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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의존강의20211216a 베드로후서1장 19절(실패다)-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베드로후서

서울의존강의20211216a 베드로후서1장 19절(실패다)-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1장 16절부터 하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그렇게 되어 있죠.

16절의 내용을 한 마디로 생각하게 되면 이 이야기는 정리가 됩니다. 어떻게 정리하느냐 하면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내가 꾸민 것이 아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내가 꾸민 것이 아니에요. 공교하게 만든 게 아니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내가 꾸민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이걸 확장시킵니다. 크게 키워나가요. 전(全)우주로 다 키워나갑니다.

그럼 내가 꾸민 것이 아니라고 할 때는 인간은 나름대로 내가 꾸민 것이 있다,를 전제로 하는 거예요. 내가 꼼지락거리는 게 있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쉬지 않고 뭔가 조작을 해내는 겁니다. 그래서 꾸민 것이 아니라 할 때는 나는 가만히 있고 주님께서 다 주신다는 게 아니라 내가 나름대로 꾸미면서 나를 조작하면서 속이면서 내가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나간다’라는 이 원칙에 대해서 내가 스스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나간다. 남이 만들어주는 게 아니고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거야,라는 사실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16절에,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요, 이 이야기를 베드로가 하는 거예요. 인간은 어떤 결과든지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면 내가 그 일에 어떤 영향력을 얼마나 줬는가를 먼저 따지기 마련입니다. 따지는 것은 평소에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내가 예상하는 일에 대해서 꼭 내가 시발점이 되고 내가 거기에 대해 시도를 하게 되어있다는 그런 인간의 본성을 본인이 속일 수가 없어요. 내 일을 내가 벌여야지, 남이 벌여줍니까? 그게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1장 16절, 17절, 큰 영광 중에 우리가 변화산에서 하늘에서 오는 음성을 들었다 하는 이야기, 나중에 샛별이 떠오른다는 이 모든 이야기는 ‘베드로, 나 자신의 변화와 연계해서 주님을 증거한다’는 거예요. 나 자신의 변화와 연계해서, 연결 지어서 주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 조건이 뭐냐. 나 자신의 변화가 필히 여기에 관여한다. 내 자신의 변화가 관여한다는 말은, 내 자신의 변화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주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이 내용 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또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은 한시도 쉬지 않고 내 자신의 변화를 내가 시도한다,를 전제로 하는 겁니다.

내 자신의 변화를 내가 시도하면서 교회에서 흔히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이게 바로 시도하는 거예요. 내 자신을 위해 내 변화를 내가 시도하는 거예요. ‘내가 어떤 체험을 하면 구원받은 자의 체험일까?’ 이걸 시도하는 겁니다. 자신은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이게 기만이고 하나님 앞에 속인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거예요.

왜냐하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꾸민 것이 아니어야 하는 원칙을 내 쪽에서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에서 내가 시도한 일은 하나도 없고 다 내 바깥에서 일어난 일과 결부되어서 나에게 이런 파도가 밀려오고 물결이 밀려온 거예요. 그 사실을 베드로 자신의 변화 속에서 베드로가 발견하고 체험하는 겁니다.

여기 19절에 보면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이렇게 되어 있죠. 샛별 이야기 언급하죠. 언급하는데 여기 18절에 보면,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무슨 소리가? 17절, 하늘에서 구름에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게 마태복음 17장이나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변화산 이야기잖아요.

이 변화산 이야기를 할 때에 그때는 샛별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그때는 샛별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냥 봤죠. 그냥 본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자기 변화된 몸을 그들에게 보여줬잖아요. 몸을 보여줬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못 본 거예요. 보여줬는데 못 본 거예요.

