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요엘 3장 9-13절(무기)211222-이 근호 목사
15강-요엘 3장 9-13절(무기)2112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3장 9-13절입니다.
요엘 3:9-13
“너희는 열국에 이렇게 광포할찌어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무사로 다 가까이 나아와서 올라오게 할찌어다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찌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찌어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찌어다 사면의 열국아 너희는 속히 와서 모일찌어다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로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 열국은 동하여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찌어다 내가 거기 앉아서 사면의 열국을 다 심판하리로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찌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포도는 이스라엘이 살던 약속의 땅의 주산물입니다. 그래서 추수를 한다는 것은 그동안 키웠던 포도를 다 모으는 일입니다. 농사짓는 그 과정 그리고 그 마감, 이스라엘 내부에 생존을 위해서 농사짓는 걸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타임라인, 인류의, 전세계의 타임라인을 이스라엘 내에 함축시켜 놓았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나는지,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마감되는지, 그걸 함축을 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속에 그 내용을 다 꼬깃꼬깃 집어넣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담겨 있던 내용이 이스라엘의 경계선을 넘어서 바깥으로 퍼져버리면 그것은 곧 이스라엘 개인에 관한 운명이 전체 인류의 운명으로 확대되고 모든 것이 그 운명으로 최종 정리가 되는 식으로 하나님이 계획을 하셨습니다.
여기 요엘 우리가 처음 봤듯이 메뚜기가 날뛰고 설치는 그것, 이게 우선적으로서는 이스라엘 국가,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것이 결국 전 세계 인류의 마지막 모습으로 이어지도록 하나님은 그렇게 계획 잡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보면서 우리는 이것이 이스라엘나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전 인류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미리 예언하신 말씀인 것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이 예언했다는 말은 모든 일의 실행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먼저 시작을 하셨다, 라고 보시면 쉽습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하나님이 개시를 하시고 우리 인간은 거기에 말려드는 형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지 아니하면 인간에게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셔야 돼요.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두 민족이 나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고요, 또 하나는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11절에 “사면의 열국아” 열국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9절에도 “너희는 열국에 이렇게 광포할찌어다” 광포(廣布), 널리 전해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과 맞닿아 있는 국가가 있을 것이고 이스라엘과 맞닿아 있는 그 국가와 맞닿아 있는, 이스라엘에서 보다 더 멀리 떨어진 민족이 있을 것이고, 그 멀리 떨어진 민족과 또 맞닿아 있는 그 옆의 나라가 있을 것이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열국, 이 세상 인간이 사는 모든 나라는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예언에 종속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일을 벌이면서 벌어진 그 일이 전 인류에게 다 퍼져나가는 거예요. 타임라인을 통해서, 시간의 경과를 통해서 결국은 다 끝을 보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너희는 낫을 쓰라” 낫을 쓴다는 것은 추수할 때 낫을 쓰지요. 그리고 포도를 땁니다. 