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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11213a 부산강의 : [시편]44(28:3)-나와의 이별자유게시판시편

20211213a 부산강의 : [시편]44(28:3)-나와의 이별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28편,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그렇게 시작되지요. 여기서 좀 더 읽어보면 3절,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이것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무덤과 무덤의 반대말은 여기 성소로 돼있고, 그 다음에 행악자의 반대말은 뭐냐 하면 여기 성도로 돼있어요. 다윗 같은 성도로 돼있습니다. 행악자, 행악하는 자. 여기서 성소의 반대말이 성소 바깥이 아니고 무덤이라고 이렇게 돼있어요. 그거는 이게 구약, 옛 언약이죠. 옛 언약은 어디서 이뤄지느냐 하면 지평에서 이뤄져요. 수직이 아니고 지평에서 이뤄집니다.

그 이유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이 땅이 어떤 땅이냐? 이스라엘의 거주지에 와요. 사실은 이스라엘의 거주지라 돼있지만 사실은 주의 이름의 거주지에 이스라엘이 합류한 형식입니다. 주의 이름에 이스라엘이 합류했으니까 여기서 주의 이름이 어떤 분이냐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합류했던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여기 행악이 있어야 되고, 행악자가 등장해야 되고 이스라엘 내부에서 행악자와 그 다음에 행악자의 반대가 뭐라 했습니까? 성도. 성도라는 것이 주의 이름의 작용으로 결과적으로 두 개가 이렇게 나와야 돼요. 이 말은 행악자, 성도를 구분하는 것은, 성도가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행악자가 구분하는 게 아니고 여기에 함께 하시는 주의 이름에 의해서 갈라지는 겁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느냐 하면은 이렇게 등장해요. 이웃으로 등장해요. 그래서 무덤, 성소, 행악자, 성도 전부 다 이게 같은 개념들이 모아져서 주님이 어떤 주님인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드러내는 재료가 되는 겁니다.

특히 여기서 무덤이라는 게 왜 나왔느냐 하면 지평에서 이스라엘 거주지 또는 주의 이름의 거주지에서 이게 무덤으로 가버리면 이런 기능을 못해요. 지평에서 사라지면. 무덤이 지하에 있거든요. 밑으로 들어간다고요. 죽은 자의 모임. 죽은 자의 모임이 돼버리면 주의 이름의 기능자에서 탈락하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드러내는데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이게 구약이에요. 구약은 이래요.

신약은 어떠냐? 이 무덤이 지옥으로 변하고 성소는 어디로 갑니까? 이게 천국으로 되거든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거주지에서 이렇게 되지만 이스라엘 멸망하고 난 뒤에서는 성소가 위로 올라가요.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이 위로 올라갑니다. 천국 하늘나라까지 올라가버리고, 이쪽에 무덤은 지옥으로 내려가게 돼있어요. 중간에 이 땅은 어떠냐? 땅은 불타버리고 없어지는 거죠. 연극은 끝났으니까. 무대장치는 시효가 끝났으니까 없어져버려요.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은 결국은 이스라엘 안에, 우리가 하는 것은 시편 28편 구약이니까 구약 안에서 주의 이름이 이웃으로 온다는 겁니다. 이웃으로 오는데 그러면 이웃에 대해서 잘해주면 되지 않겠느냐? 이웃으로 오셨으니까 이웃으로 오신 주님께 잘해드려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 이웃이 어떤 이웃이냐 하면 낯선 이웃이에요. 우리가 아는 친근한 이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은, 왜 하나님이 낯선 이웃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인간들이 생각한 이웃은 나에게 잘해주는 자, 이걸 우리는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한테 잘해주는 자니까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한테 잘해주는 자를 이웃으로 삼으면 이건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행악한 자에 해당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이 거주하는 곳에 나도 같이 살고 있으니까 여기서 경쟁이 일어나요. 주님을 위해서 살 것이냐, 아니면 나를 위해서 살 것이냐? 경쟁이 일어나죠.

