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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20204a 울산강의-역대기상(7강) 5장 1절 : 장자의 허구성자유게시판역대상

20220204a 울산강의-역대기상(7강) 5장 1절 : 장자의 허구성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역대상 5장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찌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렇게 시작되지요.

여기 먼저 태어난 자가 장자다. 에서와 야곱이 있는데 쌍둥이인데 먼저 태어난 사람은 에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먼저 태어났으니까 장자라 하고 야곱을 차자, 그 다음 사람으로 생각해요. 이삭은 하나님의 복이 이스라엘에게 장자로 주어질 때 모든 복을 에서에게 몽땅 다 맡깁니다. 야곱은 에서를 장자로 인정하는 조건 하에서만 야곱이 에서의 복에 참여하는 그런 방식으로 아버지 이삭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에서가 장자라고 생각한 이 장자가, 장자가 아니고 누가 장자냐 하면 야곱이 장자가 되지요. 야곱이 장자가 되게 되면 그림으로 그려서 이삭이 이렇게 서 있잖아요. 이게 바꿔버리면 이삭이 거꾸로 처박히지요. 이삭이 완전히 밀어줬던 그 장자가, 장자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나라고 여겼던 그 정체, 또는 정체성은 가짜라는 뜻입니다. 이건 가짜였던 거예요.

하나님께서 에서를 먼저 태어나게 하고 태어나게 했으니까 마땅히 장자라고 여겼던 그 안일한 나의 판단, 나의 평가, 해석은 하나님 쪽에서 바꿔버리니까 이쪽의 것이 같이 연결됐으니까 완전히 뒤바꿔지는 거예요. 이걸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로 인한 천국은 천국이 아니었다. 내 생각에 내가 천국 가야지 하는 천국은 백 퍼센트 전부 다 가짜입니다. 하나님께서 뒤바꾸는 이 원칙 때문에.

그래서 반대로 나는 지옥 가도 마땅해, 라고 한다면 지옥 가도 마땅하다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면 혹시 하나님께서 착하다고 천국 보내주지 않을까, 이런 통박, 이런 계산 그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건 더 못 됐어. 수작을 부리는 거예요. 간단해요. 나로 인한 천국이, 천국이 아니라니까요. 진짜 천국은 나를 제치고 달리 등장하시는 그분의 나라가 천국이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조건 하에 우리는 천국 가는 거예요. 천국은 나 살기 위한 나라가 아님을 지적받는 그 조건 하에, 그러면 그 천국은 나의 세계가 아니고 누구의 세계다? 주님의 세계라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에서 입장에서는 야곱이 남이거든요. 자기 자신이 아니잖아요. 동생이잖아요. 자기 몸뚱이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만약에 에서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야곱의 세계를 자기 세계보다 더 좋아하면 되겠지요.

이게 아까 제가 말한 이거잖아요. 나로 인한 천국은 천국이 아니라면 나 중심 말고 다른 분의 중심이 된 그게 천국이라면 나는 기꺼이 나 중심의 천국을 날마다 포기하면 되지요. 참 쉽지요. 내 중심의 행복, 내 중심의 가치, 내 중심의 의 이런 걸 포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되진 않아요. 여기서 긴긴 역사가 필요해요. 그 역사가 무슨 역사냐? 바로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스라엘은 원래 이름이 야곱이지요. 이스라엘의 역사란 것은 야곱이 펼쳐진 역사, 야곱의 역사에요. 야곱의 역사에서 뭐가 나오느냐? 그냥 나오는 게 아니고 여기 물줄기가 몇 개 나오느냐 하면 물줄기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두 개의 물줄기가 나오지요.

오늘 역대상 5장 1절 할 때 그 물줄기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르우벤입니다. 르우벤 물줄기가 등장하지요. 그래서 르우벤이 등장하면서 르우벤은 르우벤의 자리와 더불어 함께 있으면서 이 자리바꿈이, 르우벤이 장자라는 자리가 바뀌면서 르우벤이 바꿔져야 되는 거예요. 르우벤은 열두 아들 가운데 몇 번째 태어난 아들이에요? 첫 번째지요. 그럼 아까 제가 말한 원칙에 의하면 첫 번째는 항상 이건 뭐다? 하나님께서 틀어버리는 그 원리에 의해서 첫 번째는 첫 번째가 아니었던 겁니다. 첫 번째가 아님을 알려주는 첫 번째로 태어나는 거예요.