포도주 틀이 가득차면 거기서 포두주가 생산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포도 주생산지인 이스라엘 나라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고 포도주 이야기를 하면서 이 포도를 인간의 악으로 전환시키고, 추수하는 것을 전 세계에 대한 멸망으로 간주하십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 뭔가 함축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함축된 것이 드디어 공개될 그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똑같은 사정이 12절에 나옵니다. “열국은 동하여” 동하여 라는 말은 ‘움직여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찌어다” 이런 일을 실시하고 주도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을 하시는 거예요. 여호사밧 골짜기는 이스라엘 나라에 있는 골짜기입니다. 그 여호사밧 골짜기가 유명하게 된 것은 역대하 20장 전체를 보게 되면 거기에 모압과 암몬, 마온 사람, 그리고 세일, 세일이라는 것은 에돔사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남쪽에서부터 에돔, 모압, 암몬, 이렇게 나라가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그 붙어 있는 나라들, 이스라엘과 맞닿아 있는 나라와 이스라엘 사이에 일어나는 그 전쟁이 전형적인 하나님의 시범케이스가 되어서 이제는 온 세계에 대해서 그들 모든 민족이 멸망하는 테스트로 이스라엘에게 먼저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멸망한다. 그 이유가 궁금해? 그 이유가 뭔지 몰라?” 그러면 이스라엘과 접해 있던 모암과 암몬과 그리고 에돔나라가 이스라엘과 전쟁할 때 전쟁의 승패가 특이하게 갈라지거든요. 거기서 도출된 원칙이 온 인류를 멸망시키는 동일한 원칙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러시아하고 싸우든지, 네덜란드하고 싸우든지, 우간다하고 싸우든지, 미국하고 싸우든지, 북한하고 싸우든지, 하나님이 싸울 때는 동일한 원칙으로 싸우시는 거예요. 그게 여호사밧 골짜기에 있었던 그 전쟁에서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전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같은 말로 이 세상은 왜 멸망하고 어떤 방식으로 멸망하는가? 같은 말입니다. 그 전쟁에서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했는가? 역대하 20장 17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이게 원칙이에요.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전쟁하고 싶어서 환장한 나라가 아니에요. 뭐든지 인간은 평화로운 게 최고지 싸우고 투쟁하고 시비 걸고 하는 것은 짜증나요. 층간소음 아주 짜증납니다. 그냥 너 조용하고 나 조용하면 제일 좋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층간소음을 일으켜 버리면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붙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분노를 유발하게 해가지고 유발한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어떤 특정장소로 유인되게 만들어버리고, 그 유인된 장소는 그래서 갇힌 장소가 되고, 그 갇힌 장소에서 몰살하는 방식, 하나님께서 전쟁할 때 마지막 전쟁을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했는데요. 첫째는 분노가 일어난다. 분노가 일어나서 그들로 못 참게 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전쟁을 안 하고 싶어도 일어나게 만들어서 화가 난 상태에서 몰려온다. 몰려왔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잘됐다. 한곳에 다 모여라. 다 모였지, 그지? 한꺼번에 다 죽여줄게.’ 이 방식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유인하는 요인이 뭐고 그 분노를 유발하게 하는 원인이 뭐냐? 역대하에 보면 전쟁방식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씀드리면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전쟁을 벌이면 무기가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앞장세워서 벌이는 무기는 “이스라엘아, 너희들은 어떤 무기도 사용하지 마,”라는 방식으로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어떤 무기도 사용하지 마.
그러니까 얼른 들으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굉장히 기분 좋은 말이에요. 아무 무기도 없이 그냥 전쟁에서 구경하고 관람하듯이 뒤처리만 하면 되니 얼마나 신바람 나는 이야기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은 나에게 아무 무기를 가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 이게 1번. 기분 좋지요. 똑같은 말씀입니다. 너는 너를 지킬 무기를 갖지 마라. 두 번째 와서는 기분이 싸해집니다. 갑자기 웬 불안? 불안과 초조가 일어납니다.
똑같은 말 세 번째 하겠습니다. 세 번째 하면 첫 번째, 두 번째 다 잊어버렸지요. 첫 번째는, 이 전쟁에는 네가 싸울 것이 없다. 두 번째는, 너를 지킬만한 무기를 갖지 마라. 똑같은 말인데 세 번째는, 네가 그동안 너를 지킨 무기를 내가 빼앗아 버리리라.
첫 번째일 때는 기분이 좋았는데 두 번째에서 기분이 싸~해지다가 세 번째로 오면요, 그 이스라엘 쪽에서 도리어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난 하나님께 분노합니다.” 하나님은 말합니다. “그 분노, 바로 그 분노야. 바로 그거야” 네가 적들과 싸우기 전에 나와 너와 싸워야 돼요.