나를 위해서 산다면 눈에 보이는 눈에 띠는 모든 것이 나한테 잘해주기를 바라는 거죠. 그게 행악자에요. 그러면 성도는 어떠냐? 이게 다 나를 위한 것이라면 성도는 어디 있느냐? 성도는 이게 없어요. 성도가 없습니다. 성도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요. 성도는 주님이 이웃으로 와서 행악자한테 심하게 시달릴 때 그때 등장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한 번 물어봅시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가 누구죠? 이건 쉽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가 나지요.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했는데 따먹은 것이 나라는 당사자기 때문에 나는 이미 주님 보시기에 행악자에 속하는 겁니다. 그러면 선악과 따먹은 그 결과가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 에요. 나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 나의 이익 가운데 인간이 노리는 가장 이익은 뭐냐 하면 나를 천국 보내는 이익이에요. 이게 뭐라고? 이게 바로 행악자에요.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것, 이게 바로 행악자입니다.

뭐든지 이용하려고 해요. 누구마저 이용하느냐 하면 하나님마저 이용하려 합니다. 평생 50년, 60년 교회 다녔는데 50년, 60년. 70년 이렇게 교회를 다녔는데 그 교회 다닌 의도가 뭐냐 하면 나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이용해서 나한테 꾸깃꾸깃 다 집어넣는 거예요. 나한테는 뭐냐 하면 캥거루 배처럼 나 자체에 쇼핑백이 있어요. 쇼핑백에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 있잖아요. 긍휼, 자비, 예수님의 피, 복음, 언약, 십자가 그런 것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난 배불뚝이가 되겠지요.

배불뚝이가 되어 이제는 천국 가는데 하자가 없도록, “하나님, 뭐 필요합니까? 이것 드렸습니다. 이것 여기 있습니다.” 온갖 좋은 것, 천국에 합격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집어넣고 멀쩡한 나를 멀쩡하게 만들어서 가겠다는 것, 이게 바로 행악자에요. 성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28편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말씀은 존재하지 않는 성도를 생산하는데 그 주인공에서 내가 탈락한다는 이야기가 성경이야기에요.

내가 탈락하고, 내가 탈락하면 그 의도 있잖아요. 목적, 내가 천국 가는 그것도 주님께서 사정없이 그걸 밀쳐버리죠. 교회 다니고 종교 생활한다는 것이 스스로 자기 중량을 늘여버린 거예요. 몸무게가 늘어서 가만있어도 지옥으로 빠지게 돼있습니다. 갈수록 본인을 못 버려요. 처음에 교회 삼일 다닐 때, 참 삼일 다닐 리는 없지.

삼주 다닐 때는 까짓 것 뭐 이 교회가 안 받아주면 나는 교회 안 가면 되지, 하고 쉽게 빠질 수 있는데 60년 다녔다? 이것 교회 안 나올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동안 자기한테 쌓은 공덕이 많은데, 불교식으로 이야기해서 자기한테 쌓은 공덕이 많은데 그 공덕을 어떻게 아까워서 버립니까? 교회 갖다 바친 돈이 많은데 그걸 어떻게 버리고 완전히 부정할 수 있어요. 안 되지요.

그래서 우리가 방금 다시 이야기하면 성소의 반대말은 무덤이다. 모든 인간이 무덤가잖아요. 그만큼 무덤가는 그 인간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성소에 가야 되는데 무덤가기 전에 먼저 탈락되지 않고 성도에 합류해야 성소 자체가 천국 갈 때 같이 따라갈 수 있는 겁니다. 이 성소에는 누가 계시느냐? 이스라엘 전체 가운데서 성소가 따로 있습니다. 그게 성전인데요.

성전에 누가 계시느냐? 주의 이름이 계셔요. 그런데 주의 이름이 있는 성전 안에는 뭐냐 하면 모든 율법을 완성한 자리가 되는 거예요.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업무가 끝나면 하늘로 올라가는데 거기에 같이 따라 붙어서 올라가게 되면 그 사람이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는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 속에 있으면서 내가 하늘에서 온 이웃이라는 걸 그들이 발견해야 되는데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어서 뭐든지 나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알아보질 못하게 돼있어요. 이게 막히게 돼있습니다. 막히게 돼있는 이것을 어떤 식으로 걷어내느냐 이 이야기를 지금부터 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막혀있는 우리의 나 위주로 살아가는 이걸, 나의 이익 위주로 살아가거든요. 다시 하겠습니다.