이게 르우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에 있는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를 위한, 나로 의한, 나로 인해서 생각되어지는 천국은 가짜다, 라는 것을 아는 순간에 우리는 버리고, 버리고, 버리고 아낌없이 버릴 수가 있어요. 나로 인한 것은 천국과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아까 어떤 분에게 참 똑똑하다고 이야길 했는데요. 똑똑한 이유가 인생은 속도가 아니고 방향이기 때문에 그래요. 얼마나 빨리 목적을 달성하느냐가 아닙니다. 인생은 올림픽이 아니에요. 게임도 아니고 주식투자도 아니에요. 얼마나 많이 쌓고 모으고 긁어모으나가 아닙니다. 네가 지금 인생 방향이 어느 쪽이냐가 중요해요. 그 방향이 제대로 됐다는 똑똑한 사람이에요. 그게 달란트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여러분 다 아시죠. 열, 다섯, 한 달란트. 교회 좀 다니면 모르는 사람 없잖아요. 그 달란트 비유에서 칭찬받는 직원의 특징이 방향이 자기 쪽이 아니고 주인 쪽에 있다는 거고요. 거기서 주인한테 잘려서 울며 어두운데 쫓겨난 직원은 방향이 주인 쪽이 아니고 방향이 자기 쪽이에요. 이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빨간 걸로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체적인 목적과 의미를 가지지 말아야 된다. 이스라엘은 자체적인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사는 이유와 목적을 스스로 만들면 안 되게 돼있어요.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힘들다 하는 경우 있지요. 힘든 경우 왜 힘든지 제가 알아 맞춰볼까요? 그게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목적이 있으면 반드시 힘들게 돼있어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로또를 우연히 구입하게 됐는데 그게 1등에 당첨됐다. 1등 상금 타기 위해서 은행에 갈 때 여러분 굉장히 힘들어요. 왜 힘드냐 하면 가다 엎어지고 자빠지면 어떻게 될까? 신나면서도 갑자기 스트레스를 받아요. 뭐 당첨 안 돼서 모르겠습니다만 상상하면 돈이 수십 억 들어온다는 것은 새로운 스트레스가 침입하는 거예요. 내 인생에 들어오는 겁니다. 잘 믿어지지 않는 얼굴을 하고 계신데......

항상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것은 여러분들의 집요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목적이 여러분들을 괴롭히고 내 사는 이유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다보니까 점점 여러분들은 괴로운 인생에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목적과 의미는 내가 나 잘 되기 위해서 하는 목적과 의미기 때문에.

세상의 돌아가는 중심은 내가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잖아요.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고집스럽게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기를 고집하니까 이 고집 때문에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은 본인 탓이죠. 본인이 그렇게 만든 겁니다. 자식 둘 있는데 자식 둘 잘 되길 바란다. 그때부터 부모는 힘들어져요.

그래서 오늘 핵심은 뭐냐 하면 장자 재구성입니다. 장자가 된다는 것, 르우벤 이야기거든요. 르우벤이 자기가 장자라고 여기잖아요. 남들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 그것을 자기에게서 뽑아내요. 그게 불가능하죠. 누가 뭐라도 먼저 태어났는데요. 창세기 49장 3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것 보기 전에 창세기 29장 보겠습니다. 르우벤이 처음 태어날 때 이야기거든요. 창세기 29장 32절에,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이렇게 돼있어요. 이 구절 레아가 남편과 동침해서 임신해서 제일 먼저 낳은 아이가 르우벤이었어요. 그래서 르우벤의 바탕은 없음입니다. 이런 게 굉장히 어려운 대목인데요.

르우벤의 이름의 뜻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레아의 괴로움을 권고하셨다, 들어주셨다는 뜻이거든요. 하나님은 인간의 어려움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지금 레아는 들어줬다고 기도응답을 착각하고 있어요.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기도응답을 받을 수 없는 대상이에요. 인간의 기도응답은 있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상대 안 하거든요. 하나님이 상대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나의 괴로움을 들어주셨다는 것은 누가 중간에 빼앗아가야 하느냐 하면 장차오실 예수님이 이 르우벤의 괴로움을 자기 것으로 옮겨가요. 옮겨가서 주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그러니까 주님 자신이 르우벤이 되는 거예요. 기도의 응답이 르우벤이니까. 야곱의 열두 아들은 어느 한 사람이라도 이 땅에 없어야 될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야곱의 아내 라헬과 레아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여러분들이 내 이야기를 모른 척하시는 데, 모른 척하는지 진짜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 들어보시면 아아 그 원리구나, 라는 걸 아시게 될 것입니다. 자, 인간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 앞에 쫓겨났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상대할 인간은 없습니다. 상대하려면 쫓아내질 않습니다. 쫓아냈으니 상대할 인간이 없어요. 그래서 없는데 여기 뭐가 주어지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져요. 언약이 주어지면 언약의 특징은 없는 자리에 사람이 새로 생겨요. 신기하지요.