이 세상에서 무기라는 것은요, 지킬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무기를 만들어요. 뭘 지키고 싶은가?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 외에는 지킬 필요가 없어요. 자기, 나,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무기들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이걸 끌어 모으는 겁니다. 컴퓨터에서 전쟁 게임할 때 아바타에다 무기 돈 주고 사잖아요. 그거 왜 삽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서 게임 주인공이 나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서 무기를 사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소속이 내 소속이야. 그렇다면 너를 지킬 무기를 갖지 마” 이걸 다른 말로 하면요. “너는 너를 지킬 자격이 일체 없어” 그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너는 네가 이익이냐 손실이냐를 계산할, 카운트 할 그런 대상자도 아니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 거룩한 하나님의 전쟁에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무기를 쏙 빼는 그 자체가 무기가 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평소에 자기를 지키려고 했던 인간에게 하나님에 의해서 무기가 빼앗기게 되면 그 사람은 얼마나 허전하겠습니까? 불안하겠습니까? 심지어 불안을 넘어서서 하나님께 대들고 반항할 겁니다. 이게 여호사밧 골짜기에 모든 인류를 유인시켜서 한꺼번에 완전히 작살내는, 멸망시키는 그 작전에 이스라엘이 여기에 참전하게 되는데 역대하 20장에서는 이스라엘이 멋도 모르고 그렇게 되었어요. 이것이 ‘우리 이스라엘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했지’라고만 여겼지 나중에 전 세계 멸망할 때 이 원칙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전에 일어났던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의 작은 원칙중 하나를 이제 마지막 때는 모든 민족을 멸망시키는데 동일하게 다 적용시킵니다. 그 원칙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전쟁을 다시 볼 필요가 있는데요.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고 역대하 20장 17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해놓고 그 다음에 어떻게 했느냐?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찬송을 부르게 만들었어요. 찬송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일이 마무리 될 때 부르는 겁니다.
“아, 주께서 개입하셔서 이렇게 아름답게 모든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렇게 전쟁이 끝났을 때 불러야 되는데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것을 미리 부르게 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 눈으로 목격하고 그 다음에 믿겠다는 것, 이것이 인간들의 마음이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제대로 이스라엘이 되려면, 하나님의 무기가 되려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것을 주님 앞에 다 빼앗겨야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오늘날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우리의 무기는 뭡니까? 굳이 제가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까? 힌트를 드린다면 한글로 한글자입니다. 돈입니다. 돈.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기 때문에 돈이 무기지만요, 옛날에 사적인 육신을 지키는 무기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6장 51, 52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과 제자들 사이의 문제,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의 문제에서 그 원리를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유지시켜 줍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로마 군대가 왔어요.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밤에 예수님을 체포하려 합니다. 요새말로 대제사장소속의 경찰이 와서 예수님을 체포하려 할 때에 함께 있는 자, 누가복음에 보면 그 자가 베드로라고 되어 있어요, 그 베드로가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 그 이름이 말고인데 말고를 쳐서 그의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52절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 요엘 3장에 보니까, “이스라엘아, 주변 나라와 전쟁해라. 너희들 빨리 군사를 일으켜라” 해놓고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10절에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찌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본격적으로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와 전쟁하라는 겁니다.
보습이나 낫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생존,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농기구잖아요. 농기구를 가지고 칼이나 창 전쟁무기를 만들라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지시를 하고 누가 이런 일을 시작을 하느냐 하면, 이건 하나님이 시작한 거예요.
“이스라엘아” “예” “너는 약속의 땅에서 밥 먹고 사는 게 좋으냐?” “좋습니다. 이 땅에서 계속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제는 이 땅에서 너희들이 사는 게 너희들 사명이 아니라 전쟁해야 될 민족이야.”라는 것, 이스라엘 본연의 자세,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전사가 되어야 해. 생존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밥 먹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고 전사가 되어야 해.”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름대로 이스라엘, 싸워야 될 민족이라는 말이지요.