선악지식이라 하는 것은 그 선악지식의 활용도가 항상 나의 이익으로 쏠린다는. 내게 이익이 될 때 그걸 선이라 하고, 내게 손해가 되면 그걸 악이라 하는 거예요. 내가 천당 가면 이익이라 보고, 내가 지옥 가면 나한테 손실이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천국, 지옥도 선악지식을 전제로 해서 이게 구성이 되기 때문에 그 천국, 그 지옥은 하늘나라 안 받아줍니다. 받아주질 않아요.

그러면 그러한 장막에서 벗어나는 방식이 어떤 것이냐? 그 방식을 제가 훅하고 지나가는 식으로 빠른 시간에 해드리겠습니다. 꿈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 밤에 꾸는 꿈이 있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밤에 잠을 잤으니까 꿈을 꿨잖아요. 그러면 해가 떠오르면 낮이 됩니다. 낮 자체가 꿈이에요. 두 가지 꿈이 되는 겁니다. 둘 다 꿈이라는 걸 알려면 이걸 느끼는 의식하는 세 번째 존재가 있어야 돼요.

세 번째 그걸 보고자 하는 나가 여기 있는 겁니다. 그 나는 꿈이 두 가지인데 둘 다 꿈이라고 판정하는 내가 여기 있다 이 말이죠. 나는 어떤 경우라도 꿈이 아니어야 한다. 나는 판정관이다. 나는 꿈이 아니고 판정관이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문제가 되거든요. 이건 꿈이고 세상을 꿈이라고 보지 않고 현실 그대로로 보는 것은 이게 잘못 된 건데, 왜냐하면 꿈에는 무의식이죠. 내가 활동을 안 하고 있으니까 꿈으로 확정되는데 낮에는 내가 설치고 다니까 꿈으로 안 보잖아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꿈으로 안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라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의식에서 나온 나다. 내가 나를 의식하니까 여기에 ‘나’ 있지요, ‘나를’ 있지요. 나가 몇 개에요? 두 개지요. 근데 거울 보면 내가 한 개거든요. 이게 뭐 잘못 된 거예요. 거울에 비친 내 몸뚱이는 하난데 왜 나는 나를 의식하느냐? 그럼 ‘나’가 두 개가 되는 겁니다. 둘 중에 하나가 꿈이에요. 이게 가짜다 이 말이죠. 그래서 판정하는 나는 가짜일 수 없고, 낮에 설치고 다니는 나는 나한테 가짜가 되니까 이것도 하나의 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이것에서 벗어나야 돼요. 왜냐하면 최후 마지막 궁극적으로 뭐만 남아요? 세상 다 멸망당하고 지옥 가고 천당 가고 뭐든 다 깨져도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뭐만 남습니까? 이 나라는 것만 달랑 남아요. 그러니까 남으니까 나를 위해서 뭘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마지막 남은 게 나니까 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말이죠.

여러분들이 교회 와서 예수님 이야기해보세요. 내가 아는 예수와 네가 아는 예수가 다 달라요. 다를 수밖에 없지요. 열 명이 있다면 열 명의 천국이 다 다르고 열 명의 지옥이 다 달라요. 열 명의 예수가 다 다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누굴 위해 살았기 때문에? 나를 정당화하면 살았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지요.

성경에서는 그게 아니거든요. 성경에서는 나를 깹니다. 나는 깨는 것, 나를 깨는데 깨는 방법이 뭐냐 하면 철저하게 내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다 보여주면서 깨어버려요. 철저하게 갈 데까지 가게 하는 거예요. 나라는 것이 갈 데까지 가게 하는 겁니다. 가는 방법을 이제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깨어지는 방법, 그게 의외로 간단해요.

