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11126b 출애굽기 19장 17절(이름없음)-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11126b 출애굽기 19장 17절(이름없음)-이 근호 목사
이름 없는 숫양, 짐승을 잡아서 그 속에 하나님의 언약, 죽음을 집어넣듯이 똑같은 그런 역할을 이스라엘에게 집어넣습니다. 강제로 율법을 줘요, 강제로. 그러니까 아까 출애굽기 19장 17절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할 때 그들이 무엇을 선물로 받는지 그들은 짐작도 못했죠. 수고했다고 뭐 감사장이나 표창장 줄줄 알았죠. 너희들은 이제 죽었어. 이거란 말이죠.
법을 받아와요. 모세가 법을 받아온다고요, 겁도 없이. 겁도 없고 자시고 간에 강제로 법을 받아오게 되면 이스라엘은 근원적인 생존의 위협에 처하게 됩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하는 것은 일단 본인이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그냥 강제로 밀어붙여버리면 도대체 너에게 ‘살아있다’가 너의 어디를 봐서 그게 성립되느냐? 네가 그럴 위인이 되느냐? 를 근원적으로 보게 하는 거예요.
근원적으로 보게 되면 인간들의 존재는 자기를 필연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존재는 우연이 됩니다. 아니, 내가 살아있다니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정말 살아 있는 거 맞아요? 왜 살려줘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이방민족은 살기 위해서, 자기 살아있음을 계속 지탱하기 위해서 신을 믿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이걸 우상이라 하는데 언약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우상입니다. 언약이 없는 신이 우상이에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살아있는 내가 죽어서도 좋은 곳으로 가려면 필연적으로 자기 죽음에 대해서 악착같이 사력을 다하여, 죽을 힘을 다하여 자기 자신의 동질성을 지켜내야 되겠죠.
지난 주일 낮에 제목이 이었습니다. 간격. 간격을 성경 구절과 연계시키면 이런 구절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2장 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되어있죠. 죽도록 ‘충성’에다가 gap을 집어넣으면 죽도록 gap을 주목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한테 생명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해도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충성이라는 것이 어디에 충성이냐 하면 바로 이 gap에, 언약에 충성하거든요. 십자가와 부활, 거기에 주목하는, 그거 보고 지 목숨은 하찮게 여기는 것이 충성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그러니까 인간이 언약이 오기 전까지는 인간이 생각하는 생명은 그게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연속성이지, 생명이 자기 목숨의 연결이었지, 중간에 끊어져서 새롭게 주어지는 부활의 주님의 생명은 아니었죠. 마귀가 이야기하는 네 목숨줄이지, 주님만이 알고 있는 생명은 아니었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생성되었던 생명은 아니었죠.
그래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근원적인 생존의 위협을 주시는 것은 언약적 핵심의 내용인 율법으로서 마땅히 할 일이죠. 인간의 모든 생각과 사고방식과 행동에 대해서 일일이 전부다 그 바탕 자체를 그냥 다 해체시켜버리고,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율법, 법은 파괴다’, 다 파괴시켜버리는 거예요. 한솔기업이라니까요. 떡이 되게 만들어버려요. 쓰레기 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p.213 봅시다. 교재 이제 들어갑니다. 지금까지 한 시간 가까이 한 이것을 ‘주님이 나의 존재보다 앞선다’ 이렇게 축약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보다 앞선 거예요. 골로새서 1장 16절 잘 아시죠?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모든 만물은 다 누구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 있다 했잖아요. 여기 있는 나를 위해서 주님이 계신 게 아니고 주를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진 거예요. 주님이 나의 존재보다 앞선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이제 이해하려고 하죠. 그럼 주님이 언약을 동원해가지고 이해하는 나를 없애버리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앞에 뭐를 붙이세요. ‘신기한 우연의 산물’. 이걸 아까 두 자로 이야기하면 그냥 내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물. 내가 왜 있지? 신기하네. 그렇게 되는 거예요.
p.213 “언약과 주체의 발생” 그 다음에 보면 “말씀을 거부하면 사람은 죽게 된다.” 이렇게 되어 있죠. 왜 말씀을 거부하면 사람은 죽느냐 하면 주님이 우선이고 말씀이 우선이기 때문에 말씀을 살리기 위해서는 방해되는 인간은 불도저처럼 방해물을 전부다 철거하면서 한솔기업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죠. 하나님이 주님이 먼저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실제적으로 하는 거예요, 쳐내면서 하는 거예요.
고속도로 뚫을 때 뭐 이 집안은 안동 권씨 집 대대의 소나무가 있고...... 필요 없어요, 전부 다. 어이, 이명박. 밀어붙여! 새벽4시에 일어나서 불도저로 경부고속도로 다 밀어붙이는 거예요. 깔끔하게 다. 뭐 이거는 성씨 집안의 소유권이... 소유권 다 필요 없어! 그냥 밀어붙여, 다. 다 밀어붙여! 이건 이백 년 된 명당... 명당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무덤 다 옮기던지 하고 다 알아서 하고 다음날 되면 다 없앨 거야. 깔끔하게 없애버립니다.
