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9장 31절 (예수 이야기)211221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9장 31절 (예수 이야기)211221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9장 18절부터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질문하는 자와 질문 받는 자가 연대를 이룹니다. 질문자는 예수님이 질문하지요. 질문 받는 자는 제자들이 질문을 받지요. 그러면 여기서 이어져 나와야 되는 논리는 뭐냐 하면은 내 이야기가 나오면 안 되고 성도는 주님 이야기가 나와야 돼요. 주님 이야기가 나와야 돼요. 주님 이야기. 내 이야기가 나오면 안 되고요. 주님 이야기.
이 말은 내 이야기는 아니고 주님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주님의 이야기가 나와야 됩니다. 현재 주님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쏟아 붓고 있다는 그 이야기가 나와줘야 연대라는 것이 형성되는 겁니다. 연대. 예수님께서 먼저 이야기했잖아요. 질문을 하잖아요.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님 쪽에서 질문을 했어요.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로써 제자들은 제자들의 팔자와 운명은 주님의 질문 안에 묶여져 버렸습니다. 주님이 질문을 했다는 것은 이제는 제자들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주님의 질문이라는 그 묶음 안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질문은 주님이 알아서 성취되어버려요. 덩달아 질문 받은 제자들의 운명과 팔자도 확정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한 것은 정답을 그들에게 얻고자 함이 아니라 주님과 그들이 질문으로서 한데 묶였다는 것 자체가 정답이 되어버려요. 답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너는 나하고 같은 질문을 받음으로서 내 세계 속에 이미 들어와버린 그런 대상이라는 것. 그게 정답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떨어져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하나님에게 떨어졌을 때 하나님이 아담을 구원해서 하신 게 뭐냐 하면은 질문이었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거는 아담이 지어낸 게 아니에요. 아담 쪽에서 하나님께 질문한 게 아닙니다. 이 말은 인간의 모든 질문은 자기 밖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의 모든 질문은 자기 밖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질문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모든 생각은, 마음 씀씀이는, 본인의 모든 생각은 본인의 의식 영역 밖으로 못 벗어나요. 질문을 해놓고 도로 자기로 끌어당깁니다. 예수님 말고 인간들은. 인간들은 아무리 질문을 뱉어봐야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질문을 하면서 어떤 대상, 어떤 사실에 대해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어떤 사태에 대해서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궁금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저게 뭐지? 선악과가 뭐지? 저 하늘에 있는 별은 몇 개지? 자꾸 질문을 던져요. 인간이 질문을 던지는 걸 이걸 가지고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게 바로 세계, 세상이라고 이야기해요. 세계, 세상. 그래서 인간이 이해하는 세계란 나의 의식 범주 안의 세계에요. 의식 범주 안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고린도후서 5장 7절 한번 읽어보세요.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다. 인간은 보는 것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잖아요. 아예 안 보이면 아무 것도 없는데 질문을 못 던지죠. 아무 것도 없으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 무슨 질문을 던집니까. 인간이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보이는 게 있다는 그 범위, 범주가 전부입니다. 범주가 전부에요.
그래서 도마도 뭐라고 합니까? “보면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예수님 다녀갔다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 말 안 듣고 “아니 나는 안 보고는 못 믿겠다. 보면 내가 믿겠다” 이게 인간의 자기한계입니다. 인간이 어떤 말을 하고 질문을 던질 때는 눈에 뭐 뵈는 게 있기 때문에 던지는 거에요. 뭔가 훅 예상 못한 게 뭔가 등장하게 되면 갑자기 물 위를 걸어오게 되면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제자들이 저건 유령인가? 질문을 던졌잖아요. 유령인가?
그럼 평소에 유령이라는 것은 인간이 보는 것 바깥에 보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 미지의 세계를 인간은 이미 뭐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까? 이거는 유령의 세계다. 귀신의 세계고 천사의 세계고 이건 하나님의 세계다 있지요. 자기 딴에 보는 것 너머의 다른 세계가 있다고 아무리 아울러도 인간의 의식에서 나왔던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가짜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예수님이든 전부 다.