오늘날 우리는요, 이 땅에 싸우려고 살지 않습니다. 그냥 내 몸 하나 건사하고 그냥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평화를 원합니다. 내 조그마한 노동의 대가만 얻으면 그다지 나쁜 죄 안 짓고 내가 하는 노동으로 밥벌이 하면서, ‘사는 게 뭐 있어? 그게 좋지.’
그런데 주님께서는 “누구 맘대로? 인간의 본질은 그게 아니야”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분명히 요엘서에서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라고 해놓고는 예수님께서 베드로한테는 칼을 가지는 자, 검을 가지는 검으로 망한다는 거예요.
전쟁무기의 방식이 신약에 오면서 점점 더 인간들이 자기 신체를 지키는 방식을 넘어서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34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여기서 또 검이 나와요. 그러면 검이라 하는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칼이고 검이다. 누구나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를 지키기 위해서 검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시고자 한 그 일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무기가 새롭게 너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다움을 지키는 그 무기를 가지고 새롭게 너희들에게 제공될 것이다. 그런 뜻이에요.
어쨌든 간에 평화는 없습니다. 여기서 불화를 일으킨다고 되어 있어요. 무슨 뜻이냐? 화평이 아니고 전쟁을 일으키는데 마태복음 10장 35절에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아버지가 그 아들과 싸운다는 말이고요, “딸이 어미와” 집 꼬라지 하고는! 뭐 엉망진창이지요. 그 다음에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그 다음에 결정적으로 36절에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되어 있어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 되어 있지요. 아멘, 은 조금 성급합니다. 뭡니까? 너의 원수는 바로 너라는 거예요. 나를 지키고자 하는 나와 ‘나는 지킬 대상도 아니야. 나는 망해야 돼.’라는 그 나 사이의 전쟁, 그런 나가 될 때만 우리가 하나님의 제대로 된 이스라엘, 하나님전쟁의 무기가 됩니다. “주님이여, 저 같은 것은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번역하게 되면 “저한테는 돈 손해나도 그것도 주의 뜻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절대로 과격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게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도행전7장 57, 58절에 보면 거기 누가 나오느냐? 스데반 집사가 나와요. 스데반집사에게 사람들이 뭘 들고 왔느냐 하면, 돌을 들고 왔습니다. 사도행전 7장 57, 58절에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 쌔” 돌로 쳤다 이 말이에요. 스데반집사에게.
그러면 스데반집사가 갖고 있는 무기는 뭐냐? 놀랍게도 스데반집사의 무기는 뭐냐? 죽음을 통과한 거예요. 죽음을 통과해서 죽음 뒤에 기다리고 있는 예수님을 만난 게 무기에요. 여러분, 죽음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스데반집사의 무기는 뭐냐 하면, 십자가로 주님이 죽었던 그 동일한 죽음 속에 들어가는 게 무기였고요.
자살해서 주님 만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죽게 했던 그 동일한 상황, 십자가상황에 합류함으로 말미암아, 그 죽음에 합류함으로 말미암아 그 뒤에서 어서 오너라, 하고 두 팔 벌려 기다리고 있는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이걸 기쁜 소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죽게 했던 그 죽음이 너를 살게 하는 유일한 입구가 되는 거예요. 천국의 입구. 그 입구에 들어가게 되면 들어가자마자 주님께서 와락! 와락! 오늘 제목을 ‘와락’이라 할까, 와락, 안아주시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고 난 뒤에, 아니 그 전에 이미 봤지요, 주님께서 스데반 집사를 보고 “와, 와! 빨리 와!” 오라고 하는 거예요. 스데반 집사는 방패나 던질 돌이 없어요. 그게 스데반집사의 무기입니다. 그게 여호사밧 전쟁이에요.