언약의 특징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게 하는 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자손 아니지요.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이삭이지요.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이디어에 없는 존재에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자식 내 아들이 생길 것이다. 그건 아브라함 자기 생각이고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어야 돼요. 그래야 언약이 아브라함을 찾아왔다는 것이 징후가 남겨져야 되기 때문에. 언약이 오기 전에는 없어야 되고, 언약이 오고 난 뒤에는 없던 데서 새로 생겨야 돼요. 그게 아브라함언약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언약에서 아들은 이스마엘이 아니고 누구냐 하면 바로 이삭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생각했던 아들은 종에서 태어난 아들이거든요. 하갈과 동침해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하갈로 해서 낳게 해놓고 자식이 있음을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보여줘 놓고 그 일이 먼저 발생되게 해놓고, “자식 있지, 있지?” “있습니다.” 있으니까 그거는 아니에요. 있으니까.

인간이 있는 식으로 있는 것은 자식이 아니에요. 그걸 여러분 자식한테 적용시켜보세요. 내가 여기 태어났잖아요. 태어났으면 죽어서 어디 가고 싶어요? 지옥 가고 싶어요, 천국 가고 싶어요? 천국 가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 천국은 나로 인한 천국이기 때문에 있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천국이 되는 겁니다. 들어보니 별로 놀라운 논리도 아니지요, 뭐.

하나님께선 인간과 상댈 안 해요. 기도응답이고 뭐고 인간이 있어야지 마음에 드는 인간이 없는데 무슨 기도에 응답하고, 상대할 가치도 없는데 상대합니까. 상대할 가치 있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언약을 주고요 언약 안에서 새로운 인간 류, 인간 종류를 만들어요. 새로운 인간 종류를 만드는데 이 인간 종류가 만들어질 때 어디서 만들어지느냐 하면 장차올 미지의 세계, 이스라엘 역사가 끝난 멸망한 그 지점에 미지의 인물을 토대로 해서 그 토대 안에 있는 인간으로 하나님께서 언약, 천국 백성이라고 만드시는 거예요.

자식을 성경에 있는 이야기해보겠어요. 성경에 없는 이야길 하면 너무 복잡해지니까. 룻기 4장 17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사실은 나오미의 아들이 아니고요 나오미의 손자를 낳은 거예요. 나오미의 며느리가 낳은 아들이 오벳이에요. 룻이란 사람은 다윗의 증조할머니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부모가 할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 또는 증조할아버지, 할머니가 있고 거기서 아들이 생겨서 그 다음에 손자가 생겼다. 이게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우리의 상식과 제가 아까 처음에 했던 이삭에 제일 먼저 나온 에서를 장자로 했던 것이 지극히 너무나도 인간세계에서는 마땅하고 상식이죠.

주님께서는 그걸 뒤엎어버립니다. 야곱과 에서에서는 그 당시에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야곱이 장자가 되고 에서가 장자에서 탈락이 돼요. 그냥 탈락이 아니고, 탈락이란 말 어려운데요. 미리 이야기할게요. 인간에게는 타락이란 게 없고 탈락밖에 없어요. 탈락을 통해서 타락을 설명하게 돼있어요, 성경은. 성경에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서는 모든 것이 너 아니고, 너 말고 다른 분 이런 식이에요. 너는 탈락이야, 라고 하면서 다른 분을 소개해요.