본인이 질문을 던져놓고 본인이 해답을 하고 본인이 쥐고 있으면서 나 구원받았다고 우기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는 것은 제자들과 연대를 하지요. 연대를 함으로서 이 제자들을 뭐로 몰아세우느냐 하면은 실패로 몰아세워요. ‘실패’로.
그게 누가복음 9장 24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졌고 질문을 던짐으로서 질문 받은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예수님과 연대가 이루었고 그 연대를 이루었던 예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이건 실패한 길이야 이건 안돼 이러면 망하는 거야 라고 그들을 강제로 끌고 갑니다.
지금 누가복음 9장에서는 이렇게 되어있는데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9장 22절에 보면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이 말씀을 마태복음에도 나오잖아요.
그럴 때 여기에 누가복음 9장에는 없지만 마태복음 16장에 나올 때는 베드로가 여기에 끼어들지요. 베드로가 자기의 의사를 거기에다가 끼어드는 거에요. 끼어들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뭐라고 합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은 나의 연대 속에 주님의 연대 속에 참여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사탄이 끼어들려고 할 때 그 주님의 연대가 될 수 없는 쪽에서 끼어들게 되면 베드로가 하는 그 사고방식대로 끼어들어요. 우리는 실패하면 안됩니다 주님이여. 이 생각. 내가 망하면 안됩니다 주님. 이 생각. 하면 된다 주님께서는 ‘Boys, be ambitious. 소년들아 소망을 가져라’ 이런 거 있잖아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런 거. 이런 것들이 악마의 생각이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꾸 자기 생각의 범주 안에서 자기 성공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여기에 오늘 본문 누가복음 9장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잃으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말은 뭐냐 이거에요. 말이 길지만 짧게 하면 이겁니다. 너를 없애라는 거에요. 네가 내 십자가를 방해한다.
아까 마태복음 16장 같은 경우는 베드로가 노골적으로 보여줬잖아요.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성공 쪽으로 나가야지 실패로 끝나면 그동안 당신에게 기울인 지난 모든 3년의 공적이 다 날라갑니다 하고 간곡하게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베드로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게 자기가 알던 자기로서는 성의를 다했지만 베드로는 악마의 생각이 뭔지를 베드로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악마의 생각이.
악마의 생각은 항상 성공, 성공, 성공, 성공. 성공에서 성공으로 나가는 것이 악마의 생각이라는 것은 베드로로서는 그게 당연하게 하나님이 도와주는데 당연하게 여겼지 하나님이 도와주는데 실패한다 있을 수 없다는 거에요. 주님은 실패하라가 아니라 실패, 성공을 꿈꾸고 있는 너를 없애버려라 이 말이죠.
너를 없애버려라 이 말은 질문자가 질문에 대한 내용을 성취시키지 너는 네가 만약에 거기 끼어들면 너는 방해자가 될 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연대에서 예수님이 허락한 유일한 실체는 유일한 대상은 실패한 나, 실패해버린 나. 이것이 유일한 대상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실패한 것을 감수할 때 그동안 몰랐던 숨어있던 찬양이 나옵니다. 감사가 나오고요.
실패 안하기 위해서 부르는 찬송은 그거는 찬송이 아닙니다. 그건 장난치는 거에요.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라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순간이 나와요. 그때 사울이 여호와를 찬양했습니까? 그 다메섹에서 내려갈 때 찬양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거기서 기도했습니까? 아니지요.
사울이 그냥 다메섹에 내려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갔을 때에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처음 만난 자리에서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나는 너 찬송소리 들었다 기도소리 들었다 그렇게 나왔습니까? 아니지요. 사울아 사울아 너는 나를 핍박했다는 거에요. 너는 너 자신을 모른다는 거에요. 네가 하는 모든 것이 나의 핍박으로 하늘나라에서는 그게 해석이 된다는 사실을 네가 모르고 있는 거에요. 주님 앞에서.