나가 있잖아요. 나의 위기는 뭐냐? 타인과의 만남입니다. 꿈이 좋은 것은 꿈이 나중에 깨어나면 주인공이 나라서 꿈에서 죽든 말든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내 안에만 있으니까요. 그런데 낮에 설치게 되면 누굴 만나느냐 하면 남, 남을 만난다고요. 여기서 위기를 느끼는 겁니다. 꿈속에서 천국 갈 수 있어요. 꿈속에서 지옥 안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걸 무효로 돌립니다. 네가 네 안에서 꿈꾸고 있는 천국, 지옥은 인정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지평적, 눈에 보이는 세상, 죽는 세상 말고 아직도 여전히 살아 있는 그 세계에서 남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남을 만나면서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내 의식이 두 동강나면서 의식을 깨는 게 뭐냐? 지금까지 강의했는데 그렇게 궁금했던 것, 나는 어떻게 깨는가? 그거는 욕망입니다. 남들이 갖고 있던 그 욕망, 거기에 대한 나의 탐심과 욕심이 나로 하여금 나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거예요. “아아, 나는 내가 싫어. 지금의 내가 싫어. 난 저 사람처럼 될래.”

여기서 타인을 만나면서 나를 지키는 방법이 첫 번째는 뭐냐 하면 타인을 밀어내는 방법. 밀릴 때 누구도 같이 밀리겠어요? 예수도 같이 밀리겠지요. 그 다음에 타인 속으로 건너가는 방법. 이때는 자기를 부인하죠. 나는 내가 되기 싫어. 저쪽의 뛰어들고 싶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촌에서 일곱 식구, 옛날엔 그렇게 살았잖아요. 일곱 명 되는데 방은 하나, 지긋지긋하지요.

그래서 다른 형제들은 이렇게 살아도 우리끼리 정 붙이면 괜찮아, 하고 살만했는데 그 중에 네 번째 얘가 친척이 사는 롯데월드타워 시그니엘 레지던스라든지 한남더힐이라든지 그런 데 별로 비싸지도 않아요. 200억밖에 안 돼. 그런 데 슬쩍 친구 따라 갔다 오고 난 뒤에는 지금 내 집구석이 이게 사는 게 아니고 이건 짐승우리보다 더 못한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의 현재 존재에 대해서 현재 상황에 대해서 저주하고 싶은 겁니다. 이게 뭐냐, 이게. 내가 평생 태어나서 이 꼴로 이렇게 죽으란 말인가. “엄마, 나 서울 갈래. 차비만 보태주면 내 알아서 살게.” 보따리 싸서 서울 가고 나머지 형제들은 여기서 농사지면 살자. “농사 지긋지긋해 나 서울 갈 거야.”

그러니까 그냥 있는 데로 살래, 하는 방법과 타인의 욕망 속으로 건너가는 방법.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의 욕망이 인간을 두 조각내는 거예요. 타인 속에 건너가는데 이게 밀어내는 것, 이것 가능합니다. 타인 속에 건너가는 것, 불가능해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이 뭘 하느냐 하면 불가능한 것에 집착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되지도 못하는 그 일에 내가 거기에 하나의 삶의 목표가 돼버린 거예요. 되지도 못한 거예요.

결핍을 느끼고 그 결핍을 느낄 때 나는 쪼개지잖아요. 쪼개지면 내가 아쉽다는 괴로움이 너무 아프잖아요. 아프니까 어떻게 변명하고 정당화하느냐 하면 모든 결핍과 균열을 수시로 봉합하는 공백의 유령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빈자리라는 유령, 귀신에 시달리게 되는 거예요. 결핍에서 나오는 게 이 말이에요. 네 자, 죽은 조용기 목사가 그렇게 자주 했던 믿씁니까, 하는 거예요.

