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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11223a 창세기 9장 13절(말씀의 완성)-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광주강의20211223a 창세기 9장 13절(말씀의 완성)-이 근호 목사

p.214부터 할 차례입니다. p.213 밑에서 6번째 줄에 “말씀 안에 ‘종말’이 담겨 있”다고 되어 있죠, ‘본론 언약과 주체의 발생’ 바로 밑에. “말씀을 거부하면 사람은 죽게 된다. 그 이유는, 말씀 안에 ‘종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말씀이 없다면 인간은 죽는 이유도 몰랐는데 말씀이 딱 들어오니까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인간은 죽어야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럼 개인적으로 봐서는 죽는다니까 상당히 허무하게 느껴지지만 이거 하나 생각하면 그렇게 허무하지 않을 거예요. ‘죽음은 완성이다’ 알기 쉽게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은 성공이다’.

죽음이 성공인 이유는 죽음이 주님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자기 성취이죠. 처음부터 흙인 것이 흙 됐다, 그러니 이게 성공이잖아요. 죽음, 종말 하니까 상당히 부정적 단어처럼 느껴지는데 완성이나 성공은 아주 긍정적이죠.

그래서 죽음은 성공이기 때문에 ‘나의 삶은 아직 아님’이 되는 겁니다. 나의 삶은 미완료, 그리고 다른 말로 하면 결핍된 것, 모자라는 것. 저도 마찬가지이고 안 죽고 이렇게 여러분이 살아서 만나잖아요. 그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이고, 이 모자라는 것.’ 이게 적합해요. 아이고, 모자라는 것들. 죽음은 완성인데 완성이 미달됐으니까 모자라는 겁니다.

그럼 주님의 죽음이 완성인 이유가 뭐냐?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이지만 종말은 전체를 말하거든요. 종말은 끝을 이야기하는데 두 개를 생각해야 돼요. 우리는 종말이라 하면 자꾸 마지막 순간을 이야기하는데 종말은 마지막 순간과 시작한 순간, 이 두 개가 다 합쳐져야 종말이 성공이라는 의미가 발생됩니다. 시작한 순간과 마지막 순간.

그렇게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공식이 나타납니다. 이 공식만 알면 오늘 강의는 의외로 쉽습니다. 처음에는 없거든요, 부재(不在). 부재에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결핍, 결핍에서 과제. 이게 공식이에요, 부재→ 결핍→ 과제.

우리는 처음에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그다음부터 살아가면서 아까 삶은 모자람이죠, 모자람. 아까 한 것 다시 이야기해줄까요? 아이고, 이 모자란 것. 더 심하게 해서, 이 머저리. 살아있는 모든 것은 머저리이고 모자람이에요. 부재, 그다음에 모자람이 결핍이죠. 거기서 결핍은 과제를 받게 되죠. 과제, 숙제를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는 것이 밤 근무해서 어떻게 살아가냐, 이게 아니고 이것은 주님이 주신 과제가 되는 거예요. 누구를 만나든, 어디서 살든. 과제라는 말이 세상적 용어라면 성경적 용어로 이것은 사명이죠, 사명. 존재의 이유, 우리가 있어야 될 이유는 주께서 주신 과제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과제는 바로 결핍을 채워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결핍이 무엇 때문에 생기느냐? 살아있기 때문에 결핍이 생기잖아요, 미완료이니까. 그러니까 미완료는 방향성을 지녀야 되는데 그 방향, 죽음의 완성으로 가는 그 과제로 이끌어가면서 처음에 있던 부재, 이 부재라는 말은 없다는 말입니다, 처음 시작한 순간과 마지막 순간이 종말의 완성을 다 갖추게 되는 거예요.

부재라는 것은 우리가 없었는데 뭐가 있었습니까? 누군가 시작한 순간은 있었죠. 일본말로 요이 땅, 하는 것은 있었어요. 요이 땅, 하면서 우리가 부재에서 없는 데서 있게 된 거예요. 있으면서 어디로 달려가는가? 완성으로 달려가는 거예요. 그 완성이 뭐냐 하면 죽음이니까 바로 마지막 순간. 이것을 전세계 규모적으로 이야기하면 종말이죠. 그래서 말씀 안에 종말이 들어있는 거예요, 말씀 안에 종말이.