그래서 20대 30대가 찬양집회에서 종교적 감수성 때문에 그 엄청난 영적 분위기 속에 찬양에 빠질 때는 무엇이 누락되느냐 하면은 자기가 주님을 핍박했다는 생각이 들래야 들 수가 없잖아요. 핍박 없이 하나님과 일체감을 되는 그런 황홀한 감수성, 황홀한 감정을 찬양이라는 이름으로 거기에 뛰어들고 싶은 거에요. 젊은 기분에.
앞에 드럼치고 기타치고 같이 율동 하면서요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이서 해서 앰프 팍 키워가지고 많이 해봤잖아요. 소리가 막 울려가면서. 음악이라는 그 파장에 사적인 개인적인 그러한 심장 고동마저 다 삼킴을 당할 때 그 노래가 나를 완전히 접수할 때 인간은 자기를 상실하는 어떤 놀라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야 너 찬양할 때 나 되게 아팠어. 왜? 네가 나를 밟았거든. “너는 나를 아프게 하는 자로다” 그렇게 하면 분위기 다 깨지요.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의 신앙적 분위기를 주님께서는 초를 쳐버려요.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무슨 짓을 안 해도 너는 나를 핍박하는 존재로서 이 땅에 태어났다.
그 이야기를 사울은 처음 들었습니다. 내가 뭘 하나 안하나 상관없이. 내가 나로 산다는 것이 곧 주께 핍박이 된다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주님이 오셔야 주님께서 먼저 질문을 던져야 주님께서 먼저 대화를 시작해야 내가 주님을 핍박하는 사람인걸 그제서야 왜 아느냐?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소에 기만하고 있기 때문에 속이고 있기 때문이에요. 속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한 거에요. 인간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이유는 주일날 설교에서는 이렇게 설명 했지요 A★ 이걸 주일날 뭐라고 했습니까? 주일설교에서는 기획투사라고 했지요. 지금의 내가 좀 더 상세히 설명하면 인간은 의식을 의식, 느껴지는 것을 뿜어내고 느껴지는 것은 뭐가 있느냐 하면은 목표가 있어요.
지금의 현재가 목표 사이에 결핍을 갖고 있고 결핍을 내가 빨리 메꿈으로서 어서 A★ 그야말로 star가 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몰락되는 게 아니잖아요. star가 되는 거에요. A★ 되는 이 지점에 오게 되면 AA★ 요게 끝나면 AAA★.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목표 없는 의식은 없어요. 반드시 의식한다는 것은 이렇게 되고 싶어라 라는 의식을 그것과 연결하면서 의식이 작동하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이런 목표 없는 의식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경우, 사울의 경우, 모든 인간의 경우는 이런 자기를 상실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를 잃어버리는 게 아닙니다. 어쨌든지 자기를 살려내야 돼요. 어떤 수단을 동원하던지 어떤 방법이든지 자기를 빠트리면 안돼요. 죽을 때까지 어디를 가든지 자기 자리를 데려가야 돼요. 데려가서 A★가 되야 돼요. 목표를. 전력을 다해서. 진정을 다해서.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이 목표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질문 속에 이 목표를 너도 죽고 나도 같이 죽자 로 바꾸어버린 거에요. 너도 죽고 나도 죽자. 그게 뭐냐? 자기 십자가에요. 너는 너한테 십자가 있고 나는 나한테 십자가 있는데 십자가라는 점에서 같이 목표를 죽는 목표를 하자가 아니라 목표 자체를 없도록 하자. 목표 자체를 없도록 하자. 어떤 노림수 자체를 없도록 해버리자.
자,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목표를 없애버리면 질문을 누가했죠? 주님이 하셨지요. 질문을 하신분이 이 땅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났잖아요. 그러면 질문자가 이 땅에 출생했지요. 주님은 그 예수님 자신의 출생을 제자들의 출생과 일치시킬려고 하시는 거에요. 이 말은 새로 시작하자는 거에요. 제자들아 현재 너 말고 새로 시작하자. 나의 출생이 너의 출생이 되도록 하자에요. 그거 아니면 그 노선을 주의 노선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출생을 같이 하는 그 점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6장에 나와 있어요. 뭐냐 하면은 “베드로야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했거든요. 그때 예수님께서 딱 거기에다가 토를 달지요. “이걸 네가 알게 한 것은 네가 아니고 혈육이 아니고 네 노선이 아니고 나를 이 땅에 출생하게 하신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시작점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베드로나 12제자가 어떻게 돼요? 새로 시작되야 되는 겁니다. 그 새로 시작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22절에서 같이 연대되어 있는 그 질문자, 예수님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소멸시킵니다. 내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된다.