주님 쪽에서 하자가 있는 게 아니고 자기 속에 샛별이 떠오르기 전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샛별이. 샛별은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게 아니고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아울러 포함한 변화가 일어나는 게 샛별이에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봤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베드로하고 일곱 제자가 고기 잡으러 갔잖아요. 그때 예수님 봤을 때 예수님을 처음 봤습니까? 아니죠. 3년 동안 같이 본 사람이잖아요. 왜 전에도 봤고 나중에 십자가 지고도 봤는데 그분이 그분인 걸 그들이 알면서도 왜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합니까? 그것은 본인이 본인을 배신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본인이. 신앙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배신해줘야 돼요.

마태복음 17장, 누가복음 9장을 보게 되면 9장 28절에 여러분 다 아시는 말씀인데 한번 읽어볼게요.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때 왜 예수님을 안 믿었어요? 예수님이 변화된 걸 보고 좋다고 베드로가 함께 뭐라고 하냐 하면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초막 셋을 짓겠다는 얘기는 했지, 왜 그때 예수님은 안 믿었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보기만 봤지, 왜 예수님을 안 믿었냐 이 말이죠.

그것은 베드로가 베드로 본인을 배신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떠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이 자기를 전혀 달라지게 하지 않았어요. 기존에 알던 나를 그대로 유지한 채 자기는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그냥 본 겁니다. 그래서 뭐? 그게 뭔데? 결국 그것이 예수님의 배신으로까지 이어졌잖아요. 변화산 봤는데 배신했잖아요.

예수님이 변화 됐다. 해같이 변했다. 아무리 예수님이 해같이 변해도 예수님이 해처럼 태양처럼 변한 것이 중요합니까, 베드로 본인이 중요해요?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답변해보세요. 어느 쪽이 중요해요? 말하기 난처하십니까? 해같이 광채 난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의 몸 이것이 중요할까요, 베드로의 몸이 중요할까요?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그 당시에? 누가복음 9장, 마태복음 17장에서 어느 쪽이 중요했습니까?

베드로의 몸이 중요하죠. 예수님은 버릴지라도 베드로 본인은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 본인이 상상 이상으로 악독하다는 사실을 베드로가 몰랐던 겁니다. 인간은 본인이 예수님을 밀칠 정도로, 예수님이 어떠한 호사스러운 모습과 유혹할 만한 것으로 온다 할지라도 인간은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멋진 광경을 보더라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부부가 크루즈 여행가서 지중해의 아름다운 광경 있잖아요, 지중해 연안에. 하얀 색깔로 칠한 동화마을처럼 생긴 거기서 빠라바라바라바라~ 포카리스웨트 음료수 들고 하잖아요. 그렇게 아름다운 걸 보면 뭐합니까? 그거 보고 여행 내내 부부싸움 하는데. 아무리 아름다운 걸 보고 캐나다의 화려한 단풍을 보고 멋진 설산을 봐도 호텔 들어가서 둘이 싸우는데. 그거 한다고 인간성이 달라져요? 인간성이 변합니까? 인간성이란 것이 그렇게 연약한 거예요? 쉽게 달라지는 거예요? 사랑은 그렇게 변하지 않아요! 사랑이라는 것은.

그래서 두 번째 찾아왔을 때, 주께서 부활하셔서 베드로에게 찾아왔을 때, 베드로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딱 이거 하나입니다. 모든 것은 너의 문제가 아니고 나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나무라지 않은 거예요. 너 이리 와. 너 오늘 좀 맞고 시작하자. 이러시지 않은 거예요. 내가 네 장모까지 고쳐줬잖아. 너 물 위도 걷게 했잖아. 이리 와. 귓불 잡아당기면서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이렇게 하지 않았어요.