자, 이렇게 설명 들으니까 사적인 고민과 걱정 같은 것은 쏙 빠지죠? 왜 사적인 고민이 있느냐 하면 현재 살아있는 것을 미완료로 보지 않고, 살아있다는 자체가 그 시작점을 부재, 없음으로 해야 되는데 계속 있다 보니까 내가 계속 있어야 이게 완성인 줄 알고...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게 완성인데 그게 아니고 내가 계속 있어야 이게 뭐 일이 잘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시작한 순간을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따먹지 마라’ 했잖아요, 따먹지 마라. 그런데 악마는 시작한 순간을 창세기 2장으로 보지 않고 창세기 3장으로 보는 겁니다. ‘너, 선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었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따먹었으니까 우리는 부재가 아니고 악마는 우리를 존재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주님은 “선악과 따먹으면 너 죽어. 선악과 따먹지 마란 말이야.”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런데 악마는 “따먹었으니까 이제는 괜찮게 되어라.”라고 우리에게 윽박지르는 겁니다. 이 차이에서 알 수 없는 수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부끄럽습니까? 부끄러운 이유가 뭐죠? 부끄러운 이유는 타인의 시선 때문에 부끄러워요. 남들이 날 어떻게 볼까, 그것 때문에 부끄러운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타인의 시선을 안 보기 위해서 자기는 숨어버리죠. 낙원의 수풀 속에 숨죠.

숨는데 내가 생각하지 않은 타인으로 등장한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이 영원히 따라오는 타인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면서 우리는 여기서 수치를 느끼는 겁니다.

자,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안다 치고 이제부터 제가 이 수치의 원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치의 원인에 대해서 왜 말씀드리느냐 하면 이게 바로 종말의 현상이기 때문이에요. 인간이 부끄럽다는 것은 종말의 현상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올 때 우리는 수치를 느낀다. 따라서 이것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처음부터 하나님이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는 못하지만 수치스럽다는 그것을 통해서 느낌이 여기서 발산되는 거예요. 양심상 뭘 동원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어요. 이 세상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다.

이것에 대해 제가 어려운 용어를 쓰는 것을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목으로 이걸 하고 싶은데요. ‘소외’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소외란 본래 나인 것이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 된 것’ 이걸 소외라고 합니다. 본래 내 것이라고 철석같이 알았는데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 될 때 이걸 소외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볼게요. 소외, 이것이 비극입니까? 이것이 불쾌합니까? 마르크스라는 공산당이 이 이야기를 해서 굉장히 유명한 말이 되었어요, 소외.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성과에서 배제 당했다. 그것을 소외라 하는 거예요.

일은 자기가 해놓고 남들이 자기 노동한 대가를 가져갔으니까 강탈해갔으니까 날이 가면 갈수록 자본가가 자본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생산을 하는 모든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끼어드는 노동자들은 그 생산에서 나오는 돈의 가치에서 일부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못 가져가고 내 건데 타인에게 빼앗겨버린 거예요. 그 빼앗긴 것이 축적된 자를 자본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본가가 자본을 가지고 생산 활동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분의 자본이 발생된다는 희망으로 그들은 경제활동에 뛰어든다. 그래서 그렇게 축적된 자본으로 인하여 자본가들은 더욱더 자본가로서 많은 양의 자본을 증강시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잡고 그들이 그렇게 하면 할수록 반대로 점점 더 노동자들의 생활은 핍절해진다. 점점 더 가진 것이 없어진다. 이게 유럽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뒤집어놓은 마르크스의 주장이고 그다음에 레닌, 엥겔스, 스탈린 이런 사람들이 이 논리를 이야기해서 지금의 김일성까지 온 이론입니다, 이 이론이.