그래서 여기 교재에 보면 말씀=종말의 징후라고 보는 겁니다. 말씀이 왔다는 말은, 쳐들어왔다는 말은 나는 이제 필연적인 나를 챙기면 안 되는구나. 나는 그런 필연에서 우연적 존재로 전환되는 겁니다. 바람이죠. 우연적 존재로. 그리고 이게 여러분 편해요. 따지고 보면 가만 계산 튕겨보면 이게 편해요. 왜냐하면 살려고 한다면 살 이유가 있어야 되거든요. 살려면 율법대로 살아야 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율법의 내용도 모르면서 율법대로 지킨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율법을 누가 출제했습니까? 내가 출제 안 했죠. 출제자의 의도를 모르면 일방적으로 지켰다 해도 그건 지킨 게 아니에요. 괜히 남들이 나서지 마세요. 성도는 주님과 상관하지, 남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에요. 구원해도 주님이 구원하고 버려도 주님이 버리지, 남들이 나서서 ‘너는 버렸다. 너는 구원되었다’ 할 수가 없습니다. 부수고 다시 세운다고 생각하면 쉽죠.
그러면 이스라엘 내부에 이 율법이 들어왔을 때 종말의 징후가 어떤 식으로 등장하는지 그것을 잠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 설명 드리는 것은 종말이 왔을 때 어떤 징후가 있는가. 불안이 오고 그다음에 파괴가 되죠. 불안이 ①, 파괴 ②. 불안이 오고 파괴가 되는 겁니다.
불안은 왜 오느냐 하면 진실을 소유(소지)하기 때문에 불안이 오는 겁니다. 진실을 소지하기 때문에. 난 복음을 알았어. 그때부터 마음이 편한 게 아니고 그때부터 이 복음을 유지해야 된다. 나보다 나에게 더 우선되는 게 없잖아요. 천상천하에 내가 제일 중요하잖아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진실 그러니까 말씀, 복음을 내가 소유하죠. 남이 소유해서 내가 구원 못 받고 내가 멀쩡하게, 내 터는 내 테두리는 멀쩡하게 있어야 돼요. 그 프레임은 있어야 되고 여기에 말씀을 수입하죠. 그러면 이게 아까 힘이 되고 내가 있는 이 장소는 신격화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진실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진실이 우리에게 너무 과해요. 감당이 안돼요. 과잉이에요. 과잉 때문에 늘 불안해하는 겁니다, 정서적으로. 제가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높이뛰기 선수가 자꾸 신기록을 세우니까 점점 더 높이는 거예요. 점점 더 높여요.
모든 스포츠나 그런데 보면 인공지능이요, 인공지능이 왔을 때 재미없다고 하는데 재미없는 게 아닙니다. 인공지능이 있음으로써 바둑 둘 때 초반에 30~40수는 인공지능대로 가요. 신진서, 박정환, 변상일, 장로님 잘 아실 거예요, 딩하오, 커제 이런 선수들이 바둑 둘 때 인공지능을 얼마나 공부하는지요. 유사해요. 실제는 2점 놓고 인공지능한테 이긴다니까요. 수억 판을 다 외운 인공지능을 인간이 2점 놓고 이긴다니까요. 기가 차죠.
라이벌이 생긴 것은 목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내가 라이벌 때문에 기죽는 게 아니고 반대로 나가요. 그래서 인간의 불운은 높은 목표점, 도달점이 생기면서 인간은 여기서 결여, 결핍을 느끼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하는데 전혀 그럴 마음 없어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하지 않습니다. 그냥 원룸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라. 아니, 그런 거 싫어요. 100평짜리 아파트에 고급차를 타야 돼요. 왜냐하면 이미 내 레벨은 높아졌으니까요.
그만큼 갭이 있겠죠. 갭이 있죠. 그 갭이 인간에게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행동 잘못하게 되면 내가 구축해온 것이 하루 아침에 와르르 무너져내리면 내가 처음부터 다시 이걸 어떻게 쌓을까 그게 아득한 거예요.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것도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에 완전 다 무너져버려요. 이 코로나 바이러스만 아니면 벌써 1년 전에 끝날 문제에요.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가 인도에서 생겼잖아요. 거기서 또 퍼졌잖아요. 2년 됐다고 신나가지고 애들 학교 전부 다 가고 수련회 다하고 가야산 예약 다해놨는데 변이 3차.
불안한데다가 거기에 대한 시원한 해결점은 뭐냐. 아예 파괴를 해버리는 거예요. 여기에 법이 법대로 실행해요. 인정사정 보지 않고. 고마운 줄 알아야 됩니다. 모든 불안을 일거에 없애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 존재에서 우리를 하루하루 사는 일회용 하루살이 같은 우연으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만들 때 이스라엘에게는 뭐가 남는가. 이스라엘에게는 이게 남아요. ‘세상이 꼭! 멸망해야 될 이유’가 그다음부터는 관심사로 확 다가오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신약에서는 종말론적 안목이라 해요. 종말론적 안목. 세상은 왜 멸망하는가. 이걸 손쉽게 이야기하면 물귀신 작전. 너 죽고 나 죽자.
아까 세상의 주체란 무한한 현출이라 했죠. 현출이란 나타난다, 현상, 출발, 출현된다 그런 뜻이에요. 무한한 현상들의 계열이라 했죠. 인간들의 주체는요. 그 주체에 대해서 제가 노래 가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가사가 어디 나오는 가사인지 여러분 들어보면 알아요. 콜 오드 발레바브 페니마 (Kol ‘od balevav penimah), 히브리어인데 제목은