나의 탈락됨을 받아들일 때 그 사람은 자기의 타락도 동시에 수용하면서 이것이 내가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게 바로 구원이에요. 내가 뭘 아는 게 아니고 내가 뭘 지식을 소유하는 게 아니고 내가 지금 어떤 상황 속에 놓여있는지 알면 되는 거예요. 그게 나 위주의 나로 인한 나라가 아니고 주님 위주의 나라를 따로 만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언약 없는 하나님은 그냥 우상이에요. 인간이 만들어낸 거예요. 지어낸 거예요. 이슬람의 알라신처럼, 힌두교의 잡신처럼, 불교의 미륵보살처럼 전부 다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신이에요. 그래서 니체라는 철학자도 이야기했잖아요. 신은 죽었다고요. 니체가 말을 잘못했어요. 신이 죽은 게 아니고 신은 애초부터 없는 겁니다. 니체는 그것까진 몰랐지요. 애초부터 신이란 건 없었어요. 왜? 인간은 신에 대해선 모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 있고 인간은 하나님 밖에 있다는 것 하나님이 증명해주는 거예요. 하나님 안에 들어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음을 하나님 쪽에서 언약으로 증명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언약이 다가오게 되면 그냥 에서 같은 경우에, “그래 네가 장자다. 내가 너한테 빌어먹고 살래.” 이러면 자기도 구원받을 수 있는데 에서의 본질이요 동생한테 빌어먹고 사는 본질이 아니라 에서의 본질은 장자의 명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본질이에요. “내가 중요하지 장자가 뭐 중요해.” 이게 에서의 본질이에요.

예수님을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하면 그래 나는 이제 나를 부인하고 예수 믿을게, 이게 인간의 본성이 아니고, “예수 없이 살지, 뭐. 무소의 뿔로 가라 했는데 내 인생 내가 개척하면 되지 뭐. 꼭 예수 의지하고 예수에 빌붙어 살 필요 뭐가 있겠어.” 이거는 인간으로 숨길 수 없어요. 사람이 처음에는 교회 가겠습니다, 믿어줍니다, 라고 아부도 하지만 성령이 없는 사람은 결국 교회 오십 년 다니고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다 해놓고 결국 내 인생 내 힘으로 살았지 누구 힘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해요. “예수가 뭔데 내가 중요하지 예수가 뭐 중요해.”

지금은 아직 죽을 때가 안 돼서 속으로 숨겨놓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늘 나오게 돼있어요. 인간은 사화산이 아니고 활화산이에요. 속에 부글부글 끓습니다. 처음엔 누르고 있으니까 자기의 본심을 안 드러내는 데 뭔가 일이 탁 터지면 속에서 눌렸던 것이 폭발해버리지요. 붉은 마그마가 막 쏟아지고 주위에는 화성암이 생성되고 폭발해버립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이걸로 폭발해버려요. 내가 천국 가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왜 조건이 점점 더 많아지느냐. 나는 더는 못 참겠다고 이런 식으로 폭발해버리지요. 기독교 아니면 다른 종교 없겠느냐, 이런 식으로. 다른 신은 신이 아니냐. 산으로 정상에 올라가면 되지. 가는 길은 다양하다. 이상한 소리 해가면서 그렇게 하게 돼있어요. 주로 신학자들이 그런 소리 많이 해요.

그래서 인간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선악과 따먹고 내가 바로 포기할 수 없는 신이다. 이런 목적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아까 마태복음 19장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버리라 하잖아요.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해놓고 그 다음 순서가 뭐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 에서와 야곱 경우 알지요. 없는 자가 있다고 여기는 거울 보면 내가 있잖아요. 있으니까 그거는 가위 표에요. 아니에요. 눈에 보이니까 아닌 거예요. 나 말고 없는 자를 위한 천국이란 사실을 여기 눈에 보이는 나 스스로 그것이 떨어져나가야 되지요. 내가 나에게서 떨어져나가면서 없는 분을 위해서 내가 있게 되었다는 이 관계가 언약 관계입니다.

내가 여기 있는데 천국 가기 위해서 언약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라고 있는 것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없는 분이 오셔서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이야기한 것 마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는 건 너무나 상식이에요. 성경에서는 언약적으로 이걸 뒤집어버립니다. 후손이 누굴 끌어당기느냐 하면 나중에 나타난 후손이 앞에 나타났던 선조를 끌어당겨서 구원하는 거예요. 내가 찾아가는 게 아니고 그분이 끌어당기는 거예요.