그런데 이 사람들이 소외라 할 때 무엇과 관련되어 있어요? 자기의 노동력에서 만들어지는 생산을 시장에 내다팔면 뭐가 생기죠? 돈. 이 돈에서 노동자가 소외된다, 달랑 이것만 나가는 거예요. 마르크스가 이런 주장을 하면서 인간의 인간됨은 기본적으로 의식주가 보장되어야 되고 의식주가 보장되려면 돈이 기본이니까 인간의 의식주가 보장되는 돈에서 소외되면 이것이 인간세계의 소외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주장을 했던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여기에 매료되기 시작한 거예요. 인간은 아무리 점잖은 인격을 가져도 자기 것 빼앗기면 가만있지 않잖아요. 내 것 누가 가져갔어? 고생은 직사게 내가 했는데 고생도 안한 너희들이 왜 가져가? 봉기하자. 궐기해서 일어나자. 계급투쟁을 해야 된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이론 가지고는 안 되고 계급투쟁을 해서 뒤엎어버려야 된다, 그런 식으로 동조를 했죠. 물론 그렇게 했던 마르크스는 영국사회에서 완전히 찍혀버렸지만.

그런데 사람들이 ‘본래 내 것, 나인 것’이라 하는데 성경적 언약으로 보면 본래 자기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본래 ‘나’가 없어요. 나라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부재, 아무것도 없음에서부터 몸이 나왔기 때문에 나라는 것도 나가 없음부터 합류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내가 없다는 것은 몸이 없다는 뜻을 말하는 게 아니고 나라고 지칭할 수 있는 어떠한 환경도 처음에 인간은 부여받은 적이 없어요. 하나님 앞에서 아담과 하와가 ‘너’라고 지칭할 수가 없어요. 에덴동산에 있던 모든 것은 시작한 순간 이 안에 완성이 들어있기 때문이에요.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럼 끝났어요. 첫째 날 만들고 둘째 날을 만들고 셋째 날을 만들고, 어떻습니까?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여섯 번째 날 만들어진 인간이 아니요! 하고 손들고 나설 수가 없어요. 만드신 분이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면 좋은 거지, 거기에 대해서 아니요, 하고 나설 수가 없는 겁니다. 아니오,라고 나선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든 창조세계 따로 있고 나를 위한 창조세계를 내가 계획할 때나 아니오,가 성립돼요.

아까 한 것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죽음은 완성이라 했죠. 완성, 완료 또는 성공. 그러면 죽음이 완성이 되려면 인간은 하나의 퍼즐조각에 지나지 않아요. 죽음은 완성이기 때문에. 이 죽음이 완성이라는 성경적 근거가 어디 있느냐?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십자가 아세요? 십자가가 하나님의 죽음이에요, 하나님의 죽음. 이게 죽음이라고요. 죽음인데 죽으면서 주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하고 나 사이에 모든 계약은 이제 죽음으로써 완료가 된 겁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비극입니까? 굉장히 불쾌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처음부터 원래 내가 아닌 다른 나를 상상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마르크스가 생각도 못한 소외가 있어요, 언어적 소외. 언어적 소외라는 겁니다. 물질적 소외 이전에 언어. 인간의 한계는 자기가 말한 그 세계가 인간의 자기 세계의 한계에요. 인간이 말한다는 것.

그럼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아담과 하와가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그럼 그 말씀이 말씀되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악과 따먹은 우리 인간들은 필히 죽어야 되죠. 이게 슬픈 소식입니까, 기쁜 소식입니까? 내가 없는 상태에서는 따로이 나의 성공을 노리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제가 하는 말은.

부재, 내가 없는 상태에서 몸은 있지만 이게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잖아요. 몸은 있지만 나는 아니란 말이죠. “아담아” 부를 때는 아담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의 주인이 있을 것 아닙니까? 책에 ‘오OO’ 있으면 이름이 있는 한 그 책 주인은 오OO가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아담을 불러준다는 것은 아담 이름 안에 하나님의 자기 이름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담이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 곁을 떠나면 안돼요. 떠나면 자기만 손해죠. 자기 손해라는 말도 안 되지만 하여튼 떠나버리면 주께서 떠날 것을 미리 아시고 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것은 네가 떠나봤자 죽음이 너를 낚아챌 거야, 라고 주께서 이미 큰 그물로 인간을 덮어놓은 거예요.