“나의 결핍을 채워주소서, 신이시여.” 믿습니까? 여전히 누굴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다 동원해서 믿습니다. 기어이 결핍과 균열, 결여, 모자람이죠. 모자람을 계속해서 그때마다 채우려고 유령의 소릴 듣는 겁니다. 나는 내 만족을 위해서 설교를 듣고 복음을 듣고 유령의 소릴 듣는 거예요. 그게 마귀의 소린데 악마의 소린데 자기는 성경대로 하니까 주의 성령의 역사인 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타인 속으로 건너가려고 노력합니다.

밀어내는 방법은 뭐냐 하면 안 들은 걸로 하는 거예요. 안 들은 것으로 치는 것, 이게 뭐냐 하면 현실을 유지하는 방법이에요. 현실을 유지하는 방법, 성경에선 그걸 악이라고 하는 겁니다. 현실에 안주해서 안 들은 걸로 쳐서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그대로 하는 것, 그게 밀어내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계속 줘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안주하기 위해서 율법을 안 들은 걸로 치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근사하니까 내가 그대로 유지가 되니까요. 끊임없이 변명이 나와요. 뭐 쉬지 않고 변명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건 불가능하고 이건 가능한데 둘 다 실패로 끝나지요.

실패로 안 끝나려면 어떻게 하느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전체가 뭐냐 하면 이게 보는 것, 내가 보는 거예요. 내가 보는 것의 반대말은 뭐냐 하면 누군가에 의해서 내가 보여지는 거예요. 지금껏 우리는 내가 중심이고 내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내가 보는 것 중에서 괜찮은 것, 나한테 이익 되는 것을 선으로 여겨서 전부 다 나한테 캥거루 보따리에 다 집어넣었어요. 내가 보는 것 중에서 괜찮은 것, 안 좋은 것은 버리고 좋은 것만 취하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부잣집에 형제 일곱 이 있는데 그 중에 한 네 번째 얘가 촌에 돼지우리에 친구 따라 놀러갔다. 그러면 얼마나 화들짝 놀래겠습니까. “아이고, 어머니. 못 살겠습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반대로 말이죠. 우리 집이 최고에요. 그게 악이에요. 그 현실에 안주하는 게 악이란 말이죠. 상당히 보수적이죠.

누군가 나한테 보여지는 것, 이 누군가가 뭐냐 하면 다윗입니다. 다윗은 주의 이름의 활동의 증상이에요. 이 다윗은 여러분 알다시피 언약의 계약자에요. 언약의 상대자에요. 언약의 계약 상대자에요. 하나님의 선택이기 때문에 지가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일부러 다윗에게 찾아와서 기름 부었거든요. 사무엘을 통해서.

계약 상대자기 때문에 이 계약의 완성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지금까지 간단한 결론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관건이에요.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봅니까? 죄인으로 보지요. 이게 바로 구원의 자리에요.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내가 시도하지 않았는데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주님의 시선이 내 시선을 이겨버린 겁니다.

상스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만 주님의 시선이 내 눈알을 그냥 찔러버린 거예요. 그것도 눈이냐? 너무 상스럽게 눈깔이란 이야긴 하지 않겠습니다만 “그것도 눈이냐, 그것도 귀냐? 귀가 달리고 눈이 있으면 뭐하냐?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성령이 그 일을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그 일을 해요. 철학을 하고 과학을 하고 공부를 해도 그것도 지혜야, 그것도 지식이냐, 찔러버립니다. 전부 다 너를 위한 거예요. 너를 위한 악행, 악마가 하는 짓이야, 하고 찔러버리죠.

그게 누구냐 하면 세리와 창기 아닙니까. 내 인생 물어줘, 하니까 네 인생도 인생이냐 창기가 되던 세리가 되던 그게 뭐가 대수냐 말이죠. 십이 년 동안 피 흘리고 했다? 혈우병에 있던 여인이 12년 동안 청춘을 허송세월한 것 일체 주님한테 묻지를 않고 그대로 겸손하게 그냥 내 청춘 돌려줘, 하지 않고 감히 옷도 못 만지고 옷자락만 만졌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세상보기였고 예수님이 그 여인과 자기 백성을 볼 때 그런 안목으로 보는 예수님의 안목을 너도 가졌구나. 이걸 믿음관계라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안목을 본인이 갖는 거예요.