이것을 베드로전서 1장 10절과 11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구약에 예수님의 영이 미리 그들에게 찾아가서 만들었고 찾아갔다 이렇게 표현해요. 그러니까 베드로전서 1장 같은 경우에는 도대체 시간을 완전히 반대로 적용시키니까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상당히 난감하지요. 성경 자체가. 내가 어떻게 이익을 얻을까 해서 성경 보는데 성경은 맨날 너 아니래, 너의 성경해석이 보탬이 안 된데요.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감추어놓은 미리미리 안에 화산처럼 들끓는 나의 버림받아 마땅한 죄성을 노출시키라고 성경을 준 거예요. 그게 노출이 돼야 언약이 나타나거든요. 언약을 내가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찾아오게 되면 이게 숨겨진 내가 따로 빼돌린 나의 죄성이 마치 언약이 자석이라면 나는 이 안에 들어있는 쇠붙이가 되어 언약이 오게 되면 딸려 들어가요. 딸려 들어가면서 내장 해부 찢어지면서 속에 들어있는 내 마음이 언약에 죄란 모습으로 들어붙게 돼 있어요. 그게 이스라엘 역사에요.

르우벤은 먼저 태어났지요. 장자지요. 그 르우벤이 장자에서 탈락합니다. 그게 바로 언약의 일관된 원칙이에요. 장자 만들어놓고 먼저 된 자 만들어놓고 나중 만들어요. 이거는 구약도 신약도 모든 게 다 마찬가지입니다. 정리해봅시다. 우리의 후손이 정확하게 아브라함의 후손이 시조가 되는 아브라함을 구원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그 후손은 여러 명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의 후손은 단 한 명입니다.

그래서 이 숫자만 기억하면 돼요. 1━12━1. 이(앞에) 1은 보이지 않는 1일에요. 없는 1일인 데 야곱은 한 명이잖아요. 여기서 열두 명 나왔지요. 열두 명이 뭐냐 하면 야곱의 육적 요소에요. 야곱이 자기 아내들과 혼인해서 애를 낳았잖아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로 시작해서 족족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하고 하나님께 부정당할 육적인 아이들이 생산됩니다.

그렇게 부정당할 때 부정당한 요소가 언약이 찾아와서 전부 다 부정당하면서 부정당한 언약에 의해서 없던 데서 생기고 없는 데서 살아나는 그 근거는 장차오실 이스라엘로 오실 예수님에 의해서 그것이 밝혀집니다. 창세기 29장, 30장 보게 되면 아까 이야기한 것 마무리 지어보겠습니다.

창세기 29장, 30장 보면 열두 아들 낳고 이름 하나씩 짓는 게 나와요. 근데 여러분 물어보겠어요. 그 이름이 주의 이름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이름입니까? 이런 질문도 되고요 이 이름이 야곱의 이름입니까, 이스라엘의 이름입니까, 라는 질문도 동일한 질문이에요. 여기에 르우벤 그 다음에 시므온, 그 가음에 셋째 아들이 레위, 넷째 아들이 유다인데 창세기 29장에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가 야곱의 이름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의 이름입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인데요. 왜 잘못된 질문이냐 하면 둘 다 돼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이름이. 시작은 야곱의 이름이에요. 시작은 야곱의 이름인데 나중에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이스라엘 이름으로 바뀌는 거예요. 바뀔 때 야곱의 이름으로서의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이것은 전부 다 제거돼야 됩니다. 사람의 육의 이름은 제거되고 제거되게 하는 작용에 의해서 거기서 주의 이름이 하나로 통합이 돼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르우벤이 르우벤 이름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이라니까요. 주님의 기능을 보여주는 르우벤.

창세기 29장 33절에,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했다는 뜻이에요. 아까 첫 번째와 비슷한 응답했다 이 말이거든요. 그 응답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에게만 응답해요. 왜냐?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받기 때문에. 구원의 노선은 이미 확정됐습니다.

거제도 가면 무슨 다리가 있습니까? 거가대교가 있지요. 그러면 그 다리 말고 딴 길로 갈 수 없지요. 이미 다리가 확정되었다니까요. 무엇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내 이름은 그 앞에서 어떻게 돼요? 삭제해야 되지요. 그런데 그 삭제를 내가 내 뜻으로 내 힘으로 삭제가 안 되는 거예요.

왜? 우리는 내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고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되겠다는 목적, 복 받겠다는 목적, 신앙생활 잘하겠다는 목적,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목적, 그 목적들을 주의 이름으로 바꾸는 과정 속에서 나의 목적이 어떻게 실패로 끝나는 걸 보라. 그게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그 역사를 우리한테 되풀이하는 반복시키는 거예요. 이제 이해되지요.