이 모든 문제가 너의 개인에게 속한 문제는 일체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악마가 베드로에게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내 문제는 내 문제라고 철석같이 우상처럼 종교처럼 그렇게 확고해지게 한 거예요. 딱딱해진 거예요, 인간에게는. 마귀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인간은 자기에게서 자기가 떠나갈 생각을 안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우예수가 와도 부처가 오더라도 인간은 절대 자기를 포기할 마음이 일체 없어요. 선악과 따먹은 그 약 효과가 대단합니다. 나 말고 더 중요한 존재는 더는 없는 식으로 모든 사고방식과 의식이 전부다 굳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설득하지 않아요, 우리를. 달래지도 않습니다. “그래, 너는 네 길로 가라. 나는 내 할 일 할 테니까.” 이래서 구원된 거예요. 그 딱딱한 벽돌을 부드러운 스티로폼으로 바꾸지를 않습니다. 우리 몸은 너무나 딱딱하고 짱돌 같아요. 주님의 방법은 뭐냐. “쳐라! 내가 네 짱돌에 얻어맞을게.” 이래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너의 그 딱딱함, 너의 완고함, 너의 마귀적인 것, 내가 그 모든 일을 구원하는 데에 천국 백성 만드는 데에 효과적으로 내가 써먹을 거야, 그거. 네 심성을 내가 써먹을 거야. 그렇게 해서 찾아온 거예요.

그럴 때 베드로는 유구무언,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아이고, 주님 잘못되었습니다. 인간인 이상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한번 봐주소.” 이런 게 성립이 안돼요. 베드로가 이야기할 것은 이거였습니다. “주님은 나를 알아도 나는 주님을 몰랐습니다.” 그 이야기죠.

주님을 보고 주님과 식사하고 주님과 온갖 말 주고받고 고난을 따르겠습니다, 백날 대화 대화, 요새 같으면 문자 보내고 이모티콘 좋아요, 사랑해요, 얼굴 벌겋게 해서 뭐 백날 해도 그것은 베드로가 내가 뭔가 되고자 하는, 꿍치고 싶은 자기 의도로 예수님을 이용한 것이지,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겁니다.

내가 어떤 노래가사를 쓸 테니 이게 어떤 노래인지 알아 맞춰보세요~ 제목 알아 맞춰보세요.
그 사람 나를 알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그대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 합니다

이문세의 ‘사랑이 훅 지나가면’. ‘훅’ 빼고 .

우리가 주님을 알아봐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를 알아본 거예요, 주님이. 쉬는 시간에 이 노래 재원씨가 한번 불러도 괜찮아요, 감미로운 발라드. 이 가사내용이 상당히 어려워요. ‘그 사람 나를 알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이 말은 내 안에 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내 안에. 한때 너를 알았고 한때 내가 너를 좋아했다는 건 다 아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은.

그런데 베드로는 이 이야기를 두 번째 주님이 찾아왔을 때, 부활하고 난 뒤에 찾아왔을 때 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주님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 본인이 본인 들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당신을 3년 동안 따라다녀도 몰랐더랬습니다.’ 라는 이야기.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 아닙니까? 이게 구원이잖아요. ‘내게 일어난 모든 신앙, 내게 일어난 모든 천국, 이것은 내가 알아서 처신한 게 아니고 그냥 나는 주님을 버렸지만 주님이 나를 찾아와서 비로소 알게 된 것들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은 내 문제가 아니었었습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 예수님을 배신한 그 일까지, 주님 자신의 문제인 것을 알았습니다. 대신 다 가져갔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처리할 내 문제는 일체 없습니다.

주님은 말합니다, 베드로에게 요한복음 21장에서 “내가 너를 띠 띠고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갈 것이다.” 그전에 베드로가 이야기했죠. 주님 사랑하는지를 저한테 왜 묻습니까? 저는 주님의 질문에 답할 잽도 못되고 그럴 인간도 못됩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건 주님 쪽에서 알 문제이지,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 이제 저는 압니다, 이제는. 본인을 알게 된 거예요. 주님을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주께서는 나는 나만 알고 주님은 몰랐다는 인간으로 변화시켜서 베드로를 구원하는 겁니다.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환경이, 모든 되어지는 일이 나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게 아니죠. 그 사실을 우리가 나의 변화와 동반해서 알려면 부지런히 내 일은 내가 챙겨야 돼요. 부지런히 열심히. 이건 뭐 부탁할 사항이 아니고 지금 평소에 하시는 일이 그 일이니까. 내 인생 내가 알아서 내가 한다. 부지런히 하세요.