지금까지 도달함이 어디까지 왔느냐? 보여지는 거예요. 여기서 투쟁이 벌어집니다. 내가 보는 예수님이라든지 또는 다윗, 구약이니까 예수님은 아직 안 오셨지요. 다윗 속에 예수님이 계시니까요. 내가 보는 다윗과 다윗이 보는 나, 여기서 다윗 중심으로 새로운 집합체가 등장하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성소에 들어갈 하나님의 성도들이에요. 이렇게 성도들의 구성되게 되면 나머지 있잖아요. 나머지 배제된 자가 뭐가 되느냐 하면 악행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없는 성도가 다윗을 통해서 만들어내고 생산해내겠다는 것이 시편 28편 내용이에요. 그렇다면 다윗이 보는, 예를 들겠습니다. 사무엘상 18장 21절 누가 읽어보세요.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

사울 왕이 다윗에게 고위직을 주는데 그 주는 이유가 적들에 의해서 제거시키기 위해서 고위직을 줘요. 내가 준 업무를 제대로 못할 경우에 너는 완전히 잘린다는 겁니다. 이게 사울 본인이 보는 세상 모습이에요. 사울은 왕이고 다윗은 부하로 의도적으로 채택한 이유가 그 당시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게 하신 분은 누구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사울은 내가 나를 보는 그 시선으로 다윗을 평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다윗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신경 쓰고 있다는 말은 평소에 사울의 관심사가 백성들이 나만 주목하기를 바라는 관심사의 연속이에요. 연장이에요. 내가 나를 평소에 생각하는 방식으로 말하게 돼있거든요. 말하고 행동하게 돼있어요.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게 아니고 상대방을 통해서 나를 더욱 더 나답게 이해하는 방식을 상대방에게 전도하는 거예요. 강요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나와 타인 간에 항상 뭐가 생기느냐 하면 오인이 생겨요. 잘못 되게 하는 거예요. 이 오인은 잘못 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되고 싶은 나와 나 사이에 여기서 오인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괜찮은 존재인 줄 알고 있는 거예요. 남은 죽어도 자기는 안 죽어야 되고 남은 아파도 나는 건강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계속 오인이 내 안에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사무엘상에서 다윗에게 고위직을 주면서 네가 성사하면 내 딸과 결혼시켜 줄게. 이 모든 제안을 하는 것은 사울 본인이 다윗에게 그렇게 하게 되면 다윗은 나라도 붕 뜨겠다. 뭐 되겠다하는 것처럼 다윗도 내가 원하는 세상 권력을 너도 같은 인간인데 너도 원할 게 아니냐? 내가 사람 볼 줄 몰라? 사람은 다 그렇고 그렇지. 그렇게 생각한 거죠.

그런데 제가 아까 했지요. 다윗은 뭐라 했습니까? 무엇의 징조, 무엇의 증상이라 했습니까, 누구의 증상? 하나님의 증상이거든요. 하나님의 일이거든요. 사울은 다윗 안에 하나님이 다윗보다 더 세게 주도적으로 있다는 것을 사울은 지금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다윗은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시대의 비밀이에요. 다윗 존재 자체가 비밀입니다.

다윗이 비밀이라는 말은 어렵게 말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드러내는 순간 인간에게 신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예수를 제거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에게 신은 영원한 비밀이어야 하는데 그 하나님이 그 비밀봉투를 찢고 비밀을 공개해버렸거든요. 공개하니까 내가 평소에 생각한 그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그걸 유지해야 나한테 이익이 되니까 그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 앞에 누굴 제거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제거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내가 나를 제거하기 싫어서 예수님을 제거한 거예요. 그게 복음이에요. 그래서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의 하나님 됨을 위해서 날마다 나를 제거하는 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얼마나 우리는 우리 위주에요. 우리 자신밖에 모르기 때문에. 나를 제거하게 되면 뭐도 제거되느냐 하면 평생에 내가 일구어놨던 모든 성과와 실적, 이거는 내 자식이다, 내 가정이다, 내 재산이다 이 모든 것도 누구의 표적이 되느냐 하면 성령님의 표적이 되어 제거대상입니다. 모든 게 제거대상이에요.