이스라엘 역사가 왜 필요합니까? 이스라엘 역사는 자기가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부했는데 나중에 그 백성 속에 누가 왔어요? 메시아가 왔을 때 그 메시아를 누가 죽입니까? 메시아 죽인 자들이 누구에요? 합세해서 이구동성으로 누굽니까? 유대인들.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 택한 백성이라고 여겼던 자들이 죽이잖아요. 그러니까 아니잖아요.

인간은 본인은 인간인데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아니에요. 그냥 무기물이에요. 인간 속에 산소가 제일 많고 그 다음에 수소, 규소도 많고. 인간은 원소 덩어리에요. 그냥 흙이에요, 흙.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할 때 어디서 만들었습니까? 흙에서 만들었지요.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흙에서 만들었습니다. 들어봤어요? 진짜 들어봤지요, 이 이야기.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본전입니까?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면 본전이잖아요.

그런데 무슨 마음의 상처라든지 되지도 않는 사치스러운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마음의 상처라니요? 무슨 교만이 이런 교만이 다 있어요. 외롭습니다. 흙이 뭘 외로워요. 달이 벌벌 떱니까, 외로워서? 짜증나서 못 살겠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 짜증냅니까? 수성이 짜증나서 못 살겠다고 그런 소리합니까? 뭔가 괴물이 들어가서 그래요. 그냥 흙이면 산소, 질소 가만있잖아요. 그냥 무기물은 원소 아닙니까. 가만있잖아요. 왜 우린 가만 못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이 인정하지도 않는데 스스로 인간이라고 우기면서 나름대로의 목적과 삶의 가치와 의미를 챙기려고 누가 시켰습니까? 배후의 악마가 시켰지요. 누가 시키겠어요. 너는 네 이름을 챙겨라. 르우벤이 실패한 이유가 자기 이름 챙겨서 그런 거예요, 이게. 이게 우리가 간직해야 될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는 버릴 이름이에요. 버릴 카드라고. 패가 버릴 패라고.

내 자존심, 내 가치, 자존감 전부 다 이거는 조기 폐기해야 돼요. 그러나 우리는 폐기 안 합니다. 왜? 못 하니까. 누가 악마를 이겨요? 악마를 아무도 이기질 못해요. 악마 못 이깁니다. 괴로울 땐 교회 나오고 편하면 안 나오고. 이게 인간인데 뭐. 자기만 챙기면 그만인데 이 버릇을 이 본질을 누가 이깁니까. 그래서 이거 하나 정리해야 돼요.

인간의 정체성이란? 정체성은 나는 나다 이 말이죠. 인간의 정체성이란 남이 나를 알아주는 방식이에요. 내가 이렇다고 우기지 마세요. 나는 이렇게 잘 났다 우기지 마세요. 그건 사회에서 인정 안 해줍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주는 그게 나의 본질이고 정체성이에요.

티비 거의 안 보는데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솔로 게임이란 게 있어요. 서울 출신 말고 시골 출신 남자, 서른둘부터 해서 마흔넷까지 나오던데 이렇게 촌에 있는 노총각들, 예천이라든지 수원, 하여튼 노총각들 다섯 명과 이십 대 스물아홉부터 서른다섯, 일곱 정도 되는 노처녀 다섯 명을 3박4일간 한 건물에 지내게 해서 나중에 짝 맞추는 게임이에요.

짝 맞추는 게임에서 처음에 자기 직업부터 소개합니다. 나는 치과의사입니다. 나는 안경점합니다. 나는 공무원입니다. 괜찮은 직업들 갖고 있어요. 여자들 직업도 괜찮아요. 전부 다 소개하는 거예요. 자, 나의 직업을 소개하는 것은 나의 정체에요. 내가 아는 나다움이에요. 그런데 정체성은 뭐라 했습니까? 예천인가 어디 있는 사람은 자기가 안경점을 하는데 그 건물이 아버지가 준 4층 건물인데 자기는 건물주라는 거예요. 나이는 서른일곱 쯤 됐는가, 그래요. 한 팀 말고 아무도 안 됐어요.