지금 너희가 보고 있는 나는 너희들 보기에 너희 의식적으로 나를 기대하고 목표를 갖고 있지만 너희들 보는 나는 버린 바 될 것이다 에요. 죽게 될 것이다 이 말입니다. 더 이상 인간들의 쓸모 있는 대상이 못 되는 거에요. 없어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제자들 입장에서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은 그래야 인간은 인간 자신을 기만하고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솔직하고 자기에게 아무리 순수해도 그 바탕은 그대로 본인이라는 바탕은 본인을 버린 적이 없잖아요. 버릴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거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고생하고 선교하고 고생하고 기도해도 본인이 본인을 버릴 수 없는 거에요.
a에서 b로 달라질 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가 보세요. a에서 b로 변했을 때에 1번. a가 변화했다. 2번. x가 변화했다. 어느 게 정답일까요? a가 변화했다. x가 변화했다. 어느 게 정답입니까? 문제 상당히 어렵지요? 그렇지요? a가 변화한 겁니까? 아니면 그 미지의 x가 a형태에서 b형태로 변한 겁니까? 1번입니까? 2번입니까? 정답은 2번이죠. 2번. 정답은 2번인 거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2번을 모르고 자꾸 1번을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내가 나를 변화했다고 내가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게 반칙 아닙니까.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지요. 나는 새 사람 되었어 라고 내가 말한다. 이게 새 사람입니까? 변화라고 하는 것은요 본인이 관여하지 못해야 돼요. 외부에서 나를 내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함을 외부에서 알려줘야 돼요.
너는 백날 몸부림쳐도 그냥 몸부림치는 것이지 전에는 몸부림쳤는데 지금은 몸부림 안 친다. 본인이 변화된 게 아니고요 다시 원래대로 된 거죠. 변화된 게 아닙니다. 원래대로 되는 것은 변화되었다 말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기가 바뀌어진다고 인식하지 외부에서 자기를 바꾼다는 것은 도저히 인간들 아이디어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예에요. 요한복음 12장에서 이것도 질문 형식으로 하면 쉽거든요. 죽은 마르다 마리아 오빠 이름이 뭐지요? 나사로죠. 죽은 나사로가 나흘 만에 멀쩡하게 살아났습니다. 맞지요? 이거 변화입니까? 변화 아닙니까? 변화된 거 맞지요. 죽었다가 소성했으니까 변화 맞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걸 안 믿는 거에요. 안 믿고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그들이 모여서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은 죽은 나사로를 죽일려고 모의를 했어요. 요한복음 12장에.
죽은 나사로를 죽이겠다고 할 때 이거는 변화입니까 변화 아닙니까? 이거는 내부적이죠. 젊은 ‘나’가 차에 치어서 죽었다. 이건 변화입니까? 변화 아닙니까? 젊었다는 그도 ‘나’고 죽은 것도 ‘나’잖아요. 지금 유대인들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나사로가 알아서 살아난 걸로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죽은 나사로를 죽일려고 하다가 하나님께서는 이 유대인들을 뭘로 유도하느냐 하면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게 한 그 미지의 x라는 분, 그분을 유대인들이 죽이도록 유도하신 겁니다. 물고를 나한테 와야 될 그 율법의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고비를 주님 쪽으로 바꿔버린 거에요. 왜? 나는 율법을 지켜도 변화가 안 되니까요. 될 수가 없는 거에요.