여호사밧전쟁을 다시 한 번 봐야 되는데요. 역대하 20장에 보면 전쟁의 진행과정이 이렇습니다. 전쟁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일단 22, 23절에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하나님의 방식은, 암몬과 모압자손이 누굴 치느냐? 같은 편인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그 다음에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육하였더라”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거예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스라엘과 인접했다는 이유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을 벌입니다. 이스라엘과 인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쟁을 의도적으로 일으켰어요. 이스라엘이 전쟁을 일으키고 싶은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알아서 전쟁을 일으킨 겁니다. 그 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하는 방식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이 전쟁에 대해서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 너희들이 무기를 갖지 말라, 가 무기에요 그게. 그러니까 이 말은 달리 말해서 뭐냐 하면, 이스라엘아, 이방민족은 스스로 자기를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왜 그들은 자기를 지킵니까? 자기가 유일하게 모든 인생을 걸면서 유일하게 지키고 싶은 것은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기 때문에.
“나야 나!” 하잖아요. 나야 나. 평생을 다해서 마지막 떨어내고 잘라 내고 잘라 내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포기하고 다 줘버려도 마지막 갖고 싶은 것은 나, 나, 나, 나, 나, 나 하나뿐입니다. 나 하나뿐이에요. 이게 인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걸 정상으로 여깁니다. 이게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고 멸망할 요소와 원인제공이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상상을 못해요. 타고 났으니까요. 이걸 의심하고 이게 문제 있다고 누가 그걸 생각하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기 위해서 하나님이 알아서 먼저 전쟁을 일으키면서 특이한 전쟁방식을 사용해버리는 겁니다. 자기들끼리 죽게 만들어요. 자기들끼리 죽게 만드는 것 그걸 저는 네 자로, 오늘날 현대에 비추어서 네 자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자본주의에요. 자본주의.
돈 없이는 못살아요. 돈 없이는 못살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기를 치고 사기당하고, 또 사기 치고 사기당함으로써 그 사기 수법을 알아서 그 사기 수법 가지고 남에게 또 사기 치고. 사기당해 본 자만이 사기를 칠 수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모조리 돈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10장에 이걸 인용하게 되면요. 딱 들어맞는 이야기에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돈 문제 때문에 싸우고, “딸이 어미와” 돈 문제 때문에 싸우고, “며느리가 시어미와” 돈 문제 때문에 “불화하”고, 돈 문제에 관해서 네 원수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딱 들어맞지요. 그런데 더 뒤에 나가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그다음에 38절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인간들은 자기 지킬 유일한 이유가,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존재의 유일한 이유가 나를 살리기 위함이거든요. 나를 살린다고 교회 오잖아요. 여러분 빼놓고요. 우리라는 개척교회 빼놓고요.
주님께서 “제발 너는 평생을 살면서 손해 봤다, 이익 봤다, 를 생각을 하지 마” 그래서 성도가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다른 좀 투박한 예를 하나 든다면 권총을 하나 가지고 늘 관자놀이에 겨누고 있는 겁니다. 내가 나를 지킬 맘이 있으면 총으로 쏴버려야 돼요. 성령으로 이걸 쏴버려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나의 구원을 방해하기 때문에. 내가 내 구원을 주께서 시작한 구원을 내가 발목을 잡아요. ‘아무리 십자가 복음이 좋지만 그런다고 돈 생기나?’ 이럴 때 ‘죽어버려라. 이 인간아.’
다시 할게요. 주님이 벌인 일은 뭐냐? 우리에게 분노를 유발해서 결국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죽여버려’ 죽이도록 모이는 그 장소가 그게 여호사밧 골짜기에요. 하나님과 정면으로, 1대 1로 마주해서 된통 전쟁을 벌이는 그 장소, 지금 그 장소가 오늘날 매일 우리가 거주하고 일하는 그 직장과 가정이고 교회입니다.