죽음이 없이는 창조가 완성되지 않는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생각해놓은 겁니다. 예수님이 죽지 아니하면 창조세계는 완성되지 않는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생각이에요. 우리하고 사전에 상의하거나 의논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으니까 여러분이 죽는 것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비극적으로 생각하시면 아니되옵니다. 아니되요.

인간은 언어적 소외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고 그걸 언어로 표현하는 그 안에 스스로 갇혀있는 꼴이에요. 갇혀있습니다. 언어적 소외를 누가 보여주느냐 하면 이방민족, 이방인들이 이 소외를 보여주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출발이 뭡니까? 이스라엘은 부재하죠. 이스라엘 나라가 없었어요. 없고 이스라엘보다 먼저 계신 분이 언어죠.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언어, 말씀이라는 언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언약이 계속 성공적으로 나가니까 그 성공적인 증상 중 하나로 툭, 하고 이스라엘 나라가 생겨버린 거예요.

그 이스라엘 안에는 하나님의 언어, 하나님의 말씀이 풍부한 거예요. 말씀이 말씀대로 되게 되면 이스라엘은 늘 완성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말씀을 위반하게 되면 우상을 섬기게 되면 언약이 빠져버리면 말씀이 빠져버리면 그 안에 주의 말씀이 없어버리면 소외된 자기 언어의 세계가 여기에 채워지겠죠. 이것은 이방민족 나라하고 차이가 없잖아요.

이스라엘이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요. 말씀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들춰 보이느냐 그 기능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 기능에 대해서 제가 아까 공식했죠. 부재에서 어디로 갑니까? 결핍, 그다음에 과제.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떠맡은 기능이고 역할이에요. 부재→ 결핍→ 과제.

이게 오늘날 성도가 떠맡은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 역할을 떠맡았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완성. 이스라엘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 자체는 완성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그건 인간나라가 아니고요, 하나님 나라에요.

미리 말씀드릴까요? 소속이 밝혀지는 때가 종말이에요. 소속이 다 드러날 때가 종말입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이건 빨간 걸로. ‘종말이란 소속이 다 드러나는 시점’ 이게 종말이에요. 너 어느 소속이야? 소속이 최종 밝혀지는 그때가 종말의 때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소속이 어디입니까? 예수님의 선지자이니까 예수님 소속이죠.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천국에 소속된 자와 지옥에 소속된 자가 소속됨을 결정짓는 기준과 표준이 드디어 등장했다는 겁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이 다른 데 속했다는 것을 확연하게 다 확정 짓는 그 작업을 하신 거예요. 주님은 종말을 내다보면서 말씀 따라 오셨기 때문에 구분 짓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종말을 구분 짓죠.

그런데 여러분 제가 문제 하나 낼게요. 답변해보세요, 둘 중에 어느 것인지. 인간이 하는 일은 1번, 해결책을 원한다. 2번, 선택지를 가진다. 1번과 2번 중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1번이겠어요, 2번이겠어요?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할 때 그걸 해결 났다고 봅니까, 새로운 선택지가 발견됐다고 보는 겁니까? 새로운 선택지에요.

