.
단지 우리는 여러분이 성도라면 이것만 바꾸면 돼요. 오십 명 자살하고 범죄 할 수밖에 없고 간음할 수밖에 없고 형제에게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에요. 그럴 수밖에 없는데 그게 다 뭐라고요? 그게 바로 뭐다? 두 자로.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면 돼요.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는 어느 속에 있다? 꿈이 뭐를 이긴다? 현실을 이기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현실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현실이야. 나는 그럴 수밖에 없어. 왜? 그게 현실이니까. 그런데 그 현실을 누가 이긴다? 꿈이 이기는 거예요.
예수님은 항상 우리가 마저 덮을 수 없는 우리가 율법을 다 못 지키고 남아있는 그것까지 몽땅 알아서 다 사랑으로 다 덮어버렸습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원하는 조건으로 너를 묶어버린다. 너는 이 현실 속에서 따로 신비를 말하지 마세요. 그냥 신비도 현실 속에 하나에요.
진짜 꿈같은 그 사실이 우릴 이끄시면 뭐가 보이느냐? 나의 죽음이 아니고 나의 죽었다가 부활이 아니고 나의 죽음 뒤의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 보여요. 십자가의 의미가 부각이 돼요. 내 대신 죽었구나. 내가 죽는 것은 아무 의미 없고요. 죽은 자가 죽는 거예요. 그게 뭐가 의미 있어요. 원래부터 죽은 자에요. 원래부터 무기물인데.
죽지 않아야 될 분이 대신 죽으심으로 부활한 그 세계에 우리가 감히 들어가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우리의 지금의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주죠. 너는 죄인이라고. 너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현실에서 못 벗어나. 하지만 그것이 뭐냐? 그게 죄야. 그런데 그걸 죄라고 아는 것, 이 아는 게 어디서 왔겠어요? 바로 우리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아는 거예요.
내가 장자가 아니고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내 인생을 주도하는 주인공은 따로 있으니 그분이 알려줬기 때문에 내가 주인공 아님을 아는 겁니다. 내가 장자 아님을 아는 거예요. 내 덕으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장자의 덕분으로 내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걸 현실 속에서 꿈의 자리를 늘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내고 찾아보는 겁니다. 어느 것 하나 주님의 것이 아닌 게 없습니다. 이 귤 두 개까지 전부 다 때를 맞춰 주신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썩어가는 육신까지.
그래서 마지막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나는 살아 있다. 결국 나는 죽는다. 이 경계선 잊어버리시고요 십자가, 그리고 부활 이 경계선으로 갈아타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고 죽는 것은 아무 시답지 않은 시시한 이야기에요. 죽든 살든 아무 문젯거리도 안 돼요. 중요한 것은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되는 것, 그것을 우리가 미리 알게 되었다는 이것을 여러분들이 복인 줄 아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죽었다 살았다가 얼마나 시급한 문제고 제일 중요한 문제처럼 여겼습니다. 여기에 인생 모든 걸 걸었습니다. 이게는 거기다 걸지 말고 십자가 이후에 부활 있고 부활은 십자가 통해서 가는 이 복음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여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걸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