인간은 목표가 있고 그 목표는 그 목표를 구경하기 전까지는 내가 도중에 죽거나 망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내 변화를 내가 목격하고 싶은 거에요. 이건 변화가 아닙니다. 그냥 연기지요. 아픈 척해서. 그런 대목이 나와요 성경에 요한계시록 2장 10절 이런 말씀 있습니다. 제가 그 대목 읽어볼 테니까 여러분들이 어떻게 실천하는지 실천하는 사례를 이야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 말씀요. 자, 죽도록 충성하라. 그걸 여러분들 이 말씀 어떻게 지킵니까? 실눈 뜨고 죽도록 충성하는 내 모습이 죽도록 충성하는지 아닌지를 누가 감시하고 누가 판단해야 돼요? 죽도록 충성하는 내가 판단해야 되잖아요. 그래야 이 말씀을 내가 지켰다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 걸 내가 실눈 뜨면 실눈 뜬 그 상태가 내가 진짜 죽은 척하고 있는 거에요? 죽은 거에요? 이건 죽은 척하고 있는 거죠. 이게 자기 기만 아닙니까. 속임수잖아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자기 속이는 재주밖에 할 수 없잖아요. 속이니까. 막 실눈 뜨고 보는 거에요. 사자가 와서 물을 때 사자가 딱 물렸을 때 죽지는 않았는데 죽어가고 있잖아요.
죽어가고 있는 순간 자꾸 확인할려고 하는 거에요. 죽도록 했는데 어디서 화살 날라와가지고 사자 죽어버리면 나는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잖아. 이건 죽도록 충성한 사람 아닌가 죽을 뻔하다가 죽을 뻔할 정도로 충성한 것이지 죽도록 충성한 건 아니에요. 모든 말씀은 연대를 이루는 주님이 가져가셔야지 내가 있는 게 아닙니다. 질문자가 주님이지 내가 주님한테 질문해서 해답을 얻는 게 아니잖아요.
오늘 본문이 그거잖아요. 오늘 본문이 누가복음 9장에서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먼저 질문을 제자들한테 먼저 했잖아요. 제자들은 그때부터 주님의 질문 받는 자가 되어서 뭐가 돼요? 하나의 연대를 이룹니다. 연대를 이루면 본인의 목표는 날라가버리고 주님의 목표에 그들이 함몰되지요. 같이 휩싸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굳이 내 목표가 있어야 돼요? 말아야 돼요? 내 목표는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제자들 앞에서 내가 버림받는다 내가 죽는다는 이야기를 해버렸거든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같이 연대라고 평소에 생각했는데 그들이 노렸던 그 목표가 아니었잖아요. 아닌 정도가 아니고 반대로 가지요. 이 타이밍에서 주님이 사라져버리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이러는 거에요. 제자들이 당황스러운 겁니다.
당황했다는 말은 제자들이 평소에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여온 거에요. 인간은 A에서 B로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A 본인이 A라는 본인이 B가 될려고 소용없는 짓거리를 해온 거에요. 인간이. 옆에 x라는 미지의 능력으로 A가 B로 달라져야 되는데요. 미지의 x를 생각하지 않고 A라는 내가 예수님의 능력을 컨닝해가지고 저분한테 말 잘 들으면 내가 원하는 목표 B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꼼수를 써왔던 것이 어떻게 저와 여러분만의 이야기겠습니까.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야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울보고 뭐라고 했느냐? 먼저 질문했고 “사울아 너는 나를 핍박했다” 처음 자리 나, 예수님과 구원받을 너의 첫 번째 첫 걸음은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로 나는 너와 연대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야 주님이 십자가 사건이 터지기 때문에.
사울이 얼마나 찬양하고 얼마나 헌금 많이 했습니까. 헌금 많이 하고 찬양 많이 할수록 자기에게는 자기가 주님을 핍박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다는 생각만 있을 거에요. 왜냐 하면은 사울은 인간이었고 인간은 반드시 의식이 있고 A에서 A★라는 자기 목표가 의식 속에 그것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주님이 우리와 연대해서 주님의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목표를 이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더는 목표가 없다는 뜻이에요. 목표가 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거는 어렵지 않죠? 이 이야기는. 그렇잖아요. 목표가 사라졌잖아요. 그럼 그 목표는 내가 원했던 목표든 원하지 않았던 목표든 간에 나의 입장에서는 목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목표가 없는 거에요.