목사가 되어 가지고 교회 언제 부흥되냐, 할 때 얼른 권총을 자기 관자놀이에 대고 자기를 쏴 죽여 버려야 돼요. 왜? 그게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자기가 자기에게 원수가 되는 겁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무기가 두 종류가 있는데요. 살고자 해서 내가 갖고 있는 무기와 나를 죽이는 무기, 주께서 제공했던 그 무기. 나를 죽인다는 말은, 평소에 나는 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살기 위해서 칼이 필요하다, 살기 위해서 많은 친구들이 필요하고 권력이 필요하다, 라는 점에서 형성된 그 자아상, 자아정체성, 나라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을 때 그게 나답다고 형성된 그 나, 그 나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창조의 원리에 어긋나요.
그래서 이제 포도주 이야기를 해 드려야겠어요. 포도주 이야기를 할 때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요엘 3장 13절에 보면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찌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라고 되어 있어요. 결국 여호사밧 골짜기도 한곳에 갇혀 있는 형국이라면 포도주 틀도 그 생산된 포도는 모두 동일하게 포도주 틀 안에, 그 바깥에 못 튀어나오도록 꼼짝 마라, 할 정도로 그 안에 갇혀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게 어떻게 완성되느냐? 요한계시록 17장, 18장, 19장에 보면 마지막 때는 모든 나라가 자본이라는 자본주의에 모두가 다 갇혀 있어요. 모든 인간관계가 돈과 돈으로 유통되는 관계에요. 우리 오늘부터 친구하자,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내 돈 아쉬울 때 좀 빌려줄 수 있는 친구냐, 그런 것을 내다 보지요. “이러려면 우리 헤어져” 무슨 뜻일까요? 더 이상 너한테 빼먹을 돈이 안 나온다는 뜻이에요.
돈은 어디에 필요하냐? 이 땅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돈이에요. 스데반집사를 죽였던 그 유대인들이 돈을 왜 갖고 있습니까? 스데반집사의 말이 옳을 것 같으면 그들 본인 들은 지옥 갑니다. 지옥 가면 나를 지킨 것이 허사가 돼요. 그동안 하나님 믿고 열심히 찬송하고 열심히 예배드렸던, 그 괜찮아 보이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과 다른 방식에 대해서는 돌로 쳐 죽여서 죽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나를 비난하는 저쪽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 보세요. 본인이 자기 지킨다고 날라온 돌보다 더한 다이너마이트 만들어서 도로 던져서 그들에게 복수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잘 있거라 인간들아, 하고 자기는 죽음이라는,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십자가 안이라는 그 죽음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어요.
이것은 마치 애굽군대가 홍해까지 왔는데 홍해 바다를 건너지 못한 상태하고 똑같은 상태에요. 여기서 스톱! 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가로막았으니까. 요단강도 마찬가지예요. 요단강도 이것은 건널 수 없는데 건너가잖아요.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 그게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다움을 지키는 무기입니다. 다른 무기 필요 없어요. ‘내가 나를 지키지 않는 이것이, 평생에 내가 그렇게 얻고자 하는 기쁨과 감사와 찬송이, 바로 모든 것이 내가 나를 안 지키면 되는데, 이게 예수님 가신 그 길인데, 그게 좁은 길이고 찾는 이가 없는 그 길인데 왜 나는 그것을 몰랐을까? 이제라도 알았으니 나는 기쁘다.’ 그게 바로 무기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사용했던 그 무기를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제공해주신 거예요. 누구한테? 스데반집사한테. 그래서 스데반 집사는 그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죽여라. 그것도 주께서 유발시킨 그 분노를 가지고 나를 죽여라.’ 그게 바로 오늘날 하나님의 전사입니다. 우리는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사도바울이에요.
그래서 지금 오늘날 성도는 어떻게 사는가? 세상에 나가서 그들의 분노를 유발하세요.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말과 태도에서 최후로 나는 나를 건져야 되겠다는 그 방식이거든요. 그 방식인데 성도는 나한테 어떤 이익이 된다, 손해가 된다, 그 자체를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왜 생각을 안 하느냐? 우리 인간성이 좋아서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치기 전에 먼저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가 갖고 있는 무기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버리는 겁니다. 이거 얼마나 귀한 돈인데. 기차를 탈 때 65세 이상은 30퍼센트 할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바쁘다 보니까 65세 이상이라는 표시를 안 해서 돈이 8천 원 날라 갔어요.