주님 찾아오게 되면 바로 그 이야기하세요. 나는 나밖에 몰랐습니다. 그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에요. 그 이야기할 때 무슨 의미가 강하게 솟구쳐 올라오느냐 하면 샛별이 떠오른다는 말이 비로소 의미 있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샛별이 떠오르는 거예요.

이 샛별의 특징은 나의 어둠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외부적으로 다가오게 되어있어요.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이” 오는 거예요, 어두운데 비취는. 어느 인간이 자기 어둡다고 자기가 만든 등불 가지고 자기를 비췹니까? 그럼 등불 자체가 어둡죠. 왜? 내가 제조했으니까. 내가 만들어냈으니까.

내가 만들어내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나의 어둠을 결코 밝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변명으로 일관되죠.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신앙생활 잘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거예요.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런 변명 하지 말고 나는 나밖에 모른다고 이야기를 하라. 그게 합당한 구원의 신앙고백이에요.

다시 16절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라고 되어있죠. 뭔가 뒤에 ‘아니요’라고 되어있죠. ~이 ‘아니요’입니다. 이 이야기를 베드로가 하죠. ~이 아니요,라고 하면서 앞에 ▭에 ‘공교히 만든 것,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주 예수님의 능력과 강림의 효과다 이 말이거든요. 예수님 오심으로.

아까 불쑥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봤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 했죠. 예수님 몸의 영광된 광채를 봤잖아요. 아, 예수님에게는 이렇게 영광된 모습이 있구나. 그래서 뭐? 우리가 달라졌습니까? 그거 본다고 우리가 달라집니까? 내가 어둠인 것을 깨닫게 됩니까?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보다 내가 더 중요하니까요.

그러면 이 말씀은 “예수님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 자체를 구원받은 사람은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한복음 21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1장 12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어요. 주님이 누구냐고 묻지 않는다는 말은 이제는 본인에게서 내가 주님에게 묻는다는 그 자격이 박탈당하고 탈락되었음을 인정하는 거예요. 뭐든지 사람이 묻는다는 것은 자기 향상과 자기 발전을 도모하기 때문에 묻는 거예요.

“목사님, 이 성경본문이 무슨 뜻입니까?” 묻는다는 것은 그걸 알게 되었을 때 안만큼 내가 진보한다는 뜻이거든요. 더 나아졌다는 뜻이에요. 더 나아지게 되면 더 나아진 나를 버리기가 더 힘들어져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데 국전에 입선했다. 한번 해봤는데 입선했다. 그 다음에 하니까 특선했다. 특선하고 난 뒤에 나 이제 화가 안할래, 이럽니까? 아니죠. 잘했으니까 더 발전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버리기가 포기하기가 힘든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 샛별이라 하는 거예요, 샛별. 샛별은 소유용이 아니고 저쪽에서 나를 비추는 용도에요. 샛별이 뭐로 구성되었나 보자, 이게 아니고 그냥 나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신경 쓰라고 비추는 게 샛별이에요.

요새는 그런 아버지 없지만 옛날엔 아버지가 애가 말 안 들으니까 “저기 회초리 가져와. 걷어. 종아리 걷어. 회초리 가져와.” 할 때 애가 하는 말이 “아버님 질문 있습니다.” “뭔데?” “그 회초리 재질이 어떻게 됐습니까?” 맞기만 하면 되지, 그걸 왜 묻냐 이 말이죠. Just moment. 아버지, 잠깐만 잠깐만. 우선 이 회초리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한번 휘어보겠습니다. 이걸 맞는 쪽에서 왜 검토해요, 맞는 쪽에서.