자기 자신이 이렇다고 내세울 데 문제는 앞에 있는 다섯 명의 여자들 솔로들이 백날 해도 나는 당신을 받아주기 싫으면 끝나는 거예요. 결혼이란 조건보고 하는 게 아니에요. 네가 어떻게 되든 내가 받아주면 무조건 내 배우자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혼인을 해서 죽을 때까지 나는 사람 너무 좋아서 받아주었다가 계속 가요.

그러니까 인간의 정체성은 내가 누구랑 같이 있는가, 그 사람 소속이 돼버려요. 특히 부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거든요. 그러면 이 원리를 그대로 이야기해봅시다. 나의 정체성은 뭐냐? 남이 나를 받아주는 한, 성경에선 언약에선 남을 누구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을 여기다 집어넣읍시다. 그럼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는 방식은, 이것은 우리 쪽에서 신앙생활 잘하고 백날해도 받아주겠어요, 안 받아주겠어요? 안 받아주지요.

그러나 조건을 방식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왔다면 내가 지옥 가고 싶어 몸부림 쳐도 지옥 갈 수 없는 거예요. 왜? 그 방식이 나를 꽁꽁 묶었으니까. 그걸 흔히 하는 사랑의 밧줄이라.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라, 있잖아요. 사랑의 밧줄로 나를 꽁꽁 묶어버렸어요. 내가 무슨 짓거리를 하고 어떻게 진짜 개망나니 같이 살더라도 이 조건이 나를 옥죄는 거예요. 잘한다, 아이쿠, 이렇게 옥죄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대하는 태도에요. 그게 언약입니다. 언약의 완성이에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나를 낳았다? 이게 신나야 될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 버릴 리스트에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부모가 포함돼 있지요. 부모가 나한테 남겨준 것은 일방적인 부모의 고집과 자존심으로 뭉쳐진 육적인 것이지 하나님 아버지가 천국에 받아주겠다고 했던 하나님 쪽에서 내민 조건은 아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위에서부터 멀리서 과거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구원은 십자가로부터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부터 거꾸로 끌어당긴 거거든요.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8장에서 이렇게 했어요. 아브라함이 누구를 보기를 원했어요?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가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오느냐 하면, 보고 뭐했다? 기뻐했느니라.

도대체 유대인들이 그 이야기 듣고 학을 떼는 겁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느냐. 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왜 달라. 달라도 너~무 달라요. 우리는 아버지 있고 손자 있고 이게 인간의 방식이거든요. 그리고 장차오실 메시아만 기다리면 된다는 것이 유대인들이 역사적 상식적 인식이었습니다. 그게 파토 나는 그걸 완전히 거꾸로 돌려버리는 거예요. 마치 이삭이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에서를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어.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맏이다, 장자다. 복 받아라 인간아. 내 너한테 몰빵 해줄게. 이것이 너무나 상식인 것처럼 주께서 그걸 뒤집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역대상 5장 1절에서 이스라엘의 장자는 르우벤 맞다. 성경에 보면 계속 그 이후에도 르우벤은 장자라는 이야기가 한두 번 나오는 게 아니고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런데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먼저 태어난 건 맞는데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 아들 요셉의 자손으로 돌아가서. 요셉에게 돌아갔다는 거예요.

도대체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돌아갔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이게 찾아보게 되면 창세기 48장 16절, 17절에 나옵니다. 16절에,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눈먼 야곱이 더듬거리면서 요셉의 아들, 두 손자를 의도적으로 아이의 위치는 그냥 두고 먼저 난 자, 나중 난 자 두고 먼저 난 자를 나중에 돌리고 나중 난 자를 먼저 돌려서 어긋맞게 축복하면서 아버지가 한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바꾸시는 분이란 뜻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구원의 조건이라는 겁니다.

나로 인한 천국을 진짜 나의 바탕이 되는 예수님과 맞바꾸게 하시는 이것이 오늘날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나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이걸 매일같이 바꾸는 거예요. 뷔페에서 먹는데 맛있단 말이죠. “맛있는 걸 내가 무슨 복을 받아서 맛있는가. 아차, 내가 아니고 주님입니다.” 초밥 하나 먹기 전에 후딱 바꾸는 거예요. 그게 식사기도 아닙니까. 식사기도 그렇게 하지 않아요? 여러분 다 그렇게 해 왔지요?