나는 저 여자 만나고 다른 여자랑 사귀어서 결혼할거야, 하다가 그 여자 떠나고 나면 한때 나의 선택지였어, 하잖아요. 선택한 사람 중에 하나야, 이렇게 된다고요. 아들이 둘이다. 딸을 보고 싶다. 드디어 딸 낳았다. 일단 자기는 딸을 원해서 딸 낳는 해결점을 원했죠. 그런데 딸 놓고 난 뒤에는 그걸로 성이 안차. 새로운 하나의 선택이었지. 여기서 또 아들 둘인데 딸 하나면 좀 뭐하니까 딸 하나 더 낳아? 그때 가면 또 마음이 흔들리면서, 안 흔들린 적이 사실은 없었어요, 새삼스럽게 흔들리면서 내가 옛날에 결심했던 것은 하나의 선택이었어. 새로운 선택지를 가졌다는 말은 여기서 뭔가 또 노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있음에서 결핍을 느끼고 결핍을 메꾸기 위해서 자기한테 과제를 주는 거예요. 있음→ 결핍→ 과제. 아까 공식과 뭐가 다릅니까? 처음에 부재, 없음인데 악마가 인간에게 없음을 잘라내 버렸거든요. 이제 네 인생 네가 알아서 해야지, 뭐. 이렇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출발점이 있음이에요, 출발점이.

그러니까 항상 이것(있음→결핍→과제)은 미완성이에요. 끝까지 미완성입니다. 만족함이 없어요. 만족함이 없을 때 인간은 타인이 오면 수치를 느끼는 겁니다. 혹시 저 사람이 내가 꼬깃꼬깃 감추어놓은 약점을 캐낼 수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불안감 같은 것. 거기다가 완전하다고 여겼던 것이 미흡함으로 드러났을 때 수치감을 느끼는 거예요.

코미디에 그런 게 있어요. 이라는 코미디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오거든요. 안영미라는 개그우먼이 남편 없을 때 자꾸 바람을 피워서 자기 집에다가 남자를 데려오는 거예요. 남자를 데려왔는데 남편이 출장 갔다 해놓고는 갑자기 사정이 바뀌어가지고 집에 왔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옷장에다가 자기랑 바람 피우는 남자를 딱 집어넣었거든요. 그러니까 들어온 남편이 수상한 눈치로 두리번거리다가 옷장을 확 열고 ‘거봐,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잖아. 옷을 나란히 정렬하라는데 나란히 정렬 안 했잖아.’ 그 밑에 보니까 남자가 속옷 바람으로 웅크리고 있는데 그건 눈에 보이지도 않아. ‘거봐. 내가 옷 정리 제대로 못한다 했지?’ 밑에 있는 남자는 눈에 뵈지도 않아. 이게 코미디입니다. 왜? 자기 언어세계의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거봐. 아들 둘인데 내가 딸 낳았잖아, 거봐. 그러니까 이것은 감사할 일이지.’ 여기서 뭐가 잘못된 거예요? 뭐가 완성이라 했습니까? 내가 죽는 게 완성이에요. 내가 죽는 게 완성인데 그걸 모르고 살아서 결핍을 메꾸면 자기가 완성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제 슬슬 교회 문제 등장하겠죠. 그래서 이 있는 인간들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성경을 본다든지 교회 나와서 설교를 듣는다던지 이렇게 하죠. 이렇게 해서 자기 있음에 대한 완성, 없어지는 게 완성이 아니고 나는 있는데 있는 그 채로 완성이 되기를 노리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언어를 통한 소외를 메꾸기 위해서 성경말씀대로 지키고 실천하고 온갖 걸 다하는데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as if’ 마치 그런 것처럼. 이걸 준(準)-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 마음에 딱 맞게 자기가 자기를 구원받은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내가 성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언어적 소외 속에 있는 내가 성도로서 모자람이 없기 위해서 바리새인들처럼 또는 성경에 나오는 많은 신앙인들이 하는 것처럼 성경대로 다 따라하는 거예요. 스데반이 순교했다고 하면 지도 순교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마지막 주님 만날 때 흰 옷 입는다고 흰 옷 따로 만들어놓고 하여튼 그럴 때 성경 그대로 사도 바울이면 사도 바울 그대로 했을 때 그걸 ‘as if, 마치 ~인 것처럼’ 이라고 하는 거예요.

진실에 도달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되죠. 안 됩니다. 주님 자신만이 이미 완성했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대체할 인물은 주께서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얼추 주님 따라오는 제2의 제3의 주님이 필요치 않아요, 주님한테는. 예수님만이 모든 말씀을 이루라고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이미 사전에 끝난 이야기입니다.