아니,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걸 왜 공부를 합니까? 공부를 한다는 것은 뭔 뜻이에요? 내 마음에 들 때만 믿겠다는 뜻이잖아요. 그걸 누가 했습니까? 그걸 열두 제자가 한 거예요. 십자가 지기 전까지 그 짓 한 거예요. 그때 베드로도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샛별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어둠을 비취는 등불 기능으로 보지 않았어요.

그냥 예수님에 대해서 주고받는, 예수님에 대해서 모든 걸 알려주면 나는 그걸 받아가지고 예수님 가는 나라에 내가 합격해서 그냥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지, 주님이 나를 비취고 새삼스럽게 나를 탐색하고 검토하고 조사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이것은 열두 제자에게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예수지만 내 검토는 내 선에서 이미 끝냈다 하는 거예요, 내 선에서. 인간이 지금 보통 문제가 아니죠?

아까 요한복음 21장 12절 말씀처럼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다음에 감히 묻지 못하는 이러한 상황을 15절에 그냥 그대로 예수님이 밀어붙여버립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께서 “네가 보기에, 네가 생각하기에 나하고 여기 네 친구들하고 둘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할 때 베드로의 답변은 “주님, 저는 저조차 사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답변이 이렇게 나온 거예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하심을, 주님의 주님 되심을 저항하고 밀쳐내는 그런 속성인 것을 이제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주님을 밀어내는 그 힘밖에는 안 나옵니다. 주님의 그에 대한 답변은 이거에요.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네가 나를 밀어내는 그 힘이, 그 작용이 네 문제가 아니고 바로 예수 내 문제이다.”

이 문제를 점점 더 심도 있게 생각해봅시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심도 있다기보다 아주 알기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편지나 메시지가 왔는데 ‘나는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해놓고 보내는 사람이 ‘-송혜교-’ 이렇게 왔다고 칩시다. 받는 사람은 송혜교인 줄 알고 그 카페 현장에 나갔죠. 그러나 우리나라에 있는 수천 명 가운데 하나의 송혜교였어요, 그 유명한 송혜교가 아니고. 왜냐하면 송혜교란 이름은 혼자가 아니잖아요. 얼마나 많습니까, 송혜교가? 이순자씨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 이순자는 우리 고모 이름이에요. 그런데 고모 이름이면서도 또 누구 이름이냐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름이 이순자 여사에요. 그쪽만 여사가 되고 우리 고모는 여사가 안돼요.

베드로와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몸을 봤어요, 십자가 지기 전에. 이 예수님의 몸을 보고 본인이 어둡지 않다고 오해를 했기 때문에 내가 아는 그 메시아 예수님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난 진짜 송혜교는 모르고 내가 생각하는 송혜교가 그 송혜교인 줄로 받아들이듯이, 여기 진짜 이순자는 모르고 내가 아는 이순자만 알듯이 예수님을 일방적으로 내가, 우리들이 해석을 해버린 거예요. 그리고 해석 당사자인 나는 하등 문제 없고 하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일이 오늘날 교회에서 똑같이 반복해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똑같이. 샛별이 떠오르지도 않으면서 계속 샛별 없이 예수 믿는 거예요, 샛별 없이. 샛별이 뭐야? 이러고. 새벽을 깨우는 샛별. 드디어 밤이 끝나고 아침이 되는 샛별. 금성.

베드로의 입장에서 이 샛별이라는 말은 자기 인생, 자기가 예수님을 배신했고 그때 고기 잡을 때 다시 찾아왔던 그 절차,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설정하신 그 절차를 딱 샛별로 해서 준 겁니다. 샛별로 줬을 때, 어둠을 밝히는 이 샛별이 지금 베드로에게는 아주 감동적이고 감격스러운 거예요.