“이거는 내 공로 아니고 주의 은혜입니다. 주께서 주신 만나입니다.” 이러고 안 잡수었어요? 요샌 하지도 않으니까, 뭐. 심지어 제사음식 오징어 간장에 조린 것 먹으면서도 큰집에 제사 하든 말든 먹기는 맛있게 먹자, 할 때 큰집 제사음식도 주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묻지 말고, 이거는 조상에게 바친 건지 묻지 말고 감사하게 먹으란 말이죠.

왜? 어차피 주님을 드러내가 위해서 존재하는 우리니까요. 내가 아니라는 방식으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린 없어야 되거든요. 있는데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있는 우리가 없음의 자리에 가서 다시 주님에 의해서 그 다음에 내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사는 것은 내가 아무리 아이디어를 상상을 하고 생각을 해도 그거는 내가 상상 밖의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구원받고 천당 가는 걸 생각하지 내가 아니고 주께서 만들어진 어떤 게 천국 간다는 생각은 내가 자리 잡고 있는 한 내 쪽에서 아이디어를 못 끄집어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우리가 일평생을 살면서 우리는 아무지게 하나님이고 예수고 간에 누가 우선인가? 나의 가치와 나의 목적과 나의 의미 챙기는 것, 우리는 한시도 숨을 안 쉬면 안 쉬었지 그 모습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게 르우벤이에요. 그러니까 르우벤이 여기 나온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딱 우리 모습이에요. 그게 유다였습니다.

아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가 누구의 자손입니까? 무슨 백성? 유대 백성 아닙니까. 유다 백성이거든요. 이게 장자가 처음에는 르우벤이었잖아요. 그 다음에 요셉이죠. 요셉인데 중간에 또 바뀝니다. 시편 78편 68절 이번에 수련회 참석한 사람은 압니다. 그 대목을 읽어드리겠어요.

67절부터 보면,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주께서 르우벤 지파 잘라내고 요셉 지파로 장자 해놓고 요셉 지파 잘라내고 그 자리에 유다 지파 해놓고 그 유다 지파가 누굴 죽였습니까? 메시아를 죽이게 만들어버렸어요.

결국은 열두 지파가 야곱의 열두 지파입니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입니까? 이 질문이 의미 있는 질문이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무슨 지파입니까? 야곱의 육의 소산이에요. 야곱의 육이 잘 보여주는 것이 두 아내입니다. 레아와 그리고 라헬. 둘이 자매간인데 엄청 싸워요. 둘 다 남자한테 꽂혔어요. 남자는 하난데 상대할 여자는 둘이에요. 맨날 결승전이에요. 결승전 이긴 자가 자기 남편과 동침이 돼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식 그냥 주지 않습니다. 육이 육대로 다 노출시켜놓고 자식을 줘요. 그런데 그 자식 나올 때마다 이름 붙이잖아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이름 누가 붙입니까? 동침했던 엄마가 붙여요. 엄마가 왜 붙입니까? 나는 너한테 이겼다는 거예요. 앗싸. 그래서 모든 이름을 응축해보면 두 자에요. 앗싸. “나는 이 땅에 존재하는 자체가 복이야.” 이런 것 있잖아요. “나는 이 땅에 살아남았어요, 앗싸.”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29장, 30장이죠. 열두 아들 주셨잖아요. 그 다음에 야곱이 다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32장에서 누가 죽는가? 야곱이 죽어 버려요. 야곱은 이삭의 장자지요. 이는 뭐냐? 장자의 결핍, 장자는 그 자체가 빈 공간, 블랙홀이 되는 겁니다. 장자가 구멍이 뚫렸어요. 장자 없~다가 돼요. 장자가 없어요.

이것도 모르고 열두 아들은 아버지 장자라 해서 창세기 34장에 보면 세겜에서 그때 레위와 시므온이 야곱의 육적인 것, 육의 특징이 뭐냐? 남한테 지고는 못 사는 거예요. 나는 죽으면 죽었지 너한테는 안 진다는 육의 본성, 나는 나를 지키는 자기 때문에. 나는 나를 지킨다는 것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4장에 보면 나와요. 나는 가인은, “하나님, 나는 나를 지키는 자지 아우를 지키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이 그거에요.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이고 예수고 뭐라 해도 마지막 남는 것은 내가 나를 안 지키면 누가 지키랴. 향토예비군 정신이죠. 내 고장은 내가 지키는. 그게 전부입니다. 딴 거 없어요. 이런 우리를 어떻게 천국에 넣어주는가? 그건 두 번째 시간에 해야지요. 10분 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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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8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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