그걸 인정하는 게 성도에요.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을, 얼굴 찌푸리고 비극적으로 하는 게 아니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심지어 내가 죽는 것조차도 주님의 완성의 퍼즐로 참여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겁니다. 밤에 잔업 하다가 쓰러져 죽는 것도 영광스럽게 여기는 거예요. 그것도 사흘 동안 계속 하다가 쓰러져 코피 흘리고 죽어버리는 것도 웬 은혜냐 하면서 그걸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으면 내가 순교한다는 것은 순교가 아니에요. 마치 순교인 것처럼, 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걸 발로 차버리죠. 어디서 이 가짜가... 치워버려요.

그래서 주의 뜻은 결국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종교 선배들처럼 그렇게 자기가 하나님이 거룩하라 하는대로 거룩하고 뭐 성도 되고 하는 모든 노력을 책망하는 일로 성령이 오는 거예요. 책망할 때 뭐라고 하겠어요? “똑바로 안 해? 더 열심히 안 해?” 이렇게 책망하는 게 아니고 “이거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다 했는데 왜 그래? 너 왜 그래? 다 끝났어!”

그게 사도 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너 지금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이런 식으로 책망하는 거예요. 네가 생각하는 의, 네가 생각하는 심판, 네가 생각하는 죄, 그거 다 구라야, 구라! 김구라야, 그거 전부다 거짓말이야. 네가 스스로 스타 되려고 하는 거야. 네가 승리하려고 하는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께서는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죽는다 하는 것을 순교로 봐주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의 죽음은 탈(脫)-소유에요. 나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 탈-소유. 내 소유권에서 벗어나버리는 거예요.

그럼 벗어나려면 내가 죽었다 치고 나를 다시 만들면 이 다시 만들어진 나의 또 다른 영역은 내 소유가 되거든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나는 죽었다고 바라보는 또 다른 자를 만드는 게 아니고 이미 만들어진 주님의 십자가 자리에서 우리가 탈-소유를 바라보게 하도록 성령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전부를 옮겨놓으신 겁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주님 자리에서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일의 반복, 그걸 되풀이하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아, 내가 쓰레기구나. 내가 쓰레기구나. 아까 제가 뭐 안 좋은 소리했는데...... 이 머저리야. 이 바보야. 왜 바보짓을 해? 왜 자꾸 마귀한테 속아서 바보짓을 하냐 이 말이죠. 다 끝난 일인데.

그래서 성령께서 일을 하셔야 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끝난 상태에서 우리 몸에 남아있는 본성 같은 거 있잖아요. 그 본성이 얼마나 헛짓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 우리 육신이 발휘하고 있는 아까 언어적 소외, 물질적 소외, 그리고 또 하나의 소외를 말씀드리겠어요, 내 몸의 소외. 아, 오늘 어렵다. 어렵기 때문에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마르크스가 말한 물질, 먹고 마시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돈으로부터의 소외. 이것은 정치적 소외죠, 경제적 소외. 두 번째는 언어적 소외. 세 번째는 제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거예요. 나의 몸으로부터 소외. 소외가 너무 어렵거든 그냥 배제라 하세요, 배제.

몸에 통증이 오거나 암, 아픈 것, 이게 바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내 몸뚱아리에요. 내 몸이 나로부터의 소외에요. 왜 내 몸은 늘 아름답고 건강하지 않은가. 왜 튼튼하지 않은가. 나는 마치 버림받은 몸 같아, 그런 느낌 있잖아요. 이걸 어려운 말로, 참 어려운 말인데 ‘탈구형 몸’이라 해요.

뭔가 뼈가 하나 툭 튀어나온 것처럼 내 몸이 원래 내가 상상한 멋있는 몸에서 삐져나온 거예요. 제자리에 정렬되지 않고 정립되지 않고 삐져나왔어요. 삐져나오면 누가 누구를 미워하겠어요? 내가 나의 현 몸에 대해서 미워할 거야! 하고 미워해버리는 거예요. 나는 왜 백내장인가. 왜 나는 항상 주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 몸이 안 따라주고 그러냐 이 말이죠.