예를 들면 어릴 때 가장 좋은 사과를 나 혼자 몰래 먹는 기분. 가장 좋은 사과를, 이건 먹지 말라고 어른들 손님 대접할 거니까 먹지 말라고 부모가 이야기했는데 어릴 때 몰래 사과 하나를 먹을 때의 기분. 그것도 자기가 찾아서 먹은 게 아니고 낮잠 자고 있는데 사과 쟁반이 기울어져서 지가 알아서 도르륵 사과가 굴러 와서 입가에 딱 들어올 때, 이건 먹으라는 하나님의 신의 계시다, 해가지고 아작아작 먹었을 때 그때 그 맛. 그걸 먹을 때 그 뒤에 일은 수습할 생각이 안 나죠.

내가 내 일, 인생에 대해서 정리하거나 수습할 생각을 완전히 가시게 만드는 그런 상태, 그것이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샛별입니다. 더 이상 인생의 고민이라든지 염려라든지 걱정, 이런 게 완전히 가시는 거예요. 걱정이 뭐에요? 공포가 뭐에요? 두렵다는 게 뭐에요? 불확실성이 뭐에요? 나는 다 잊어버렸어요. 뭐가 떠오르면? 샛별이 떠오르면.

그래서 이것은 결국 샛별로 재편성하는 겁니다. 나의 세계가 샛별로 재편성돼요. 샛별로 재편성되면 나는 지독한 어둠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지독한 어둠의 역할. 이게 난해합니까? 이게 난해한 거예요?

아침에 하는 막장 드라마에서 대본이 왔는데 그 대본에 5번째 장면에서 나의 어머니가 내 남편을 싫어한다. 내 어머니는 내 남편을 싫어한다. 따라서 내 남편이 왔을 때 어머니는 남편에게 김치 싸대기를 날린다. 이런 대목이 있다 칩시다. 그럼 연출자가 큐사인 하면 카메라가 돌아가잖아요. 막장이니까 막 가는 거죠. 그럼 시어머니 역할을 하는 그 연세 든 여자 연기자는 옆에 조연출이 준비한 소품 있잖아요, 김장김치 막 해놓은 거 있잖아요, 그걸 들고 처음에는 스윙 연습을 해보는 거예요. 연습을 해보다가 드디어 큐 들어가면 실감나게 김치를 가지고 “너는 사위도 아니야! 집에서 나가!” 하고 때릴 때 이걸 어설프게 때리면 또 맞아요. 그러니까 한 번에 잘 들어가야 돼요.

때릴 때 그 시어머니는 악한 역할을 하죠. 그렇죠? 그럼 악한 역할을 했다고 그 시어머니는 그 다음부터 출연료 안 줍니까? 그럼 연기적으로 뺨을 얻어맞은 남자 주인공의 가족들이 시어머니 역할을 한 선배를 찾아가서 죽인다고 문자 보내고 어디 하늘같은 내 아들을 때리냐고 달려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감독 입장에서는 “오케이~ 잘 때렸어.” 이렇게 되잖아요. 그 역할을 맡아야 생활비가 나오잖아요, 연기자들은.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 역할을 우리에게 맡긴 거예요. 무슨 역할을 한다고요? 김치 싸대기까지 멀리 갔습니다만, 결국 우리가 무슨 역할을 한단 말입니까? 지독한 어둠의 역할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지독한 어둠의 역할. 내가 이정도로 악한 역할이었을까? 본인도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놀라면서 한쪽에선 기분 좋은 거예요. 그 기분 알아요? 악한 역할은 누구보다 지지 않는 악한 역할을 하면서 속으로 ‘다행이다. 주여 이런 역할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역할도 없어서 지옥 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이런 악한 역할을 하면서 “주님, 악해도 이건 너무 심한 역할인데......”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모든 것은 네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다.” 나의 나됨을 위해서, 내가 너에게 찾아간 그 취지를 위해서 너는 그 역할을 감당해야 되고 담당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참 하기 싫은데 주님이 시키니까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일을 해야지.’ 하면서 악한 일을 할까~요? 아닙니다. 아주 신났어. 신났어. 평소에 악하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좋은 구실 있잖아요. 잘됐다 싶어가지고 뭐 신나게 하죠, 신나게. 내가 너무 막 가는 게 아닌가. 역할인데 너무 신난다. 이거 너무 신나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이 또 들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악한 역할 하지 않고 수제자로서 선한 역할로 주님 앞에 잘 보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습니까? 그런데 잘 보이기 위한 그 노력으로 인하여 배신감이라 하는 것은 오히려 강도가 더 셌고 어둠은 더욱더 짙은 어둠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나를 배신한다는 시편에 그런 말씀 나와요 (시편 41편, 55편).