목표가 나라는 A가 있는데 B가 되는 목표가 있었는데 이 B라는 목표가 없어져 버리면 이 거꾸로 보면 뭐도 없어졌다는 말입니까? 나한테 목표가 없다는 말은 이거는 나도 없어졌다는 뜻이에요. 나도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나는 껍데기고 내 안에 누가 사느냐 하면은 예수님, 그리스도가 사는 거에요. 요 관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나니” 다시 말해서 십자가 죽는 것은 내 목표가 아니고 나에게 찾아오신 누구의 목표에요? 주님의 자신의 목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 자신의 목표가 이루어졌습니까? 안 이루어졌습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다 이루어졌잖아요. 그럼 이미 이룬 목표이기 때문에 따로 나의 목표가 있을 리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래서 기도라는 것은 뭐냐? 믿음에서 나온 기도는 뭐냐 하면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그 목표가 껍데기 같은 나를 통해서 마음껏 발휘되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에요. 나는 죽었으니까. 내 이름의 목표는 없어졌으니까. 현재 내 처지에 있는 모든 상황은 내가 모르는 사항이에요. 내가 의도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남편이 백신 맞고 돌아가신 상황은 권사님이 의도했어요? 빨리 죽어라 죽어라 의도한 겁니까? 의도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그 일이 벌어졌잖아요. 그러면 대강 눈치를 채야지요. 이건 내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이다? 일방적인 주의 일이란 걸 눈치를 채야지요. 그렇게 되어가는 절차를 통해서 뭘 발견하느냐 하면은 바로 내가 사라져주는 것이 주님의 목표가 또렷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기능인으로서 역할 다 하는 거에요.
이거는 결국은 범사에 뭐한다? 범사에 일어난 모든 사태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고마워하는 거에요. 어떤 일이 일어나든 주변에 자식이 죽던 아들이 죽던 딸이 죽던 남편이 죽던 내가 죽던 심지어 내가 죽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스데반처럼 주께 감사하는 거에요. 이걸 간단히 말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주의 목표 안에 놓이게 된 그 자체가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축복해서 얻어진 엄청난 목표에 거기에 참여하다 보니까 굳이 따로이 내 목표를 내 기쁨을 얻겠다고 따로 내 목표를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딸이 수능 잘 쳤으면 좋겠다 라는 감정이 확 올라오지요. 그러면 함께 계신 주님이 묻습니다. “누굴 위하여?” 딱 묻지요. “누굴 위하여?”
그러면 주님을 위하여 수능을 잘 쳤습니다 이렇게 정답을 아니까 답이 나오겠지요. 그럼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네 딸을 주님 내가 수능 잘 치게 했다. 이미 목표가 끝나버렸어요. 잘 치게 했다는 거에요. 뭐 잘 치지요. 연필 갖고 잘하면 되지요. 잘 쳤잖아요. 문제 보고 정답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시험은 잘 쳤잖아요. 일찍 내고 나갔는지 그거는 모르겠습니다만.
일어난 모든 사태에 대해서 인간들은 아무리 복음으로 믿음으로 산다 해도 주님께 다 했다 해도 막상 일어난 그 상황이 은근히 내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내 목표, 내 자존심과 가치를 확 올라오게 만드는 사태를 일부러 만들어버려요. 일부러 만들어요. 그래서 반복해서 십자가에 자기를 부인해야 될 십자가를 우리를 통해서 되풀이되게 표상되게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만이 남도록.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성질을 건드려버려요. 우리의 성질을. 잠자는 사자를 건드리는 것처럼 가만히 있는 나를 가만있는데 건드려버려요. 갑자기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다가 1분도 안 되서 갑자기 내 의지가 확 살아나게 만들어요. 여러분한테 다시 한번 간단한 질문을 한번 던질테니까 여러분들 답변을 한번 해보세요.