그래서 탈구형 몸, 내 몸에서 소외된 몸의 특징은 항상 피로감을 느껴요. 항상 피로해요. 직장 다니다가 육십 좀 넘어가지고 이제는 퇴직하고 말씀만 따라다니고 말씀 모임만 참석하겠다 하는데 그때부터는 이제 몸이 안 따라주네, 피로감을 느껴가지고. 말씀 듣겠다고 왔는데 오느라 모든 정력 다 낭비해가지고 말씀 들을 때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모습이 내가 너무 싫어. 너무 싫어요.

도대체 있음 자체가 말썽쟁이에요. 내 몸이 여기 있다고 느껴지는 게 말썽꾸러기에요, 말썽꾸러기.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거울이 있다는 것은 거울에 몸이 있는 게 아니고요. 몸은 하나밖에 없는데 거울에 반사된 거잖아요. 그냥 반사된 거예요. 반사된 것이니까 결국은 싫든 좋든 인간은 몸뚱아리 하나 갖고 계속 질질 끌고 가야 되는 거예요. 몸 따로 자아 따로 있는데 자아가 몸을 리어카에 실어서 끌고 가듯이 계속 끌고 가야 되는 거예요, 평생동안 우리 육신의 몸은.

물론 복음이 왔으니까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즐겁죠. 내가 저런 고생을 해도 마땅해. 난 나밖에 모르니까 저런 고생 해야지. 남 보듯이 볼 수 있는 그 여유로움, 그 넉넉함, 그것이 이제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는 그런 모습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구원 받고 난 뒤에 몸이 튼튼하고 30대로 돌아가면 되는데 왜 이렇게 피곤한 몸을 주시는가. 이게 종말의 현상이거든요. 종말의 현상이 아니고 우리 몸이 예수 믿고 튼튼해져버리면 주님의 완성은 신경도 안 쓰고 그런 데에 관심도 없고 나 하나 잘 챙겼으면 됐지 뭐. 자기에게 찬미하게 돼요.

그러면 소속이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소속이. 주님의 완성에 소속되어야 되는데 우리는 따로 옛날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악마한테 사주 받은 그 짓을 또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나 따로 나만이 따로 만들어진 나의 세계에서 내게 소속이 되어버린다고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자기 백성이 그렇게 되는 것을 가만히 방치하지 않죠. 소속 분명히 하라는 거예요, 소속을. 너는 너한테 소속이 안 되어 있다는 겁니다. 소속이 나한테 안 되어버리면 소외라는 것이 아예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습니다.

소외란 원래 내 것이었는데 남이 가져가니까 내 돈을 남이 가져가고 나의 몸이 피곤하니까 내 원대로 뜻대로 안 되니까 짜증나고 소외감을 느끼잖아요. 그런데 원래부터 내 것이 없다면 소외감을 못 느낄뿐더러 감사해야죠.

주님이 자기완성을 축하파티 하겠다고 쓰레기 같은 우리를 가지고 거봐, 쓰레기잖아. 사물이잖아. 물체잖아. 물체에서 감사 나오잖아, 봐라. 주님 아니면 누가 그런 솜씨를 하겠어요? 마귀가 하겠어요? 본인이 쓰레기인 걸 알면 알수록 더욱더 감사가 나오니까 마귀는 많이 약이 오르죠, 많이. 약이 많이 오르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 문장으로 옮겨보겠습니다. 나의 소외에서 빠져나온 증거는, 빠져나온 것을 증거하는 방법은? 상당히 궁금하잖아요. 이것은 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 거예요. ‘나의 소외에서 빠져나온 증거는 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 것’ 이겁니다. 나의 죽음은 주의 일에 완성을 위한 하나의 조각이고 일부입니다. 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하고는 좀 다르죠?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해가지고 아이스크림 선전하는 그거 아니고, 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 거예요. 흙이 흙 되는 것이 이게 나의 일이 아닌 거예요. 그럼 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도 있을 수 없고 나의 일 자체가 날아가 버리면서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나의 소외에서 빠져나온 증거입니다.