시편보다도 누가복음 9장 한번 봅시다. 아까 변화산 이야기에요. 9장 35절에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절에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다음에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왜 그들은 자기가 본 것을 동네방네 나발 불지 않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이것이 해석이 되질 않았던 거예요. 보기는 봤는데 뭔가 중간 과정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빠져버렸어요. 주님의 영광스러움이 다가 아니라 그전에 무슨 과정이 있는데 그 과정에 대해서 제자들이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그 과정에 대해서 제가 설명 드리면, 누가복음 9장 31절, 이건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자, 그때 같이 있었던 엘리야와 모세와 더불어서 별세하실 것을 이야기했죠. 그런데 별세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이 영광스러웠습니까, 초라했습니까? 영광스럽죠.

그러면 무엇과 무엇이 격이 안 맞는 거예요? 영광스러움과 졸지에 별세하는 것과. 죽음은 처참하게 망가진 거잖아요. 처참하게 망가진 것과 영광스러움과는 조화가 안 되잖아요, 이게.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연결이. 영광스럽다는 말은 어떤 힘도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방어력을 갖고 있거든요. 공격력도 갖고 있고. 죽으신다는 말은 허약성, 방어할 것이 전혀 없음이 돼요. 자기가 자기를 지킬 어떤 여력이 없다는 뜻이 되거든요, 죽었다는 말은.

예를 들면 배트맨이 고담시를 장악하고 있는 가장 악한 악당을 물리치고 어두운 밤하늘에 조명기를 비춰서 하늘에 박쥐 문양을 딱 만들 때 사람들이 얼마나 이걸 신화화, 영웅화시키겠습니까? 야, 역시 배트맨은 무소불능(無所不能)하게 못하는 일이 없고 모든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이 영화 볼 때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서 화장실 갔다 오니까 배트맨이 죽어있어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도대체? 잠시 5분 동안 갔다 오니까 배트맨이 죽어있어요. 도대체 논리의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조커를 박살내버렸는데 나중에 보니까 배트맨이 감옥에 갇혀 있고 배트맨이 초라하게 되어 있고 거의 반 죽게 되어있고 보니까 조커가 이겼어. 그럼 배트맨을 이긴 조커는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배트맨을 사로잡았느냐, 이런 논리가 되잖아요. 나중에 돌아서서 복수는 하겠지만.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에 상당히 섭섭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는 거예요.

우리의 영웅, 우리 편, 든든한 분. 이게 열두 제자의 예수님에 대한 인상이었던 겁니다. 물 위를 걸었죠, 오병이어 했죠. 사람이 하지 못하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때 열두 제자는 얼마나 든든하게 주님을 믿었습니까? 그들은 그걸 믿음이라고 한 거예요. 자신에게 문제 있다는 건 생각 안하고 그냥 보호해주고 지켜주면 얼마든지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이러고 나온 거예요. 그게 구원입니까? 그게 구원받은 상태에요? 그게 복이에요?

열두 제자가 경험했던 것은 오늘날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이라는 그분의 이미지를 대할 때 열두 제자가 오해한 그 오해를 모든 인간은 전부다 같이 다 체험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나한테 이익이 되고 유리할 것 같아서 예수를 믿는 겁니다.

내 힘으로 내 인생을 못 살아가니까 힘드니까 주님의 힘으로 도와주시면 주께 영광이 되는 인생 되겠다고 주님에게 접근한 거예요. 기술이나 하나 더 익히고 주님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재주라도 뭐 묘기라도 하나 더 얻어 챙길까 싶어가지고. 이렇게요? 저렇게요? 이렇게 새벽기도 할까요? 이렇게 헌금할까요? 이렇게 봉사할까요? 그러면 주님은 저를 안 버리겠죠.