거기서 나오는 영어단어가 있다면 이거지요. 간단해요.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why me? “왜 하필이면 납니까, 주여. 왜 하필이면 이런 암에 걸립니까, 왜 하나님이여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왜 납니까?” 그것은 주께서 나와 나를 이별하기 만들기 위해서. 인간은 늘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누굴 만나든 이별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차하면 갈라서자. 이럴 것 같으면 헤어져.

우리는 이별할 준비가 돼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28편에서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에게는 이별이 없습니다. 뭐 기쁜 소식이라 해도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에겐 이별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자기 것을 담기 위해서 했기 때문에 자기가 담아 있는 자기와 이별할 수 없어요. 끝까지 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한테 성도와 이별이 없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필히 조건이 뭐냐? 나는 나와 이별해야 돼요.

그래서 여기서 노래 가사 하나 적어드릴 테니까 내가 나와 이별하는 그 순간을 묘사한 가사입니다. 적어볼게요. “어떻게 돌아왔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아무 생각이 안 납니까? 한 번 불러볼까요? 양수경이 불렀던 거기 보면, “예감할 수 없었던 이별이었기에” 예감할 수 없는 이별, 이게 내 중심의 세계, 이 세상을 내가 바라보는 식으로 구성된 세계에서는 예감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헤어진 게 아니고 내가 구성한 내 세계로부터 내가 벗어나야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거예요.

거기에 결정적인 가사가 나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했던” 이거는 보통 용기 아니면 이런 가사 못 써요. 나보다 더, 아마 자길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가사를, 실제로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제발 프리즈 너를 잊어라 이 말이죠. “네가 너를 붙들지 않더라도 너를 붙드는 사람 따로 있잖아. 그런데 왜 네가 자꾸 너를 붙들려고 해, 아끼려고 해.”

그래서 나오는 그 다음 가사가, 이런 가사는 아니지만 약간 변경하면, “아직도 내게 내 모습이 남아있나요” 이게 바로 성도의 기도 아닙니까. “주님이여, 아직도 내가 내 것을 아끼고 내 것을 쥐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아직도 육적인 모습이 남아있습니까” 이런 기도에요. 그 다음의 가사, “내 모습이 정말 싫어요. 내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나와 어느 시점에서 나랑 헤어져야 됩니까, 주여.”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이거는 노래 가사기 때문에 노래 가사 세계에서 보면 나와 남과의 이별을 이야기하잖아요. 무슨 이별입니까? 나와 남과의 이야기잖아요. 이별은 이 세상은 아무리 좋은 사람 만나고 부부가 자식을 낳아도 전부 다 이별을 할 준비를 하세요. 그게 주의 뜻이에요. 세상과의 모든 이별을 함으로써 이별되지 않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 영원히 이별이 없는 세계, 그것을 위해서 결국 이별할 수밖에 없는 그 세계를 준비해놓은 겁니다. 그게 바로 죽음이에요.