그런데 빠져나올 때 빠져나온 이 일이 우리는 나의 일이고 싶은 욕망이 육신이 있기 때문에 또 있어요. 빠져나온 이것이 나이고 싶어.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 쓰레기 같은 몸을 에라이, 죽을 때까지 돌려버리는 거예요. 끊임없이 돌려버리는 거예요. 빠져나온 내 모습을 가지고 내가 기뻐한다면 이것은 나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지, 주님 일의 완성차원에서 기뻐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주께서 일부러 만든 어떤 상황, situation속에 놓이게 됩니다. 갑자기 뭐 잘 가는데 산에 올라가다가 엎어져가지고 광대뼈가 푹 들어간다든지, 난데없이 다리에 힘이 빠져가지고, 이런 식으로. 그냥 가만히 아무 것도 안 하는데 뭐 여론조사에 자기가 지지하는 대통령 대선 후보의 지지율이 확 폭락한다든지,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갑자기 성질나게 만드는 일들을...... 성질이 안 나야 되는데, 내 몸은 나는 이렇게 주의 일이고 싶지만 그건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하고 우리 주변에 있는 경제적 상황, 아까 경제적 상황을 뭐라고 했습니까? 경제적 소외죠, 소외 상황 이런 것들이, 그리고 내 일은 아니지만 내 자식, 자녀 일이라든지 내 남편, 아내의 일이 나를 힘들게 하죠, 가만 있어도.

그럼 아까 했던 잠시 잠깐의 감사와 고마움은 일순간에, 어디 갔지? 짜증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그냥 찰밥해서 먹으면 되는데. 찰밥해서 먹으면 되거든요. ‘주께서 은혜 주셔서 찰밥 먹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되는데 괜히 뭐 엉뚱한 손님이 들어와서 ‘이것도 찰밥인가?’ 이러면 갑자기 성질 확 나거든요.

그걸 오늘 배운대로 하면 타인의 등장은 우리에게 수치를 유발하는 거예요, 수치를. ‘아이고 뭐 집사님 찰밥 맛있긴 맛있는데 내가 아는 다른 집사님 거보다 맛없다.’ 곱게 먹으면 될 걸 그저 그걸 긁어가지고...... 긁는데 그걸 누가 긁게 했습니까? 누굽니까? 주님이 그렇게 했으면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면서 ‘내 일은 내 일이 아니다’ 버릇처럼 이래야 하는데 그러고 가만 있으면 되는데 ‘너 이리 와. 오늘 함 보자.’ 한바탕 또 싸우고 이렇게 되면 도대체가 지금 나는 나에게 소외 안 되려고 내가 생각한 표준적 나의 모습에서 육신이 안 벗어나려고 은연중에 잠복적인 그러한 원칙이 계속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는 방법은 그 작용조차도 의도적으로 누가 일으켰습니까? 주께서 마침 옆집 어떤 아줌마가 오게 하셔가지고 우리끼리 먹으려는 찰밥을 시비 걸게 주께서 아주 발걸음도 사뿐사뿐 해서 딩동 눌러가지고 ‘빈 그릇 가져왔습니다’ 하다가 아다리가 맞아서 수치와 모욕감, 가만 있으면 안 되죠, 터트려야 되죠, 반발 이거 다 누가 하셨습니까? 주께서 하셨으니까 오로지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정답대로 주께만 감사할 뿐이죠. 감사하는데 돌아서면 그게 또 하나의 선택지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어서 이런 순환구조에서 벗어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다 이 말이죠. 본인의 소원이에요. 하지만 내가 이렇게 떠나지 않는 것도 너희를 위해서 성령 받은 사람은 이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려주는 그 일을 위해서 사도 바울은 그것도 흔쾌히 감수하겠다는 것이죠.

10분 동안 쉬시면서 어떤 수치와 모욕감을 또 느껴야 될지, 주께서 벌이실지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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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9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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