이렇게 자기가 제시한 자기 조건을 냈을 때 그것은 샛별이 필요치 않은 상황이에요, 샛별이. 샛별 없어도 내가 요령껏 주님과 하나가 되겠다는 집념 같은 것. 자기 편익 중심으로 그러한 인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 주님, 랍비여 랍비여, 하지만 그들이 만나는 것은 진짜 돈 많은 송혜교가 아니고 이제 연세 팔십이 다 된 어떤 송혜교. 요양병원에 가서 지금 치매 걸린 송혜교일 수도 있어요. 내가 그 사람 갑자기 욕한 게 되어가지고......

예수님의 변화됨과 엘리야와 모세, 세 분이 별세에 대해서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열두 제자들은 감히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에 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잘되는 쪽으로 생각해야지, 왜 망해서 죽어버리는 그런 부정적인 쪽으로 주님을 그렇게 생각할 이유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는 거예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 “말 안 해.” 본인들이 그 논리에 대해서 끼어들 자리가 없었어요. 그렇게 좋은 자리에서 죽음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말이죠. 우리는 희망이 있었는데, 주님은 영원히 하나님은 메시아이기 때문에 죽지 않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죽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들에게는 결정적인 걸림돌이 된 겁니다.

자기 자신을 몰랐기 때문에 생긴 걸림돌이 본인이 어둡다는 사실, 깜깜하다는 사실, 본인이 시작하고 시도하는 모든 것은 주께서 받지 않는 것들만 내놓는다는 사실이에요. 그걸로 인하여 예수님은 죽었고 그 죽음 자체를 예수님은 ‘제자야, 그건 네 문제가 아니고 이건 나의 문제다.’ 라고 간주하셔서 주께서는 외롭게 다 떨쳐버리고 누구의 후원도 없이 도움도 마다하시고 홀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는 이름이 없고 송혜교의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 못 받는다는 이야기였어요. 하도 많은 예수, 하도 많은 삼위일체, 하도 하나님이 많아서 전부다 우상들이에요. 전부다 우상적인 예수에요.

진짜 예수님은, 진짜 송혜교는, 진짜 예수님은, 오늘 잘못하면 제목이 송혜교 되겠다, 내가 어둡다는 그런 역할을 제공하신 분이 진짜 주님이에요. 나를 죄인 되게 하신 주님. 나에게 죄인 역할을 제공하신 주님. 이 대목에서 여러분, 신나야 됩니다. 그 죄인 역할, 그건 안 배워도 잘 해요. 타고났으니까. 나는 내 것만 챙기는 그 속성을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어요.

남매 간에 보세요. 누가 가르쳐줬습니까? 누나가 먹는 것을 뺐고 안 주니까 때리는 것. 그거 누가 가르쳐줬어요? 마귀가 가르쳐줬지, 누가 가르쳐줬겠어요. 타고난 거예요, 이것은. 부모가 가르쳐준 게 아니에요. 네가 너 먹는 거 누나가 안 주거든 때려라, 뭐 이런 걸 엄마가 가르쳐줬어요? 아니죠. 상대방에 대한 폭력을 누가 가르쳐줬겠습니까? 이것은 네가 폭력해라. 폭력해라. 엄마가 아빠가 가르쳐준 게 아니에요.

사람이 달라고 울부짖는 것을 누가 가르쳐줬습니까? 그건 타고난 거예요. 젖 달라고 하는 것. 생물에서는 그것을 좋게 보지만 복음에서는 인간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거예요. 나만 챙기는 그 죄, 그 죄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샛별이 떠오르면 이제는 샛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재편됩니다. 재편될 때 일어나는 변화는 어떤 변화냐. 그것은 10분 뒤에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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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9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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