1. 내가 없는 세계, 2. 교회 없는 세계, 3. 주님 없는 세계, 4. 국가 없는 세계, 5. 가정이 없는 세계. 이중에 어느 것이 제일 답답합니까? 어느 게 제일 답답해요? 미국에 있는 어떤 분은 저한테 전화했는데요 그냥 유투브만 봤는데 교회 없이는 못 살겠다고 오랜만에 교회 가가지고 이렇게 복음 좀 나눌려고 하다가 너무 실망을 해가지고 또 다시 펑펑 울었다고 전화 왔거든요. 답답해서. 세상에 교회가 이렇게 진리가 없을 줄 몰랐다 했는데.
교회라는 것도 복음 듣는 것도 좋지만 같이 모여 이바구하는 그 즐거움이 있던 그것도 너무 멀면 안 되고 가까운데 전철타고 갈수 있는 거리에 복음 전하는 교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국가가 없으면요 나중에 북한 쳐들어오면요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쳐들어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탈레반 쳐들어온 지가 몇 개월 지났는데 70% 굶어죽게 생겼어요. 원조 다 끊기니까.
전에 미국이 통치할 때는 밀가루 얻어먹었지요. 다 끊어졌어요. 70%가 다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지금. 국가가 없다는 것. 나를 지켜줄 국가가 없다는 게 그렇게 비참해요.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고. 소련군이 쳐들어왔는데 대처할 능력이 없습니다. 홍콩도 마찬가지고요. 홍콩 자체적인 군대가 없어요. 중공군이 확 밀고 들어오니까 겁주니까 홍콩이 손들고 전부 다 중국한테 져버렸습니다.
국가가 없다는 것은 이거는 시리아 난민들하고 똑같은 거에요. 난민 한번 돼볼래요? 실상이 어떤지. 국가가 없다는 말은 땅이 없는 거에요. 내가. 다른 나라가 땅을 뺏어가버렸어요. 이거 살려면 무조건 공산당 돼야 되고 무조건 알라신 믿어야 되고. 국가가 없을 때는 그래서 전 세계 모든 독립국가가 전부 국가에 전부 다 독립투사들이 있습니다. 독립투사.
민족과 국가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순교를 자처하는 사람이 모든 국가에 있어요. 아프리카에도 있고 베트남에도 있고 그들은 지금 전부 다 광장에 동상 하나로 남아있어요. 그들이. 세르비아 같은 나라도 마찬가지고요. 세르비아라는 나라는 주기율표에 나오는 모든 원소를 다 갖고 있는 나라에요. 코발트 광산 때문에 데모하고 있어요 지금. 세르비아. 세르비아 나라 발칸 반도 거기에 있어요. 이스라엘하고 다투고 그 유명했던 나라 있습니다.
하나의 국가가 있다는 것은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행복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기본적인 울타리가 되는 거에요. 국가가 없다는 것은. 침략 받아버리면 노예가 되어버리는데 옛날. 옛날에 구약 보면 나오잖아요. 국가가 없을 때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에 가면 뭐합니까. 도로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는데. 그때 나오는 예레미야 애가부터 해가지고 시편에 나오지요.
137편인지. 우리가 바벨론 강가에서 울었다고 하는 거요. 137편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국가가 없으니까 우는 거에요. 불렀던 팝송 있잖아요. 이 노래 아닙니까.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꼴좋다 이 말이에요.
너희 하나님이 너희 버렸잖아. 아이고 너희를 버린 하나님을 믿다니 바보같이. 역시 우리가 믿는 마루둑 신이 더 쎄. 이런 조롱을 들은 거에요. 국가 없으니까. 그러나 국가라는 것, 민족이라는 것, 교회라는 것 다 무엇을 위함입니까?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면 그 가정, 그 가정 안에 누구 가정입니까? 이게 내 가정이잖아요. 남의 가정 아니잖아요. 내 가정이잖아요. 내 가정이라고요.
국가에서 가정이 더 중요하고 가정이 중요한 것은 거기에 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이야기했잖아요. 교회에서 교회 헌금하는 것은 취지가 뭐냐 하면은 몇 푼 주고 보내 보내. 하나님께 내 할 도리 했으니까 제발 신이시여 헌금 받아 챙기시고 내 것은 건드리지 마세요. 현재 내 수입과 내 건강과 내 가정의 행복은 건드리지 마세요.