그 순간 망했다, 아깝다, 나 같은 인간은 이제 죽어야 해, 돈 8천 원 날라 갔으니 살 이유도 없어, 라고 생각해 보면, 누가 그랬다는 말이 아니고 예를 들어서 하는 이야기에요, 그런 생각을 할 때 평소에 예수 믿는다, 십자가니, 주여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하던 이 모든 것은 다 거짓된 것이고 평소 사고방식은 ‘역시 돈이 있어야 이게 살맛이 난다. 나는 내 돈 가지고 나를 지킬 거야’
그것을 뭔가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빼앗아 버릴 때 자기의 본색이 그대로 노출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로 원수였구나. 내가 주의 전쟁에 방해물이었구나.’ 베드로가 칼을 쥐고 의분에 의해서 예수님을 체포하는 자를 말고의 귀를 베었지만 주님은 누굴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를 나무라는 거예요.
네가 예수님의 무기를 나의 무기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지금도 칼 들고 설치는데 지금이라도 하늘나라 군대가 없는 줄 아느냐? 지금도 나를 십자가에서 빼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올 수가 있다.” 그러나 그래 가지고는 천국을 이루는 원칙이 천국에 갈 수 있는 방식이 못돼요.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어려운 이야기니까 그냥 듣기만 하세요. 창세기 2장 14절에 에덴동산에 유브라데 강이 나오잖아요. 유브라데강이 나오는데 요한계시록 9장 14절에 그게 또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할 때 처음 좋았던 그 창조의 원리원칙을 양보하거나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왜 심판하느냐? 너희들이 창조원리를 위반했잖아. 그러면 심판하시는 분은 누구냐? 이 땅에서 아무 무기 없이 약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그분, 요한계시록 19장 15, 1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시편 2편에 나오는 그 예언이지요.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창조의 원리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하여 “너희는 시건방지게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살면서 창조의 그 원리, 에덴동산의 그 원리를 너희들이 위배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창조주가 너희를 사정없이 짓밟아 버리겠다.” 이 계획은 지금껏 취소된 적이 없습니다. 똑같은 인간들끼리, 똑같이 죄짓는 인간끼리 평화롭고, 안심하고, UN에서 회의하고 해도 아무 소용없어요.
데살로니가후서 1장 7, 8절에 보면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하나님을 모른다고, 복음을 모른다고 형벌을 주신다는 겁니다.
복음이 뭐냐? 스데반집사한테 물어보세요. 복음은 하나님이 자기를 지키기 위한 무기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의 정신, 그래서 성도한테 기쁜 소식은 주님이 죽었던 동일한 방식, 다시 말해서 세상의 자기를 지키는 자들로부터 분노가 유발되어서 살해당하신 그 방식, 미움 당하신 그 방식, 그 방식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자는 그 죽음에 들어가자마자 주께서 와락, “내가 영원히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생명의 나라에 있을 것이다. 어서 와! 이곳이 바로 창조의 원리가 그대로 완전히 살아 있는 천국이야”라고 여러분을 반길 것입니다.
자살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여러분을 작동해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세상에 밉상 받고, 심지어 더 중요한 내가 나한테 밉상 받는 방식으로 아무것도 없이, 손해될 필요도 없고 걱정 염려될 필요도 없이 그냥 주께서 매일같이 죽이시는 대로 주의 무기로써 주한테 이끌리면 도착지점이 바로 예수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냥 우리가 살기 위해서 십자가 피 믿으면 된다는 그 발상이 얼마나 마귀적이고 기어이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얕은 속임수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해주시고, 주께서 유발한 모든 것이 더이상 우리를 지킬 무기가 필요치 않음을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