버티다, 버티다 못 버티면 인간은 자기와 이별합니다. 그게 자살이에요. 너무나 고통을 참기 힘들어서. 세상사는 고통에서 이별의 고통에 제일 참기 어려운 게 지옥인데요. 지옥의 고통은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내가 죽어서 자식이나 누군가 타인과 헤어지는 고통, 남이 겪는 고통도 있지만 이거는 지옥 고통 아니에요. 지옥 고통은 뭐냐? 내가 살아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고통, 이게 지옥 바로 고통이에요. 이게 내가 살아 있으면서 뭘 느낀다? 이별의 고통을 그 참담함을 온 몸으로 다 받아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에는 내가 안 죽어요. 안 죽어서 지옥이 고통스러운 거예요. 내가 그냥 죽어 없어지면 그까짓 것 불기둥이든 뭐든 내가 죽으면 그만이죠, 뭐. 죽으면 고통도 없는데 그만하면 살다가 힘들면 지옥 가지, 이러면 되는 문젠데 이게 안 죽으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죽지 않으니까. 그걸 이스라엘은 어디서 경험하는가? 살아 있으면서 경험하는 거예요. 그 경험을 누가 받아주는가? 그게 바로 다윗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통 속에서 이 세상과 이별 속에서 시편 28편을 남기는 거예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자기 안에 장차올 메시아가 살아 있어서 이 메시아 되시는 분, 하나님 되시는 분이 인간과 소위 하나님 백성이라는 자들과 어떻게 강제로 이별해야 되는가를 그것을 미리 다윗 시대에 다윗 속에 담겨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목사님 나는 어떻게 삽니까, 라는 질문자체가 성립 안 되고 내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다윗 같은 고통을 우리 함께 고스란히 다 같이 체험하고 재현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28편은 이 말씀덩어리가 현재 우리의 삶에 설계도로서 우리 안에 이미 쳐들어온 거예요. 우리가 시편 28편 말씀대로 살자가 아니라 그건 엉터리고, 이단이고 말씀이 알아서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이게 복음이고 진리에요.

나의 세계 완전히 개 무시당하고 주님의 말씀의 세계가 나를 완전히 장악하고 지배하는 것, 그리고 이끄시는 것. 그럼 이끄시면 저는 구원받습니까, 라고 질문할 건데 구원을 받는 문제가 아니고 무엇이 악인이고 무엇이 성도인가 이 대비되는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예수님처럼 이웃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 말이에요. 사람과의 이웃으로. 무엇이 나한테 이익이냐, 손해냐 하는 그런 질문은 더 이상 우리한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악인과 성도는 우리 안에 다 들어있어요. 내가 악인이고 내가 성도거든요. 이건 뭐냐? 내가 보는 것, 내가 세상 보겠다는 고집, 이건 악인의 역할이고 보여지는 것,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날 어떻게 보는가, 이거는 성도의 시선이고요. 두 개의 시선이 우리 안에 계속 작동하고 있습니다. 작열해요.

그래서 시편 28편은 주님께서 이웃으로 내려오시는 과정, 이것을 다윗의 일과 속에 삶 속에 그대로 집어넣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신앙대로 살았느냐? 아니요. 다윗은 환경대로 살았어요. 가만있어도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서 본인이 원치 않는 길로 계속 시달리고 후달리며 살은 거예요. 골리앗 만나자 골리앗과 싸울까 이런 것도 주께서 그런 환경을 조성하신 겁니다.

우리가 주어진 하루일과가 내가 만들어낸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에요. 주께서 의도했는데 무슨 의도? 악인이 누구냐를 네 자신을 통해서 드러내고 거기에 대비가 되는 성도가 누구냐를 네 자신으로 드러내라고 우리에게 지금의 환경을 준 거예요. 나는 착하다, 나는 훌륭하다 지금 이것 자랑질 하라고 주신 환경이 아니고 그냥 세상 속에서 후달리고 시달리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가 되는 거죠. 세상에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주님의 일을 주를 위하여 주의 일을 하도록 이렇게 주께서 택하여줬다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우리가 시작은 악인의 역할을 하지요. 우리가 이거는 잘해요. 왜? 태생이 주특기가 할 줄 아는 것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이거는 뭐냐? 가능성,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가능성은 나 지키는 것, 그게 악이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성도 되는 것은 뭐냐? 불가능성이죠. 그러니까 불가능성이 가능성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거예요. 매일 삶 속에서.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새로움이에요. 새로운 체험하겠다고 오늘은 아침이슬 먹고 다음에는 양주 먹고 술 바꾼다고 그게 새로움이 아니라 새로움은 계속 다시 도루묵이라 하죠. 도로 악인이 되는 내가, 내가 보는 나를 지키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주님 보시기에 너 악인도 하나의 역할이라고 알려줄 때 그것이 덮쳐올 때 비로소 우리 자신으로부터 또 다시 헤어지는 순간입니다. 전에는 이별하면 슬픈데 이제는 이별이 기쁘고 이별하는 재미로 사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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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9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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