그러니까 몇 푼 주고 보내고 안주면 또 삐져가지고 내 가정을 친다니까요. 그러니까 이게 주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요 헌금이고 기도고 내 것 지키기 위해서 헌금하는 거에요. 여러분 빼놓고. 여러분은 헌금하는지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그런 거에요. 교회가. 교회보다 뭐가 더 중요하다? 부등호표 동원할까요? 교회, 내 가정 어느 것이 더 중요해요? 물어본 내가 귀싸대기 맞을 거에요. 내 가정 지키기 위해서 교회 다니잖아요. 내 가정 지키기 위해서. 내 남편 천당 보내기 위해서 교회 다니잖아요. 복음 듣고.
자, 문제 다시 나갑니다. 내가 없는 세계, 교회 없는 세계, 주님 없는 세계, 국가 없는 세계, 가정이 없는 세계 어느 것이 가장 괴롭습니까? 이것 수능 나옵니다. 뭐가 가장 괴로운 거에요? 정답은 알고 있지요? 마지막이 정답 아니지요? 중간에 섞어버렸지요.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주님이 정답이죠. 그럼 여기 하나 더 들어갑니다.
누구를 위하여 주님 없는 세계가 견디기 힘듭니까? 누구를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주님 없는 세계가 견디기 힘듭니까? 따라서 이거는 2020년도 수능 과학과정 20번 문제와 동일한 거에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질문을 바꿔야 돼요. 질문이 뭐냐? 무엇이 없는 것이 가장 괴롭습니까? 라고 질문할 것이 아니고 질문을 무엇이 가장 즐겁습니까? 무엇이 가장 즐겁습니까? 정답이 너무 많아요. 1번 2번 4번 5번이 정답이에요.
왜냐? 주님은 삭제되지 않으면 주님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러면 집에 가서 불 질를까요? 아니요. 불 질르지 마시고 너무 성급하고요 좀 기다려봐요. 그대로 살리면서 주님을 주님 되게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살리면서. 다 살리면서. 어떻게 살리느냐? 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3번과 연관시키는 거에요. 주님을 위해서 내가 있던 없던 나는 즐겁고 감사해야 된다. 주님을 위해서 교회 있던 없던 감사해야 되고.
왜? 주님만 있으면 되니까. 주님을 위해서 국가가 있던 없던 감사해야 되고 주님이 있던 없던 가정은 주님을 위해서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주 참 섭섭한 말씀을 하신 거에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천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장차 100배나 받는다고 이야기했어요. 누가복음에서. 마태복음에서는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4번은 5번보다 약하다. 나를 위해서 가정을 버린다 할지라도 나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방금 이 말씀을요 제가 여러분께 드린 질문이 아니고 주님이 여러분에게 먼저 선빵 날리듯이 질문을 던졌다고 보세요. 우리는 반항하는 베드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는 평소에 우리 자신을 따로이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충실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 시간을 끝내면서 이 질문으로 마감하겠습니다. 어떤 질문이냐 하면은 1이냐 2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1. 나를 숨겨야 할까요? 2. 나를 없애야 할까요? 어느 쪽입니까? 주께서 나를 없애지요. 십자가 지라고 했잖아요. 나를 없애는 거에요. 네 목표 내가 대신하겠다고 주께서 오셨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말씀 들으면 없앨 생각 안하고 뭐합니까? 지하로 도망치고 숨을 생각해요. 그것이 그 길이 뭐냐? 바로 제자들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사랑은 사랑이 지나가면 생기는 거에요.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하고 난 뒤에 비로소 베드로는 사랑이 생긴 거에요. 주님이 날 사랑했다는 거에요. 전에는 뭐냐? 내가 주님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주께서는 십자가로 그게 얼마나 기만적이고 어리석고 거짓인 것을 십자가로 와서 보여주니까 제가 사랑한 게 아니고 주께서 저를 사랑했다는 그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길 바라면서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